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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철영평론가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영
1948년 10월 19일 여수여, 순천이여!
_오미옥, 정선호, 김지란, 김경윤, 김미승, 박관서, 조미희 , 이민숙, 강덕환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망망한 바다 그 안에 수천 개의 섬이 돛배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는 곳, 금방이라도 바다로 뛰어들면 푸른 파도처럼 출렁이는 겨울 끝자락을 물고 저 홀로 붉게 물들어 동백꽃 피는 오동도에 닿을 것 같다. 들떠서 좋은 마음으로 동백꽃을 구경하러 왔다 바다를 낀 풍광이 좋아 보인 해안선 따라 돌다 간간이 표지판 알림 글로 새긴 ‘여순사건’이란 말, 그러려니 하고 가다 보면 군데군데 희생자들이 묻히거나 살해당한 곳이라는 섬뜩한 안내 글과 만난다. 1948년 10월 19일에 발발한 ‘여순사건’의 역사 속에 묻힌 참담한 진실을 알고 나면 아름답기만 한 여수가 아니었다. 진실이 조금씩 드러날 때마다 설마설마하였지만, 거짓으로 덮여 숨겨진 채 가망 없는 세월은 너무나 멀리 흘러가 버렸다. 까닭 없이 죽어간 사람의 사무친 원한은 깊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나몰라라 하는 무정한 세월이여! 해방을 맞았지만, 다들 권력에 도취되어 까막눈 민중들 눈 가려 놓고 곶감 빼먹느라 정신 못 차리던 위정자들이 주체가 되어 자유당 정권이 단독으로 세운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의 삼천리 금수강산 팔도가 거덜 나기 직전 가뭄과 기근에 배고픈 민중들 우선 먹어야 살지, 거기에 해방되어 일제 강압 통치 끝장냈다고 좋아들 했지만, 나라 두 동강으로 잘려 남과 북이 나뉘고 한쪽은 소련이 한쪽은 미군이 들어와 국제적인 투기판이 되어버렸네. 나라 굴러가는 꼴 제대로인 것이 없어서인가, 제주도가 단독정부 반대를 외치며 좌우 대립이 극심하더니 기어이 1948년 4·3 사건이 발발하고 수세에 몰려 위급해진 제주 경찰, 육지에서 응원 경찰 투입해도 거세진 저항에 견딜 수 없고 악화일로 미군정 묵인하에 국방경비대 병력까지 긴급 투입한다. 제주도민의 저항은 더 거세지고 결국 육지에서 응원군이 들어가야하는 상황이 발생된다. 그중 선발 예정된 토벌군 병력이 여수 신월리에 주둔 중인 14 연대 소속이다. 제주도 토벌 파견 반대를 외치던 군내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반란군은 순식간에 여수와 순천을 점거해버린다. 이후 정부군은 토벌 작전을 전개하여 여수와 순천을 다시 탈환한다. 이후 잔류한 반란군과 협조한 부역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선량한 민중들이 좌익으로 몰려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다. 그 희생자가 상당수에 달하고 당시 집계가 정확히 이뤄지지 않았지만, 2,000~5,000 정도에 이른다. 늦게나마 ‘여순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한 노력이 지역적으로 진전되다 2020년에 ‘여순사건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국민적 관심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적 관심이 전부만은 아니다. 진실로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가슴에 맺힌 원한을 보듬어주는 것이다. 해마다 붉은 동백은 변함없이 피고 지지만, 통한의 세월은 아무런 말이 없다. 여기에 수록한 시는 실재한 사실을 통해 시적으로 발현된 것이고, ‘여순 10.19 항쟁’ 74주년 추념 창작집 《해원의 노래》에 수록된 시 일부를 참조한 것임을 밝힌다. 여》》》순10·19항쟁 74주년
남편 잃고
아들 잃고
퇴적층처럼 쌓인 한, 가슴에 묻고
추운 겨울밤에도
저고리를 벗은 채 창문을 열어놓고 주무시던 어머니
시시때때로 경찰서에 불려가 생동백나무 몽둥이로 맞고 돌아
온 날이면
밤새 끙끙 앓는 소리가 내 잠을 깨우고
어머니 온몸에서는 붉은 동백이 피었다
꽃이 지면 다시, 또다시 어머니를 불러 동백꽃을 피우던 그 사
람들
어머니는 한 많은 동백꽃이었다
동백을 그렇게도 꽃피우던 어머니는
끝내 웃음 한번 웃어보지 못하고 쓸쓸하던 눈 감으셨다
내 나이 네 살 때, 아버지가 총살당했다는데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기억할 수 없는데
빨갱이 딸이라고 도장을 찍어
파출소에서는 수시로 불러 감시하고 따라 다녔다
나 죽기 전에 억울한 누명이라도 벗겨줄 수 있다면
울 아버지 이름에 찍힌 붉은 도장 깨끗하게 지워줄 수 있다면
해마다 동백꽃 피는 계절이 와도
나 서럽지 않으리
온몸에 동백꽃만 피우며 살다 간 어머니, 그 동백꽃을 눈물로
바라보지 않으리.
