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mandy 상륙작전은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4년 6월 6일, 미국과 영국군이 주력이 되고 기타 캐나다, 자유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폴란드, 노르웨이 등 8개국의 연합군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령 노르망디 해안에 펼친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으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의 판세를 뒤엎고 연합군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결정적인 작전이다. 미ㆍ영연합군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이 북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서 감행한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으로, 정식 작전명은 ‘오버 로드(Operation Overlord)’이다. 이 작전은 2차세계대전 초기 서부전선에서 패하여 유럽 대륙으로부터 퇴각했던 연합군이 독일 본토로 진공하기 위한 발판을 유럽 대륙에 마련하고자 감행한 것이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에 동원된한 병력만 무려 15만 6천 명이었다. 그들의 적인 노르망디 해안의 독일 방어군은 약 1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1941년 독일-소련 개전(開戰) 이래 독일의 주력부대를 맞아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던 소련은 북프랑스에 제2전선을 구축할 것을 영국ㆍ미국 양측에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영국 수상 처칠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신중론 때문에 실현이 지연되었다. 1943년 11월 말 미국의 루즈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은 테헤란 회담에서 1944년 5월 1일까지 북프랑스에서 상륙작전을 실행할 것을 확인하였다. 이후 5월이 아닌 6월 5일로 작전일이 정해졌으나 악천후로 하루가 연기되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해 병력을 모으고, 독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사령부를 편성하였다. 상륙작전의 최고사령관으로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상군 사령관으로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임명되었다. 연합군은 초기 네덜란드 해안, 브리타니 해안, 파드칼레 해안, 노르망디 해안의 4곳을 상륙지점으로 고려했으나 그 중 비교적 적군의 방어가 허술하였던 노르망디 해안으로 낙점하였다. 마침내 1944년 6월 6일 새벽, 미ㆍ영 연합군은 6500여 척의 선박, 1만 2000여 대의 공군 비행기를 이끌고 노르망디 해안을 기습하여 첫 날에만 17만 명의 병력을 노르망디에 상륙시켰다. 프랑스 지역을 수비하고 있던 룬트슈테트가 기습을 받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연합군은 대규모의 군사와 보급품을 상륙시켰다. 무능한 모습을 보인 지휘관들을 교체하고 히틀러 자신이 군대를 지휘했을 때는 이미 전세가 연합군으로 기운 상태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을 발판으로 연합군은 1944년 8월 25일 파리를 탈환하게 된다. 결국 전술적 기습효과를 십분 발휘하여 8월 29일까지 계속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유럽 대륙의 해방을 가져다준 기념비적인 역사로 남았다.
영·미 연합군 병사들은 노르망디에 상륙한 1944년 6월 6일을 흔히 '가장 길었던 하루(The Longest Day)'라고 표현했다. 2차대전 중 가장 중차대한 군사작전에서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느라고 엄청난 고생을 했고, 동시에 결과를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태에서 지내야 했던 그날이 그렇게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연합군은 이 상륙작전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준비했다. 상륙부대·장비·보급품을 준비하고 한편으로는 적 저항력을 공중폭격으로 충분히 분쇄해야 했다. 연합군 공군은 장기간 동안 철도와 교량 등을 집중 폭격해 독일군 보급체계를 와해시켜 다른 지역에서부터 신속한 증원이 불가능하도록 했다. 실제로 연합군이 상륙했을 때 독일은 증원군 선발대를 자전거에 태워 보낼 정도로 폭격 피해가 컸었다.
당시 정세를 살펴보면 1944년에 들어서 연합군은 상륙정과 보급품을 충분히 갖추게 되었다. 1월에는 사령부를 편성하고 최고사령관에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을, 그리고 지상군 사령관에는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을 임명했다. 직책과 작전범위를 놓고 미국 장성과 영국 장성들 간에는 다소 신경전이 있기도 했으나, 위대한 조정자였던 아이젠하워는 미군과 영국군 간에 원만한 타협을 이루어냄으로써 연합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독일군이 해안 일대를 요새화하고 있었으므로 해안을 침공하는 데는 적의 허점을 이용하고 기만하기 위한 고도의 책략이 필요했다. 상륙해안은 영국에서부터 전투기 사정거리 내에 있는 곳으로 대체로 위의 네 군데가 고려되었다. 그 가운데 네덜란드 해안은 영국 항구에서 너무 떨어져 있고 브리타니 해안은 독일로부터 너무 떨어져 있었다. 해협에서 가장 가까운 파드칼레 해안은 독일군의 최대 방어가 예상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연합군 사령부는 비록 정박시설이 없는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비교적 방비가 허술한 노르망디 해안을 상륙지점으로 선정했다. 정박 문제에 대해서는 영국에서부터 임시로 인공부두 정박시설을 만들어 해협을 횡단해 끌어오는 기발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기습효과를 최대로 얻어내기 위해 파드칼레 해안에서 주 상륙작전을 실시할 태세를 보이는 각종 기만책을 사용하기로 했다. 최초 상륙을 개시할 부대로는 5개 보병사단과 3개 공수사단을 선정했다. 이 병력 규모는 1940년 한때 독일이 영국 침공계획을 수립하면서 고려했던 것과 비슷했다. 보병사단은 해안을 장악해 보급시설 상륙을 지원하고 공수부대의 임무는 침공지역의 양측방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독일 집단군사령관 룬트슈테트는 60개 사단을 거느리고 프랑스 지역을 수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10개 사단은 기갑사단이었는데, 이들은 히틀러가 직접 통제했다. 룬트슈테트 휘하의 롬멜은 해안방어를 담당했는데, 두 사람은 방어개념에서 견해차가 컸다. 룬트슈테트는 적 계획을 모르기 때문에 내륙에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가 상륙장소가 알려질 때 신속히 투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롬멜은 제공권을 갖지 않는 이상 내륙에서부터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해안선에 전진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대체로 롬멜 의견에 동조했으나, 기갑부대는 자신이 직접 관장하고 내륙 후방에 배치했다.
