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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중앙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건강한 교회
2013년 9월 15일 / 대예배 / 출애굽기 14:6-16
20세기 중엽, 특히 미국의 신학계를 중심으로 가장 중심을 이루었던 화두는 ‘교회 성장’으로, 어떻게 하면 교회 성장을 이룰 것인가가 지대한 관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교회가 성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침체되어 있던 교회로 하여금 일어설 수 있게 했습니다. 교회의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외형이 커졌다는 것하고 바른 교회, 교회다운 교회라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20세기말, 21세기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가장 중심적인 화두는 ‘건강한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 되느냐? 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신앙인, 건강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초대교회처럼 부흥할 것입니다. 오늘 자신들을 향해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건강한 교회인가? 우리 자신은 건강한 그리스도인인가?”
▶ 조금 더 생각해 보십시다. 겉모양이 달걀이라고 해서 달걀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고 생명이 있는 정란(精卵) 달걀과 생명이 없는 무정란(無精卵) 달걀이 있습니다. 정란은 어미 암탉이 품고 있으면 때가 되어 병아리가 나오지만 무정란은 아무리 품고 있어도 달걀 그대로입니다. 정란은 생명 인자를 소유한 달걀이요, 무정란은 생명 인자가 달걀입니다.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느냐? 아니냐?(거듭났느냐? 거듭나지 않았느냐?), 삶의 중앙에 예수님을 모셨느냐?”는 육신의 생명보다 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6:33 /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 요 1:11-12 /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 어느 날 밤 이슥할 무렵 바리새파에 속한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지도자(이스라엘의 선생) 한 사람이 예수께 회견을 청해 왔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려고 선생님을 보내신 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보이신 표적이 그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진실로 진실로)으로 네게 말한다. 누구든지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말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태에 들어가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진정(진실로 진실로)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그러니 내가 네게 새롭게 다시 나야 한다고 한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 3:1-7)
예수님은 여기에서 ‘진실로 진실로(진정으로)’라는 말을 거듭 2번씩이나 하셨으니 얼마나 중요한 말입니까?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말씀임을 볼 때에 거듭나는 것은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며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잊을만하면 다시 거듭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도 아니요,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며,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심한 말로 천국은커녕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다. 내 자신이 스스로 천국 백성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 한 번쯤 여쭈어 보라는 말입니다. 나도 내 자신이 거듭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가 목사가 되고 나서 교회를 개척한 후 1년 6개월 동안의 무서운 시련 속에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났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죄와 허물로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 죽은 영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그때부터 영적인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는 말씀은 바로 인간의 죽은 영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양수를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 중에 이 첫 번째 출생을 겪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인간은 성령으로 그의 영이 거듭나지 않는 한 육신의 죽음인 첫째 사망(히 9:27) 이후 사망과 지옥이 불못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을 맞게 됩니다(계 20:14). 거듭나지 못한 죄인은 이렇게 2번의 사망을 맞는데,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나면 한 번 죽는다.”는 말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핵심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목사님을 돕는 중요한 일꾼들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그 목사님은 과연 영적인 사역을 제대로 해 낼 수 있을까요? 교회는 영적인 단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당회, 직원회, 교육기관, 자치기관 등이 항상 기도와 말씀이 주축이 되어 활동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를 막론하고 활동하기 전에 먼저 말씀과 기도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일이 더딜지라도 말입니다. 아직 거듭나지 못했다면 거듭나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두고 노력하되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묵묵히 교회 일을 하십시다. 우리 모두 이런 교회가 되기를 위해 힘씁시다.
