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급보이옵니다. "
한 마법사가 달려 들어오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통신실에 배속되
어 있던 마법사인데,급한 전갈을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코린트가‥‥‥‥ 코린트가 개입했사옵니다. "
황제는 이 뜻하지 않은소식에 놀라 엉거주춤 일어서며 외쳤다.
"뭣이? 그게 정확한 정보냐?'
"예,지금 트루비아 왕실로부터 긴급 전문이 들어왔사옵니다. 적 타
이탄은 50여 기,문장으로 봤을 때 철십자 기사단 소속의 타이탄으로
추정 된다 하옵니다. "
마법사의 보고를 듣고 있던 황제는 자신이 지금 체통에 어긋나는
행위를하고 있다는 것을깨닫고는슬며시 자리에 앉으며 외쳤다.
"루빈스키!루빈스키 대공을불러 와라?"
황제의 부름을 받은 루빈스키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나타났다.
루빈스키는 제국 안에 퍼져 있던 친크루마 세력을 완전히 소탕해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일 처리는 매우 신속하면서도 한편
으로는 잔인한 것이었기에 죄 없는 피해자도 많이 나타났다. 황태자
를 자주 만났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된 중신도 있었을 정도니까 말
이다.
하지만 사건의 발단이자 그들의 최고 괴수라고 할 수 있는 황태자
는 나쁜 친구들을 사귀지 말라는 황제의 훈시 정도만 듣고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그를 지하 감옥에 집어넣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황제가그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때부터 황태자의 주위에는 그를 감시하는 눈들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루빈스키는 황태자가 지하 감옥에 가기 전까지 도망치지
못하게 황궁에 잡아 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황태자가도망친다거나또 다른 외부의 세력을 포섭해 들어오
면 매우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게 된다. 지금은완전히 힘을 상실했지
만,그래도 엘리안은 황제의 아들인 황태자였기 때문이다.
황태자의 부하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대규모 소탕전이 벌어진 후
루빈스키는 타이탄 연습장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그만큼 부하들
을 훈련시키고,또 청기사가 제대로 된 위력을 내게 만드는 것이 중요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황제의 명에 따라 그를 데려오기 위해 마법사들이 재빨리
움직였고, 이동 마법진을 이용해서 움직였기에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아 황제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서 오게,루빈스키 경. 그래,보고는들었는가?"
"예,폐하. 대충 보고는 들었사옵니다. "
"경의 의견은 어떻소? 구원군을 보내야 할까,아니면 충돌을 피해야
할까?"
"폐하,놈들이 50여 기나 되는 신형 타이탄을 투입했다는 것은 트루
비아 전선에 대한 구원병의 차원을 넘어,아예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
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그리고 트루비아
를 충동질한 본국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하겠
지요."
"그야,그렇겠지. 그렇지 않다면 지금 트루비아가 가지고 있는 타이
탄총수가 20기를 넘지 못하는데,50기나 밀어 넣었을 리가 없겠지."
"폐하,소신의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구원병을 파견해서는 안 된다고
사료되옵니다. 하지만‥‥‥"
"파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고 의견을 말했으면 됐지, 하지만은
또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신의 판단이옵고, 폐하께서는 한 가지 더 생
각하셔야 할 것이 있사옵니다. 물론 군사적인 입장에서는 강력한 코
린트와의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 할 것이옵니다.
하지만,트루비아는본국의 동맹국이옵니다. 그것도본국의 부탁을
받아 타국을 침공한 맹방이옵니다. 그런 그들을 이번에 외면한다면
다음에는 본국의 부탁을 들어 줄 동맹국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
"그렇군. 경의 의견은 잘 알았네. 최후의 선택은 짐이 내리라는 것인
가?"
"예, 하명을 하시옵소서 !"
"으음, 어쩔 수 없구먼. 만약 구원군을 파병하지 않는다면 동맹국들
은 등을 돌릴 것이 분명하겠지?파병하는 것으로 하세. 하지만 코린
트와 정면 충돌을 일으키지 말고, 격퇴하는 수준으로 공격을 끝내는
것이 좋겠지. 알겠나?"
"옛,폐하."
황제의 집무실에서 물러난 루빈스키 대공은 즉시 두 명의 기사를
호출했다. 그들은 중앙 기사단 7전대와 8전대를 책임 지고 있는 쟈므
란 백작과 라테민 백작이었다.
제7,8전대는 전방에 포진중인 다른 전대들과 달리 수도에 주둔하
는 예비 부대의 성격이 강했지만,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이들
이 우선적으로 투입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루빈스키의 호출에 급
히 달려와서는 예를 올렸다.
"명을 받고 달려왔사옵니다, 전하."
"오, 어서들 오게나. 자네들은 지금 탄벤스 공국으로 가야겠
다. 부대원들을 소집하고,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이동 마법진으로 집
합하도록,"
"옛,전하."
"피터슨."
공작의 호명에 피터슨폰 라테민 백작이 즉각답했다.
"옛."
"자네는 다 거느리고 갈 필요 없이 30기만 가져가도록. 나머지 8기
는 수도에 두고 가라,"
제8전대의 경우 아직 편성중인 부대였기에 다른 부대들보다 수가
조금 더 많았다. 만약8전대의 수가 정수인 30기를 훨씬초과하여 40기
를 넘어 버리면그초과분 10기로 제9전대가 편성되게 되는 것이다.
"옛!"
"자네들도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트루비아가 탄벤스를 침공
하는 데 갑자기 코린트가 개입해 왔다. 적의 전투력은 확실하지 않지
만 타이탄 50여 기 정도니까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작
전은 트루비아를 돕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코린트의 기사단과 정면
충돌할 필요 없이, 될 수 있으면 체면만 세워 주고 돌아오면 된다. 알
겠나?"
"옛,전하."
그로부터 20달 후 그들은 마법진을 이용해서 탄벤스 공국으로 날아
가, 탄벤스 공국의 군대와 대치중인 트루비아 군대와 합류했다.
"전세는 어떻습니까?"
자므란의 물음에 시드미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세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코린트의 타이탄을 발견
하자마자,전 군에 후퇴 명령을 내린 후 여기까지 도망쳤으니까 말입
니다. 지금 제각기 후퇴하여 이곳에 도착하고 있는 부대들을 재편성
중입니다. "
"그렇다면 적의 위치는 파악하고 계십니까?"
"그거야 당연하지요."
시드미안은 그들을 지도가 있는 곳으로 안내한 후 설명을 시작했다.
"적은 세 방향에서 진격중입니다. 중앙의 주력 부대,그리고 주력 부
대에서 40킬로 정도 떨어져서 좌우에서 이동중인 좌익과 우익 부대
입니다.
정보에 의하면 코린트의 기사단은 주력 부대와 함께 이동중이라고
합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적들의 이동 속도는 아주
느리기 때문에 오늘이나 내일 오후쯤 되어야 만나 보실 수 있을 겁니
다. "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격멸하는 것이 전투의 정석인데, 왜 저들
의 진격 속도가그렇게 느린 것입씨까?"
"글쎄요. 그 이유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덕분에 별 피해 없이 후
퇴하는 데 성공했으니 다행이라고 봐야겠지요. 놈들의 움직이는 속
도로 미루어 봤을 때, 내일 오후에 여기에 도착하여, 진형을 짜고 준
비를 갖춘다면 아마도 모래쯤 되어야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질 것이
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휴식이나좀 취해 두십시오."
"알겠습니다, 시드미안 경."
오랜 휴가를 끝낸 아르티어스는 또다시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들인지 원수인지, 요즘 들어서는 분간이 잘 가지 않지만,
하여튼 그 망나니의 마수에 걸려서 호된 경험을 치르는중이었다
"수고했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잘 되어 가는 거야."
"감사합니다, 아르티어스님"
"그래, 파이프 라인 공사는 언제 끝낼 수 있겠나?"
여기저기 공사가 진행중인 현장을 설계 도면과 비교하면서 바라보
던 아르티어스는 한쪽에서 길이 10미터가 넘어 보이는 아주 길면서
도두터워 보이는파이프를 땅에 묻고 있는 것을보며 말했다.
"예, 일주일 정도는 시간을 더 주셔야 하겠습니다. 수도 전체에 거미
줄같이 파이프들을 깔자니까 시간이 예상보다 더 많이 들어가고 있
기 때문입니다. "
"뭐, 일주일이면 그렇게 늦는 것도 아니야. 고생 좀 했겠구먼."
"천만에요. 할 일을 했을뿐입니다. "
아르티어스는 공사 현장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상태
대로 공사가 진행된다면 아마도 반년 이내로 공사를 완료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완료는 될 수 있다면 자신과 아들이
처음 만난 그날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장기인 마법을 이용해서 아들과 자신의 나라
를 발전시킬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치레아 곳곳에
는 이동용 영구 마법진들이 설치되고 있었고,수도 주위에는 거대한
방어 마법진과 함께 상하수도 망까지 마련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올 겨울부터는 따뜻한 물을하루 종일 수도 내의 각 가정
에 공급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도에 사는 시민들은
난방비가 필요 없게 될 테고,그때부터 수도세의 명목으로 세금을 조
금 더 걷는다면 일석이조가 될 것이 분명했다.
아르티어스는 이곳 치레아 공국이 아들의 영토가 되었을 때부터 세
심한 주의를 기울여 아들의 영토를 돌보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아마도 10년 이내에 마도 왕국 알카사스에 버금갈 정도로 마법에 의
한 편의 시설이 잘 갖춰진 나라로 거듭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뭔가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확실히 재미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거의 반 영구적일 정도로오랜 수명을 가지고 있고,또그것이
사용되는 것에 대해 모든 시민들이 찬사를 늘어놓는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자신의 생활에 보탬까지 된다면 더 이상 말할 나
위가 없어지는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그 때문에 재정이 허락하는 한 여러 가지를 틈틈이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아들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기념할 뭔가를 말이다.
"아빠! 여기서 뭐 해요?"
"헤헤헤, 보면 모르겠냐? 너와 나의 소중한 기념품들을 만들고 있
지."
희희낙락하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다크는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말했다.
"수도의 모든 사람들이 왕래하는 중앙로에 거대한 분수대를 만드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요. 여름에 물이 뿜어져 올라가면 아주 시원하게
보일테니까‥‥ 그런데 거기에 만들어 놓은거대한동상은또뭐예
요?"
