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만춘
楊萬春
당나라에 맞서 안시성을 지켜내다
시대출생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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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시성과 성주 양만춘
- 고구려의 군사 전략과 천리장성 주변의 성들
- 당나라 군대의 토산 공격을 무너뜨린 안시성의 결사항전
안시성과 성주 양만춘
양만춘(楊萬春)은 고구려 말기의 무장으로, 연개소문이 집권할 당시 안시성(安市城)의 성주였다. 안시성은 요동 지방에 위치한 토성(土城)으로 요동성(遼東城), 백암성(白巖城), 건안성(建安城) 등과 더불어 당나라의 평양성 진입을 방어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던 군사 요충지였다. 정확한 위치가 고증되어 있지는 않지만, 지금의 중국 요녕성 해성현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 지역이 옛 안시성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양만춘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역사적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양만춘이라는 이름도 직접 거론된 역사서가 드물고, 대부분 '안시성주(安市城主)'로만 표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정(東征)의 공(功)은 안시성에서 패했으니, 그 성주(城主)는 가히 호걸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사기(史記)에 그 성명이 전하지 아니하니 이는 양자(楊子)가 이르기를, "제노(齊魯)의 대신(大臣)이 역사에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라고 함과 다름이 없다. 심히 애석하다. - 《삼국사기》 권 21, 〈고구려본기〉 권 9, 보장왕
그렇다면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어떻게 전해져 내려오는 것일까?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주로 등장하는 것은 조선 시대에 저술된 야사집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李瀷)이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하맹춘(何孟春)의 《여동서록(餘冬序錄)》을 상고해 보니 '안시성장(安市城將)은 곧 양만춘'이라는 기록이 나온다고 전하고 있다. 이 밖에도 《부계기(涪溪記聞)》,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 《열하일기(熱河日記)》 등에 양만춘의 이름이 '楊萬春' 혹은 '梁萬春'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안시성주의 이력을 자세하게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는 단서를 남기고 있다.
당주(唐主)가 백암성을 항복받자 이세적(李世勣)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안시성은 성(城)이 험하고 군사가 정예(精銳)하며, 그 성주는 재능과 용맹이 있어 막리지의 난(亂)에도 성을 지키고 불복하므로 막리지가 이를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맡겼다 한다. (……)했다." - 《삼국사기》 권 21, 〈고구려본기〉 권 9, 보장왕
여기서 막리지란 연개소문을 뜻한다. 양만춘은 연개소문이 수많은 반대파를 물리치고 권력을 잡았을 때에도 안시성주로서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연개소문도 건드릴 수 없을 만큼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또한 위의 설명대로라면 연개소문과 양만춘은 적대적 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당나라가 침입했을 때 두 사람이 연합해 당 태종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군사 전략과 천리장성 주변의 성들
안시성 전투의 승리는 당시 고구려 군대의 군사 전략과 전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잣대이다. 고구려의 군사 전략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고구려의 험한 산세를 이용해 성(城)을 쌓고, 성을 지키면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다. 고구려의 견고한 축성기술은 당대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특히 요동 지방에 자리한 요동성은 고구려의 성들 가운데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비록 당나라 군대와의 혈전에서 함락되기는 했지만, 수나라 대군의 공격에도 끄떡없는 철옹성이었다. 성 자체가 튼튼한 방어막의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성주의 지휘 아래 군사와 백성들이 똘똘 뭉쳐 적의 공격을 물리쳤다.
안시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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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은 요동성을 비롯한 여러 성들 주변으로 천리장성을 쌓아 방어전선을 구축하기도 했다. 천리장성은 영류왕 시절부터 시작해 무려 16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당나라와 고구려의 1차 전쟁이 끝난 646년(보장왕 5)에야 마무리가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영류왕이 백성을 동원해 장성을 쌓았는데, 그 성의 동북쪽은 부여성에서 시작해 동남쪽으로 바다까지 1천여 리가 되었다'라고 한다. 지도상으로 볼 때 천리장성 안쪽으로 신성, 개모성, 백암성,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이 차례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처럼 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 전략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술이 더 뒷받침되어야 했다. 이른바 '청야(淸野) 전술'이라고 불리는 전술이었다. 청야 전술은 원정에 지친 적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기 위해서 모든 전력을 성 안에 집중시키고 주변의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모두 없애는 것이다. 이러한 전술은 특히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기마술과 칼싸움에 능한 중원과 북방 민족들은 고구려의 산악 지형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러한 점을 간파한 고구려는 성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적들의 식량이 바닥날 때까지 활과 돌을 날리며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활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향해 쏠 때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로 성을 중심으로 싸움을 펼치는 고구려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무기였다.
한편 당나라는 수나라의 실패를 교훈 삼아 원정에 앞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대규모의 군대를 움직이는 대신 정예부대를 꾸려 고구려의 청야 전술에 쉽게 지치지 않도록 했다. 또한 고구려의 수성(守城)전에 맞서기 위해 뛰어난 공성(攻城) 무기를 갖추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1차 전쟁에서 고구려의 철옹성들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특히 요동성을 공격할 때는 당 태종이 직접 정예부대를 이끌고 합류해 승부수를 띄웠다. 당 태종은 요수를 건너면서 건너 온 다리를 철거해 군사들의 결심을 굳게 하는 등 승리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당나라 군대는 포차(砲車, 돌을 날려 보내는 무기)를 열 지어 세워 큰 돌을 날려 성벽을 부수고, 충거(衝車, 큰 나무로 쳐서 성벽에 충격을 주는 무기)로 성 위의 집을 쳐서 부수었다. 요동성을 지키던 고구려군은 나무를 쌓아 누각을 만들고 그물을 쳐서 막으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요동성은 12일 만에 당나라에 함락되고 말았다.
