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른 자두에 대한 기억
이 홍사
써먹지도 않을 공인중개사 시험을 본다고 책상위에 장부 대신에 책을 어지럽게 펼쳐 놓고 인터넷강의를 들으며 이어폰을 끼고 있던 여동생이 이어폰을 빼며 말했다. 나는 그 때 정수기 앞, 간이 싱크대에서 커피를 타고 있었다. 근무시간이지만, 강의를 듣고 있는 동생에게 방해하기가 싫어 내가 직접 커피를 타는 중이었다. 하긴, 여동생의 업무 중에 나에게 커피를 타서 대령하는 업무는 결코 없다.
-오빠 나는 이 지금 이 계절이 젤 좋아요. 감나무 잎이 싹이 트는, 이때가 가장 좋아요.
무슨 강의를 들었는지 뜬금없이 계절을 들먹였다.
-공부하다가 웬 계절타령이냐? 나는 이때가 가장 싫다.
-왜요?
노트북을 켜둔 채, 책상 앞에 앉아 팔로 턱을 고이고 낭창하게 물었다. 강의를 듣는 게 어지간히 따분한 모양이다.
-땀이 안 나지. 먹고 나면 나른하지. 유별나게 봄을 타서 건성인 피부가 갈라지며 새카맣지. 내 손등 좀 봐. 나는 이때가 젤 싫어.
-오빠! 나올 때는 제발 문 좀 닫고 나와요.
-알았다. 미안하다.
돌아보니 내 방의 미닫이문을 그대로 열어두고 나왔다. 나는 느끼지 못하지만 동생은 벌써 새어나오는 담배냄새를 맡은 모양이다. 어디나 그렇지만 요즘 들어 담배에 너무 민감해졌다. 흡연자들이 설 자리가 없다. 원래 사무실 하나를 통으로 썼었는데 담뱃값을 폭발적으로, 왕창 올리면서 흡연자를 범죄자 수준으로 취급하며 매스컴에서 떠들어대자 동생의 성화에 못 이겨 사무실 중간에 칸막이를 설치하고 문을 달아 내 방을 따로 만들었다. 사장실이 아니라 흡연실인 셈이다.
-오빠는 어느 계절이 젤 좋아요?
-남자들은 다들 가을을 좋아하지 않냐? 나도 마찬가지야. 늦은 가을 저녁에 누워 도로에 차량들이 달리는 타이어 소리를 들으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에 괜히 설레어 진다. 아무튼, 지금 이 계절이 가장 싫어.
-그렇구나. 늙어도 남자는 다르네.
-야가 뭐라카노? 그래! 늙는다고 남자가 여자로 변하냐?
동생의 말에 대꾸를 하고 커피를 홀짝이고 보니 동생은 이미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내 대꾸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써먹지도 않을 공인중개사 공부를 가로 늦게 왜 하느냐고 언젠가 물었더니 자신에게의 도전이라고 했다.
자기와의 도전? 그래 열심히 도전해라.
커피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버릇처럼 담배를 물었다. 봄을 언제부터 싫어했지?
초등학교 사오 학년 때 살았던 시골집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60년대, 그땐 농경사회였으니 고만고만한 시골에서 태어난 다른 친구들도 그랬겠지만, 분명 농토를 가진 농가에서 태어났지만 넉넉지 않은 집에는 알게 모르게 보릿고개가 존재했다. 그 어린 시절을 되살리자 갑자기 시장기가 느껴졌다.
올라가서 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을 까?
내가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초등학교 사오 학년 때부터다. 그 때부터의 기억은 컬러다. 그 이전의 기억은 흑백사진처럼 빛바랜 기억이고 기억이 끊어진 곳도 있으며 기억의 순차가 바뀐 곳도 더러 있다. 나만 그런가? 이상하게도 그렇다. 그때의 담임선생님을 떠올리면 사오 학년 이전의 담임선생님들의 기억은 흑백이고 그 후의 담임선생님의 얼굴은 컬러다. 물론 지금까지 그 담임선생님들의 성함을 다 외고 있으니 내 기억력이 나쁘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동생은 감나무 잎이 싹이 트는 이 시기,라고 했는데 감나무는 비교적 늦게 싹을 틔운다. 그러니까 늦은 봄이다. 고향집 울타리에는 감나무가 너덧 그루가 있었다. 감꽃이 떨어지면 그걸 주워 지푸라기에 꽂아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니던 여동생이었다. 동생에겐 그런 어린 시절 감꽃에 대한 기억이 서정적이며 생경스러울지 몰라도 나에겐 그 계절의 허기짐이 먼저 떠올라 문득 몸서리가 쳐진다.
