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들 선조와 그들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다
종친회 탐방을 통해 영주의 뿌리와 역사를 알려 씨족의 근원을 찾고 어린아이들과 청소년, 젊은 층에게 자신의 뿌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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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1,2세조 시제 모습 |
조선 창업자 삼봉 정도전의 고향은 ‘영주’
선조의 뜻 잇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가
최근 조선을 설계하고 백성을 으뜸으로 여긴 민본(民本) 사상가였던 삼봉 정도전의 사상과 정신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또한 그의 고향이 영주로 알려지면서 후손인 봉화정씨도 선조들의 올바른 정신과 기틀, 뿌리를 바로 잡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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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제 전경 |
▲삼봉은 삼각산을 뜻해
고려 말에 태어난 정도전의 고향은 영주다. 당시 혼인제도는 서류부가혼(남귀여가혼)으로 남자가 여자의 집에 장가를 들어 처갓집에서 한참을 함께 지내다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친가로 되돌아오는 방식을 따랐다.
봉화정씨 종친회 정동섭(67) 사무국장은 “문중에서는 그동안 삼봉의 고향이 단양으로 많이 알려져 있어서 무척 안타까워했다”며 “정도전 선조의 어머니인 우씨는 영주우씨인 우연(禹淵)의 딸로 그 내용은 ‘가의대부 한성판윤 겸 성균관 대사성대광문하찬성 일봉 정공의 묘갈명’에 기록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선조는 영주 구성 삼판서고택에서 태어나 자랐고 삼봉(三峯)이라는 호도 삼각산(북한산)의 세 봉우리 아래 집을 짓고 살았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삼봉집에 있는 오언율시를 비롯해 여러 곳에 나온다”고 강조했다. 인근 단양의 ‘도담삼봉’에서 따왔다는 그동안의 속설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영주에서는 2007년에 열린 소남한시회에서 당시 봉화정씨종친회 회장이 공식적으로 정도전 선조의 호인 삼봉에 대해 처음 밝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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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현사 춘향제 |
▲역적오명 벗고 제향
삼판서 고택의 첫 판서이자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의 향사가 2005년 이산면 신암리에 준공한 모현사에서 매년 4월이면 전국 각지에 있는 후손들이 모여 참예한다.
정종석(78) 회장은 “올해로 염의공(정운경) 탄생 710주년을 맞이했다”며 “사당인 모현사에는 다섯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한 가운데 염의공 선조의 신위가 있고 오른쪽에는 문헌공(정도전)과 희절공(정도전의 아들)의 신위를, 왼쪽에 일봉공(정도복, 정도전의 막내동생) 신위와 양경공(정도전의 증손)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은 바로 정도전이 아버지 정운경의 삼년상 시묘살이를 하던 움막이 있던 곳으로 이후 문천서당이 있던 자리이다.
정 사무국장은 “고종 2년에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한양을 설계한 정도전 선조의 업적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 공훈과 지위를 회복시켜 ‘문헌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왕실의 반역자라는 오명을 벗고 공개적인 제향이 이뤄졌다”며 “많은 이들이 선조의 사상과 그 뜻을 알리고 있는데 유림에서는 홀대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선조의 얼과 올바른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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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향후 헌관, 축관 등 |
▲뿌리의 근원 다시 찾다
봉화정씨의 시조는 정공미(鄭公美)이다. 정도전은 그의 5세손이다. 23세인 정종석 회장은 “봉화정씨 영남문회는 50~60명이 정기총회와 상시모임을 갖고 유대를 다진다”며 “후손들이 자신의 뿌리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종친회는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자료화 하기위한 소통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26세인 정동섭 사무국장은 “봉화정씨는 8개 분파로 나눠져 있는데 하나씩 컴퓨터로 자료화하는데 6~7년 정도 걸렸고 현재는 1/5 정도 입력했다”며 “평균 70세인 종친회원들이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역사를 남겨주는 기회를 만들고 보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안산에 사는 30대 청년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면서 본인의 뿌리를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 지금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다고 전화를 해 왔다”며 “돌아가신 할아버지, 아버지 이름으로도 알기 어려웠는데 당시 사위의 이름을 기록했던 내용을 토대로 살아계신 고모할머니에게 이름을 전해 듣고 자신의 뿌리를 찾는데 도움을 준 적이 있다”고 회상하며 컴퓨터 자료화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했다.
스스로의 정체성, 뿌리를 알아야
➲ 인터뷰 - 영남문회 정종석 회장, 종친회 정동섭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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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종석 회장(좌), 정동섭 사무국장(우) |
컴퓨터 데이터 베이스화
시간오래 걸려도 완수할 것
스스로가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정종석 회장은 이것이 바로 선비의 기본자세라고 했다.
정 회장은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많고 부모세대가 있어 종친회의 모임참여가 젊은 층은 아무래도 수가 적다”며 “옛날 8,9촌까지 기록된 족보도 20년 마다 한 번씩 만들어지기 때문에 촌수가 더 넓어지면서 족보에서 없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이어 “조상에 대해 정말 알고 싶어 자료를 요청하거나 찾는 오는 사람들에게는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며 “반면 자신의 뿌리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아닌 그저 자료로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어 안타깝다”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정동섭 사무국장은 “각 공파마다 수권이 있는데 서문, 발문을 포함해 입력할 내용이 상당하다”며 “참봉공파의 자료를 컴퓨터로 작성해 저장하기까지 3년이 걸렸다. 큰집인 용인공파까지 정리했는데 이렇게 하니 보존과 찾는데 상당히 이롭다. 이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