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에서 읽는 징비록(懲毖錄)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장안의 화제를 모으는 영화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배경은 병자호란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임진왜란과 참 많이도 닮았구나 생각했다. 두 전쟁의 침략 형태로 보면 일본의 전국(戰國)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명나라를 치겠다며 16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해온 전쟁이 1592년 임진왜란이었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다시 쳐들어온 전쟁이 1597년 정유재란이었다. 여진의 제족(諸族)을 통일한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명나라만 섬기려는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 1627년 정묘호란이었고 이때의 협약이행에 불만을 품고 12만 대군으로 다시 쳐들어온 전쟁이 1636년 병자호란이었다. 두 전쟁의 침략 피해로 보면 임진왜란의 임금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갔고, 병자호란의 임금 인조는 도성을 비우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선조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포로로 잡혀갔고 인조의 두 왕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끌려갔다. 임진년(1592)에는 남쪽의 일본에 당했고 병자년(1636)에는 북쪽의 청나라에 당했으니 우호선린이 아니라 철천지원수였다. 장장 7년간의 임진왜란은 일본을 물리친 승리의 전쟁으로 불과 두 달간의 병자호란은 청나라에 항복한 패배의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임진년(1592) 4월13일, 왜적들이 현해탄을 넘어 부산으로 쳐들어 왔다. 이때 관군인 부산진 첨사 정발, 동래 부사 송상현, 상주 순변사 이일, 충주 도순변사 신립이 차례로 죽거나 도망쳤다. 불과 20일 만에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성의 동쪽 동대문에 도달했을 때 임금 선조는 이미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뒤였다. 이때 의로운 백성들이 도처에서 봉기했으니 경상도에 김면·정인홍·곽재우, 전라도에 김덕령·고경명·김천일, 충청도에 조헌·영규(승)·이광륜, 황해도에 이정암, 함경도에 정문부, 묘향산의 휴정(승), 금강산의 유정(승) 등 의·승병이었다.
임진년 4월 30일, 선조실록의 모습이다. 임금 선조가 임진나루에서 배에 오르다가 따르는 신하들을 보고 엎드려 통곡하니 좌우가 눈물을 흘리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밤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한 개의 등촉도 없었다. 동파에 닿은 임금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도 철거시키자 백관들은 굶주리고 지쳐 촌가에 흩어져 잤다. 이때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절반을 넘었다. 적병이 뗏목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한 처사였다지만 임금이시여, 배를 타지 못한 신하와 백성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병자년(1636) 12월 9일, 청나라 군이 압록강을 넘어 의주로 쳐들어왔다. 불과 5일 만에 전봉장 마부대(馬夫大)가 한성의 서쪽 홍제원에 당도하자 임금 인조는 궁궐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도원수 김자점은 황해도 정방산성에서 청군을 막지 못했고, 충청 경상 전라 함경 평안 등 각도의 관찰사와 병사(兵使)들이 구원에 나섰지만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모두 패하여 죽거나 붙잡히니 남한산성은 고립무원이 되었다. 이때도 많은 의·승병이 봉기하니 전라도의 정홍명, 경상도의 김식회 등이었다. 단 두 달간의 전쟁으로 큰 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관군이 무너질 때마다 의로운 백성들이 봉기하니 진정한 애국은 민초들의 것이었다.
정축년(1637) 1월30일, 인조실록의 모습이다. 임금 인조가 삼전도에서 용포를 벗고 남색 융복을 입은 채 단(壇) 아래 엎드렸다. 청태종을 향해 한번 엎드려 절하고 세 번 이마를 찧기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이른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였다. 이때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도 엎드려 절하게 하니 보는 자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항복의식을 마친 인조에게 청태종은 오후 늦게 창경궁으로 환궁을 허락했다. 한강을 건너려고 소파진에 다다랐지만 진을 지키던 군사들은 모두 다 죽었고 빈 배 두 척만 남아 있었다. 백관들이 앞 다투어 배에 오르려고 임금의 어의(御衣)를 잡아당기니 군신의 구분이 없었다. 청나라에 끌려갈 일만 명의 백성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며 임금을 향해 울부짖었다. "임금이시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吾君、吾君, 捨我而去乎)......."
