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왜장ㆍ왜졸에게 물어보기를,
“살기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이나 물(物)이나 마음이 똑같은 법인데, 일본 사람들은 유독 죽기를 좋아하고 살기를 싫어하는 것은 어쩐 일이냐?”
고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일본에 있어서는 장관(將官)이 백성들의 이권(利權)을 장악하고 털끝 하나라도 백성에게 맡기지 아니하기 때문에, 장관의 집에 기식(寄食)하지 아니하면 의식(衣食)이 나올 길이 없으며, 이미 장관의 집에서 기식하는 이상에는 이 몸이 내 몸이 아닙니다. 한 번 담력이 부족하다고 소문나면 가는 곳마다 용납되지 못하고 패도(佩刀)가 정(精)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열에 끼워 주지 아니합니다. 칼에 찔린 흔적이 얼굴에 있으면 용맹한 사나이라 지칭되어 중한 녹(祿)을 얻고, 칼 자욱이 귀 뒤에 있으면 달아나기를 잘하는 자라 지칭이 되어 배척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의식(衣食)이 없어서 죽을 바에는 적의 진중에 달려가서 싸우다 죽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힘껏 싸우는 것은 실로 자신을 위한 모책(謀策)이요, 주장을 위한 계책(計策)이 아닌 것입니다.
대개 그 사훼(蛇虺)의 독과 호랑(虎狼)의 탐욕이 무력을 믿고 잔인을 즐기며, 그 떠들썩하게 싸우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오직 천성에서 얻어지고 이목에 익혀진 것뿐만이 아니라, 법령이 따라서 얽어매고 상벌(賞罰)이 또 따라서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장수가 태반은 재질이 노둔한데도 다 능히 사람을 죽일 힘을 얻고, 그 군사가 태반은 연약한데도 다 능히 적(敵)과 맞서서 죽음을 다투게 되니, 만 명만 되면 능히 당적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 왜노를 두고 이름인데, 하물며 수 십여만이겠습니까?
천하의 화는 으레 소홀하게 여기는 데에서 생기는데, 우리나라에서 야인(野人)을 방비함에 있어서는 남북에다 두 병사(兵使)를 두되 다 2품의 중직으로 하고, 서북에다 두 평사(評事)를 두되 다 명망 있는 문관(文官)으로 하면서, 호남ㆍ영남의 변장(邊將)에 있어서는 관례를 따를 따름이니, 2품의 중직과 명망 있는 문관이라고 하여 방어하는 데 큰 보탬이야 없겠지만, 남(南)을 경히 여기고 북을 중히 여김이 이를 들어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아도, 백만의 야인이 수십만의 왜병을 대적치 못할 터인데, 국가에서 남을 경히 알고 북을 중히 여기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마음속으로 따져 보고 왜에게 물어본즉, 수백 년 전의 왜국 법령은 대개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다름이 없어서, 귀인의 집에 사노(私奴)를 두는 것이나, 범민(凡民)이 사전(私田)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수령들의 경질, 과거(科擧) 보여 인재 뽑는 것 등이 대략은 서로 같았으니, 대개 수 천 리의 한 낙국(樂國)이었습니다. 그런데 관동 장군(關東將軍) 뇌조(賴朝)가 전쟁을 일삼은 이래로는 마침내 하나의 전국(戰國)을 이루었습니다. 이른바 포수(砲手)라는 것은 이전에는 없었고, 단지 창과 칼을 쓰는 것으로 장기(長技)를 삼았을 따름이었습니다. 추산해 보면 50년 전에 남만(南蠻)의 배 한 척이 표류되어 왜국에 도착했는데, 그 배에는 포탄(砲彈) 및 화약(火藥) 등이 가득 실려 있었으므로, 왜인이 이때부터 포 쏘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왜인의 천성이 영리하여 배우기를 잘해서 4~50년 사이에 뛰어난 포수가 온 나라에 퍼졌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왜노는 옛날의 왜노가 아니요, 우리나라의 방어는 또 옛날의 방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강역(疆域)의 근심은 전일보다 백 배나 더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이제 이후로는 남쪽을 경히 여기고 북쪽을 중히 여기는 폐습을 철저히 개혁하여 인심을 단결케 하며, 변방을 튼튼히 하고 변장(邊將)을 선택하며, 성(城)과 호(壕)를 구축하고 선박을 손보며, 봉화(烽火)를 잘 관리하고 군졸을 훈련하고 기계(器械)를 수선하는 것 등을 한결같이 한다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대개 오랑캐를 방어하는 것은 구황(救荒)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구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으니, 하나는 바로 화기(和氣)를 감동시키고 불러들여 풍년이 들게 하는 것이요, 그 다음은 단지 저축하는 계책이 있는데, 만약 백성이 기근을 당해서야 알았다고 한다면 다시 무슨 계책이 있겠습니까? 