중세 교회를 보십시오. 중세 교회의 장식은 무척 아름다워지고, 외형은 화려하고 엄청나게 컸습니다. 예배 형식도 아주 정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열을 올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은 희미해졌습니다. 그들 속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졌을 때,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서 떠나시거나 침묵하셨습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로 인하여 믿음이 강조되면서 부흥의 불길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지금 한국은 어떻습니까?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과연 수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자랑하는 것이 십자가일까요? 그들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일까요? 그네들이 과연 이웃을 사랑하고 있을까요?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움직이지 않는 교회는 심판날에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가 목사이기에 구원받았다고 착각합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서 직분을 맡았기에 구원받은 줄로 착각합니다. 교회에 다니기에 구원받은 줄로 착각합니다. 심지어 이런 말을 하면 ‘믿으니까 교회 다니는 것 아니냐?’고 툴툴거리며 자기 합리화를 하는 분들. 그들이 죽은 뒤에 가야 할 곳은 영원한 불못 뿐입니다. 죄로 저주받은 육신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불멸(不滅)이기에 지옥에서 태양의 표면보다도 뜨거운 극한의 고통으로 인하여 밤낮 쉼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때가 너무 늦기 전에 그들은 모두 거듭나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지옥에 가면 목사, 장로, 집사가 가장 많을 것이다.”라는 말은 조크(joke)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대 교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꼬집은 뼈 있는 경고입니다!
부탁합니다. 더딜지라도 주의 말씀을 행하고 순종함으로 나갈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 모두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만들어 가십시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십시다. 자자손손 넘치는 은혜를 받읍시다.
마 18:19-20 /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1.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이런 뜻을 가지고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의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들이라는 의미로 신약에서는 ‘에클레시아’라는 용어가 교회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면 구약 히브리어에서는 ‘카알’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사도행전은 그들을 ‘광야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출애굽 교회는 ‘건강한 교회’였습니까? 우리가 정말 본받고 싶은 건강한 교회였는가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비록 ‘건강한 교회였느냐?’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행복한 교회, 은혜가 넘치는 교회’였음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들만큼 가까이에서, 구체적으로, 놀랍게, 직접적으로 다스리시고 인도하신 교회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도와주시고, 말씀하시고, 품에 품고 사랑하셨다는 점에서 그 교회는 참 행복한 교회요 모든 교회가 부러워하는 교회였습니다.
어느 시대에서도 초대교회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축복받은 교회는 없었습니다. 그 교회는 참으로 행복한 교회요 은혜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저들만큼 선명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던 교회, 저들만큼 생생하게 하나님을 경험한 교회, 저들만큼 놀라운 은혜를 누린 교회는 없었습니다. 저들은 자다가 일어나서 밖에 나가보면 저들 앞에서 행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을 들려주시던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해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였습니다.
▶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애굽을 나온 저들이 잘 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기 위해서 였습니다.
출 6:4, 8 / 나는 그들이(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나그네로 살던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데려가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이다.(참고 창 50:24, 출 13:5, 11, 33:1, 민 14:23, 30, 신 1:8, 35, 4:31, 6:10, 19, 23, - 생략 - )
그런데 이러한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예수님)께서 제시한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신 30:15, 20 /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한 여호와의 명령에 여러분이 순종하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주께서 가르치시는 길로만 걸어가고 주님의 계명과 규정과 명령을 다 지키면 여러분이 살아남아서 점점 더 번창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제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20) 오직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그분에게만 매달려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면서 약속하신 땅에서 여러분이 오래오래 살 것입니다. … .
요 15:5-6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내 안에 살고 내가 그 안에 살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6) 만일 누구든지 나를 떠나면 필요 없는 가지처럼 버려질 것이요, 말라서 다른 것과 함께 묶인 채 불에 태워질 것이다.
2. 애굽의 기병대와 가로막고 있는 홍해를 통해 믿음을 가르치시려는 하나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기네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애굽에 내리신 수많은 재앙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애굽에 내린 10번째 재앙인 죽음의 그림자가 온 애굽을 덮고 있을 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재앙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생명까지 건짐을 받은 놀라운 감격을 맛보며 애굽을 나왔으며, 애굽의 바로 밑에서 종노릇하던 저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조상 대대로 4백 여 년이 넘게 노예로 삼았던 저네들을 가리켜서 출애굽기 12:41에서는 “430년이 끝나던 그날 여호와의 군대는 애굽에서 빠져 나왔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합지졸인 저들, 싸움에 나갈 무기라고는 농기구가 전부인 저들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하셨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천군천사들이 지켜주고 대신 싸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광야교회는 은혜가 충만한 행복한 교회였으나 ‘행복을 누리는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축복은 받았으나 그 축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넘어지고, 작은 문제 앞에서도 방황하고, 작은 장애물 앞에서도 불평을 토해 놓는 어린아이와 같은 교회였고, 교인이었습니다.
