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 용문고등학교, 한양대학교
성악과 중퇴, 서울대학교 성악과 중퇴, 서울대학교 성악과
명예졸업, 트리니티 신학대학교 학사.
데뷔 : 1968년 노래 '딜라일라'
종교 : 개신교
가족 : 동생 성악가 겸 교수 조영수
1. 소개
대한민국 연예계의 원로급 종합 예술인, 그러나 한편으로는 구설수를
만드는 트러블 메이커. 1963년 말 데뷔해 한국 대중음악과 성악을 가요에 접목시켜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가수. 에버랜드 지구마을 노래도 이분이 불렀다.
황해도 출신이라 분단의 아픔과 지역감정의 대립 등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역감정으로 갈라서기 시작한
경상도와 전라도의 화합을 내포한 '화개장터'라는 곡을 불렀다. 참고로 조영남은 작곡만 했고 작사는 친구인 김한길 전 의원이 했는데 그 친구는 다른 쪽으로 유명해졌다.
2. 데뷔 전
1945년 4월 2일,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나,
1.4 후퇴의 피난행렬에 섞여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이주했다.
조영남은 용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하였다. 이어 1962년에 한양대학교를 자퇴하였는데, 자퇴의 이유가 재밌다(?). 2013년 10월에 방송된 SBS '좋은 아침'에
조영남은 한양대 성악과 후배 김승일과 함께 출연하여, 한양대를 자퇴한 이유를 설명하며 "2학년이 됐는데 신입생 여자 아이들 중에 정말 예쁜 여자가 들어왔었다. 그 여자가 한양대학교에 오는 걸 매일 몰래 봤다. 걔가 입학한 후로
온 정신은 '그 애와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였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내가 사회를 보면서 걔를 의식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약혼자가 있는 여자였다. 학교에서 그 여자와 내가 데이트 한다는 소문이 났고 약혼자가 날 찾아오기까지
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조영남은 "학교에 퍼진 소문 때문에 자퇴하게 됐다. 다시 공부해서
서울대에 갔고 그 여자는 파혼했다"고 말했다.
2015년 10월 방송된 MBN '속풀이쇼 동치미'에 출연해서는 한양대 자퇴에 대해 "잘렸다"는 말을 하였다. 즉 이날 방송에서 조영남은 "내가 한양대학교에 다니다 뜨거운
연애를 하고 잘린 적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에
출연진들이 "연애를 한다고 학교를 잘리냐?"며
의아해했고, 조영남은 "약혼한 여자와 눈이 맞은
거였다. 그 때는 내가 전액장학금을 받는 학생이었으니까 그러면 안 되는데…. 예쁜 걸 어떻게 하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자퇴서를 냈다. 이후 공부를 해서 다시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후 1964년에 서울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하였는데, 1968년까지 다니다가 서울대 성악과도 이후 자퇴하였다. 다만, 2000년대 들어 서울대학교 측에서 조영남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서울대학교
자퇴의 이유에 대해 조영남은 2010년 9월 방송된 ‘황금어장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여
“서울대 음대를 다니던 중 미8군 오디션을 보고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깜짝 놀랄 만큼 수입이 좋아 더 이상 학교 다닐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해서 자퇴했다”고 밝혔다.
3. 무명가수에서 데뷔까지
조영남은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밤무대를 전전하다 주한미군이 운용하는 쇼룸에서 팝송을 부르다 성악을 그만두고
상업가수의 벌이가 좋은 것을 이유로 상업가수로 전환, 1968년에 '딜라일라' 라는 번안곡으로 데뷔한다.
이 딜라일라로 방송에 데뷔했는데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데뷔하자마자 굉장한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본인도 본인 저서나 출연방송에서 본인은 거의 무명 시절은 없었던 편이라 회고하곤 한다.[7]) 이후 텔레비전이 지금처럼 절대적인 대중매체가 되기 전 시절이었음에도
TV에 자주 나와 TV를 자주 못 보던 서민들도 가수 조영남을 아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 젊은 층은 화개장터밖에 모르지만 조영남과 같은 세대거나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윗세대 어르신들의 경우 70년대 유명하던 대중 클래식 가수였다고(실제로는 번안 스탠다드팝
가수지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어쨌거나 유명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대부분 잘 모른다. 70년대 LP로만 음반을 발매하던 시절에 7만 5천장을 팔았다고 하니 90년대 기준이면 밀리언셀러 못지 않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한 인기 가수인 것.
스타가 되어 돈을 벌고 좀 먹고 살 만해진 뒤엔 본인이 한때의 굶주림에 상업가수로 전향한 것을 후회했는지 동생인
조영수가 성악가가 되길 원하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4. 결혼과 전성기
1971년, 군생활 도중
알게 된 영화배우 윤여정과 결혼한 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주도한 여의도 평화집회[8]에서 성악 쪽
담당자들을 수소문하고 직접 지휘한 후 빌리 그레이엄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 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수로 돌아오면서 활동도 왕성했지만, 집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끝내는 윤여정과도 갈라섰다. 스스로도 윤여정과 갈라섰을 때를 매우
뉘우치지만, 윤여정을 위한다면 윤여정의 'ㅇ' 조차 꺼내지 말라는 여론이 대다수다. 사실 조영남은 옛날부터 알아주는
악명 높은 바람둥이였는데, 결혼 생활 때도 그 버릇을 통 못 고쳤다.