-<동백꽃 피는 어머니> 전문/ 오미옥
이 정도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트라우마를 입게 된다. “남편 잃고/ 아들 잃고” 홀로 남겨진 어머니에 딸린 네 살배기 딸은 이유도 모른 채 손가락질 당하며 험한 세상을 살아왔다. 당시 아버지가 좌익으로 몰려 죽었다면 그 집안은 죄인 취급을 받던 연좌제가 국가적으로 적용되던 사회였다. 실제로 아버지가 좌익에 물들어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누명에 의한 것이라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남편 잃고/ 아들 잃고/ 퇴적층처럼 쌓인 한, 가슴에 묻고/ 추운 겨울밤에도/ 저고리를 벗은 채 창문을 열어놓고 주무시던 어머니”였다. 하늘같이 믿고 살아온 남편과 자식을 하루아침에 잃은 것도 원통한 데 “시시때때로 경찰서에 불려가 생동백나무 몽둥이로 맞고 돌아/ 온 날이면/ 밤새 끙끙 앓는 소리가 내 잠을 깨우고/ 어머니 온몸에서는 붉은 동백이 피었다”는 한 많은 시절을 증언하고 있다. 거기다 네 살 때 아버지가 총살당했는데 어린아이가 아버지 행동거지를 어찌 기억하겠는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빨갱이 딸이라며 파출소에 수시로 불려 가 아는 것을 대라며 윽박 당한 일들을 겪으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하도 억울한 어머니의 소원은 제발 ‘내 지아비가, 내 자식 놈이 빨갱이가 아니란 것을’ 국가가 나서서 풀어달라는 것 뿐이다. 죽은 어머니 대신 딸이 외치고 있는 말도 ‘우리 아버지와 오빠가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말’ 한마디만 해달라는 것이다. 하늘도 한번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세월을 살아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살아온 유가족의 한많은 세월은 “울 아버지 이름에 찍힌 붉은 도장 깨끗하게 지워줄 수 있다면/ 해마다 동백꽃 피는 계절이 와도/ 나 서럽지 않으리”라며 구구절절 이어진다.
마래터널 입구에 여순사건 희생자들의
합동묘지가 있고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자들이 만든 터널 안 걸으며
한국전쟁 전, 후로 희생된 730여 건의
양민학살사건과 수십만 희생자들을 되새겼다
이승만 정부는 이념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무작정 죽였다
친일분자들을 제대로 청산하지도 않았으며
정부, 군인과 경찰의 요직에 등용했다
그들은 정부의 지시에 충실하게 양민들 죽였다
살아남은 유족들은 혹독한 군사정부에서
희생자들의 추모를 못하고 숨죽이며 살았다
연좌제로 관청에 등용되지 못했으며
통한과 질곡의 세월을 살았다
1987년 민주화가 되고 나서야 사건들 밝혀져
조금은 명예회복이 되고 배상도 있으나
아직 명예회복도 되지 않는 사건들 많다,
아직도 그들 희생을 인정하지 않는 이 있다
터널 안 걸으며 다시는 이 땅에서
이념으로 사람들 죽이거나 가두지 않으려면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해야 함을 가슴에 새겼다
어둡고 기나긴 터널을 지나 바다에 이르러
정의와 평화의 노래를 크게 불렀다
* 전남 여수시의 마래산을 통과하는 터널.