오랑캐를 방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역시 두 가지 설이 있으니, 한 가지는 바로 춘추(春秋)의 도(道)가 있는 세상에는 방수(防守)가 서이(西夷)에 있다는 것이요, 그 다음은 단지 변방을 튼튼히 하는 계책이 있을 뿐이니, 만약 침략을 받은 뒤에 알았다고 한다면 다시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소신(小臣)이 왜경에 온 뒤부터 왜국의 허실을 탐지하고자 하여, 간일(間日)하여 왜승(倭僧)과 접촉해 보니, 그중에는 문자를 해득하고 사리를 아는 자가 없지도 않았습니다. 의사(醫師) 의안리안(意安理安)이란 자가 있어 낭당(琅璫)의 안으로 소신을 만나러 자주 찾아왔었고, 또 묘수원(妙壽院)의 중 순수좌(舜首座)라는 자가 있는데, 경극황문정가(京極黃門定家)의 손자요, 단마수(但馬守) 적송좌병 광통(赤松左兵廣通)의 스승으로서 자못 총명하여 고문(古文)을 이해하여 어느 글이라도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성품이 굳세어 왜인에게 용납되지 못하였는데, 내부(內府) 가강(家康)이 그가 훌륭한 인재란 말을 듣고서 왜경(倭京)에다 집을 지어 주고 해마다 쌀을 2천 석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순수좌는 그 집을 버리고 살지 아니하였고 곡식도 사양하여 받지 아니하면서, 유독 약주소장 승준(若州少將勝俊)과 좌병 광통(左兵廣通)만을 데리고 놀았습니다. 광통이란 자는 그 나라 환무천황(桓武天皇)의 구대(九代)손인데, 그는 육경(六經)을 독실히 좋아하여, 비록 비바람 치는 말 위에서도 늘 책을 놓지 아니하였는데, 그 성품이 노둔하여 그 나라 언역(諺譯)을 버리고서는 한 줄도 읽어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순수좌가 일찍이 말하기를,
“일본의 생민(生民)이 지치고 시든 것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조선이 만약 중국 군사와 함께 일어나서 백성을 조문하고 죄 있는 자를 토벌하되, 먼저 항복한 왜인 및 통역으로 하여금 왜언(倭諺)으로 방을 내걸어, 백성의 수화(水火)의 급함을 구제한다는 뜻을 보이며, 군사가 지나가는 곳마다 추호도 백성을 침범하지 아니한다면, 비록 백하관(白河關)에까지라도 갈 수 있거니와, 만약 왜인이 조선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던 그 수단을 이쪽에다 바꾸어 쓴다면 비록 대마도 하나도 건지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또 신에게 우리나라의 과거 보는 절차 및 춘추(春秋)의 석전(釋奠)ㆍ경연(經筵)ㆍ조정(朝廷) 등의 절목(節目)을 묻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초야의 사람이라 미처 참여하여 듣지 못했다.’ 하였고, 단지 과거ㆍ석전(釋奠) 등의 대개를 알려 주었더니, 중은 매양 실심하여 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내가 중국에서 나지 못하고 또 조선에서도 나지 못하고 일본에서도 이런 시대에 태어났단 말인가? 나는 신묘년 3월 살마주(薩摩州)로 내려가서 해박(海舶)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병이 나서 경(京)으로 돌아왔소. 병이 조금만 낫게 되면 조선으로 건너가려고 했는데, 뒤미처 전쟁이 벌어져서 서로 용납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이 때문에 마침내 감히 바다를 건너지 못했으니, 그 상국(上國)에 가서 관광(觀光)을 못하게 된 것도 역시 운명입니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일본의 장관(將官)은 모두 다 도적들인데, 오직 광통(廣通)만이 자못 사람의 마음을 지녔습니다. 일본이 본시 상례(喪禮)가 없었는데 광통만이 홀로 삼년상을 실행하였고, 중국의 제도 및 조선의 예절을 독실히 좋아하며, 의복ㆍ음식의 세세한 절차에 있어서도 반드시 중국이나 조선의 것을 본받고자 하니, 비록 일본에 살지만 일본 사람이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드디어 신의 일을 들어 광통에게 이야기했더니, 광통이 이따금 찾아와 안부를 물으며 자칭 청정ㆍ좌도 등과 더불어 틈이 나 있는 처지이니, 절대로 좌도의 집에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또 일찍이 우리나라 선비로서 포로가 되어 있는 자와 신 형제를 상종하여 육경(六經)의 대문(大文)을 적어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가만히 은전(銀錢)을 주어 객지의 생활비에 보조하면서 돌아가는 길에 노자나 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일찍이 우리나라 《오례의(五禮儀)》ㆍ《군학석채 의목(郡學釋菜儀目)》을 얻어서 그의 사읍(私邑)인 단마(但馬)를 독려하여 공자의 묘(廟)를 세우고 또 우리나라 제복(祭服)ㆍ제관(祭冠)을 만들어 날을 걸러 그 부하를 거느리고 제의(祭儀)를 익혔습니다.
