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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마당 스크랩 文人이 쓴 전쟁과 사람의 추억
빗방울 추천 1 조회 138 13.09.06 05:42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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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文人이 쓴 전쟁과 사람의 추억

 

“남루한 한복과 긴 수염, 나를 죽여 주십시오”(김수영)

 

명동은 지금 변했다. 낭만 대신에 돈, 돈 대신에 자본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어질고 착하던 우리들 명동의 왕자들, 김인수 박인환 김수영 조지훈 마해송 변영로 노천명 시인도 각자의 성좌를 찾아 이미 하늘로 떠나 버리고 남은 벗들은 세찬 시대적 바람에 몰려 종로로, 무교동으로, 세종로로, 청진동으로, 인사동으로 혹은 자기 안방으로 뿔뿔이 ‘폴 베르레느’의 가을낙엽처럼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 “서울서 오신 김동인 선생이다. 술을 대접하고 노래를 불러라”

⊙ “그런 훤한 눈은 드물 것이오”(김동리의 손소희 첫인상)

⊙ ‘그도 웃는, 같은 인간이로군!’(전봉래 웃음에 대한 조병화 반응)

⊙ ‘이제 姓도 이름도 없는 태양을 등진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조연현)

 

자료제공 : 공연예술연구가 金鍾旭

 

 

50년대 말의 서울 명동 거리 풍경.

 

 

좌우(左右)의 해방공간과 6·25 전란(戰亂)은 불과 얼음의 아비규환이었다. 가난한 문인(文人)들은 펜 하나로 기막힌 세월을 견뎌야 했다. 매몰되기 직전의 폐광 같은 경험을 모국어(母國語)로 옮겼다. 문인들의 절절한 내면세계는 그 시절을 함께 견뎌 낸 동료 문인의 회고로 확인된다. 그 회고 내지 수기·증언은 당시 간행됐던 신문·잡지에 발표됐으나 작가가 숨지고, 매체가 폐간되면서 잊혔다.

 

후대의 몫은 세월의 더께에 쌓인, 그러나 여전히 어딘가에 남아 있을 증언과 회고를 찾아 세상에 내놓는 일이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이고 미화된, 사사로운 얘기일 수 있으나 격변기를 살던 한국인의 초상(肖像)일지 모른다. 적어도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 6·25의 지옥(地獄)을 견딘 ‘모국어 첫 세대’ 문인들의 절규가 아니겠는가.

 

《월간조선》이 소개하는 회고록은 시인 조병화(趙炳華)와 김수영(金洙暎), 소설가 박영준(朴榮濬)과 김송(金松), 평론가 조연현(趙演鉉)의 육성이다. 1969년 4월 7일부터 이듬해 12월 10일까지 지금은 사라진 《대한일보》에 연재됐다. 《대한일보》는 1961년 2월 창간돼 1973년 5월 15일 폐간된 신문. 또 잡지 《희망(希望)》의 1953년 8월호에 실린 김수영의 수기를 발췌, 소개한다.

 

김송의 金東仁 회고

 

 

소설가 김송 선생과 그가 쓴 <나와 백민시대>.

 

소설가 김송(1909~1988)은 《대한일보》에 게재된 <나와 백민(白民)시대>라는 회고에서 소설가 김동인(金東仁·1900~1951)과 김동리(金東里·1913~1995) 선생을 추억한다. 《백민》은 광복 후 극심한 이념갈등 속에서 민족문학을 부흥시키려 만든 문예지다. ‘백민 동인’은 백철 김동리 조지훈 정비석 최정희 손소희 서정주 등이다. 희곡과 소설을 쓰며 문단에 이름을 남긴 김송은 전후(戰後) 신흥극장 단장과 《서울신문》 문화부장, 전국소설가협회장을 역임했다. 대표작으로 <지옥>과 <주막> 등이 있다.

 

김송의 고향은 함흥. 일제 말엽, 김동인 선생이 함흥을 찾아와 문예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강연이 끝난 그날 밤, 김송은 요리점에서 기생을 불러 동인에게 술을 치게 했다.