남한산성, 징비하지 않은 자의 비극
<남한산성(南漢山城)>의 관람 포인트는 첫째, 화친과 항전으로 대립하는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과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의 대결이다. 둘째, 항전에서 화친으로 의지가 변해가는 임금 인조의 판단과 결단이다. 최명길을 비롯한 주화파의 주장은 ‘일단 화친해서 나라가 보존된 뒤에야 비로소 와신상담(臥薪嘗膽) 할 수 있다는 것이고, 김상헌을 비롯한 척화파의 주장은 ‘일단 화친하면 적이 반드시 군신(君臣)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결사항전(決死抗戰) 하자는 것이었다.
임금 인조가 언급하는 항전의 의지를 보자. “정묘년(정묘호란)에 강화를 허락하여 치욕을 당한 것은 부득이한 계책이었다. 이번 병자년(병자호란)에 오랑캐가 대호(大號)를 참칭하고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므로 내가 천하의 대의를 위해 그들의 사자(使者)를 단호히 배척하였다. 이제 화의는 이미 끊어졌으니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싸워서 이기면 상하가 함께 살고 지면 함께 죽을 것이다.” 그러나 강도(江都, 강화도)가 함락되자 임금의 항전의지는 급격히 꺾이고 말았다. “처음 생각에 이런 일은 결코 따를 수 없고 오직 성을 등지고서 한 바탕 싸워 사직과 함께 죽으려 하였다. 그런데 군정(軍情)이 이미 변했고 사태도 크게 달라졌다. 밤낮으로 기대했던 것은 그래도 강도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자부(子婦)들이 모두 잡혔을 뿐만 아니라 백관의 족속들도 모두 결박당해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내가 혼자 산다 하더라도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다시 보겠는가." 하자, 제신(諸臣)이 목 놓아 통곡했다.
청태종이 언급하는 침략의 이유를 보자. “조선이 기미년(1619 광해군 11년)에 명나라와 협력해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해친 바 있고, 요동을 얻고 난 뒤에도 우리의 도망병들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치는가 하면 그래서 짐이 크게 노여워하여 정묘년(1627 정묘호란)에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그 뒤 10년 동안에도 조선은 우리를 배반하고 도망한 이들을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명나라 장수가 투항해 오면 군사를 일으켜 길을 막고 끊었으며, 우리의 구원병이 저들에게 갈 때에도 그대 나라의 군사가 대적하였으니, 이는 군사를 동원하게 된 단서가 또 그대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가 우리를 침략하기 위해 배(船)를 요구했을 때는 그대 나라가 즉시 넘겨주면서도 짐이 배(船, 임진왜란에서 맹활약한 이순신의 수군 전선)를 요구하며 명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는 번번이 인색하게 굴면서 기꺼이 내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명나라를 도와 우리를 해치려고 도모한 것이다.”
병자호란은 조선이 섬기는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으라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대대로 은혜를 입고 특히 임진왜란에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은 명나라를 배신할 수 없다는 것이 김상헌 등 척화파의 논리였다. 반대로 청나라가 이미 득세했고 강도와 정방산성이 무너지면 현실적으로 대처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 최명길 등 주화파의 주장이었다.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항복이나 다름없는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을 엄벌하라는 상소가 잇따랐다. 전 참봉 심광수가 최명길의 목을 베길 간청했고. 사간 이명웅 등도 최명길을 죄 줄 것을 상소했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최명길이 지은 국서는 곧 항서라며 갈기갈기 찢어가며 주벌을 간청했고, 이조참판 정온은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개의 임금이 없는 데 최명길이 두 개의 태양과 두 임금을 만들려하니 나라를 팔아넘긴 죄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상소했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이미 고립무원이 되었고 강도(江都)마저 함락되니 인조는 항전의 여력을 잃었다. 급기야 청태종은 화친을 배격한 척신(斥臣)들을 묶어 보내라 협박했다. 그러자 전 교리 윤집, 전 수찬 오달제가 오랑캐에게 묶여가 죽기를 자청했다. 이조참판 정온과 예조판서 김상헌이 스스로 칼을 빼어 자결을 시도했다. 결국 임금 인조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로서 청나라에 귀순하니 백기 항복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갔고, 화친을 반대했던 신하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이 포로로 묶여갔고, 죄 없는 백성 최소 30만 명이 심양으로 끌려갔다. 불과 2달간의 병자호란이 임진왜란 7년 전쟁 보다 더 큰 상처와 굴욕을 남겼으니 명·청 교체기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대가는 너무나 혹독하고 참담했다.
