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문 배달
덕수 중학교 2부에 입학한 후 처음엔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간 학생들이 교문을 나올 때
책가방을 들고 가는 것이 창피했고 열등감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에는 2부 학생들도 많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고
오후에는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 때 우리 집은 멍덕골이라는 장위동에서 변두리 무허가 건물에 살고 있었다.
전세를 살다 그 곳으로 이사한 것이다.
복개를 하지 않아 공주능(현 드림랜드)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흐르는 개울옆으로 무허가 집들이 나란히 있었다.
그리고 앞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있었다.
아마 그곳에서 3년 정도 살았던 것 같다.
방은 1칸으로 어머니, 제대한 형,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살았다.
1학기 정도 지난 후 나의 라이벌이 생겨 주산 반에 들어가,
학교에 일찍 등교하여 주산을 놓고 수업을 했기에
주간 반 아이들이 하교하는 것과 마주치지 않아서 좋았다.
또 한 가지 안 사실은 많은 학생들이 주간에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이다.
병원에 물건이나 회보를 돌리는 아이,
짜장면 집에서 먹고 자면서 심부름 하는 아이,
신문 배달하는 아이 등 이었다.
나도 가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 2년 간 새벽에 신문을 돌렸다.
새벽 4시 전에는 보급소에 도착해 신문에 간지와 광고물을 끼우는 작업을
30분 정도 한 후 약 100부에서 150부를 옆구리에 끼고
구독하는 집에 신문을 넣어주고 월 말에 수금을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한국일보를 배달했다.
한국경제와 일간스포츠도 같은 계열이라 같이 배달했다.
인수인계를 받기 위해 선임을 따라다니며 대문이나 벽에
흰 분필로 H 자를 쓴 집을 찾아서 3~4일 같이 배달한 후엔,
혼자서 컴컴한 밤에 글자를 찾아 배달했다.
하지만 집집마다 신문종류마다 글자를 표시해 놓아
구독하는 집이 어느 집인지 익숙해 지기까지는
H자를 찾는 데 애를 많이 먹었다.
그리고 당시엔 집을 많이 지었다.
건축 붐이 일어 소위 청부업자(집을 지어 파는)들이 집을 많이 지었기에
신문 개척에 열을 올려, 보급소에서는
새로 지은 집은 무조건 신문을 넣으라고 지시했다.
당시 급여는 택시 사납금 처럼 신문 한 부 구독료의 일부를 지급받는 식이었다.
말하자면 신문값이 100원이라면 90원을 보급소에 내고
나머지 10원을 내가 먹는 식이다. 하지만 수금이 쉽지 않았다.
구독하겠다고 해서 배달한 집이 대부분이었지만
신규 개척하려고 일방적으로 넣어준 집이나
이사를 가 주인이 바뀐 후 구독을 원치 않는 집에서는
수금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집의 신문대금 90원은
내가 지불해야 하기에 실 수입은 많지 않았다.
신문을 돌리다 보면 처음엔 옆구리에 낀 신문이 무척이나 무겁지만
배달이 진행됨에 따라 무게가 점점 가벼워지고
뜀박질도 빨라질 때의 후련함 이랄까 그 기분은
정말 새벽공기보다 상쾌하다.
또한 배달의 기술도 향상되어 일반 가정 집에는
멀리서도 담 너머로 안전하게 던지는 내 자신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대문 앞에 가서 대문 틈 사이로 밀어 넣었지만
요령이 생기면서는 뛰면서 옆구리에 낀 신문 한 부를 꺼내어
허벅지에 한 번 때리면 2절지 정도로 작아지는데
‘신문이요!’ 하면서 그것을 던지면 원하는 곳에 안착이 되는 것이다.
가끔은 수도가 등에 잘못 던져져 구독자에게 핀잔을 듣는 경우도 있지만,
수금할 때 집에 들어가든지 집안을 살펴볼 수 있어
다음부터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된다.