-<마래터널*에 마음을 새기다> 전문/ 정선호
여수 시내가 반란군에 의해 1948년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점령 당한 상태에 놓이고 만다. 이런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각 지역에서 증원된 4,000여명의 병력으로 여수와 순천을 에워싼 반란군 토벌 진압 작전을 펼친다. 수적으로 우세한 정부군에 의해 27일에는 여수와 순천 전 지역이 탈환된다. 이후 여수 지역 및 순천에서는 잔류 반란군과 반란군에 협조한 부역자 색출이 전면적으로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좌익이나 부역자로 몰려 죽음을 당하는 데 학교 운동장이나 해안가의 절벽 등 으슥한 골짜기에서 진행되었고 그런 곳 중 하나가 마래터널이다. 마래터널은 외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은밀한 곳이어서 시신을 유기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본 것이다. 이렇게 국가의 권력을 동원해 자행된 만행을 수십 년 동안 유기하면서 세상의 눈을 속여온 것이다. 정선호 시인도 여순 희생자 묘역이 있는 마래터널 안을 다녀온 뒤 보고 느낀 감상적 소회를 적고 있다. ‘여순사건’을 진압하면서 이승만 정권 보호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한국전쟁 전, 후로 희생된 730여 건의/ 양민학살사건과 수십만 희생자들을 되새겼다/ 이승만 정부는 이념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무작정 죽였다/ 친일분자들을 제대로 청산하지도 않았으며/ 정부, 군인과 경찰의 요직에 등용”한 원죄를 피해 가기 위해 악용한 것이다. 그들은 희생된 민중을 무조건 좌익인 빨갱이로 규정해버리면 그만인 반공 이데올로기를 최대한 활용한다.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무고한 시민과 유가족들은 지난 세월 동안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꽁꽁 숨어 살아야 했다. 마래터널은 아직도 역사의 시간을 간직한 채 침묵만 감돌고 있다. 사람은 달라도 진실을 보는 눈과 마음은 다르지 않다.
마래터널 지나 만성리 가는 길
여수의 아픈 역사를 알려주는
해설사의 발걸음을 따라가는데
통곡하듯 쏟아져 내리는 햇빛과
비릿한 바람이 심장을 파고든다
무수히 지나쳤던
바다가 보이는 마래터널 도로변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비석 뒷면에 새겨진
말줄임표 여섯 개의 묵음
여수 종산국민학교로 다 모이라는
군홧발에 못 이겨 끌려 나왔다가
머리 짧다고 미군 팬티 입었다고 죽이고
하다 안되니 손가락 총으로 찍은 뒤
부역자로 몰린 절망을 굴비처럼 엮어
끌려가 죽어가면서 서로를 위로한 그들
강요당한 침묵과 감춰온 말들을 새긴
아픈 통증의 세월을 말할 수 없다
해빙까지의 당도해야할 긴 시간들
세상에 흘러넘치는 말들 속에서
이제야 통한 속 진실들을 듣는다
역사의 질곡을 맴돌던 영혼들이
시월 푸른 바다를 품은 여수 동백이
유난히 붉어 슬픈 절정이다
-<백비> 전문/ 김지란
억울하게 죽은 영령들의 한 맺힌 절규가 여수 푸른 바다의 파도가 들이칠 때마다 통곡처럼 들리는 곳이 절경 좋은 마래산 해안가다. 사람들이 마래터널 안을 지나다닐 때마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희생된 영혼들이 놀라 깨길 반복한다. 마래터널은 몇 년 전까지 도로로 활용되다 제2 마래터널이 개통되면서 관광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마래터널과 멀지 않은 만성리를 찾아와 레일 바이크를 타며 여가를 만끽하면서 사람들은 관광 명소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입구 안내표지판에는 여순 희생자들의 묘역과 거기에 묻힌 원혼들의 시간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김지란 시인은 터널 안 ‘형제묘’에 세워진 ‘백비’를 통해 ‘여순’ 희생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과 역사의 오욕이 남긴 묘역을 본 것이다. ‘형제묘’는 마래터널 안 ‘용골’ 근처에 있다. 묘에 묻힌 원혼들은 ‘여순 사건’ 때 “여수 종산국민학교로 다 모이라는/ 군홧발에 못 이겨 끌려 나왔다가/ 머리 짧다고 미군 팬티 입었다고 죽이고/ 하다 안되니 손가락 총으로 낙인 찍은 뒤/ 부역자로 몰린 절망을 굴비처럼 엮어/ 끌려가 죽어가면서 서로를 위로한 그들” 저항 한번 못하고 끌려간 것이 죄라면 죄였다. 그들을 실은 트럭에는 장작더미와 밑불에 부을 기름통까지 실었지만, 영문도 몰랐을 그들이다. 죽창에 찔리고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서로를 위로하며 껴안고 죽어간 사람들이다. 원통하게 죽은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훗날 시신을 수습해 묘역을 만들었고 한날 죽은 사람들이라 해서 ‘형제묘’라 했다. 그 묘역에 세워진 “비석 뒷면에 새겨진/ 말줄임표 여섯 개의 묵음”을 보며 ‘백비’의 유래가 된다. 하도 원통하고 억울해서 말문이 막힌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리라. 시인은 “마래터널 지나 만성리 가는 길/ 여수의 아픈 역사를 알려주는/ 해설사의 발걸음을 따라가는데/ 통곡하듯 쏟아져 내리는 햇빛과/ 비릿한 바람이 심장을 파고든다”는 심정적 슬픔을 전언하고 있다. 여수 동백은 슬픔마저 깊어서인지 진혼鎭魂을 거부하며 붉은 각혈을 쏟아낸다.