강화의 비극으로 읽는 징비록
병자호란에서 임금 인조가 항전의 의지를 꺾고 강화(講和)로 돌아선 결정적 동기는 강화(江華)의 함락이었다. 결과적으로 최명길이 주장하는 화친을 택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임진왜란에서 임금 선조가 전란에 대비하지 못한 결정적 동기는 통신사 김성일의 잘못된 보고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두 통신사, 정사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 했고, 부사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을 일으킬 인물이 못된다고 했다. 조선반도에 전쟁을 원치 않았던 임금 선조는 백성들의 동요를 원치 않았던 주도세력에 편승하니 7년 전쟁의 비극은 피할 수 없었고 김성일은 역사에 오점을 남긴 인물이 되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읽는 징비의 교훈이다. 척화로써 항전을 주장했던 김상헌도 강화로써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도 모두 구국의 충신이었다. 비록 외적에 대처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궁극적으로 나라를 위하는 애국지심이었다. 예컨대 임금의 명으로 쓴 최명길의 국서를 김상헌이 어전에 달려들어 항서라며 찢어버렸다. 그러나 최명길은 찢어진 국서를 주워 모으며 임금에게 고하기를, ‘조정에는 예판처럼 이 문서를 찢는 사람도 반드시 있어야하고 나와 같이 굴욕스런 국서를 쓰는 사람도 당연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비록 정적이라도 그 역할을 인정하고 배려하려는 존중의 정치가 있었다. 급기야 청태종이 화친을 배격한 신하를 묶어 보내라하자 전 교리 윤집과 전 수찬 오달제는 앞 다투어 묶여가기를 자청했고, 비록 중상에 그쳤지만 이조참판 정온은 차고 있던 칼로 자신의 배를 갈랐고 예조판서 김상헌도 자신의 목을 베었다. 청나라로 끌려갔던 윤집과 오달제는 결국 심양에서 참살을 당했다. 비록 자신의 주장에 반하는 항복이지만 나라의 굴욕은 결국 자신의 잘못이라는 책임의 정치가 있었다. 어둠의 권력으로 국사를 농단하고 정적을 모함하고 주군의 눈귀를 멀게 했던 간신들, 할복으로 책임지기는커녕 제살길만 모색하는 권력자들이 배워야할 덕목이다. 충신불화 화신불충(忠臣不和 和臣不忠), 충신은 임금과 잘 지내지 못하고 임금과 잘 지내는 신하는 불충이라 했건만, 충신은 멀리하여 눈귀를 틀어막고, 화신만 가까이하여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국가지도자가 배워야할 덕목이다.
17세기 전후의 두 전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징비해야할 교훈은 무엇인가, 조선은 사대와 의리를 앞세워 쇠락하는 명나라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발흥하는 일본과 청나라의 득세를 감지하지 못했다. 조선은 실리와 명분을 앞세워 자주국방의 방어력을 구축하지도 못했고 실사구시의 외교력을 구사하지도 못했다.
21세기 오늘의 한국은 한반도 전쟁과 외교전쟁에 직면해있다. 한국은 국익과 자주권을 앞세워 한반도 전쟁을 막기 위한 자강안보의 국방력을 확보해야할 것이다. 북핵도발에 대비하는 공조외교, 미중갈등에 대처하는 균형외교, 패권강국에 대응하는 자주외교를 펼쳐야할 것이다. <남한산성>에서 임진왜란을 회고했던 유성룡의 「징비록」 그 서문을 읽는 이유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내가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날의 근심거리를 삼가게 한다(子其懲而毖後患)’고 하였는데 이것이 징비록을 저작한 까닭이다.” -끝-
첫댓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제가 드린 발표문(남명학파 인물들)을 참고해보시면 안촌 배응경 선생이 한탄하는 장면을 실어놨습니다.정유재란 직전 체찰사의 명으로 수축한 남쪽의 거의 모든 산성이 정유재란 때 낙엽처럼 스러졌다는 안타까움입니다.당시에 성을 쌓은 것이 아니라 원성(怨聲)을 쌓은 것이라고 한탄하는 장면입니다.
설혹 학봉이 같이 동조를 하였다고 해도 임진왜란 전쟁대비태세는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그전에 왜의 사신이 조총을 건내주었고 전쟁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귀띰을 했지만 조정의 방비태세는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이 말입니다.
