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성서신학들을 위한 기준들
베르너 진론트1)
노태성 譯(譯)
대체로 오늘까지 신학과 성서연구의 관계는 어느 순간에도 원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많은 신학자들은 성서연구에 관해, 적어도 신약성서에 한해서는 정통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으며, 오늘날의 신학적 사고를 위해 역사비평적 주석의 결과들을 이용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다른 신학자들과 함께 하는 비판적인 대화를 위해서 그다지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았다. 유럽과 북미의 많은 대학에서 신학 교수들은 계속해서 연구자나 교사와 같은 부류들만을 위한 상아탑의 신학을 전개했고, 그 곳에서 성서학자들과 신학자들의 비판적이고 건설적인 협력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만일 어느 한쪽이 전통적인 경계를 뛰어 넘고자 노력한다면, 그는 기껏해야 상대편으로부터 의심받기 일쑤였고 심하면 비난까지 감수해야 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성서연구가 순수하게 과학적인 수준에서 진행된 반면에 신학은 철학적 사변이나 아니면 교회론적 관심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성서학과 신학 사이의 전통적 구분을 더욱 고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따라서 신학은 주관적이고 고백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보다 학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물론 역사비평적 방법은 신학자들을 위해서 구원선(the life raft)을 제공하였다.
그동안 성서연구에 있어 새로운 각성이 진행되고 있다는 징조들이 점점 증가하였다. 성서연구의 그러한 변화는 신학적 연구를 포함한 다른 분야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아주 다른 자기 이해를 낳게 되었다. 이와 같은 최근의 발표와 회의들은 성서학자들에게는 새로운 개방을 입증하는 것이다.2) 성서학자들은 신학을 재발견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신학 역시 변화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신학은 최근에 더욱 해석학적으로 발전하였다. 다시 말해서 신학은 읽는 방법과 본문이론에 대해 더욱 관심을 기울였고, 그래서 성서연구를 포함해서 본문 번역과 관계 있는 모든 분야를 위한 잠재적인 대화 상대가 되었다. 둘째로, 신학은 성서 안에 있는 신학들의 보다 큰 스펙트럼을 재발견하고 있다.3)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훨씬 더 흥미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신학자들이 성서의 보다 큰 신학적 스펙트럼을 재발견하는 한편4), 성서학자들은 신학자들을 대화상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양쪽 모두가 성서신학의 가능성들에 관해서 한번 더 함께 숙고해 보는 것은 참으로 적절한 일이다.
그러나 “성서신학”이란 용어가 언급되는 순간, 모두가 이것에 대해서 기피하는 듯 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비판적인 학자에게 있어서 성서신학은 역겨운 것으로 보인다. 성서신학이란 종교개혁 이래로 분명한 신앙적 과제를 따라 연구한 성서학자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전개된 변증적 훈련(an apologetic exercise)으로 생각되어져 왔고, 결과적으로 성서신학이란 학문적인 정직성에 있어서 충분히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질 수 없었다. 둘째로, 성서신학은 다양한 성서 본문들이 가지고 있는 가지각색의 신학적 경향들을 통합하고 조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때때로 반(反)유대적 성향을 가진 기독교 성서학자들의 이데올로기적인 노력(ideological effort)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성서신학은 일원론(monism)의 기미를 보인다. 셋째로, 성서신학은 종종 교회의 기둥으로서 학문적으로 신학적인 배경들에 관심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런 비난과 관련하여 성서신학은 동시대의 학자들에게 독일학계의 메뉴에만 있는 특별한 요리로 보여졌다. 독일학계에서는 성서신학이 앞으로 목회자가 될 사람들에게 그들의 성서적인 신앙의 선포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성서신학에 반대하는 이러한 입장들 속에서 독자는 왜 내가 성서신학의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하는지 궁금히 여길 것이다. 첫째로 성서신학은 성서본문에 접근하는 많은 비판적인 방법들 가운데 하나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서신학은 이런 본문들의 의미에 대한 중요한 측면을 다루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했고, 어떻게 이스라엘 역사와 나사렛 예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했는지, 또 그러한 믿음에 따라 어떻게 생활하였는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하지만 모든 성서신학이 좋은 신학은 아니며, 모든 성서신학이 알려진 것처럼 성서를 적합하게 읽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내게 있어서 오늘날 성서신학의 적절한 형태로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위한 어떤 기준들을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들에 대한 논의를 위해 가장 좋은 자리가 성서학자들과 신학자들의 간학문적인(interdisciplinary) 대화라고 생각되었다.