1944년 6월 6일 새벽, 연합군은 사상 최대 규모의 육해공군 합동작전을 개시했다. 6,500척의 선박과 12,000대의 항공기를 가동시켜 첫날 17만 명의 병력을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시켰다. 공수부대는 기상 악화로 말미암아 광범위하게 흩어졌지만 오히려 그것이 적을 혼란에 빠지게 함으로써 전화위복이 되었다. 일부해안에서 독일군이 완강히 저항해보았으나 전체적으로 역부족이었다. 연합군은 상륙하자마자 곧 교두보를 확보했다. 독일군은 제대로 공조체제를 이루지 못했으며 룬트슈테트는 적이 진짜 상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만작전을 펴는 것인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일주일 후 연합군은 33만 명의 병력과 5만 대의 차량, 10만 톤의 물자를 상륙시켰다. 독일군은 공군지원이 없는데다가 지휘체계 혼란으로 말미암아 매우 힘겨운 전투를 치렀다. 그러던 중 7월에는 독일군 내부에서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까지 일어남으로써 위기가 가중되었다. 히틀러는 룬트슈테트와 롬멜을 모두 교체하고 그 자신이 직접 기갑부대에 대해 돌격명령을 내리고 전 보병부대에게는 사수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으며,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연합군은 8월 25일 파리를 해방시키고 승리의 여세를 몰아 독일 내로 진격해 들어갔다. 독일군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판사판으로 나왔다. "전쟁이 끝나 지옥에 가느니 차라리 전쟁을 최대로 즐기자"는 유행어가 퍼지는 가운데 독일군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1944년 12월 흔히 '발지 전투'라고 알려진 아르덴 고원에서 독일군은 최후의 반격을 실시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독일군은 도처에서 와해되었으며, 1945년 2월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은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만나 독일 분할을 결정했다. 4월 30일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자살했다. 무솔리니가 군중에 의해 처형된 이틀 뒤였다. 5월 7일 되니츠 제독은 약 200만 명의 잔여병력과 함께 무조건 항복했다. 이로써 유럽에서는 2차대전이 끝이 났다.
D-Day : 작전명 오버로드. 작전명 넵튠
연합군측은 당시 작전명 오버로드(Overlord)라는 북부 유럽 침공 작전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그 개시 단계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작전명은 넵튠(Neptune)작전이었다. 오버로드는 대군주(大君主)를 뜻하고 넵튠은 로마 신화에 나오는 해신(海神)의 이름이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영국군의 프레데릭 모건 중장이 이끄는 기획팀이 계획을 세웠는데 사상 최대의 작전이었으며 육해공군을 모두 망라한 것이었다. 넵튠 작전은 1944년 6월 6일 개시되어서 노르망디 교두보가 완전하게 확보된 1944년 6월 30일 종료되었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이었고 지상군 사령관은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였었다. 독일측의 방어사령관은 프랑스 주둔 독일 집단군의 총 사령관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드 장군이 아이젠아워와 같은 격의 최고 지휘관이었으며 대서양 해안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장군은 북 아프리카에서 용맹을 떨친 에르빈 롬멜 장군이었다. 둘 다 원수(元帥)였지만 롬멜이 훨씬 후배였다.
버나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 1887 ~ 1976)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 ~ 1969) |
상륙작전 개시일인 6월 6일은 D-day라는 음어로서 이미 연합군 내부에서 사용했었는데 이 암호는 나중에 아주 유명한 명칭이 되었다. 첨언한다면 D-day의 D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Day의 약자라고 한다. 세계 각 군마다 이 D-day에 해당하는 고유의 단어가 있는데 우리에게 역시 낯익은 Zero-hour와 비슷한 말이다. 상륙 작전은 두 단계로 시행되었다. 1944년 6월 6일이 되자 자정 경에 공수부대의 야간 투입 작전이 있었고 날이 밝자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먼저 노르망디 침공 작전의 시작이 되는 공수 작전을 소개해본다. 24,000명이나 되는 공수 부대원의 공수작전이 상륙 작전 전야(前夜)인 6월 5일과 6일 사이 자정 조금 후에 실시되었다. 공수 작전에 참가한 공수 부대는 미국, 영국, 그리고 캐나다와 자유 프랑스 군의 부대들이었다. 해안에 보병과 기갑부대로 구성 된 상륙부대가 해안에 상륙하기 시작한 것은 그 날 아침 06:30분이다. 해상의 일기가 아주 황천(荒天)상황이어서 기습은 성공을 거두었다. 상륙작전이 아주 힘든 나쁜 날씨에도 불구하고 총사령관 아이젠하워가 내린 작전 감행의 결단이 결실을 거둔 것이었다.
기습은 상륙작전이 불가능해 보이는 날씨의 덕도 보았지만 연합군측이 독일군에게 전개했었던 기만 작전의 성공에 힘입은 바 컸다. 그 기만 작전은 보디가드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는데 독일군의 경계심을 상륙 예상 지점인 노르망디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기만 작전의 핵심은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로 하여금 연합군의 상륙이 노르망디가 아니라 영불해협의 연결항구인 칼레(Calais) 북쪽 지역에 행해질 것이라고 오판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 1군이 패턴 장군의 지휘아래 도버 해협을 건너 칼레에 곧 상륙 작전을 할 듯이 양동 작전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노르망디에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칼레에 상륙할 듯한 위장 작전은 계속되어서 독일군의 방어 병력 집중을 막았다. 연합군은 기만작전을 더욱 신빙성 있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머’나 ‘텍사블’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위장 작전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연합군의 정보 활동과 반 정보 활동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했었다. 침공전 연합군이 독일을 상대로 펼친 기만 작전(작전명 FORTITUDE)은 독일로 하여금 연합군의 상륙 작전이 Pas de Calais 칼레로 향할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게 해서 그들의 방어 주력을 7월까지 노르망디에서 돌리게 하였다. 이 기만작전은 연합군의 중폭격기들이 칼레 앞바다인 도버 해협 상공을 비행하며 방대한 양의 얇은 금속 박편을 살포하여 독일군 레이다를 교란하는 것이었다. 칼레 해안에 곧 상륙 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로 오산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위장 작전에 사용된 가짜 전차. |
위장작전에 사용된 가짜 비행기 |
매월 10일간만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가능하였다. 그 중에 만월(滿月)이 되는 날의 밝음과 조류가 작전 실시에 가장 이상적이었다. 밝기는 공중 침투하는 항공기 조종사나 글라이더 조종사들이 지형지물의 식별에 필수였었고 조류는 상륙정들이 해안에 설치한 독일군의 상륙 저지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서 가능한 최대로 높은 해수면이 필요했었기 때문이었다. 6월 5일이 바로 그런 만월이 뜨는 날이었다.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잠정적으로 6월 5/6사이 야간을 작전 개시일로 결정했었다. 그러나 5월에는 아주 쾌청했던 일기가 6월에 들어와서 나빠지기 시작했다.