금년 2월 초 9일에 이르러 좌도란 자가 그의 사읍(私邑)에서 가강의 명에 응하여 복견성에 왔는데, 대구(大丘)에서 포로되어 온 사람 김경행(金景行)이란 자가 약간 왜언(倭諺)을 적을 줄 알기에, 신등이 그 사람의 손을 빌려서 왜언으로 글을 만들어 좌도에게 주며 말하기를,
“열 식구를 공연히 기르고 있으니 너희들도 이익될 것이 없고, 4년 동안을 외로이 갇혀 있으니 나는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혹시 죽이고 싶지 않거든 문을 나가도록 허락해 줄 것을 바라며, 문을 나가도록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살아도 아무런 의욕이 없다.”
하였더니, 왜승(倭僧) 경안(慶安)이 힘써 좌도에게 권유하며 말하기를,
“어버이를 생각하고 고향을 그리는 것은 피차가 다 마찬가지다. 만약 문을 나가도록 허락해 준다면 혹시 돌아갈 편(便)도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좌도란 자가 곧 신에게, 한 집안을 거느리고 문 밖으로 나가라 하므로, 신이 우리나라 사인(士人)들 중에 일찍이 약속을 맺었던 자를 수합하고, 또 왜인 집에 있는 뱃사공을 끌어내어, 전후에 얻었던 은전을 거두어 몰래 배 한 척과 배 안에서 먹을 양식을 사들였습니다. 타국의 사람이 홀로 천 리나 되는 호랑이 굴을 지나가자면 뜻밖에 예측하지 못할 걱정이 있을까 두려워서, 드디어 순수좌 및 광통을 찾아가서 국경을 벗어나도록 힘을 빌려주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광통은 사택지마수(寺澤志摩守)의 편지를 구하여 관문의 기찰(譏察)에 대비하도록 해주었고, 순수좌는 또 뱃사공을 한 사람 내주어 수로를 일러 주게 하고는, 대마도에 당도하면 그 사공을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
신은 드디어 신의 가속 열 사람과 포로된 사인(士人) 및 뱃사공과 그들의 아내와 딸, 모두 38명을 거느리고 배를 같이 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4월 초 2일에 왜경(倭京)을 떠났는데, 뱃사공의 솜씨가 서투르고 바람이 또 좋지 못하여 5월 19일에야 비로소 부산에 당도하였습니다. 포로된 사람 중에서 나오려고 하는 자는 으레 대마도로써 귀문(鬼門)의 한계로 삼기 때문에, 신은 격서(檄書) 한 장을 만들어서 귀정(歸正)의 의(義)를 들어 힘쓰게 함과 동시에 대마도를 의심하지 말도록 설유하였습니다.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으로부터 여기까지는 바로 경자년 귀국하던 날 봉진(封進)한 것이다.
한국고전총간 > 동국여지지 > 卷一 > 京都 (경도)유형원(柳馨遠) 1656
한성부〔漢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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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승(形勝)
북쪽으로 화산(華山)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한강(漢江)을 앞에 두고 있다.
