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야마 키요유키 씨는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입니다. 아마 모든 산업디자이너들이 꿈꾸는 궁극적 모습이 이 분 같은 삶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일본 외 나라에서는 켄 오쿠야마라는 이름을 쓰는 이 분. 알 만한 분들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경력이 엄청나게 엄청나고 대단히 대단합니다. 가볍게 훑자면
쉐보레 4세대 카마로
혼다, 두카티, GM, 포르쉐 등을 거치며 자동차 디자이너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GM에서는 너무나도 유명한 4세대 카마로를 디자인했죠.
이후, 페라리 마세라티 등을 디자인하는 이탈리아 카로체리아 피닌파리나에 입사합니다. 그냥 입사만 한 게 아니라 피닌파리나 수석디자이너이자 디렉터 자리에 오르는 놀라운 능력을 보입니다. 그리고 켄 오쿠야마를 전 세계에 알린 그 차를 디자인하게 되죠. 그 차란 바로
페라리 엔초 페라리
엔초페라리 입니다.
오쿠야마 씨의 디자인 안이 엔초페라리의 디자인으로 최종 선택된 과정도 재미납니다.
엔초페라리의 디자인을 확정 지어야 할 날이었습니다. 페라리의 몬테제몰로 사장이 헬기를 타고 피닌파리나 스튜디오에 도착했죠. 피닌파리나 경영진들과 오쿠야마 씨는 완성된 디자인 안을 가지고 몬테제몰로 사장에게 프리젠테이션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장은 그 디자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페라리 360 모데나
최근 페라리는 인하우스 디자인팀의 디자인 비율을 높이고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페라리 디자인은 당연히 피닌파리나의 몫이었습니다. 그런 계약이 따로 있지 않았음에도 언제나 페라리 디자인을 피닌파리나가 도맡아 해왔던 건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단순히 품평회 때마다 몬테제몰로 사장을 가장 만족시켜왔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오쿠야마 씨로 인해 그런 신뢰관계가 깨질 위기에 놓인 겁니다. 그것도 사상 최초로 동양인이 맡은 페라리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말이죠. 아마 이때 오쿠야마 씨의 절망감과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했을 겁니다.
언짢은 표정으로 자리를 뜬 몬테제몰로 사장은 헬기 이착륙장으로 나섰는데, 예정보다 일찍 나온 탓에 아직 헬기가 준비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사장은 잠시 소파에 앉아 헬기의 이륙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죠.
잠시 시간이 생긴 피닌파리나 경영진은 다급히 오쿠야마 씨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방금 보여줬던 A안 말고 B안이든 C안이든 무엇이든 괜찮으니 다른 어떤 스케치라도 가져오라고요.
이 그림이 당시 사용된 그림은 아닙니다.
오쿠야마 씨는 수첩에 낙서수준으로 끄적거렸던 수 많은 B, C안들 중에 하나를 골라 그 짧은 시간에 그림을 그려갔어요. 꼼꼼하게 그리지도 못했고, 그의 표현에 따르면 색깔도 날림으로 겨우 칠한 수준이었다고 하더군요.
이 그림도 당시 사용된 그림은 아닙니다.
대기실에서 헬기의 이륙준비를 기다리던 몬테제몰로 사장은 오쿠야마 씨가 허겁지겁 그려온 B안의 렌더링을 보고 매우 흡족해 했습니다. 왜 처음부터 이 그림을 가져오지 않았냐며, 결국 그날 엔초페라리의 디자인을 그 안으로 승인해 줬죠. (오쿠야마 씨는 처음 퇴짜 먹었던 A안이 훨씬 멋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일본에 있을 때 오쿠야마 씨에게 직접 들었던 일화입니다. 디자이너로서 평상시에 언제나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그걸 B안이든 C안이든 항상 품에 다양하게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강의를 하던 중에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후 오쿠야마 씨는 ‘이곳에서 하고 싶은 걸 모두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피닌파리나를 나와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디자인스튜디오를 설립해 더욱 넓은 분야의 다양한 디자인을 하고 있죠. 주로 일본 지방에 숨어있는, 뛰어난 기술을 가진 회사들을 찾아내서, 그들의 기술력을 이용한 디자인을 하고 있어요. 예컨대
텐도오 목공 오리즈루 T-3205MP-CH
원목을 겹겹이 붙여 접어내는 기술을 가진 회사와 함께 오직 접는 공법만으로 만든 종이 접기 같은 느낌의 원목의자를 디자인했고요,
금속성형기술이 뛰어난 회사를 찾아내 티탄으로 만든 이런 안경을 디자인하기도 했습니다. 스스로 아이웨어 회사를 만들어서 팔고 있죠.