이렇게 생생한 은혜를 입고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심약(心弱)한 저네들을 하나님께서는 걱정하셨습니다(출 13장 끝부분, 14장 첫 부분). 그래서 연약한 저들을 당장 위험을 무릅쓰고 가나안으로 가는 가까운 거리인 블레셋 땅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시고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도 저들을 연단하여 강한 민족으로 만드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저들을 홍해 앞에 세우심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배우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홍해 사건을 통해 저희가 섬겨야 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는 과정과 그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역사의 기록인데, 그중에서 14장은 첫 번째 장애물인 홍해를 기적으로 건너가는 기록입니다.
남자 장정만 60만이 되는 대 인파가 한꺼번에 해방되어 길을 나섰으니 갈팡질팡이고 질서가 뒤죽박죽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니 질서가 잡히고, 행진하는 방향이 잡혀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을 향한 방향으로 행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흘째 되는 날에 뜻하지 않은 난관이 생겼습니다. 그들 앞을 홍해가 가로막았습니다. 몇 십 명이나 몇 백 명이라면 어디 가서 배를 구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 많은 사람이 탈 수 있는 배도 없고, 바다를 건너갈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땅 꺼지게 한숨을 쉬고 있는데, 뒤쪽에서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뭔가가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애굽 군대가 600대의 전쟁용 마차를 타고 이스라엘을 잡으려고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 백성들은 여기저기서 웅성웅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선동꾼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한 사람들인데 어려운 일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동해서 자기가 대장이 되어보려는 것입니다. 오늘도 거듭나지 않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자꾸 인간의 생각과 방법으로 교인들로 하여금 불신의 세계로 빠지게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날 때에 함께 떠난 수많은 잡족들(출 12:37-38)로 이들은 앞장서서 모세에게 거칠게 항의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와서 여기서 죽게 한단 말이냐? 우리가 언제 당신더러 우리를 해방시켜 달라고 했기에 괜히 충동하여 여기까지 끌고 와서 결국은 죽게 하느냐?”하면서 모세를 향하여 항의하더니 결국 회중들을 선동해서 모세를 돌로 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 반대를 하며 회중을 선동했습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잡족의 한 사람이기는 하였지만, 모세가 아내가 없었을 때(?)에 결혼한 구스 여자, 제사장이 될 수는 없었지만 갈렙의 경우처럼 유다 지파를 대표해서 가나안을 정탐할 정도로 뛰어 났던 잡족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아니었지만 한 지파를 대표해서 가나안을 정탐하러 갈 정도라면 당시 따라 나온 중다한 잡족들 모두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 뜻대로 사는 훌륭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 이런 난리통에 모세는 전혀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출 14:13-14 / 그러자 모세가 대답하였다. “겁먹지 말고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하여라.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보기만 하여라. 너희가 두 눈으로 보고 있는 이 애굽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몸소 싸우실 것이다. 너희는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여라.”
모세의 말을 요약하면 “너희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라.”는 말로 자꾸 부정적인 말이나 불신의 말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었지만,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말이 대책이 된다고 보십니까? 그러나 모세는 당당히 백성들에게 그렇게 말했고, 조금 후에 보니까 그 말은 정말로 대책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출 14:15-18 / … “너는 어째서 살려 달라고 내게 울부짖고만 있느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앞으로 진군하라고 명령을 내려라. 16) 그리고 지팡이를 들고 네 손을 바다위로 내뻗어라. 그러면 바다가 갈라지리라. 그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다 한가운데를 마른 땅처럼 건너게 되리라. 17)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만들리라. 그래서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뒤를 쫓아 들어가면 내가 바로뿐만 아니라 그의 병거 부대, 기병 부대를 단숨에 쓸어 버려 내 힘이 어떠한지를 드러내 보이리라. 18)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 부대, 기병 부대를 단숨에 쓸어버린 뒤에야 비로소 애굽 사람들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깨달으리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출 14:19-22 / 이스라엘 진영 앞에서 그들을 이끌고 가던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뒤로 돌아가 이스라엘을 호위하자 앞서가던 구름 기둥도 뒤쪽으로 돌아가 20) 애굽 진영과 이스라엘 진영 사이에 섰다. 그러자 그 구름 기둥 때문에 애굽 진영은 캄캄해졌고 이스라엘 진영은 밤이 되었는데도 환하였다. 어둠에 갇힌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쳐들어오지 못하고 온 밤을 새웠다.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밤새도록 샛바람을 강하게 불게 하여서 바닷물이 물러가게 하셨다. 물이 갈라져 땅이 드러났다. 22)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다 한가운데를 마른 땅처럼 건넜다. 갈라진 바닷물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좌우에 벽처럼 둘러서 있었다.