가난은 죄를 야기한다?
어린 시절을 기억하다가 문득 떠올린 말이다. 하교를 일찍 하면 집에서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 시절 농촌에서 자랐다면 다들 공감할 것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소꼴을 베고 겨울에는 땔감으로 나무를 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런 일이 하기 싫어 학교 앞 구멍가게 나무의자에 앉아 저물도록 만화를 보다가 귀가해서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왔노라고, 앙큼하게 표정도 바뀌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사무실을 지키는 막내 여동생과는 겨우 열 살 차이가 나지만 성장과정은 여실히 다르다. 여동생이야 막내로 태어났으며 딸이라 집안일은 손도 대지 않고 자랐다. 그리고 내가 당시에 일이 고달팠고 배가 고팠다고 하면 이해할 수가 없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막내여동생과 열 살 차이다. 근대화 시기의 십 년은 근본적으로 그런 커다란 차이를 야기한다. 아무튼, 먹을 게 귀한 봄은 싫다.
늦은 봄!
그 늦은 봄이라는 계절을 떠올리며 궁상을 떨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경무였다.
퇴근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생각하니 녀석은 시설관리공단 노조 위원장이 되고부터 퇴근시간이 따로 없다. 그 때 나는, 매일 만나는 술친구로 수식할 수밖에 없는 권 박사에게 저녁에 시간이 어떤지 전화를 해볼 참이었다. 경무는 시를 쓴다. 십오 년 전인 이십대에 일찌감치 국내에서 알아주는 시 전문지에 열댓 편의 시를 발표하며 화려한 등단절차를 거치고는 그 흔한 잡지에 시 한편 발표하지 않고 죽은 듯 있다가 작년에야 첫 시집을 낸 좀 희한한 짐승이다. 그 동안 쓰던 서정성을 뒤엎고 사차원 모더니즘 시각으로 발표한 그 시집이 지금 희한하게 팔리며 주가를 올리고 있다. 그 난해한 시를 읽어도 무슨 얘기인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아무튼, 녀석이 이 시간에 전화를 하면 뻔하다. 저녁이나 사줘요. 녀석의 입에 달린 말이다. 그 말을 나올 줄 알았는데 잠시 귀가 즐거울 의외의 발언을 수화기에 살짝 불어넣었다.
-뭐해요? 술이나 한잔해요. 내가 살게요.
-뭐? 내가 살게요? 너? 양놈 지갑 주웠나? 내가 고기 맛있는 집 개발해 놨다. 사무실로 와라.
경무에게 사무실로 오라고 하고 바로 권 박사에게 전화를 했다. 대답은 저녁에 문화원에서 나오는 책자 마지막 교정을 보기로 약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쉽다. 그럼 둘이 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며칠 전 우연히 거래처 소장 손에 이끌려갔던 김천의 허름한 시골식당에서 먹은 돼지고기 수육이 생각난 것이다.
잔치수육이라고 메뉴에 적어놓은, 그 집 고기의 특징은 고기를 삶아서 도마 위에 얹어놓고 뭉텅뭉텅 썰지 않고 옛날 잔칫집이나 초상집 가방에서 고기 썰 듯이 살짝살짝 빚어서 나오는 것이다. 고기 한 점에 껍질과 비계, 고깃살이 다 붙어있어 맛이 특별하다. 그 뿐 아니라 고기를 어떻게 삶았는지 어린 시절 초상집에서 먹던 고기와 마찬가지로 고기가 설익은 것처럼 붉은 빛을 살짝 띠고 있는데 맛이 그만이었다. 그런 고기는 된장에 찍어먹는 게 아니라 간장에 찍어 먹어야 제 맛이 난다. 생각하니 갑자기 입에 침이 고인다.
그 집은 김천 무실 삼거리, 자두 밭 뒤에 숨어 있는데 경무의 집이 김천이니 녀석의 차로 가서 거기서 먹고 경무는 대리를 불러서 바로 집으로 가고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나오면 깔끔하겠다 싶었다.
전화를 끊은 지 십 분도 안 되어 사무실 아래에서 경음기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무가 도착한 것이다. 조수석에 타고 말했다.
-김천으로 가자.