연합군 총사령부. 왼쪽부터 브래들리, 램지, 테더(Arthur Tedder), 아이젠하워,
몽고메리, 레이 말로리, 스미스
6월 4일 악천후는 작전 실시 불가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강풍과 파도는 상륙 모선이 상륙정을 발진시킬 수가 없게 했고 낮은 시계(視界)는 항공기의 활동을 불가능하게 했었다. 이미 병력을 싣고 영국의 항구를 출발하였던 함선들은 영국 남해안으로 다시 돌아와 만이나 강구에서 대피하고 있어야 했다. 상식으로 본다면 6월 5일 침공계획은 전면 취소하여야 했고 함선들은 항구로 돌아오고 병사들은 원래 머무르던 기지 생활관으로 되돌아 가야 했다. 사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미 상륙 작전에 사용될 어마어마한 무기와 군수품들이 모두 바다에 떠있는 상황이었다. 다음 만월이 뜰 때까지는 무려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대기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6월 5일 연합군 총사령부에서 중대한 회합이 있었다. 이 회합에서 영국 공군 기상대장 JM 스태그 대령은 6월 6일에는 기상이 약간 좋아질 것이라는 예보를 브리핑했다. 지상군 사령관 몽고메리 원수와 아이젠하워 참모장 스미스(Walter Bedell Smith) 장군은 작전을 원 계획대로 강행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연합군 항공군 사령관 레이 말로리(Sir Trafford Leigh-Mallory) 경은 작전 강행에 회의적이었다. 연합군 해군 사령관 버트람 램지(Sir Bertram H Ramsay) 제독은 중도적인 입장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스태그 대령의 기상예보를 근거로 작전 강행을 최종 결정하였다. 작전은 강행되었지만 악천후는 결과적으로 충분한 항공 지원을 불가능하게하여, 강력하게 요새화 되어 있는 오마하와 주노(Juno)의 해안 방어력에 대한 충분한 타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에르빈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 1891 ~ 1944) |
칼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1875 ~ 1953) |
독일이 도버해협의 프랑스 쪽에 준비한 구경 40.6cm 해안 방어용 거포
상륙작전은 대량의 인원과 물자를 영불해협을 횡단하는 항해를 통해 수송되어야 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지역은 그 폭이 무려 50 마일로서 이 넓은 해안은 5개의 작전 구역으로 구분이 되었다. 각 작전 구역에는 작전 명칭이 부여되었는데 유타(Utah), 오마하(Omaha), 골드(Gold), 주노(Juno), 그리고 소드(Sword)였다. 미군과 영국군 캐나다 군이 각각 담당한 해안선의 침공 구역은 아래와 같다. 미군 1군은 73,000명의 병력으로 오마하와 유타, 두 개의 해안 목표를 공격했는데 이 병력 중 15,600명은 공수 병력이었다.
노르망디 작전 직전의 양군의 배치. 상륙작전 계획을 표시한 지도.
독일의 ‘대서양 방벽’으로 마련한 방어시설 |
노르망디 근처 독일군 방어용 벙커 |
롬멜은 상륙작전은 만조(滿潮)때 감행되리라고 판단하고 이 지역을 콘크리트 벙커와 포대와 기관총 진지, 그리고 철조망을 밀집시켰고 해변에는 상륙정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수천 개의 방어물과 수만 개의 지뢰를 매설하였다. 연합군은 방비가 엄중한 칼레를 공격하지 않기로 하고 대신 조금 더 떨어진 독일 7군과 15군의 전투 지경선이 있는 노르망디를 상륙 예정지로 선택했다. 침공이 발발하면 두 독일 군(軍) 사이에 책임 전투구역을 두고 큰 혼선이 있기를 바라는 희망 사항도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한 노르망디 상륙지점은 4개의 독일군 사단이 수비하고 있는 곳이었다. 716 독일 보병사단은 상륙 해안의 최동단(最東端)이었다. 이곳에는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상륙할 예정이었다. 716 보병사단은 신체적으로 약한 독일병사들과 다른 나라들에서 징병한 병사들, 그리고 소련군 포로들로 포함 잡다한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 전투력을 의심받고 있었다.
오마하 해안에는 독일 정예 352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사단 병사들은 대소 전쟁의 동부전선에서 실전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 정예 사단이 방어하던 오마하 해안을 공격했었던 미군 병사들의 피해율이 가장 높았었다.
해안으로 뻗어 나온 코탕탱(Contentin) 반도 내륙에는 루프트바페 소속의 91공수 사단이 주둔했다(독일 공군인 루프트바페는 보병 전투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709 보병 사단은 코탕탱 반도 동쪽과 북쪽 해변에 배치되어 있었다.
기타 노르망디 해안 인근 주변 지역에 주둔한 부대들을 여기 소개해보면, 243 보병 사단은 코탕탱 반도의 서쪽 해안을 방비했었고, 711사단은 페이 드 코(Pays de Caux)의 서쪽 지역 방어를 맡았었고, 30기동 여단은 예비로 주둔하고 있었다. 30기동 여단은 아주 독특한 부대로서 모두 자전거로 이동하는 기동 부대였다. 독일군의 기갑 예비군에 대해서는 특기할 필요가 있다. 롬멜은 상륙 저지 부대로서 최고 유효 수단인 기계화 사단들의 사용을 두고 집단군 사령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는 순수하게 관리의 편의성 때문에 휘하 서부 기갑 집단군 부대들을 레오 게이르 폰 슈베펜부르크(Geyr von Schweppenburg) 장군의 휘하에 두고 있었는데 이 집단군은 후에 제 5 기갑군으로 명칭을 변경하게 된다. 5 기갑군은 노르망디 방어를 위해서 다시 재배치 되게 되었다.
해안 방어시설을 시찰하는 독일의 롬멜 원수
아프리카에서 실전 경험을 풍부히 쌓은 롬멜은 연합군의 항공력이 훨씬 우세하며 전투가 발발하면 기갑부대의 이동에 막대한 장애가 발생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갑부대들은 이동거리가 짧은 해안으로 가능한 한 가까운 지역에 배치되기를 강하게 요청했다. 그는 침공 첫 날 해안에서 적의 상륙을 저지할 한 개 기갑사단이 적이 해안에 교두보 설치가 완료된 침공 삼일 째 되는 날 반격에 나선 3개 기갑 사단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게이르는 기갑군은 파리와 루엥의 중간 지점에 중점 위치해 있다가 적의 교두보가 확인되면 기갑군을 집중 투입해서 이를 궤멸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기갑의 운용을 두고 갈등을 빚다가 이 문제를 히틀러에게 직접 중재해주도록 하기로 하였다. 히틀러는 그의 버릇대로 양쪽 다 만족하지 못할 중재안을 내놓았다. 롬멜에게는 단지 3개 기갑 사단만이 주어질 예정이었다. 이 3개 사단으로 연합군이 상륙할 전 해안선을 커버하기는 불가능하였다. 나머지 사단들은 ‘OKW 예비대‘라는 명칭을 주고 게이르의 휘하에 두고 적의 상륙 공격이 있을 시에 반격하도록 했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사용할 수 있는 사단은 단 3개 사단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 4개 사단들은 연합군이 남부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상륙할 경우에 출동하도록 하였다.
1943년 파리에서 작전을 논의하는 독일군 수뇌부. 롬멜(좌)와 룬트슈테트(가운데)
알프레드 가우제(Alfred Gause)장군(우측)
히틀러는 예의 버릇대로 집중할 병력을 분산시키는 큰 실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나쁜 결정은 게이르 휘하의 OKW 예비대 3개 사단을 출동시킬 때는 히틀러의 직접 허가를 받도록 한 것이었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개시할 때인 6월 6일에는 OKW 예비대 전차 사단장들은 히틀러의 지시가 없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날 히틀러는 깨우지 말라는 지시를 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그의 부관들은 감히 그의 엄명을 무시하고 그를 깨울 수가 없었다.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프랑스 내 기갑부대들은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 롬멜이 구상하던 바와는 동떨어진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대규모 상륙부대가 영국해협을 가로지르고 있다.