모세의 말 대로 이스라엘은 가만히 서서 구경만 했을 뿐이고, 모세는 하나님이 하실 줄 믿고 장담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해 주셨습니다. 이제 저들이 할 일은 마른 땅처럼 된 바다 한 가운데를 걸어서 건너편 언덕으로 가는 것뿐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계속 봅니다.
출 14:23-31 /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뒤를 추격하였다. 바로의 병거 부대와 기병 부대가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의 뒤를 따라 바다 한가운데로 쫓아 들어왔다. … 25) 또한 여호와께서는 애굽 군대의 병거 바퀴를 수렁에 빠뜨려 옴짝달싹못하게 하셨다. 그러자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녀석들을 더 이상 추격하지 말고 우리 목숨이나 살고 보자. 아무래도 여호와가 이스라엘 녀석들 편이 되어 우리 애굽 군대를 쳐부수는 것 같다.” 하고 소리쳤다. 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뻗어라. 그러면 바닷물이 바로뿐만 아니라 그의 병거와 기병 부대 위로 다시 넘쳐흐르게 될 것이다.” 27) 모세가 곧 그 손을 바다 위로 내뻗자 동이 틀 무렵 바닷물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애굽 사람들은 바다물결이 뒤덮쳐 오는 것을 보고 오던 길로 다시 도망치려고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한가운데로 처넣으셨다. 28) 이렇게 바닷물이 제자리로 돌아와 애굽의 병거 부대와 기병 부대를 뒤덮어 버렸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뒤쫓아 바다로 뛰어들었던 바로의 군대는 하나 남지 않고 다 바닷물 속에 잠기고 말았다. … 31)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대항하여 큰 손을 휘두르시는 모습을 보고서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굳게 믿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한 번 더 봅니다. 우리는 편안하고 흥미있게 이 말씀을 읽지만, 이런 일을 당하는 이스라엘은 얼마나 두렵고 답답한 일인지 모릅니다. 남쪽과 서쪽으로는 높은 산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무서운 속도로 추격해 오고 앞에는 거대한 홍해 바다가 저들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혀 무장도 되어 있지 않았고 설령 무장을 했더라도 대제국 애굽의 정예부대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떠나 저들은 전혀 싸울 마음조차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저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원망부터 합니다. 곧 이어 지도자 모세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 이어집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거부하면서 차라리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났다고 단정 짓습니다. 저들의 신앙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저들은 홍해보다 더 깊은 염려 가운데 떨어집니다. 불안해합니다. 방도를 강구하지만 대책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넋을 잃고 앉아 있을 뿐으로 차라리 아무 소리나 하지 말지, 나오는 소리는 아우성과 더불어 원망뿐입니다.
▶ 우리들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분문에 있는 이스라엘보다는 형편이 낫습니다. 예배 자리에 나아와 앉아 하나님을 찬송하고, 말씀도 듣고, 예배를 드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도 예배에 참여는 하였으되 사업 문제, 경제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미래의 문제로 인해 염려에 찬송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말씀을 들어도 한쪽 귀로 흘려나가게 됩니다. 저들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염려와 불안과 같은 삶의 압박에서 벗어 버릴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 죽을 문제처럼 대단한 것입니까?