산하가 거듭 막혀 있고, 사방에서 오는 거리가 균등하다. 본조 박의중(朴宜中)의 〈한도(漢都)〉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하늘이 만든 험고함이다. 본조 권근(權近)의 시에 “화산이 우뚝하고 한강이 넘실거리니 하늘이 만든 험고함은 금성탕지보다 장엄하다.[華山峨峨 漢水湯湯 天作之固 壯于金湯]”라고 하였다. 또 “거리가 균등하며 수레와 배가 모두 도달한다.[道里攸均 舟車畢達]” 하였다.
천연의 요새인 도성이다. 본조 유성룡(柳成龍)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형세 중에는 한양만큼 험고한 곳이 없다. 한강과 임진강(臨津江)이 전후로 둘러싸고 있고, 동북으로 높은 산과 큰 산마루의 험조함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감싸고 있으니 바로 천연의 요새라 말하는 곳이다.” 하였다.
북악이 뒤에서 솟아 있고, 남산이 앞에 우뚝하다. 명나라 예겸(倪謙)의 〈태평루부(太平樓賦)〉에 “북악이 뒤에서 솟아 있어 궁전의 휘황함을 더해 주고 남산이 앞에 우뚝하며 성곽이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다.[北岳後聳 宮殿增輝 南峯前峙 城郭四圍]” 하였다.
산천이 아름답다. 산천의 아름다움이 나라 안에서 으뜸이다.
풍속(風俗)
신의를 숭상하고 유술(儒術)이 돈독하다. 〈함허자(涵虛子)〉에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신의를 숭상하고 유술이 돈독하여 중국의 풍조를 양성하였다.” 하였다.
의관과 제도가 모두 중국과 같다. 출전은 위와 같다. “의관과 제도가 모두 중국과 같으므로 ‘시서예악(詩書禮樂)의 고을’이나 ‘인의(仁義)의 나라’라고 불린다.” 하였다.
천성이 유순하다. 《후한서(後漢書)》에 “천성이 유순하여 다른 지역의 이민족과 다르다.” 하였다.
인물이 지혜롭고 총명하다. 지지(地志)
백성과 물산이 많고 성대하다. 명나라 예겸의 부(賦)에 나온다.
예의를 잘 차리는 지역이다. 명나라 진감(陳鑑)의 〈희청부(喜晴賦)〉에 “조선은 동번(東藩) 가운데 중요한 나라이니, 예의를 잘 차리는 지역이고 시서(詩書)를 많이 공부하는 곳이기 때문에 특별히 으뜸으로 칭한다.” 하였다.
선비에게 시서를 가르친다. 《풍속첩(風俗帖)》에 이르기를 “선비에게 시서를 가르치고 상사(喪事)는 반드시 삼년상을 행하니, 비록 노복과 군졸이라 할지라도 삼년상 행하는 것을 허락해 주어 그 효성을 이루도록 하고, 사대부 집안과 종가(宗家) 자제들은 모두 가묘(家廟)를 설립하여 그 선조를 제향한다.” 하였다.
문벌(門閥)을 중하게 여긴다. 출전은 위와 같다. “나라의 풍속이 문벌을 가장 중요시하여 선대에 문무 관직을 지낸 적이 있는 자를 양반이라고 부르는데, 대대로 양반의 반열에 속한 자들은 같은 부류가 아니면 모두 예모를 갖추지 않는다. 양반의 자제들은 독서하는 것만 허락받아서 잡된 기예를 익히지 않으며 더러 행실이 좋지 않으면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비난한다.”하였다.
혼인에서 중매를 신중히 한다. 명나라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혼인에서 중매를 신중히 하며, 풍속이 재가를 부끄럽게 여겨서 재가한 부인의 소생과 정조를 잃은 부인의 자식과 서첩(庶妾)의 자식은 아무리 학식이 많더라도 사류에 끼어서 벼슬에 오르지 못한다.”라고 서술하였다.
