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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7. 묵상글 (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 정신 무장, 성령 무장.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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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7.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정신 무장, 성령 무장
지난 바자회는 하느님 은총과
여러분의 기도와 후원과 봉사 덕분에 성황리에 아주 잘 끝났습니다.
날씨는 너무 화창하고 적당히 따듯했으며
많은 분이 바자회를 찾아와 주셨고,
봉사자들은 모두 기쁘게 봉사해주셨습니다.
옥에 티가 있었다면 민원 때문에 구청 직원이 와서 그만두라고 한 것인데
그런데도 큰 문제로 만들지 않고 마지막 날까지 다하고 끝을 잘 맺었습니다.
일은 이렇게 잘 마무리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다음 날 미사 때 생겼습니다.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제 내부의 영적인 문제였지요.
하필 미사 중에 그 일이 떠오르며
그 구청 직원의 괘씸함이 눌러도, 눌러도 계속 생각나는 거였습니다.
그 어린 것이 화를 벌컥 그리고 먼저 낸 것과
구민에게 봉사해야 할 공무원이 마치 군림하듯이 행세한 것이 괘씸하여
한 번 찾아가 따지고 잘못했다는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런 제가 너무 한심하고 그런 자신을 보는 것이 너무 슬펐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미사를 드릴 때 하느님께 마음을 쏟으라고 했는데
제 마음이 자꾸 그 애송이한테 가 있었고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해야 할 제 마음을
부정적 감정이 차지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스럽습니까?
이런 저를 바오로 사도는 오늘 강하게 나무라는 듯합니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아니어도
저는 자주 그런 생각을 하고 지향을 둬왔습니다.
이 나이를 먹어서도 시시하게 사소한 인간적인 감정에 지배당하지 말자고.
하느님께 가야 할 나이에 인간 문제에 너무 많은 감정과 에너지를 뺏기지 말자고.
그런데 이렇게 지향을 두고 애를 쓰면 쓸수록 제 옆에
사탄이 늘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이 나이 들면서 점점 듭니다.
특히 형제들이나 신자들과 미사와 기도를 함께 드릴 때보다
혼자 드릴 때 하찮은 생각이나 감정이 많이 듭니다.
흔히 말하듯 제가 정신 무장이 되어 있다면
이런 것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텐데
저는 아직 정신 무장이 덜 되어있다는 표시겠지요.
이런 저와 우리에게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 무장하라고 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런데 하느님의 무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바오로 사도는 오늘 여러 말로 하고 있지만
제가 그것을 한마디 말로 줄이면 바로 성령 무장입니다.
정신 무장이라는 일반적 용어를 신앙적 용어로 바꾸면 성령 무장일 것이고,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 대적하실 때 성령의 인도를 받아 나가셨듯
악령과 사울 때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으로 무장하고 싸워야 합니다.
성령 충만,
성령 무장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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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7.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3)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음에 직면하신 장면과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신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합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루카 13,31)
바리사이들의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예수님께 호의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여행을 방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어떠한 인간적 장애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계획을 관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루카 13,32)
(최초의 불교경전 숫파니파타에 나오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라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소티세나 왕자와 왕자비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수행을 확실히 하십니다. 곧 당신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진하여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가야 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다는 것을,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맞이하신다.’는 말씀은 그분의 뜻에 따라 당신의 삶을 완성하시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자진하여 당신의 길을 가심을 밝히십니다. 곧 담대하고 의연하고 결연한 의지로 당당하게 당신의 길을 가실 것을 밝히십니다. 그것은 헤로데가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모두 살해하면서도 이루지 못했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어도 이루지 못했던, 그 죽음을 이제는 당신께서 스스로 이루시러 가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제시하고 있는 길은 먼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었던 것입니다. 곧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평화의 복음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잡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칼을 쥐고 담대하게 가는 길입니다.’(에페 6,13-17 참조).
이처럼, 예수님께서 사명수행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었듯이,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고’(에페 6,13)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우리가 가야할 길을 계속 가야겠습니다.”(루카 13,3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3)
주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가야할 길을 계속 가게 하소서.
자신이 죽어 타인을 살리는 길을!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평화의 복음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잡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칼을 쥐고,
담대하게 가야할 길을 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순종의 길을 가게 하시고,
당신이 하고자 하신 바를 이루소서.
당신 안에서, 제 삶이 완성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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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7.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마리 여우
여우는 밤에만 은밀하게 활동하고 낮이 되어 위험할 때면 굴속에 숨는다고 합니다. 예민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이기에 겉으로는 온순한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간교하고 음흉한 것이 특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왜‘여우’라고 칭했을까요? 헤로데에게는 예수님의 전도활동이 골칫거리였습니다(루카 9,7이하).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선동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영토 밖으로 내쫓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그 표현을 하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어떠한 찬성이나 반대의견을 전혀 취하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야말로 간교한 교활함과 비열함을 모두 갖춘 한 마리 여우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끔 ‘너는 하는 짓이 여우같다’는 소리를 하는데 정말 좋은 말이 아닙니다. 랍비문학에서 여우는 간교함의 상징입니다.
