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문에서 버스로 낙원회관에서 한식 뷔페로 점심을 먹고 찾은 곳이 민주화 과정 의 어두운 흔적이 남아 있는 남명동대공분실을 찾았다. 이 곳은 6월항쟁의 불씨가 된 박종철의 고문 치사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경찰은 고문 사실을 숨기기 위해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궁색한 변명을 내놓아 국민들의 분노를 쌌다. 이 사건은 부검의였던 오연상이 물고문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사인을 기자에게 알리면서 진상이 들어나기 시작하였고, 이후 당국이 축소 은폐를 시도하여 수사관 둘만이 단독으로 저지른 일로 몰아가려고 하자 서울영등포구치소 보안계장 안유가 당시 구치소에 있던 재야인사에게 폭로하였다. 안유의 폭로는 우여곡절을 거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게 전달되었고,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미사에서 〈고문 경찰 축소 조작〉을 폭로하여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우리는 이런 무시무시한 현장에 들어서는 것 만으로도 공포감이 엄습해온다. 아무이유없이 이 곳에 끌려온 많은 사람들이 5층 취조실로 끌려 올라갈 때 느꼈을 공포심이 어땠을까? 희생 된 많은 분들에게 미안해 진다. 우리 아이들도 조금은 알것 같은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열심히 설명을 듣고 궁금한 것을 질문도 한다. 해설사님도 아이들도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돌아보다보니 어느새 약속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서둘러 마무리를 하고 버스에 탑승하여 마지막 장소인 사육신공원으로 갔다. 사육신을 모신 사당 의절사에 참배하고 사육신 묘를 둘러보며 신하로서의 충심을 죽음으로 항변한 사육신의 뜻깊은 죽음에 숙연해진다.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답사소감을 또박또박 발표하는 아이들이 대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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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동 대공분실 지금은 경찰청인권센터
앞으로는 민주이권기념관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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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이 세워진 날짜를 세긴 정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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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이 이건물의 바람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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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대공분실의 역할에 대하여 설명해주시는 해설사님
남영동 대공분실(對共分室)은 대한민국 경찰청 산하의 대공 수사 기관이었다.
1976년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005년까지 보안분실로 사용되었다가 경찰의 과거사 청산 사업의 일환으로
경찰청 남영동 인권센터로 역할을 바꾸어 운영 중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위치는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71길 37
(옛주소 서울 용산구 갈월동 98-8번지)로 법정 행정구역은 용산구 갈월동이지만,
건물 바로 옆으로 남영역이 있어서 남영동 대공분실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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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 해도 음산하고 기분이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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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로 팔각형 기둥을 표현하다보니 이런 독특한 모서리모양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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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영화1987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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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공터인 곳에 도 다른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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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활짝 열려있는 이 철대문은 대공분실로 있을 때는 이 중의 철문으로 꽁꽁 막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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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면의 작은 창문은 이 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도록
외부에서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작게 만들었으며
안에서도 밖을 내다 볼 수 없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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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으로 끌려온 수감자는 이 문을 통해 안로 끌려갔다.
밖에서 보았을 때 문이 잘 보이지 않도록 둥근 벽안에 감춰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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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형계단을 따라 5층까지 올라왔다. 눈을 가린채 나선형계단을 오를때 나는 발자국소리는 아마도 심장을 쾅쾅내리치는 소리로 들려왔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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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층까지 올라오면 긴 복도를 따라 16개의 방이 늘어서 있다.
잘 살펴보면 문과 문이 마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 사이로 문이 나있다.
건너편 고문실이 보이지 않도록...
이 초록색문 너머에서 무슨일이 벌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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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구조를 상펴보자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낮은 칸막이로 가려진 공간이 나온다.
이 곳이 바로 물고문과 전기고문이 이루어진 공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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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문 위의 작은 구멍은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 보며
수감자의 행동을 감시하는 렌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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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색유리판 뒤에는 cctv가 설치 되어 있어 이 모든 행동을
3층 관제실에서 모두 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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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사건 이후로 물고문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욕조대신에 변기와 세면대로 교체했다고 한다
아래사진처럼
그리고 벽면은 모두 타공석고보드로 붙여져 있다.
그이유는 방안에서 나는 소리를 이 타공이 흡수하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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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막이가 낮은 이유는 감춰진 cctv로 잘 감시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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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영화의 모티브가 된 그리고 6월 항쟁의 불꽃이 된 박종철열사의 죽음의 현장이다.
509호 수감실 이 곳에서 그는 물고문과 심한 구타로 결국은 꽃다운 나이에 죽임을 당했다.
박종철 열사(1965~1987)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7년 1월 14일 새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참고인 신분으로 연행된다
이후 그는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가로 123㎝, 세로 74㎝, 높이 57㎝의 욕조에서 물고문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참고인 신분이라는 법적 지위는 그를 지켜내지 못했다.
헌법 위의 권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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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호실 이곳은 다른 곳과 달리 두배로 공간이 넓다.
왜 이런 공간이 필요했을까? 수감자를 좀 더 넓은 공간에서 지내게 하기 위한 배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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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중에 칠성판을 돌린다는 말이 있지요
칠성판은 사람이 죽으면 관 바닥에 칠성판을 깔아 하늘의 문을 통과해
북쪽으로 돌아가는 존재라고 믿었지요.
