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관광
D중고등학교라는 이름을 첫 만남은 언제이련가.
1957년도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1차에 떨어지면 2차 학교에 다시 시험을 봐야 한다.
1차는 1 ~2류에 속하는 학교이며 2차는 3류~4류로 표현하면 좋을 거다.
고등학교도 마찬가지이다. 해당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른다.
시험문제도 해당 학교에서 출제한 것이므로 각각 시험문제도 다르다.
1류를 A급, 2류를 B급, 3류를 C급, 4류를 D급으로 표현해도 좋을것이다.
D중고등학교는 한마디로 4류에 속하며 똥통 중고등학교로 부름일 것이다.
하지만 4류이든 똥통이든지 이런 학교라도 만난것이 천만다행이리라.
1차 2차 중학교 입학시험에 모두 낙방의 고배만이 기다리고 있을뿐이다.
어찌 할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의 구렁텅이로 유혹도 받는다.
국민학교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 익혔는지 배운것도 아는 것도 아무것도 기억에 없으니 당연지사이리다.
한달이 지난 즈음에야 내 아버지가 손을 잡고 D중학교에 찾아가는 운명의 순간이다.
입학시험도 무슨 얘기도 조건도 없이 무조건 입학이다.
1954년 4월이라고 기억코 있다.
입학시험도 보지 않아도 얼른 손을 내밀어준 마음씨 착한(?) 곳이 바로 D중학교이다.
아마도 D중고등학교와는 피할 수도 어쩔 수도 없는 천생연분의 세월이리다.
이곳이 나의 중고등학교를 6년간 다니게 한 모교(母校)이자 운명적인 만남이다.
토양에는 물도 나무 그늘도 없는 잡균들로 가득한 불모지와 같은 사막에 비유하면 어떨까.
스스로 홀로 서서 걸어야 하며 땅굴이라도 파서 스스로 나만의 안식처도 만들어야 한다.
어쩌다 소나기라도 퍼붓는 날이면 바로 식용수로 저장도 한다.
똥통뿐으로 동서남북 방향이라도 제대로 가르쳐주는 이도 없다.
그래도 밤마다 밝게 환하게 빛나고 있는 북두칠성이 삶의 희망이 아니랴.
저 별이 손짓하는대로 꾸준히 읽고 배우며 앞으로 전진이다.
새벽이면 사라져버리는 샛별이라도 거머쥐는 결과의 산물도 가슴에 품는다.
초일류 대학인 S대학교 공과대학은 두번이나 낙방의 초라함 뿐으로 SKK대학교 약학대학의 학사모를 받는다.
그뿐이련가. 못 다한 설음을 SKK 임상약학대학원의 석사의 꿈을 늦게나마 가슴에 품는다.
이것이 똥통인 4류 중고등학교이지만 덕분에 순간의 선택이 삶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결과물이렸다.
요즘에는 중고등학교 입학은 무시험제로 지역마다 학군이 있다.
학생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서울에는 1학군부터 11학군이 있다.
한강 이남의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등의 새로운 거주지역을 활성화 하기 위한 정책일 터이다.
강북에 소재하고 있는 중고등학교를 강남 서초 송파 지역등으로 이전을 시킨다.
그 당시까지 초일류로 꼽히던 경기중고등학교, 서울중고등학교. 경복중고등학교등도
강남구 서초구등으로 옮겨야 하는 신세이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폐지하고 학군별로 추첨을 통해 학교를 배정한 중학교 입학제도로.
입시지옥과 과열과외에 시달리는 어린이를 해방하기 위한 제도이다.
일류 중학교 관념의 불식을 위해 경기 서울 경복등의 중학교는 없애고
고등학교만 강남으로 이전하여 설립해야 하는 것이다.
1969년에 서울을 시작으로 3년에 걸쳐 전국으로 확대되어 평준화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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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군은 동부교육지원청이 관리하며 동대문구와 중랑구가 해당되는 지역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선호하고 가고 싶은 지역이 어디인가.
11개 학군에서도 강남교육지원청의 8학군으로 강남구와 서초구가 선망의 대상이라해도 좋을게다
" 얘는 반드시 강남으로 가야 합니다 , 집이 왜 안팔립니까, 좀 싸게 내놓으세요 " 초등학교 5학년때 담임선생님의
한마디이다. 우리 가족이 모두 강남으로 옮긴다.. 아마 1980년 중반일 때일게다..
자녀들이 강남구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재학시에 잠시 광진구로 옮긴다.
아들 딸이 모두 결혼하고 자녀들의 출생으로 모두 강남구행이다.
중고등학교 대학교도 다닌 강남구에 정도 들고 마음은 항상 강남이었던 모양이다.
부모로서도 자식과 손주들이 있는 강남으로 돌아올 밖에 어쩔 수가 없다.
한마디로 강남구가 제2의 고향으로 생각도 되리다.
북한의 김일성 1인 독재자이며 공산당이 남침(南侵)을 한다.