-김천은 왜요?
-거기 쥑이는 집이 있어.
-김천으로 가면 형이 사야 되는데? 내 카드는 관내에서만 사용가능해요.
말을 들어보니 노조위원장 판공비 카드인 모양이다.
-상관없다. 억수로 맛있는 집이야. 고기가 혀에 착착 감겨! 늦게 가면 줄서서 기다려야 한다.
-대구도 아니고 김천 바닥에 그런 집이 어디 있어요?
-말이 그렇단 얘기야.
둘은 차로 이십여 분 걸리는 김천을 향해 사차선 산업도로를 달렸다. 무실 삼거리, 자두 밭 뒤에 숨어있는 그 집은 오래된 농가주택을 개조해서 식당으로 만들었다. 도착하니 이른 시간인데도 복잡했다. 정말 옛날 시골 잔칫집에 들른 기분이 들었다. 겨우 자리를 잡고 앉으니 술은 어떤 걸로 하시겠냐고 간단히 묻는다. 소주! 대답 또한 간단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소주 값을 올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집은 따로 메뉴가 없다. 잔치수육! 단일 메뉴다. 전문점은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다.
살짝 빚은 잔치수육은 금세 식탁에 올라왔다. 미심적은 듯 붉은 빛을 띤 고기를 젓가락으로 뒤적이다가 고기 맛을 본 경무는 고기를 우물거리며 엄지를 세워 앞으로 쭉 내밀었다. 맛이 죽인다는 말이다.
그 집의 특징은 따로 상추등속의 채소가 나오지 않는다. 열무김치와 깍두기가 반찬으로 나오는데 상추에 싸서 먹으면 고기의 본래 맛을 음미할 수가 없음으로 간장에 찍어 먹으며 고기의 진미를 음미하라는 뜻이다. 고기를 삶으며 무슨 향료를 넣었는지 먹고 나면 입안이 상큼하다. 경무와 먹으면 무엇이든 맛있다. 녀석의 장점은 뭐든 엄청 맛있게 먹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금방 저녁을 먹고 나서도 늦게 나타난 경무가 자장면을 먹는 걸 보면 또 먹고 싶어질 정도로 맛있게 먹는다.
-형! 진짜 죽이는데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가 않네?
소주 두 병을 다 비워갈 무렵, 경무가 극찬을 했다. 나는 소주 한 잔에 고기 한 점으로 먹는데 경무의 젓가락은 고기만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손님이 많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한 접시 더 시킬까?
-아뇨 됐어요. 사무실에 들어가 봐야 해요.
바로 퇴근하는 게 아니라 사무실에 다시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내일 회의 자료 정리해야 걸 직원에게 시켜놓고 왔는데 그걸 검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월의 해는 야무지게 길어서 그때까지도 밖은 훤했다. 시계를 보니 겨우 퇴근시간 무렵이다. 낮술을 마신 셈치고 사무실에 다시 들어가는 건 새삼스런 일이 아닌데 경무도 술을 마셨으니 어떡한다?
-차는 어쩌려고?
경무는 술을 마시며 속셈을 한 모양이다. 차는 식당 앞에 세워두고 나랑 같이 버스를 타고 다시 사무실에 가서 볼일을 마저 보고 다시 버스를 타고 올라와서 차를 가지고 바로 퇴근하면 된다고 했다.
-너 만큼 바쁜 노조위원장은 첨 본다. 꼭 사무실에 가야 된다면 그렇게 하자.
혼자 버스를 기다리다가 타고 가는 것보다 모양새가 낫겠다. 술을 사겠다던 경무는 예상대로 계산을 하지 않았다. 판공비 카드가 관내, 그것도 술집이 아닌 식당에서만 허용된다고 거듭 얘기해서 내 카드로 계산을 했다. 가격이 워낙 싼 집이라 부담 없이 긁었지만 경무가 무안해하는 눈치였다.
자두 밭을 돌아나가면 바로 무실 삼거리다. 그곳에 버스 정류장이 있지 싶다.
차는 식당의 마당에 그대로 세워두고 둘이서 걸어서 농로를 빠져나오는데 옆의 자두 밭의 자두나무 가지가 울타리 밖으로 뻗어 나와 있었다.
-자두나무는 가지치기를 안 하냐?
-글쎄요?