정탁님의 생각, 김성일이 동조했다 해도 임진왜란 전란대비태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에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황윤길의 보고를 따랐다 해도 왜적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고, 김성일의 보고를 따랐다 해도 선조가 전쟁대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보고를 한 김성일의 죄가 용납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김성일은 계속해서 같은 주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임란 직전인 1591년 11월의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왜란을 대비하는 것을 잘못된 계책이라 하였고, 이순신을 발탁한 것도 잘못된 정사라 했으며, 왜적의 침입에 대한 우려보다 영남백성의 원망을 더 우려했던 김성일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김성일이 논하는 시폐 10조의 차자를 보면 과연 김성일의 잘못된 보고가 침략의도를 알면서 허위로 보고했는지, 정말 침략의도를 몰랐던 무지의 보고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어떤 경우든 왜적이 침입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기는커녕 무책임한 처신을 했으니, 경상도초유사라는 직책을 다시 맡아 백성들을 타이르고 경계했다는 사실, 임란 초 도망쳤던 수사와 병사를 신랄하게 질타하여 상소했다는 사실 등입니다. 임란 발발 1년 만에 김성일은 병사했지만, 병자호란에서 의로운 반대를 했음에도 나라의 굴욕은 곧 자신의 잘못이라며 스스로 자결을 시도했던 김상헌과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병자호란 전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화약을 터뜨리고 분사(憤死)한 남이흥 장군이 있습니다.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나주목사 남유(南瑜)의 아들이죠.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다시 정묘호란에서 얻은 교훈을 징비하지 못한 조정 대신들을 보면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는데, 현재의 어느 정권도 징비의 교훈을 엊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방진님의 글에 공감합니다.
정묘, 병자호란에서도 많은 애국충신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충신의 후손들이 병자호란에서도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예컨대 충주전투의 도순변사 신립의 종사관이었던 김여물의 아들이 병자호란의 중심에 있던 영의정 김유였고, 김여물의 손자이자 김유의 아들인 김경징은 강화도 검찰사 였습니다. 또한 신립의 아들 신경진은 병자호란에서 김여물의 아들 영의정 김유의 지휘를 받으며 남한산성을 수비하던 훈련대장이었습니다. 물론 개인별 공과는 있지만 전란의 와중에 많은 충신들의 역할에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방진 맞습니다.공감합니다.ㅎ
철천지 원수지간 미일이 군사동맹 맺을 줄 누가 알았을까요ㆍ 국가간 의리는 존재할 수 없고 필요의 관점ㆍ전쟁방지 외교 줄타기 외교 백성이 평안한 실리외교가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는게 외교의 현실입니다. 국가간 의리는 지켜야 하는 것이 실리외교일 수 있고, 균형외교라는 것이 어느 쪽이나 똑같은 비중으로 외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경중에 맞는 비중으로 외교를 하는 게 균형외교일 것입니다. 자주성과 정체성 실리성이 모두 어우러질 수 있어야 하기에 어려운 외교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조선이 아주 형편없는 종모법 한번 종은 영원한 종 자자손손 신분제 국가였던 점도 병자호란 완패의 원인중 하나 아니었을까 합니다ㆍ임란때 전공을 세우면 양민되는 인센티브가 호란 때는 없었다 들었어요ㆍ제가 사는 경기도 광주 쌍령고개에서 아무리 오합지졸 이라해도 삼도군사 4만?이 여진족 기병 200?에게 유린 당했다 하는데 불과 30년전에 전면 실전을 치른 국가로서 청병이 아무리 강군이라 해도 이해 어렵지요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일어난 원인, 패한 원인 등은 매우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철저히 공부하고 반성하고 대비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시대를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는 눈을 주시는 방진님 복 많이많이 받으세요. 늘 감사합니다.
아직 남한산성 못보신 분을 위해서 한번 보시라는 뜻에서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진 소설 남한산성은 2007년에 읽었지만 영화는 아직...
三學士..懲毖錄..등.
배경의 연유를 공부했을 때마다.
아픈 가슴이었는데..
잠시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항상 느낌이 있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척화 삼학사를 공부하셨다니 저보다 훪씬 더 많은 학습을 하셨군요. 존경합니다. ^^
장문의 좋은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부분을 공부할때 마다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삼배구고두를 하여 인조임금의 이마가 찢어져서 선혈이 낭자하게 흘렀다...등등..