 

 

<… 고향의 문인들은 개천거리에서 울분을 터뜨리고 노래를 부르고 일제 정책을 매도하다가 경찰에 끌려간 일이 많았었다. 이곳에 놀러 온 문인도 그랬었다. 따라서 색주가들도 그 두 가지(左右) 사상을 가지고 문인을 상대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중략)

 

“얘, 서울서 오신 유명한 소설가 김동인 선생이다. 술을 대접하고 노래를 불러라.”

 

내가 기생 보고 말하자 기생이 술을 올리면서 당돌하게 “김동인 선생은 무슨 사상인가요?” 하고 물었다. 김동인은 “나는 사상이 없다” 하고 껄껄 웃고 나서 “우리는 조선 사람이니 조선이 우리 사상이다” 하고 민족주의 사상을 암시했었다. …>

 

 

“조선이 우리 사상이라니요?” 하고 다시 기생이 묻자 동인은 “우리 역사책을 읽었으면 알게 아니냐!”며 껄껄 웃고서 “나는 술보다 미인을 좋아하니 오늘 밤 덕담(외설)이나 하자”고 말을 돌렸다.

 

 

소설가 김동인 선생.

 

<… 요리집에서 나온 동인은 여관은 마다하고 나(김송)의 집, 모기장 속에서 그와 함께 자고 이튿날 총총히 북행차를 탔다. 함경도를 돌아 간도에서 문예강연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동인은 짧은 바지에 스타킹을 하고 캡을 쓰고 단장을 들고 마치 등산가 차림을 하고 문예강연 행각을 했다. 그런 차림은 당시 서울(경성)의 ‘모던 보이’들이 즐기는 멋이었다. …>

 

김송은 “해방 이후 동인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작품 쓸 기력조차 없었다”며 “30년 동안 문학을 통해 업적을 남겼으나 결국 문학은 생명의 진을 뽑아 먹는 작업이었다”고 했다. 언젠가 동인은 <계란 세우는 방법>의 글을 써서 김송을 찾아왔는데 그에게 불쑥 만년필 한 자루를 내밀었다고 한다.

 

<… “나는 오늘 이것을 당신에게 주려고 왔소.”

 

“왜 선생님이 쓰지 않고 나한테 줍니까?”

 

“나는 이것이 소용없게 되었소.”

 

“왜요? 글을 쓰셔야죠.”

 

“나는 아마 못 쓰게 될 것이오. 나한테는 만년필보다 약이 소중하오. 그러니까 김송씨가 이것을 가지고 약값을 주오.” …>

 

김송은 “동인의 얼굴에 영 핏기가 없고 죽은 빛이었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선생님, 이것은 거두시고 원고료 선금을 드리지요”라고 선금으로 원고료를 주었다. 그때 선금을 받고 동인이 쓴 글이 다섯 달 걸려 완성한 <여(汝)의 문학도 30년>이다.

 

김송의 金東里 회고

 

김동리 선생.

 

 

김송의 김동리 선생과의 교유(交遊)는 이렇다.

 

어느 날 민중일보사(발간 1945년 9월 22일~1948년 12월 2일)에서 김송과 김동리가 만났다. 김동리는 해방 이전에 붓을 꺾다시피 하고 산촌에서 지냈는데 해방이 되자 상경해 문학운동을 벌였다. 김송은 “사람들이 동리를 편벽하다, 고집이 세다고 말하지만, 내가 본 동리는 정당하고 지조가 강해서, 숱한 무리 중에서도 순수 문학정신을 고집하고 공산문학과 대결한 자”로 평했다.

 

동리와 김송은 매일같이 만나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혹은 교외로 나갔는데, 그 시절 동리는 가정적으로 고독했다고 한다. 하루는 늦게까지 다방에서, 막걸리집에서 마시다가 자정이 임박해 두 사람이 동리의 집으로 향했다. 김송이 어딘지 모르고 따라갔는데 어떤 집 대문에 들어서자 조그만 집이 빈집처럼 조용했다고 한다.

 

 

<… 안방을 들여다본즉 헌 넝마 같은 이불이 펼쳐 있고 건넌방에는 상당한 책자가 꽂혀 있는 서재가 보였다.