"뭐긴 뭐겠니?너와나의 동상이지. 흐헤헤‥‥‥‥"
"그딴 거 만든다고 계속 돈을 낭비하실 거예요?가스톤과 카알이 매
일 나한테 와서 투덜거린단 말이에요. 국경에 요새를 건설해야 하는
데 돈이 없다면서 ‥‥‥‥"
"헤헤헤,뭐 그 따위 걸 가지고 그러냐?걱정하지 마라, 만약 적이 쳐
들어오면 내가 내쫓으면 되지. 그런 쓸데없는 것보다는 좀더 우아하
면서도 실용적인 것들을 많이 만드는 편이 좋아?"
"글쎄요‥‥‥‥"
"아,평상시에는그런데 신경토 안 썼으면서 오늘따라 왜 그러냐?"
"그래도 밑에서 투덜거리니까신경이 쓰여서 그러지요."
"그 따위 것은 이 아비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신경 끄라구. 몇 년
만 더 지나면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로 만들어 줄 테니 아무
걱정도하지 말란 말이야 "
"글쎄요‥‥‥‥ 저는그게 더 걱정이 되는데‥‥‥‥"
들개와 까마귀의 밥이 되게 하겠노라
탄벤스 공국은 동쪽으로는 드보레크 산맥을 끼고 있는 그렇
게 크지 않은 국가였다. 드보레크 산맥이 끝나는 부분에 위치한 토리
아 왕국이 알카사스와 코린트, 크라레스와의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것에 비한다면 탄벤스는 그렇게 상업이 잘 발달한 국가는
아니었다.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고 있는 탄벤스 공국은 공왕이 다스리
는 국가다. 공왕이라는 것은 전제 왕권이 발달하기 전의 과
도기적인 국가에서 나타나는 왕이다. 전제 왕권의 왕위가 아들이나
혹은 딸에게 세습되는 데 반하여,공왕의 경우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
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는 것이다.
탄벤스 공국의 경우 세 개의 가문이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 가문에서 돌아가면서 왕이 배출되고 있었는데 이것을 보고 공
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공왕이 다스리는 국가를 보고 공국이
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적인 선출에 의해 탄생되는 왕이 다
스리는 공화국과는찬전히 다른 개념의 국가인 것이다.
탄벤스 공국은 공왕이 다스리는 만큼 전제 왕정보다는 왕권이 떨어
지고 귀족들의 권한이 강했다.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주어지지 않
고, 기득권 층인 귀족들이 그 권세를 장악함으로 인해 대단히 보수적
인 성격이 짙은 국가가 되었다.
귀족들의 경우 될 수 있다면 변화를 싫어했기에,타국에 대한 침략
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재수 없게도과거 약소국으
로 깔봤었던 트루비아의 침략을 당하게 된 것이다.
탄벤스 공국의 군대는 트루비아 군이 침공해 들어오자, 국경 수비
군이 트루비아 침공군을 저지하고 있는 사이 뒤로 후퇴하여 일단 전
력을 정비해야 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부대들이 한곳에 집결을 완료한 후에야 탄
벤스 군은 트루비아 군과 감히 싸을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
단 전력이 정비된 후 탄벤스 군은 트루비아 군의 힘을 알아 보기 위해
간단한 탐색전을 펼쳤었다.
그런데 막상 전투를 해 본 결과 상대방의 군사력이 보통이 넘는다
는 것을 알아 내고는 재빨리 자신들의 맹방인 코린트에 구원병을 요
청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벤스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 철십자 기사 단
장 가가린 후작이다. 그는 철십자 기사단을 거느리고 전선에 도착한
후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체스터 공작은 가가린 후작에게 트루비아 군을 전멸시켜 크라레
스를 자극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고,서서히 트루비아 군을 압
박하여 그냥 국경 밖으로 내쫓으라고 명령을 했었기에 그가 거느린
철십자 기사단도 상당히 수동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그 덕분
에 트루비아 군대는 코린트의 강대한 기사단 앞에서 거의 피해도 입
지 않고 후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흐음‥‥‥‥아직도 후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인가?"
"옛, 각하. 트루비아 군의 진형으로 봤을 때 일전을 벌일 각오인 것
같습니다."
부단장으로부터 모고를들은가가린 후작은잠시 뭔가를궁리했다.
놈들이 과연 무엇을 믿고 일전을 벌일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도대체
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뭔가 속임수가 아닐까? 일전을 하는 듯이 보이면서 실지로 주력 부
대는 뒤로 빠지는 것 말이야. 놈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쪽에서 서
둘러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뭔가 감춰진 내막이 있다고 지레
짐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안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각하."
"그렇다면 놈들에게 이쪽에서 전투를 벌일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리
는 것은 어 떨까?"
"각하, 만약 그것을 공왕이 안다면 우리들의 저의를 의심할지도 모
릅니다."
'맞아,그걸 생각못 했군. 그렇다면 어떻게 한다?"
"일단 위력 제압부터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껏 밀어붙여 버리면
놈들은 그냥 도망칠 겁니다. 그걸 추격 섬멸만 하지 않으면 상관없지
않을까요?"
실질적인 정면 전쟁에서 오는 피해보다 패배하여 도주하는 적을 추
격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피해가 더 크다는 것은 거의 상식에 가까을
정도로 간단한 문제 였다.
철십자 기사단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타이탄까지 보여 주며 은근히
압력을 가했는데토 불구하고 녀석들은 국경을 넘어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꼭 일전을 겨루겠다는 의지를보이고 있었다.
꼭 말로 해서 안 듣는 상대라면 일단 이쪽의 실력을 보여 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가린 후작에게 떠올랐다. 적을 전멸시
키지만 않는다면, 혹은 전멸시킨다고 하더라도 토리아까지 침공해
들어가면서 전쟁을 확대시키지만 않는다면 크라레스는 묵인해 줄 것
이다.
"좋아,부하들에게 전투 준비를 하라고 지시해라,"
"옛,각하."
"천천히 이동하는속셈을모르겠단 말이야. 자네 생각은 어때?"
"글쎄‥‥‥ 혹시 이쪽에서 그냥순순히 물러나주기를원하는것은
아닐까?"
"순순히 물러나주기를 원한다면 저쪽에서 전령이 빨리 물러나지
않는다면 전멸시켜 버리겠다 ' 하는 포고문을 가지고 달려왔겠지."
"그럼 뭐지?혹시 함정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딱히 함정을 만들
만한 것은 없으니까 우리들의 퇴로를 차단할 계획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듀런더러 부하 몇 명을 데리고 가서 퇴로를 확보
하라고 지시를하는 게 좋겠군."
"그게 안전하겠지."
트루비아 군과 크라레스 군이 적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당황하고
있는 사이,탄벤스 공국의 주력 부대는 천천히 이동해 와서는 트루비
아 군과 2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양국
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상대방을 향해 욕설
을 퍼부으며 저마다 부산하게 움직이면서 상대의 됫수가 뭔지를 궁
리했고, 또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며 날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양군은 서서히 이동하여 상대방과의 거리를4킬로 정
도로줄인 후 진형을짜기 시작했다. 탄벤스 공국을 지원하기 위해 파
견된 코린트 군으로서는 타이탄을 숨길 이유가 없었기에, 그것들을
모두 다 밖으로 꺼내어 배치했다. 코린트 쪽으로서야 자신들의-강력
한 타이탄을 상대가 보고, 알아서 도망쳐 줬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라?"
"왜 그래?"
"저거 서른네 대 맞지?"
쟈므란 백작의 물음에, 라테민 백작은 상대방 진형에서 코린트의
타이탄을 찾아서 헤아리기 시작했다. 코린트의 미노바-P2의 경우 탄
벤스 공국이 보유하고 있는 타이탄보다 훨씬 덩치가 컸기에 판별하
기는 쉬웠다.
"맞아,서른네 대야."
"그럼 열여섯 대가 어딘가로 갔다고 보는 게 옳겠군. 안 되겠어. 자
네가 아흡 대를 더 가지고 뒤로 가. 자네가 뒤에서 놈들의 퇴로를 막
아 준다면 든든할 것 같아."
"내가 뒤에서 꽁지 빠지게 막아 주는 동안에 너 혼자 영웅이 되겠다
는 거냐?"
"히히,그럴지도 모르지. 싫다면 내가 뒤로갈까?"
"아니 , 내가 뒤로 가지."
"고마워. 무슨 일이 있으면 빨리 연락해."
쟈므란 백작의 말에 라테민 백작은 빙긋이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잘해 봐라."
라테민 백작은 서둘러서 자신이 지휘하던 8전대에서 아홉 명을 추
린 다음 마법진을 이용해서 부하들이 포진하고 있는 후방으로 가 버
렸다. 그렇게 하여 쟈므란 백작은 8전대의 남은 열 명까지 합한 40기
의 타이탄을 투입해 코린트와의 정면 대결을준비하기 시작했다.
쟈므란 백작은 20기의 타이탄을 퇴로 확보를 위해 30킬로 후방에
배치시킨 후,면밀하게 적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34대 40이라면 그
런 대로 팽팽한 싸움이 될 것이다.
거기에다가 코린트의 경우 탄벤스 공국이 보유한 19기의 타이탄을
믿을수 없는 데 반해서,크라레스의 경우 트루비아가가지고 있는 14
기의 타이탄을 믿을 수 있었다. 근위대 소속의 3기가 트루비아의 수
도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시드미안이 거느리고 있는 14기 중에서 12
기가 카프록시아 급이었기 때문이다.
양국 군대의 전투 진형이 완전히 갖춰지고 나자,관례에 따라 탄벤
스 공국의 전령이 백기를 들고 트루비아 군 진형으로 달려왔다. 전령
은 시드미안이 있는 곳까지 달려와서는 두루마리를 펼쳐 놓고는 거
만한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본국의 영명하신 라미네르 공왕 전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
어, 너희 침략의 무리들이 지금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물러간
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노라! 너희 침략의 무리들
은 목숨이 아까운줄 알면 이곳 탄벤스 영토에서 조용히 물러가라. 그
렇지 않다면 너희들의 시체를 들개와까마귀의 밥이 되게 하겠노라,"
전령의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들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 수작이 빤
히 보였던 것이다.
"헛소리를 하고 있군, 전쟁 준비를 완전히 갖춘 후에 물러가라니,말
이 되나? 만약 어제 밤 정도에 사신을 보내 왔다면 몰라도‥‥‥‥ 후퇴
하면 뒤통수를 치겠다는 말이겠지 "
쟈므란 백작의 말에 시드미안 공작이 덧붙였다.
"그렇지 않다면 탄벤스 지휘관들의 상상력이 부족한 것일 겁니다.
