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충주 문학기행(1)홍명희를 만나며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든다는 말을 한다. 사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번 여행이 다른 어떤
문학기행보다 소중하고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아무도 다른 생각을 갖지 않을 것이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에 대해서 조사를 하는데는 많은 노력이 요구되었고 그래도 작은 책자로 엮어 낼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이른 아침 예산버스터미널에 모여든 우리들은 참 난감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시까지 약속이 된 버스는 도착을 하지 않았고 관광회사에 전화를 하니 버스는 떠났다고 하는데 8시가 다가와도 집결지에 버스가 도착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버스는 이미 와 있었지만 H아파트 앞 도로에 정차를 한 상태여서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20여분을 그대로 서 있었으니 사무차장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실감한 아침이었다
8시쯤 버스가 예산을 출발을 했는데 사정상 문학기행에 참석하지 못하는 김홍기 회원과 이정준 회원이 우리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 주었는데 참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 사정상 함께 하지 못한 회원들께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번의 여행이 너무
소중했고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든다. 예산을 출발한
버스는 독립기념관에서 거행되는 행사로 인해서 천안으로
가지 못하고 성환과 직산을 통해서 충북으로 들어갔다. 중간에 우리 회원들의 수준 급인 노래실력을 확인 할 수 있었는데 노래방이 열을 받아 멈춰 설 때까지 노래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은 노래방이 생겨나면서 생긴 전국민의 가수화가
가져다 준 선물이라고 생각이 든다. 또한 분위기 우먼 J 부지부장의 재치와 적극적인 참여로 말미암아 서로의 '끼'를
발산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무대였다
백곡저수지 휴게소에서 차 한잔을 마시면서 함께 했고 증평을 거쳐 첫 번 째 목적지인 괴산에 닿았는데 군민들에게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홍명희 생가를 찾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으나 문학기행을 가면서 늘 가지는 현상이었다. 물어 물어서 임꺽정을 쓴 홍명희 생가에 10시 45분에 도착했는데 길옆에 위치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거의 모든 문인들의 생가에 도착했을 때 그러하듯이 실망을 하는 회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현실을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한참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마당에 주검으로 누워있는 개 한 마리를
보며 그 모습이 홍명희 생가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괴산읍 동부리 450-1번지는 홍범식·홍명희·홍기문의
생가인데 홍범식 홍명희의 부친으로 금산군수로 재직 중이던 1910년, 한일합방에 항거하여 자결한 순국지사라 한다.
그의 아들 벽초 홍명희는 그 유명한 ‘임꺽정’의 작가이자 일제시대 최대의 민족운동인 ‘신간회’를 주도했고 민족교육의 상징인 오산학교 교장과 동아일보 편집국장·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리고 손자 홍기문은 저명한 국어학자였다.
이 집은 문공부 발행 ‘문화재대관’에 중요민속자료
146호로 등재되었다가 90년 해제된 바 있는데 거기에는 “안채는 좌우대칭의 평면을 갖는 중부지방식의 대표적인 사대부 집이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전면 5간, 측면 6간인데
형 몸체에 일자형 광채를 한 단 낮게 맞물리는 형상으로 광채의 지붕이 몸채의 아래를 파고들면서 이어진다. 평면은
몸채에 전퇴를 달고 나머지는 맞배집인데 동쪽 날개만 우퇴를 나중에 덧달아낸 듯 하다”고 쓰여 있다고 한다.
우리의 문학에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보훈단체는
벽초에 대한 거부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현재 홍명희 생가는 전면 보수작업에 들어갔는데 우리들은 담장 보수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현재 이 집의 골격은 그대로 남아 있으나 방·마루 천장과 부엌 등 곳곳의 보수가 시급한 실정이었다. 괴산군의 보훈단체에서는 아직도 벽초에 대한 거부감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벽초가 지난 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가한 이후 북에
남아 부수상까지 지낸 이력 때문이다. 그래서 관련 단체에서는 ‘빨갱이’ 라는 멍에를 씌워 생가 보수작업에도 반대, 괴산군에서조차 쉬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97년, 지역유지와 일반인 등 70여명이 ‘홍범식·홍명희생가 보전위원회 괴산모임’을 만들어 군에 생가 매입을 요구했는데 그 때 보훈단체와 여러 차례 부딪혔다”고 말했다. 그 곳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나오는 우리들은 씁쓸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곳을 출발한 우리들은 제월리에는 벽초 홍명희 문학비를 찾으러 가다가 헤매고 여러 번 버스를 세우고 나서야 제월당 입구 주차장에 서 있는 문학비를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은 도로 확포장 공사가 한창인 부분도 있었으나 도로 사정은 대체적으로 양호한 편이었다. 98년 10월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공동위원장 신경림·권희돈·강맑실 등)가 모금활동을 벌여 제월대에 건립했다. 글씨는 서예가 신영복씨가 쓰고 문학비 제작은 조각가 송일상씨가 맡았다고
하는데 이 비문이 그래도 별 탈 없이 남아 있는 것은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와 보훈단체 대표가 비문을 사전에
합의하는 절차를 거쳤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충주에 도착해서 그 곳의 문인중인 한 명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문학비에는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情調)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라는 벽초의 글귀가
쓰여 있다. 이것을 제월대에 세운 이유는 평소 벽초가 괴강이 흐르는 이곳에서 낚시를 즐겼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 28일 찾아간 제월대는 봄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주변의 얕으막한 산과 산책길이 매우 아름다웠다.
홍명희는 1928년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10여년에 걸쳐 소설 '임꺽정'을 집필하였다. 이 '임꺽정'은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로 민족문학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 맑고 인정 두터운 이곳 괴산은
선생의 삶의 자취가 역력한 곳이자 민족 정신이 살아있는
역사의 고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저서로는 수필집
《학창산화 學窓散話》(조선도서, 1926)와 장편소설 〈임꺽정〉(을유문화사, 1948)이 있다.
주차장에서 언덕을 오르자 제월대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고 한 정자에서 옛날 선비가 되기도 했다. 그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줄기를 바라보니 세상의 온갖 시름이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고 몇 시간이라도 더 머물고 싶었으나 일정
상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