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追憶 素描
#.1 <개야, 개야 짓지 마라>
지금은 없어진 <강릉극장> 그 앞에 일제시대 그 건물 낡은 건물 신문사 자리는 아직 살아있다. 지나면서 바라보니 많은 음식점들이 들어섰지만, 한 때는 유일한 강릉극장으로 <학생 입장 가>라는 영화가 상영 될 때면 우리들은 좁은 극장 앞 길 가득 줄을 서서 영화 관람의 즐거움에 들뜨곤 했다.
극장 바로 앞에 당시만 해도 강릉에서 제일 큰 <삼문사> 서점이 자리하고 있어 문예반 학생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이젠 그 유명했던 서점도.,극장도 모두 사라져 추억 속에만 자리하고 있다. 바로 그 강릉극장 옆에 간이 골프장(?)이 있고 그 앞 건너편에 작은 이층 일본식 목조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래층은 이발소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이층은 신문사 지국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일보> <세계일보> <중앙일보> <강원일보>등 몇 가지 신문 지국, 총국이 자리 잡고 있어 각 학교 수업이 끝나는 오후가 되면 신문배달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곤 했다.
당시만 해도 각종 신문은 지금 택시부 광장에 자리 잡은 시외버스로 서울서 운송되어 오후에야 강릉에 도착했고, 우리들은 그 신문 뭉치를 찾아들고 다시 신문사로 돌아와 급히 배달 준비를 하곤 했다. 신문을 배달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겪었지만, 지금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 있다. 아마 지금도 남아있는 이층 신문사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는 신문구독자 집이 있었다. 나는 그 집에 신문을 배달할 때 마다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뜰 앞에 묶여있는 사나운 개 때문이었다. 대문을 지나 뜰 앞 까지 가서 정중하게 마루에 신문을 놓고 나와야 했기에 그때 마다 그 무서운 큰 개는(이름도 모르고 종류도 몰랐음) 우렁찬 목소리로 나를 향해 짖었고, 그때마다 내 또래의 주인집 여학생이 뜰 앞까지 나와 개를 붙잡아 주곤했다. 처음 몇 달은 대문 앞에 신문을 던져 놓았으나 바람에 날려가고 비에 젖는 일이 몇 번 생기자 그 여학생은 나에게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신문을 똑똑하게 돌려요! 비에 다 젖고 바람에 날려가고..... 아빠가 신문사 지사장에게 알린데요!” 대문 안에 던져놓았을 때는 사나운 개의 공격을 받지 않아 무난하게 신문배달을 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뜰 앞까지의 배달은 개와의 전쟁이었다 한 동안 그 여학생의 날카로운 시선과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초라한 내 자신을 다시 생각하기도 했다. 대문을 지나 뜰 앞 까지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속으로 중얼 거리곤 했다. -개야, 개야 재발 짓지 마라! 그 아이 또 나온다!- 그러나 솔직히 그 때는 갈 때마다 짖어대는 그 큰 개 보다 나는 내 또래의 그 주인집 날카로운 여학생이 더 무서웠고 자존심이 상했다.
많은 날들이 지난 어느 날 배달을 모두 마치고 신문사로 돌아왔을 때, 내 테이불 위에 예쁘게 포장된 꽤나 큰 포장지 속에 쌓인 이십 여권의 고급 노트와 생전 처음 보는 만년필 한 개를 볼 수 있었다. 예쁜 편지 한 장과 같이. -미안해요. 우리 개가 너무 짖어서.....- 틀림없는 그 큰 개가 짖어대는 그 집 여학생이란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사춘기인가?
학교를 졸업할 무렵 어느 눈 오는 날, 신문을 배달하다 눈길에 넘어지면서 나는 그 소중한 만년필을 잃어버렸고 그 후 마음이 허전했다. 그 여학생은 지금 나처럼 이렇게 많이 늙었겠지. 길에서 보면 알 아 볼 수도 없을텐데 한번 쯤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2 놀이 터 남대천 모래밭.