바로 1950년 6,25전쟁이 터진 것이다. 평화스럽던 한반도 전체가 쑥대밭으로 휩쓸린다.
한민족 같은 혈통으로 형제자매인 수 많은 백성들이 죽음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이다.
속절없이 자장가만 부르고 있던 남한은 낙동강가까지 공산군의 침범을 당한다.
미국을 비롯한 UN연합군이 방어에 나서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한다.
계속 북진(北進)으로 밀고 들어간다.
황해도 평안도를 지나서 백두산을 마주한다. 곧 김일성 공산주의국가 함락되는 때이리라.
10만이 넘는 중공군 괴뢰군이 물밀듯 들이닥친다. 유엔 연합군이 후퇴할 밖에 방법이 없다.
공산당 치하가 싫은 내 아버지의 결단이 내려진다.
회갑을 넘기신 내 할머니에게 작은 아들과 작은 누나를 함께 남기고 내 오마니 아버지 큰 누나 맏아들만 데리고 피난을 하련다.
" 피난은 그런게 아니니께니 가족 모두 데리고 가거라 "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시는 내 할머니의 모습이다.
1951년 1,4후퇴로 살고있던 이북고향인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어수리 226번지를 떠나야 하는 순간이다.
수시로 쌕쌕이(전투비행기) 소리가 하늘을 가르는 순간은 집앞에 있는 방공호(防空壕)로 날래 들어가야 한다.
이러기를 몇몇번이던가. 눈보라가 엄청 쏟아지는 날이다.
석탄을 때고 있는 화물열차가 " 꾁 ~ 에 ~ 꾀~에 꽥 ~ 꽥 " 소리를 지르며 시커먼 연기를 내뿜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물칸은 물론이고 지붕위에도 하얗게 피난민들로 뒤덮고 있다.
화물칸에 있는 드럼통속에 아버지는 맏아들 장남인 나를 꼭 끌어안고 들어간다.
얼어죽지 말라고 오버로 꼭 감싸고 가슴에 품어주시고 있다.
달랑 배낭(背囊, リュックサック)에는 갱엿 한덩어리가 전부이다.
며칠후면 아니 늦어도 한달이면 다시 고향땅으로 돌아간다는 생각뿐이었으니 어쩔까.
도중에 열차가 정차할 때면 많은 사람들이 냄비에 쌀을 넣고 근처 나무쏘시개로 불을 붙인다.
밥을 하기 위함이다.
기차가 "꽥~에~엑~"소리를 지르며 떠나려면 냄비를 들고 뛰어 들어온다.
밥은 아직 생쌀 그대로이다.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열차는 일주일 이상이나 걸려서 서울역에 도착이다.
한강다리는 끊기고 꽁~꼬옹 얼은 한강위를 걸어야 한다. 지게에는 쌀이 아닌 어린애기를 태우고 있다.
소달구지에도 먹을 식량 대신 가족들 몇명이다.
배고프다고 보채는 대여섯살배기 애기들의 울음소리가 어름장을 흔들고 있다.
" 정남아~~~ 쬐끔만 참거라 ~~~ " 갱엿 한조각을 입에 물려주시며 내 오마니의 얼어붙은 목소리가 가슴을 녹인다.
자빠지고 넘어지고 피난민들은 헤맬뿐이다.
대통령이라는 멍청하고도 위대한(?) 분이 한강다리를 미리 폭파한 것이다.
피난민들의 생각은 없고 공산군의 남침만 막겠다는 알량한 분이다.
자신은 미리 건넜으면서도 아직 서울에 남아있다는 거짓부렁이 노인네의 투정이다.
피난은 계룡산 근처 산골 마을이다. 집도 절도 없이 먹을 것도 쉴곳도 아는이 하나도 없는 낮설고 물설은 타향살이이다. 대전 홍도국민학교를 거쳐 5학년 2학기에 서울로 상경이다. 갈곳은 어드메인가.
현재는 중부시장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허허벌판 같은 공터에 가마니 서너장 깔고 서너평 정도되는 판잣집 신세이다. 모두 판잣집인 이십여채가 피난민들의 보금자리이리다. 변소도 공중으로 판자로 대충 얽어 맨 곳이다.
아침 마다 길게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기도 한다.
을지로 4가 오장동 근처에 있는 서울 영희국민학교로 전학이다.
오마니는 을지로 5가 버스정류장 앞에서 노점상을 한다.
아버지도 서울운동장 근처에 자그마한 판자집 가게를 하고 계신다.
어느때인가 D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코 있다.
5만환인가 몇푼의 이사비용을 받는다. 그 당시 피난민 판자촌 자리에 중부시장이 들어설 모양이 아닐까.
그 당시의 중구 쌍림동에 있는 D중고등학교를 지난다.
장충단 공원을 스치고 약수동을 거쳐 매봉산 줄기를 넘어야 한다. 지금은 금호역이 있는 근처이다.
성동구 금호동 자그마한 산줄기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옥수수나무에 흙으로 담장을 만든다.