성서신학의 잠재성에 대한 토의가 계속되는 가운데 나는 네 단계의 순서를 정하고자 한다. 첫 단계에서 나는 성서신학에 대한 반대 입장들에 대해서 몇 가지를 말할 것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 나는 예전과는 달리 비판적이고 자기비판적인 성서신학자들을 대신해서 해석학에 근거한 주장을 제시할 것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비판적인 성서신학자들을 위한 몇 가지 기준들을 제안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비판적인 성서신학의 잠재성에 대한 어떤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따라서 이 논문은 현존하는 성서신학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다.5) 오히려 나는 성서신학들이 현 시점에서 필요로 하는 기회들에 대해서 건설적으로 재고하도록 소박한 제안을 하고 싶을 따름이다.
1. 성서신학에 반대하는 입장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성서신학에 반대하는 입장들은 많이 있다. 헤이키 레이제넨은 그의 책 ꡔ신약성서 신학을 넘어서ꡕ(Beyond New Testament Theology, 1990)와 그 밖의 여러 글에서 이러한 반대입장들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6)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약성서 신학”은 의식적으로 교회적 신학의 합법적 일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보다 넓은 학문적 맥락에서 연구하는 우리들은 그러한 작업(과 신구약성서를 포괄하는 “성서신학”에 대한 꿈)을 포기해야 한다. 보다 엄밀히 말해서, “신약성서 신학”은 이러한 맥락에서 두 가지 다른 작업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첫째로 초기 유대교의 상황에서 발전한 “초대 기독교 사상사”(또는 신학)이고, 둘째는 철학적/신학적인 “신약성서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신약성서가 우리의 역사와 현재 생활에 끼친 영향에 대한 성찰이다.(xviii)
레이제넨은 인간의 마음이 두 단계로 이 두 가지 일에 관여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가지 일은 구별되어져야 하며(그것은 변증적인 해석학자들의 주장보다도 더 가능성이 있다) 각각의 단계들에서 얻어진 결과들을 서로 이용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라고 한다(ibid).
레이제넨은 신약성서 신학의 역사에 대한 보고에서 자신이 공감하는 부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즉 성서학이 가블러(Johann Philipp Gabler)와 브레데(William Wrede)를 따랐었다면, 성서학은 잘 발전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두 학자는 모두 성서본문의 역사적 읽기와 신학적 읽기를 분명히 구별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레이제넨은 “신약성서는 신학 문서가 아니라 종교 문서이다”(14쪽)라고 말한다. 그는 브레데의 사상을 따랐기 때문에, 그의 전반적인 관심은 성서본문에 대한 학문적 읽기에 교회 또는 교리적 기준들을 도입시키려는 시도들에 반대해서, 성서의 역사비평적 연구의 필요성을 변호하는 것이다. 그는 가장 확고한 과학의 원칙들을 고수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반대한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의 엄격한 원칙이 없이는 종교에 대한 연구가 우리 시대의 서방 학문제도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확신한다. 레이제넨의 전반적인 관심은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학문적인 읽기, 즉 역사적인 읽기 이외의 다른 어떤 형태의 읽기방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레에제넨은 불트만의 ꡔ신약성서 신학ꡕ(Theology of the New Testament)7)처럼 신약성서의 신학적 내용을 통일된 형태로 종합하려는 노력에 유감을 표한다: “규범에 대한 문제는 물론 통일성에 대한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57쪽). 최근의 독일 신약성서 신학계에 대한 레이제넨의 긴 설명은, 정확한 성서학을 위해서 필요한 학문적인 기준들을 어긴 사례들을 길게 열거한 것 같다. 그러므로 독일에서 발생한 혼돈처럼 성서학에 대한 반대 입장은 불행하게도 더 이상 독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레이제넨에 따르면 이러한 혼돈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역사적 작업을 신학적 작업으로부터 분명하게 분리시키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은 “아직까지 오직 과제로서만 선포되었을 따름이다. 그것도 극히 소수에 의해.”(p.74) 레이제넨은 이처럼 역사적 작업과 신학적 작업을 분리시키려 했던 학자들로서 스탠달(Krister Stendahl), 로빈슨(James M. Robinson), 몰간(Robert Morgan), 베르거(Klaus Berger) 등의 공헌들을 간략하게 정리한다. 계몽주의시대 이후의 성서학에 대한 조사 끝에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금세기에 우리는 1897년 초에 브레데가 예상했던 초대 기독교 종교와 신학의 역사를 생산하지 못했다.”(89쪽)
레이제넨은 자신의 작업목표에 관한 제안에서 성서학의 지평을 보편화하기를 원한다: “오늘날 성서연구(또는 어느 다른 분야)를 위한 진정으로 타당한 지평은 인류 전체이다.”(96쪽)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말한다.