 

김형과 나는 여름이므로 마루방에 누워서 잤다. 새벽이 되자 김형이 먼저 눈을 뜨고, 성북동 어느 술집에 가서 술국을 마시자고 해서 나도 눈을 떴다. 그때 안방에서 아이들이 나왔다.

어디서 새소리가 들린 모양인지 새소리의 울음을 흉내내고 있었다.

 

“우리집에 온 감상이 어떻소?”

 

“뭐 씁쓸하구만요” 하고 나는 솔직한 감상을 삼갔다.

 

“아침 몇 시에 일어나오?”

 

“대개 다섯 시 ….”

 

그의 대답에 나는 탄복했다. 술을 마시고 늦게 돌아와서 다섯 시에 일어나 일을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

 

그뒤 김송이 동리와 함께 명동을 거닐다가 소설가 손소희(孫素熙·1917~1986)를 우연히 만났다. 김송이 동리에게 손소희를 처음 소개했는데, 그녀에 대한 동리의 첫인상은 이랬다.

 

“나는 그런 눈을 처음 보았고. 그런 훤한 눈은 드물 것이오.”

 

동리의 두번째 여인이 된 손소희는 당시 동화통신 여기자였다. 동리는 그녀와의 사랑을 불륜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리는 그날의 만남 이후 부인을 두고 손소희와 따로 살림을 차렸다.

 

박영준과 김용호의 얄궂은 인연

 

 

소설가 박영준 선생과 그가 쓴 <나와 종군작가 시절>.

 

 

예술원 회원이자 연세대 문리대 학장을 역임한 소설가 박영준(1911~1976)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모범경작생>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1948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를 거쳐 1951년 육군본부 정훈감실 문관으로 복무, 종군작가단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다음은 《대한일보》에 실린 박영준의 <종군작가 시절> 중 시인 김용호(金容浩·1912~1973)와의 일화다. 김용호는 훗날 단국대 국문과 교수, 펜클럽한국본부 부회장을 역임했다.

 

박영준과 김용호는 6·25 당시 짐을 싸매고 아이들과 함께 집을 떠났지만 한강인도교가 폭파돼 도강(渡江)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갔다가 극심한 고난을 겪었다.

 

도강을 못한 두 사람은 의용군에 끌려 이북 강계까지 갔다. 그곳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탈출했다. 박영준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근 천리길을 꼬박 걸어’ 서울로 돌아갔다. 당시 의용군에 끌려 북행했던 문인 중에는 소설가 박계주(朴啓周·1913~1966)와 시인 김수영도 있다. 두 사람 역시 탈출에 성공했다.

 

박영준·김용호는 또다시 가족을 서울에 남겨두고 함께 피란길에 올랐다. 그해 12월 28일 무렵의 일이다. 영등포역에 처음 도착했으나 그들이 탈 자리는 없었다. 객차 안은 그야말로 콩나물 시루여서 발 들여놓을 자리가 없었다. 열차 지붕에 올라가 보니 그곳마저 빈 틈이 없었다.

 

<… “걸어가세. 가다가 트럭을 타고 가는 편이 낫겠어.”

 

김형(김용호)의 말이다.

 

“빈 트럭이 있을라고?”

 

나는 회의적이었다.

 

“어떻게 될 거 아냐? 걱정 말고 가.”

 

김형은 낙관적이었다.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믿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중략) 우리는 수원으로 가는 도로까지 나섰다. 그리고 지나가는 트럭마다 손을 흔들었다. 한 트럭이 우리를 보고 정지를 해 주었다. 그런데 트럭이 정거한 곳은 우리가 서 있는 데서 약 50m쯤 앞선 곳이었다. 우리는 달렸다.

 

다시 없을 기회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앞서 가는 김형의 뒤를 따를 수가 없었다. 고생을 한 탓인지 다리가 말을 들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새 김형은 트럭 뒤에 올라탔다. 나는 까마득히 뒤떨어져 있는데, 그리고 내가 타기 직전 트럭은 김형만을 태운 채 그냥 훌훌히 가 버렸다. …>

 

 

시인 김용호 선생.