인적 없는 외딴섬은 무덤이었다
한 평도 못된 구덩이 속에서 수십 명의 유골이 쏟아지던 날
땅속에 묻힌 흰 고무신처럼 썩지 않는 슬픔이
지아비를 잃고 예순 해를 청상으로 살아온 노파의 가슴에
붉은 동백 꽃잎으로 흐득흐득 피어나고
푸른 하늘을 맴돌던 갈매기들도 상여소리로 울었다
“어찌게 그 징한 세월을 말로 다 하것소.
아무리 말해도 지비들은 모를 것이요”
어떤 세월도 진실을 매장하지는 못했다
굴비 두름처럼 손목이 묶인 채 학살된 떼주검들이
밤마다 도깨비불로 떠돌다 유족의 품으로 돌아오던 날
애비를 잃고 한평생 재갈 물린 세월을 살아온 아들의 가슴에는
아직도 파들파들 떨고 있는 파도소리 들리고
까마귀쪽나무 그늘에서 휘파람새가 씻김굿 가락으로 울었다
“말도 못하는 시상을 살고 나왔지 싶소.
고것은 전쟁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재앙이었어라.”
* 갈매기섬 : 전라남도 해남과 진도 사이에 있는 섬, 이 섬에서 1950년 7월 중순
경에 경찰들이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을 집단 학살했다.
-<갈매기섬> 전문 / 김경윤
김경윤 시인의 시 전체적인 내용은 ‘갈매기’ 섬에 유기된 ‘보도연맹’ 학살자의 시신 발굴을 통해 드러난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한 평도 못된 구덩이 속에서 수십 명의 유골이 쏟아지던 날/ 땅속에 묻힌 흰 고무신처럼 썩지 않는 슬픔”은 “지아비를 잃고 예순 해를 청상으로 살아온 노파의 가슴” 속 참았던 통곡이다. 가슴 깊이 숨겨온 자조 섞인 넋두리를 쏟아내면서 “어찌게 그 징한 세월을 말로 다 하것소./ 아무리 말해도 지비들은 모를 것이요”라며 한 많은 고통을 증언한다. 긴 세월 동안 지아비를 잃고도 어디 대놓고 억울하고 원통 하단 말 한마디 할 수 없던 몹쓸 세상이었다. 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인데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응당 행사해야 할 권리를 박탈당했고, 보호받아야 할 대상에서 배제되거나 차별은 일상이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들어선 대한민국, 이승만 자유당 정권하에서 정권 유지를 위해 혈안이 된 그들이다. 남한 단독정부의 존립을 위해 친일파의 중용도 마다치 않았고 권력 외에 뵈는 것이 없었으니 순박한 민중들을 향한 만행이 불법적으로 자행된다. ‘제주 4.3’과 ‘여순사건’을 통해 무언가 빌미를 만들어야 할 시기에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보도연맹’이라는 임의 단체에 가입시킨 뒤 사상 검열과 전향을 종용한 뒤 반공 단체로 활용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상황은 급 반전된다. 인민군 가담이나 기타 부역 행위를 우려해 조직적으로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도록 한 것이다. 국가에서 지역 단위로 할당해 좋은 것이 좋은 거라고 사탕발림에 가입하라고 해서 이름 올린 것이 전부인 ‘보도연맹’ 사건은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국가 폭력으로 자행된 인권유린의 전형이다. 위 사례는 해남과 진도 근해의 ‘갈매기섬’에 유기된 시신을 발굴하면서 그 진상이 밝혀진다. 또한 발굴된 ‘흰 고무신’을 통해 희생자의 연고 확인이 가능했음을 말해준다.
포슬한 흙가슴 풀어헤치고
봄 햇살에 수줍은 듯 얼굴 붉히는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난 얼레지,
지리산 깊은 산골
열여섯 콩각시*, 열일곱 키다리 신랑
알콩달콩 신접살림 너무 뜨거웠나
화인처럼 새겨진 사랑
빨갱이가 뭔지 파랭이가 뭔지
수상한 바람 불어와
지리산 팔뚝에 채워놓은 불온한 완장 하나
사랑의 불쏘시개 되어
입산한 열일곱 키다리 신랑 찾아
지리산 아흔아홉 골짜기를 메아리로 떠돌던
그녀, ‘망실공비’
그예 서러운 이름 하나 얻었다
열 세 해 동안,
그녀가 찾아 헤맨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리혈 쏟은 붉디붉은 철쭉은 아니고
돌 틈에 찢겨 너덜너덜 해진
타다 만 그리움 한 조각
다음 생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리산 싸리봉 아래 바람난 처녀 꽃,
얼레지나 되어!