노르망디 작전의 예비단계는 해군의 역할이 중대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연합국 해군 사령관은 영국 해군의 버트람 램지 경(Sir Bertram H Ramsay)이 임명된 사실에서 알 수가 있듯이 작전에 동원된 함선들은 영국 측이 주동이 되어서 마련한 것들이었다. 사령관 램지 경은 전쟁 초기 독일군에게 패주한 영국군과 프랑스군들을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수송 작전에 참여하였으며 연합군의 북 아프리카 상륙 작전에서 해군작전 기획책임자로 일했었고 시실리 섬 침공 때도 두 개 함대 중에 한 개 함대를 지휘하였다. 다시 말하면 해군 상륙작전 지휘의 최고 베테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영국해협을 바라보는 버트람 램지 경(Sir Bertram H Ramsay) 동상.
작전명 넵튠,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중요한 해군 목표는 노르망디 침공의 해상 루트와 상륙 예정 해변을 독일 해군(Kriegsmarine)의 방어와 반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침공 해상 루트의 보호 임무는 영국 본토 해군 함대에게 부여되었다. 독일 해군이 바다에서 침공 함대에 가해올 위협은 두 가지로 압축될 수가 있다. 하나는 노르웨이의 북방 해안과 발트해에 기지를 두고 있는 독일 함대의 주력 대형 함에 의한 해상(海上)공격이다. 그러나 독일 대형 전함들은 영국 해군과 공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었고 순양함들은 훈련 목적으로만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함대의 출동 연료도 부족했었고 출동한다 해도 영국 해군이 이들 수상함대가 통과할 빌헬름 황제 운하(Kaiser-Wilhelm-Kanal, 발트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독일의 운하) 해역에 설치한 대량의 기뢰 지대에 걸리게 되어 있었다. 설사 이런 불리한 조건을 뚫고 상륙 해안에 출동한다 해도 영국 해군의 함대는 독일 함대가 제압하기에 너무 막강했다. 그러므로 독일의 수상함대는 연합군에 대해서 별다른 위협이 될수가 없어서 작전 수립 단계에서 독일 대형함대에 대응하는 부분을 제외하였다.
연합군의 최대 위협이었던 독일군 U보트
연합군 해군에게 예견 가능한 진짜 위협은 대서양에서 위협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독일 해군의 U 보트(잠수함) 부대였었다. U 보트를 감시하기 위해서 미 해군의 호위 항공모함 세 척과 영국 공군 해안감시대 소속 정찰기들이 영국본토에서 먼 바다까지 나아가서 정찰을 했지만 별다른 U 보트의 활동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연합군 해군은 U 보트에 대한 경계 활동을 지속하면서 프랑스 브리타니와 비스케이 만으로부터 상륙지점에 접근할만한 길목에는 함대를 배치해서 봉쇄하였다. 프랑스 연안에는 기뢰지대가 여러 곳 설치되어 독일 해군 함정이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엄호 거리내에 항로로 통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독일 함선들이 할 수없이 연합함대의 구축함들이 출몰하는 먼 바다로 나와 항해를 해야 했다. 연합군 해군은 만반의 대비를 하면서 독일 해군의 동정을 살폈지만 작전개시 전까지 별다르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쯤에서 만족하지 못한 연합군 해군은 독일 해군에게 더욱 압박을 가했다. 도버 해협의 접근로는 모두 기뢰를 깔아 접근이 불가능했다. 여기에 더해서 공중 초계와 레이다가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독일 전투함이 출항할 만한 항구들은 모두 폭격해서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훼방 놓을 수도 있는 독일 함대의 출현을 경계하는 연합군 해군이 침공 전까지 격침한 독일의 군함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적 함대의 상륙작전 방해라는 가능성의 싹을 잘라버리는 목표는 완수해낼 수가 있었다. 상륙 작전 당일(D-day) 작전을 방해한 독일의 U 보트는 한 척도 없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해상 작전을 수행 중인 영국 함정들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해군이 맡은 중요한 임무는 전함에서 순양함, 구축함, 그리고 상륙정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함정의 화력을 상륙 작전 지원에 최대로 동원하는 것이었다. D-day에 지원된 해군 함정의 화력지원은 막강한 것이었다. 한 본보기를 든다면 주노 해안에서 캐나다 상륙부대에게 지원된 화력은 큰 실패로 끝났던 1942년 디에프 기습작전 때의 몇 배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영국의 구형(舊形) 전함 HMS 라미리스와 와스파트와 포함(砲艦) HMS 로버트는 오른(Orne) 동쪽의 해안 포대를, 순양함들은 베르쉬르메르(Ver-sur-Mer) 와 물리노(Moulineax)의 해안 포대를, 11척의 구축함들은 각 상륙부대에 근접하여 전면 적 요새를 직접 사격으로 파괴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정통 군함 외에 수십 척의 상륙정들을 다양한 상륙 화력 지원함으로 개조하는 작업도 행해졌다. 8척의 상륙용 함정들에 각각 두 문의 4.7인치 포들을 장치했고 다른 8척은 기관포를, 또 다른 8척은 1,100발을 일시에 발사하는 로켓 발사기를, 8척의 상륙정은 24발의 폭뢰를 발사하는 무장을 해서 독일군이 해변에 설치한 기뢰들을 파괴하는 기능을 주었다. 24척의 탱크 운반 상륙정들은 상륙 해안으로 질주하는 시간에도 적 해안 목표를 향해 발사가 가능한 자주 곡사포를 장비했었다. 해군의 함정들이 그 위력을 발휘하는 화력은 해안에 설치한 독일군의 군사 목표를 타격할 뿐만 아니라 해안선 먼 후방까지도 타격하여 군 병력의 집결을 지장을 주기도 하였다. 독일군 룬트슈테트 원수는 이 점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적[연합군]은 매우 강한 해군력을 교두보 연안에 전개하여서 이 전력을 아주 빠르게 대응하는 기동 화력 기지로 활용하였다. 이 화력 지원은 항시 대기하고 있다가 육군이 요청하면 바로 실시되었다. 주간에 실시되는 해상 포격은 정찰기에 의해서 유도되었으며 육군 전방 화력 통제 장교들이 통제 하였다. 신속하고 막강한 해군 화력은 그 유효 사거리 내에서 벌어지는 지상전투에서 연합군에게 전투의 결정적인 프리미엄을 제공하였다. 기갑 부대의 탱크조차도 주간에는 해군의 가공할 화력이 타격을 가하는 개활지에서는 기동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노르망디 상륙지휘함의 한 척인 영국 HMS 로포드. 독일 공습으로 침몰되었다.