어째든, 예수님께서는 이 여우와 맞서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며 당당하게 당신의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시며(루카13,33)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12,50).하셨지만 마침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구원자로서 활동하셨지만, 미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처형을 당할 정도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시련과 고통 속에서 두려움과 포기에 직면하게 될 때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나를 연장으로 삼아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가야 할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합니다. 가야 할 길이 험난한 가시밭길일지라도 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사랑과 예언자들의 눈물로 세워진 도시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어미’를 배척하는 불효를 저지른 것입니다.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13,34).하는 탄식에 등 돌린 자식에 대한 아픔이 배여있습니다.
그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어미의 사랑은 끝내 그를 품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약속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오리라(13,36). 하시며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시금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한지요?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어미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내가 겪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자초했든 다른 사람에 의해왔든 주님께서는 그 안에 함께하십니다. 완고한 마음 안에도 여전히 계시고 그 마음이 풀어지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이 어디에 계시냐? 고 항변하는 그 안에도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영광 안에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분명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그럼에도 그분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것은 내 눈이 가려진 탓이요, 내 마음이 여우인 까닭은 아닌지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며 나를 품고 계신 주님을 찬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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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7.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 홍보를 위해 출장을 다니면서 준비물을 챙기게 됩니다. 신분증, 핸드폰, 지갑, 옷, 상비약, 노트북, 책, 제의, 충전기, 구독신청서, 신문, 필기구를 준비합니다. 신분증은 비행기 탑승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핸드폰은 어려울 때 도움이 되는 친구와 같습니다. 정보를 검색하고, 표를 예약하고, 송금도 하고,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지갑은 필요한 것을 얻는데 도움이 됩니다. 옷과 상비약은 약방의 감초와 같습니다. 노트북은 강론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책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제의는 미사 때 필요합니다. 특히 저는 체구가 작은 편이라서 저의 제의가 더 필요합니다. 구독신청서와 신문은 제가 출장을 가는 이유이기에 꼭 챙겨야 합니다. 출장을 다니면서 재미있는 경험과 뜻하지 않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연결고리가 있어서 아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가끔 비행기가 연착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 경험이지만 종종 있습니다.
한번은 아침 7시 40분 비행기가 오후 6시 40분으로 연착된 적이 있습니다. 혹시 빠른 비행기가 있을지 몰라서 예정대로 공항으로 갔습니다. 다행히 오전 11시 40분 비행기가 있어서 4시간만 공항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항공사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쿠폰을 문자로 보내 주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맥주와 같은 주류는 안 되고 음식만 주문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깜빡하고 맥주를 시켰는데,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공항에서 주어진 4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갑니다. 2시간은 산보하면서 보낼 수 있습니다. 1시간은 강론을 준비하면서 보낼 수 있습니다. 1시간은 책을 읽고, 쿠폰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비행기가 연착되어서 집에도 늦게 도착하고, 일정이 차질되는 것 때문에 짜증이 날 수 있지만, 어차피 연착되었으니 시간을 즐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책도 읽고, 산보도 하고, 강론도 준비하니 ‘1석 3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돌아갈 비행기를 구하였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박해의 시대를 견딜 수 있는 준비물을 이야기합니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준비물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2000년 전의 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준비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는 준비물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진리, 의로움, 평화의 복음, 믿음, 구원의 투구, 성령의 칼을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이런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준비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권력 앞에 당당하게 맞섰습니다. 두려워하거나, 피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십자가를 남에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외로움도, 고통도, 죽음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우리들 또한 주님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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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7.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남들은 군대에 가면 고생해서 몸무게가 쫙 빠진다고 하는데, 저의 경우 신병교육대를 마치고서 10킬로 이상 살이 쪘습니다. 그래서 50킬로대의 몸무게가 거의 70킬로에 가깝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게 군대 체질이 아니냐고 묻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밥 먹고 뒤돌아서면 바로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무조건 빨리, 또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도 있더군요. 똑같이 먹고 똑같이 생활하는데도 전혀 살이 찌지 않는 사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먹지 않아도 될까요? 먹어도 안 먹어도 체중의 변화가 없으니 말입니다.