* 정순덕 : 1950~1963년까지 13년 동안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생포되었던 여자. 신혼시절 입산한 남편을 찾아 산으로 들어갔다.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 ‘망실공비’로 알려져 있다.
-<지리산 얼레지> 전문/ 김미승
경남 산청 지리산 산자락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눈 속으로 쏙 들어온 청년 성석근을 사랑했던 게 전부인 “열여섯 콩각시*, 열일곱 키다리 신랑/ 알콩달콩 신접살림 너무 뜨거웠나/ 화인처럼 새겨진 사랑”이 전부인 최후의 파르티잔(빨치산) 정순덕의 일대기적인 생애를 제재題材로 한 시다. 둘의 사랑은 깊어져 이내 결혼을 하였고, 얼마 뒤 6.25가 터져 북한군이 산청까지 내려오면서 살기 위해 남편 성석근은 부역에 협조한다. 이후 국군의 진압이 시작되자 부역한 것에 대한 처벌이 두려워 지리산에 거점을 둔 인민 유격대에 자원하고 만다. 정순덕은 애타도록 사랑한 부군을 찾아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다행히 그들은 만나 얼마간의 해후를 맞았지만, 전투 중 남편 ‘성석근’은 전사하고 만다. 이후 하산을 하지 않고 유격대에 잔류 빨치산 활동을 수행하다 지리산 내원골에서 생포된다. 사랑을 쫓아 들어간 정순덕은 “빨갱이가 뭔지 파랭이가 뭔지”도 모른 순박한 여인이었건만 시대가 사람을 변하게 했다. 지리산에서 13년 동안 빨치산으로 활동하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못해 막연하게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한 토벌 대상에 ‘망실공비’로 이름을 올렸다는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의 파란 많은 일생이다. 화자는 정순덕의 삶이 의미하는 바를 묻고 있다. “열 세 해 동안,/ 그녀가 찾아 헤맨 것은 무엇이었을까”라고. 못다 이룬 안타까운 사랑을 연민하면서 다음 생에 혹시 태어나거든 “생리혈 쏟은 붉디붉은 철쭉은 아니고/ 돌 틈에 찢겨 너덜너덜 해진/ 타다 만 그리움 한 조각/ 다음 생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리산 싸리봉 아래 바람난 처녀 꽃,/ 얼레지나 되어!”라며 확신할 수 없는 주문을 던지고 있다. 시대가 금지한 사상이 사람을 변하게 했고 이데올로기라는 이분법은 무참하게 사람을 내치면서 참혹한 삶을 마감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불순한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불온이다. 불온한 것들을 내치는 놀이패의 장단에 맞춘 발림과 추임새 한번 걸판지다.
아야, 거만치 허천나게 처묵어 부렀으먼
인자 기냥 가부러라잉
머시 더 챙길 거시 있다고
고렇게 점점이 퍼질러 있다냐아
염병헐, 바다에 빠져분 사람들만 징허제
시퍼렇게 멍든 하늘만 미쳐분당게 잉
지집배 치마 땅꼬옷으로 갈아입고
돼놈들 왜놈들 양놈들의 대굴박 앞에
몸땡이를 조아려 얻은 쪽심으로
백년천년 제 배때기를 불려 왔겄지만
웃기지 말그라 여그는 시뻘건 화산재 뿌릴 때부터
문저리 망둥이 조구새끼 짱짱히 말려서
다시래기와 간장으로 조려먹고 살아 왔응게
징헌 파도와 햇살과 바람의 족보로
뼈와 뼈를 이어가며 살아왔응께 너그 같은
잡것들은 빨리 꺼져부러라 잉
* 다순구미 : 전남 목포의 남쪽 끝 어촌마을.
