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 鄧小平(등소평) ]
생애
1904년 8월 22일 쓰촨성[四川省] 출생.
1918년 프랑스로 유학,
1921~1924년 파리에서 공산주의운동에 참여
1927년 광시[廣西]에서 공산당 지하운동에 종사
1933년 반주류였던 마우쩌뚱[毛澤東]을 지지하고, 장정(長征)에 참여.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위원을 지냄
1949년 장강(長江) 도하작전과 난징[南京]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수립에 공을 세움.
1952년 정무원(政務院) 부총리, 1954년 당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 정치국 위원.
1966년 마우쩌뚱과 정치적 노선 차이로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紅衛兵)으로부터 반모주자파 (反毛走資派)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
1973년 3월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됨,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죽자 마우쩌뚱의 추종자인 4인방(四人幇)에 의하여 다시 실권. 1976년 9월 마우쩌뚱사망
1977년 7월 복직.
1981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실용주의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조치들 을 단행하였다. 그의 집권 후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보장, 지방분권적 경제운영, 엘리트 양성, 외국인투자 허용 등으로 중국경제가 크게 성장하였다.
1989년 4월 천안문사건 무력 진압
1989년 11월 장쩌민 총서기에게 주석직을 물려주며 공식 은퇴
1997년 2월 19일 사망했다.
등소평의 정책
등소평의 정치 리더십의 진정한 가치는 비혁명적 정책으로 사회전반에 걸쳐 근본적 변화를 파급시켰으며, 그러한 변화가 자신의 정치적 권위와 맞물리면서 그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상승효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의 무리한 점을 보여주는 일화로는 당시 등소평은 부수상 겸 당총서기 직책에 있었다. 이 때 하북성에서 "1묘에서 벼 1만근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는 믿기 어려운 보고가 올라왔다. 즉 100평방미터 넓이의 논에서 벼 6000㎏을 생산했다는 황당무계한 보고였다. 당시 세계최고기록은 1묘에 1500㎏이었다. 당시 식량난에 허덕이던 중국으로서는 반가운 소식이었기에 등소평은 현지로 내려가 확인을 하였다. 논은 분명히 큰 이삭을 달고, 누렇게 잘 익은 벼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발을 옮겨 놓을 틈조차 없이... 그러나 의심스러운 것은 그렇게 빽빽이 자랐는데 어떻게 햇빛을 고루 받았느냐는 것이었다. 나중에 비서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이러했다. 하도 생산량을 높이라고 몰아치니까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모두 15묘의 논에서 익은 벼를 조금씩 그 논으로 옮겨 심었다는 것이다.
등소평의 등장은 모택동 치하의 중국이 대만을 비롯한 여타의 자본주의 체제에 비해 낙후된 경제력을 보이고, 그로 인해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이 심각한 도전을 받을 위기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등소평은 이러한 이중의 위기, 즉 정통성과 일체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적 인물이었다. 이러한 등소평이「1개의 중심점과 2개의 기본점」, 즉 중국식 사회주의의 방향을 제시하고 실행하던 중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 직면하여 등소평은 1979년 3월30일에 "4항 원칙을 견지하라"는 내용의 사회주의 원칙을 발표하였다. 4항 원칙이란 첫째, 사회주주의 길. 둘째,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셋째, 공산당의 영도 넷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의 사상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등소평의 정치 리더십 원칙의 하나는 쌍백(雙百)운동의 기본정신은 인정하나 그것이 사회주의의 원칙을 부정하고 공산당 영도를 거부하며 급기야 군중운동의 형식으로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발생하는 각종 부작용에 대한 쐐기인 동시에 사회주의 원칙의 강조로 등소평 체제의 정통성 기반을 공고히 하는 수단이며, 4개 현대화의 테두리를 설정함으로써 개혁·개방도 사회주의의 울타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등소평의 리더십의 한계 - 6·4 천안문 사태
11기 3중전회 이래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된 지 10년이 되어갈 무렵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전반적인 경제적 퇴조와 몰락에도 불구하고 중국식 사회주의가 낳은 놀라운 성과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적지 않은 부작용도 수반되기 마련인데 그 시정을 요구하는 동시에 문제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화, 즉 사회주의 정치체제의 변혁을 요구하는 시민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학생과 시민들의 참여는 등소평의 정치 리더십이 한계를 드러낸 시점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등소평 리더십의 딜레마는 생산력의 발전이 정치적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던 그의 예상과는 반대로 생산력의 발전이 오히려 시민운동을 조장하여 정치적인 불안정이 조성되었다는 데 있었다. 즉 경제적 논리로 정치적 문제를 극복하려던 등소평의 중국식 사회주의가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의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1986년 지식인의 민주화 요구 시위와 1989년 6·4천안문 사태로 좌절을 맞은 것이었다.