한 가지를 휘어잡아 보니 자두가 빼꼭히 달렸는데 크기가 꼭 엄지손가락 한마디 크기였다. 그래도 매끈하게 자두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개중에서 큰 놈 두 알을 따서 한 알을 경무에게 내밀었다.
-씹어봐, 술이 확 깰 거야.
-아뇨, 보기만 해도 침이 돌아요.
한 알을 덥석 베어 물었다. 그리고 잘근잘근 씹어 보았다. 풋내만 나는 게 아무 맛도 없고 입안에 신맛만 돈다. 뱉어내고 싶었지만 어린 날의 그 푸른 자두 맛을 생각하니 뱉어낼 수가 없었다. 뱉어내면 푸른 자두에 대한 모욕이 된다고 생각하며 또 한 입을 베어 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이렇게 시고 쓴 것을 어린 날은 왜 서리까지 해서 먹었을까? 그때는 푸른 자두가 이 맛이 아니었다. 그 때는 분명 먹을 만 했는데 나이가 들면 입맛조차도 변하는 모양이다. 분명 그 때의 맛이 아니다.
쥐고 있던 푸른 자두 한 알은 재킷주머니에 넣고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빼어 물었다. 입안이 신맛으로 가득한 까닭에 담배 맛도 보통 때의 맛이 아니다. 내가 우물거리는 것을 본 경무가 희한하다는 듯이 담배연기와 함께 한 마디를 날렸다.
-형! 신 것을 잘 먹네요. 바람기가 많아서 그런가?
-신 것하고 바람기하고 무슨 상관이냐?
자두를 씹으며 되물었다.
-신 것 잘 먹는 사람이 바람기가 많다고 하잖아요?
-검증되지 않은, 근거 없는 얘기는 하지마라.
건성으로 대답하면서도 내 사유의 더듬이는 유년의 기억 속에서 자두를 찾아 더듬고 있었다.
자두나무집!
신 자두를 씹으며 유년의 기억을 더듬다가 내 더듬이에 포착된 기억이 아니라 단어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 입안에 맴도는 낱말을 자두와 함께 씹었다.
자. 두. 나. 무. 집.
비로소 그 기억이 선명해졌다.
*
자두나무집. 어른들은 그 집의 말바우댁이라는 택호를 불렀지만 우리는 그 집을 두고 그렇게 불렀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자두나무 과수원을 지닌 집이다. 지금 생각하니 과수원이랄 것도 없다. 집 뒤 텃밭에 열댓 그루의 자두나무가 있는 집이다. 내 고향집이 있는 자연부락은 미석산자락을 따라 C자, 형으로 형성되었다. 지금은 빈 집이 더 많지만 당시에는 백이십 호가 넘었으니 자연부락치고는 큰 마을이다. 우리 집은 이쪽 끝자락이고 자두나무 집은 저쪽 끝자락인데 야트막한 야산 오솔길로 질러가는 길이 있다. 학교 갈 때면 동네 길로 돌아서 가지 않고 그 산자락 오솔길로 질러가서 신작로를 이용한다. 하교할 때면 자두나무집의 자두가 얼마나 여물었나, 눈여겨보곤 했다. 정정하자. 눈여겨보는 것이 아니라 눈독을 들인 것이리라.
자두나무 집 울타리엔 언제나 막대기에 농약병을 거꾸로 꽂아서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곤 했다. 농약을 쳤으니 따먹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다. 그러나 우리는 영악하게도 그게 공갈 농약병이라는 걸 안다.
그 기억이 컬러인 것을 보니 아마 내가 초등학교 오학년 때였지 싶다.
동네에 소문이 돌았다. 자두나무집 둘째 딸이 사고를 쳤다고,
그 둘째 딸이라는 누나는 얼굴이 뽀얗고 갸름한 게 어딘가 모르게 촌티가 나지 않고 세련되어 보이는데 나보다 예닐곱 살 많지만 어쩌다 마주치면 나에겐 엄청 다정하게 굴던 누나였다. 그때 나는 말로만 듣던 천사가 저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될 지경이었다. 헌데, 애석하게도 60년대 당시 농촌에서 태어난 난, 가난한 딸들은 거의가 중학교 진학을 못했다. 부모의 교육열이 높은 집이나 특별한 집의 딸이 아니고는 당시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는 게 보통이었다. 하여 면소재지에 하나 있는 중학교에 내가 다닐 때 남녀공학으로 한 학년에 다섯 학급이었지만 네 학급이 남학생 반이고 겨우 한 학급만 여학생으로 구성되었다. 그 자두나무집 둘째딸, 그 누나도 교육열이 높은 부모를 만났거나 특별한 집의 딸이 아니었으므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고 있었다.