탄벤스를 침공하면서 모든 전투에서 이와 똑같은 보고문을 들었으니 ,
까 말입니다. 아마도 탄벤스에서는 지휘관들에게 포고문에 대한 공
식 책자라도 나눠주는 모양이지요. 어떻게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지,
원‥‥‥‥"
시드미안은 툴툴거리면서 자신의 부하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그
부하는 말을 달려 나가 전령의 백기를 낚아채 그것을 높이 들어올린
다음 꺾어 버렸다. 헛소리하지 말고 전쟁이나하자는표시였다.
"적들이 깃발을 꺾었습니다 "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라미네르 그론티어 공왕은 자신도 눈으로 적
의 기사가 깃발을낚아챈 후 깃대를 꺾어 버리는 것을봤으면서도 짐짓
못본 척하고 있다가,부하가 보고를 올리자 허세를 부리면서 외쳤다.
"이런 천인공노할 녀석들, 이쪽에서 자비를 베푸는데도 그것을 못
알아듣다니. 여봐라!저 극악무도한 놈들에게 맛을보여 줘라,"
공왕의 옆에 서 있던 노 장군이 외쳤다.
"기사단 돌격하라!'
코린트의 기사단은 트루비아의 기사단이 상당히 강하다는 것을 알
기에 탄벤스 공국의 타이탄이 돌격해 들어갈 때,그들을 따라서 돌진
하기 시작했다. 코린트 쪽의 입장에서는 적들에게 호된 맛을 보여 준
후 놈들이 후퇴하기 시작하면 그냥 놔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방
에서도 타이탄을 꺼내 놓기 시작하자 철십자 기사 단장 가가린 후작
은 경악했다. 삼두의 드래곤 문장을 달고 있는 크라레스의 타이탄들
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가가린 후작은 매우
당황했디. 그들은 탄벤스 공국 군대에 코린트의 기사단이 지원 나와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면 승부로 나온 것을 보면 진짜로 한판 해 볼 작정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후퇴할 충분한 시간의 여유를 뒀음에도 아직까지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은,코린트 군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
으로 볼수밖에 없었다.
"젠장! 사정 봐주지 마라, 돌격,!"
가가린 후작은 상대방과 격전을 벌이면서도 매우 당황했다. 상대방
타이탄은 크라레스 중앙 기사단 소속의 7전대와 8전대가 분명했다.
적 타이탄에 그려져 있는 전대 문장을 무시하고 생각한다
고 해도 트라노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5전대부터 8전대까지였다. 그
리고 저 문장들은 7전대와 8전대를 뜻하는 것이었다.
가가린 후작의 머리 속은 급속도로 회전했다. 크라레스 기사단의 1
개 전대는 타이탄 30기였다. 그런데 저 앞에서 돌진해 들어오는 것은
40여 기, 그렇다면 최소한 20기 이상이 이곳에 모습을보이지 않은 것
이다.
적들은 분명 이쪽에 코린트의 기사단이 있다는 것을 알고 덤비는
이상,상황을 예측한 충분한 대비가 있을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포위 공격인가?'
가가린 후작은 후방에서 적의 타이탄이 나타날 가능성을 따져 보기
시작했다. 불안하게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겨우 34기
밖에 안 되는 철십자 기사단을둘로나눈다는 것은자살 행위였다. 그
렇다면 방법은 하나. 정면의 적을 박살 낸 다음 도주하는 적을 뒤쫓지
않고,180도 반전하여 탄벤스 군을 학살하는 크라레스의 별동대를 무
찌르는 것뿐이었다.
'젠장!더럽게걸렸군‥‥‥'
이제 가가린 후작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최소한 눈
앞의 적이라도 박살 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뒤로 포위 공격을
당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황제 폐하로부터 지휘권을 하사받은
이 철십자 기사단이 오늘 전멸 당할 가능성까지 있었던 것이다.
"돌격!황제 폐하께 영광을!"
하지만 이어서 벌어진 대규모 타이탄 전투는 놀랍게도 코린트 기사
단의 압승이었다. 트루비아 연합군 쪽의 주력 부대인 크라레스 기사
단은 대충 하고 끝내려고든 것에 반해서,위기를느긴 코린트의 기사
단은 대충 할 생각은 아예 포기하고 총력전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수십 대의 타이탄들이 고철이 되어 나뒹구는 가운데 가가린 후작은
패퇴하는 크라레스 기사단을 추격하지 않고, 곧장 반전하여 공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적의 별동 부대가 언제 들이닥칠지 알지 못했
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만약 가가린 후작이 뒤의 적을 생각하지 않고, 패퇴하는 크
라레스 기사단을 전멸시키기 위해 추격전을 감행했다면 어떻게 되었
을까? 그랬다면 가가린 후작은 크라레스 군의 퇴로를 지키고 있었던
라테민 백작의 별동대와 패주하던 쟈므란 백작의 양쪽 부대에
게 협공을 당해서 되레 전멸 당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렇듯 전쟁에
있어서 가장 큰 변수를 차지하는 것은 전략도, 전술도 아니고 운
이었다. 그렇기에 예로부터 가장 뛰어난 장수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운이 들어가는 것이다
크라레스 파견군이 대패했다는 보고는 재빨리 각국에 보고되
었다 루빈스키 폰스바시에 대공은 그 급보를 받자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마시고 있던 포도주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와 황제가 2개 전대를 트루비아에 파견했던 궁극적인 이유는 트
루비아의 체면을 살려 주는 것이었을 뿐,승리나 패배,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적당한 수준에서 트루비아와 탄벤스 공국의 체면을 살려 주면서 은
근슬쩍 '후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파견군을 보내 놨
더니 그가 가장 원하지 않던 행위,즉 '정면 대결' 을 펼쳐서는 결국은
패배를 자초했던 것이다.
"이런 제기랄?"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황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뭐라고? 추가적인 파병이 필요하다고?"
"예, 폐하. 원래는 적당한 수준에서 후퇴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사옵니다. 본국이 대패한 이상, 동맹국들이 본국의 능
력을 의심하며 흔들리기 시작할 것이옵니다.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
사옵니다.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여 흔들리는 본국의 위상을 바로 세
워야 하옵니다. 그렇게 큰 승리는 필요 없지만, 어느 정도 '우세한 상
황' 으로 전세를 몰고 가야 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
루빈스키 대공의 말을다들은 황제는 고개를주억거리며 말했다.
"경의 말이 옳구려, 그렇다면 얼마나파병을 하는 것이 좋을까?하지
만꼭 파병을 더 한다고 해서 승리를 거둘수 있을까?'
"승리를 거두도록 해야지요. 아르곤 국경에 주둔중인 제1전대를 투
입하겠사옵니다. 제1전대장인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이라면, 지난 번
전쟁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던 만큼 충분히 임무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이라면 루빈스키 대공의 먼 친척이었다. 루빈
스키는 크로아후작이 젊었을 때 검술을 가르쳐 준 적도 있었기에,그
의 차분한 성품이라든지 꼼꼼하게 일을 처리해 나가는 실력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6년 전 3국 전쟁에서 크로아 후작은 미란에 파견되었던 살
라만더 기사단 부단장의 직분을 훌릉하게 완수해 냈고,또 그에 뒤이
어 벌어진 코린트와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무공을 세웠었다. 그 덕분
에 지금은 후작으로 작위가 한 단계 상승한 상태 였다.
크라레스의 군 지휘부는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분류하고 있는 코
린트와 '잠재적인 위험 지역'으로분류하고 있는 아르곤의 국경에 중
앙 기사단의 최고 정예들로구성된 전대들을배치해 두고 있었다.
코린트는 그렇다고 해도 왜 여태껏 크로노스 교가 통치를 시작한
이래로 타국을 침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아르곤이 '잠재적인 위
험 지역 으로 잡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아르곤의 군사력이 대단히
강력하고,또 그 국력 또한 대단하기에 그렇게 설정된 것이 아닐까 하
고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6년 전 전쟁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크로아 후작이 지휘하는 제1전대와 역시 뛰어난 무훈을 통해 을
라온 린넨 후작이 지휘하는 제2전대. 이들은 만약 큰 사건이 벌어지
게 되면 '안전한 아르곤 국경' 을 부담 없이 이탈하여 그곳에 투입할
수 있는 예비군적인 성격이 짙었다.
물론 이렇게 아르곤을 위험 지역으로 선포해 두면 속사정을 잘 모
르는 적들은 1, 2전대가 아르곤 국경에 꼭 매달려 있어야만 하는 줄
알고 이쪽의 유동 전력에 대해 오판하게 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그리고 1,2전대에는 그 예비군적인 성격 외에도 한가지 중요한 임
무가 더 있었다. 말토리오 산맥 부근의 아르곤과 치레아로 갈수 있는
도로가 위치하고 있는 교통의 요지에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이유는,
최악의 경우 크라레스 제국에 가장 위협이 되는 적으로 발전할 수 있
는 치레아 대공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말토리오를 넘어 진격해 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치레아 대공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1,2전대가 주둔하고 있는
말도른 요새를 통과하지 않는다면 스바시에 공국으로 진격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란군이 말토리오 산맥을곧바로 넘지 않고스바시에 공국
쪽으로 진격한다면 그곳에는 스바시 에 기사단과 제5전대가 주둔하고
있으므로 본국에서 증원군을 파병할 동안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이 분
명했다.
이렇듯,제1,2전대는 크라레스 중앙 기사단의 최고 정예였고 그 목
적에 맞는 위치에 주둔중이었다. 그런 만큼 제1전대를 전장으로 보낸
다면 충분히 막강한 실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렇게 처리하라."
"옛,폐하."
이렇게 해서 탄벤스 공국을 무대로 거대 강대국 간의 제2차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탄벤스 공국에서 벌어진 제2차 전투는 순전히 크라레
스의 자존심과국제적 지위 하락을 염려해서 벌어진 전투였다.
그에 비해 코린트의 로체스터 공작은 가가린 후작으로부터 대승의
보고를 접하자 깊은 한숨을 쉬었다고 전해진다. 이번 전쟁을 대충 끝
내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둬 버린 한
심한 부하 때문에 쏟아져 나온 가슴 아픈 한숨이었다.
이렇게 되면 크라레스가 그냥 순순히 물러날 가능성은 더욱 없어
지기에 로체스터 공작은 추가로 30기의 타이탄을 파병할 수밖에 없
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명령을 어기고 승리를 거둬 버린 멍청한 가가린
후작을 사령관 직에서 박탈하고 대신 은십자 기사단의 부단장인 알
프레드 드 크로데인 후작이 탄벤스 전선의 사령관으로 즉위하게 된
다. 알프레드 드 크로데인 후작은 6년 전에 벌어졌던 3국 전쟁에서
전사한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을 배출한,코린트의 유명한 3대
무가들 중의 하나인 크로데인 가문의 기사로서 대단히 실력이 뛰어
났다.