큰 역할을 한 연합군 해군은 역시 독일 육상화력에 피해를 보기도 했다. 상륙 지휘함의 한 척이었던 HMS 로포드는 상륙작전 3일째인 1944년 6월 8일 주노 해변에서 적의 공습을 받고 침몰하였다. 상륙작전 중 유일한 수상함끼리의 해전은 D 데이 당일 오후 소드 피시 해안 연안에서 동부 기동함대를 공격한 4척의 독일 어뢰정이 발사한 18발의 어뢰 중 한 발이 노르웨이 구축함 스베너 함에게 명중해서 이를 격침 한 것이다. 독일 어뢰정들이 겨눈 것은 구식 영국 전함들이었는데 빗나가서 노르웨이 구축함을 격침하게 되었다. 독일 구축함들은 어뢰를 발사한 뒤에 연막을 치고 도주해버렸다. 그 외에 독일이 해안에 설치한 기뢰에 의해서 미(美)구축함 코리 함과 PC정, 그리고 여러 척의 상륙함이나 상륙정들이 격침되었다.
투하될 공수부대원을 격려하는 연합군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상륙작전의 최종 목표는 내륙으로 진공할 수 있는 병력과 물자의 집중이 필요한 교두보의 확보다. 다음 단계는 내륙으로의 진격이다. 이 과정에서 경계할 것은 교두보 확보를 거부하는 적의 반격이며 교두보 확보 단계에서는 이런 적의 반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적의 반격을 차단하기 위해서 중요 접근로와 교량 등을 선제 공격을 해서 확보할 필요가 있다. 노르망디에서는 특히 적의 측면 공격이 우려되는 교두보의 동쪽과 서쪽의 차단이 절실했다. 결과 노르망디 상륙개시 전에 주요 거점을 사전에 점령하기 위한 대규모의 공수 투하 작전이 실시된다. 공수 작전은 미국과 영국, 캐나다, 자유 프랑스군 등 4개국의 공수 부대들에 의해서 행하여졌다. 미군 82공정 사단과 101 공정 사단은 유타 해안의 서쪽 목표가 주어졌다. 영국군 6 공정 사단은 유타 해변의 서쪽 사단의 목표가 주어졌다. 영국군에 배속된 530 자유 프랑스 낙하산 부대는 브리타니 지역의 목표가 할당되었다.
캉(Caen) 운하의 다리. 공수작전의 목적은 이와 같은 주요 교량 등 접근로를 사전 점령하는데 것이다.
미국의 82공수 사단과 101 공수 사단은 총 13,000명이었다. 이 병력은 야간에 투하되어 서쪽에서 노르망디로 접근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야간 공수 작전이라는 생소한 전술은 숱한 문제점을 야기했으며 목표를 달성함에 미흡한 점이 많았었고 야간 공수 작전은 전쟁 중에는 다시는 시도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45%나 되는 병력이 목표 지점에 낙하하지 못하고 넓은 지역으로 흩어져서 병력집중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이 병력의 분산 투하는 연이어 날아올 C-47 수송기의 야간 비행을 유도할 레베카/유레카 시스템이라는 전자 비콘 발신 장치가 제대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에서 비롯된 이유가 가장 컸다.
미군 공수부대를 실어 나른 C-47 수송기
노르망디 공수 작전의 첫 개시는 6월 6일이 시작되는 새벽 00:48에서 01:48 사이에 101 공수사단에 의해서 감행되었다. 이어서 01:51에서 02:42사이 82 공수 사단이 투하되었다. 두 사단의 공수 작전에 무려 400기의 C-47 수송기가 동원되었다. 간격을 두고 새벽 직전에 글라이더들이 대전차포와 양 사단의 추가 지원 병력들이 투하되었다. 공수 작전은 상륙 작전이 있던 6월6일 저녁 무렵에 82사단의 포 24문이 글라이더로 공수되었다, 그 다음 날인 6월 7일에도 325 글라이더 보병 연대가 82 사단에 증파 되었고 두 번의 낙하산에 의한 보급품 투하가 있었지만 이 날의 투하는 결과가 좋지 못했다. 대규모 공수 작전의 효율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24시간이 지났지만 투하 82 공수사단 병력 중 2,000명과 101 공수 사단의 2,500명만이 지휘 가능한 상태였다. 광활한 지역에 되는대로 뿌려진 병력의 대다수는 아직도 부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C-47 수송기가 병력과 장비를 실은 글라이더를 끌고 날아와 선을 끊고 돌아가는 모습.
그러나 공수 작전의 실패는 생각지도 않은 긍정적인 결과를 부수적으로 가져 오기도 하였다. 너무 넓은 지역에 뿌려진 병력은 독일군으로 하여금 병력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작은 부대로 흩어지는 결과를 낳아 상륙작전 부대가 집중 돌파를 하게 하였다. 이것은 취약한 미군 상륙 부대의 남쪽 측면을 보호하게 하는 전과를 얻게 하였다. 분산 낙오 된 공수 부대원은 흩어질 대로 흩어져 헤매다가 다른 부대원을 만나면 서로 급조 전투 부대를 만들어 그 중 최상 계급자인 부사관이나 초급 장교들이 지휘를 하며 주력 본대를 찾아 돌아왔다. 이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82 사단은 6일 새벽 프랑스의 작은 도시(Sainte-Mere-Eglise)를 점령하였다. 이 도시는 노르망디 작전에서 최초로 해방된 프랑스 도시였다.
캉(Caen) 근처의 오른(Orne)강 다리. 독일측, 연합군 측 모두에게 전략적 요충지였다.
노르망디의 최초 공수 투하는 6일이 시작되는 자정이 막 지난 6일 00:16, 캉(Caen) 운하와 오른(Orne) 강에 걸린 다리를 점령을 목적으로 영국 6 공수 사단의 글라이더 수송 공수 부대가 착륙함으로서 개시되었다. 이 다리들은 상륙 해안에서 단지 7km 떨어진 곳에 전략적 위치에 위있었다. 독일군이 반격하기 위해서는 이 두 교량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동쪽으로 진격하는 연합군 입장에서도 반드시 건너야 하는 요충지중의 요충지였다. 영국군 6 공수 사단의 목표는 세 개였다. 이 교량들을 점령하고 연합군 상륙부대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예상되는 독일 기갑부대 반격으로부터 확보하는 것이고 부차적으로 두 다리 근처에 있는 독일군의 메르빌(Merville) 포대를 섬멸하는 것이었다. 이 포대는 영 캐나다 군이 상륙하는 소드 해안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세번째 목표는 디브(Dives) 강 다리에 걸린 다리를 폭파하여 독일군의 우회돌파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글라이더로 노르망디에 투하될 병사들의 긴장된 모습
착륙한 영국군 공수부대의 글라이더
공격에 성공한 영국 병사들이 프랑스 소녀와 기념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반면(좌),
글라이더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희생된 병사도 다수 있었다(우).