헌데, 동네에 입소문으로 떠도는 사고란 그 누나가 임신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소문이 일고는 그 누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지금이야 알게 모르게, 그런 일이 허다하지만 당시에는 처녀가 임신을 했다면 집안의 체면에 흠이 가는 상당히 큰 사고였다. 상대가 면소재지에 하나밖에 없는 영화관의 영사기를 돌리는 청년이라는 소문도 있고, 더러는 그가 아니라 영화관의 간판과 포스터를 그리는 청년이라는 소문도 있고, 술도가에서 동네 주막마다 당시에는 귀한 오토바이로 막걸리를 배달하는 청년이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누군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얼굴이 반반한 것이, 도화살이 있어서 그럴 줄 알았어.......
그 소문을 접한 할머니가 칼국수를 덜어서 형의 그릇으로 옮기며 대수롭잖게 하셨던 말이 귀에서 풀어지고 있었다. 그 때 우리 식구들은 마당에 들마루를 놓고 칼국수로 저녁을 때우고 있었다. 곧 증조부 제사가 있었으므로 쌀을 아껴야만 했던 계절이었다.
당시에 그런 소문들은 대게가 들일을 하면서 번진다.
보리배기를 하거나 모내기, 밭매기에 품앗이를 하면서, 입에서 입으로 건너가며 구체화되고 또 입에서 다른 입으로 건너가며 부풀려진다. 그런 소문이 남정네나 노인들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저녁을 먹는 시간이다. 들에서 듣고 넘겨 짐작한 소문이 저녁상을 두고 가족에게 퍼진다. 소문이란 언제나 부풀려지게 되어있다. 다음날 저녁밥상 앞에서 들으니 영화관 청년 둘이서 어디론가 잠적을 했고, 두 놈이 건들어서 그 누나가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그건 근거 없는 이야기다. 당시의 의료 시설로는, 쌍둥이인지 아닌지 낳아보지 않고는 알 길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 소문이 잦아들 무렵, 또 다른 비보가 날아들었다.
비보? 당시 나에겐 분명 비보였다. 그 누나가 쌍둥이를 낳으면 그 누나를 닮아서 엄청 뽀얗고 예쁜 아기가 나올 걸로 기대했던 나에게만은 비보였다.
그 누나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 소문은 촌 동네에, 순식간에 일파만파 퍼지게 마련이다. 대구에 가서 애기를 떼는 수술을 받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수술을 받으면 방귀를 뀌기 전까지는 물을 마시지 말아야하는데 그걸 모르고 물을 마셔서 죽었다는 말도 있고 낯짝 들기가 부끄러워 죽으려고 일부러 방귀를 참고 물을 마셨다는 말도 있었다. 아무리 소문이지만 그 누나가 죽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듯 했다.
-미인박명이라더니, 반반하게 생긴 애가....... 참 딱하네.
할머니의 말이었다.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전혀 딱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전하는 그 소문을 당시에 중학교 이학년이던 형도 들마루에 앉아 저녁밥상 머리에서 같이 들었다.
당시에는 사랑방을 형과 둘이 썼다.
형이 하는 영어공부가 참 재미있어 보였다. 펜촉에 잉크를 찍어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영단어를 필기체로 쓰면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그땐 볼펜이 귀하던 시절이라 중학생이 되면 잉크를 썼다. 잉크병은 엎질러도 쏟아지지 않게 스펀지를 넣어서 쓰는 게 형들 사이에선 유행이었다. 어쩌다 만년필이 하나 생기면 반 아이들이 부러워할 정도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형은 달필이었다. 지금은 필기체를 쓰지도 않고 필기체를 쓰는 것을 보지도 못했지만 당시에는 필기체가 필수였다. 형은 필기체를 무슨 그림 그리듯 그려가는 모습이 보기 좋아 방바닥에 엎디어 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산수 문제를 풀다가 자꾸 넘어다보았다. 마치 날개가 달려 날아갈 듯이 보이는 필기체. 그걸 배우고 싶었다. 필기체를 좀 가르쳐달라고 해도 형은 나중에 자연스레 알게 된다며 좀체 가르쳐주지 않았다. 지금은 초등학생이 영어를 배우지만 당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알파벳을 겨우 입으로만 외워 노래처럼 부르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형이 휘갈기는 펜촉이 공책에 끌리는 소리가 엄청 듣기 좋았다. 어느 곳에서는 힘이 들어가고 어느 곳에선 빨라졌다가 느려지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물었다.