크로데인 후작은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로체스터 공작에게 불려 가
서 한 시간동안이나잔소리를 들어야 했는데,그 잔소리의 요지를 간
단하게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적당한 수준에서 놈들에게 승리를 맛보게 해 주게나. 본국의 체면
이 있으니 패배는 절대로 안 돼. 일단 치고 받다가 적당한 순간에 슬
쩍 전략적 후퇴를 하란 말이야. 그래야 이놈의 망할 신경전을 끝낼 수
있다구 알겠나?"
다시 불붙은 제국 전쟁
이제 바야흐로 탄벤스 공국에서의 전쟁은 당사국인 탄벤스 공국과
트루비아 왕국을 됫전으로 두고, 코린트와 크라레스의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로 흘러가고 있었다.
증원 부대와 함께 도착한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은 쟈므란 백작과 라
테민 백작에게 상황 보고를 들었다. 대패라고는 하지만 타이탄 전투
직후 적들은 패주하는 쟈므란 백작의 기사단에 대해 추격전을 펼치
지 않았기에,타이탄 부대의 직접적인 피해는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
었다.
대신 후퇴하는 타이탄 부대를 따라 재빨리 전장을 이탈하지 못한
트루비아의 정규군이 입은 피해가 막심했다.
"시드미안 전하."
"예?"
"귀국 군대는 30킬로 뒤쪽으로 좀 빼 주십시오. 이제부터 벌어지게
될 전쟁은 코린트의 타이탄 부대를 상대로 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병이나 기병들은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또, 전쟁중
에 그들까지 신경 쓰면서 싸을 수는 없지요. 이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
"라테민 백작."
"예."
같은 전대장급이라고 해도 그 연륜이나 지위로 봤을 때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다. 특히 아르곤이나 코린트의 국경선에 배치되어 있는
1,2,3,4전대장들은 6년 전 3국 전쟁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했던 매우
노련하면서도 우수한 실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그에 비해 스바시에나 크로나사 서부, 혹은 수도에 주둔하고 있는
5,6,7,8전대는 3국 전쟁 후에 새로 창설되어 배치된 부대들인 만큼
그 지휘관들도 대부분 신출내기들이었다.
물론 그들도 3국 전쟁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독립 부대를 이끈 지
휘관은 아니었던 것이다
"전번 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어떻소?'
"예,26기를 잃었습니다, 각하."
"26기라‥‥‥ 어려운 전투가 되겠군."
한참 고심하고 있던 크로아 후작은 시드미안 공작을 향해 말했다.
"전하,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어쩌면 도움을 드릴 수 없는 지경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보유하고 계신 타이탄 전력만으로 군
대를 보호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예,아직도 10여 기가 남아 있으니 그런 대로충분할 것입니다. "
"좋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기사단과 함께 트루비아 군을 보호
하는 데 치중하십시오."
크로아 후작은 로련한 인물답게 천천히 이동해 오는 적을 삼면에서
포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적들은 천천히 이동해 오면서 이쪽을 압
박해 오고 있었기에 기습 공격을 가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천천히 이동해 오는 적의 주력 부대를 라테민 백작과쟈므란 백작이
각각 지휘하는좌 ·우익 부대가각각서쪽과동쪽을 맡고,크로아후작
이 거느리는주력 부대는 남쪽을 맡는다.
상대는 매우 천천히 이동해 오고 있으니 기습전에 있어서
서로 간의 시간차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크로아 후
작이 북쪽에 대해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적들이 일단 치고 받다가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깨닫게 되면 충분히 도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배려였다.
다음 날 오후,새롭게 코린트 파견군의 사령관이 된 알프레드 드 크
로데인 후작은 정찰조로부터 적의 주력 부대가 30킬로 전방에 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을 보면 전에 트루비아 군이 대패를 했던 전투와 같이 트루비
아 군이 먼저 기다리고 있는 그곳에 탄벤스 공국의 주력 부대가 10킬
로쯤 접근해 들어가서 밤을 지새운 다음,다음 날 아침 무점에 상호간
에 진형을 갖춰 격전을 치르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확실히 서로의 체면이 걸린 싸움이라서 그런지 매우 신사적으로싸
운단 말씀이야. 전번 전쟁에서는 정규전은 거의 없고, 계속 게릴라전
만 펼쳤었는데‥‥‥‥"
"후작각하."
탄벤스 공국의 전령이 급히 말을 달려 오며 크로데인 후작을 찾았
다. 그것을 보고 후작의 경호 기사 한 명이 그쪽으로 달려가 그를 후
작이 있는 곳으로 데려왔다
"무슨 일인가?"
"예, 공왕 전하께옵서 이쯤에서 식사를 하고 다시 진격을 하자고 말
씀하셨사옵니다."
크로데인 후작은 태양을 살짝 바라봤다. 이제 겨우 정오가 조금 넘
었을 뿐이다. 오늘 저녁에 야영하기로 정한 목적지까지 겨우 17킬로
남짓 남았으니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행군을 계속 해도 목적지에 도
착하는 데는 별다른 무리가 없을 듯 생각되었다. 또 내일 아침에 있을
전투를 생각한다면 병사들에게 충분한 식사와 휴식이 필요할 것은
분명했다.
"알겠다. 공왕 전하의 현명하신 판단을 따르겠다고말씀드려라,"
"옛,각하."
탄벤스 군대는 상관의 명령대로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
이나 저녁 식사의 경우 든든한 방어진이 설치되기에 그래도 격식을
갖춘 식사가 장만되어 배급된다. 하지만 이렇듯 점심 때의 휴식을 겸
한 식사는 빵과 고기포,그리고 물만으로 간단하게 넘어가게 되는 것
이다.
적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이 절호의 순간을 놓칠 리 없는 노련한크
로아 후작의 군대는 그때를 노려 기습 공격을 가했다. 서로간에 진형
을 짜고 횐 깃발을 들고 상대를 설득하거나 엄포를 놓기 위한 전령 따
위를 보내야 하는 정식 전투가 아닌 기습 공격인 만큼,크라레스의 64
기나 되는타이탄들이 숨어 있던 곳에서 뛰쳐나와 당황해서 우왕좌
왕하고 있는 적진을 향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진해 들어가기 시작
했다.
"젠장! 모두들 타이탄을 꺼내라! 적 타이탄을 막아라. 탄벤스 군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 줘라,!"
크로데인 후작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기사단뿐이었
다면 재빨리 적이 공격해 오지 않는 북쪽으로 달아나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탄벤스 공국의 군대와 함께 이동중이라는사실이었다.
자신들이 먼저 도망치면 탄벤스 공국의 군대는 맥없이 전멸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만약 공왕이 전사하기라도 한다면 그들을 도
와 주기 위해 파견되었던 코린트 기사단과 그 형편없는 기사단을 동
맹국에 파견해 준 코린트의 명성은 땅바닥에 패대기쳐질 것은 분명
한사실이었다.
"공왕 전하를 피신시켜 !"
삼면에서 육박해 들어오는 적 타이탄들 때문에 탄벤스 공국의 주력
부대는 기병과 보병들이 섞여 우왕좌왕하는 혼란의 극치를 이뤘다.
이 전투에서 크로데인 후작이 지휘하던 코린트의 타이탄 부대는 탄
벤스 공국의 군대가 퇴각하는 것을 지원해 주기 위해 크라레스 군과
본의 아니게 사생결단을 벌였다.
하지만 이런 노럭에도 불구하고코린트 파견군에게 남은 것은 전력
의 반 이상이나 상실한 참패,그리고그 혼란의 극치를 이뤘던 전장의
어느 구석에서 죽어 버렸는지 모르지만 멍청한 공왕의 전사 소식이
었던 것이다.
"대패를 하였다고 하옵니다. "
베르딘 후작 대신에 로체스터 공작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는 마법사
는 붉게 충혈 되기 시작하는 로체스터 공작의 분노에 타오르는 눈동
자와 마주하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거기에다가 '뿌드드득'하는 이빨갈리는 소리와함께 '우지끈'하
며 로체스터 공작이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가 무의식적인 그의 손
아귀 힘에 의해 부서져 나가는 소리까지 함께 들려 오자,마치 자신이
대패를 당하고 보고하는 당사자가 된 듯,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다. 로체스터 공작은 새파랗게 질려서 떨고 있는 마법사를 향해 드디
어 노성을 터뜨렸다.
"이런 멍청한 녀석!그냥 싸우는 척하다가 슬쩍 후퇴하는 것도 못 한
단 말이냐?그 녀석의 목을 당장 잘라 버려?"
베르딘은 기사단이 대패했다는 그 보고를 접하면 로체스터가 발광
을 할 것이 분명했기에 슬그머니 부하에게 팔밀이를 했고,보고서를
대신 들고 온 마법사가 예상대로 경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듯화
를내는로체스터 공작을 바라보며 그 옆에 서 있던 까미유가 말했다.
"전하, 이렇듯 이성을 잃으시면 될 일도 아니 되옵니다. 고정하시옵
소서 , "
로체스터 공작은 다시 붉게 충혈 된 눈동자를 까미유 쪽으로 돌렸
다. 마법사는 잘모르고 있었지만로체스터 공작의 붉게 충혈 된 눈은
오늘의 분노 때문만이 아니라 격심한 픽로감 때문이었다.
이놈의 전쟁이 벌어진 후에 연속적으로 벌어진 대책 회의 때문에
거의 잠을 못 잔 때문이었다.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로체스터 공작의
심기는 이미 폭발 일 보 직전에 와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기름을
붓고 불을 당겼으니 로체스터 공작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 버렸던 것
이다.
"내가 고정하게 됐어? 탄벤스 공국을 도와 주라고 보내면서 꼭 승리
하고 돌아오라는 어려운 주문을 한 것도 아니잖아? 상대의 체면을 세
워 주면서 슬쩍 후퇴하는 그것도 못 한다는 말이야? 그러면서 탄텐스
공국의 공왕까지 전사했단 말이다. 이렇게 되면 본국의 체면이 땅바
닥에 떨어지는 것은 둘째치고,아무 것도 모르는그 병신 같은 놈들은
나를 탄핵해 올 것이 분명한데?"