이후 백암성까지 당나라의 수중에 들어가자 당 태종은 여세를 몰아 남은 안시성, 건안성, 오골성(烏骨城)을 함락시키고 평양성으로 진군하고자 했다. 당 태종은 당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이세적에게 말했다.
"건안성이 군사가 약하고 군량이 적다 하니, 만약 불의에 나아가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공은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라. 건안성이 떨어지면 안시성은 우리 복중(腹中)에 있는 것이다."
그러고는 안시성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이세적은 안시성을 먼저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다 요동에 있으니, 지금 안시성을 지나서 건안성을 치다가 만일 고구려 사람이 우리의 양도(糧道)를 끊으면 장차 어찌 하오리까? 먼저 안시성을 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안시성이 함락되면 북을 울리며 나아가 건안성을 취할 것입니다."
이미 여러 성이 함락되었지만,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 군대가 여러 성 주변에서 여전히 게릴라 전법으로 당나라 군대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것이 당나라 군대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당나라 군대는 안시성을 먼저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 달리 안시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그것이 당나라의 패배로 이어졌다.
당나라 군대의 토산 공격을 무너뜨린 안시성의 결사항전
당나라 군대의 안시성 공격은 3개월이나 계속되었다. 성 주위를 포위한 채 포차(抛車)와 충거(衝車)를 동원해 하루에 6~7차례 공격했다. 하지만 공격으로 성벽을 부수면 그때마다 번번이 안시성의 고구려 군은 목책(木柵)을 세워 공격을 막아냈다. 안시성이 쉽게 무너지지 않자 화가 난 이세적은 다짐했다.
"안시성이 함락되면 성 안의 남자들을 모두 땅에 파묻겠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안시성의 저항을 더욱 거세게 만들 뿐이었다.
성 주위를 포위한 공성 공격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당나라 군대는 성의 동남쪽에 토산(土山)을 쌓기 시작했다. 흙을 성 높이만큼 쌓아 그 위에서 성 안을 직접 공격하려는 계획이었다. 《삼국사기》, 《동사강목》 등의 기록에 따르면 토산을 쌓는 데 꼬박 2개월의 시간이 걸렸고, 투입된 인력도 5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실로 엄청난 규모의 물량과 인력이 투입된 것이다. 인공적으로 산을 하나 만드는 일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안시성 공략이 쉽지 않자, 당나라 군 내부에서는 작전 변경에 대한 논의가 다시 한 번 시작되었다. 여러 장수가 안시성을 포기하고 더 안쪽에 위치한 오골성(烏骨城)을 공략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오골성의 성주가 늙고 수비가 견고하지 못하니 군사를 이끌고 가 그곳을 먼저 치면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또한 비사성(卑沙城)을 함락한 장량(張亮)의 군대를 불러 함께 치면 오골성뿐만 아니라 주변의 작은 성들을 쉽게 점령한 후 평양성을 곧바로 칠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당 태종이 신임하는 대신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이를 말리고 나섰다. 이미 건안성과 신성(新成)에 진을 치고 있는 고구려 병력이 10만이나 되는데, 만약 당나라 군대가 오골성으로 향하면 고구려 군사들이 뒤를 쫓아와 위험해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당 태종은 장손무기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다시 안시성 공격을 명했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의 계속되는 공격에도 안시성은 끝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당 태종과 당나라 군대는 점점 지쳤다. 그러다 2개월에 걸쳐 쌓아 올린 토산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전투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토산이 갑자기 무너진 원인에 대해 자세히 전해지는 바는 없다. 하지만 원인이 어떤 것이든 엄연한 당나라의 작전 실패였다. 결국 당 태종은 군량이 떨어지기 전에 군대를 철수하기로 했다. 추위가 일찍 찾아오는 요동 지방에서 군대를 더 주둔시키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당나라와 고구려의 첫 번째 전쟁은 끝이 났다. 안시성의 승리, 고구려의 승리였다.
안시성 아래에서 군사들을 시위하고 돌아서니, 성중(城中)에서는 모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성주(城主)가 성에 올라 송별의 예를 하니 당주(唐主)는 그가 끝까지 성을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00필을 주어 그 임금에 대한 충성을 격려했다. - 《삼국사기》 권 21, 〈고구려본기〉 권 9, 보장왕
당 태종은 전쟁에 져서 도망가는 주제에 이처럼 격식을 다 차리고 떠났다.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안시성의 전투는 당나라와 당 태종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안겼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 태종이 안시성 전투 당시 양만춘이 쏜 화살에 맞아 눈을 잃고 그 화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고려의 문신 이색(李穡)이 지은 한시 〈정관음(貞觀吟)〉에 전해지는데, 이 시에는 '검은 꽃이 흰 깃에 떨어질 줄 어찌 알았으랴(那知玄花落白羽)'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검은 꽃은 당 태종의 눈을, 흰 깃은 안시성주가 쏜 화살을 의미한다. 또한 다음 구절에서는 '정공이 죽고 나자 언로가 막혔으니(鄭公已死言路澁), 풍비를 무너뜨렸다가 다시 세운 것이 가소롭다(可笑豐碑蹶復立)'라고 했다. 이는 당나라가 고구려 안시성에서 패한 사실이 구체적으로 역사서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위징과 같은 현자가 없어 자신의 고구려 원정을 말리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라고 한 당 태종을 비웃는 내용이다.
당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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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에서 중국과 맞서 싸워서 이긴 사례는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 그중에서도 안시성 전투의 승리는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다만 당시 안시성주로 알려진 양만춘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정사에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허구의 인물로 단정 지으려는 사람들이 있어 유감이다. 만주를 활동 무대로 전통적으로 무예를 숭상했던 고구려의 승전 기록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묻히기 전에 더 많은 고증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