지붕은 천막이 전부이다. 여름이면 무더위에 숨이 턱턱 막힌다.
겨울이면 머리맡에 놓은 자릿기에 물도 꽁꽁 얼고 숨을 쉴때 마다 하얀 서리같은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어쨌든 피난 나온 이후에 여섯식구의 첫 주거용 흙 천막집이다.
주소는 서울 성동구 금호동 4가 1483번지이다. 언제부터인가 호적에는 본적지로 올려져 있다.
평난남도 개천군 조양면 용현리 227번지는 원적지로 기재되어 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정신이 번쩍 든다. 집 뒤에 있는 동산으로 오른다.
"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시여 ! 앞으로는 공부를 꼭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D고등학교가 아닌 더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할 것입니다 "
정월 대보름달을 바라보며 수없이 약속에 약속을 한다.
매번 공부하다가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기도 한다.
이럴때마다 가위에 눌려 거의 질식상태도 온다.
온몸이 뻗뻗이 굳어지고 움직이기도 어렵다.
" 정남아 ~~~~ 공부는 이렇게 하지 말거라, 잠은 편히 이불에 누워서 자거라 "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의 말씀도 귓등으로 흘리기도 한다.
반드시 장학생이 되어 월사금도 면제를 받으리라 다짐도 한다.
1류인 S고교에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당연히 낙방의 고배이다.
D중학교라는 절간터의 4류 중학교에서 아무리 1등을 해도 초일류인 S고등학교는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언감생심인 것이다.
또 다시 DB고등학교의 부름에 따라야지 방법이 없다.
그것도 장학생 시험이라는 유혹을 마다키도 어렵지 않은가.
이렇게 1963년도에 DB고등학교를 졸업을 한다.
S대학교 공과대학도 연속 두번이나 쓰디쓴 물을 들이겨야 한다.
조금 커트라인이 낮은 의대나 약대로 지도를 하는 선생님도 없으니 한심한 학교가 아닌가.
2023년 올해가 D고를 졸업한 60주년 회갑이 되는 기념해이다.
좋든 싫든 1류이든 똥통인 최하류이든 어떻든 내가 다니고 졸업한 모교(母校)가 아니랴.
인생 60이면 회갑기념잔치도 베풀곤 하는 한국의 실정이 아닌가.
D고 졸업 60주년 회갑기념으로 동기들 몇명이 일본 대마도를 1박2일 여행키로 한 것이다.
10월 22일(월) 밤 여덟시 십이분에 서울역에서 부산행 KTX에 오른다.
밤 10시 41분에 부산역에 도착이다.
부산역 건너편에 있는 차이나타운 24시 사우나룸으로 들어간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근처 식당에서 아침식사와 반주도 함께 하는 동기들이다.
아침 9시10분에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 일본 대마도로 떠나는 NINA호 여객선에 오른다.
1시간 30여분이 지나 오전 10시 40분경에 대마도 히타카츠에 도착이다.
근처 ㅇㅇ進家라는 식당에서 점심이다. 반찬도 쬐꼬마한 서너조각씩 서너가지이다.
메뉴는 무슨 음식인지 도대체 알수가 없다.
"キムチはないです(김치는 없습니다) "
한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김치 한조각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돌아온 답이다.
" 食べ物の味が全然ない 不味い (음식맛이 전혀없고 맛이 없다) "
한스픈 맛을 보고 나오면서 소리질러 던진 한마디이다.
" 味がない (맛이 없다) "식당주인 노인네가 깜짝놀라며 투덜대고 있다.
계속 버스로 이동을 한다. 가이드라는 50대 정도 여인네가 계속 주절인다.
" 조선시대 조선통신사가 어떻고 러일전쟁에 총알을 맞은 러시아군인이 아~악 소리를 지른다. 어쩌고 저쩌고 ~ ~ ~ " 다시 버스에 오르면 무슨 말인지 또 혼자 계속 떠든다.
도대체 어린아이들 가르치는 학원강사인지 코메디안인지 도대체 머리가 어지럽다.
" 여기서 10여분 내려서 경치를 보시고 다시 승차하세요 " 가다쉬다를 반복이다.
버스내의 관광객은 거의 60대 후반의 노객들이다.
" 여러분의 반 이상이 주무시고 있네요 " 계속 떠들어대는 가이드의 언성은 버스 천장을 울리고 있다.
조용히 차창밖으로 펼쳐지고 있는 경치라도 보면 좋으련만 방법이 없다.
" 버스 마이크 볼륨이 엄청 커서 힘드니까 언성도 낯추고 볼륨도 팍 낮추세요 "가이드에게 몇번 부탁한다.
하지만 버스에 오르면 또 다시 마찬가지로 볼륨도 크고 계속 씨잘데 없는 농담인지 진실인지 종잡기도 어렵다.
지난 역사는 대충은 알고 있는 한국인들이다.