"한 번 실수를 했다고 해서 뛰어난부하를죽일 수는 없사옵니다. 일
단 사령관 직책의 해임과 동시에 본국으로 소환을 하시옵소서, 그런
다음 투옥해 놓고 나서 천천히 처리를 궁리해 보는 것이 옳을 듯하옵
니다. "
로체스터 공작은부글부글 끓어오르는화를 최대한 억눌렀다. 까미
유의 말대로 변방에서 일어난 작은 잘못을 가지고 부하를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좋아. 경의 의견대로처리하기로하지."
"감사하옵니다, 전하,"
"그래,승리한후 적의 동태는 어떤가?"
"그것이 이상하게 그 여세를 이용해서 몰아붙일 생각을 하지 않고,
국경을 넘어서 퇴각했다고하옵니다."
"승리한 후에 국경을 넘어 퇴각했다고? 이런 괘씸한 놈들‥‥‥ 자기
들만 대승을 거두고 후퇴하면 끝인 줄 알아?당장 국경을 넘어 추격하
여 놈들을 박살내 버려?"
"전하, 그렇게 감정적으로 처리할 사안이 아니옵니다. 어제도 밤을
새우셨지 않사옵니까? 조금 쉬신 후에 다시금 의논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붉게 충혈 된 피로한 눈을 들어 까미유를 바라봤
다. 의지가 되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에
탄벤스 공국에서 전쟁이 벌어진 후 그는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하고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국내외의 사정도 어려운 데다가 정적들의 모략도 막아야 했
고,또 그들의 모략에 대응할수단까지 짜 내다 보니 무지막지하게 피
로와 짜증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믿고 보냈던 부하가 자
신의 믿음을 완전히 배신한 꼴을 연출했으니 그가 이성을 잃은 것도
당연했다.
"경의 말대로 조금 쉬는 것이 좋겠군 두 시간만 자고 올 테니까 대
웅할 작전을 구상해 보게,"
"옛,전하."
방문을 나서면서 로체스터 공작은 투덜거렸다.
"젠장, 예전에 키에리가 존경스럽군.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처리하
면서 정적들까지 억눌렀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두 시간 후 로체스터 공작이 아직도 충혈 된 눈으로 나타났을 때,
까미유는 결정된 사항을 보고했다.
"일단 기사단을 추가로 파병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지금의 군
사력으로는 도저히 적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이옵니다. 아마도 은십
자 기사단에서 타이탄을 30기 정도 빼내어서 보내 준다면 괜찮겠지
요. 그리고 이쯤에서 크라레스와 협상을 통해서 서로 간에 끝을 보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쓸데없이 변방에서 소모전을 펼치고 있을
이유는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
"협상이라‥‥‥‥"
"옛, 녀석들도 이번에 대승을 챙겼으니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것
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옵니다. 놈들도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좋
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좋아, 그렇게 하지. 참, 기사단을 이용해서 무력 시위를 벌이면서
협상을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협상에 동의하지 않으면 전면 전쟁으
로 확대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거야. 그렇게 되면 놈들은 좀
더 많은 것을 양보해 올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30기가 아니라 은십자 기사단 전부를 다 집어넣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무력 시위는 규모가 클수록 효과 또한 크지 않겠사
옵니까?"
까미유의 의견에 로체스터 공작은고개를끄덕여 허락했다.
"좋아,그건 그렇게 처리하기로하지. 그리고 협상은자네가 해 주겠
나? 자네라면 믿을수 있을 것 같군."
"옛,전하."
"고맙네,자네라면 훌릉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야."
로체스터 공작의 치하에 까미유는고개를 숙였다.
"감사하옵니다,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이제 한 가지 일이 처리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또
다른 일을궁리하기 시작했다. 탄벤스 공국은 들인 공에 비했을 때 정
말 얻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뭔가를 확보해야
만 했다. 탄벤스에서 잃어 버린 타이탄의 보상은 받아 내야 할 것이
아닌가?
"그건 그렇고‥‥‥ 만약 전쟁이 끝난다면 탄벤스 공국은 이제 주인
없는 나라가 되겠지? 공왕도 전사했고,막대한수의 군대와 뛰어난 장
군들도 많이 죽어 버렸어. 이 기회에 본국이 탄벤스에 더욱 깊은 영향
력을 행사할 수 있지 않을까?'
"영향력을 확실하게 행사하시려면 다음 공왕을 우리 쪽 인물로 세우
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전하."
까미유의 의견에 로체스터 공작은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그게 좋겠지. 다음 공왕은누가 될 예정이지?"
로체스터 공작이 고개를 살짝 뒤로돌려서 질문을 하자, 레티안은 잠
시 생각을 한후 답했다.
"예. 여태껏 탄벤스 공국에서 공왕이 선출되었던 전례를 따져 본다
면다음차례는 아크레니아가문에서 공왕이 나을 것이옵니다."
"으음‥‥‥‥ 하지만 정식적으로 공왕이 선출된다면 이쪽에서 영향력
을 행사하기가 힘들어. 탄벤스 공국의 경우 공왕이 되기 위해서는 30
세가 넘어야만 한다는 조건이 있지 않던가?그 정도 나이라면 자신의
주관이 벌써 정립되어 있는 나이니까조종하기 힘들지. 어떻게 한
다?'
이리저리 궁리를하던 로체스터는 의자의 손잡이를 탁하고 치면서
말했다.
"참, 이번에 전사한 라미네르 그론티어 공왕에게는 혈족이 없나?그
놈을 왕위에 올린다면 명분도 세울수 있고, 이용해 먹기도 편할 텐데
말이야."
두 번째 질문에도 레티안은 즉각 대답을 했다. 정말 엄청난 암기력
이었다.
"예, 있사옵니다. 아들 둘과 딸이 하나 있사온데,그 장자의 나
이는 이제 열세 살 이 된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
"열세 살이라‥‥‥‥ 이용하기에 꼭 좋은 나이로군. 그렇지 않은가,까
이유?"
"그렇사옵니다, 전하."
까미유도 찬성하는 것을 보며, 레티안은 방금 떠오른 계략을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전쟁 때문에 탄벤스 공국의 뛰어난 중신들도 많이 죽은 것으
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이 기회에 탄벤스 공국을 완전히 차지하
는 것은 어 떻겠사옵니까?
이번 전쟁에서 탄벤스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사옵니다 이것을 기회
로 탄벤스를 돕는다는 명목 하에 군대를 한 5개 사단쯤 파병하여 완
전히 틀어쥐는 것이옵니다. 그런 다음 꼭두각시 왕을 한 명 세운 후
귀족들을 차례로 숙청해 나간다면 머지않아 본국의 속국·으로 편입시
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
레티안의 조언에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주억 거리면서 말했다.
"그렇군 그런 다음 그 어린 왕까지 없애 버린 후 아예 본국의 공국
으로 편입시키면 아주 재미있어질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다른나라들의 비난을사지 않을까?동맹국을 집어삼켰다고 말이지."
"그것은 걱정하실 것이 없사옵니다, 전하. 어린 왕을 세우고 충신들
을 차례차례 없애 버린다면, 탄벤스는 머지않아 완전히 무법 지대가
될 것이옵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되도록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가 훗날 일거에 그들
을 쓸어버리면서 전면에 나서는 것이옵니다. 그러면서 어린 공왕은
폐위시키고 누구 한 사람에게 권해서 두 번째 꼭두각시 공왕을 만드
는 겁니다.
그런 후 그 공왕을 협박해서 '짐은 흔자서 왕위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코린트의 품 안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노라.'하고 선언하
게 만들면 되옵니다. 그 놈에게 대공의 작위를 내린다면 그 다음부터
탄벤스는 본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좋겠군,그게 좋겠어. 탄벤스를 본국의 영토로 흡수할 수 있
다면 이번의 실패를 만회하기에 충분하겠지. 입만 살아 있는 놈들도
군소리를하지는못할 거야. 안그런가?'
"그럴 것이옵니다. 전하."
협상을 해 보자는코린트의 제안은크라레스에 의해 즉각 받아들여
졌다. 크라레스 쪽의 입장으로 봤을 때 탄벤스 전선의 마지막을 대승
으로 장식했기에 더 이상아쉬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번 승리를 통해 설사 적이 코린트라고 하더라도 동맹국을
위해서는 검을 뽑아 들고 맞서 싸워 주는 의리 있는 국가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소득을 얻었다. 그리고 첫 번째 전투에서 상실했던
타이탄을 보충하기 에 충분할 딴큼의 노획품도 챙겼던 것이다.
코린트에서 까미유드 크로데인 후작이 협상 책임자로나온다는 것
을 통보받고 크라레스에서는 그와 격을 맞추기 위해서 루빈스키 폰
스바시에 대공을 그 상대로 내보냈다. 그리고 그들의 협상 장소는 코
린트와 크라레스의 접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 선택되었다.
"오랜만에 뵙는구려,크로데인 후작."
"그렇습니다, 대공 전하.6년 만인가요?"
"허헛,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구려. 그대를 볼 때마다 그대와 같은
훌릉한 후진들을 거느리고 있는로체스터 공작이 부럽소이다. "
"과찬이십니다. "
이렇듯 양국의 대표는화기애애한분위기로 회의를 시작했다. 사실
상 이번에 양국이 갈등을 려게 된 것이 동맹국에 대한 파병 때문이었
기에 이런 분위기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현안들을
차근차근 의논하며 해결해 나갈 생각이었다.
설혹 양보를 해서 땅덩어리 하나를 상대국에게 떼어 준다고 해도
그건 자국의 영토가 아니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을 정도였
다. 당연히 느긋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그들의 뒤에는 이번 회의가 어떻게 결론 지어질지 지켜보는
동맹국들이 있었다. 회의에서 강한 쪽이 좀더 많은 것을 얻어 낼 것이
고, 약한 쪽이 보다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
러므로 이번 회의의 결과에 따라 누가 강자인지,또는 약자인지가 확
연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또 얻어 내게 되는 것에 대한 혜택이나 손해는 고스란히 동맹국인
트루비아 왕국이나 탄벤스 공국이 책임 지게 된다. 그 때문에 자국의
동맹국·을 위해 '얼마나노력해 주는국가' 인가가 이 한판의 회담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서로 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어차피 양보할 수
없는 한판 대결을 이 좁은 탁자 위에서 벌이게 된 것이다. 뒤에서 지
켜보는 눈들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로체스터 대공과 까미유 후작의
입씨름은 며칠에 걸쳐 매우 지루하게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까미유와 루빈스키가 팽팽한 평화 협상을 하고 있는 동안
코린트의 군대는 마법진을 통해서 탄벤스 공국에 입성했다. 육로를
통해 발렌시아드 공국을 경유하여 트레보크 산맥을 넘어서 올 수도
있었겠지만그렇게 되면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르게 된다.
