지난 3월 4일 가람님 진행으로 보령 힐링여행을 다녀왔는데, 보령의 절경들을 많이 찾았습니다. 다만 차량이동으로 천천히 둘러볼 시간은 많지 않았고, 마침 예전 여행후기가 있어 보완 겸 우리가 찾은 곳을 더 많이 들여다 보는 의미로 올립니다.
첫번째는 통영 만큼 아름다운 오천항, 그 옆의 '동백꽃 필 무렵' 촬영지였던 충청수영성, 그리고 조금만 걸어가면 닿는 바닷가에 면한 갈매못 성지입니다. 벌써 다시 가고 싶네요. 오천항이 보령시에 속한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서산군에 속한 지역으로 알고 있었는데... 보령이 엄청 큰 지역이더군요.
본 후기는 2014년 4월 18일, 세월호 참사 이틀 후 방문했습니다. 그때의 분위기를 그대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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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와 부활절을 앞둔 토요일 충남 보령 오천항 일대 걷기는 가뜩이나 흐린 날씨 속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전국민의 마음을 짓누른 진도 세월호 참사로 수많은 어린싹들이 피워보지도 못한채 어둠에 갖혀 있었기 때문이죠.
말은 안해도 마음은 통하는 법, 오고가는 안부도 반가움 보다는 눈인사로 대신합니다. 모처럼 버스걷기 많은 인원이 출발해도 가라앉은 분위기, 날씨조차 잔뜩 흐리더니 금방이라도 빗물을 떨어 뜨릴 것 같습니다.
이번 길은 보령 오천항 근처 빙도에서 오천항, 충청수영성, 해안경관전망대, 도미부인사당, 그리고 갈매못성지에서 끝나는 일정입니다. 개인적으로 오천항, 충청수영성, 갈매못성지 길은 1866년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사건인 병인박해가 일어난 곳이라 나름대로 성지순례길이고, 한국판 산티아고 길이라고 생각하며 기대가 컸습니다. 한편으로는 걷는 내내 진도참사를 생각합니다. 좋은 소식이 없는지 가끔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날 두가지를 생각하며 걸은 것 같습니다. 하나는 순교함으로써 영생을 얻은 것, 다른 하나는 칠흑같은 어둠속에서라도 한줄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것.
사실 저는 성지순례니 순교니 영생이니 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길을 걸으면서 생각이 든 것은, 막상 죽음 앞에 당당할 수 있었던 그 신앙과 신념의 소유자들 보다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 특히 가족의 입장이 어떠했는가? 혹은 죽음앞에서도 초연했던 그 사람들은 막상 죽음 앞에서 무엇을 생각했던가를 조금이라도 더듬고자 길을 나선 것입니다.
버스는 어느새 오천항 부근 빙도에 멈춥니다. 약간 쌀쌀한 날씨지만 신록이 반겨줍니다. 낮은 산을 넘어 땐섬을 지나 오천항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바로 옆 충청수영성 일대를 돌아봅니다. 아침에 우중충했던 날씨는 걷히고 조금씩 해가 나더니 날이 더워지기 시작합니다.
충청수영성은 충청지역 해군사령부라 할 수 있죠. 조선시대는 3개의 수영(해군사령부)이 있었습니다. 경상우수영, 전라좌수영, 그리고 충청수영이죠. 천수만 일대를 관장하는 충청수영은 그만큼 전략적 요충지인 것이죠. 원균 지휘하에 충청과 전라좌수영이 무너진 후 경상우수영은 나중에 삼도수군통제사영이 됩니다, 이를 줄여서 통영(지금의 통영시)이라 하는 것이죠.
충청수영은 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을 도와 혁혁한 공을 세우다 원균 휘하에서 옥쇄하다시피 무너지고 이후 재건되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역사에 잠깐 등장한 것은 대원군 시절, 병인박해시 천주교도 처형장의 역할이죠. 충청수영성을 보니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힘 한번 못쓰고 망국의 길로 들어선 역사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황성옛터 같이 유적만 남은 충청수영성. 망국의 흔적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충청수영성을 나와서는 근처 해안경관전망대로 갑니다. 이곳에 가면 오천항 일대 뿐 아니라 안면도 까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전망대를 지나서는 역시 신록을 지나 녹음이 우거진 산을 돌아 도미부인사당으로 갑니다.
막상 가보니 이름도 생소한 도미부인사우(祀宇), 사당아닌 제사집이란 작은 규모의 건물입니다. 대우를 하려면 이름이라도 사당이라고 해야지 ‘사우’가 뭔가요? 도미부인도 그럴듯한 한자가 아닌 한글로 ‘도미부인’이라고 했네요. 한글이 문제가 아닌 격식의 문제로 아주 어정쩡한 곳입니다.