지금 기독교 교회들과 그 구성원들은 인류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그들은 내가 계획한 종류의 연구를 사용할 잠재적인 사용자들에 속한다.... 나의 요점은 간단히 말해서 종종 권위주의적이고 선험적인 방법으로 인정받고 있는 교회들의 전통적인 관심들이 종합을 위해서 방향제시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교회적인 종합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하며, 신앙과 세계관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든지 이해되는 실마리를 주어야 한다. 만일, 전통적인 조직신학과 교회 지도자들이(또는 평신도들이) 그러한 학문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학문의 수혜자들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96-97쪽)
그러므로 레이제넨은 성서 해석에 끼여들 수 있는 교회적 침입에 반대하여 싸운다. 성서 해석을 안내하는 관점들은 성서학으로부터만 나와야지 그 성서본문을 교회가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지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실제적인 사용자들이 레이제넨의 방법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곳에서 보다 더 적절한 잠재적 사용자들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다.
성서학의 학문성을 보존하는 데 있어서 그의 시도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한편으로 그는 신약성서 주석을 교회의 아전인수격인 해석으로부터 해방시키기를 바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서해석가들의 가장 큰 그룹, 즉 기독교 교회들과 유대교 공동체들의 구성원들의 필요성을 기꺼이 무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서의 실제적인 독자들과 성서의 실제적이고 가능한 사용법을 숙고하는 신학자들과 함께 비판적인 대화를 추구하는 대신, 그는 스스로를 학문의 상아탑에 가두어 놓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날 성서연구가 위기에 처했으며, 보다 더 분명한 목적과 방법론을 필요로 한다는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또한 다른 성서학자들은 역사비평적인 기초들에 근거한 “성서주석” 장르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다.8) 그러나 레이제넨의 주장, 즉 “비정경적 문학, 성서의 영향에 대한 역사, 역사적인 주제로부터 신학적인 주제로 옮겨가 현실화시키는 문제에 대하여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98쪽)는 주장은 오늘날 성서학의 기능을 어떻게 정의 내릴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충분한 해결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서 읽기에 대한 관심은 확실히 교회들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성서를 역사적인 문서로서 관심 갖는 것 역시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이런 본문들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가 아니다. 레이제넨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서와 초대 기독교의 관련된 본문들에 관해서 믿을만한 정보를 요구하고 있지만, 그들은 또한 그들의 질문들과 가능한 답변들을 교회와 결부시키는 교회적(권위주의적) 연관 없이 이 본문들을 신학적으로 읽을 수 있는 가능성들에 관해서도 더욱 잘 알 수 있기를 원한다. 교회의 갱신은 종종 성서해석자들이 당시의 지배적인 교회의 관심들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질문들을 갖고 성서 본문에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요점은 성서의 역사적 연구가 그 본문에 대한 합법적이고 필요한 접근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유일하게 합법적인 접근인지 아닌지, 그리고 성서에 대한 순수하게 역사 비평적인 접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필연적으로 교리적인 읽기(a dogmatic reading) 밖에 없는지 아닌지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그의 관점이 그가 말하는 성서해석에 있어서 학문적인 관심들에 너무 제한되는 것인지 아닌지를 물어야 한다. 읽기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는 교회적인 맥락에서 뿐만이 아니라 학문적인 맥락에서도, 심지어는 역사 비평적 독해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각에서 레이제넨이 결코 본문의 진정성(textuality of texts)과 그것이 타당한 성서 읽기 전략의 발전으로부터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해서 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결코 읽기의 과정(process of reading)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성서 본문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역사비평적 주석가 뿐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그는 “신약성서에서의 통일성과 다양성에 관한 질문은 근본적으로 현실화시키는 신학(actualizing theology), 즉 비판적인 작업의 두 번째 단계에 속하며, 바로 이 단계에서 우리는 현시대의 기독교의 문제들을 숙고한다”(103쪽)고 주장한다.
레이제넨은 “단지 성서학자가 신학자적인 자세를 포기할 때, 다른 관점들로부터 떠 오르는 사고들을 위한 충분한 여지를 얻게 될 것이다.”(108쪽) 라고 결론 내린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성서 읽기는 오직 신학적인 사고들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에만 비로소 그 본래의 목적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다음에 곧 확인하게 될 것이지만, 성서해석의 작업에서 신학적인 읽기를 제거하는 것은 비판적인 성서해석의 전체적인 과제의 타당성을 위태롭게 만들 것이다.