4. 하나님의 처방 - 염려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되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만을 고민하라
그런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너무 간단했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너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라. 너는 홍해 앞에서 손을 들라.”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광야 교회에 주신 명령으로 염려와 걱정에 대한 처방이었습니다. 이 처방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빌 4:6-7 / 걱정에 싸여 지내지 말고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기도하십시오. 필요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남께 감사드리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 7) 그러면 여러분은 인간의 이해를 훨씬 더 초월한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할 때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안정시키며 안식을 줄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인간의 생각에 사로잡혀 걱정하고, 염려하며 불안해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놀랍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통해 홍해를 건넜지만 계속 조그마한 어려움이 오면 곧 당황해 하였고,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대해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설칩니다. 그런 문제 상황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미련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염려하며, 설치는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서있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드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 최첨단의 무기로 무장한 최정예부대가 추격해 오는 데도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십니다. 앞에는 거대한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데, 모세는 홍해 앞에서 지팡이나 들고 있으니 얼마나 미련해 보입니까? 그럴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지시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답답하게 여겨졌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기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렸습니다. 홍해 앞에 서 있는 두 종류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신앙이냐? 불신앙이냐? 의 문제였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으면 어른은 염려 때문에 잠을 날밤을 새웁니다. 믿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잠을 잘 잡니다. 부모를 100%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권고합니다.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맡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큰 은혜 중에 은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상황은 여전히 어렵지만 염려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걱정꺼리가 있어도 걱정을 안 하는 신앙, 문제가 있어도 잠을 푹 잘 수 있는 은혜’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염려하는 체질에서 맡기는 체질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사우나에 가면 늘 눈에 들어오는 글귀가 있습니다.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십시오. 맡기지 않은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도 이 말과 같지 않을까요?
▶ 믿음은 평안할 때도 필요하지만 어려운 때는 더욱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믿음의 힘을 활용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힘을 활용하지 못하게 되자 그들은 불안과 걱정, 염려와 불신앙에 사로잡힙니다. 그러자 원망이 터져 나오고, 분노하게 되고, 마음이 강퍅해져서 나중에는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구원받은 감격은커녕 자기 자신에 사로잡혀 목이 곧아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부드러운 마음 즉 겸손과 온유한 마음 가지고 순종하십시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3절)
가만히 있는 것이 믿지 못하는 교인들의 눈에는 대책 없는 짓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는 가장 지혜롭고 의로운 대책입니다. 자기가 하면 될 것처럼 방향도 모르면서 섣불리 움직이면 일을 더 그르치게 되고, 이유도 모르면서 섣불리 말하면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므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 있어야 합니다. 그게 답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도우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가만히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내가 잘못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우리 방식의 마지막 몸부림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멈추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다리는 것이 가만히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5. 너희는 내가 인도하고 있다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가만히 있으면 좋으련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듬직하게 서있으면 좋으련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 날 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싸우시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 앞에서 가장 원하셨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저들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받았을 뿐 아직 거듭나지 않은 백성들이었기에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이요, 인도하시는 분이시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적들과 싸우시는 분이시며, 나중에는 천국으로까지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전적으로 믿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담대히 나갔다는데 ‘담대히’라는 말의 히브리어 ‘야드 라마’의 본래의 의미는 ‘높은 손’이라는 뜻으로, 전능하신 여호와의 높은 손에 이끌려 그분의 보호하심 가운데 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애굽에서 해방된 것에 흥분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합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저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출 13:21 /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진할 때 앞서 가셨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 위를 환하게 밝혀 주셨다.
▣ 광야 교회는 구원받은 감격 속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나는데, 그 길을 하나님이 친히 인도해 가시는 행복한 교회로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낮에도 밤에도 그들을 인도하시며 지키십니다. 고개만 들면 저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그런 삶 가운데 있었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성막을 만든 후 그들이 거주할 때는 반드시 성막의 위치를 이스라엘 12지파의 중앙에 세우도록 함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에 계신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광야에서 어떤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은 저들 앞뒤좌우에서 인도하시며, 보호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우리의 삶 중앙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 있을지라도 두려움과 염려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앞이 캄캄해질 때는 예수님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시니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문제가 어려워도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드십시다. 고개를 들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봅시다. 광야 길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줄 믿고 따릅시다.
▶ 이러한 엄청난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도 왜 그들은 건강한 교회가 되지 못합니까? 건강한 그리스도인들로 서지 못합니까? 저들은 삶의 현장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신뢰하지 못하니까 방황이 나오고 이어서 원망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지 못하니까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보여주시는 현장에서 작은 문제 앞에서 그들은 흔들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우리만이라도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불평할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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