임금이 당한 치욕(그나마 인조는 당일로 궁궐로 복귀하여 왕권을 보전)만을 강조하면서도...30만명이
넘는 백성들이 끌려가다가 절반이 넘게 죽고 다친것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관(史觀)...
아무리 당시 조선이 "왕의 나라" 왕국이라 하지만...왕이라는 한 개인의 굴욕보단
수십만명 백성의 목숨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제 부족한 생각입니다...
지당하신 생각이십니다. 척화파라는 이유로 잡혀갔던 삼학사(三學士), 교리 윤집(尹集)은 별시 을과출신으로 향년 31세, 수찬 오달제(吳達濟)는 별시 장원급제 출신으로 향년 38세였고, 평양부서윤 홍익한 역시 정시 장원급제 출신으로 향년 51세였으니 수재중의 수재 인재중의 인재로 장차 나라의 동량을 잃게 되었습니다. 비참한 인질생활을 피하려고 압록강을 건너오다 얼어죽고 굶어죽고 빠져 죽은 백성들은 또 어떻습니까? 심지어 탈출하는 조선의 백성들은 되돌려 보내야 한다는 정축화약(丁丑和約)으로 입국을 저지당하니 물에 뛰어들어 자결했던 저 민초들의 참상, 조국의 배신에 얼마나 몸서리 쳤을까요, 참으로 슬프고 또 슬픕니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인질된 백성이 최대 50만이었고, 그들을 환국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몸값을 치러야 했고, 정사(正史)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수많은 처자들이 첩으로 몸종으로 능욕을 당한 후 일부는 돌아왔지만 오직 조선의 백성이란 죄 때문에 피해자였던 환향녀(還鄕女)들을 지조없는 화냥년(花娘姩)으로 매도했다는 역사앞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두 왕자의 운명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9년간 함께 인질생활 후 귀국하였으나 운명이 뒤바꼈습니다. 장자 소현세자는 원통하지만 그래도 청나라에서 배울 것은 배우자는 북학론(北學論)늘 폈다가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제주도에 유배당했다 두 아들이 어린나이에 죽으니 비극 중 비극이었습니다. 장자 소현세자가 급서하자 차자 봉림대군은 왕세자가 되었고 인조 승하 후 즉위했으니 그가 곧 효종이었습니다. 억울한 인질생활에 한이 맺힌 봉림대군은 북벌론(北伐論)을 주장했고, 즉위 후에는 청나라는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는 북벌정책을 폈지만 더욱더 세력이 팽창하는 청나라의 위력 앞에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역시 재위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승하하니 향년 40세였습니다. 소현세자가 향년 33세 였으니 삼학사, 환향녀, 두 왕자 등등 그래서 더욱 슬픈 역사,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되는 역사입니다. 감사합니다.
@방진 네...그러하옵니다...그 당시의
엄혹한 동북아 안보환경을 감안
하더라도 인조임금의 무능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습니다...저는
개인적으로 인조가 조선27왕들중 가장
무능하고 리더로서의 책임감이
부족한 임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을사늑약 징비하지 못하고 나라가유린 백성이 고통받는 일 다시는 일으나지않게, 현대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배우고 깨어잇어야 한다는것을,공부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경상우수사님, 25일 내려가 뵙겠습니다.^^
존경하는 방진님의 다양하면서도 깊이 있는 옥고를 읽고 많은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먼저 " 전란에 대비하지 못한 결정적 동기는 통신사 김성일의 잘못된 보고 때문이다" 등등 임진왜란과 관련한 글들은 철저히 선조의 변명을 대변하는 뉘앙스가 곳곳에 있음은 방손의 입장이라 저만 느끼는 감정 일까요?