거기다가 돈을 한 푼도 안 벌었던 것도 덤. 오죽하면, 쌀독에
쌀이 없던 날이 있던 날 보다 많았다고 했을 정도.
무릎팍도사 윤여정 편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윤여정에게는 이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실제로 관련이 있는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조영남의 'ㅈ' 조차도 꺼내지 않는다. 강호동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진행했다. 물론, 조영남 본인도 직접
"그녀가 입을 열었다면 조영남이란 사람은 사회에서 매장당했을 것"이라며
잘못을 시인했다. 그래 놓고는 나중에는 윤여정이 못생겨서
같이 잘 수 없다는 초특급 망언을 했다. 일단 당신 거울이나 보쇼!
지금이야 양원경처럼 결혼생활 내내 막장 짓을 저지른다거나, 송종국처럼
불륜(간통)을 저지른 것처럼 어마 무시한 사고를 친 것이
아닌 이상, (이혼에 대한) 인식은 제대로 잡혀서 이혼하고도
응원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저 때 여자 연예인들에게 있어서는 이혼하면 마약 복용 후 연기에 복귀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동급으로 여겨졌을 만큼 사회에서 매장당할 정도로 어려운 시기였다. 아 현정아, 내 때는 예수재림이었어! 조영남과 이혼을 했던 윤여정 역시 매장당할
뻔했지만, 본인과 가까웠던 김수현 덕분에 생활연기인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재기에 성공했다.
이러니까 조영남의 'ㅈ'만
들어도 경기할 만큼 증오하는 것은 당연지사. 윤여정에게는 당장 지우고 싶은 악몽이 바로 그 때다. 그런데도 조영남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를 "첫 번째
결혼시절"이라고 말한다. 온갖 X짓을 다 하고 살았으니 편했겠지! 윤여정, 그리고 아들과 함께 지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말과 함께 당시 세 가족이 함께 찍었던 사진을 이용하여 미술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하여간 조영남은 이혼 후에도 정신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여자들과 엽색 행각을 벌였으며, 80년대에는 자주 여성지에 이름이 올라왔다. 그리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자신은 자유로운 정신으로서의 자유 연애, 결혼 제도에 대한 실험이라며
변명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그냥 그렇다.
이혼 후에는 방송에 인생을 올인하여 체험 삶의 현장으로 대표되는 체험 다큐 형태의 방송을 이끌었으며, 2000년대 중반에는 MBC 표준FM
16~18시 슬롯 <최유라, 조영남의 지금은
라디오시대>에 발탁이 되어 라디오로도 발을 넓혔다.
보조 MC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는데 미국에서 MC로 성공한 자니 윤을 불러와서 그를 메인 MC로 한 '자니윤 쇼'에 조영남이 보조MC를 맡았는데 두 사람의 호흡이 너무 잘 맞아서 큰 인기를 끌었다.
가수 쪽은 공식적인 은퇴 앨범을 낸 만큼 폐업 상태이나 프로그램의 PD들이 찾아와 사정을 하면 한두 곡 정도는 불러준다. '화개장터' 는 자기 스스로도 쪽 팔려서 안 부르는 편. 결국 데뷔곡인 '딜라일라' 를 우려먹고 있다. 하지만 은퇴했으니 개런티는 공짜나 기부한다는 조건으로 안 받고 있다.
한국 연예인 중 손꼽히는 부자이며 재산가이다. 그가 살고 있는 청담동 고급 빌라는 연예인이 살고 있는 집 중 제일 비싸다고 하며, 공시지가만 50억 이상, 실 거래가는 백억이 훨씬 넘는다고... 사실 그 고급 빌라는 조영남이 아주 오래 전 구입한 것으로 구입 당시에는 그리 고가가 아니었으나 재건축만 2번을 거듭하다 보니 주변 시세와 맞물려 건물 가격이 폭등한 것. 게다가 집값이 너무 비싸다 보니 팔리지도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실제로 정말 작정하고 돈을 모았으면 지금의 재산 따위 푼돈으로 여길 정도로 엄청난 갑부가 되었겠지만 전술한 바람기를
바탕으로 한 방탕한 생활로 인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들한테 돈을 거의 뿌리다시피 하면서 재산을 홀라당 까먹기가 일상다반사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인기가 좋아서 돈을 엄청 잘 벌어서 저런 재산가가 된 것이다. 특히 재건축을 거듭할 때마다 그 집을 팔라는 요구는 있었는데 본인은 그 집 자체가 좋아서 그걸 지키고 싶어
안 팔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