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 - 이에 해당하는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자비하지 않은 민족으로부터'이다. 이것은 시편 저자를 향하여 조그마한 자비심도 나타내 보이지 않았던 것, 곧 대적들이 저자를 혹독하고 부당하게 다루었던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상황의 묘사는 다윗 그의 집과 권좌 (權座)에서 내어 쫓겼던 압살롬의 반역을 연상시킨다(삼하 15장). 하지만 본 시편이 42편과 연결되는 시편이라는 점에서 42편과 함께 저자는 고라 자손으로 보는 것이 더 무난할 것이다.
=====43:2
버리셨나이까 - 42:9에서 ' 으셨나이까'로 표현했던 저자는 이제 '버리셨나이까'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자나' 로서 강한 혐오감 내지는 역겨움을 반영하는 말이다. 또한 이 용어는 예수님께서 신약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더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입에서 토해 내겠다고셨는데 바로 이 '토해내다'와 의미가 통하는 말이기도 하다(계 3:16). 이제 '잊으셨느냐'는 표현 대신 입에서 토해내듯 '버리셨느냐'는 좀더 강한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대적으로 인한 고난의 강도가 좀더 세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표현은 이어서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에 대한 짜증, 빈정거림, 자포 자기의 성격은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43:3
빛과...진리를 보내어 - 자주 사용하던'인애와 진리' 대신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손을 잡고 인도하듯 이끌어서 성소, 제단에까지 이르러 감사제를 드리도록 하게 할 천사들을 기자가 염두에 두었음을 반영한다(Perowne). 성경은 인격체인 천사를 빛, 진리로 부르기도 하는데(91:11) 기자는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자신을 이끌어 주시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43:4
나의 극락(極樂)의 하나님 -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기쁨중의 기쁨이신 나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최고의 기쁨을 제공하는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기자의 고백이다. 더군다나 극한 고통을 당하던 끝에 드디어 하나님 전에, 나아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때 기자가 맛보게 될 때 기쁨은 최고의 기쁨이 될 것이 분명하다.
=====43:5
내 영혼아...찬송하리로다 - 42:5, 11과 동일한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42, 43편의후렴구이기도 한 본 시편의 내용은 본 시편의 저자가 동일인임을 간접 증명하는 구실도하고 있다(Barnes).
하나님께 대한 확신에 찬 기도로 되어 있는 본시는 제목이 없으므로 '고아 시편'이라고도 불리워지는데, 원래 42편과 하나의 시로 연결되어 잇다가 후대의 필요에 의해서 나누어진 것으로 추측되어진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의 완전히 독립된 찬송으로 볼수도 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서 성전 예배에 동참하기를 갈망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담은 본시는 하나님을 향해 탄원하는 전반부(1-3절)와, 서원과 찬양이 들어있는 후반부(4, 5절)로 구성되어 있다.
본시의 역사적 배경과 시의 유형은 42편과 동일하다(42편 강해 참조), 즉, 고라 자
손 중의 한 사람이 성전을 멀리 떠나 요단 북쪽에 머무르면서 원수의 조롱과 핍박을 받을 때에 성전에서 봉사하던 시절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겨 쓴 시로 일반적으로 '개인적 비탄시'로 분류될 수 잇다. 대부분의 개인적인 비탄시처럼, 본시도 당면한 고난과 핍박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찬양으로 끝을 맺고 있다.
42편의 세 번째 연에 해당하는 본시는 과거와 미래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현저한 발전을 보여 준다. 앞의 시(42편)에서 드러났던 불평, 분노, 희망이, 이제는 그에 따르는 신념의 기도로 완성되어 나타난다. 자신과의 한숨섞인 내적 대화는 이제 하난미과의 영원한 대화로 발전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아픔과 원수의 조롱으로 인하여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시인은 자기 연민에 빠져 헤매이지 않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변호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부각시킨다. 또한 수수동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감내(堪耐)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확신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이제 비탄에서 발전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발전하고 있는 본시의 내용을 좀더 세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을 위한 변호(1, 2절). 시인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을 접
어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도를 시작하고 있다. 기도의 내용에 있어서도 단순히 자신의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당성을 변호하는 일종의 변증적 성격을 띠고 있다. 시인은 이제 자신의 고통에 대한 하소연이나 원망을 하는 것이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송사를 하고 잇는 것이다. 여기서 자륀느 시인의 관점이 새롭게 변화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문제를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에 대한 모욕보다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 멸시되는 상황을 더욱 안타까워 하면서 하나님께 변증적 기도를 드린다. 이러한 시인의 기도는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 하에서는 할 수 없는 내용이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근시안적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시인은 수동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세상의 주권자로 인식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둘째, 성소에서 하나니을 찬양하고 싶은 소원(3, 4절).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는 본 대목은 (1) 성소 귀환에 대한 소망(3절), (2)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4
절) 등,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시인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원수들 앞에서 높여지도록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러면 자신의 유리(流離)하는 신세를 비웃던 원수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시인이 요청하고 있는 시온으로의 귀환은 단지 장소적이고 육체적인 이동이 아니라 내면 속에서 하나님을 접하는 영적 실재를 의미한다. 사실 시인이 그토록 애타게 성소를 사모하는 것은 성소를 단순히 향수적 회상의 장소가 아닌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만나고 체험하는 공간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귀환의 소망은 시인의 서원으로 이어진다(4절). 자신이 성소로 돌아가면 반드시 한나가께 나아가 기쁨으로 찬양할 것을 다짐한다. 여기에는 시인의 기도와 시인의 확신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드디어 시인은 자신의 갈증을 영원히 해소할 수 있는 생수의 근원을 찾았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을 충만하게 할 유일한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주를 찬양할 것을 하나님께 맹세한다. 그러난 사실상 이것은 조건을 동반한 서원이라기보다는 시인의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삶의 간증이요 고백인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확신에 도달하면서 이전에 느꼈던 모든 불안과 좌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찬양에 도달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시인은 무기력한 좌절의 심연(深淵)에서 헤매이지 않는다.
시인은 극락(極樂)의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영원한 보호자이신 주님을 찬양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
셋째, 하나님께 대한 찬양(5절). 앞의 시에서 두 번이나 반복되었던 후렴구(42:5,
11)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등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후렴구의 내용은 여전히 동일할지라도 그 의미에 잇어서는 더욱 심오한 진전이 이루어졌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앞 부분에서는 상대적으로 전반절이 강조된 반면, 여기서는 후반절이 더욱 부각되었다. 시인은 많은 고통을 겪은 이후에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신앙에 도달하였다. 자기 자신과의 내면적 대화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찬양하는 신앙에 도달하엿다. 자기 자신과의 내면적 대화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시하게 되엇던 것이다. 시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참된 기
도는 모든 불평과 원망을 극복하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낙심치 말고 더욱 기도함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눅 18:1;엡 6:!8).
(2) 우리는 모든 일을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성전(聖殿)에서 예배드리던 기억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42:4), 오직 여호와를 직접 대면함으로써만 가능했다(4절).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데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과 직접 접하도록 노력해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