전투는 치열하였고 양쪽 다 피해가 속출했다. 그러나 영국 캐나다 공수부대는 이를 잘 버티어냈다. 정오경 영국 1 특수 임무 여단 코만도 부대의 증원을 받았다. D-Day 저녁 무렵까지 영국과 캐나다 공수 부대는 잘 고수해서 오른 강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반격은 다음 날도 계속되었다. 6월 10일, 독일 346 보병 사단은 대공세를 취해서 동쪽 변두리의 한 구석에 침투했다. 그러나 12일 영국 공수 부대원들이 브레빌(Breville) 마을의 전투에서 참호를 파고 응전하는 독일군을 강습해서 이들을 모두 패주시켰다.
작전 중 가장 피해가 심했던 오마하 해변.
‘죽음의 아가리 속으로(Into the Jaws of Death)’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미군. 연합군의 상륙작전 성공으로 대륙진공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1944년 6월 6일 새벽 상륙 작전은 개시되었다. 이날 16만 6천 여명의 병력이 바다와 하늘로부터 프랑스 땅에 상륙을 하였다. 이중 73,000명은 미군, 61,715 명은 영국군이었으며 21,400명은 캐나다군이었다. 5,000척의 각종 함선과 195,700명의 해군 및 해상 지원 병력이 지원했었다. 오마하 해안은 미군1 보병 사단과 2 보병사단이 상륙했다. 정면에는 강한 두 개 사단의 독일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합군 정보 부서는 폭이 100 킬로 미터나 되는 이 해안을 방어하는 독일군은 원래 독일 716 사단 한개 뿐으로 판단했으나 상륙작전 개시 3개월 전 이 해변은 두 구역으로 양분되어 716사단은 캉 지구(Caen Zone)으로 이동 집중 배치되고 나머지 바이외 지구(Bayeux Zone)에는 새로 편제된 352 보병 사단이 전개되었다. 한 개 사단이 방어하던 지역을 두 개 사단이 배치된 것이다. 최근에 조직된 독일군 352 보병 사단은 소련 ‘해방’ 포로들 과 동부 전선에서 참전했던 독일 고참병과 막 소집한 신병 등으로 잡다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이 신편 사단 장교 중 50%는 전투경험이 전혀 없었다.
오마하 해변의 독일군 포대, 전차포탑을 벙커에 설치한 것
오마하 해변의 독일군 벙커, 두꺼운 콘크리트로
지은 단단한 요새. Omaha Beach Bunker
여기에 더해서 오마하 해안은 요새화 공사가 아주 정교하게 되어 있는 곳이었다. 벙커와 기관총 진지, 그리고 박격포 진지들이 해안을 조밀하게 수를 놓았으며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요새들은 함포사격이나 항공 공격으로 파괴되지 않을 만큼 단단한 것들이었다. 동쪽 해변에 많이 노출된 모래톱으로 해서 상륙정들의 진행이 무척 지장을 받았다. 이 모래톱의 방해로 인해서 많은 상륙정들이 미리 예정했던 해안의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밀려 나가서 적 요새 바로 앞에 상륙하는 바람에 첫 1 파의 탱크와 보병 그리고 공병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오마하 해변에 상륙예정이었던 16 량의 전차 중 제대로 상륙한 것은 단 두 량뿐이었다. 공식적인 기록은 오마하 해안에서 첫 10분간에 벌어진 혼란을 이렇게 표시하였다.
상륙정의 상륙 램프가 내려지고 10분이 지난 뒤에 중대는 지휘 통제력을 잃고 무력해져서 작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었다. 중대의 전 장교와 부사관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부상했기 때문이다.
포연이 자욱한 가운데, 상륙 1파가 해안으로 다가가는 모습.
상륙정 안의 미군이 해안을 주시하고 있다.
해변에 설치한 상륙 장애물 중에 오직 몇 곳만 제거하여 상륙의 돌파구를 열었지만 많은 상륙정들에게는 혼란을 초래하게 하였다. 독일군은 방어하고 있던 차량 이동 가능 루트를 아예 봉쇄하여서 연합군 차량들은 해안에서 내륙으로 이동할 수가 없었다. 해안을 점령했지만 내륙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던 해안의 연합군은 해안 확보 두 시간 만에 계속 해변으로 밀려드는 상륙부대에게 차량을 적재한 상륙정은 잠시 해상 대기하고 보병만 상륙하라고 긴급 통보하였다. 나중에 원수가 된 오마르 브래드리 장군을 포함한 여러 장군들이 이 해안에 상륙을 하려고 하는 중이었다. 불리한 상황을 본 장군들은 이 해변을 포기할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였다 그러나 이런 혼란 속에서 해안에 상륙했던 보병들 소부대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고 서로 합쳐서 전투 부대들을 급조했다. 이 급조 부대들은 함포 사격과 생존한 탱크들의 화력 지원에 힘입어 적의 강력한 방어 거점을 사이를 뚫어서 적 후방으로 침투하였다.
오마하 해변에서 발생한 부상자와 전사자들. 총 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계속 증원되어 오는 보병들은 이 조그마한 돌파구를 확대해서 드디어 D-day 저녁 해안에 두 개의 작은 교두보를 만들 수가 있었다. D-day의 오마하 해안에서 상륙 총 병력 50,000명중 5,0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 사상자들 대부분은 상륙 개시 수 시간 만에 발생하였다. 반면에 해안 요새 안에서 방어하던 독일군들에게는 훨씬 가벼운 1,200명의 사상자만 발생하였다. 힘들게 확보했었던 두 개의 교두보는 다음날 추가 병력의 증원에 힘입어 더 크게 확대되었다. 결과로 미군이 해안에서 D-day 첫날 달성하려고 했던 목표는 사흘이나 지난 D+3일에야 달성할 수가 있었다.‘
오마하 해변의 D-Day 오후의 모습. 독일군은 해변에 수많은 상륙방지용 장애물을 깔아두었다.
프앙테뒤오크의 지도. 155mm 해안포가 설치되어 있다고 믿어 미군공격이 감행됐다. |
미군은 로프와 사다리를 타고 프앙테뒤오크의 절벽을 올라 공격했다. |
미군 레인저 부대가 이틀간의 전투 끝에 프앙테뒤오크 요새를 점령한 모습, 미국기와 독일군 포로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공격대는 이 가공할 포가 이미 철거되어서 조금 안쪽의 내륙으로 이동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레인저들은 포대가 비어있자 후방으로 이동하면서 탐색작업을 벌여 이 포들을 찾아내어 파괴하였다.