레이제넨은 성서해석에 있어서 잘못된 신학적 전제들, 예를 들어 무비판적이거나 완전히 권위주의적인 교리의 올가미와 신앙이 요구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원한다. 게다가 그는 독자를 위해서 주제의 통일성이라는 잘못된 개념들로부터 성서본문들의 통전성(integrity)을 보호하기를 원한다. 비판적으로 작업하는 신학자들과 자기비판적인 모든 신학자들은 여기에서 레이제넨에게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성서연구의 이상적인 상황이 두 종류의 해석, 즉 역사적 해석과 현실화시키는 해석의 두 가지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하는 데(108쪽)까지만 방법론적으로 동의한다. 역사적 연구가 현실화시키는 어떤 형태 없이 가능한 때는 언제일까? 오히려 더 급박한 질문은 무엇이 포괄적인 이해를 구성하며, 무엇이 성서본문에 대한 부분적 읽기를 구성하는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신학적 읽기(theological reading)와 역사적 읽기(historical reading) 모두는 성서본문을 보다 더 타당하고 포괄적으로 읽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이지만, 오직 부분적인 읽기이다. 포괄적인 성서 읽기를 위해서는 다른 여러 가지의 읽기 방법들, 예를 들어 문학적인 읽기, 정치적인 읽기, 미학적인 읽기, 여성해방주의적 읽기, 해방론적인 읽기 등을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초대 기독교 사상사에 대한 레이제넨의 프로그램은 물론 초대 기독교 본문들에 대한 많은 합법적인 접근들 가운데 하나로 환영받아야 한다. 특히 “사상은 그것 자체의 한 단어로 고립되어서는 안된다.”(121쪽)는 그의 조건은 일리가 있다.9) “종교적인 사상과 구체적으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개인과 집단의 경험들과의 연결은 매우 신중하게 다뤄져야 한다. 초대 기독교 사상의 태동과 발전은 전통, 경험 그리고 해석 사이의 상호작용으로서 설명되어야만 한다”(ibid). 신약성서 연구에 대한 현재의 상태 가운데, 레이제넨은 “자료의 주제에 따른 구성”을 선호하는데, 그는 “종말론이 가장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고 본다(ibid). 그러나 비록 최근에 그가 신약성서 본문들에 대한 다른 접근방법들의 합법성을 강조했고, 어떤 특별한 접근방법을 절대화시키는 것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가 어떤 종류의 현상학을 선호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그의 책에 제대로 설명되어 있지 않다.10)
초대 기독교의 종교사에 관한 레이제넨의 계획은 이미 언급된 것처럼 합법적이고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신구약 성서 본문에 대한 신학적 읽기를 포함하는 더 완전한 성서해석이라는 똑같이 필요한 작업을 대치시킨 것인가?
2. 새로운 성서신학들의 필요성
1) 성서본문은 성서신학들을 필요로 한다
과거 몇 십년 동안 해석학, 문헌비평, 그리고 본문의 언어학에 대한 논의가 성서 본문에 대한 순전히 역사적인 탐구라는 좁은 한계를 뛰어넘어 본문 해석의 지평을 확대시켰다. 물론 역사비평은 성서해석을 모든 외적인 족쇄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획기적인 업적을 이루었고, 이로 인해 모든 다른 접근방법들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새롭게 획득한 자유 때문에 히브리성서와 신약성서의 본문들에 접근하는 방법들의 다양함은 성서해석을 풍부하게 할 것이기 때문에 환영받게 되었다. 성서본문을 승리주의적이거나 교리적으로 읽는 것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하는 것(레이제넨은 이것에 전혀 공헌하지 않았다)은 이제 성서본문을 본문으로서 새롭고 포괄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장애물들을 제거하였다. 게다가 이런 관점에서 나는 성서본문들과 실제적인 독자들과의 비판적인 대화는 타당한 성서학에 필요한 차원인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다른 곳에서 좀 더 상세히 보여주고자 노력했던 것처럼, 성서본문은 우선적으로 본문으로서 생각되어져야 한다. 즉 성서본문은 의미전달의 단위들(communicative units)로서 독자들에게 그 잠재적 의미를 열어 놓는다.11) 그러므로 성서해석은 어느 특정한 읽기 방법의 가능성과 한계들을 더욱 적절하게 평가하기 위해서 읽기에 관해 계속되는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문헌비평, 독자-반응 비평, 미학적 효과 이론, 형식주의,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본문 해석학 등과 같은 읽기 이론들의 많은 공헌들을 성서학자들과 신학자들도 연구하고 그것들의 독특한 가능성들과 한계들의 관점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읽기라는 구체적 행위는 읽기의 어떤 장르(genres)의 도움을 받게 된다. 이러한 읽기 유형들은 독자들이 본문을 읽을 때 그 본문으로 하여금 특정한 의미전달의 관점을 개방하는 경우에만 적절히 고려되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특별한 본문 장르(text genres)는 특별한 읽기 유형(reading genres)을 요구한다. 물론, 우리는 모든 종류의 읽기 유형을 가지고 어떤 성서본문에 접근하기를 원한다. 독자가 그렇게 하려는 것을 방해할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내게 보다 더 복잡한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떤 읽기 장르가 어떤 특정한 본문을 그 독자에게 그 본문자체의 의미전달의 잠재성을 가능한 한 많이 열어 놓는가? 궁극적으로 성서해석은 어떤 성서 본문이 의미를 전달하는 도전에 대한 응답의 문제이며, 책임성의 문제이다. 오늘날 이 의미 전달의 도전이 우리를 향해 있다. 우리가 어떤 해석자들의 공동체로부터 나오든, 그리고 아무리 많은 읽기 전승들과 함께 하든간에 말이다. 우리가 여전히 성서 본문을 읽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흥미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트레이시(David Tracy)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가 성서 본문들을 “고전”(classic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12) 다시 말해서, 성서본문들을 수용하는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성서본문은 새롭고 여전히 대두하는 맥락 속에서 이런 본문들의 의미를 더욱 이해하도록 해 준다.