그 가장 높은 봉우리를 백운봉(白雲峯)이라고 하고, 그 옆에 또 국망봉(國望峯)과 인수봉(仁壽峯)이 있는데 우뚝이 높이 솟아서 운무가 그 위에 있는 경우가 많다. ○ 고려 이장용(李藏用)의 시에,
험한 산길 더위잡고 오르니 비탈진 돌길이요 / 試攀崎嶇石徑斜
점차 몽롱한 곳 벗어나니 바위산이 막혀 있네 / 漸出濛籠巖嶺隔
깊은 골짝을 굽어보니 아득하기만 하고 / 俯臨絶谷但蒼茫
높은 정상에 올라 보니 더욱 오그라드네 / 上到危巓增跼蹐
청명한 봉우리는 하늘과 겨우 두어 길이요 / 晴峯距日纔數尋
허공에 걸친 구름다리는 몇천 척이라 / 雲棧凌虛幾千尺
한번 올라 배회하며 홀로 탄식하나니 / 一回徙倚獨嗟咨
잠시나마 팔방을 멋대로 휘저을 만하네 / 八極須臾可揮斥
하였다. ○ 고려 이색(李穡)의 시에,
태초에 세 봉우리 깎은 듯 솟았으니 / 三峯削出太初時
하늘 향한 선인장 천하에 드물도다 / 仙掌指天天下稀
젊어서부터 진작 참된 모습 알았는데 / 自少已知眞面目
사람들은 뒷모습이 살진 양 귀비라 하네 / 人言背後玉環肥
하였다. ○ 본조 김시습(金時習)의 시에,
묶여 솟은 세 봉우리 하늘을 꿰뚫으니 / 束聳三峯貫太淸
오르면 두성 우성도 따 볼 만하네 / 登臨可摘斗牛星
큰 산이 한갓 운우를 낼 뿐만 아니라 / 非徒嶽岫興雲雨
나라를 만세토록 편안하게 하리 / 能使邦家萬世寧
하였다.
백악(白嶽) 경도(京都) 북쪽에 있다. 삼각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다시 솟아올라 이 백악이 되는데, 성이 그 산등성이를 따라 있다.
인왕산(仁王山) 백악 서쪽에 있다. 도성(都城)이 그 위를 따라 있다.
목멱산(木覓山) 바로 서울의 남산(南山)이니, 일명 인경산(引慶山)이라고 한다. 인왕산 아래 평지에서 남쪽으로 뻗어 가다가 동쪽으로 돌아 솟아나서 이 목멱산이 되는데, 도성이 그 위를 따라 있다. 한강이 그 바깥쪽을 감싸 흐르고 북쪽으로 성내를 돌아보면 궁궐, 원유, 거리, 온갖 관사가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매양 따뜻한 봄철이 되면 꽃과 버들이 성에 가득 피고 청화한 기운을 느낄 수 있으므로 경성 십경(京城十景) 중의 하나로 꼽혀 ‘목멱산 꽃구경[木覓賞花]’이라 불렀다. 본조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남산에서 앉아 보니 층진 성이 드높고 / 南山坐對層城高
궁궐 냇가 수양버들 홍교를 스치네 / 御溝楊柳拂虹橋
상원에 만발한 꽃은 붉은 노을 엉긴 듯하고 / 上苑花發蒸紅霞
태액지 따뜻한 물결은 포도주 넘실대는 듯 / 太液波煖漲葡萄
구름에 닿는 저택들, 봄이 성에 가득한데 / 甲第連雲春滿塢
봄바람은 촉촉한 가랑비 보내누나 / 東風吹送如酥雨
천만 송이 붉은 꽃들 모두 자태 머금었으니 / 萬紫千紅總含姿
정자에서 북을 쳐 꽃 피길 재촉할 것 없네 / 相催不用臨軒鼓
하였다.
타락산(酡酪山) 경도 동쪽에 있다. 성곽이 그 위에 연이어져 있다.
무악(毋岳) 도성 서쪽 6리에 있다. 일명 안현(鞍峴)이라고도 하며, 기봉(岐峯)이라고도 한다. 산 위에 옛 성터가 있다. 인조(仁祖) 때에 원수 장만(張晩)이 이곳에서 이괄(李适)을 격파하였다.
녹반현(綠礬峴) 도성 서쪽 10리 되는 홍제원(弘濟院) 서쪽에 있다.