 

 

박영준은 다시 영등포역으로 돌아갔다. 한 몸뿐이니 어디라도 끼여서 갈 수가 있었으면 했다. 객차 안에는 감히 들어설 수 없어 기차 지붕위로 올라갔다. 그곳도 만원이었으나 그래도 앉을 자리가 있었다. 몇 시간을 기다리자 기차는 떠났다.

 

사흘 뒤 대구역에 내렸다. 12월 31일이었다. 수소문 끝에 서울에서 온 문인들이 자주 간다는 ‘아담다방’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의 침식을 걱정해 줄 여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스스로 한심스럽기만 해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소설가 김송이 나타났다. 김송의 셋방에 가니 부인과 네 아이가 비좁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사양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김송의 가족도 박영준이 미안을 느끼지 않도록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무슨 일을 해서든 자활해야겠다고 다짐한 박영준은 소설가 정비석(鄭飛石·1911~1991)을 만나 함께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숙소는 여관 2층 다다미방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대구로 피란 온 소설가는 최정희 장덕조 최상덕 최인욱 최태응 김송 정비석 유주현 방기환 김영수 김리석 등이었다.

 

박영준은 정훈감실에서 사병문고를 편집하고 작가들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그러는 동안 서울을 점령했던 중공군이 국군의 진격으로 후퇴하고 서울이 다시 탈환됐다. 서울이 탈환되고 전선(戰線)이 38선으로 이동하자 서울왕래가 시작됐다. 당시 《국방》이란 잡지를 편집하고 있던 소설가 유주현(柳周鉉·1921~1982)이 서울에 간다고 하자, 박영준은 자신의 가족을 찾아가 달라고 부탁한다. 유주현은 물어 물어 서울 성북동 산꼭대기에서 사는 그의 아내를 천신만고 끝에 만나 남편의 생사를 감격적으로 전한다.

 

김수영의 탈출기

 

 

시인 김수영 선생과 그가 쓴 <나는 이렇게 석방되었다>.

 

 

잡지 《희망》의 1953년 8월호(3권 8호)에 실린 김수영(1921~1968)의 수기 <나는 이렇게 석방(釋放)되었다>는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탈출, 서울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이 수기의 부제(副題)는 ‘시인이 고하는 조국의 공개장’.

 

김수영은 6·25 사변 당시 피란을 못 가 평안남도 북원리까지 끌려갔다. 그해 8월 3일의 일이다. 가까스로 훈련소를 탈출했지만 중서면에서 다시 체포돼 훈련소로 돌아간 것은 다음달 28일. 하지만 10월 11일 유엔(UN)군이 평남 순천에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다는 ‘벼락 같은’ 정보를 듣고 재차 훈련소를 탈출해 평양까지 오게 된다. 그의 기록이다.

 

<… 평양에 와서 비로소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국군장병에게 보내는 치하문(致賀文)을 길가에서 읽고 나는 눈물을 흘리었다. 음산한 공설시장(公設市場)에 들어가서 멸치 150원어치를 사 가지고 등에 걸머진 쌀 보따리 속에 꾸려 넣고 대동강(大同江) 다리가 반(半) 이상이나 복구(復舊)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60원씩 받는 나룻배를 타고 유유(悠悠)히 강을 건넜다. 강을 넘어서니 인제는 살았다는 감이 든다. (중략) 신을 벗고 보니 엄지발이 까맣게 죽어 있다. 신을 벗어 들고 걸었다. 오리도 못 가서 발바닥이 돌에 찔려 가지고 피가 난다. 다시 신을 신고 걷는다. 새끼로 신을 칭칭 동여매고 걸어 본다. …>

 

김수영은 그해 10월 28일 저녁 6시경 서울에 도착한다. 시인이 느끼는 서울의 거리는 ‘살벌’했다. ‘6·25 이전의 서울, 그 호화로웠던 서울’이 아니었던 것이다. 순간 ‘살고 싶다는 의욕과 인제는 살 가능이 드디어 없어졌다는 새로운 절망의 인식이 직감적으로 시인의 가슴을 찌르고 지나갔다’고 썼다. ‘공연히 서울에 돌아왔다는 후회조차 들었다’고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남루한 한복, 길게 자란 수염, 짧게 깎은 머리, 1500리 길을 오는 동안 온 몸에 밴 먼지는 의심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수영은 ‘나를 죽여 주십시오 하고 돌아온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썼다.

