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전 도서관에서 별 생각없이 집어든 책이 <한국현대사산책>이었다. 책의 권수가 너무 많아 ‘이승만’이 어떤 사람인지나 알아볼까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한 것이 ‘1950대편’이었다.
그런데 책을 편 순간부터 내 머릿속으로 지독한 회오리바람이 불어왔다. 책은 내가 식상하게 들었던 6.25.전쟁부터 시작하고 있었지만 내가 이전에 알던 6.25.전쟁이 아니었다. 국군과 미군들에 의해 너무나 많은 민간인들이 처참하게 학살되었고 톱질전쟁 속에 우익 아니면 좌익을 강요받아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원혼들. 책의 군데군데 피냄새가 진동했고 역겨움이 배어났다.
그렇게 해서 1950년대편 3권을 악몽에 몸부림치듯 읽어갔고 1960년대편으로 접어들었다. ‘1960대편-1권’은 4.19.혁명부터 5.16.군사쿠데타까지 다룬 내용이다. 장면 정부의 혼란과 기회주의자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과정과 성공원인에 대해 갖가지 역사적 사료를 들어 설명하고 있었다.
작가가 제시한 역사적 사실이나 논증과 별도로 내가 이 책을 보면서 느낀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존재의 허약성이다.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을 때 이승만 정권 시절 권력의 2인자였던 국무총리 이기붕은 일가족과 함께 집단자살을 한다. 적어도 일국의 국무총리였고 차기 대통령감으로 거론되던 사람이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쉽게 삶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한,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역사속의 위인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에게 닥친 위기 앞에 겁에 질려 그렇게 쉽게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다른 한 장면. 의원내각제하에서의 총리였던, 대통령제라면 대통령과 같은 존재인 장면 역시 인간 존재의 허약성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장면은 쿠데타가 일어나자 혹시 쿠데타군의 총에 맞아 죽을까봐 두려워 수녀원에 숨어서 55시간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발각될 것이 두려워 자신의 최측근에게도 행적을 알리지 않았고 연락을 시도하지 않았다. 만약 최종 군사지휘권을 가진 장면이 쿠데타가 발생한 즉시 군사적 행동을 지시하였다면 전체 군인의 0.5% 수준에 불과한 쿠데타군을 쉽게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증언이다. 그럼에도 장면은 쿠데타군이 무서워 55시간동안 행적을 감춰 버린 것이었다.
또 하나. 엄청난 담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박정희 역시 몹시 허약한 인간성을 드러낸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킨 5월16일 새벽, 쿠데타 성공여부를 매우 걱정하여 술을 마구 들이켰고 몹시 취해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우리가 알던 역사속의 영웅들도 알고보면 모두 이토록 겁 많고 허약한 인간들이 아니었을까? 승자의 편에서 역사가 기술되므로 모두 그들의 용맹성을 칭송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원래 형편없이 허약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가 아닐까 의심스럽다.
둘째, 역사는 대체로 기회주의자들이 정의로운 자를 이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정희는 철저한 기회주의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 일본 관동군에 속했다가 해방이 되면서 만주군에 들어갔고 6.25.전쟁 전에 좌익이 우익보다 우세할 무렵 남로당 활동을 했으며, 6.25.전쟁 후 남로당을 배신하고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철저히 출세와 권력만을 향해 달렸고, 어떤 것이 정의로운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것이 저것보다 유리하다면 이것을 취할 뿐 이것과 저것의 가치를 따지지 않았다. 어찌 박정희만 기회주의라고 할 수 있으랴. 당시 출세가도를 달린 이들은 모두 뛰어난 기회주의자였다. 혁명위원장으로 추대된 장도영, 5.16.혁명의 주역 김종필, 쿠데타에 소극적으로 협조한 윤보선 대통령 등.
더구나 박정희의 쿠데타를 지지한 미국조차 기회주의의 속성을 보여준다. 미국은 장면 정부보다 박정희 정부가 ‘반공친미’에 더욱 매진하리라는 사실을 먼저 인식하였고 쿠데타를 은연중 지원했다.
반면, 이승만 정권 시절의 조봉암은 가장 이상적이고 실현가능한 통일계획을 가진 진보적인 인사임에도 사형을 받아 죽어갔고,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했던 이종찬 장군은 그 정의로움에도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한 현상은 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현상은 기회주의자들이 아부와 뇌물을 좋아하는 인간본성에 호소하여 주위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돕도록 만들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또 큰 이익을 많은 사람이 조금씩 나눠 가지는 것보다 작은 이익을 적은 사람이 많이 나눠가지고 싶은 인간의 본성이 기회주의자를 돕는 것이 아닐까 싶다.
셋째, 부패는 언제나 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이승만 정부나 장면 정부 모두 정치권의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그것은 권력의 유지에는 필연적으로 부패가 따르기 때문이다. 정치권에 많은 돈을 갖다 바친 기업이 각종 혜택으로 몸집을 불려서 재벌의 시초가 된다. 그러한 부패의 고리는 점점 아래층으로 내려오고 나중에는 최하층 국민들을 수탈하게 되는 구조가 형성된다. 당시의 국회의원이나 장관 자녀들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군복무를 회피하였다. 군 수뇌부들은 늘 요정에서 흥청거렸고, 힘있는 미국의 대사관, 군정보기관에 줄을 대려고 애를 썼다.
이제 한국현대사 산책 1960대편-2권을 집어든다. 박정희 정권의 시작되고 있었다. 벌써부터 마음이 먹먹하다.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최고의 기회주의자가 만든 공화국은 결국 기회주의자들이 승리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 사람의 진짜 면목이 나온다고 하는데
우리의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개인주의로 살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어떤 방법으로든 도피하고 마는
생태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겠죠. 지도자라고 해 봐야 뭐 그리 대단한 인간도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공감도 되지만 나역시 별반 다르지 않을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당시에 나라면 .. 정말 다른선택을 했을것 같지는않아보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고 삶을 온몸받치신분들도 많으시지만.. 여튼 짧게나마 깊은생각을 하게만든 글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평범한 중생의 한 사람으로써 생존을 위해 비겁한 행동을 마다하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그러나 한 국가의 최고위층 인사들이라면 저하고는 좀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저와 다를바 없는 그저 그런 인생들이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차기 정권의 중심에 서 있는 문재인, 안철수, 김무성 등도 뭐 그리 저하고 크게 다를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