첫번째 버스에 오르는 순간부터 마지막 여객선 승선시까지 혼자 웃고 여전히 떠들고 끝이 없다.
관중은 나몰라라 하면서 1인 코메디인가. 이런 가이드는 처음이다.
버스에 승객이 40여명이다. 손님들은 안중에도 없다.
1인당 3만원씩 가이드 비용으로 걷는다. 120만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다.
미친똥개가 암컷을 만나면 올라타고 꼬리를 흔들며 혼자 쾌감을 즐기는 모습이 아닐까.
아소만의 절경을 조망할수있는 에보시타케전망대로 오른다.
관광객들은 계속 오르고 있으나 볼것은 그저 그런 모습이다.
동해바다 아니면 남해 바닷가 한국의 땅끝마을인 해남바닷가 이와같은 풍경이 더 볼만하며 친근할뿐이다.
일본해군함대의 통로를 위해 인공적으로 굴삭한 만관교(万關橋)를 걸어서 통과한다.
버스차창으로 용궁전설이 내려오는 바다신을 모시는 "와타즈미신사"를 스쳐 지난다.
석식후 이즈하라에 있는 대아호텔 4인실 숙박이다. 새벽 3시부터 기상하여 설치는 동기도 있다.
아침에 1층에 있는 사우나를 한다. 동기생 네명이 아침 바다를 산책하며 근처 낮은 산으로 오른다.
" 통신사황윤길현창비(通信使黃允吉顯彰碑)" 조선통신사비석도 참관이다.
호텔에서 아침식사후 버스에 오른다.
이즈하라 시내관광 도로가 협소하여 도보로 이동 일본정통 신사인 '팔번궁신사' 에 들어선다.
10월24일(화) 1박2일의 마지막 날이다. 이즈하라에서 XX면세점을 들린다.
가이드도 동행이다. 면세점에서는 낫또키나제, NMN, 또 무슨 무슨 물건을 사라고 한다.
자신이 먹어보니 효과가 엄청좋단다. 여타 노객들은 멋도 모르고 사재기도 한다.
" 너희들은 절대 그런 것 사지마라 " 친구들에게 한마디 던진다.
사려면 인터넷으로도 훨씬 저가로 구입 할 수 있으니까.
히타카츠터미널에서 오후 3시30분발 NINA여객선에 오른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 오후 5시5분경 도착이다.
한국에 도착하고 보니 이제야 마음이 편안하다.
이토록 가벼운 마음은 어쩜 주절이는 가이드가 없어서가 아니랴 .
터미널내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네명의 동기들이 마주 앉는다.
직접 냉장고에서 그토록 즐기는 쐬주가 빠질리가 없다.
저녁 6시 42분에 부산역 KTX에 오른다. 객실에서도 동기들 세녀석들은 또 알콜에 현혹되고 있다.
10월 24일(화) 밤 9시 59분에 서울역에 도착이다.
" 잘 가거라" " 또 만나자 앞으로 27년간을 " 악수를 하며 뒤로 돌아선다.
어디로 가야하나.
마음은 걱정뿐이고 발걸음은 무겁고 어찌할까. 어디로 가야하나.
아내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하리다. 전화를 한다.
아내에게인지 딸내미에게 했는지 기억도 없다. " 집에 가서 주무시고 오후에 오세요 "
" 아니, 그러지 말고 집에서 주무시고 아침 일찍 병원으로 오세요 " 딸과 아내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아파트로 들어선다.
" 왜 이리도 늦게 오시는가 " 아내의 한마디가 그립다.
항상 보이곤 하던 아내는 어드메로 갔는다. 거실에 불을 켠다.
이사를 와서 6년정도 살고 있는 청담동 아파트집이 아니고 어디이던가.
불을 환히 켜둔채로 내 방의 침실로 고꾸라진다.
방안에 인기척은 고사하고 아무도 없는 무인도(無人島)의 깜깜한 빈 동굴속만 같다.
아내와 50년 넘게 살아온 부부이다.
80여평생 이런 감정은 처음이다.
당연히 아내는 남편을 항상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줄만 알았다.
잠은 고사하고 온갖 잡념이 지난날의 헛발질하던 자신이 초라하기만 하다.
쓰시마로 향하고 있는 10월 23일(월) 오전 10시즈음이다.
" 아빠 ~~~엄마가 ~~~ 방안에서 넘어지셔서 다리골절을 당했어요 ~~~ 119구급차를 불렀어요 "
딸내미의 다급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폰을 흔든다.
여객선을 돌릴 수도 없고 가슴이 미여지고 할말을 잊는다.
방안에서 청소를 하다 돌아서는 순간 무엇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꼼짝도 할 수가 없고 엄청 부어오르고 바로 1미터 앞 식탁에 놓인 폰을 잡지를 못한다.
통증은 말로 표현키도 어려웠을게다. 30여분 이상 기어서 겨우 딸에게 전화를 한다.
마침 회사의 일로 강남구청 근처의 딸과 연락을 한 것이다. 근무지는 노원구쪽인데 천만다행이리라.