도미부인 설화는 많이 알려졌죠. 아름다운 도미부인을 두고 백제 개루왕(혹은 개로왕)이 남편을 함정에 넣고 도미부인을 취할려고 했는데, 정절이 높은 부인이 남편과 함께 고구려땅으로 도망친다는 것이죠. 역사상 여자 이름으로 주인공이 된 드문 사례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참 어처구니 없습니다.
도미부인이 주인공이 된 것은 딱 하나, 정절을 지켰다는 것이죠. 완전 남성중심적 가치관의 반영이고, 도미부인을 통해 수많은 여성들에게 정절을 강요하는 것이죠. 그러고 보니 도미부인사우 뒤편 덩그라니 있는 건물의 이름도 정절사(貞節祀)입니다. 도미부인의 정절이 왜 누구에게 중요한 것인가요? 도미부인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이 아닌 남성의 입장에만 중요한 가치로 강요받는 것, 이것이 도미부인 설화가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죠. 여전한 Herstory 아닌 His story=History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도미부인의 정절을 강조하는, 강요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도미부인사당을 뒤로 하고 버스에 올라 드디어 마지막 여정인 갈매못성지로 향합니다.
갈매못성지는 전국 유일 바닷가에 면한 순교지입니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풍광입니다. 그래서인지 이곳 신부님들은 항상 나그네에게 “눈으로 보면 관광이요, 마음으로 보면 순례입니다”라며 종교적 부담을 덜어주면서도 미사 때마다 "여러분이 계신 곳을 성지로 만드십시요. 제가 성지 순례를 여러분 댁으로 가겠습니다"라는 말로 순례자들을 감동시키는 곳이기도 합니다.
순교성지 갈매못, 전국 유일 바닷가에 면한 곳입니다.
갈매못은 원래 갈마연(渴馬淵)으로 “목마른 말에게 물을 먹이는 연못”이란 뜻으로 "갈증을 채워주는 생명의 물이 있는 곳"이란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이 영적인 의미로 더 승화된 것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순교의 땅이기 때문이죠.
병인박해는 한국천주교사에서 많은 의미를 차지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가장 안좋은 시기에 가장 안좋은 일로 일어난 종교적 비극인 것이죠. 조선의 암울한 현실에 실망한 많은 지식인 하급양반, 민중은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며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집권세력인 대원군은 서양세력인 천주교를 이용하려다 여의치 않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천주교를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수 천명의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당하고 중요인물은 한양에서 250리나 떨어진 갈매못, 충청수영 백사장에서 참수를 당하고 머리는 효수당하는 순교를 맞죠.
저는 앞서도 말했지만 일어난 사건, 종교적 신앙과 신념으로 순교의 길을 택한 분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그들을 사랑한, 그들을 기억하는 가족이나 친지들의 비통한 심정에 더 마음이 끌립니다. 천주교 박해령으로 체포 구금 고문당해 만신창이 몸으로 250리 떨어진 보령 충청수영으로 끌려가는 길(우리가 걸었던 길), 그들과 함께 했던, 그러나 가까이 가보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나마 그들을 지켜보아야 했던 가족 친구들의 비통한 마음은 누가 알아줄까요?
진도참사가 떠오릅니다. 어린 영혼들이 어둠에 갖혀있고 생사조차 불문명한 이때 그 부모 형제들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질까요? 순교와 희생, 당사자 보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더 가혹하고 가슴아픈 일입니다.
갈매못성지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시 8분. 해는 중천에 떠있지만 진행자는 단호하게 딱 30분을 줍니다. 실제로는 20여 분 사방에서 탄식과 아쉬움이 나옵니다.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은 마음, 어찌 30분을 더 준다 해도 채울 수 있겠나요? 바쁜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이곳저곳 사진에 담기 바쁩니다. 사진에 욕심없어 보이시는 사람도 낙화를 붙잡고 사진찍기 좋은 곳으로 끌고(?) 갑니다. 그만큼 청아하고 단아한 곳. 저절로 힐링이 되고 마음이 평화로와 지는 곳입니다.
짧은 시간 성당을 담고 ‘십자가의 길’ 입구만 보고 바로 돌아섭니다. 돌아서는 길, 바닷가에 면한 성당을 보니 김광균의 <외인촌>이란 시가 떠오릅니다. 아마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종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이 있었나 봅니다.
