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에 이역만리 타향으로 건너와 살 거면 벌과 나비와도 친구 하고 꽃도 자주 피울 일이지, 온몸에 독 오른 바늘을 꽂고 엄한 경계령을 내릴 게 무언가. 종족 번식에만 열을 올려 불현듯 폭발하듯 새끼 치는 걸 보니, 제 몸을 분할하기까지 하는 걸 보니 아주 독한 종족이로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행복> 5월호 표지 그림을 보고 나니 선인장에 대한 이 비아냥거림이 민망스럽다. 이 세상 꽃이 아닌 것 같은 선인장이 알큰한 숨결을 내뿜는다. 밤하늘의 달처럼 신성해 보이기도 하고, 우주의 소행성 같기도 하다. 풍성한 둔부를 드러낸 폼이 후덕한 아낙네 같다가, 새끼들까지 통통하게 달라붙어 있는 걸 보니 순박한 짐승 같기도 하다.
(왼쪽) 조은신, ‘a cactus-beautiful time’,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162.2×112.2cm, 2010
아름답다 “제게 선인장은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식물이에요. 특별히 보호받지 않아도 살아남는 데다, 어느 순간 갑자기 꽃을 피워내는 모습은 감동스럽기까지 하죠. 무질서 속 질서라 할 가시의 배열은 또 어떻고요. 그 꽃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지요. 그림 그리는 내게 이보다 완벽한 소재가 있을까요?”
조은신 씨는 선인장만 그린다. 화산, 별자리, 바위 그림을 지나와 지금은 선인장만 그린다. 온몸을 덮은 가시털이 타인을 위한 무장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걸, 광염으로부터 관 속을 타고 흐르는 수액의 증발을 막기 위해 넓은 잎 대신 뾰족한 가시를 키우는 거라는 걸 안 후부터 선인장에 더 애착을 가졌다. 어머니, 아내, 자식이라는 여러 몫을 짊어진 자신의 모습, 생존하기 위해 강인한 본성을 키워온 여자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이 녀석의 이름 ‘선인장 仙人掌’은 신선의 손바닥처럼 생겼다는 뜻이다. 신선의 손길로 세상 모든 사람을 어루만져준다는 거룩한 뜻.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여기까지 듣고 나자, 문득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왜 세상을 그다지도 얄팍하게 보고 산단 말인가.
곱다 그의 선인장 그림은 곱다. 그리고 키치스럽다. 시리도록 눈에 띄는 색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단박에 칠해내는 산뜻한 색채와는 좀 달라요. 화판에 밑칠을 하고 물감을 뿌린 후 고운 모래를 섞거나, 진주·보석을 곁들여 사포질을 하기도 해요. 그렇게 해서 두터운 질감을 가진 색이 만들어지죠. 언뜻 보면 그냥 핑크색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겹겹으로 쌓인 색의 단층들이 숨어 있어요. 겹겹으로 쌓인 우리 모두의 생의 단층처럼.” 그는 그림 그리는 꿈을 잠시 접은 채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삶을 살았다. 미술 학원을 운영했지만 예술의 꿈은 좀 멀리 있는 것 같았다. 아내와 어머니의 삶을 기쁘게 살면서도 캔버스 앞을 떠나진 않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때부터 더 열심히 그렸고, 드라마 <파스타>에 그의 그림이 비치면서 ‘확’ 떴다.
여자 조은신의 인생도 그의 그림처럼 겹겹이 덧칠한 색인 것이다. 아롱다롱한 일상을 한 켜 한 켜 쌓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것, 짐이기도 하지만 덤이기도 한 여자의 일상을 쌓아가다 보면 이처럼 고운색의 인생이 된다는 것. 그의 그림엔 이렇듯 많은 뜻이 담겨 있다.
(오른쪽) 조은신, ‘a cactus-beautiful time’, 혼합재료, 80×73cm, 2010
![](https://t1.daumcdn.net/cfile/cafe/192AF13E4DCBE28F0D)
▲ 조은신/a cactus-beautiful time 80x73cm Acrylic on canvas 2009
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히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