서초구 사당역 11번 출구 근처에 정형외과를 개원하고 있는 오빠에게 전화를 한다.
자신은 발과 발목을 전문으로 예약받은 환자만 중점진료를 하고 있다.
그외의 허리 팔 어깨 손등은 아예 생략이다.
아들의 후배가 있는 사당역 14번 출구 근처에 있는 YSSR병원으로 직행이다.
왼쪽 넙쩍다리의 대퇴골절이다. 10월 23일(월)에 입원이다.
다음날 오전에 3시간 이상 수술을 받는다.
일주일 동안 입원하고 11월1일 퇴원이다.
나머지 한쪽도 미리 수술로 관절을 보호해야 한다고 한다.
예약일은 11월 28일(화)에 입원하여 그 다음날 수술 예정이다.
이번에는 4일 정도만 입원하면 될거란다.
열심히 치료해준 아들 후배에게 감사를 드린다.
며칠전에도 이곳에서 진료를 받은 곳이다.
골다공증으로 왼쪽 오른쪽 모두 대퇴골에 금이간 상태란다.
" 넘어지시면 안되십니다 " 며 처방전을 받는다.
골다공증 주사 매일 자신이 근육에 주입하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아내에게 이런 끔찍한 사고이 터진 것이다.
모두 완치가 되려면 금년 12월은 넘겨야 할것만 같다.
그래도 불행중 다행으로 천만다행이 아닌가. 남편인 이 노객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될수록 옆에서 아내의 심부름꾼 밖에 도울 방법도 없다.
지난 날의 동기들과 약사들과 산행에 빠져 헤매기를 몇몇해이던가.
새벽까지 술에 곤두레 만두레가 되던 그 시절이 그저 부끄러울뿐이다.
자녀들과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한마디도 못한 멍한 애비이자 남편이다.
아내는 엄청 아파서 쭈그리고 잠을 못자지만 평생 아프다는 한마디 내뱉은 적이 없다.
가끔 등허리가 아프다며 잠을 설친다. 그럴때는 으레껏 진통제주사 한방을 주입한다.
그러면 별 말도 없이 곤히 잠이든다. 그러기를 몇번이더냐.
1980년대 중반 아내는 40대 초반으로 기억코 있다. 강동구에서 태평양약국을 하던 시절이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있는 국립보훈병원의 외과로 진료를 받는다.
병원장이 약국 윗층에서 얼마전까지 비뇨기과를 개원하던 의사도 함께이다.
X-Ray 혈액검사등 진료를 받는다. 초음파도 MRI등 검사도 하지 않는다.
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아마도 의료기가 없는 모양이다.
" 사모님은 잠깐 밖에 계세요 " 병원장의 한마디이다.
무슨 일인가.
" 담낭암입니다"라는 주치의 선생님의 한마디이다..
방법이 없단다.. 어찌 할까.
아내에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며칠밤을 눈물로 지새운다.
약국 2층에 있는 이비인후과 친구에게 뛰어들어간다.
" 아내가 암이라는데 어떻게 해야 되나 " .
" 치료차 미국으로 가면 되려는가" 대성통곡을 한다.
" 그러지 말고 다른 병원에서 다시 진료를 해봐야지 "라며 병원 이름을 알려준다.
국립병원에서 내린 병명인데 그곳이라고 별 방법이 없을 것이 뻔하다.
마지 못해 아내랑 다시 찾은 XX병원이다.
아내랑 나란히 앉아 검사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어린아이들이 이리저리 휘저으며 깔깔대고 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아내도 덩달아 같이 웃고있다. 가슴이 터질것도 같다.
" 김의경님 ~ " 잠시후에 간호사가 아내 이름을 부르고 검사결과를 봉투에 넣어준다.
보나마나 결과는 뻔하리라. 아무 말없이 한참을 걷는다.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살며서 검사결과를 아내 몰래 들여다 본다.
" 아니, 이게 뭐~야, 여보~~~ 암이 아니래~~~"
"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요, " 돌아온 아내의 시쿤둥한 답변이다.
강남구 경기고등학교 후문쪽에 있는 연립주택으로 들어선다.
" 나는 여태까지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내일이든 언제이든 죽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
계단을 오르며 아내가 뱉은 한마디가 아닌가.
바로 엊그제 같은 충격적인 순간도 있다.
이 못난 애비로서 아내의 남편으로서 그저 답답할 뿐이다.
세월은 물같이 흐르고 남은 여생(餘生) 며칠이련가.
가슴속에 묻어둔 못 다한 배려와 사랑을 마음껏 피워보면 어떠하려나.
일본열도는 사라지리다
대마도(쓰시마)는 일본과 한국을 가르는 대한해협에 있다.
인구는 겨우 29,670명 (2020년 추계)이고 면적은 708.5㎢이다.
한국에서 가장 큰 섬인 제주도의 면적은 1850.3 ㎢ 이며
인구수는 676,832명( 2023년 6월 기준)으로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 이다.