외인촌(外人村) - 김광균
(중략)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 묘지(外人墓地)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단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村落)의 시계(時計)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褪色)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噴水)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순교자 기념비
저는 이미지만 치중하고 기교적인 김광균의 시를 좋아하진 않는데, 성당이란 공간이 김광균의 시를 떠올리게 했나 봅니다. <외인촌> 보다는 동양적인 사찰에서의 성찰을 느끼게 하는 조지훈의 <고사(古寺)>가 떠오릅니다.
고사(古寺) - 조지훈
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西域 萬里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사실 갈매못성지에 가면 서해 낙조를 보고 싶었습니다. 해질 무렵 서해 노을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좀 추스르고 싶었던 것인데 아쉽게도 시간에 쫒겨 버스에 올라타야만 했습니다.
부활절 전야, 갈매못성지를 찾아간 여정은 참으로 의의가 컸다고 봅니다. 좋은 시기, 좋은 곳을 찾아갔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여정을 보니 보령 오천항, 충청수영성, 도미부인사당, 갈매못성지. 도저히 하루만에 다 가볼 곳은 아닙니다. 중요한 곳만 해도 3군데나 되는 곳, 많은 분들이 움직였는데 진행자가 웃는 얼굴로 참 진행을 잘하셔서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왔습니다. 그래서 후기가 많이 길어지게 됐습니다.
부활절입니다. 돌아오는 길, 이 글을 쓰면서도 한가닥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자들의 몫은 그들을 오래오래 기억하는 것, 부활의 의미를 다시 새깁니다.
다음 좋은 길에서 뵙겠습니다.
낙화는 유수처럼
오천항 부근의 이름모를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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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을 걸어갑니다.
서해안이라 특이한 지명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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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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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방조제로 어업기지 역할이 줄어들자 낚시배들이 많이 보이네요. 오천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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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오천항입니다. 보령방조제(2000년 준공) 전에는 키조개잡이로 유명, 오후 5시면 조개배들로 파시가 이뤄지곤 했던 항구입니다.
진휼청입니다. 진휼은 사람들을 구제해주고 도와준다는 일종의 복지기관인데 충청수영성에 왜 있는지 궁금합니다.
진휼청에서 바라본 오천항, 무척이나 평화롭습니다.
어느 분은 동백이 너무 크고 붉어서 부담된다고 하셧는데, 아마 순교자의 붉은 피가 환생한 것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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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운 풍경, 소나무 사이로 보령방조제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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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바라본 보령방조제입니다. 미니 새만금처럼 보입니다. 방조제 공사로 조류가 바뀌고 조개들은 길을 잃었습니다. 인간의 편리함과 욕심으로 자연환경이 망가진 곳이죠.
도미부인 정절사 표지. 겉으로는 좋은 내용인데 속을 보면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것이죠.
도미부인사우(祀宇) 보고 한참 웃었습니다. 사당도 아닌 제사집이란 사우. 인심을 쓸려면 제대로나 쓸 일이지 쫀쫀하게 사우가 먼가요?
계단만 높은 도미부인사우. 지하에 계신 도미부인이 흐뭇해 할까요? 아니면 화를 낼까요?
내 몸을 갖고 니들이 왜 장난치냐고 화를 내실 것 같은데....
드디어 갈매못성지입니다. 시간은 오후 4시 8분. 30분 밖에 시간이 없어서 너무 아쉬웠습니다.
리우데자네이로 해안가 세계최대 예수상 보다 더 멋집니다.
숙연해집니다.
순교복자비입니다.
기념관입니다. 들어가 보지도 못했습니다.
다블뤼 안토리오 주교, 일명 안 신부님 조각상입니다.
황석두 루가 회장님 조각상입니다.
바닷가 모래사장은 충청수영성 군사들이 조련을 받은 곳...
왼쪽 조각상들은 내려오면서 보게 합니다.
십자가가 인상적입니다.
저절로 명상 힐링이 되는 곳.
본당 내부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 뒤로는 서해바다입니다. 부활절 전야라 준비에 무척 바쁜 모습입니다.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우리를 용서하소서... 이 말 밖에는...
2014년 4월 18일... 변함없는 소월님
안나님 리즈시절
2014년 4월에는 무거운 카메라 들고 날라다니시던 니키타님 (충청수영성에서)
* 보령 힐링여행 추가2편은 원산도 옆 보물이 세개나 있다는 삽시도입니다.
첫댓글 소월님.안나님.니키타님.
세월도 비켜가시는군요~^^
눈으로 보면 관광,
마음으로 보면 순례...
이 말이 와락 와 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