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는 그런 둘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 뒤
다음날로 그들을 돌려보냈다.
몸만 놓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거느리고 있던 군마를 모두 되돌려주고 성밖까지 나가서 배웅할 정도였다.
그런 유비에게 유대와 왕충은 더욱 감격했다.
진정으로 떠나기 싫은 듯 작별했다.
그런데 채 10리도 가기 전이었다.
갑자기 한차례 북소리가 울리더니
장비가 길을 막아서며 놋그릇 깨지는 소리를 냈다.
"우리 형님은 도무지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시는 분이군.
일껀 사로잡은 적장을 어째서 놓아보낸단 말인가? 안 된다.
나는 네놈들을 놓아줄 수 없다!"
놀란 유대와 왕충이 애절하게 빌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고리눈을 부릅뜨며 금세 창을 들어내려 찌를 기세였다.
그때 누군가 저만큼 등뒤에서
장비에게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아우는 무례하지 마라!"
유대와 왕충이 보니 관우가 말을 달려오며 외치는 소리였다.
둘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이미 형님께서 두 분을 놓아주셨거늘
아우는 어찌하여 그 영을 어기려 드나?"
달려온 관우가 엄한 얼굴로 꾸짖듯 물었다.
장비도 지지 않고 불퉁거리며 대꾸했다.
"지금 놓아 보내면 다음에 또 올 것 아니오?
그런 걸 어찌 그냥 보낸단 말씀이오?"
"저들이 다음에 또다시 오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다.
물러서라."
관우가 그렇게 말하고 유대와 왕충도 입을 모아 맹세했다.
"승상께서 우리 3족을 모두 죽인다 해도 다시는 오지 않겠습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너그러이 보아주십시오."
그러나 장비는 다시 한번 무섭게 둘을 얼러댄 뒤에야
길을 비켜 주었다.
"조조가 직접 온다 해도 죽어 갑옷 한 조각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너희 따위겠느냐?
이번에는 잠시 너희 두 덩어리 머리를 그대로 붙여 둘 것이니
반드시 그걸 잊지 말아라."
유대와 왕충은 그 말에 대꾸조차 변변히 못하고
머리를 싸안은 채 쥐새끼 달아나듯 달아나기에 바빴다.
그들이 산굽이를 돌아 완연히 사라지자
관우와 장비는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유대와 왕충에게 준 은의(恩義)의 빚을
두 배로 늘리려는 유비의 명을 받아 꾸며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우와 장비로부터
그 일의 전말을 듣는 유비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조조는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다."
유비가 탄식 섞어 그렇게 말하자 손건이 곁에서 조심스레 말했다.
"서주는 사방이 트여 있어 적이 오면 막기 어려운 땅입니다.
오래 머물 곳이 못 됩니다.
군사를 하비와 소패에 나누어 서로 돕고 의지하는 형세를 이룸으로써
조조를 막도록 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바로 얼마 전에 여포가 썼던 방식이었다.
그때는 소패와 하비가 각기 진등과 진규의 계략에
어이없이 떨어지는 바람에 실효를 거둘 수 없었으나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낸다면 그것도 한 방책일 수 있었다.
이에 유비는 손건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군사를 셋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관우에게 딸려 미부인`감부인과 함께 하비로 가게하고,
다른 하나는 손건`간옹`미축`미방 네 사람에게 딸려 서주를 지키게 했으며,
나머지는 유비 자신과 장비가 이끌고 소패에 둔병하도록 했다.
☆☆☆
한편 허도로 돌아간 유대와 왕충은
입을 모아 유비의 허물없음을 조조에게 변호했다.
그 길만이 유비의 목숨 살려준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싸움에 진 책임을 더는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조는 보지 않고도 일의 앞뒤를 알 것 같았다.
그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난 목소리로 꾸짖었다.
"나라를 욕되게 한 무리들이다. 네놈들을 살려둔들 어디다 쓰겠느냐?"
그리고는 좌우를 돌아보며 차갑게 영을 내렸다.
"저 두 놈을 끌어내 목을 베어라!"
그때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공융이 말렸다.
"저 두 사람은 원래 유비의 적수가 못 됐습니다.
만약 지금 목을 베신다면 다른 장수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렵습니다."
그 말에 조조도 치솟던 노기를 조금 가라앉혔다.
원래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내보내 놓고 졌다고 목을 벤다면
누가 자신 없는 싸움을 하려 들것인가.
이에 조조는 유대와 왕충을 죽이는 대신
그 벼슬을 거두고 내쫓는 것으로 일을 맺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괘씸한 것은 유비였다.