용산(龍山) 도성 서남쪽 9리에 있다. 무악산의 남쪽 줄기가 서울을 감싸고 돌다가 강변에서 끝나는데 용산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아래가 용산포(龍山浦)가 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서 “용산은 도성의 한강 동쪽에 있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잠두봉(蠶頭峯) 세속에서 가을두(加乙頭)라고 부르는데 또 용두봉(龍頭峯)이라고도 한다. 도성 서쪽 14리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다. ○ 본조 강희맹(姜希孟)의 서문에 이르기를 “서호(西湖)는 도성에서 10리도 되지 않는데 뛰어난 경치가 동방에서 으뜸이다. 서호 북쪽에 모습이 자라 머리처럼 생긴 끊어진 언덕이 있는데 그것을 잠두(蠶頭)라고 부르기도 한다. 언덕 발치가 서호에 잠겨 들다가 중간에 형세가 또 높아져서 호수의 승경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 하였다. ○ 명나라 사신 기순(祁順)의 시에,
용두 제일봉을 걸어서 올라 보니 / 步上龍頭第一峯
한없는 풍광에 흥이 어찌 다하리오 / 煙光無限興何窮
사방의 산수는 시의 감흥 넘어서니 / 四旁山水詩情外
드넓은 천지가 한눈에 들어오네 / 萬里乾坤望眼中
마을은 북으로 이어지니 성곽에 가깝고 / 村舍北連城郭近
고깃배는 서쪽으로 가니 해문과 통하네 / 漁舟西去海門通
주인이 술자리 마련해 객을 자주 만류하니 / 主人置酒頻留客
석양에 저녁놀 사라지는 줄도 모르네 / 不覺殘陽失晩紅
하였다.
중흥동(重興洞) 삼각산 서남쪽에 있다. 위에 중흥사(重興寺)가 있기 때문에 이름 붙은 것이다. 좌우에 산봉우리가 솟아 있어 골짝이 깊고 그윽하며 암석과 반석이 희고 깨끗한 데다 냇물이 폭포로 떨어지기도 하고 깊은 못을 이루기도 하여 굽이굽이 즐길 만하니 도성 사람들이 놀러 가는 곳이 되었다.
동교(東郊) 도성 동쪽 10리에 있다. 세속에서 살곶이[箭串]라고 칭한다. 그 땅이 평평하고 널찍하며 물과 풀이 매우 풍성하므로 주변에 우리를 둘러치고 나라의 말을 길렀는데 넓이가 30여 리나 된다. 남쪽으로 한강에 임해 있다. 본조 정인지(鄭麟趾)가 서문에서 “동교는 토질이 비옥하고 물과 풀이 좋아서 목축에 알맞다.”라고 하였다.
한강(漢江)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고 불렀다. 신라 때에 북독(北瀆)이라 하여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그 원류는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왔는데 충주(忠州) 서북쪽에 이르러서 달천(達川)과 합류하고 원주(原州) 서쪽에 이르러 섬수(蟾水)와 합하고, 양근(楊根) 서쪽에 이르러 회수(淮水)에 합하고, 광주(廣州) 경계에 이르러 두미진(斗迷津), 광진(廣津), 삼전도(三田渡)를 지나서, 경성 동쪽에 이르러 두모포(豆毛浦), 한강나루가 된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흘러서 노량도(露梁渡), 용산포(龍山浦)를 지나고 또 서쪽으로 가서 서강(西江) 양화도(楊花渡)가 되고, 양천(陽川) 북쪽에 이르러 공암도(孔巖渡)를 지난 뒤 교하(交河) 서쪽에 이르러 단수(湍水)와 합류하고, 통진(通津) 북쪽에 이르러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 명나라 기순의 〈한강사(漢江辭)〉 서문에 “조선국 도성 남쪽 10리쯤에 있는 강을 한강이라고 하는데, 수원(水源)이 오대산과 금강산(金剛山)에서 나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그 경치가 그윽하고 뛰어나기로 유명하고 올라가 조망할 만한 누각이 강 앞에 있으므로 중국에서 사신 온 선배들이 모두 여기에 가서 유람하였다. 성화(成化) 병신년(1476, 성종7) 봄에 내가 이곳에 사신으로 왔는데 한강에서 노닐기를 청하는 자가 있었다. 당시 지난밤에 내리던 비가 막 개어서 산천이 맑고 아름다우며 하늘빛과 물색이 서로 이어졌는데 누대에 올라 실컷 구경하며 술잔을 들어 서로 따라 주었다. 얼마 있다가 함께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수십 리를 내려가 용산포에 이르렀으니 바로 각 도의 군향미가 모이는 곳이다. 또 몇 리를 가서 양화도에 이르러 용두봉에 올라갔다. 봉우리에서 물가 건너편 언덕을 바라보니 민가와 섬, 돛단배가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조선은 중국에서 수천 리나 떨어져 있어서 국사(國事)가 아니면 이를 수 없으니 한강의 유람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하였고, 그 사(辭)에,
강물이 유유히 흐름이여 / 江水兮悠悠
거마가 강 머리에 북적대는구나 / 車馬雜遝兮江之頭
누선을 타고 물결을 가로지르니 / 駕樓舡兮橫波
아, 내 잔잔한 흐름을 건너는구나 / 謇吾渡兮安流
풍륭더러 뒤따르게 하고 / 令豐隆兮追隨
비렴에게 선봉이 되게 하네 / 命飛廉兮前驅
산은 분분히 다가와 맞이하고 / 山紛紛兮來迎
구름은 표표히 나를 호위하네 / 雲飄飄兮護予
회포를 풀어 크게 노래하고 / 放懷兮浩歌
술잔을 드느라 지체하네 / 擧杯兮延滯
사람 그림자는 물속에 비치고 / 人影兮波心
새는 하늘 가로 날아가네 / 鳥飛兮天際
동고에서 그윽한 난초를 잡고 / 擥幽蘭兮東臯
남포에서 향긋한 지초를 캐도다 / 采芳芷兮南浦
미인을 그리워하나 오지 않음이여 / 思美人兮不來
주머니를 묶으며 머뭇거리네 / 結佩纕兮容與
하였다.