켄 오쿠야마 디자인 스튜디오. K.O 7
자신의 주특기인 자동차디자인도 더욱 재미나게 하고 있습니다. 자사에서 자신이 원하는 차를 자기 마음대로 디자인해서 세상에 내놓고 있죠. 위 사진의 차가 그 첫 모델이었고, 곧 열릴 동경모터쇼에서 자사의 최신판 모델 발표를 앞두고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30yu5CKBys4
한마디로 산업디자이너들이 꿈꾸는 모든 것을 다 해본, 혹은 하고 있는 셈입니다. 정말 부럽기 그지없습니다. 혹시나 이런 삶을 꿈꾸며 산업디자이너를 지망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지금까지 역사상 모든 디자이너 중 손에 꼽을 정도라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아무튼, 오쿠야마 씨는 이 외에도 고속철도, 항공기, 선박 등의 디자인 프로젝트에도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독특한 작품(?)을 발표했죠.
얀마 YT01 컨셉트
일본의 농업/어업분야 장비 전문회사 얀마(YANMAR)의 차세대 트랙터를 디자인한 겁니다. 컨셉트 모델이긴 하지만 실제 얀마의 트랙터를 기본으로 만들었고 모든 작동이 가능한 워킹목업입니다. (사진은 공식배포용 이미지에 담긴 그래픽이지만 실제로 만들어 전시회도 열었습니다.)
당장 로봇으로 변신할 것 같은, 트랜스포머에 나옴직한 모습. 아마도 도구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농기계 특성상, 로봇 같은 스타일을 노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기능성도 출중해서, 전후/상하/좌우로 경쟁 트랙터모델 중 최고의 시야각을 확보했고, 또한 혼자서 두 대를 조종할 수 있는 링크조종기능도 갖췄다고 합니다. 한 대를 조종하면 나머지 한 대가 똑 같은 작업을 하면서 따라오는 기능인데 넓은 밭을 가꿀 때 유용하다고 하는군요.
얀마는 앞으로 이 모델을 토대로 양산형 트랙터를 개발해 나간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에 쓰인 디자인을 반영해 나간다는 뜻이죠.
얀마는 오쿠야마 씨 외에도 종합 프로듀서 한 명, 패션 디자이너 한 명을 불러 세 명의 스페셜리스트와 함께 ‘프리미엄 브랜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분들도 모두 그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는 실력파들이죠. 오쿠야마 씨가 차세대 컨셉트 트랙터를 디자인했다면 패션 디자이너는 농업과 어업에서의 작업복을 디자인했습니다. 사진이 왠지 모르게 조금 웃기긴 하지만, 위의 트랙터에서도 그랬듯, 작업용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세련된 모습입니다.
이번에 선보인 트랙터와 작업복 모두 실제 판매보다는 기업의 이미지를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프로젝트의 임팩트를 위해 페라리를 디자인했던 오쿠야마 씨를 기용한 것이었죠. 그리고 그는 실제로 이슈가 될 만한, 눈에 띄고 멋진 트랙터를 디자인해 냈습니다.
바로 얀마가 원하던 목표였죠. 이 모델은 관심을 끌기 위한 성격이 강했지만 앞으로 오쿠야마 씨가 얀마를 위해 디자인할 농업용 어업용 실제 제품들은 도구로 쓰이는 ‘장비’로서의 맛을 살린 오쿠야마 씨만의 디자인이 될 겁니다.
페라리부터 각종 소품과 농기구까지. 디자인에는 경계가 없는 듯 합니다. 계속 넓어지고 있는 그의 디자인세계처럼요.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오히려 활동범위를 넓히고 있는 오쿠야마 키요유키 씨. 앞으로 그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자동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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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라리 카디자이너출신 글쟁이 김준선 erin@topgearkorea.com
- 영국 BBC 〈Top Gear〉 한국판 에디터. 일본에서 자동차 디자이너로 일했고, 자동차 파워블로그 〈모터블로그〉에 Erin이란 필명으로 활동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