결국 질성판은 전기고문을 하기 위한 둥근판인데 사람을 누일 정도로 큰 둥근 쇠판 으로
그만큼 큰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에 514호 와 515호는 전기고문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칠성판 위에 올려져 전기고문을 당한다면 거짓진실도 말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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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근태선생이 고문당했던 515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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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공원입구로 들어가는 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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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절사에서 참배하는 향토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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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지묘(김문기)
김문기(金文起, 1399년 ~ 1456년)는 초명은 효기(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혹은 마암(馬巖), 김녕 김씨(金寧 金氏) 충의공파(忠毅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충청북도 옥천 출신으로 조선의 문신이며 단종의 충신 즉, 삼중신 중 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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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지묘(박팽년)
박팽년(朴彭年, 1417년 ~ 1456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 겸 학자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字)는 인수,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의 학사로 활동했고, 관직은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손자 박일산이 생존하여 사육신 중 하위지가와 함께 후손이 전한다.
세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1456년, 형조참판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6월 2일 잡혀 갔으며, 고문 받던 중 6월7일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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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씨지묘(유응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첨지중추원사·경원절제사를 지내고 1452년(단종 즉위) 의주목사, 1453년 평안좌도절제사 등을 역임했으며, 1455년(세조 1) 동지중추원사에 임명되었다.
세조 즉위 후 전직·현직 집현전 출신인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모의했다.
이 모의가 실패하고 밀고가 들어가면서 주모자 6명이 형을 받거나 자살했다.
유응부는 세조의 국문에 답하다가 더 극심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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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개(李塏, 1417년 ~ 1456년)는 조선시대 전기의 학자이자 관리이며,
성삼문, 신숙주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하였다.
또한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청보(淸甫) 또는 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다.
고려시대 말기의 학자 목은 이색의 증손자이다.
1436년 문과에 급제한 후, 1441년 세종에 의해 집현전 학자가 되었다.
그해 저작랑(著作郞)으로 《명황계감》(明皇戒鑑)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집현전 학사로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참여했다.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하였다.
1455년에 단종이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자,
1456년(세조 2) 이개는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되었으나 고위 관리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붙잡혀 형문을 당한 후 아들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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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원(柳誠源, ?~ 1456년)은 조선의 문신이자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으로 자는 태초(太初), 시호는 절의(節義), 뒤에 충경(忠景)을 더하였다.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사인(舍人) 유사근(柳士根)의 아들로 1444년(세종 26) 문과에 급제하여
1447년(세종 29)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호당(湖當)에 들고,
집현전 학사로 있으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등 조정의 대신들을 죽이고
스스로 영의정부사·이조판서·호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를 겸한 뒤,
교서(敎書)를 만들어 그 훈공을 기록하려 할 때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도망했으나,
유성원만이 혼자 잡혀서 협박 끝에 정난공신의 공로를 기록하는 교서를 쓰고 집에 돌아와 통곡했다. 그 후 1456년(세조 2) 성삼문·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탄로되자 집에 돌아와 아내와 이별의 술잔을 나누고 조상의 사당에서 칼로 자결하였다.
자결을 한 후 시체는 1456년(세조 2) 6월 7일 거열형(車裂刑,
다리를 두 개의 수레에 각각 묶어 몸을 찢어 죽이던 형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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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 6월 8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
생원으로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였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아버지 성승·박팽년 등과 같이 상왕(上王 :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에 착오가 생겨 세조의 직접 심문과 가혹한 고문 끝에 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김문기와 함께 군기시(軍器寺)(지금의 태평로 근처)에서 처형되었으니 이를 사육신이라 한다.
사형에 임하여 그는 죽기 전에 시 한수를 지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어 있어.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때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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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씨지묘(하위지)
하위지(河緯地, 1412년 ~ 1456년)는 조선 전기의 문신, 정치인, 학자이며
조선 단종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진양(晉陽). 자(字)는 천장(天章)ᆞ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 적촌(赤村), 연풍(延風)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의 측근들에 의해 강압을 받아 양위하자,
성승, 유응부, 성삼문, 김질 등과 함께 세조 3부자를 타살하고 단종 복위를 거사했다가
회유 또는 실패를 예상한 성균관사예 김질의 밀고 로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첫댓글 박종철 열사의 추모하는 방을 보니
Vincent - Don McLean (Starry, Starry Night)
https://www.youtube.com/watch?v=Ooi2yP_v9IM
가 생각납니다.
노래 가사에서
빈센트(고흐)
라는 말 대신
<박종철>
로 바꾸어 노랠 들어 보시면
의미 전달이 됩니다.
Starry, Starry Night....
이 노래도
박종철 열사의 군사 정부시절
미디어를 통해 즐겨 들었던 곡입니다.
그 때는
고흐
만 추모한 곡으로 알았지만
이제는 박종철 열사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들어도 의미가 통합니다.
<고흐>의 시대와 다른 점은
박종철 열사 사망 당시와 달리
우리 사회는 민주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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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수근께서 남영동 대공분실 (1976년)을 지었군요.
향토회에서
2012-6-23 국립부여박물관(1967년)
2011-7-23 국립청주박물관 (1979년)
각각 다녀 온 적이 있는데
이 두 건물이 김수근 선생의 작품입니다.
남영동 대공분실 (1976년)은
공간사옥 (1971년)을 만든 후여서
공간사옥과 많이 닮긴 했지만
한 단계 업그래이드된 느낌입니다.
그의 건물 특징은
부산향토회원들이
국립청주박물관에서 보셨듯이
마당을 가운데 두고
여러 공간이 하나의 집을 이루는 한옥처럼
건물을 여러 동으로 나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