-형? 자두나무집 누나가 정말 죽었을까?
-소문이 그러니 죽었겠지. 뭐.
형은 필기체를 휘갈기며 감정을 싣지 않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
무실 삼거리에서 버스를 한참이나 기다렸다.
늘린 게, 구미와 김천을 오가는 시내버스인데 기다리니 좀체 오지 않는 것이었다.
-개똥도 약에 쓸려니 없네? 형! 커피나 한잔 할래요?
시내버스를 얼마 만에 타보는지 기억에 없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짜릿했지만 녀석은 기다리기가 짜증이 났던지 시계를 힐끗 보고는 커피를 들먹였다. 녀석의 얼굴이 불콰했다.
-이 촌 바닥에 커피집이 어디 있냐?
내 말에는 대답도 없이 정류장 옆에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들고 있던 꽁초를 버리고 후딱 따라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안에 들어가니 구멍가게가 아니라 제법 규모를 갖춘 마트였다. 음료코너는 두 가지로 분류되어 있었다. 속이 훤히 보이는 냉장고와 온장고가 있었다. 나는 따뜻한 것을 택했다. 즐겨마시던 칸타타를 두고 붉은 계통의 알루미늄 캔에 든 아메리카 블랙을 잡았다. 처음 보는 상표인데 맛을 검증하기 위해 택한 것이다. 경무는 커피가 아닌 시원한 탄산음료수를 집어 들었다. 계산을 하려고 보니 점원 아가씨가 내가 쥐고 있는 커피는 신제품 프로모션 기간이라 원 플러스원이라며 하나를 더 가져오라고 했다. 하나를 더 꺼내 와서 계산을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들먹였다.
-어? 이게 누구야?
금세 알아볼 수 있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기, 정임이었다. 그녀는 면소재지 양조장 집 외동딸로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같이 다니고 고등학교는 같이 대구로 나갔지만 다른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시집을 가고 나서도 그녀는 다른 동기들 계집애보다 비교적 자주 보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기회를 하면 빠짐없이 나타나곤 했다. 그녀는 경찰 공무원과 결혼을 했는데 동기들 사이에서 서장 사모님이라고 불린다. 정임이 남편의 직급이 뭔지는 몰라도 그렇게 부른다.
-이 마트 네가 하는 거냐?
-심심풀이로 하고 있어. 애들도 다 컸고.......
정임이가 꺼내온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그녀가 썰어온 빵조각을 씹으며 버스가 두 대나 지나가도록 노닥거렸다. 가게 밖으로 버스가 지나가는 게 훤히 보였다. 아이들은 둘 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정임이 남편은 지금 김천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와 노닥거리다가 비보를 접했다.
중학교 동기 계집애 중에서 경자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경자면 우리 동기들 중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던 계집애다. 당시에 시골에서 태어난 계집애로서는 언감생심인 대학을 가뿐하게 마치고 미국 유학을 하면서 만난 남편이 경영학 박사고 경자도 박사학위를 받았다. 거기까지는 나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정임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러나 그건 타이틀일 뿐이었다. 타이틀이 숟가락을 쥐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정임의 이야기에 의하면 경자는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전임을 받지 못하고 오십이 넘도록 전문대학 강단에 보따리장사로 뛰었던 아이인데 주식에 손을 대고 사채에 시달리다 우울증이 와서 자살을 했다는 얘기를 구체적으로 들었다. 그녀가 마지막 살았던 곳이 바로 김천이라고 했으며 바로 가게 건너편 동네에 있는 주공아파트라고 했다.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한 아이인데 결과가 그렇다니 조금 우울했다. 아이들은 없냐는 내 질문에 경자는 남매를 두고 있었는데 둘 다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경영학 박사인 남편은 지금 뭐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정임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김천의 어느 실내골프연습장 관리인으로 카운터를 보고 있다고 했다. 경영학 박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일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골 깊은 한숨을 쉬었던가?
-공부 잘해도 살아가는 데는 말짱 헛것이야! 그치?
동의를 구하는 정임의 말을 들으며 나는 주머니 속에 든 푸르고 단단한, 한 알의 자두를 만지작거렸다. 할 말이 궁했다.