-<다순구미> 전문/ 박관서
‘다순구미’의 ‘~구미’는 바다에 인접한 해안 돌출부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 의미를 확인시켜주듯 박관서 시인은 ‘다순구미’를 “전남 목포의 남쪽 끝 어촌마을”로 주석을 달아놓았다. 어촌마을 앞은 바다가 있고 뒤로는 내륙과 인접한 지정학적 접근성을 지닌다. 서남 해안과 내륙을 끼면서 목포를 기점으로 이어진 국도를 따라 영산강과 승달산을 넘나들며 떠도는 각설이 품바의 걸판진 놀이패가 해살궂은 얼굴을 내밀며 들쳐오는 우렁우렁한 소리 좀 들어보자 “아야, 거만치 허천나게 처묵어 부렀으먼/ 인자 기냥 가부러라잉// 머시 더 챙길 거시 있다고/ 고렇게 점점이 퍼질러 있다냐아// 염병헐, 바다에 빠져분 사람들만 징허제/ 시퍼렇게 멍든 하늘만 미쳐분당게 잉”라며 세상을 향해 소리꾼은 일갈한다. 소리를 거슬러 가보자. 갑오경장 이후 동학 농민 봉기가 일어난 어수선한 틈을 빌미로 일본과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저들 맘대로 밀치고 들어와 주둔하게 된다. 마침 아산만에 청의 북양 함대 일부가 정박해 있었는 데 느슨해진 틈을 타 일본군이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였고 청나라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당시 ‘왜놈’과 ‘돼놈’이 바다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많은 병력이 서해 바다에 수장된 것을 상기해준다. 이후 일본은 조선의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추가 개항을 강력히 요구한다. ‘다순구미’는 물류의 집산이 상당한 어촌인 데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목포 개항 요구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거기에 원활한 물동량의 수송에 맞춰 목포는 국도 1, 2호선이 시작되는 기점이 된다. 따라서 ‘다순구미’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삼천리 금수강산으로 치환된다. 목포의 변화는 시대를 대변한다. 이어 “지집배 치마 땅꼬옷으로 갈아입고/ 돼놈들 왜놈들 양놈들의 대굴박 앞에/ 몸땡이를 조아려 얻은 쪽심으로/ 백년천년 제 배때기를 불려 왔겄지만” 이라며 권력을 쫓아 약삭빠른 사람들은 시류에 맞춰 ‘중화 사대’도 부족하여 ‘친일’도 하고 해방 이후에는 ‘친미’로 변절을 거듭해가며 흥청망청 배를 채운다. 해방 이후 살만한 세상이 오나 했지만, 그 꿈은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북한에는 소련이 진주하고 남한은 미군정이 들어선 것이다. 남북 분단의 단초가 된다. ‘다순구미’는 역사적인 서사를 관통한 상징성으로 봐야 한다. 그런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잘도 견뎌낸 ‘목포’였고, 그 자부심은 민중적 각성의 결과란 것을 말해준다. 그 인식을 잘 보여주는 놀이패 상쇠의 돌이 뱅뱅에 조소 잔뜩 먹인 추임새로 한판 신나게 깐죽거리며 까발리고 있는 것이다. 걸판지고 거한 각설이 놀이패처럼 거동 따라 넘실 흠짓 발림 짚어가는 한 맺힌 노랫가락 잘 들어보니 지랄 같은 세상 돌아가는 판을 비웃으며 실컷 떠들어대는 한풀이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축출하고자 한 것은 악귀도 아닌 이 땅에 도무지 도움 안 되는 외세를 가리킨다. 목포 유달산에 올라가 보면 한눈에 보이는 다순구미다. 목포 근경을 아우르는 중심으로 ‘다순구미’가 정온靜穩해지면 살만한 세상이 도래한다는 민중의식의 원형이다. 참고로 목포와 인접한 무안 일로 지역은 ‘각설이 품바 놀이패’가 해방 전부터 물산이 풍부한 근경을 무대 삼아 활동해왔다. ‘다순구미’는 박관서 시인이 오랜동안 관심을 갖고 정리한 품바 놀이패의 민중성을 시적으로 환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토속적인 질감을 살려낸 언행을 적층적인 민중의 노래 가락처럼 인용해 질팍한 소리패의 원형을 접목한 시 ‘다순구미’로 환기한 것이다.
이것은 최초의 지하 건축
위에서 아래로 쌓아 올렸던 민심,
우물에선 쌓인 물맛이 나지만
우물은 몰살의 상징
어느 밤의 모략가가 풀어놓은
음모가 숨죽여 스며든 곳.