로체스터 공작의 계획은 비어 있는 공왕의 자리에 새로운 공왕이
앉기 전에 코린트의 군대가 탄벤스를 장악해야만 성공할 수 있었다.
5개 사단,즉 5만 명에 해당히-는 방대한 병력과 은십자 기사단 전부
가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은십자 기사단 단장인 투르넨 후작은,6년
전 치촉적인 패배를 당했었던 코린트 남부 전선의 부사령관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휘자로서의 뛰어난 실력과 행동이 인정되어 아직까지
도그 직위를유지하고 있었다.
투르넨 후작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 먼저 가 있던 가가린 후작은 직
접 마중 나가 새로운사령관을 환영했다.
"어서 토십시오,사령관각하!"
"그래,수고했네. 알프레드는 어디에 있나?"
"예,부단장각하께서는 지금사택에 연금되어 계십니다. "
가가린 후작의 보고에 투르넨 후작은 역정을 냈다.
"그런 멍청한 놈에게 부단장이라는 직함을 붙이지 말게!그 놈의 직
위는 박탈되었으니까 말이야."
"옛, 죄송합니다, 각하."
"어떻게 부단장이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이 모양인지‥‥‥‥ 전에 있었
던 칸테로마도 그랬고, 이번에는 알프레드까지. 젠장!"
화부터 내는 투르넨 후작을 보고 송구한 듯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
지 갈팡질팡하는 가가린 후작에게 투르넨 후작은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자네가부단장이었다면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을 텐데 말이야."
"감사합니다,각하."
"그래도 어잴 수 없지. 지금 은십자 기사단에는 부단장이 없으니 자
네가그 직책을 맡아주겠나?"
"영광입니다,각하."
"고맙구먼. 자네는 마법진을 통해 이동해 오는 병사들이 도착하는
대로즉각 곳곳에 투입하여 우선적으로수도를장악하라."
"옛."
"탄벤스의 수도 방위군 사령관은 어디 있나?"
투르넨 후작은 일단 일을 벌이기 위해서는 탄벤스 공국의 수도 방
위군을 딴 곳으로 따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괜히 양쪽의
무력이 한 장소에 집결해 있다가는자칫 칼부림이 날수도 있었다.
그리고 일단 그런 칼부림이 일어나게 되면 탄벤스의 동맹국으로서
이곳에 와 있는 코린트의 명성이 실추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방
위군 사령관을 타일러서 수도가 아닌 딴 곳으로 보내 버리려는 계획
이었다.
투르넨 후짜의 말에 가가린 후작은 사령관이 묻는 의도를 알지 못
해서 다소 장황한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가린 후작은 아직까지
젊은 야전 군인이었을 뿐, 정치적인 의도나 모략 ·술수 따위를 이해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충성을 다하고 있는 기사도의 나라 코린트가 동맹국을 꿀꺽
집어삼키려고 술수를 부리고 있는 줄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
었던 것이다.
"예, 각하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전방으로 보냈사옵니다.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옵서 다거스 후작을 방위군과 함께 전방으로 보내어 본
국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적의 발목을 잡고 있으라는 지시를 내
리셨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상세히 설명했더니 다거스 후작은 수도
방위군 1개 사단을 이끌고 전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며칠 후 본국
군대의 도착이 완료되면 그들과 위치 교대를하면 될 것입니다. "
가가린 후작의 말에 투르넨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가린 후작
이 일 처리를 매끄럽게 해 뒀던 것이다.
"좋아 수도 방위군이 빠져 나간 빈 자리를 본국의 군대가 대신한다.
공왕이 없는 때를 틈타 불순분자들이 설치지 못하도록 수도를 확실
하게 장악해야 한다. 자,빨리빨리 움직이게나."
"옛,각하."
부하들을 이끌고 분주하게 달려가는 가가린 후작의 됫모습을 보며
투르넨 후작은 미소를 지었다. 탄벤스의 수도 방위군까지 빠져 나가
고 없다면 일은 더욱손쉽게 진행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제 탄
벤스의 수도를 장악한 후, 철없는 꼬맹이를 왕위에 올리는 일만 남았
던 것이다. 물론그 전에 반대 세력부터 없애 버려야하겠지만‥‥‥‥
눈물을 흘리는 황제
"폐하, 놀라운 정보가 입수되었사옵니다. "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는 안티노스 후작이었지만,
어디서부터 얼마나 달려왔는지 다소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런가?"
"예,코린트의 군대가 비밀리에 탄벤스 공국에 집결중이옵니다. "
그 보고를 듣고 황제는 지그발트 폰 안티노스 후작의 의도대로 기
절할 듯이 놀랐다. 코린트의 군대가 평화 회담을하고 있는 와중에 탄
벤스 공국에 집결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크라레스 쪽이 그러했
듯이 파견했던 기사단을 철수시킨다면 모를까‥‥‥
"뭣이?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은십자 기사단이 모두 다 투입된 데다가, 거의 3개 사단에 달하는
병력이 도착했사옵니다. 마법진을 통해 3만에 달하는 군대까지 이동
시킨 것을 보면 분명히 대대적인 전쟁을 벌일 야욕이 있음이 분명하
옵니다. "
하지만 황제는 애써 좋지 않은 생각들을 털어 내며 조심스럽게 긍
정적인 방향으로 말했다. 은십자 기사단이 전부 다 투입된 것에 비해
3개 사단의 병력이란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우 3개 사단인데‥‥‥‥"
"하지만이 아니옵니다. 지금도 계속 마법진을 통해 병력이 이동해
오고 있사옵니다. 코린트가 하루에 1만이 넘는 병력을 지속적으로 탄
벤스 공국으로 보내고 있다는 것은 전쟁 외에는 답이 있을 수 없사옵
니다. 빨리 대책을 세워야하옵니다. "
하루에 1만씩 계속 보내지고 있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병력
이 추가로 투입될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원래가 수비적인
개념의 전쟁을 하는 데는 기사단만으로 충분하지만, 공격을 하려면
점령지를 장악하기 위해서 군대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상
식이었다.
6년 전에 대규모로 벌어졌었던 전쟁에서 병력이 모자라서 엄청난
고전을 면치 못했던 크라레스였다. 그렇기에 기사단과 함께 상대방
의 병력이 대규모로 이동중이라는 것은 뭔가 코린트가 침략적인 전
쟁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으음‥‥‥‥ 이런 난감한 일이 있나?다론을불러 들여라. 빨리!"
"옛."
황제의 명령을 받고 근위 기사가 재빨리 밖으로 달려나갔다. 잠시
후 다론이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그는 연구실에 있다가 끌려왔는
지 여기저기에 뭔가가묻어 있는 지저분한복장을하고 있었다.
"부르셨사옵니까?폐하."
"다론 경,토지에르 경의 치료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가? 이틀 전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것으로 보고를 받았었는데,그 이후 어떻게 되
었나?"
"예, 지금 회복되고 있는 중이옵니다. 이대로 경과가 좋다면 아마도
한 달쯤후에는완치될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
"지금 토지에르 경과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는데, 주선을 좀 해 줄
수 있겠는가?"
지금은 스승이 안정을 취해야만 할 때였다.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
었던 스승이었기에 다론은 조심스럽게 황제의 의견에 반대했다.
"예?하지만 토지에르 경은 안정을 취해야 하는지라, 여기까지 오는
것은무리일 것이옵니다. "
"아,그것은 상관없네. 통신용 마법진을 통해서 몇 가지 의견 교환만
하면 되지, 직접 여기까지 나을 필요는 없는 것이지. 그것도 안 되겠
는가?"
직접 스승이 와야 한다면 몸에 무리가 갈지도 모르지만, 침상에 누
운 채로 마법진을 통해서 대화를 한다면 그렇게 무리가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위하며 다론은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토지에
르를 찾을 정도라면 보통큰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폐하의 명이시라면‥‥‥"
"빨리 준비해 주게."
"옛,폐하."
잠시 후 다론의 노력에 의해 회의가 개최되었다. 수정 구슬에 모습
을 드러낸 토지에르는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그래도 눈빛은
여전히 맑게 살아 있었다. 황제는 병상에 누워 있는토지에르의 야윈
얼굴을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런 감정을 표현할수는 없었다. 일단 이 장소는 공식적인 회의 석상이
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천장을보며 겨우 참아 냈다. 그런 후
자신이 낼 수 있는 한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황제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네,토지에르 경. 그래,몸은좀 어떤가?"
눈물을 참기 위해 천장을 바라보는 황제의 표정을보고 토지에르는
가슴이 터질 것 간았다. 자신이 황제에게 그만큼 커다란 사랑과 신뢰
를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최대한 아무렇지
도 않은 듯 가장하여 답했다.
"소신의 몸은 괜찮사옵니다. 폐하께 심려를 끼쳐 드려 황송할 따름
이옵니다. "
"그런 소리는 하지 말게나. 하루라도 빨리 털고 일어나는 것이 짐을
위하는 것이야. 그건 그렇고 몸이 불편한 경을부른 것은 상의할 일이
있어서네. 그대가 설명을 해 주겠나,안티노스 경?"
안티노스는 병상에 누워 있는 토지에르에게 이번 전쟁의 시작부터
전개 과정까지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토지에르는트루비아에서 전쟁
이 터지기 전에 병원에 실려 갔기에 좀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했던 것
이다. 다론은 병상에 누워 있는스승이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쓰지 않
도록 복잡한 사건은 아예 보고를 하지 않았기에 그런 과정이 필요했
던 것이다.
"경은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코린트는 트루비아를 쓸어버림으로써 본국의 동맹국들에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인 것 같사옵니다. 만약‥‥ 만약 본국의 동맹이 무너
진다면 더 이상코린트를 제압할 수는 없다고사료되옵니다. "
토지에르로서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코린트는 엄청난
힘을 지닌 강대국이었고, 또 이번에 적기사까지 대량으로 생산한 저
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도 크라레스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크라
레스의 동맹들을 해체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경도그렇게 생각했는가?"
"탄벤스는 머나먼 변방일 뿐이옵니다. 만약 그곳에서 전쟁이 조금
크게 벌어진다고 해도 코린트는 전면전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옵니
다. 코린트에게 본국의 힘을 보여 주소서. 그렇다면 코린트는 양보하
지 않을수 없을 것이옵니다.
이때 코린트가 완전히 두 손을 들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타격을 입
혀야만 하옵니다. "
"흐음‥‥‥ 그렇게 되면 코린트가 물러설까?"