버스를 타고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나도 모르게 자두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경무는 술이 어지간히 깼다면서, 남은 일은 내일 일찍 나가서 검토하고 바로 퇴근하겠다고 마음을 바꾸고 내가 시내버스를 타는 걸 보고 돌아갔다. 익은 자두는 만지작거리면 말랑말랑해지는 법인데 주머니에 든 자두는 아무리 만져도 골프공처럼 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손에 전해지는 매끈한 감촉, 버스 의자에 앉아 그 감촉을 즐기며 봄이 완연하게 익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
-오늘 죽었다면 집이 비었겠네?
책과 노트를 번갈아보며 한참 필기체를 휘갈기던 형이 글씨 쓰기를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고 물었다. 느닷없이 그 말이 귀에서 풀어지고 있었다.
-어느 집이 비어?
-자두나무집.
형은 스펀지가 든 잉크병 뚜껑을 닫으며 대답했다. 나는 형의 의도를 단박에 감 잡았다. 형은 공부를 빙자했다. 지금 잠이 오니 신맛이 나는 자두를 먹으며 잠을 날려버리고 열두시까지 공부를 하자고 했다. 당시에 열두시까지 공부하는 게 형들 사이에서는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나 어젯밤 열두시까지 공부했다고 하면 다음날 수업시간에 졸아도 선생님이 봐주던 시절이었다. 나도 중학생이 되면 열두시까지 공부해야지 하면서 숙제를 마치면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하는지 궁금했다. 예습과 복습, 그런 학습법과 용어를 모르고 숙제만 마치면 공부 다 했다고 말하던 시골의 초등학생이었다.
-형! 오늘 죽었는데, 자두에 귀신이 붙지 않았을까?
내키지 않아서 그렇게 둘러댔다.
-귀신이 어디 있어? 인마!
하는 수 없이 따라나서야 했다. 형은 책가방에 든 책을 몽땅 꺼냈다. 그리고 빈 책가방을 들고 지름길인 뒷산 오솔길로 들어섰다.
-형! 무섭다.
-무섭긴 뭐가 무서워? 매일 다니던 길인데.
용감하게 어둠을 뚫고 앞서가는 형의 꽁무니를 바짝 쫓았다. 긴장을 해서인지 발바닥에 땀이 나서 고무신이 미끄러웠다. 당시에 중학생이 되면 운동화고 초등학생은 특별한 집 아이가 아니고는 다 검정고무신이었다. 자두나무집 자두 과수원은 길 쪽으로는 가지치기를 해서 울타리 밖으로 휘늘어진 가지가 없다. 그러나 산 쪽으로 붙은 곳에는 울타리 밖으로 가지가 휘늘어져 있었다.
산 쪽으로 형이 붙어 섰다.
나는 형의 허리춤을 잡았다. 고무신이 미끄러워 자꾸만 벗겨지려고 했다. 잔솔나무만 있고 낭떠러지다. 자두나무 가지는 울타리를 벗어나 그곳까지 늘어져 있었다. 형이 간신히 손을 뻗어 자두나무 가지 끝을 휘어잡았다. 언덕에 붙어 서서 힘껏 당겼다. 푸른 자두가 조롱조롱 달린 가지가 딸려 나왔다. 형은 나를 보고 그 가지를 당기고 있으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그 가지를 당기고 있고 형이 가방을 벌리고 자두를 빠른 속도로 가방에 따서 담았다. 한 가지를 훑어 넣으니 한 가방이었다. 됐다는 형의 말을 듣고 당기고 있던 가지를 놓았다. 가지가 휘청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고 자두나무집 개 짓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솔밭을 빠져나와 오솔길로 돌아 나오는데 앞집에 사는 선동이 형이 빈 가방을 들고 오솔길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형도 자두나무집이 비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랑방으로 돌아와 가방의 자두를 쏟아놓았다. 정말 농약을 쳤을지 모른다며 형과 물수건으로 자두를 닦기 시작했다. 한참 자두를 닦는데 마실 가셨던 아버지께서 방문을 벌컥 여셨다. 아버지는 자두와 형의 얼굴을 번갈아보셨다.
-이거 먹고 잠을 쫓으며 열두시까지 공부하려고요.
푸르고 단단한 자두를 닦으며,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낭창하게 말했다.
-그 집 분위기 안 좋다. 이런 짓 하지마라!
그 말씀에는 형이 예! 하고 대답했다.