한 마을의 기일이
같은 날 고여 있기도 하는
풍덩, 소리가 나는 석축
눅눅함의 한계 시간이 되면
파란 털들이 돋아
다시 살아나는 돌들
폐정은 카타콤
오래된 몰살은 뼈들을 걸고 연대한다
전설과 진실 사이를 서성인다
우물의 키는 점점 마모되는
파릇한 봉분 같다
파묻히거나
발견되는
학살에는 후손이 없다
단체로 물려받은 요란한 기념식과
달력의 한 귀퉁이에 버려진
붉은 날짜의 무덤들
-<우물> 전문/ 조미희
마을 공동체가 생존을 위해 필요한 항목 중 최우선인 것이 먹고 마실 수 있는 샘을 확보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마을 한가운데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우물터를 만들었다. 그 우물터에서 아낙들의 입담을 통해 동네 대, 소사가 건네 지고 주민 간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자연스럽게 화해가 이뤄져 공동체 의식을 돈독하게 하는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담당했다. 조미희 시인은 마을을 살리는 ‘우물’을 ‘여순사건’ 때 발생한 만행 장소 중 하나로 바라본다. “우물은 몰살의 상징”이라는 참혹함으로 상기시킨다. 한 날 한 시에 동네 주민들을 우물 속으로 몰아넣어 처참하게 수장시켜버린 역사의 현장이 안타깝게 ‘우물’이었다. 그 사건이 발생하게 된 계기는 “어느 밤의 모략가가 풀어놓은/ 음모가 숨죽여 스며든 곳./ 한 마을의 기일이/ 같은 날 고여 있기도 하는/ 풍덩, 소리가 나는 석축” 안은 사람을 살리는 우물이 아니라 사람을 죽여 수장한 암 매장터가 되어버렸다. 화자가 발설한 행간을 살펴보면 ‘여순사건’에 휩쓸릴 수 없는 순박한 사람들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동네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불순한 사건과 연루시켰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랜 방치로 인해 우물 안으로 덧대 쌓은 석축에는 푸른 이끼가 돋아나 과거의 사실을 덮어버린 듯해도 세상 알만한 사람은 ‘우물’ 속 진실을 안다. “폐정은 카타콤”이었다며 우물에서 벌어진 일들이 입과 입으로 지하 공동묘지에서 은밀하게 이뤄진 비밀 결사처럼 전해진 것이다. 아무리 세월을 속이고 눈을 가려도 세월보다 더 단단해서 삭아 문드러지지 않는 것이 사람의 뼈다. 아직도 우물 안에 남아있는 인골들은 당시의 참상을 증언해준다. 여순 사건이 발발한 지 70여 년이 경과되면서 우물터도 세월의 마모를 견디지 못하고 흔적을 지워간다. 더 불안한 것은 아직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는 데 사회 인식 변화는 너무 답답하다는 것이다. 유가족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파묻히거나/ 발견되는/ 학살에는 후손이 없다”는 비애감을 분노로 표출한다. 만행을 저지른 흔적은 이렇게 진실로 드러나는데 도대체 학살을 주도했거나 실행했다며 나서서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기껏 한다는 것이 발굴 현장에서 역사의 잘못을 깊게 뉘우친다는 말 몇 마디 하고 기념사진 달랑 남기는 것이 전부라는 비통함을 화자는 통탄할 수밖에 없다.
스물다섯 살 신혼에 죽임을 당해, 피투성이인 채 구덩이에서
태워진 조선 누렁소,
아버지의 이름뿐, 죄 없는 삶에 덤터기, 한평생 빨갱이 누명 입
에 재갈 물고 살아야 했던 송아지의 피맺힌 21세기, 야만의 게르
니카로부터 건너온 참혹인가 1948년 10월 19일! 빙하의 시계로
멈춰 있다
굴비 두릅 엮듯이 손목 묶고 돌덩이 매달아 애기섬에 수장시킨
손가락총의 파도☞ 동백의☞ 동백에 의한☞ 동백을 위한☞ 그 번
듯한 거짓말☞ 고요하던 숭어의 바다 함께 죽어버렸다.
-<게르니카 여수> 전문 / 이민숙
힘을 써야 하는 농촌에서 가장 큰 일꾼은 누런 황소다. 동네에서 일 잘하는 일꾼을 가리킬 때 누런 황소 같다는 말은 최고의 칭찬이면서 남이 부러워할 선망의 대상이다. 이민숙 시인은 여순 사건 때 발생한 참상 중 누런 황소처럼 일 잘하고 마음씨 착한 사람의 죽음을 알게 된다. 그 사람은 “스물다섯 살 신혼에 죽임을 당해, 피투성이인 채 구덩이에서/ 태워진 조선 누렁소,”라고 호명한다. 집안을 먹여 살렸던 ‘조선 누렁소’처럼 우직하게 농사일에만 매달린 젊디 젊은 스물다섯 신혼의 꿈이 채 깨기도 전에 죽임을 당한 사람이다. ‘조선 누렁소’라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여순 둥이’ 핏덩이에 씌워진 빨갱이 자식이란 사회의 냉대가 성장의 긴 시간을 고통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사회와 국가로부터 받은 냉대와 감시로 속박당한 세월을 화자는 이렇게 말해준다. “아버지의 이름뿐, 죄 없는 삶에 덤터기, 한평생 빨갱이 누명 입에 재갈 물고 살아야 했던 송아지의 피맺힌 21세기”를 “야만의 게르니카로부터 건너온 참혹인가”라며 되묻고 있다. 참고로 ‘게르니카’란 그림은 1937년 독일의 폭격기에 의해 ‘게르니카’가 폭격당하면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참상을 알리려고 피카소가 그린 작품이다. 이민숙 시인은 시적 화자의 입을 통해 고발하고자 한 ‘여순사건’의 참상을 피카소가 그린 ‘게르니카’를 통해 압축 환기시킨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당시 좌익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지명한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손가락 총’이란 말이 생겨났고 화자는 그 ‘손가락’을 시어 사이에 삽입해 살벌했던 그날을 되돌아보고자 했다. 애기섬에 묻힌 통한의 세월을 위로하고 붉어 슬픔으로 상기된 동백을 보며 아픈 역사의 종언과 역사의 반복을 경계하자는 민중적 각성을 주문하고 있다.