황제의 고심에 찬 물음에 토지에르는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그가 생각했을 때 코린트가 이쪽의 뒤통수를 치려다가 그게 발각되
어 오히려 자신들이 커다란 타격을 당했다면, 크라레스가 결코 만만
한 국가가 아님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고또그렇게 된다면 알아서 꼬
리를내리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예. 그 정도타격을 당했으니 손을 털지 않을수 없을 것이옵니다. "
"은십자 기사단을 상대하려면 타이탄들을 많이 투입해야 할 텐
데‥‥‥‥"
"폐하,스바시에 전하께서는 지금 회담 장소에 가 계시니 어쩔 수 없
고, 치레아 대공을 보내시옵소서. 그녀와 치레아 기사단이라면 다른
곳에서 병력을 빼지 않아도충분할 것이옵니다. "
황제는 잠시 궁리를 했다. 물론 키에리라는 검호를 물리친 치
레아 대공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타이탄 전력에서
너무 심한차이가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아무리 그녀가 간다고 해도 20기는 너무 적은 숫자가 아닐까?적의
규모는 거의 100기에 달하는데‥‥‥‥"
"그러시다면 폐하,탄벤스 전선에서 빼냈던 기사단을 재차 투입하시
면 될 것이옵니다. 국경선에 대기중인 다른 기사단들을 빼낼 수는 없
기 때문이옵니다.
적들이 이쪽을 향해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기습을 펼쳐야만 피해를
줄일 수 있사옵니다. 또 이번 전투가 기습으로승부를하는 것인 만큼
그렇게 많은 병력은 필요 없을 것이오나 기밀 유지가 철저해야만 하
옵니다.
그렇게 하여 너무 큰 타격을 받게 된다면 놈들도 이쪽을 향해 기습
공격을 준비했던 터 였기에 아마도 간담이 서늘해져서 더 이상 딴 생
각을 못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
탄벤스 전선에서 빼낸 것은 1,7,8전대였다. 그들은 이번에 있었던
두 번에 걸친 격렬한 전투 덕분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하지
만크라레스의 대부분의 기사단들은 국경의 중요 요새들을 기지로
하여 타국의 침략을 억제하고 있었기에 빼낼 수는 없었다.
크라레스 기사단들 중에서 임의로 빼낼 수 있는 기사단은 치레아
기사단과 스바시에 기사단,그리고 1,2,7,8기사단뿐이었던 것이다.
"알겠소, 그렇게 하지."
"감사하옵니다, 폐하."
"다론! 통신을 해제하라."
"옛,폐하."
다론이 재빨리 통신용 마법진을 해체하고 있는동안 황제는 안티노
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티노스 경."
"옛,폐하."
"치레아에 연락을보내라. 그리고소집을 해제했던 기사단들을다시
소집하라. 평화 회담을하면서 뒤로는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그 가중
스러운코린트에게 호된 맛을보여 주는 것이다. "
"옛,폐하."
전쟁테에서 보자, 비열한 자식들
"오호,황제의 말대로 저기들 있군."
탄벤스와 트루비아의 국경선 너머에서 은십자 기사단의 깃발이 펄
럭이는 것을 보고 다크가 이죽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적극적으
로 호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은십자 기사단의 전력이 엄청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
실이었다. 그런데 치레아 기사단이 보유한 타이탄 20기와 1,7,8전대
의 잔여 세력 42기만으로 그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리한
작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1,7,8 전대의 경우 두 차례에 걸친 격전
끝에 겨우 34기만 남았었는데,수도에 남아 있던 8기를 보충받았기에
42기로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치레아 기사단의 경우 그녀 개인의 기사단으로서 강자에게
타이탄을 준다는 원칙에서 벗어나서 그녀의 친구들에게 배당한 타이
탄도 많았을 뿐더러,루빈스키 대공의 물밑 작전에 의해 그녀에게 할
당된 기사들도 그렇게 뛰어난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각 전대장들과 스바시에 기사단 부단장인 카알 폰 카슬레이 백
작은 그런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심사가 복잡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바짝 다가서 있는 제스터의 경우 영문도 모른
채 이곳으로 이동되어 온 상태였기에, 어떻게 하면 빨리 코린트에 정
보를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
는 아직까지 이 사실을 코린트에 전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자,쓸데없이 얼굴 표정을 굳힐 필요 없어. 적이 바로 코 앞에 있
는데 그렇게 긴장을 해서 쓰나?자,모두들 모여 보라구. 작전 회의를
해야 할 것 아냐?"
모두들 쭈뺏쭈뺏 그녀의 곁으로 다가서고 있을 때, 제스터가 그녀
에게 허등지등 말했다.
"저,전하,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사옵니까?"
"왜?"
"저 그게 말이옵니다,그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말을 꺼내려다가 그
말이 전하라는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는 '숙녀' 에게 해도 되는 말인
지 망설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스터가 머뭇머뭇 말을 못 하고 있
자짜중이 난다크가 퉁명스레 말했다.
"뭐냐? 빨리 말 안하면 아가리를 찢어 놓을 테다. "
"화 화장실에‥‥‥‥"
제스터가 마지못해 낮게 중얼거리는 말에 모두들 키득거리는 가운
데 ,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너는 작전하고 상관없으니 가도 좋다. "
"옛,전하."
제스터는 자신의 상전들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재빨리 숲
으로 달려갔다. 그는 다크와 오랜 시간 함께했기에 그녀가 마나의 움
직임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될 수 있는 한 멀리 달려간 다음 자신의 목걸이를 꺼
내 들었다. 그의 목걸이는 마법사도 아닌 제스터가통신을 할 수 있도
록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제작된 마법 도구였다. 제스터는 그
목걸이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여기는고양이 벼룩. 늑대 굴 나오세요."
그가 암호를 정확하게 말하자목걸이에서 아주 작은목소리가흘러
나왔다. 일반적인 통신 마법과는 달리 수정구를 통한 것이 아니기에
상대의 모습을 볼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뭔지를 알리
는 암호가 들어가는 것이다.
"예,여기는 늑대 굴.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고양이는 탄벤스국경선 옆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기습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정확한 정보입니까?"
"지금 나는 고양이와 함께 와 있습니다. 박쥐 하나에 해당되는 정확
한 정보입니다. "
박쥐 하나라면 특급 정보를 말하는 것이 었다.
"그렇다면 언제 ?"
"기습인 만큼 아마도 내일 새벽쯤에 돌진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됩
니다. "
"귀하의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조심하시기를바랍니다. "
제스터는 필요한 말만 전한 후 재빨리 통신을 끝냈다. 괜히 통신이
길어져 봐야 들킬 확률만 높아지는 것이다. 제스터는 허등지등 자신
이 있던 위치로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는아무도 없었다.
"돌격 !"
우렁찬 외침 속에 수십 대의 타이탄들이 저마다 창과도끼,철퇴,검
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특히 치레아 기사단의 드라쿤이 뿜
어 내는 황금 빛 때문에 그움직임은 더욱 현란했다.
"이런 젠장! 이게 기습이야?"
"알 게 뭐야?위에서 시키니까우리는그대로 해야지."
팔시온과 미디아는 타이탄 전투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엄청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이런 식의 농담으로 대신하
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팔시온의 말대로 이건 기습도 뭐도 아니었다. 다크는 작전
회의를하자고 한 후 밤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당장 돌격할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부하들의 반대가 거셌지만 그건 일언지하에 묵살
되었다. 그런 후 이렇게 허겁지겁 준비를 갖춰 돌격하고 있는 것이다.
코린트의 은십자 기사단은 평화 협상을 자신들에게 좀더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국경 부근에서 대규모 기동 연습을 준비중이었다. 병
력의 이동과 더불어 기동 연습 준비가 겹치다 보니 크라레스에서는
그것을 상대가 전면전을 벌이기 위한 행동으로오판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은십자 기사단이 주둔중인 평원 부근에는 기동 연습 때 사
용될 타이탄의 보조 장비들인 철퇴나 창 등이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
다. 그리고 기동 연습 전에 몸을 풀기 위해 타이탄에 타고서는 서로
간에 대결을 펼치고 있는 타이탄들도 몇 기 보였다. 하지만 지축을 을
리며 백주대로를 달려오는 이 엄청난 크라레스의 타이탄 무리들을
그들이 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적이다!"
일제히 웅성거리며 모두들 타이탄을 끄집어내어 탑승하고 있는 가
운데 가가린 후작은 마법사를 향해 외쳤다.
"사령관 각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카이론의 임시 사령부에 계십니다,각하."
카이론이라면 탄벤스 공국의 수도였다. 투르넨 후작은 새로운 공왕
을 즉위시키는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수도에 남아 있었다. 그는 이곳
탄벤스 주둔군의 총사령관이었기에 모든 것을 그가 총괄해서 지휘해
야만 했기 때문이다.
현재 은십자 기사단에는부단장이 없었기에 투르넨 후작은자신 휘
하에 있는 모든 타이탄 부대를 한 덩어리로 만들어 부사령관인 가가
린 후작에게 맡겼다.
그런 후 가가린 후작은 기사단을 이끌고 이곳 트루비아와의 국경선
에 도착하여 기동 연습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기동 연습
당일 날에는 투르넨 후작이 도착하여 직접 기동 연습을 참관(츳르)할
예정이었다.
"사령관 각하에 빨리 연락해라. 크라레스 기사단이 기습 공격을 가
해 왔다고 말이다. "
"옛, 각하,!"
가가린 후작은 통신 마법을 시도하고 있는 마법사에게서 시선을 돌
려 은십자 기사단 작전관을 바라봤다.
"자네는 정찰조를 좀더 폭넓게 배치하게. 특히 후방에 대한 적의 공
격대가 있는지 주의해서 살펴."
"옛 ,!"
"내가 타이탄들의 전투 지휘를 하는 동안 잘 부탁하네."
"옛,각하."
작전관은 사령관이 타이탄을 타고 일선에 나가 버렸을 때, 전체적
인 부대의 지휘를 담당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는 가가린 후작이 자리
를 비운 동안 타이탄 부대가 최대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토록 있는
힘껏 도와야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마법사들을 지휘하여 가가린 후작의 지시대로 여기저기에 흩
어져 있는 정찰조들을 더욱 폭넓게 배치하고, 또 새로운 정찰조 3개
를후방에 투입하여 뒤로부터의 기습에 대비했다.