이미 자신이 아끼는 차주를 함부로 죽이고 서주를 차지한데다
원소까지 부추겨 큰 싸움에 몰아넣고도,
어수룩한 유대와 왕충을 이용해 발뺌을 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원래부터 유비에게 품고 있는 의심까지 발동하자
조조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서주로 가 유비가 더 세력이 크기 전에 잡아죽이지 않으면
마침내 큰일을 그르치게 될 것 같은 예감이었다.
조조가 다시 대군을 일으키려 하자 이번에도 공융이 말리고 나섰다.
"지금은 겨울이 한창이라 가볍게 군사를 움직여서는 아니 됩니다.
내년 봄이라도 늦지 않으니,
그 전에 먼저 두 사람을 끌어들이는 일부터 손을 쓰도록 하십시오."
"두 사람을 끌어들이는 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조조가 갑작스러운지 공융을 쳐다보며 물었다.
"장수와 유표입니다.
서주의 유현덕은 그 둘을 끌어들인 연후 다시 도모하도록 하십시오."
공융이 대답했다.
공자의 자손이요 당대의 재사로
한때는 조조와 같은 제후의 열에서 동탁을 치기 위해 싸운 적도 있었으나
그 무렵은 거의 조조의 모사와 다름없었다.
공융의 말을 들은 조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엄동설한에 군사를 일으킨다는 것은 아무리 일이 급하다 해도 무리였다.
거기다가 장수와 유표는 모두 서주와 접한 땅에 근거를 갖고 있어
그들만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서주는 반 이상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조조는 공융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먼저 유엽을 양양으로 보내 장수를 달래도록 했다.
양양으로 간 유엽은
장수를 만나기 앞서 그의 모사 가후부터 찾아갔다.
그가 장수의 머리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한 일이었다.
가후 또한 세상 돌아가는 형세에 어두운 사람이 아니었다.
유엽이 조조의 위세와 성덕을 다 늘어놓기도 전에 마음을 정했다.
"얼마간만 제 집에 머물고 계시오.
내 밖의 형편을 보아가며 이 일을 승상께서 바라시는 쪽으로 맺어 보겠소."
그렇게 말하고
자기 집에 머물게 한 뒤 다음날 일찍 장수를 찾아갔다.
"조공께서 유엽이란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가후는 장수와 마주앉아 조심스레 그 일을 꺼냈다.
하지만 몇 번이나 조조를 궁지에 빠뜨리고
그 아들과 조카며 아끼는 전위까지 죽인 장수로서는
아무리 가후의 말이라 해도 선뜻 투항할 마음이 내킬 리 없었다.
그래서 절로 의논이 길어지는데 갑자기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하북 원소로부터 사자가 왔습니다."
장수가 그 사자를 들게 하여 원소가 보낸 글을 읽어보니
역시 자기를 끌어들이려는 글이었다.
한꺼번에 두 곳에서 사람이 와 얼른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가후가 문득 사자에게 물었다.
"요즈음 원공께서는 크게 군사를 일으켜
조조를 치셨다는 데 승패가 어떠했소?"
"날씨가 추워 잠시 군사를 물렸소이다.
이제 장군과 형주 유표 두 분이 모두 나라를 근심하는 선비의 기풍이 있다 하여
특히 청을 드리고자 왔습니다.
저희 주공과 힘을 합쳐 역적 조조를 치심이 어떠할는지요?"
사자가 능란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가후는 한참을 껄껄거리더니
사자가 보는 앞에서 원소의 글을 찢으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가서 원본초더러 말하시오.
그대는 형제도 서로 용납치 못했으면서 어찌 국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고."
그리고는 사자를 꾸짖어 내쫓았다.
장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지금 원소는 강하고 조조는 약하오.
그런데 원소가 보낸 글을 찢고 사자를 꾸짖어 내쫓았으니
만약 원소의 대군이 이른다면 어떻게 감당하실 작정이오?"
"조조를 따르는 수밖에 없겠지요."
가후가 태연스레 대답했다.
장수가 더욱 어두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
"나는 이미 그와 원수 진 사이외다. 그런데 어떻게 서로 용납할 수 있겠소?"
"장군께서 조조를 따라야 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무릇 조조는 천자를 모시고 그 조서를 받들어 천하를 정벌하고 있으니
그것이 장군께서 그를 마땅히 따라야 할 첫 번째 이유입니다.
또 원소는 강성하고 우리는 약해
그를 따라도 원소는 우리를 중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지만,
조조는 약해 우리를 얻은 걸 반드시 기뻐할 것이니
그것이 조조를 따라야 할 두 번째 이유가 됩니다.