나는 성서신학에 대한 문제가 성서본문에 대한 외부적인 기대들로부터 발생할 뿐만 아니라, 성서 본문 자체에서부터 나오는 언어적인 필요로서 읽는 행위 가운데 첫째로 가장 중요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성서 경전의 편집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대부분의 이러한 본문들은 복잡하게 상호 연결된 관계, 즉 사람들끼리의 관계,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 그들의 우주와의 관계, 그리고 개인들과 그들 자신의, 내부의 자아들과의 관계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다룬다. 따라서 이런 주제의 현상을 어떤 방향에서 접근하든간에, 신학적 차원을 포함하지 않는 읽기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성서본문에 대한 신학적인 차원의 발견은 고백적인(에큐메니칼적이라고 알려진) 신학적관점, 예를 들어 피터 스툴막허(Peter Stuhlmacher)와 브리바드 차일즈(Brevard Childs)의 저작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고백적 관점과 혼동 되어서는 안된다.13)
게다가 성서본문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자신들이 이 본문을 만나게 되는 공동체 또는 공동체들의 그물망(조직)에 의해서 형성된 읽기 유형을 가지고 접근한다. 그러므로 보다 더 흥미로운 문제는 사람들이 성서본문을 신학적으로 읽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느 읽기 장르, 즉 물려받거나 다른 방법으로 제시된 읽기 장르 가운데 어느 것이 그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잠재된 것의 신학적 차원을 가장 잘 드러낼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성서 본문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신학적 차원들을 밝힐 필요성은 성서신학들의 발전을 암시한다. 내가 성서신학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한 이유는 이제까지의 성서 본문 읽기가 신학적 의미 전달의 다양성, 다원성, 그리고 때로는 상충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관계성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관한 의미전달을 고찰할 첫번째 요청은 적절한 성서해석 자체의 과정으로부터 등장한다. 어떤 형태로든 성서신학이 요청된다는 것은 적절한 성서해석의 결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성서신학에 대한 또다른 요청이 있는데, 그것은 성서해석에 관심 있는 조직신학으로부터 나온다.
2) 성서신학들에 대한 신학적 필요성
신학은 항상 성서본문에 관한 학문보다 위에 있으며 결코 중요성에서 뒤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신학을 각각 어떻게 정의 내리느냐에 달렸다. 레이제넨에게 있어서는 신학이 매우 협소하게 정의 내려져, 교회의 시녀로 이해된 것 같다. 그는 비(非)교의적이고 비(非)고백적인 조직신학, 즉 이 세계의 다른 문화들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관해서, 또한 본문해석의 적절한 방법들에 관한 지구적인 탐구에 관해서 열려진 대화에 온전히 참여하는 비교의적이며 비고백적인 조직신학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이런 (비교의적이며 비고백적인 조직) 신학이야말로 오늘날 성서신학들의 가능성에 대해 대단한 흥미를 보여 준다.