가가린 후작은 자신의 타이탄을 몰고 일선으로 달려나가 부하들이
전투 대형을 완벽하게 갖추도록 독려했다. 그들이 준비하는 동안에
적들의 타이탄은 이제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가가린 후작은 기습을 위해 달려오는 적들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에 그나마 위안을 느꼈다. 이쪽이 93기의 타이탄을 보
유하고 있다면 적은 60여 기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적의 공격군이 지금 눈에 보이는 저 정도의 규모라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저것들 외에 우회 공격대가 따로 있다면 위
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밤중도 아니고
해가중천에 떠 있었기에 시야가 확트여 있었다 조금만주의를 한다
면 결코 놈들에게 약점을 잡힐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가가린 후작의 시야에, 앞서 달려들고 있는 적 타이탄들 뒤
에서 먼지를 뚫고 따라오는 타이탄이 언뜻 보였다. 타이탄들이 전속
력으로 달려오고 있었기에 엄청난 먼지를 뿜어 내고 있었지만, 일단
가가린 후작이 상대를 보고자 마음 먹은 이상그것은큰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먼지 사이로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는 거대한 청색 타이탄‥‥‥ 6미
터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에,짙푸른 색을 칠한 크라레스의 최신형 타
이탄이 6년 전 전쟁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코린트군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는 것을 가가린 후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먼지 뒤로 보이는 상대방의 타이탄이 바로 그 소문의 타이
탄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느끼는 순간, 가가린 후작에게는 이번 전투
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떠올랐다.
정보 부장인 베르딘 후작은 잠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후,자신의
책상 위에 붉은표지의 문서가 놓여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장식
용의 가벼운 여름 외투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고 책상으로 왔기 때문
이었다.
붉은표지 사이에 노란색의 줄이 세 개 쳐져 있는문서‥‥‥‥ 이것은
특급을 뜻한다는 표시였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베르딘 후작은 서류
부터 집어들고 황급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방금 벗어 놨던 여름 외투를 다시 걸칠 생각도 하지 않
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향하는 목적지는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
실이었다.
"헉헉 ‥‥‥‥"
씨근덕거리며 그가 달려들자 공작의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병이 창
을 들어 그를 막았다. 물론 경비병도 자신이 막아 선 상대가 베르딘
후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가
는 예법을 무시하려고 하는 베르딘 후작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젠장! 비 켜라?"
베르딘 후작은 거친 동작으로 경비병을 밀치고 공작의 집무실로 뛰
어들었다. 그리고그와동시에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병들도 황급히 그
를 뒤따라 들어와 그를 제압하려고 했다. 어쩌면 상대는 베르딘 후작
으로 변장한 적의 첩자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바로 그때 마법사로부터 새로 도착한 통신문을 건네 받고
는 그것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베르딘이 공작의 눈초리가 사납다는
것을 느긴 순간 공작은 그 통신문을 갈기갈기 찢어서 내팽개치고 있
었다.
"이런 제기랄!"
뭔가 분통을 터뜨릴 만한 대상을 찾고 있던 공작은 자신의 책상 위
에 놓여 있던 꽃병을 집어들고는 처음에는 바닥에 내려꽃으려고 했
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 앞에 베르딘이 있다는 것을 안 순간 꽃병은
그대로 베르딘의 머리통을 향해 쏜살과 같이 날아갔다.
요란한 음향이 울려 퍼지고 산산조각이 난 도자기 조각과 물,그리
고 꽃들이 허공을 떠돌며 비산하는 가운데 이미 기절해 버린 베르딘
의 몸은 뒤로 나자빠졌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특급 기밀 문
서 또한 땅바닥에 떨어져서 나됩굴었다.
"정보부라는 새끼들은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크라레스의 기사단
이 기습을가해 오는 데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뿌드드득하는 이빨 갈리는소리와 함께 으르렁거리는로체스터 공
작의 분노에 찬 외침이었다.
루빈스키 대공은까미유의 표정을물끄러미 바라봤다. 회의 도중에
갑자기 뛰어 들어온 마법사가 종이 쪽지를 전하자,그것을 받아 든 까
미유의 손은 루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표정은 한껏 일그러지기 시
작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받아 든 종이 쪽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기에,늘 냉철했던
기사가 저렇듯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코린트에 뭔가
큰 일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그게 뭘까 궁리해 보는 루
빈스키 대공이었다.
황제가 죽었을까?아니면 로체스터 공작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그것도 아니면‥‥‥‥
하지만 루빈스키 대공의 상념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까미
유가 갑자기 불타는 듯하면서 분노에 얼룩진 눈동자를 들어 을렸던
것이다. 엄청난 살기를 내뿜으며 까미유는 이가 갈리는 듯한 음성으
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귀하가 이렇게도 비열한 인간인 줄 몰랐었소. 어떻게 평화 협
상을 하면서 감히 본국을 기습할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젠
장!"
까미유는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고, 그와 함께 루빈스키 대공
의 뒤에 도열해 서 있던 기사들도 그에 대웅하여 검을뽑았다. 당연히
까미유를수행해 왔던 기사들 역시 검을뽑아들었다.
이 세 동작은 순차적으로 벌어지기는 했지만, 거의 순간적으로 벌
어진 일련의 동작이었다. 하지만 루빈스키 대공은 상대가 왜 갑자기
검을 뽑아 들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에,차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그 꾸밈없는 눈동자를보며 까미유는자신의 분노를 억눌렀
다. 아무래도 루빈스키 대공은 그 비열하기 그지없는 기습 작전에 관
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그의 다음 행동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던 것이다.
순간 머뭇거리고 있는 상관을 마법사가 급히 막았다. 마법사는 이
제야 겨우 상관을 막아설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그만큼서로간에 검
을 뽑아 드는 속도는 빨랐었다.
"후작 각하, 참으셔야 합니다. 일단 전하의 지시대로 수도로 돌아가
셔야 합니다. "
자신을 말리는 마법사를 뒤로 밀치 며 까미유는 조금 앞으로 나와서
는 종이 쪽지를 손바닥에 붙인 채 책상을 힘껏 내리찍었다. 까미유의
손바닥에 가격 당했을 뿐이었는데도 책상은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그대로 박살이 나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자신
을 조용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루빈스키 대공을 향해 까미유는 내
뱉듯이 말했다.
"전쟁터 에서 보자, 비 열한 자식들!"
까미유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거칠게 문을 열고는 나가 버렸다.
그리고 이제 흘로 남겨진 루빈스키 대공은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
져 있는 종이 쪽지를 집어 올렸다.
한순간 엄청난 힘으로 내려찍어진 까미유의 손바닥과 탁자 사이에
위치했었는데도 종이는 아주 말짱했다. 곧이어 루빈스키 대공의 손
바닥도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루빈스키 대공은 떨리는 목소리
로 부하들에게 외쳤다.
"최대한 빨리 수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라."
투르넨 공작이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에서는 전쟁이 시작된 후였
다 사방에서 거대한 타이탄들이 검과 방패를 뽑아 들고 힘과 기술을
겨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패배해서 땅바닥에 자빠져 있
는 타이탄들의 대부분은자신의 부하들이었다.
도착한 투르넨 후작의 시선에 제일 먼저 잡힌 것은 자신의 부하들
을 간단하게 제압하고 있는 거대한 청색 타이탄이었다. 큰 덩치에 어
울리는 거대한 방패와 검을 들고 자신의 부하들을 그야말로 간단하
게 '때려잡고' 있었던것이다. 그리고그것을보자마자투르넨후작
의 머리 속에는 6년 전 악몽 같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자신의 부하들을 죽이고 있던 그 거대한 타이탄 그때 그 단 한 번
의 전쟁으로 인해 남부 집단군의 타이탄들이 괴멸을 당했었다. 당연
히 자신이 치촉적일 만큼 지독한 패배를 당하게 만든주 원인은 그 지
옥에 떨어져 마땅한 청색 타이탄이었다. 그 놈이 있었기에 서로 간에
밀고 밀리던 그 균형은삽시간에 박살나 버렸던 것이다.
"후퇴하라?'
투르넨 후작은 있는 힘껏 마나를 끌어올려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저 놈을 상대로곡여기서, 이 전력으로 싸운다는 것은 6년 전의 실패를
다시 한 번 더 되풀이하는 것과같았다.
투르넨 후작은자신의 타이탄을불러 내어 전장의 한가운데로 달려
나가면서도 계속 후퇴하라는 외침을 쉬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상대
와 목숨을 건 일전을 벌이는 상태에서 부하들이 상관의 명령을 이행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대가 자신을 도망치도록 그냥 놔주지
를 않기 때문이었다.
"스바시에 대공 전하께서 드십니다. "
루빈스키 대공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
의 얼굴은 치솟아오르는분노로 인해 상기되어 있었다.
"오오,먼길에 수고했네. 그래 협상은 어떻게 되었나?"
반갑게 맞이하는 자신을 향해 분노에 얼룩진 시선을 보내 오는 루
빈스키를보고 황제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루빈스키는 황제
앞으로 다가가서 문제의 종이 쪽지를 그에게 들이밀며 노기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 이게 정녕 사실이옵니까?"
루빈스키가 내미는 쪽지에는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탄벤스 공국에
주둔중이던 파견 기사단에 대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는 보고가 적
혀 있었다. 그것을 힐끗 쳐다본후,황제는 시선을루빈스키에게로다
시 돌렸다.
"사실이라네. 코린트가 일거에 트루비아를 쓸어버리기 위해 기사단
과 함께 군대들을 탄벤스에 집결시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에
내린 결정이었지‥‥"
루빈스키는 황제에게 분노를 터뜨릴 수는 없었기에 정말사력을다
해 노화를 억눌렀다. 하지만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기습을 가할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만약 적이 기습을 가
해 온후에 되받아 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상대가 집결시킨 병력이 너무
나 강력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어. 90기가 넘는 적의 기사
단을 기습이 아니라면 어떻게 막을 건가?
코린트도자신들이 꾸미고 있던 꿍꿍이가 있기에 이쪽만 그렇게 탓
할 수는 없을 것이야. 그 놈들도 이번에 본국의 힘이 어떤지를느꼈을
테니, 이쪽에서 선후를 차근차근 따져서 교섭을 청한다면 웅해 올 테
지."
"기습은 성공했사옵니까?"
"대승을 거뒀다는 보고를 들었네."
"누가 지휘를 했사옵니까?'
"자네가 없었기에 치레아 대공에게 부탁했다네."
황제의 말에 루빈스키는 골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3를 보냈
다면 모르면 몰라도 상대방은 거의 치명타를 입었을 가능성마저 있
었다. 어느 정도 타격을 당했다면 그래도 협상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
지만,전멸을 시켜 놨다면 그 이후의 사태는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 오
직 신만이 아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