세 번째는 바로 장군의 기우를 덜어주는 것으로,
조조에게는 저 오패와 같은 큰 뜻이 있으니
사사로운 원한을 잊고 밝은 덕을 사해에 두루 끼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가후가 하나하나 조리 있게 대답하자 장수도 알아들을 만했다.
가후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먼저 유엽을 만나보았다.
"승상께서 만약 지난 원한을 잊지 않고 계시다면
어찌 나를 사자로 보내셨겠습니까?"
유엽도 그렇게 장수를 안심시켰다.
☆☆☆
드디어 마음을 정한 장수는
곧 바로 가후와 함께 허도로 올라가 조조에게 투항했다.
장수는 계하에 엎드려 절하며 조조에게 항복의 뜻을 표했다.
조조는 황망히 그를 부축해 일으키고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게 작은 허물이 있소이다만 모두 잊어주시오."
지난날 자신에게 대적해 싸운 장수의 허물은 묻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추며 잊어주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수를 양무장군에 봉하는 한편
그를 따라온 가후도 집금오를 삼았다.
어떤 종류의 감상적인 인간에게는
그 같은 조조에게서 비정 이상의 섬뜩한 계산을 느낄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 앙과 조카 안민,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맹스럽고 충직한 전위를 죽게 한 장수였다.
육수 가와 남양성 아래서 두 번이나 자신을 패주시키고
몇 번이나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들었던 그를
조조는 기꺼이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벼슬까지 높여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현실의 냉혹함과 당시의 천하형세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돋보이는 것은 조조의 정신적인 크기이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 큰일을 그르친 일은
옛과 이제를 통해 얼마나 자주 보는 정치적 실패의 예인가.
그런데 조조는 그런 감정을 절제함으로써 두 가지의 큰 이득을 얻고 있다.
하나는 원소와의 싸움에서 부족한 자신의 힘을 보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고 작은 적들에게 자신의 관용성을 효과적으로 선전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혈육과 아끼는 부하를 죽이고 자신의 목숨까지 노렸던 장수도
그토록 쉽게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조조를 보고
누구든 궁지에 빠지기만 하면 항복을 생각할 것은 뻔했고
실제로도 조조는 그 뒤 군웅들 가운데서 많은 항복을 받아낸 사람이 되었다.
☆☆☆
장수를 끌어들인 조조가 다음으로 손을 뻗친 것은 유표였다.
한때 그와 힘을 합쳐 싸운 적이 있는 장수에게 유표를 끌어들이기 위한 글을 짓게 하자
이제는 반 넘어 조조의 사람이 된 가후가 나서서 말했다.
"유경승은 천하에 이름을 떨친 이들과 사귀기를 좋아합니다.
반드시 문명이 드높은 이를 한 사람 골라 보내도록 하십시오.
그런 사람이 가서 달래야만 항복할 것입니다."
조조도 세상의 이름을 중하게 여기는 유표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다.
가후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순유에게 물었다.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소?"
"공문거를 보내십시오. 그라면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순유가 대뜸 공융을 추천했다.
조조도 그 말을 옳게 여겨 순유를 공융에게 보냈다.
"승상께서 한 사람의 글로 이름 있는 이를 뽑아 유표에게 보내고자 하시오.
공께서 이 일을 한번 맡아보지 않으시겠소?"
"내 친구에 예형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 재주가 나보다 열 배나 낫소.
이 사람은 마땅히 황제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니
이번에 가는 일 뿐만 아니라도 폐하께 추천하려 했소.
그가 오거든 한번 보내 보시지요."
공융은 그 말과 함께 순유를 보내고
곧 헌제께 예형을 추천하는 표를 올렸다.
예형은 평원사람으로 자를 정평이라 했다.
그때 겨우 나이 스물 넷이었는데 한번 읽은 것은 그대로 욀 수 있고
들은 소리 또한 잊는가 대쪽 같으니 많지 않은 그 나이에 이미 널리 이름을 얻고 있었다.
조조의 뜻이 곧 천자의 뜻과 다름이 없어 공융의 표문이 올라오자마자
조조는 천자로 하여금 예형을 불러들이게 했다.
천자의 부름이라 예형이 어기지 못하고 나오나
천자는 그를 조조의 승상부로 보냈다.
그런데 일생을 통해 조조에게 한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은
학식 많고 재주 있는 이들에 대한 까닭 모를 적의이다.
뒤로 갈수록 겉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아마도 그 첫 번째 희생이 예형일 것이다.