10,000개가 넘는 섬이 있는 일본도 홋가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 4개의 본섬만이 제주도보다 클 뿐이다.
쓰시마 면적은 708.5 ㎢ ÷ 1850.3 ㎢ = 0.3829 . 제주도의 38%정도이다.
인구 밀도는 29,670명(대마도인구) ÷ 676,832명(제주도인구) = 0.04383으로
제주도의 약 4%에 지나지 않고 있다.
대마도는 5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졌으며, 가미아가타[上縣]와 시모아가타[下縣]가 가장 큰 섬이다.
주요도시는 행정 중심지인 이즈하라[嚴原]와 게치[鷄知]이며 주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한다.
조선시대에는 조선통신사들이 방문한 역사가 비문(碑門)으로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
일본 신화에 따르면 창조 신들이 쓰시마를 일본 최초의 섬 중 하나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열도는 역사상 한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음에 새겨둔 쓰시마 한국전망대이었으나 현재는 공사중으로 오르지도 못한 한국전망대이다.
맑은 날에는 부산광역시 전지역과 경상남도 거제시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기도 하다.
일본의 한국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별로 볼만한 관광지도 없는 기대 이하의 대마도가 아닌가.
앞으로 20여년 뒤에는 대마도는 어떤 모습이련가. 현재 주민들은 거개가 모두 70세 이상의 노객들이다.
이들의 노객들이 전부 사라지는 날도 오리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쓰시마가 어드메에 있는지 관심밖이다.
오롯이 99%이상이 한국관광객 덕분에 대마도는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나마 한국인 마저 발길를 돌리고 나면 대마도는 무인도(無人島)로 반드시 전락하고 말것이다.
일본은 아시아 대륙의 동쪽에 활 모양으로 늘어서 있는 일본열도(日本列島, the Japanese Islands)이다.
환태평양 조산대(環太平洋造山帶)의 일부로 지질 구조가 복잡하며 지진과 화산 활동이 활발하다.
홋카이도(北海島),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규슈(九州)의 네 개의 큰 섬과 3,500여 개의 부속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인도(無人島)까지 합하면 약 10,000여개의 섬으로 구성된 곳이다.
일본열도는 수시로 태평양에서 발생하는 지진이나 태풍이 빠짐이 없이 엄습하는 곳이다.
엄청난 해일을 ( 쓰나미つなみ,津波,津浪 ) 몰고오며 마을 곳곳에는 산사태도 일어나고 도시 전체가 쑥대밭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인간의 생명이라도 부지하면 다행이렸다. 수 많은 생명이 추풍낙엽 신세가 아니랴.
최근에 발생한 지진을 다시 들여다 본다.
2011년 3월11일 금요일 오후 2시46분 일본 동북(도호쿠)지방 태평양해역
해저 깊이 24km에서 규모 9.0의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다.
거대한 쓰나미로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수소폭발과 방사능 유출 사고이다.
가동중이던 원자로의 핵분열은 자동으로 긴급 억제되지만 전력공급이 중단으로 냉각시스템이 마비돼 핵연료봉이 고열에 노출돼 수소폭발이 일어난다.
방사능 물질이 묻은 수증기가 외부로 유출된 것이다.
1만5890명이 숨지고, 2589명이 실종된다. 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자살, 병사 등 직간접 사망자를 합하면 모두 2만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다. 해일로 침수된 땅의 면적은 561㎢, 해일 피해를 본 농지 면적은 2만1480ha, 어선피해는 2만 8,600여척으로 집계되고 있다.
2011년 6월 일본이 발표한 피해규모는 약 16조9천억엔(약182조원)이다.
여전히 피난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은 전국적으로 17만여명에 달하며 후쿠시마 원전 폐로까지는 40년 가까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를 하고 있다. 어패류뿐 아니라 바다물 속을 전부 오염시키고 있는 망발이다.
"오염수 방류 계획이 국제 기준에 부합한다"는 최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일본 후쿠시마 내용의 최종보고서를 발표도 한다.
"나도 (오염수를) 마실 수 있다. 그 안에서 수영도 할 수 있다"고 방한한 라파엘 그로시(62) IAEA 사무총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주절인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후쿠시마보다 북핵 문제를 더 걱정해야 한다"고 헛소리도 하고 있다.
인근 국가들 거개가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핵오염수 방출이다.
중국등은 모든 수산물을 일본으로부터 수입을 모두 차단하고 있다.
바로 가장 가까운 곳인 대한민국 윤석열 정부의 태도는 어떤가.
여타 한일관계의 첨예한 문제도 한마디로 무릎을 끓고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일뿐이다.
" 국민들에게 후쿠시마 오염수에 오염된 해산물을 국민이 먹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일본총리에게 약속도 하고 있지 않는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일본에 대한 충성심의 극치이다.
대한민국 정부의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어드메로 갔는가.
우왕좌왕 제대로 항의 한번 목청을 높인 적이 보이지도 않는다.