트레이시의 입장을 따라, 우리가 신학을 정의함에 있어서 기독교 전통의 해석과 지금 세계의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들에 대한 해석 사이의 상호 비판적인 상호관계로서 신학을 정의한다면, 우리는 기독교 전통들의 본문을 해석하는 일에 전념해야 하는 일이 시급히 요청된다. 또한 한스 프라이(Hans Frei)와 조지 린드백(George A. Lindbeck)을 따라, 우리가 신학을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대한 내적인 기독교의 성찰로서 정의 내린다면, 우리는 성서해석에 대해 전념해야 할 책임을 절실히 느껴야 한다.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신학 방법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신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기독교 신학을 하기를 원한다면 성서해석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신학자들은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달리한다: (1) 그들의 성서 해석의 결과들을 지지하기 위해서 어떤 토론(forum)의 장을 원하는가? (2) 이러한 성서 읽기들과 관련하여 어떤 다른 해석 방향들과 관련시켜야 하는가?14)
성서해석에 종사해야 할 신학적인 필요성에 대한 폭넓은 일치는 성서학자들과 조직신학자들 사이에 상호 비판적이며 건설적인 협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협력은 동일함을 확인하는 작업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주석가와 신학자는 오늘날 성서본문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건설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모두 필요하다. 최근에 주석가인 클랜스 베르거(Klans Berger)는 이런 협력을 위해서 몇 가지 기준들을 제안한 바 있다.15)
베르거는 주장하기를 주석(exegesis)은 그것의 방법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말해지는 청중, 즉 교회” 때문에 신학적인 훈련이라고 말한다(84쪽). 레이제넨처럼 베르거는 성서 해석의 두가지 과제, 즉 주석(exegesis)과 적용(application)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그는 주석을 “특정한 성서 저자의 견해와 목적의 재구성”으로 이해하고, “적용은 현재에 대한 상관성(relevance)으로 이해한다"(84쪽). 그러나 베르거는 레이제넨과는 달리, 그 두 차원(주석과 적용)이 모두 포함되기만 하면 성서해석의 과정이 끝나는 것으로 간주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주석과 신학 모두가 어떤 교회제도에 의해서 성서 해석에 대한 교의적인 통제를 받아들이는 일 없이 교회에 봉사해야 함을 강조한다. 오히려 주석가는 어떤 형태의 교조주의(dogmatism)로부터 성서본문과 그들의 해석을 보호해야만 한다. 여기서 말하는 교조주의에는 주석가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도 포함된다(84-85쪽). 이것은 주석가가 자신의 읽기 방법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에 전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베르거에 따르면 주석가는 신빙성 있는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또한 성서본문 해석상의 논쟁이 일어나는 경우에 평화의 도구를 제공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역사비평적 방법을 연구한다. 베르거에 따르면 주석신학과 조직신학은 모두 신학의 틀 안에서, “묘사적 학문” (descriptive disciplines), 즉 그것들은 스스로를 계시나 예언으로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묘사적 훈련으로 이해된다(88쪽). 그 대신에 주석신학과 조직신학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 위한 시도들로 묘사이며 성찰이다: “왜냐하면 묘사는 다양한 성서신학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할 뿐, 그들의 규범성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기 때문이다”(89쪽). 따라서 베르거는 조직신학자들로 하여금 주석가들과 함께 협력하여 성서본문들이 야기하는 많은 가능한 신학들을 성찰하고, 이런 다양한 신학들을 비교하고 토의하도록 용기를 북돋아준다. 레이제넨과는 달리, 베르거는 주석가들과 조직신학자들의 상호 비판적인 협력을 성서본문을 보다 더 잘 이해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베르거는 많은 성서신학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데 대해서 망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초대교회의 지혜, 즉 복음들 사이에 어떤 조화를 만들어 내려는 일 없이 신약성서를 편집한 초대 교회의 지혜를 상기시킨다: “(초대교회의 지혜는) 사실상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근한 입장들을 나란히 병렬시켜 놓았다. 그리고 처음부터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이스라엘에 관해서도 기독교인들에게 기대되어 졌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처음 사랑으로 존재하도록 허락되었다. 기독교의 편협된 비관용적 역사는 이것이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지를 보여준다. 주석적인 신학들의 현실은 이 과제가 시작조차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90쪽).
이제까지의 우리의 토론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과 교회의 종교적 전통들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상태에서 인간의 하나님 경험을 성찰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이 두 전통이 많은 다른 입장들과 함께 유일신론적 운동을 입증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관한 논의는, 이 논의가 여러 성서학자들, 특히 유대교 학자들과 비판적인 대화를 통해 수정될 수 있는 한, 아직 이데올로기적인 태도나 교회의 교조주의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견지에서 최근에 히브리 성서 주석가들 가운데 이스라엘에서 유일신론의 등장에 관해 토론을 전개한 것은 성서신학의 연구에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16) 만일에 야훼 신앙(Yahwism)이 오래동안 생각되어 왔던 것처럼 포로기 이전의 현상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기간 동안 강화된 점진적인 과정의 결과라면, 성서신학들의 결과로서 신학적 해석의 새로운 발전적 모델(developmental model)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타이센(Gerd Theissen)의 진화적인 패러다임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17) 오히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경의 본문들 안과 밖의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유일신론적 운동의 발전과 그 서로 다른 측면들과 단계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18) 신학자들은 자연스럽게 이 운동을 반성하고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발전과 변혁 뿐 아니라, 그 영적 주도권과 도전들, 함축들에 관해 토론하고 싶어한다.19)