떠들썩한 이름 때문에 불러들이기는 했으나 예형을 본 조조는
그의 꼿꼿한 태도와 쏘아보는 듯한 눈길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로 처음 보는 예를 끝낸 뒤에도 예형에게 앉으란 말조차 없었다.
예형도 이내 그 같은 조조의 속마음을 읽었다.
재주 있는 이 특유의 오기가 솟아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보며 한소리 탄식을 내뱉었다.
"하늘과 땅 사이가 넓다 하나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예형의 그 같은 탄식에 조조가 괴이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 밑에는 수십 명이나 되는 당대 영웅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너는 어찌 사람이 없다고 하느냐?"
"바라건대 어떤 사람들인지 들려주십시오."
예형이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조조가 하나하나 손을 꼽기 시작했다.
"순욱`순유`정욱`곽가는 임기응변에 능하고 지혜가 많으니
옛적 소하나 진평 같은 이도 오히려 도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또 장료`허저`악진`이전 등은 그 용맹을 당할 사람이 없으니
저 무제 때의 명장 잠팽이나 광무제 때의 명장 마무가 되살아난다 해도
그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여건`만총 등은 종사일을 보는데 따를 사람이 없고,
우금`서황 등은 선봉장으로 특히 뛰어났다.
하후돈 또한 천하의 기재이며
조자효는 세상이 다 아는 좋은 장수다. 어찌 사람이 없다 하겠느냐?"
☆☆☆
그러자 예형은 가소롭다는 듯 웃다가 거침없이 말했다.
"공의 말씀은 맞지 아니합니다.
그들은 내가 모두 알고 있으니 한번 들어보십시오.
순욱은 초상집 문상과 병든 사람 문병이나 시킬 만하고,
순유는 묘지기 노릇이 알맞을 것입니다.
정욱은 관의 문지기로 삼아 관문이나 여닫으면 될 것이고,
곽가는 글이나 되고 짓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장료는 북이나 치게 하고,
허저는 마소나 기르게 하며,
이전은 편지나 격문을 나르게 하면 되겠지요.
여건은 칼이나 벼리고 갈며,
만총은 술지게미를 안주로 술이나 마시면 되고,
우금은 널빤지를 지고 담장이나 만들 사람이지요.
하후돈은 겉보기가 그럴듯하니 완체장군이라 부르면 되고
조자효는 인색하니 요전태수라고 이름하면 될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옷을 걸쳤으니 옷걸이요,
밥을 먹으니 밥 주머니요,
술을 마시니 술독이며,
고기를 먹으니 고기 자루라 부르면 될 자들뿐입니다."
자기가 아끼는 사람들을 모두 보잘것없이 깎아 내리자
조조는 성이 났다.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따지듯 예형에게 물었다.
"그럼 그대는 무엇을 잘 하는가?"
예형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천문과 지리에 두루 통하지 못함이 없으며,
세 가지 큰 가르침과 그 아홉 가지 갈래에도 막힘이 없습니다.
위로 임금을 섬기면 요`순에 이르게 할 수 있으며,
아래로 짝하면 그 덕이 공자나 안연에 미칠 수 있습니다.
어찌 속된 무리들과 함께 섞어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눈앞에 사람이 없는 듯한 태도였다.
그때 마침 장료가 조조 곁에 있다가
예형의 그 같은 언동에 더 참지 못했다.
칼을 빼어 찔러 죽이려 하자 조조가 말렸다.
"마침 내가 북치는 자가 필요하다. 머지않아 조정에서 연회가 있을 것인즉,
예형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 해야겠다."
그리고 예형에게 물었다.
"어떠냐? 그래도 북잡이는 벼슬아치니 네가 한번 해보겠느냐?"
조조의 내심은 그렇게 함으로써 예형을 조정의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어찌된 셈이지 예형은
그 하찮은 벼슬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해보지요."
그 한 마디로 응낙하고 조조 앞을 물러났다.
"저 놈의 말투가 불손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째서 죽이지 못하게 말리셨습니까?"
예형이 나간 뒤
장료가 불쾌한 얼굴로 조조에게 물었다.
조조가 뜻 깊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 작자가 그래도 헛된 이름이 높아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알려져 있네.
오늘 만약 그를 죽였다면 천하 사람들은 내가 그를 쓰지 못해 그랬다고 말할 것이네.
그렇게 되면 저만 잘난 인물로 추앙 받게 만들어 줄 뿐이야.
그래서 일부러 북 치기 같은 하찮은 일자리를 주어 그를 욕보이려 한 것이네."
그 말에 장료도 가만히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