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그 영원한 상징성
정 인
어린시절, 엄마따라 외할머니댁엘 가면 외할머니는 항상“아이구, 내 강아지
왔능가?”하시며 내 볼을 얼굴에 비비시곤 하셨다. 그리곤 연이어서 머리를
쓰다듬곤 했는데 그때의 할머니 손은 참 따스했지만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색 옥반지가 내 눈앞에서 어른거릴 때 나는 그 걸 참으로 신기하게
올려다보곤 했다.
엄마의 모성애가 할머니에게 전이되어 그게 마치 영롱한 실루엣으로 변하여
반지로 투영되어 나온 것 같은 -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시절,길가에서 우연히 외할머니를 연상하며 옥반지를 사서
끼고 다닌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돈 몇푼에 지나지 않는 짝퉁이였지만
철모르는 스무살에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그 반지를 끼고 20대를 방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흔히 반지는 결합이나 영원을 상징한다고 한다. 영원하다는 것은, 자신의
소망이 반지의 둥그런 형상처럼 돌고돌아 언젠가는 그 바래던 바가 이루어진다는
희망이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반지는 어느 손가락에 끼는 게 현명할까? 대개 엄지는 자유를 상징하고
집게(두째)는 방향을 지시하며 중지(가운데)는 영감력을 상징하며,약지(네째)는
창조력을 뜻하고 새끼(다섯째)는 새로운 기회를 뜻한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지나
약지,새끼, 이렇게 세 손가락중에 골라서 반지를 끼는 데, 중지는 보석반지를 주로
끼며 약지는 약혼.결혼반지,새끼는 보석이나 다양한 형태의 반지를 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왼손 약지(네째)손가락에 가장 반지를 많이 끼는 데,이는
약지가 심장과 가장 가까이 있어 심장에 가장 정신적인 전파를 많이 보낸다는
의미와 인간의 모든 창조력을 지니고 있어 결혼.약혼 등에 상징성을 부여한
바가 커서이다.
또한 오른손은 권력,왼손은 복종을 의미하기도 하는 데 사랑하는 사람끼리
혼인하면 서로 복종한다는 의미에서 왼손약지에 결혼반지를 끼기도 한다.
반지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데,석기시대 유적지인
패총(조개무덤)에서 반지를 뜻하는 가운데 구멍을 뚫은 조개껍질이
발견되기도 한 걸 보면,그 연대는 쾌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의 화랑들도 맹세의 표시로 반지를 끼였으며 로마시절에는 공을 세운
신하에게 훈장 대신 반지를 수여하기도 했다.그 시절에는 약혼의 정표로
철반지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노예들에게도 자신이 주인임을 뜻하는 반지를
차게하기도 했다.
반지의 용도는 매우 다양하게 변천했는 데,결혼한 여자들이 집 열쇠를 반지
속에 넣고다니는 열쇠반지가 유행하기도 했고,독일의 기사들은 인장이
새겨진 반지를 끼고 있다가 여행길에 숙박비 대신 인장을 찍어주고 여관주인은
그걸 모아 두었다가 나중에 숙박비를 청구하기도 했다.
지금도 이태리에서는 바퀴모양 반지가 자주 출토되는 데 이는 호신용으로
사용되었으며 독일농민전쟁 때 기사 괴츠는 ‘철의 손톱’이라는 별명이
어울릴 정도로 호신용 반지를 끼고 다녔다.
16세기에는 여성들이 구리와 놋쇠로 만든 골무를 끼었는 데 이를 가정재봉용이나
바느질용으로 사용했다.
어떤 의미에서 골무도 작업능률을 올리기 위해 끼였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반지용,유럽에서는 캡형으로 발달하다가 차츰 반지로 변형이 되었다.
반지중에는 초상을 넣은 것도 있었는 데 프랑스의 계몽가 볼테르의 연인
샤틀레공작부인이 죽었을 때, 그녀의 반지속에서는 새 애인의 초상이
나왔다고도 한다.
좀 특이한 반지중에는 독이 든 반지도 있어서 전쟁 중 적에게 패하면
장군들이 열어서 자살용으로 마시는 독반지도 있었다.카르타고의 명장
영웅 한니발은 이 독반지를 마시고 최후를 맞이하기도 했다
때로는 반지가 영혼의 활동을 방해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는 데,
메카를 순례하는 회교도들은 반지를 끼지 않는다.지중해 일부 섬사람들은
사람이 죽기전에 반드시 반지를 손가락에서 뺏는 데, 반지 때문에 죽은이의
영혼이 저승으로 가지 못할까하는 우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보석류의 반지가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5~16세기부터이다.
이 시절부터 남녀간에 반지가 유행했는데 장식용으로 대개 여성들이
많이 착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반지의 제왕하면 역시 다이아몬드가 아닌가 싶다.