그렇지만 포가 있었던 요새의 자리에는 아직 독일군 보병들이 있었으며 비록 포가 없었다 해도 이 포대는 외면할 수 없는 값어치를 계속 지니고 있었다. 만약에 그 빈 포대에 독일 포병 관측 장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오마하와 유타의 미군들에게 불의 비를 쏟을 화력을 후방의 포대에서 불러올 수가 있었다. 레인저들은 이틀간이나 유혈적인 전투를 벌여 60%의 병력 손해를 보았지만 이 요새를 점령하였다 점령 뒤 레인저 부대는 본대로 철수하여 합류하였다.
유타 해안에 상륙하는 미군들. 독일군 저항이 적어 쉽게 상륙했다.
유타 해안은 노르망디 상륙지점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해있었다. 미 육군 4사단이 상륙 공격을 했다, 이 해안 방어 독일군의 저항은 가장 가벼웠다. 상륙한 23,000병력에서 단지 197명만의 인명 손실이 발생했을 따름이다. 유타 해안에 상륙한 4사단 병력들은 강한 조류 때문에 남서쪽으로 휩쓸린 상륙정들이 자신들을 원 상륙 목표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상륙시켰음을 알게 되었다. 이 지역의 독일군 방어는 아주 허술하였다. 상륙부대가 잘못된 지점에 상륙했던 것은 오마하 해안과 같았지만 독일군의 방어 상태는 정 반대였다.
4 사단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아들 루즈벨트 준장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사단이 잘못 된 곳에 상륙했음을 알고 지체 없이 선언했다. 이 말은 매스컴을 타고 유명해졌다.
"우리는 바로 이 곳에서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유타 해안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내륙으로 진격하는 미군들
4 보병 사단은 그대로 내륙으로 진공해 들어가서 이미 야간에 후방에 투하 되어있던 101공수 사단의 502와 506 공수연대와 연결될 수가 있었다. 이런 행운은 거의 우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행운의 덕택에 4사단은 쾌속으로 진격하여 101 공수 사단과 연결하였고 더 나아가 다른 어느 사단보다도 신속하게 내륙으로 깊숙이 진격해 들어갔다. 잘못된 지점에 상륙은 했지만 결과로 본다면 4사단은 거의 완벽한 임무 완수를 했다.
소드 해안의 상륙 작전은 새벽 03:00에 개시되었다. 상륙과 동시에 소드 해안의 방어시설과 포대에 공중 폭격이 가해졌었다. 해군의 함포 사격지원은 몇 시간 후인 07:30에 시작했다. 상륙 제 1 파는 07:30에 해안에 닿았다. 제 1 파 상륙 부대에는 13/18 후사르(Hussars) 기갑부대 소속의 구축전차가 다수 있었고 그 뒤를 보병 8여단이 후속하였다. 소드 해안에 상륙한 영국 보병 부대는 비교적 피해를 적게 입어 인명 손실이 크지 않았다. 상륙 직후 전진을 개시한 영국군 상륙 당일 약 8km를 진격했다. 그러나 몽고메리 원수가 상륙과 동시 꼭 점령하라고 지시한 두어 개의 목표 점령에는 실패하였다. 특히 몽고메리가 꼭 점령하라고 지목한 캉(Caen)은 아직도 강력한 독일군의 손아귀에 들어있었다. 이 도시는 그 후 연합군의 되풀이 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한 달 넘게 버티어 7월 20일까지도 점령당하지 않았다.
소드 해안에 상륙한 영국군 보병. 강한 독일군 사격에 몸을 낮추고 있다.
두 번째 2 파로 상륙한 부대는 로버트 준장이 지휘하는 제 1 특수임무 여단의 코만도 부대였다. 이 부대에 자유 프랑스 부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자기들의 모국 땅에 첫 발을 내디디도록 배려되었다. 1 여단의 상륙은 언론에 보도되어 유명해졌는데 스코틀랜드 백 파이프 연주자인 빌 밀린(Bill Millin)이 선두에서 백 파이프를 연주하며 상륙을 선도했었기 때문이다. 1 여단에게는 위스트르앙(Ouistreham)에 있는 각각의 목표가 부여되어 있었다. 프랑스 군에게는 한 개의 보루(堡壘)와 카지노 점령이 목표로 주어졌다. 영국 코만도에게는 해안을 굽어보는 독일군 포대 점령이 목표였다. 프랑스 군이 가진 대전차 병기로는 단단하게 지어진 보루를 파괴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카지노는 영국 센토 전차의 지원을 얻어 쉽게 점령했다. 영국군은 부여된 독일군 포대를 접근해보니 독일군들은 이미 포들을 챙겨서 다른 곳으로 떠난 후였다. 코만도들은 위스트르앙 지역의 소탕 작전을 보병 부대에게 인계하고 후방의 더 중요한 목표, 즉 공수 낙하한 6 공수사단과 연결코자 내륙으로 진격하는 본대로 귀환하였다.
소드 해안에 상륙 중인 영국군. 사진 앞쪽의 인물이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빌 밀린(Bill Millin)이다.
주노 해안에는 캐나다군이 상륙하였다. 캐나다 군은 운이 없었다. 이 해안은 요새화 되어 있는 난공불락의 방벽이었다. 155mm 포들의 포대가 두 곳, 75mm 포대가 아홉 곳이었다. 해안은 기관총 진지들과 콘크리트 벙커, 그리고 오마하 해안보다도 두 배나 높은 방벽들이 해안을 뒤덮고 있었다.
주노 해변에 당도하는 캐나다군
줄이어 주노 해변에 상륙하는 캐나다군
캐나다군의 제 1 파는 상륙군 50%의 피해를 입었다. 이 피해는 5 곳의 노르망디 상륙지점에서 두 번째로 높은 피해였다.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군은 해안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힘들게 확보하였다. 적의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부대가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 것은 탱크들의 괄목할 활약에 힘 입은 바가 컸다, 이들 기갑부대는 때로는 보병보다 먼저 상륙해서 교두보 확보에 큰 공헌을 했다. 4대의 한 탱크소대는 따르는 보병부대를 훨씬 앞질러서 돌격해가서 최종목표에 도달했다가 보병들이 한 명도 후속하지 못한 것을 깨닫고 퇴로 차단을 우려해서 급히 철수하기도 하였다. 주요목표였던 두 Douvre 레이다 기지는 요새화 되어 있어 며칠 동안 점령하지 못했다가 영국의 코만도 부대가 점령하였다. D-day 저녁까지 약 30,000명의 캐나다 부대가 상륙했으며 이중 선도하는 캐나다 3 보병사단에게 7일과 8일에 독일 21사단, 12 SS 사단, 그리고 12 히틀러 유겐트 전차사단 등이 반격해왔지만 격퇴해버리고 다른 해안상륙부대보다 더 깊이 프랑스 내륙으로 파고들었다.
주노 해안에서 독일군 포로를 감시하고 있는 캐나다군.
캐나다 군이 상륙을 마치고 내륙으로 진군하는 모습
골드 해안에 상륙한 영국군 병력이 내륙으로 진격하고 있다.