 

시인은 무작정 서대문 파출소로 들어가 의용군에서 탈출해 온 사실을 털어놨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순경이 “지금 통행금지니 집(충무로)까지는 갈 수 없소. 내일 아침에 가시오. 지금 가다가는 도중에 잡힐 테니”라고 했다.

 

<… 기어코 순경의 충고를 어기고 억지로 나는 서대문 파출소를 나왔다. 어둠이 나리는 거리는 나의 심장을 앗아 갈 듯이 섧기만 하였다. 이대로 어디로 달아나 버릴 수 없는가, 이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

 

조선호텔 앞을 지나 동화백화점을 지나 해군본부 앞을 지날 무렵, 지프 옆에서 땀에 흠뻑 젖은 김수영의 얼굴을 향해 ‘플래시’의 광선이 날아왔다.

 

<… “어디로 가시오?”

 

“집에 갑니다.”

 

김수영은 천연스럽게 대답했다.

 

“어디서 오시오?”

 

“북에서 옵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이오?”

 

나는 한 발 쭈욱 앞으로 다가서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의용군에 잡혀 갔다가 돌아 나와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우리 집은 바로 요 앞 올시다. 방금 서대문 파출소에 들러서 자초지종을 고백하고 오는 길입니다. 집에 가서 한번 가족들 얼굴이나 보고 자수하겠습니다.”

 

국군으로 보이는 ‘플래시’ 광선은 “응? 그러면 당신은 ‘빨치산’이로군” 하며 권총을 꺼내 들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번쩍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

 

김수영은 그리운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을 앞에 두고 다시, 친공(親共) 포로와 반공(反共) 포로가 나뉘어 서로를 죽이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끌려가게 된다. 그것도 3년이나.

 

김수영은 또다른 수기 <시인이 겪은 포로생활>(월간 《해군》 1953년 6월호)을 통해 이렇게 탄식했다.

 

<… 이태원 형무소에서 인천 포로수용소로, 인천 포로수용소에서 부산 서전병원으로, 서전병원에서 거제리 제14야전병원으로?가족 친구 다 버리고 왜 나만 홀로 포로가 되었는가! …>

 

 

‘전봉래, 마침내 세상에 자살하러 온 사람 같았다’

 

시인 전봉래 선생.

 

 

세계시인회의 한국위원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지낸 시인 조병화(1921~2003)는 한국시단에 독보적 인물이다. 경성사범과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물리와 화학을 전공했으나 시에 천착, 경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조병화 선생이 들려주는 전후 문단 이야기는 슬프고도 아름답다.

 

명동, 그것도 6·25 당시 서울의 유네스코 회관 자리쯤에 아담한 찻집이 있었다. 조병화는 《대한일보》에 실린 <명동시절>에서 전봉래(全鳳來·1923~1951) 시인과의 일화를 들려준다. 전봉래는 늘 심각하고 우울하고 깨끗하고, 그리고 혼자였다. 그가 부산서 자살할 때까지 조병화의 인상 속에 전봉래의 이미지는 그랬다. 전봉래 시인은 프랑스 낭만파 시인 발레리를 좋아했고 바흐를 즐겨 들었다.

 

<… 나는 페노바비탈을 먹었다. / 30초가 되었다. 아무렇지도 않다. / 2분 3분이 지났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다. / 10분이 지났다. /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 찬란한 이 세기에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소. 그러나 다만 정확하고 청백리하게 살기 위해서 미소로써 / 바흐의 음악이 흐르고 있소.(전봉래의 <그리운 사람에게> 전문) …>

 

페노바비탈은 최면·항불안·항간질약으로 쓰이는 약이다. 봉래는 유서와 다름없는 시를 쓰고 부산 남포동 지하실 스타다방에서 사라졌지만 병화의 눈에 그는 “과묵하고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듯한 인상, 마침내 세상에 자살을 하러 나온 사람 같았다”고 회고한다.