이 문제와 관련하여 두 가지 방법이 논의되는데, 역사-발생론적(historical-genetic) 방법과 조직-개념적인(systematic-conceptual) 방법이 그것이다. 전자의 장점은 개방적이며 역동적인 성격에 있으며, 후자의 단점은 하나로 통합하는 경향에 있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조직화의 노력이 계속해서 다른 조직화의 노력들과 역사적 발생론적인 노력들로부터 수정을 받으려는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는 한, 나는 그것이 시도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찾아볼 수 없다. 확실히 우리는 성서 본문을 읽는데서 생겨나는 다양한 신학적 차원을 이해하기 위한 모든 비판적 노력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성서의 신학들에 접근하는데 있어서 보다 더 폭넓은 발생학적인 접근은, 잘 알려진 개념적 범주, 예를 들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에 관한 부르심과 응답,20) 약속과 성취, 율법과 복음과 같은 범주들 보다 성서 본문 안에 있는 신학적인 화두들에 대해 더욱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말씀의 산학에 대한 배타적인 관심조차도 성서 본문 속에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대한 중요한 특징들을 놓칠 수 있다.21) 이런 성서의 개념적인 읽기 방법들은 항상 어떤 고백적인 관점이나 신앙적 관점에 의해 미리 그 방향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본문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다른 학문들과 관련되어 읽을 때 얻을 수 있는 다른 신학적 관점들을 얻을 수 없다. 신약성서에 대한 성서신학을 생산하려는 스툴막허(Peter Stuhlmacher)의 최근 시도는 그렇게 좁은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의 관점을 정의한 하나의 본보기이다.22)
기독교인들의 고백적인 읽기 역시 매우 종종 히브리성서에 관하여 어떤 경도된 입장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루돌프 불트만의 견해, 즉 구약성서는 단지 간접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반면에, 신약성서는 직접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견해는 신앙고백적으로 이루어진 성서신학이 어떻게 성서 안에 있는 다른 신학들을 놓치는 위험에 놓이게 되는가를 보여 주는 한 예이다.23) 이처럼 성서본문을 환원주의적으로 읽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신학자들과 주석가들은 성서본문을 점점 더 잘 읽도록 촉진하기 위해 그들의 읽는 방법을 개방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간본문 읽기(intertextual reading)는 해석자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에 특별한 도움이 될 것이다.24)
지금까지 신학적 해석은 성서본문에 온전하게 접근하려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독자의 종교관, 즉 성서를 정경으로서 보거나, 아니면 성서적 신앙으로 보든가 하는 종교관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 졌다. 따라서 나는 스툴막허의 “일치의 해석학”(hermeneutics of agreement),25) 즉 성서본문의 메시지에 대한 일치의 해석학은 내가 제안하려는 비판적 성서신학의 출발점으로서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로버트 몰간(Robert Morgan)이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앙관에 의해 성경을 정경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러한 본문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일에 전념하기를 원할 것이다.26) 그러나 나는 스툴막허에 반대해서, 교회 밖에서도 성서의 신학적인 해석의 합법성과 가능성을 옹호하고자 한다.
몰간은 종교이론과 역사이론에서 성서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의 비판적인 근거를 요구하였다.27)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본문해석의 이론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이론은 본문의 다양성에 주의하여 성서해석을 이들 본문의 신학적 차원에 대해 다시 고려할 수 있도록 하며, 주석가들로 하여금 본문에 대한 단순한 역사적 혹은 문학적 특징들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벗어나 비판적 신학이라는 커다란 과제 안에서 더욱 온전한 역할을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28) 그러므로 성서학자들과 조직신학자들 모두는 비판적인 협력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대안적 양식들을 제안할 가능성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협력은 앞으로 규범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는 “후보자들”을 제안할 수 있으나, 그것은 특정한 종교 공동체 안에서의 규범적인 사고들의 실제적인 과정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3. 새로운 성서신학들을 위한 기준들
앞에서 논의된 것들을 토대로 나는 오늘날 성서신학들을 발전시키기 위한 비판적인 시도를 위해서 다음의 최소한의 기준들을 토론 내용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1. 성서신학은 본문이 전달하려는 잠재적 의미를 해석하는 보다 큰 과업의 일부분으로서 성서본문의 신학적인 차원을 끌어내려는 목적을 가진 복합 학문적(multidisciplinary) 신학 작업이다.
2. 성서신학은 반드시 어떤 특정한 교회나 종교 공동체/제도에 의해 지배받거나, 어떤 특정한 교리나 신앙에 의해 영감을 받는 교회의 작업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성서신학은 우선적으로 성서를 읽는 행위 가운데 성서 본문 자체의 잠재적 의미에 의해서 자극 받아야 한다.
3. 성서신학은 성서본문 안에 들어 있는 다양한 신학들을 발견하는데 관심 한다. 그러므로 성서신학은 간본문적(intertextual) 탐구를 포함한다.
4. 성서신학은, 히브리 성서와 신약성서의 본문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는 데 대한 그 기존의 개념이나 전통적으로 가정된 개념을 새롭게 검증하는 것을 요구하는 한, 모든 조직신학들에 대해 도전한다.
5. 성서신학은 해석학적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 즉 성서신학이 성서본문의 현재 상태(textuality)와 본문 해석의 필요성 및 함축된 의미들을 존중한다.