골드 해안에는 25,000명의 영국군 병력이 영국군 2 군 사령관 마일즈 뎀프시 중장의 지휘로 상륙하였다. 이곳 역시 잘 방어되고 있어 영국군은 상륙 단계에서 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상자 발생의 부분적 원인은 자력(自力)으로 물에 떠서 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던 M 4 셔먼 전차의 도착이 늦어진 것과 독일군들이 해안 마을을 상륙저지 방어시설로 요새화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군 50 보병 사단은 격전 끝에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상륙에 거의 성공했다. 상륙 후 해안을 장악하고 있는 캐나다 부대를 제외하고 진격을 계속해서 그날 오후 바이외(Bayeux)시의 교외에까지 진격하게 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D-day에 영국군 50보병 사단처럼 그 예정 목표에 근접했었던 부대는 운 좋게 주노 해안에 상륙한 캐나다 부대를 빼놓고는 없었다.
골드 해안에 상륙하는 영국군 코만도 부대
50사단과 같이 상륙한 47코만도 부대는 코만도부대 중에 제일 나중에 상륙한 부대가 되었다. 그들은 골드 해안의 동쪽 La-Hamel에 상륙하였다. 47코만도 부대에 주어진 임무는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상륙 후 내륙으로 빠르게 진입해서 오른쪽으로, 즉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16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어촌(Port en Bessin)의 후방을 기습하는 것이었다. 이 작은 어촌은 영국군 전선의 최우측에 있었는데 이곳은 절벽으로 감싸여 있어 대공 방어의 입지적 조건이 우수한 곳이었다. 이 안전한 해안에서 떨어진 유조선에서 송유관을 통해 석유를 육지로 반입하는 터미널이 설치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결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첫날 목표는 크게 세 개였다. 첫째, 생로(Saint-Lo), 캉(Caen), 그리고 바이외(Bayeux)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그리고 상륙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한 노르망디 해안에서 소드 해안과 유타 해안만을 제외하고 연합군들이 상륙지점을 상호교통이 가능하게 연결하는 것이었다. 제외 된 두 해안 연결은 이미 내륙에 투하했던 공수부대원들에게 임무가 부여됐다. 세 번째, 상륙 당일로 해안에서 10-16킬로 정도 내륙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지도. 독일군은 기만작전에 속아 칼레(Calais, 지도 우상부)에 상륙을 예상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를 4개 해변으로 나누어 상륙했고, 첫날 생로(Saint-Lo), 캉(Caen), 바이외(Bayeux) 점령을 노렸다.
캉(Caen) 근처의 캐나다 군 묘지.
캐나다 군과 영국, 프랑스 군 등 2049명의 병사가 잠들어 있다.
연합군의 항공력은 침공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 공군은 근접 전술 지원과 독일군의 교통체계를 마비시켜 가장 중요한 시간에 독일 전차사단을 막아냈으며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활동을 무력화 시켰다. 그러나 대전차 공격은 다소 미흡해서 독일 기갑부대의 상당수가 전진하는 연합군을 애 먹이게 하였다. 상륙 초기에 입은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연합군의 사기는 작전 내내 높았다.
프앙테뒤오크 지역을 상륙 전에 폭격하는 폭격기들 |
영국해협을 건너려 대기하는 미군들. 웃음짓는 병사가 많다. |
독일군은 지휘관 상하에서 모두 적시에 적절하게 대응하는데 실패했었다. 기동과 통신은 연합군의 항공력과 해군 화력에 큰 지장을 맛보아야 했다. 노르망디 해안에서 연합군을 맞은 일선 부대 지휘관들의 졸렬한 능력은 사령관인 롬멜을 크게 실망시켰다. 독일 최고사령부는 융통성 없게도 침공 전에 연합군이 칼레 지역에 상륙하리라는 굳은 사고 방식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룬트슈테트 원수는 히틀러로부터 자신이 보유한 예비 기갑 병력을 제때에 동원하도록 재가를 조기에 받지 못했다. 그가 히틀러의 허가를 받고 예비기갑 부대를 동원했을 때는 이미 오후가 되었을 때이고 최적의 시기는 놓친 상태였다.
룬트슈테트 원수와 롬멜 원수 |
히틀러의 충복, 독일국방군 최고사령관 카이텔(Wilhelm Keitel 1882~1946)) |
룬트슈테트 원수와 롬멜 원수는 계속 히틀러에게 좀 더 사려있는 판단을 해주도록 건의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의 충복(忠僕)으로서 그의 명령을 앵무새처럼 옮겨 내리는 카이텔 원수에게 “이 멍청아! 이제부터 강화(講和)를 준비해!”라고 큰 소리를 했다가 6월 29일 해임되고 말았다. 롬멜은 7월 16일 차를 타고 가다가 영국군의 스피트파이어 전투기에게 기총소사를 당하고 중상을 입었다. 연합군을 방어할 두 기둥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독일군은 또 지휘의 문제뿐만 아니라 병력의 질적인 면에서도 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룬트슈테트는 자기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850,000명의 병력 중에 상당수의 사단이 동부전선에서 붙잡힌 소련군 포로들을 강제로 교육시켜 편입시킨 것이었다. 이 ‘OST(동방)’ 병력들은 독일군 모병관이 제시하는 ‘독재자 스탈린을 타도하자’는 과업에 공감하여 독일군이 된 이들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유럽의 반대편으로 와서, 프랑스를 해방하려는 연합군에 저항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방에 내몰리자 모두 실망해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고, 연합군의 화력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거나 항복해버렸다.
캐나다군 병사들이 빼앗은 나치 깃발을 들고 있다.
지금으로 부터 70년 전인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
당시 아이젠하워 장군을 최고사령관으로 한 미국과 영국, 캐나다 등 연합군은 독일 치하에 있던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이날 연합군은 6500여 척의 선박, 1만 2000여 대의 비행기로 노르망디 해안을 기습해 상륙했으며 이후 여세를 몰아 파리 탈환에도 성공했다. 바로 제 2차 세계대전 승리의 결정적 계기가 된 작전명 ‘오버 로드’(Operation Overlord)로 알려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최근 영국 공군(RAF)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70주년을 맞아 당시의 역사적인 순간을 담은 희귀 사진을 공개했다. 위 사진들은 당시 전투에 참여한 영군 무스탕기에서 촬영된 것으로 장엄하고 처절한 전투 상황이 여러장의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진에는 드넓은 해안을 두고 상륙하려는 연합군 측과 막아서는 독일군의 전체적인 전경이 마치 비현실적인 그림처럼 묘사돼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날 상륙작전으로만 약 4000여명의 연합군이 사망했으며 이후 70여일 이상 이어진 전투로 연합군은 21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영국공군 측은 “수 많은 사상자를 낸 지옥같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선배들의 발자취가 사진 속에 담겼다” 고 밝혔다.
노르망디 근처 La Cambe의 독일군 묘지. 21,000 이상의 희생된 독일군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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