이번 방사능 오염수 방출 문제뿐이 아니지 않는가.
윤석열정부에 검사나 검찰수사관 등 전현직 검찰공무원 136명이 들어가 있다.
1945년 8월15일 36년간의 일제 쪽발이 놈들의 식민지 치하에서 벗어나는 독립기념일이다.
그 이후로 남한의 대한민국이 2023년도 현재 20대 대통령으로 13명의 대통령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이들 중에서 제대로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부로 내세울만한 사람이 누구이더냐.
이름을 구태여 불러보기도 싫다.
탄핵을 받은 사람이 두명이며 군사쿠테타의 주인공들도 불법 사기등으로 범죄자인 인간도 있다.
1년하고도 반년이 흐른 지금 윤석열정부는 한마디로 " 대한민국은 검찰공화국"으로 생각될 뿐이다.
그들의 놀이터이며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저들끼리 웃고 떠들고 지지고 볶고 검찰공원(檢察公園)인 모양이다.
곧 1년 이내로 저들에겐 또 다시 탄핵이라는 국민들의 올가미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관동대지진(関東大地震 간토다이지신) 은 1923년 9월1일 11시 58분(일본 표준시)에 일본 도쿄도등을 포함한 미나미칸토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해구형지진이다.
일본은 계엄령을 선포해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유언 비어를 꾸며 퍼뜨린다.
이에 격분한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 관헌들과 함께 조선인을 마구 체포 · 구타 · 학살한다.
우선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당한다.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들을 식별해 내기 위해 어처구니 없는 조치도 한다.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 한국어에 없는 종종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十五円五十銭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쥬고엔 고주센)을 시켜본다.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한다.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지방의 일본인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받고 살해당하는 등,
학살은 마구잡이식이다.
치안 당국은 "조선인들이 폭동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헛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자경단의 살상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이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도쿄에 흐르는 강물에는 시체의 피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사람이나 정부 부서는 전혀 없다.
한일합방으로 조선인을 12만여명을 노동자로 일본으로 끌어들인 상태이다.
이중에 반 이상이 넘는 6만명 이상이 살해되고도 모자랐을 것이 아니랴.
하지만 일부에서 기록을 보면 피해자가 6,066명이라고 당시 일본정부는 겨우 233명으로 추산되어 있을뿐이다..
일본어도 서틀고 얌전하고 착한 조선인은 저들에게는 인긴도 아닌 개만도 못한 식민지의 노예일뿐이리다.
유관순열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독립투쟁 열사 의사들이 일제치하에서 목숨을 바친 것이다.
그중에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 해주부(海州府) 광석동(廣石洞)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마리아(趙마리아)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태어날 때 북두칠성과 같은 일곱 개의 점이 가슴에 있다.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는 뜻으로 할아버지 안인수가 응칠(應七)이란 이름을 지어 준다.
아버지 안태훈은 자임(子任)이란 아명을 지어 주기도 했다.
1909년 10월 26일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찾아온다는 소식을 접한다.
즉각 의거를 추진해 간다.
의병 재기를 도모하던 상황에서 이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활동 지역에 적장(敵將) 이토히로부미가 찾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안중근의사는 남몰래 기쁨의 눈물을 흘렸으리라..
그리고 잠시도 지체 없이 즉각 이토 히로부미 포살의 결행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간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권총 4발로 사살한다.
1910년 3월 26일 하얼빈 의거 사형집행으로 만 30살의 나이인 청년의 삶을 마감한다.
이와같은 애국지사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리라.
일제 식민지로 36년간 저들의 군화발에 짓이겨 인간도 아닌 노예로 살아온 치욕의 역사이다.
1945년 8월15일 대한민국으로 독립된 날이다. 흐른 세월도 78년이나 된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아직도 식민지 노예로 착각하고 있는 계다짝의 일본 쪽발이 들이다.
일본이라는 섬나라 쪽발이들은 배상은 커녕 " 잘못했습니다. 미안하나이다 "라는 한마디 사과도 없지 않는가.
이 지구상에 둘도 없는 인간 이하의 동물보다도 더 못한 나라도 아닌 집단이리다.
정의의 편에 서서 천체의 모든 자연생태적 만물에게 삶과 죽음을 관리주도 하고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실권자 하느님은 절대로 일본 쪽발이들을 용서치 않으리다.
언젠가는 일본열도 전체가 지진과 태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쾌거(快擧)의 순간도 반드시 오리라 믿고있다.
비운(悲運)의 덕혜옹주(德惠翁主)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에 조선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현재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에서 태여난다.
고종이 59세일 때 얻은 늦둥이이자 고명딸이며 생모는 복녕당(福寧當) 귀인 양씨이다.
순종 의친왕 영친왕의 이복 여동생이다.
덕혜(德惠)는 1921년 이복오빠 순종이 내려준 작호이다.
고종에게는 일찍이 9남 4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대부분 어렸을 때 죽는다.