6. 성서신학은 많은 신학 활동 가운데 하나로서, 일반적인 학문적 기준들을 충분히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서신학의 결과들은 상호 주관적인 이해와 비판을 받아야만 한다.
7. 성서신학은 성서적 유일신론의 복잡한 발전과 종교적 도전에 있어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모든 비(非)교조주적인 모델들과 패러다임들을 제시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성서신학은 모든 조직화하려는 시도에 대해 끊임없이 이데올로기 비판을 할 것을 요구한다.
8. 성서신학은 그 정의상, 성서의 정경본문을 해석하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성서신학의 관심은 (브리버드 차일즈에 반대하여) 정경본문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29) 오히려 유일신론적 운동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더욱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서들, 즉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성찰에 대한 또다른 운동을 증언하는 다른 문서들과의 비교를 통해 가능하다.
9. 성서 신학은 해석 행위 안에 숨겨져 있거나 아니면 노골적인 이데올로기들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성서본문 자체 안의 이데올로기도 비판한다. 성서신학은 특히 성서본문의 구성과 공인 과정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에 대한 여성해방주의의 비판을 환영한다.30)
10. 성서신학은 성서본문의 다양한 신학적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모든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성서신학은 성서의 모든 사용자들과 상호 비판적인 대화는 추구하는데, 그 가운데에는 성서를 자신들의 종교적 공동체와 신앙 전통 안에서 정경으로 사용하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포함된다.
11. 성서신학은 상호 협력을 필요로 하는 학문으로서, 모든 비판적 이론들의 비판적 도전들, 예를 들어 문학비평, 역사비평, 문화비평, 사회비평 등의 공헌과 비판적 도전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성서신학은 신학 뿐 아니라 신학 이외의 다른 학문분야들과의 비판적이며 열려있는 협력을 위한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4. 성서신학의 잠재성
이런 점에서 성서신학은 보다 광범위한 기독교의 신학적 작업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한 부분일 뿐이다.31) 순서상 두 번째 활동으로서의 신학은 인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한다. 성서신학은 이스라엘의 사회적, 문학적, 종교적 맥락 속에서 유일신론의 발전에 관하여 그런 성찰을 제공하며, 히브리 성서 본문 안에 나타난 특정한 신학 형태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 하나님에 대한 예전적, 역사적, 해방적, 지혜문학적, 섭리론적 성찰에 관한 비판적 성찰과 신약성서의 본문 안의 나사렛 예수의 공생애, 수난,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험에 대한 다양한 성찰들에 관해서도 비판적인 성찰을 제공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신학은 이 우주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에 관한 인간 경험을 성찰하는 보다 더 큰 과제에 봉사한다. 풍성한 해석학적 전통과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들에 대한 여성해방주의적, 철학적, 정치적, 해방주의적, 생태학적, 우주론적 비판을 통해 도움을 받는 성서신학은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에게 하나님의 문제에 대해 다시 문제를 제기할 위험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에 관한 문제 제기에 수반되는 이데올로기적인 부담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우주 속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토론할 수 있으며, 이 과제의 일부분으로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하나님에 관한 성찰, 즉 성서 시대, 성서 이외, 성서 이후시대의 동료 인간들의 하나님에 관한 성찰을 새롭게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 본문 위에 기존의 신학적 이데올로기나 새로운 이도올로기를 덧씌움으로써 또다시 성서본문을 왜곡시킬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른 학문들과 상호협력하는 학문 공동체의 보다 큰 틀 속에서 성서본문들을 다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고백적인 이데올로기들과 우리의 사회적 및 도덕적인 관심들이 항상 옳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증거들을 (성서본문 속에서) 찾는 대신에,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현현을 다시 찾을 수 있다. 기존의 많은 성서신학들이 불만족스럽다는 사실을 핑계로 해서,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성찰의 다양한 줄기들의 발전과 연속성, 불연속성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일을 게을리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심지어 과거 신학자들이 해석학을 “오용(誤用)”했다는 사실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하나님에 관한 질문을 공통의 연구과제로 발전시키는 데 방해가 될 수는 없다32)
하나님에 관한 3천 년 동안의 왜곡, 즉 가부장주의, 신앙고백주의, 식민주의, 권위주의, 그밖의 다른 이데올로기적 왜곡은 매우 실망스러운 유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옛 예언자들과 새 예언자들이 있었으며, 예수처럼 종교적 폭군과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그리고 종교적, 유신론적, 무신론적 체계에 지배를 뛰어 넘어 하나님의 신비스런 임재를 추구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확신한다. 이 신비에 대한 새롭고도 개방적이며, 간학문적이며 자기 비판적인 성찰은 똑같은 자세로 성서에 대해 신학적으로 읽으려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격려와 도전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