 

언젠가 병화는 봉래가 웃는 것을 처음으로 본 것은 평양에서였다고 했다. 6·25 당시 평양으로 그는 먼저 종군(從軍)하고 있었다. 조병화가 그해 11월 중순 군용 트럭을 타고 평양엘 갔는데 그곳에서 봉래를 만난 것이다.

 

<… “조형!” 하고 반갑게 웃는 얼굴. 그가 웃는 걸 처음 보았던 거다. ‘그도 웃는, 같은 인간이로군!’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만큼 그는 웃는 사람이 아니었다. (중략) 돈 한 푼 없이 시(詩)에 떠 있는 노상(路上)의 인간, 그게 봉래형이었다. …>

 

자살하던 날 오후 부산 ‘밀다원’에서 병화와 봉래는 만났다. 봉래는 “조형! 나 찻값 좀 주오”라고 말할 정도로 참혹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 그는 정신의 귀족이었으니까. 나는 몇 푼인가를 서로 나누어 가지고 그와 헤어져 금강다방으로 갔었다. 그날 밤도 국제시장, 남포동 등지에서 만취가 되어 송도로 돌아갔었다. 그땐 송도에 집이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온 기별이 전형의 자살이다. 아,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어제 저녁 같이 술이나 했을걸. 왜 자살을 했는지 지금도 아는 사람이 없다. …>

 

조병화와 명동시절

 

 

시인 조병화 선생과 그가 쓴 <나와 명동시절>.

 

 

조병화의 회고에 따르면, 명동으로 깊이 들어서면 다방 ‘피가로’와 ‘돌체’가 있었다. “피가로엔 시인 김기림(金起林·1908~?)의 그룹이 많이 드나들고, 돌체엔 소설가 이봉구(李鳳九·1916~1983)를 비롯해 고전음악을 좋아하는 예술인들이 출몰했다”고 한다. 당시 명동 어린이공원 부근 ‘명동장’, ‘무궁원’이라는 대중 목로(木?)는 6·25 동란 전까지 명동 예술인의 소굴이었다.

 

<… 빈대떡 지지는 냄새, 생선 굽는 냄새, 곱창 불고기 굽는 냄새와 그 연기 속에 자욱이 들어들 박혀 문인과 예술인들은 날이 저물도록 술을 마시곤 했다. 좌우익의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 신경 속에서 욕설과 ‘불평볼국’이 몽땅 모여 있는 장관이었다. …>

 

그 무렵 조병화는 《경향신문》 문화부장인 김광주(金光洲·1910~1973)와 자주 명동에서 만났다. 소설가 김광주의 외상은 유명했는데 어디고 외상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쌓이고 쌓이고 더께같이 쌓이는’ 외상이었다. 그렇다고 외상시비는 없었다. 한잔 마시고 외상을 그을 무렵 시인 김수영이 나타나곤 했다.

 

<… 김수영은 이때부터 그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훅 떠날 때까지 참으로 줄곧 서로 통해서 지냈지만 때로 언성을 높인 적도 있었다. 술에 취하면 그는 말버릇처럼 나는 ‘부르조아’이고 자기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거다. 나는 귀족이고 자기는 서민이라는 것, 그러나 다음날 다시 만나면 힉 웃어 버리고 “병화 다시 한잔 하자” 하는 성격의 시인이었다.

 

참으로 좋은 시질(詩質)을 가지고 좋은 지식을 가졌던 시인이었는데 무정하게 먼저 떠나 버렸다. …>

 

6·25가 터지고 문인들은 명동을 떠나 부산 광복동과 남포동에 모여들었다. ‘금강다방, 밀다원이 서울의 카사블랑카, 무궁원, 명동장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모두들 전쟁에 내몰린 구면들이었다’고 조병화는 회고했다.

 

서울이 수복되고 문인들은 다시 명동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명동은 옛날의 그리운 명동이 아니었다.