1989년 6월 4일은 5·4운동 70주년이자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지 꼭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또한 중국사회주의의 정권 수립 40주년이자 등소평의 개혁·개방 실시 10년째로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조자양의 개혁정책이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자 이붕은 정치개혁의 속도를 완만하게 하자는 내용의 건의를 했으며, 원로들은 책임을 물러 당총서기직에서 사퇴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러한 긴장 상황에서 1986년 12월 대규모 학생시위로 실각했던 호요방이 198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이를 계기를 민주화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천안문 사건 이후, 중공당은 대내적으로는 시위세력을 탄압하고 개혁의 속도와 범위를 축소 조정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서방세계의 정치·경제적 제재와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안정에 최우선을 두어 학생 및 지식인 등 민주화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숙청을 개시했다. 이 과정에서 7만 2천여 명의 당원이 제명되었고 25만 6천여 명은 경고 및 징계처분을 받았다. 경제적으로는 치리정돈(治理整頓)의 일환으로 수요억제, 내핍생활 장려, 산업구조 조정, 가격개혁의 잠정적 중단을 실시하여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등 경제적 혼란을 진정시키고 생산성 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서방세계는 중국에 대한 무역금수, 차관금지, 기술협력 제휴 중단 등의 경제적인 제재조치를 취하였다. 1990년 중반에 와서 인플레이션이 완화되었고 국민총생산액은 5%의 성장을 기록하였다. 1990년 1월 이붕은 계엄령 중단을 발표하고 반체제인사를 석방하기 시작했으며, 12월 7일 당중앙은 개혁개방을 계속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이와 같이 안정이 다소 회복되자 서방국들은 중국에 대한 경제제재를 완화하여 중국 국내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천안문 사건은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의 부조화, 후계자의 불확실성이라는 문제를 남긴 채 매듭지어졌다. 비록 천안문 사건이 정부당국에 의하여 무력으로 진압은 되었지만, 이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며 중공당과 인민간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에 이후 중국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의 재발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총론
등소평은 중국공산당 활동과 항일전쟁, 그리고 국공내전에서도 큰 역할을 했고 이것이 그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이러한 사실이 더욱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을지 모르나, 이 보고서에서는 현재 중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실천적 주제를 목적으로 삼고 있기에 주로 70, 80년대의 상황과 등소평의 개혁정책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대중의 운명을 좌우한 일은 역사에 드물지 안다. 그러나 대중의 수가 10억을 넘어 12억이나 될 때 그 지도자의 영향력은 말할 수 없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등소평은 모택동이 사망한 뒤 화국봉을 밀어내고 중국의 최고 실력자로서 18년 남짓 군림해 왔다. 등소평은 모택동과 더불어 1949년에 세운 중국공산당정권을 가장 강력한 사회주의 체제로 만든 정치가이자 전략가였다. 모택동이 명실상부한 제1인자로 장개석 군벌과 일본 제국주의를 상대로 한 싸움을 승리로 이끈 데 비해 등소평은 참모 또는 고위 전략가로서 그를 보좌해 왔다. 그러나 인민공사와 문화대혁명이라는 무리한 정책이나 선동적 책략으로 체제를 강화하려던 모택동이 중국 대륙을 혼란에서 건지지 못한 채 숨을 거둔 뒤 등소평은 모택동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가면서 나라와 인민에게 안정을 안겨 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국토에서 굶주림과 헐벗음에 시달리던 인민들은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등소평이 주도한 개혁, 개방의 성과임은 틀림없다.
등소평의 지도와 지배를 받으면서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성장 잠재력이 큰 나라로 꼽히게 되었다. 만약 중국이 개발을 미루고 교조적 사회주의에 집착해서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모색하지 않았다면 인민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 견해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바로 이 점에서 등소평은 주린 배를 채우지 못했던 수천 만 명의 중국 인민의 추앙을 받고 있다. 이렇듯 등소평은 이념보다는 현실과 실리를 중시하여 100년 간의 쇠퇴기를 걷고 있던 중국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나 "등소평의 사회주의"가 중국에 밝은 빛과 찬란한 꿈만을 준 것은 아니다. 그의 사회주의는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는 크게 기여했지만 당료와 관료의 부정과 부패, 황금 만능주의와 대중의 도덕적 타락이라는 고치기 어려운 병폐를 낳았다. 정부가 고위 관료를 사형시키면서까지 부정부패를 척결하려 했으나 해묵은 뿌리깊은 부패는 뽑힐 줄을 모르고 있다. 지금 중국에는 벼락부자가 1억 명이라는 속설이 있다. 그들은 벤츠 같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호의호식하지만 내륙으로 갈수록 가난의 정도가 심해서 빈부 격차는 미국을 따라가는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 중국에 개혁과 개방을 바람을 불어넣고 새로운 질서를 세웠으며, 중국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등소평은 우리 나라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과 비견할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도 헐벗고 굶주리던 우리 나라를 최소한 먹고 입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집권시기에 많은 민중운동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등소평도 그의 최대의 오점인 천안문 사태를 막지는 못했다. 역사에서 서로 라이벌이 되는 인물(항우-유방, 유비-조조 등등)들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분되는 일이지만, 서로 비슷한 길을 간 인물들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등소평이나 박정희 같은 인물들은 모두 역사의 격동기에 태어나서 변화의 큰 물결을 겪으면서 그 격동기의 한 가운데서 생을 살다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도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지만, 내가 만약에 그러한 혼란기에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등소평이란 거인은 떠났고, 현재 중국은 그의 사후 흔들림 없이 개혁과 개방노선을 걷고 있다. 그러나 그 사회에서 쌓여가고 있는 모순, 특히 기본적 인권을 억누르는 일이 계속된다면 어떤 저항과 혼란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제 중국 지도부의 과제는 등소평의 사회주의가 환부를 도려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일인 것이다.
04 이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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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제출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