셔터 문이 닫힌 상점 같은 곳은 조그만 틈만 보이면 넣는데 지장이 없다.
밖에 놔두면 다른 사람의 손을 타기 때문에 신문 모서리가 들어갈 틈만 있으면
그곳으로 살살 끼운 후 던지듯 밀어 넣으면
안전하게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신문을 배달할 때 힘들었던 것은 구독자들의 성격이 다양했다는 점이다.
한국일보 사절이라는 글을 붙인 집은 이사 후 주인이 바뀌었거나
신규 개척한다고 새로 지은 집에 각 신문이 다 배달되고
그 중에서 우리 신문은 원하지 않으니 넣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배달 부수가 떨어지면 나의 수입이 줄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넣고 월말에 해결할 생각으로 넣는 것이다.
사절이 붙은 집에 넣으러 갈 때는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집 앞에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인이 안 보이면 더욱 빨리 뛰면서 신문이요! 소리도 하지 않고
던지고 달아나곤 하는데 어떤 집 주인은 대문 안쪽에 숨어있다
신문을 던지자 마자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나오며,
쌍 욕을 하는데 간이 콩알 만한 적도 많았다.
또 어떤 분은 신문이요! 하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신문이야 구문이지 하면서 야단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배달을 처음 시작하는 지점은 5시 정도 되지만
끝나는 지점은 6시가 넘게 되니
아침형 인간인 그분은 신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순서를 바꾸어 보기도 했지만
그러면 또 다른 분이 불평을 해서 참 난감했다.
특히 수금 할 때가 하일라이트다.
영수증 장부를 들고 구독자 집에 가서 직접 수금을 했는데
첫 방문 때 주는 집도 있지만, 주인(어른)이 부재중 이라든가
돈이 없어 다음에 오라는 사람도 있어 여러 번 방문을 해야했다.
그 중에서 강제로 신문을 넣어 준 집은 정말 방문하기 싫었다.
그 동안 넣은 신문을 쌓아 놓고 가져가라는 분,
욕을 하고 야단을 치는 분,
이 번만 봐 줄 테니 다음 달 부터는 넣지 말라는 분 등 다양했지만
어째튼 수금할 때가 가장 힘든 시간이었고 어린 마음에 상처도 받았다.
드문 일이지만 어떤 친절한 분은 어린 학생이 수고했다고
양말 한 켤레라도 주는 분도 계셨는데
그런 분 때문에 힘을 얻고 배달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문배달을 하게 되면 그 동네에 대한 정보를 잘 알 수 있다.
이 집이 누구집이라는 정보를…
내가 배달한 집 중에 국회의원, 탤런트, 코미디언 등이 있었는데
당시 유명배우인 문희 집에도 배달했다.
문희에겐 오빠가 있었는데 약간 장애가 있었다.
나중에 그가 우리 누나 집에 세들어 살던 아가씨를 좋아해
몇 번 찾아온 것을 기억한다. 물론 그 아가씨는 싫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힘들고 자존심 상했을 법한데
당시엔 그런 감정이 없었던 것 같다.
다른 학생들도 다 그렇게 살았고,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열심히 인생을 살았던 것 같다.
희망이 있다는 것이 삶의 원동력이니까….
2. 과외지도
중학교 2학년 때, 유** 선생님이 담임으로 계시면서
나에게 초등학교 학생을 가르치라며 아르바이트 자리를 주선해 주셨다.
삼선동에 있는 직업군인의 집 이었다.
2명의 남자 초등학생이었다.
신문배달은 하면서 일 주일에 2번 그 집에 방문하여 아이들을 지도했다.
그 후 대학교 때 역시
중학교 2학년인 유 선생님 조카(목사 아들)와 친구를 가르쳤고,
집에서는 조카들과 동네 중학생도 가르쳤다.
그러고 보면 고등학교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를 다닌 것 같다.
첫댓글 주경야독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오심이 느껴집니다 신앙의 힘이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희망은 삶의 원동력이고 행복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