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 하나 클리어
도깨비들처럼 새벽 세시 반에 집에서 출발해 아침 6시 반 정도에 전주에 도착했다. 아무 연락없이 아침 댓바람부터 집으로 들어서는 아들 내외를 보고 어머니는 어리둥절해 하셨다. 엊그제 아들과 통화하시면서
"너 어디니? 혹시 전주에 온 거니?"
하시는 말을 듣고 어머니의 마음을 알것 같아 남편에게 전주에 한 번 다녀오자고 했다. 또 딸이 지난주에 보경이 보러 전주에 왔다가 어머니를 찾아뵙고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는데 너무 얼굴이 나이들어 보이셔서 남편에게 빨리 한 번씩 편하게 어머니 뵈러 가자고 얘기 했었다. 그런 내 말을 염두에 두었는지 남편은 마치 목욕탕에 가자는 말을 하듯이 눈을 뜨자마자 내게
"우리 전주 갈까?"
했고 우리는 길을 나서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내색하진 않고 계셨지만 셋째아들이 많이 보고 싶으셨던 같다.
남편에게 미안하지만 또 전주를 내려갈 때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 피로감이 덜 느껴졌다. 이번 여행에는 주변을 잘 둘러보고 싶어 안경과 썬그라스를 잘 챙겨갔다. 준비는 좋았지만 안경이나 썬그라스를 끼고도 계속 졸았다.
어머니는 토란국, 김장배추, 멸치볶음, 고추장아찌, 동치미와 잡곡밥으로 아침을 차려주셨다. 건강하고 깔끔하고 맛깔난 음식들이었다.
얘기도 나누고 TV도 좀 보다가 전주 승화원 2차 효자 자연장에 모신 아버님과 큰 아주버니 산소에 다녀왔다. 오늘은 날씨도 좋고 낮은 산을 개간해 만든 묘지라 공기와 풍경이 좋아 기분이 참 상쾌했다. 두 분의 묘를 찾아 한참동안 돌아다녔다. 사람이 죽으면 겨우 이 이름만 몇 자 남기는 것이어서 죽은 이들의 이름만 읽으며 찾으러 다녔다. 그나마 이 돌조각에 새긴 이름도 한 사십년 정도 밖에 기억해주지 못할 것이다. 한 세대 차이가 30년정도이니 우리 부모를 우리들이나 이렇게 찾아다니지 우리 아이들에겐 벌써 잊어버릴 이름인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자연장 기간이 40년 정도인 모양이다.
사들고 간 소주와 문어 다리, 오징어 땅콩을 차려놓고 목례와 묵념을 올렸다. 술은 부어드리고 문어 다리와 오징어땅콩을 먹으며 내려왔다. 어머니 댁에서 가깝고 한가한 분위기가 참 좋았다. 우리처럼 설에 못와서 일찍 다녀가는 사람들인 것 같은 이들이 몇몇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농협마트에 들려 갈치, 고등어, 시금치, 사과, 무우, 양배추, 쌈배추, 묵가루, 삼겹살, 목살 등을 사들고 가 갔다. 우리가 먹고싶은 음식들이기도 했다. 돼지고기는 점심때 만석이 도련님과 먹으려고 산 건데 고기를 구워 밥상에 올렸는데 통 먹질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가 잘 드시지 않는 돼지고기를 한 두점 드셨다. 도련님은 자기는 오리고기를 잘 먹는다고 했다. 남편과 두 살 차이가 만석이는 어릴 때부터 남편에게 밉상으로 뺀질거리던 동생이다. 남편은 만석이가 자기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센데 오히려 힘든 청소 일이나 연탄 배달할 때 리어커 크는 일은 자기가 다 했다고 억울해 했다. 도련님의 말이 아니어도 우리에게도 돼지고기보다는 오리고기가 요리할 때나 건강에도 더 좋으니 다음에는 꼭 오리고기를 사기로 마음 먹었다.
집에서 가져온 검정콩 두 병, 농사지은 청량고추 말린 것, 석류 한 알, 파프리카 세 개도 챙겨 들였다. 어머니는 만드신 빨래비누를 통 크게 통째로 주셨다. 고추씨를 갈아 만드신 막장과 마늘 장아찌도 넉넉히 챙겨주셨다.
남편도 예전보다 피로를 덜 느끼는지, 아니면 어제 저녁에 빨리 자서인지, 아니면 기분이 좋아 몸까지 가벼워서인지 점심 먹고 바로 출발하자고 했다. 좀 밀리는 구간도 있었지만 고운 저녁노을까지 덤으로 보며 6시쯤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남편은 나의 날개이다. 그 먼 곳을 하루만에 이렇게 편하게, 안전하게 다녀오게 해주었다. 우리 둘이 이렇게 함께 곱고 건강하게 나이먹어 가길 간절히 바란다. 그것이 우리 아이들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엄마가 먼저 전화를 하셨다. 그리고 전화를 끊지않고 바로 전화를 받으셨다. 무언가 급하게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으신 것이다. 아마 광대떡이 돌아가셨을 때도 이렇게 소식을 전했을 것이다. 고향 동네가 자꾸 빈집이 늘어갔다. 우리가 아는 인물들이 자꾸 무대에서 사라져간다. 언젠가는 동네 사람들 모두가 다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갑촌떡이 치매로 간밤에 내복만 입고 동네를 배회하다 집 앞 도랑에 빠져 돌아가녔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래도 갑촌떡이나 돌아가신 요술떡 같이 치매에 거린 양반들에게는 이렇게 마음대로 자유롭게 배회하다 돌아가신 것도 큰 복이다. 요양원같은 시설에 갇혀서 지내지 않고 오래동안 살던 곳에서 오래동안 알던 사람들 속에서 이해받으며 지내셨으니 그것 또한 커다란 복이었음에 틀림없다.
엄마는 죽는 것에도 체면을 세우고 싶으신 모양이다. 엄마는 꼭 체면을 지켜 죽고싶다는 의지를 보여주신다.
"나는 정말 모든 행동을 조심하고 있단다. 전동 휠체어를 탈 때도 동네에서 걸어다닐 때도..."
엄마는 광대떡이나 갑촌떡처럼 목욕탕이나 도랑이나 이런 곳 말고 반드시 방안에서 죽고 싶다는 큰 꿈을 키우고 계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