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기독병원에서 장기려와 함께 근무하던 청년의사 박춘서는 장기려의 소개로 1945년 3월 28일 흥남 일본질소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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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 흥남에 온 지 이틀이 지났다. 박춘서는 오늘도 연성소 훈련을 마치고 5시 퇴근하는 길에 서본궁 관리계 사무실로 갔다. 거기서 이창호(오사카 간사이신학교 졸업, 양정제자)와 또 다른 조선인 친구 한 사람을 만나 오늘 밤 동구東區의 일본인 사택 지구에 있는 김교신 자택을 방문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은 본궁의 이태조 왕릉 앞을 지나 일본인 사택 지대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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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행길인 박춘서는 이창호의 뒤를 따라 꼬불꼬불 골목길을 돌아가다가 발걸음이 멎었다. 문밖 외등 불빛에 ‘김교신金敎臣’이라고 쓴 문패가 보였다. 창씨개명이 대대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행세깨나 한다는 조선인들은 조선인이면서도 철두철미 ‘야마토 다마시大和魂’로 무장하고 집에서도 일본어만 사용한다고 자랑하면서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처럼 살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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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일본제국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질소, 그것도 일본인 사택 지구 한복판에서 조선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문패를 보는 느낌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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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 근무하는 조선인들은 모두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 이창호와 박춘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장 안에서 이창호는 마쓰모토松本로, 박춘서는 히라모토平本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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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대한 흐름 속에서 창씨개명을 홀로 거부하고 조선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니! 박춘서는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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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조선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이름을 보아서는 분간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일본인 사택 지구에 김교신이라는 문패는 아마 이 집뿐일 것이다. 선생의 평소 생활이 정신적으로나 표면적으로나 뚜렷이 드러나 있지 않은가. 요즘 조선 사람들은 일본 사람의 탈을 쓰고 자칭 일본 사람 행세를 하는 얄미운 꼴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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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조선》 독자 박석현이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 유일의 경찰관’이었다면, 김교신은
평양기독병원에서 장기려와 함께 근무하던 청년의사 박춘서는 장기려의 소개로 1945년 3월 28일 흥남 일본질소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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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 흥남에 온 지 이틀이 지났다. 박춘서는 오늘도 연성소 훈련을 마치고 5시 퇴근하는 길에 서본궁 관리계 사무실로 갔다. 거기서 이창호(오사카 간사이신학교 졸업, 양정제자)와 또 다른 조선인 친구 한 사람을 만나 오늘 밤 동구東區의 일본인 사택 지구에 있는 김교신 자택을 방문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은 본궁의 이태조 왕릉 앞을 지나 일본인 사택 지대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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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행길인 박춘서는 이창호의 뒤를 따라 꼬불꼬불 골목길을 돌아가다가 발걸음이 멎었다. 문밖 외등 불빛에 ‘김교신金敎臣’이라고 쓴 문패가 보였다. 창씨개명이 대대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행세깨나 한다는 조선인들은 조선인이면서도 철두철미 ‘야마토 다마시大和魂’로 무장하고 집에서도 일본어만 사용한다고 자랑하면서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처럼 살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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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일본제국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질소, 그것도 일본인 사택 지구 한복판에서 조선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문패를 보는 느낌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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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 근무하는 조선인들은 모두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 이창호와 박춘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장 안에서 이창호는 마쓰모토松本로, 박춘서는 히라모토平本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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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대한 흐름 속에서 창씨개명을 홀로 거부하고 조선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니! 박춘서는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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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조선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이름을 보아서는 분간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일본인 사택 지구에 김교신이라는 문패는 아마 이 집뿐일 것이다. 선생의 평소 생활이 정신적으로나 표면적으로나 뚜렷이 드러나 있지 않은가. 요즘 조선 사람들은 일본 사람의 탈을 쓰고 자칭 일본 사람 행세를 하는 얄미운 꼴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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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조선》 독자 박석현이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 유일의 경찰관’이었다면, 김교신은 ‘일본질소에서 창씨개명을 거부한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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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안에 들어서니 한복을 입은 김교신의 아내 한매가 일행을 2층으로 안내했다. 김교신의 집은 한 동에 4세대가 거주하는 동남향 이층집의 남쪽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1층에 방이 두 개, 2층도 두 개였다. 2층의 다다미 8첩(약 4평)짜리 방 하나는 서재로 쓰이고 있었다. 세 사람은 일제히 조선식으로 무릎을 꿇고 절했다. 김교신은 한복에 덧저고리를 입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