스무 살 순이의 사랑을 외면할 수 없다
병원에서 간호부와 환자로 인연이 되었던
국방경비대 장교와의 사랑을 한낱
불장난이거나 치기로 매도할 수 없다.
제주도민 학살에 출동을 거부하여
반란군을 지휘했던 함경도 청년과
단선단정 거부의 땅에서 태어난
제주도 처녀, 남녀북남으로 만나
애초부터 혁명적 동지는 아닐지라도
그들의 사랑은 묶인 분단의 사슬에서
단단하고 야물어지고 있었겠지.
작지만 단발머리에 스카프를 날리며
토벌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체포하거나 살해한 자에게
거금의 현상금이 걸렸지만
그들의 사랑은 결국 지리산 뱀사골
글러버린 한 순간 조각난 꿈이었을지라도
스물의 순이와 스물다섯의 회
몇 번이나 넘었을까, 지리산 골짜기
몇 번이나 맞았을까, 동트는 새벽
그 꿈 남과 북, 여순과 제주에 새겨지기까지
그 불멸의 혁명적 사랑을 믿기로 한다.
-<제주여자, 순이> 전문/ 강덕환
낭만적인 사랑이 청춘 남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우연 같지만, 인연이 된 빌미는 “병원에서 간호부와 환자로 인연이 되었던/ 국방경비대 장교와의 사랑을 한낱/ 불장난이거나 치기로 매도할 수 없다.”며 화자는 사랑의 진전을 긍정적으로 확신하고 만다. 필연적으로 천상 연인이 될 수밖에 없는 연분을 타고난 청춘 남녀 둘을 어찌하겠는가? 갓 스무 살인 제주가 고향인 ‘순이’도 그렇거니와 스물다섯인 함경도 청년이 여수까지 내려와 14 연대 국방 경비대에 복무하는 것도 우연이지만, 운명처럼 그 둘은 여수 땅에서 만남이 이뤄진다. 당시 제주 4.3이 발발하였고 제주 도내 상황이 악화일로를 치닫자 긴급하게 이승만 정권은 미군정과 협의하에 여수 14 연대 병력 일부를 토벌군으로 파병하기로 한다. 그에 “제주도민 학살에 출동을 거부하여/ 반란군을 지휘했던 함경도 청년” 김지회 중위는 제주 토벌을 목적으로 한 파병을 반대하면서 반란을 지휘 선동하여 ‘여순사건’ 반란군 핵심 주모자로 지목된다. 이후 토벌군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김지회는 조경순(스무 살 순이)과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빨치산 무장 투쟁을 이어간다. 그런 상황마저 오래가지 못하여 김지회는 토벌군에 의해 교전 중 사살되고 조경순은 생포되어 죽음을 맞게 된다. 소설 속 픽션 같은 현실이 진실이라면 시대를 잘못 만난 청춘 남녀의 가슴 아픈 사랑에 밀려드는 연민은 인지상정이다. 강덕환 시인은 김지회와 조경순의 운명적 만남과 그 둘이 감당해야만 했던 암울한 시대의 비극적인 사랑을 시적으로 상기시켜준다. 사람을 받드는 조국에 살지 못한 김지회와 조경순의 혁명적 이상과 극명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뛰어넘지 못한 사상적 이념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해본다.
지금껏 ‘여순사건’으로 인해 자행된 국가 폭력이 여수와 순천에 국한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순사건’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가한 좌익몰이의 편리한 성과를 국가 권력자들이 확인한 것이다. ‘여순사건’을 통해 학습한 차제에 이념적 폭력을 수행할 수 있는 가해자를 양산하였고, ‘제주 4.3’을 비롯하여 6.25 전후 과정과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는 ‘80년 광주 5월’까지 ‘국가 통치 행위’라는 명분을 내세워 광범위하게 자행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도 국가 권력에 의해 크고 작은 사건들이 수없이 발생한다. 모든 사건들이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광포한 권력의 폭력성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해선 안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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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철영평론가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