학교가 끝나면 우리들은 갈 곳 많지 않았다. 그 중 한곳이 지금 남대천을 가로 지르고 있는 철 길 아래 남대천 모래밭이었다. 그 땐 철길은 일정한 간격을 둔 둥근 시멘트 교각만 우뚝 서 있었다, 일제의 잔재로 아직 기차가 들어오지 않아 우리들은 학교가 끝나면 철길 교각 옆 모래밭에서 편 나누어 씨름을 하면서 땀을 흘렸고, 그 땀을 씻기 위해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냇물로 뛰어들었다. 깊지 않는 맑은 물에 우리들은 물장구를 치며 잠수를 했다. 그러다 싫증나면 우리들은 버드나무 가지들을 묶어 은어를 때려잡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 철길 아래에는 나무 기둥을 박고 소나무 가지들을 묶어 만든 보(堡)가 있어 지금 중앙고등학교(옛 농고)쪽으로 수로를 만들어 농업용 물을 흘러 보내고 있어 물이 맴도는 보 밑에는 은어들이 상류로 오르기 위해 많이 모여 들었다. 堡 아래는 물이 얕아 우리들은 발목 조금 넘는로 맑은 시냇물을 뛰어다니며 은어를 때려 잡았다. 무척 신나는 놀이었다 . 힘이 빠지면 다시 하얀 모래불로 나와 신고 온 검정 고무신을 자동차를 들어 모래 굴을 빠져나가도 언덕길로 고무신 자동차를 밀며 하루를 지냈다.
얼마나 많은 날들이 지났을까? 6.25를 지나고 중학교 진학과 동시에 우리들은 지금 남대천 다리 바로 위쪽에 모래밭에 만들어 놓은(지금은 고수부지 주차장터) 넓지 않은 임시 운동장에서 전교생 아침 조회를 마치고 제방 둑을 따라 옛 동명극장 자리 목조 이층건물 학교로 행진하곤 했다.
<강릉중학교>.그 맞은편에 또한 자리 잡은 <강릉여중>. 우리들은 쉬는 시간 이층에서 서로 손을 흔들고.......그 재미. 호기심. 쏠쏠했다.
#.3 <안목>까지 제방 둑을 뛰어라!
우리들은 모두들 마라톤 선수였다(?) 성남동 골목에서 늦게까지 깡통 차기가 끝나고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 저녁밥을 먹기가 바쁘게 남대천 철길이 시작되는 제방 둑에 하나 둘 모여 들었다. 참 무척이나 놀기를 좋아했던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잠시 또래들이 모이면 우리들은 우르르 모여 제방 둑을 달리기 시작했다. 출발지점에서 안목으로 길게 뻗은 제방 둑을 달리는 마라톤이 시작된다. 남대천을 낀 긴 제방 둑은 안목까지 연결되지 않고 거의 지금의 <동명초등학교>에서 끝났고, 그 곳이 반환점이었다. 중간 낙오자는 제방 둑에 앉아 선두가 오길 기다려 같이 출발점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1등,2등, 3등...... 달리기를 할 때마다 1,2,3,등은 고정되어 있었다. 1등, 아니면 2등이라도 한번 해 보려고 헐떡거리며 뛰었지만.......
어느 날 마라톤에서 행방불명, 한 친구... 우리들은 모두 돌아 왔거니 하고 모두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지만 저녁 늦게까지 집으로 들어오지 않은 친구 집 식구들이 집집을 찾아다니며 녀석의 행방을 물었다. 모두 두 눈을 둥그레 뜨고 행방불명 친구를 찾아 골목길. 제방 둑으로 찾아나갔고 어둠 속을 향해 이름을 부르며 소리를 질렀다.
어두운 제방 둑에서 얼마나 소리를 지르며 녀석을 찾으려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을 때, 안목 쪽 제방 둑에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조그마한 그림자를 발견하고 모두 우르르 달려갔다. “야! 00아! 이게 어떻게 된거냐?” “너, 웬 일이냐?” “돌, 돌에 걸려 넘어졌어! 발목이 아파 뛰지 못하고....걸어오느라고.. 어둠속에서도 녀석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하하하....그것도 모르고...” 우리들은 또 모두 한마디씩 뱉으며 한바탕 웃었다. 이제 그 친구들,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 가끔 제방 둑을 걸을 때 코흘리게 친구들이 떠오른다.
*<강릉가는 길>6호에 발표한 원고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