기회되면 충분한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김상헌과 비교하신 내용도 있으신데 참으로 저로서는 수긍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계속 왜곡 되었던 역사의 오류가 벗겨지고 있으며, 저희는 단언코 선비정신에 철저한 분이라고 알고 있음을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존경하는 남명손서님의 소중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칼럼을 쓰는 저도 조심스럽고, 댓글을 다신 남명손서님도 매우 조심스럽고, 또한 다시 답글을 올리는 저는 더더욱 조심스럽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퇴계학파의 거두로서 선비정신에 투철한 충신이었다는데 이의가 없습니다. 더욱이 선조(宣祖)의 입장을 대변할 만큼 저는 관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공과(功過)는 있는 것이고 공(功)을 말한다고 해서 과(過)가 덮어지지 않고, 과(過)를 말한다고 해서 공(功)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역사적 사실을 말할 때는 개별 사안에 관한 공과(功過)를 말함일 뿐입니다. 결정적 동기라는 것은, 일본침략에 대한 정세를 탐문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띤 통신사의 보고였기 때문이고, 김상헌과 비교한 것은 책임지는 지도자의 모습을 비교하려는 때문이었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책임정치,......섬뜩해야하는... 국가지도자들이어야겠습니다.
방진님.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아픈 역사의 풀이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신거죠?
그럼요, 너무 건강합니다. 조만간 통영에 한번 내려가야 하겠습니다. 나폴리의 푸른 바다가 어련거려스리^^.....
@방진 이 해가 가기전 발걸음 한 번 하십시요 ^^
요즘 다자 외교를 펼치고 오신 대통령 생각이 나네요. 이러기도 저러기도 어려운 약소국의 대통령으로서 입지를 굳히고 입장을 표하여야 하는 일에 얼마나 고심했을까 하는.
외교의 다른 이름 협상입니다. 거란의 소손녕이 수십만 대군으로 고려를 쳐들어왔을 때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전쟁을 막고 오히려 강동 6주를 회복한 서희협상은 널리 알려진 역사입니다. 병자호란의 최명길도 협상의 명수로 알려졌지만 나라의 치욕을 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협상에 나섰던 이덕형도 이미 벌어진 전쟁에 더구나 명의 견제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임란직전. 1590 경인년 통신사로 갔던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의 역할에 실망과 안타까움을 갖는 이유도 이 때문이니 외교사절의 의무와 책임입니다. 외교 국방 다방면에서 미중일러 동남아 EU 다국가와 다자외교, 이 시대 참으로 중요한 과제입니다.^^
2017. 10. 15일 방영된 TV조선의 "박종인의 땅의 역사, 남한산성'에서는 김류, 김경징이 매우 다르게 묘사되더군요.
TV다시보기나 해당사이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직 유튜브에는 안올라오네요.
안녕하세요,
제가 TV 보지 못했는데요. 다르게 표현되었다는 말씀은?
무엇과 다르다는 말씀이신지요?
@방진 제가 표현이 잘못되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의 의도는 김류와 그의 아들 김경징이 그 TV프로그램에서는 위기상황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아주 부정적으로 소개되더라는 뜻이었습니다.
@송현(松峴) 아 아닙니다. 죄송한 일이 아니구요. 내심 그런 부분을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했습니다. 저도 남한산성 영화에서 영의정 김유가 너무 희화화 되는 게 아닌가 궁금해서 공부를 좀 해봤습니다. 저도 TV 조선 다시보기를 보겠습니다만, .....
병자호란에서 영의정 김유는 임진왜란에서 유성룡 같은 영의정이 되지못했던거 같습니다. 아들 김경징을 가장 안전힌 곳이라 믿었던 江都 강화검찰사로 보낸 것도 그렇고, 그 아들 김경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도 그렇습니다. 더 공부를 해봐야 겠지만, 충주전투의 종사관 김여물, 장원급제했던 엘리트 staff 김여물, 그의 아들 김유, 손자 김경징의 사람됨은 김여물보다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송현(松峴) TV조선 잘 봤습니다. 역사적 사실이 비굴하니 당시의 임금이나 조정대신들이 모두 회화화 되는 사실이 더욱 아픔니다. 앞에 말씀드린대로 김경징의 할아버지이자 김유의 아버지인 김여물은 종사관의 직분에서 도순변사 신립에게 기개넘치는 직언으로 싸움에 이기고자 정언을 올렸습니다. 지휘관 신립의 독단으로 모두가 죽게되는 비극을 안았지만 김여물은 장원급제자 답게 총명한 충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병자호란의 아들 김유와 손자 김경징은 전쟁도 지고 나라에 굴욕도 안겼습니다. 다만 제가 본문에서는 이 부분을 상세히 다루지 않아 그 아들 김유, 손자 김경징까지 아버지 김여물 같은 충신으로 오해하실 수 있겠다 생각하니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