아버지께선 그 푸르고 단단한 자두의 출처를 알고 계셨다. 대답을 분명히 들으신 아버지는 방문을 닫아주고 헛기침을 하시며 안방으로 올라가셨다.
*
그 자두를 먹고 잠을 쫓으며 열두시까지 공부를 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다음날 학교에 가며 자두 몇 알을 가지고 가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준 기억이 난다.
주머니에 든 푸르고 단단한 자두를 만지며 빛바랜 기억에 사로잡혀있다 보니 시내버스는 내가 내려야 할 봉곡동 입구에 닿았다. 버스에서 내린 큰 도로에서 사무실까지는 걸어서 십 분 남짓 걸린다. 동사무소 앞의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주머니에 든 자두를 만지작거렸다. 푸르고 단단한 자두를 만지작거리다 보니 또 푸른 자두에 대한 기억하나가 걸려들었다.
훈련병 시절이었다.
보병으로 주특기를 받아 후반기 교육까지 육 주간을 예비사단에서 훈련을 받았다. 사월에 입대하여 유월에 교육을 수료했는데 봄을 유난히 타는 나는 특히나 고생이 심했다. 훈련소에서 사격연습장으로 가는 와룡산 자락에 자두 밭이 두어 개 있었다. 자두나무 가지가 길로 뻗어 나와 우리가 가는 길을 덮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그곳을 지나가야 하는데 철모에 닿을 듯 열려있는 그곳의 자두가 성할 없었다. 밭주인의 항의가 심해지자 조교들은 그 자두과수원 부근에 닿으면 ‘일동 제자리에!’ 구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명령이 내려졌고 ‘총 머리에 얹어!’ 지시가 떨어졌다. 그렇잖아도 보병의 생명인 사격 점수가 시원찮아서 얼차려를 받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중인데 우리 훈련병들은 그 자두나무 밑을 총을 머리위로 쳐들고 오리걸음으로 통과해야만 했다. 죽을 맛이었다. 그 때 머리 위로 쳐다보던 푸른 자두는 증오의 대상으로 개머리판으로 후려치거나 정조준해서 쏘아 죽여야 할 적의 눈동자처럼 여겨졌다. 자대배치를 받고 첫 휴가를 나오면 훈련소 후배들을 위해서 울타리 밖으로 뻗어 나온 자두나무 가지를 몽땅 작살내야 한다고 모두들 이를 갈았다. 서로가 그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자처했지만 정작 첫 휴가를 나와서 후임들을 위한 그 자두나무가지 무찌르기 작전을 누가 수행했는지 모르겠고 훈련을 마치고 나니 지독히 얄미운, 푸른 그 자두도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푸른 자두나무도 기억의 갈피에 아름다운 색깔로 남아있다. 그 때 철모위로 본 푸른 자두와 지금 주머니에 넣어 주물럭거리는 자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뭐라고 설명을 하지? 긴장과 이완, 더 거창하게 전쟁과 평화? 아니다. 먹을 게 귀한 옛날과 넘쳐나는 현재의 차이라고 명명하는 게 좋겠다.
양평해장국 앞을 지나면서 주머니에 든 자두를 꺼내 보았다. 얼마나 주물럭거렸는지 자두에 윤기가 났다. 그냥 씹어 먹어버리기에는 아까운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윤기가 나는 자두의 깊고 그윽한 색깔을 보며 천천히 걸어서 올라오는데 옆집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옆집, 한의원집 아들인데 초등학교 삼사학년쯤 되었을 거다.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는 놈을 불렀다.
-승민아!
녀석이 자전거를 세웠다. 나는 손에 든 자두를 펼쳐보였다.
-이게 뭔지 아니?
-복숭아, 아니 자두잖아요.
-이거 너 가져라.
-이거 먹어도 되는 거예요?
-아니, 가지고 놀면서 이걸 보고 도화지에 자두를 그려보는 거야. 크레용으로 색칠을 하고 진짜처럼 매끈하게 그려보는 거야. 재미있겠지?
녀석은, 고맙습니다!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자두를 받아 바지주머니에 넣고 자전거를 타고 동사무소 쪽으로 내려갔다. 녀석에게도 평생 기억할 푸른 자두의 추억을 심어주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다. 지금 자라는 저런 녀석들은 나중에 유년의 추억으로 뭘 기억할까? 뜬금없이 그게 궁금해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측은한 마음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