어차피 화장실 가서 다 뺄 것이라면서 밥을 먹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어차피 옷이 더러워질 것이라며 빨래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차피 지저분해질 방이라면서 청소 안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어차피 화장실을 가도, 어차피 더러워져도, 또 지저분해지더라도 해야 할 것은 해야 합니다. 특히 이 해야 할 것을 규칙적으로 할 때, 화장실 가는 것도 또 빨래나 청소하는 것 역시 쉬워집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만 알아듣고 고개를 돌리면 잊어버린다는 분이 계십니다. 이렇게 잘 잊어버리는데 성경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하십니다. 매일 화장실 간다고 밥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주님 말씀이 전혀 이해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쓸모없다며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더 규칙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읽고 새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으려고 합니다.”(루카 13,31)라고 말합니다. 바리사이는 늘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후 늘 불안에 싸여 있었습니다(루카 9,7-9). 그래서 이제 자기 영지 안에 어떤 소요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을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이 다른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바리사이를 부추긴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직 죽음의 때가 오지 않았고, 아직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그 모든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이 하느님 뜻이라면 세상의 위협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철저히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반대되는 모든 세력에 동참하고 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만을 바라보며 힘차게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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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바라거나 믿는 바를 말할 때마다, 그것을 가장 먼저 듣는 사람은 당신이다. 그것은 당신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에 대해 당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향한 메시지다. 스스로에 한계를 두지 마라(오프라 윈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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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7.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
-영적 전쟁-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그분은 내 손가락에 싸움을, 내 손에 전쟁을 가르치셨네.
그분은 나의 힘, 나의 산성, 나의 성채,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모든 악의 세력들을 내 밑에 굴복시키셨네.”(시편144,1-2)
어제의 신선했던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10시30분 피정팀 14명의 미사 약속이 있었는데, 10시까지도 조용하기에 혹시 피정을 취소했나 생각했는데 임박해 가보니 13명 자매들과 1명의 형제가 미사 준비를 끝내고 앉아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예쁘고 건강한 피정자들을 보니 반갑고 힘이 났습니다. 순간 피정자들이 “하느님의 선물”이란 순간적 깨달음이 새로웠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임과 동시에 하느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인 우리들입니다. 수도생활 처음부터 참 많이 강론 주제로 등장했던 “영적전쟁-주님의 전사”였습니다. 수도자는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제대가 없는 죽어야 끝나는 평생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정말 하루하루가 끊임없는 영적훈련에다 영적전쟁중의 삶 같습니다. 규칙적 일과에 따라 아침 4시30에 기상과 동시에 시작되는 영적전투의 삶은 8:00시 끝기도로 끝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가장 해방감을 느끼는 자유로운 시간은 하루의 영적 전투가 끝났을 때의 끝기도 후 잠자리에 들 때입니다.
인류 역사와 시작된 전쟁입니다. 예나 이제나 생존경쟁 치열한 흡사 전쟁터 같은 세상입니다. 작금의 사회 현실이나 여야의 대립을 보면 그대로 전쟁 상황 같은 느낌입니다. 평화를 갈망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전쟁은 늘 있어 왔습니다. 공격성, 잔인성, 폭력성이 내재한 인간 같습니다. 바로 이런 부정적 성향과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대체재가 스포츠 운동 경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 전쟁의 참화는 너무 큽니다. 좋은 전쟁보다 나쁜 평화가 백배 낫습니다. 이런 실제 전쟁을 영적전쟁으로 변환시키는 것이 지혜입니다. 인간을 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 나를, 눈에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을 영적 전투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믿는 이들은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 기도의 전사들입니다. 참으로 평화를 위해 싸우는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도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하고 영적 전투에 임하라는 내용으로 가득 합니다. 실감나는 묘사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 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이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1.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2.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3.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4.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5.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6.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7.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8.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9.깨어 있으십시오.
말 그대로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 무장한 모습입니다. 진리, 의로움, 평화, 믿음, 구원, 성령, 말씀, 기도, 인내, 깨어 있음 등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무기요 우리 주님의 전사들이 무장해야 할 영적 무기들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할 때 백전백승에 영육의 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 시간은 영적훈련시간이자 이런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하는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하고 하루하루의 영적전쟁을 치러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에페소서를 쓴 바오로 사도야 말론 불퇴전의 영적전투의 베테랑, 주님의 전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지막 말씀이 심금을 울립니다.
“복음의 신비를 담대히 알릴 수 있도록 나를 위해서도 간구해 주십시오. 이 복음을 전하는 사절인 내가 비록 사슬에 매여 있어도, 말을 해야 할 때에 이 복음에 힘입어 담대해 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대부분 메시지 끝에는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당부를 꼭 첨가합니다. 옥중에 수인으로 있어도 치열한 영적전투중인, 주님의 전사 바오로 사도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영적 결전을 앞둔 상황은 얼마나 비장해 보이는 지요. 자기를 죽이려는 헤로데를 여우로 격하시키며 전의를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입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명 수행의 결의를 새로이 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도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참 아름답고 힘을 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이어 예루살렘을 심판을 예고하시며 안타까워하는 예수님 모습이 흡사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수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바 우리들입니다. 그대로 우리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믿는 우리들의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영적전쟁이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를 영적 전의를 새롭게 하시고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 무장 시켜 주시어, 하루하루 날마다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구원에 우리가 환호하며, 하느님 이름으로 깃발을 높이리이다.”(시편20,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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