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어릴적 이맘때면 묘사가 한창이다.
5대조 이상은 묘사로 한끄번에 모시는 묘사는 모시고 난후 떡을 나누어 주었다.
배고프든 시절 떡을 먹을수 있는 좋은 기회 였다.
동네 아이들은 어느날 누구집 묘사라는 정보는 떡을 얻어 먹기 위하여 모두 꾀뚫고 알고있었다.
제일 먼저는 지까지실 묘사를 모시는 새각단 양씨 였다.
처음 얻어 먹는 떡이라 모두 관심이 많아 온동네 아이들이 다모인다.
그댁에서는 애들이 너무 많이 몰려 오니까 떡 덩이가 작을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집안에 다들어오도록 몰아넣고 문간에 서서 떡한 덩어리씩 쥐어 주면서 밖으로 내보낸다.
기대에 못미친 떡덩이를 던 아이들은 철교가 저만치보이는 곳에 이르면 한목소리로 "ㅇㅇ 꿀돼지" 하고 고함치면서 철교 윗쪽 동네로 도망친다. 요즘 이야기로는 일종의 예쁜 시위다. 생각해보면 온동네 아이들이 다 모였는데 어지간히 준비해도 떡덩어리 클수 는 없었을것이다. 나도 어울려 "꿀뙈지" 하고 고함 첬던 것이 후회 스럽다.
두번째 서당 만댕이 납돌 권씨 묘사다.
여기에도 온동네 아이들이 다 모인다. 묘사지내는 동안에도 우리들은 논두렁에 불을 피워놓고 쪼이며 기다렸다.
묘사를 상당히 잘차리고 지내는 듯 하지만 역시 떡덩이는 기대 못미쳤다 원채 인원이 많았기 때문이다.
묘사때 마다 나보다 한해 선배인 권석현선배가 나와서 고함을 한번 씩 치곤했다. 비틀거리며 "너희들 바로서"
줄을 세워 놓고 부침 하나씩과 생선 한토막 그리고 떡덩이 하나씩을 받아 왔는데
가끔 타먹고 또 타먹는 발빠른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석현 선배가 고함을 치곤했다.
이집에도 떡덩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산소밑 논두렁에 내려오면 "권꿀뙈지"하고 고함 질렀다.
제데로 된 묘사떡은 최문네 재실 묘사와 손 가 재실 묘사였다.
떡덩이가 대에 따라 달랐지만 혼자서 다먹을수 없을 정도로 제법 컸다.
떡도 한가지가 아니고 절편과 백설기 등 몇가지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래 추운 날씨에 목도리를 하고 덜덜 떨면서 코를 훌적거리며 기다리던 그날이 떡먹는 즐거운 날이었다.
평소에 나는 두동생이 골치아픈 존재 였다.
어딜 가던지 업고 다녔다.
하나 손잡고 하나 업고 다니는 구찮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동무들하고 노는데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그좋아하던 가이생도 못하고 땅 뺏기도 구슬치기도 모두 힘들었다.
그런데 묘사날만은 이녀석들이 한몫했다.
떡을 항상 세 덩어리씩 얻어 왔으니까 그날만은 보배다.
그 녀석들은 어려서 떡도 잘 모를때 나는 세몫을 챙겼다.
아예 보자기를 하나 들고 다녔다. 모두다 받아들면 한보따리 였다.
그동안 그녀석들 돌보느라 힘들었던 기억싹 사라지고 그날만은 떡 부지였다.
이제 떡 얻으르다니는 아이들도 없겠지.
주어도 않먹는 아이들로 발전 해 버렸다.
하나 업고 하나 손잡고 떡 한덩어리 라도 더 얻어려 이집저집 기웃거리던 그날 그래도 동생들 덕분에 떡 배터지게 먹었는데
행복 했는데 그날이 그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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