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의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요한복음1:1-5)
1 In the beginning the Word already existe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2 From the very beginning the Word was with God. 3 Through him God made all things; not one thing in all creation was made without him. 4 The Word was the source of life,[a] and this life brought light to people. 5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and the darkness has never put it out.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있습니다.
31.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20:31)
결국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스데반도 바울이 보는 앞에서 순교 당했습니다.
그 바울이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려고 다메섹을 올랐습니다.
그런데 기세등등하게 올라갔던 그 바울이 다메섹을 내려올 때였습니다.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처럼 죽게 생겼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쫓겨 다녔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을까요?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예수님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조차 아낌없이 내어놓을 정보!
그런데 여러분에게 그 예수님을 기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무엇부터 소개하시겠습니까?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의 신비한 탄생 이야기부터 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한 요한의 사역에서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복음서를 전혀 달리 시작합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1 In the beginning the Word already existe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이라는 뜻은 예수님을 경험해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인해 죽임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면서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읽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의를 읽어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말씀 한마디에 귀신이 여지없이 튀어 나가고 또 병이 나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읽어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8.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한다는 말이냐?(요14:8,9)
물론 주님이 말씀이시라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교회에 나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죽을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 밑에 우리 존재를 내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주일의 예배의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새 사람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태초에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66년 전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손에서 피조된 그 이후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그 영원의 시간입니다.
주님은 이미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존재 방식입니다.
주님은 그냥 거기에 계셨습니다.
그 때에 존재했던 분은 오직 주님 뿐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 말씀의 시작을 했는데 요한의 이 발언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발언이었습니다.
그 엄격한 유대 사회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하는 첫마디가 30세의 예수님을 두고 하나님이라고 증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돌멩이들이 요한의 머리 위로 휙휙 날라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창조되기 전에 존재하셨습니다.
우리는 창조의 이후의 존재이지만 예수님은 창조 이전의 존재이십니다.
물론 그 경계를 가르시는 것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의 말씀 전에도 예수님은 계셨는데 우리는 그 말씀 이후에 피조된 것입니다.
그 예외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지적하는 것은 주님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 그 태초의 시간은 우리가 알고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 이전의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경험해서 알고 있는 모든 법칙은 주님이 세상을 만드신 이후 나타난 현실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법칙들은 말씀으로 피조된 세상 안에서의 법칙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은 저기 동해 바다 위를 발로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런 법칙이 적용된 것은 주님의 말씀 이후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시기를 사람은 땅 위만 걸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미친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공포에 질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베드로를 향해 주님이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갔습니다.
베드로는 그 때에 자연의 법이 아닌 말씀이라는 다른 법이 적용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말씀이 자연의 법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법칙을 절대시하며 이 세상의 법을 하나님의 나라에 간단히 적용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된 세상 이전의 상태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상황을 우리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성경은 그 때 주님의 상황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1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그 때 말씀이신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으니 그 분들을 두 분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과 한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 땅에서는 1+1=2 이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1+1=1 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실은 하나님의 나라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내세우면서 엄청난 교회를 짓다가 부도내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히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실은 그 나라를 몰랐던 것입니다.
겸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일어난 기독교 폭력이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의심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믿음을 갖았다는 믿음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가장 먼저 창조 이전에 계셨던 예수님의 신성을 일러주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가장 먼저 입증하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을 사람을 살리셔야 합니다.
그 그리스도께 꼭 십자가를 지시고 비참하게 죽임당하실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7. 아무리 갑부라 하여도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속량하지 못하는 법, 하나님께 속전을 지불하고 생명을 속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8. 생명을 속량하는 값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아무리 벌어도 마련할 수 없는 것,(시49:7,8)
사람의 속전을 가능케 하실 자, 하나님 외에 인간을 죄에서 구하실 분이 없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이 되셔야 했던 것입니다.
요한은 따라서 그의 책에서 가장 먼저 주님의 신성을 다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이 있기 전 이미 존재(already existed)하신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신앙에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이를 다시 반복하시는 것입니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2 From the very beginning the Word was with God.
인간과의 그 중요한 차이를 알아라!
먼저 그 시간입니다.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던 창조 이전의 태초입니다.
또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 인간이 존재 가능했던 것은 주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 그럴 필요가 없으십니다.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스스로 계신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출3:14)
주님은 존재에서 자유하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는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만큼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어느 놀이공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식구들이 놀이기구를 탔는데 한 식구들이 탄 놀이기구가 한 60m 높이에서 뒤집어진 것입니다.
식구들이 그만 땅으로 다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높은 곳에서 할아버지가 손녀를 붙잡아 매달려 있었습니다.
죽을 각오로 한 일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친할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즉 주님은 뒤집어진 놀이기구에서 우리를 껴안으신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죽음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3 Through him God made all things; not one thing in all creation was made without him.
이 땅에 모든 사람이 그 분의 태생이기 때문입니다.
흑인 백인을 가릴 것이 없습니다.
배운 자 혹은 배우지 못한 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이데올로기도 아닙니다.
그런 것을 가리면서 생명을 두고 차별을 하는 사람은 기독인이 아닙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그 분으로부터 태어난 것입니다.
12.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에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눅15:12,13)
이 아들은 온갖 못된 짓을 다 골라 했습니다.
부모에 대한 최악의 배신행위를 다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타국에서 완전히 거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배고파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이 아들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눅15:24)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그가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닙니다.
그가 거지냐가 아닙니다.
그에게 돼지 똥 냄새가 나느냐가 아닙니다.
그가 나로부터 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그의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무것도 끊을 수 없습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36. 성경에 기록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5-39)
4. 그의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
4 The Word was the source of life,[a] and this life brought light to people.
하나님을 통해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습니다.
이 생명이야말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여받은 근원적 가치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침해 당할 수 없습니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마6:25)
사람들이 너무나 자주 이런 오해에 빠지기 때문에 성경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경제 부흥을 위해 사람의 생명을 위협했다면 그것이 사탄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신 이유도 그것입니다.
죽은 우리들을 생명으로 회복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로또에 당첨되어서 빛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빛은 유일합니다.
오직 이 생명의 소식 때문입니다.
4.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
4 this life brought light to people.
이 생명을 대치할 수 있는 빛이란 없습니다.
단언합니다.
물론 이 생명이 없는 곳이 어두움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어두움이 된 것입니다.
부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5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and the darkness has never put it out.
그런데 이 어두움과 빚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어두운 지하실을 밝히는 방법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촛불 하나를 들고 지하실로 내려가면 됩니다.
그 장소는 빛으로 환해질 것입니다.
촛불이 켜졌는데 어두울 수 없습니다.
빛을 들고 갔다면 거기에 이미 어두움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빛이십니다.
그래서 귀신아 나가라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신 순간 귀신은 이미 거기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빛은 어두움의 존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