 

<… 명동은 지금 변했다. 낭만 대신에 돈, 돈 대신에 자본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어질고 착하던 우리들 명동의 왕자들, 김인수 박인환 임긍재 김리석 김수영 조지훈 박기준 김내성 박계주 윤용하 장철수 김진수 마해송 변영로 제씨들, 그리고 노천명 시인도 각자의 성좌를 찾아 이미 하늘로 떠나 버리고 남은 벗들은 세찬 시대적 바람에 몰려 종로로, 무교동으로, 세종로로, 청진동으로, 인사동으로 혹은 자기 안방으로 뿔뿔이 ‘폴 베르레느’의 가을낙엽처럼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한 세대가 간 거다. 예술은 매스컴으로 되어 버리고, 우정은 사무로 되어 버리고, 사랑은 섹스로 변해 버리고, 인간은 돈과 권력으로 되어 버린 게 아닌가. 아, 좋은 술 많던 시절의 명동이여. …>

 

조연현의 6·25

 

 

평론가 조연현과 그가 쓴 <나와 문예시대>.

 

 

소설가 김송이 만든 순문예지 《백민》이 휴간되자, 평론가 조연현(1920~1981)은 1949년 8월 《문예》를 창간했다. 그러나 6·25를 겪고 휴전이 성립된 1954년 3월호로 막을 내렸다. 간행 기간 5년에 통권 21호밖에 내지 못한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문예》는 해방 이후 최초의 분격적인 순문예지로 조연현과 김동리·모윤숙의 뜻이 모아져 만들어졌다.

 

조연현은 《대한일보》에 <문예시대>라는 회고록을 실으며 피란시절을 떠올렸다.

 

6·25 직후, 그러니까 한강 인도교가 끊어진 6월 28일 새벽이었다. 라디오에는 문총 비상 국민선전대에서 파견한 모윤숙, 김윤성의 격시(檄詩)가 방송되고 있었다. 격시는 녹음방송이었으나 생방송을 하는 듯했다고 한다.

 

<… 총성은 점점 격심해지고 어두운 하늘에 퍼지는 포화는 더욱 하늘을 덮어 가고 있었다.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가족을 거느리고 서빙고 쪽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한강을 건널 생각이었다. 60이 가까운 어머니와 3~4세밖에 안 되는 아이, 아내-아버지께선 집을 지키고 계셨다.-이것이 그때의 내 가족 전부였지만 한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저 암담할 뿐이었다. …>

 

왕십리에서 서빙고 쪽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한강에 도착했다. 수많은 피란민이 두 척의 나룻배에 매달려 아귀다툼을 하고 있었다. 조연현은 “피란민 중에는 밤새도록 ‘아버지시여, 아버지시여!’ 하고 기도를 하는 여신도도 있었고, 그중 어느 사람이 들고 나온 벽시계가 댕댕하고 한 시간마다 쳤다”고 기억했다.

 

피란민들은 비를 맞으며 고스란히 밤을 새웠다. 그는 당시의 절망스런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 새벽에 후퇴해 온 군인들을 통해 서울이 괴뢰군의 수중에 들어간 것을 알았다. 원망스런 강물은 눈앞에 흐르고 있으나 그것은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다. 밝아 오는 모래사장에서 나는 신분증과 그리고 양복 속에 적혀 있는 이름도 찢어 버렸다. 이제 나는 성(姓)도 이름도 없는 태양을 등진 한 인간으로서 살아야 한다. (중략) 이 모든 사람들은 지금부터 어떻게 되는 것일까. ‘붉은 군대 만세’의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리는 그 전율의 거리를 향해 그 속에서 숨을 자리를 찾기 위해 이미 산송장처럼 되어 버린 나의 발길이 움직이고 있었다. …>

 

조연현은 결국 피란을 가지 못하고 90일 동안 서울에서 숨어 지내다 9·28 수복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가 1953년 서울로 돌아와 이듬해 34세의 나이로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1955년 월간 《현대문학》을 창간한다.⊙

 

 

/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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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3.09.06 05:42

    첫댓글 아마도 이글을 읽은 분은 몇 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주옥 같은 이야기를 남겼어도 그들의 삶은 시대가 아팠기에 같이 아팠습니다. 읽을 수 있는 분들만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13.09.06 15:23

    가슴 아픈 전쟁은.. 문단의 지성들도 여지없이 할퀴고 지나갔군요~
    문인의 눈으로 본 당시의 자료..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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