장성할 때까지 생존한 사람은 복녕당 양씨 소생의 덕혜옹주까지 3남 1녀뿐이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애지중지 키워진다.
덕혜옹주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한국인들에게 조선의 추억을 일깨워주는 상징이기도 하리다.
하지만 그녀는 발랄하던 어린 시절 아버지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부터 공포에 휩싸여 살았다.
신식 여성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간 뒤에는 우울증에 고독감까지 겹쳐 실어증(失語症)에 걸린다.
몇 년 뒤 어머니 귀인 양씨의 죽음으로 덕혜옹주의 심리 상태는 벼랑 끝까지 몰린다.
등교를 거부하고 심한 불면증 증세를 겪어 영친왕 저택과 별장에서 요양을 한다.
결국 9월 정신장애인 조현병 진단을 받게 된다.
1930년 10월 소 다케유키와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소 다케유키는 옛 쓰시마번주 송의달(宗義達)의 양자로 들어가 백작의 지위를 계승한 화족이다.
혼인이 결정될 무렵 도쿄교육대학 영문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같은 해 5월8일 도쿄에서 결혼식이 순일본식으로 거행된다.
정신분열증으로 비화되고 냉혹한 일제는 정략결혼을 통해 그녀를 더욱 비좁은 새장 속에 가두어 버린다.
그 때문에 병세가 심화된 그녀는 딸과 생이별을 한다.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창덕궁 낙선재에 안주를 한다.
이미 영혼이 떠나버린 그녀의 육신이다.
아득한 유년의 기억만을 남긴 채 파랑새처럼 저 세상으로 훌쩍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후 옹주는 1930년 봄 무렵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등교를 거부하고 심한 불면증 증세를 겪어 영친왕 저택과 별장에서 요양을 한다.
결국 9월 정신장애인 조현병 진단을 받게 된다.
옹주는 결혼 당초부터 거의 완전한 실어증 증상을 보인다.
그녀의 조현병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전혀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다.
계속 소리내어 실소하는 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1931년 증세는 호전되었고 같은 해 여자학습원 본과를 졸업한다.
이후 옹주는1932년 8월4일에는 외동딸 송정혜(宗正惠)를 낳는다.
병세가 심화된 그녀는 딸과 생이별을 한다.
출산 이후 조현병(정신병)이 더욱 악화되어 1946년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1947년 10월 평민이 되면서 자금 지원은 중단되어 생계와 치료에 곤란을 겪게 된다.
덕혜옹주의 입원비는 영친왕이 부담한다.
입원이 장기간 지속되자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 이혼한다.
사방이 가로막힌 정신병원에서 청춘을 흘려보내다 남편에게 버림도 받는다.
1956년 딸 마사에가 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된다
옹주는 1962년 1월26일 38년간의 일본 생활을 끝내고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한다.
대한민국 국적 회복하고 같은 해 2월8일 ‘이덕혜’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이다.
이후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로 옮겨 기거한다.
옹주가 환국하고 나서 10여 년이 지나 덕혜옹주의 전 남편 소 다케유키가 창덕궁 낙선재를 방문한다.
지배인 이공재에게 전 부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을 한다.
"고종의 딸하고 원치도 않는 정략결혼을 강행하고, 끝내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이혼한 당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옹주가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오히려 옛 생각이 나서 병세가 더 악화될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 같은 사람은 면회를 일절 허용치 않으니까 돌아가라." 하고 지배인은 매몰차게 거절해 버린다.
이미 영혼이 떠나버린 그녀의 육신이다.
1989년 4월21일 오전에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낙선재에서 77세로 영면(永眠)에 들어간다.
아득한 유년의 기억만을 남긴 채 파랑새처럼 저 세상으로 훌쩍 날아가 버린 것이다
4월 25일 창덕궁수강재(壽康齋)에서 장조카이자 둘째 오빠 의친왕의 종손이 상주가 되어 영결식을 치른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된다.
조선 마지막 비운의 옹주 "덕혜옹주 결혼기념비' 영빈관터였던 '조선통신사접우비'가 있다.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은 채 비운(悲運)속에서 삶을 살다 역사속으로 사라진 덕혜옹주이다
덕혜옹주는 동요를 짓는데에도 능하였는데,
소학교 재학 시절 지은 동요 한 편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飛行機
南の空から飛んできた
大きなおはねの飛行機が
たくさんビラをまいている
ビラは金ビラ銀ビラ
わたしはそれがほしいけれど
風の神様つれてゆく
どこへ行くかと見ていれば
とんびの所で遊んでいる
비행기
남쪽 하늘에서 날아온
커다란 날개 단 비행기가
삐라를 잔뜩 뿌리고 있다
금색 삐라 은색 삐라
나는 그 삐라가 갖고 싶은데
바람의 신이 데리고 간다
어디로 가는지 보고 있자니
솔개가 있는 데에서 놀고 있다
2023년 12월 2일 무 무 최 정 남
이곳에 대마도 정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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