모든 여성들의 소망인 다이아반지는 불에 견디고 쇠보다 강해서 왕이
끼면 누구도 왕을 정복 못한다는 상징성이 깃들어져서 15세기 왕이
결혼할 때는 반드시 다이아몬드반지가 등장했는데, 다이아몬드의 무적의
힘과 둥근 링이 결합하여 결혼=영원이라는 하나의 완전한 상징성으로 통했다.
17세기 들어 왼손 약지에 결혼반지를 끼는 풍습이 전해진 후 다이아몬드의
화려함과 금의 광채, 진한 흑색에나멜이 조화를 이룬 화려한 반지가 등장
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이르러 다이아몬드 커팅기술이 발달하여 유럽사교계 여성들은
셋팅된 다이아몬드를 끼고 싶어 안달이 났으며, 다이아에 은을 셋팅한 후
더욱 밝은 색깔이 투영되도록 하는 기술이 발전했다.
19세기 들어 다이아몬드광산이 많이 발견되고 다이야 수요가 늘자 외알보다
여러 개 셋팅 다이아반지가 유행하고 그 시대 신부들은 다이야 약혼반지와
금으로 된 결혼반지, 두개를 선물로 받기도 했다.
20세기들어 현대적인 재료가 늘어나자 다이아몬드 외에 에메랄드, 수정,
진주,루비,사파이어 등 반지는 다양한 형태의 옷을 입고 변형이 되었다.
반지로 인하여 벌어지는 역사나 에피소드는 주변에 참으로 많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쿨-한 여자영웅 기생 논개가 임진왜란 중 진주 촉석루에서
일본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할 때 끼였던 반지만큼 가장 의미깊은
용도로 쓰인 반지가 또 있을까?
일본놈 한놈을 죽이고자 하는 굳은 의지속에 왜장을 껴안는 팔이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손가락의 반지를 더욱 단단히 옥죄고 뛰어든 논개야말로,
우리 역사의 가장드라마틱한 영웅중의 하나다.
사실인지 아닌지 믿거나 말거나지만, 반지의 용도는 이렇게 참됨을 위해
사용될 때가 가장 위대하다. 구국(救國)을 위해서 논개의 반지는 그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모조반지라도 재현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요즘 남자들이 여자 꼬시기 위해 사용되는 전리품으로서의 구실보다 논개의
반지는 지금에 와서도 훨씬 백배.천배 구국의 귀감으로 전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난 해 핀란드에서 스웨덴으로 가는 유람선의 면세점에서 우연히 백금반지를
산 후, 나는 요즘 차츰 반지메니아가 되어가고 있다.
광주에는 충장로5가 예물의 거리쪽이나 충장로 뒤쪽 구 황금동 콜박스 지나는
길,상무지구 못가서 귀금속백화점, 그리고 시내의 각 백화점마다 반지는 쌓여
있다.그리고 웬만한 동네마다 한두개쯤의 귀금속.보석취급 점포가 있는 데
쇼윈도우안에서 지금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반지는 많다.
나는 주로 18K금이나 은반지를 구입하는 데,18K 금반지는 반짝거림이 좋으나
변색이 잘된다.14K 금반지는 덜 반짝거리지만 대신 변색되지 않는다.
백금은 살 때 비싸고 팔 때 싸서 효용성이 덜 하지만,백금은 진주.다이야 등 제
짝을 만났을 때, 가장 화려한 제 모습을 찾기 시작한다.
오늘도 나는 아침 출근길에 보석함을 열어 스무개가 넘는 반지를 보며
오늘은 어떤 걸 끼고 갈까? 고민한다.
이럴 때 나는 참으로 한심하고도 또한 행복한 사내이기도 하다.
지금도 반지의 이미지에 대해 반지가 갖는 정표보다, 옷 패션에 맞춰
이것저것 끼워보는 악세사리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지만, 수많은 역사속에
전해져 내려오는 반지의 내력을 생각하다보면 어떤 날은 전설적인 ‘니벨룸겐의
반지’속 주인공이 되고 싶기도 하고, 언젠가 뉴욕 맨하탄 5번가 티파니 보석가게
앞에서 서성거렸던 내 사치성은, 영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에서 오드리햅번이
지방시 디자인의 리틀블랙드레스를 입고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설레임으로 반지를 끼고 출근길에 오른다.
보석함 속 반지를 고르다보면 다이아는 하나도 없고 모두 싸구려 반지지만,
바깥 세상사람들이 내 손가락에 머무는 시선만큼 난 늘 새로운 변화를 주며
살고 싶다. 철이 들어가면서도, 이렇게 철들지 않는 반지메니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