○ 본조 유성룡(柳成龍)의 시에,
멀고 멀리 한강 물은 / 遙遙漢江水
오대산에서 발원하였네 / 出自五臺山
서쪽으로 천 리를 흘러 / 西流一千里
아득히 층층의 물결 이네 / 渺渺生層瀾
백운은 도성 궐에 드높고 / 白雲城闕高
창해는 질펀하게 크고 너르네 / 滄海浩漫漫
본래 조종의 뜻이 있으니 / 自有朝宗意
만번 꺾인들 어찌 마다하리오 / 寧辭萬折難
하였다.
○ 본조 허적(許𥛚)의 시에,
툭 트인 강 양안이 길고 긴데 / 天開兩岸長
그 사이로 한 줄기 강 흐르네 / 一水其中由
거침없는 흐름은 태곳적부터요 / 奔放自太古
도도한 기세는 쉴 때가 없어라 / 滔滔無時休
가을비 지난 뒤에 배를 띄우니 / 泛舟秋雨後
긴 모래섬에 물결 더욱 넘치네 / 波漲彌長洲
굽어보니 천 길이나 되는 깊이라 / 俯壓千丈深
흘깃 보아도 용과 규룡 보이네 / 睥睨觀龍虯
천지간에 멋대로 휘파람 길게 불고 / 長嘯傲乾坤
뱃전을 두드리며 중류를 능지르네 / 鼓枻凌中流
빠르게 흐르는 것은 강가의 산이요 / 荏苒江上山
아득히 보이는 것은 강가의 누각이라 / 縹緲江上樓
저물녘 백사장에 배를 대고 보니 / 晩泊沙洲際
드넓은 안개 물결 유유히 흐르네 / 煙波浩悠悠
하였다.
신포(新浦) 광주(廣州) 경계에 있으니 도성에서 27리 떨어져 있다. 광진 나루 아래에서 한강(漢江) 물이 넘쳐 물길이 갈라지는데, 그 본류는 삼전도(三田渡)로 흘러가고 갈라진 물길을 신포라고 부른다. 가뭄이 들 때는 맨몸으로 건널 수 있으나 물이 불어나면 두 개의 강이 된다. 허적의 〈삼전도〉 시 에 “두 강에 흐르는 물 가을빛이 맑구나.[二江流水澄秋色]”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저자도(楮子島) 아래에서 합류하여 하나가 된다. 중종 때에 그 물의 기세가 선릉(宣陵)에 곧장 부딪친다고 하여 군졸을 동원해 돌을 옮겨서 강안의 이 빠진 곳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끝내 해내지 못하였다.
두모포(豆毛浦) 도성 동쪽 10리에 있다. 한수가 흐르는 물이 모여 호수를 이룬 것을 동호(東湖)라고 한다. 본조 심수경(沈守慶)의 시에 “동호의 승경을 세상 사람이 다 아네.[東湖勝槪世人知]”라고 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이수포(二水浦)라고도 칭한다.
용산포(龍山浦) 도성 서남쪽 10리 용산(龍山) 아래에 있다. 한강 물이 여기에 이르러 두 줄기로 나뉘는데, 한 줄기는 용산포, 마포, 서강이 되고, 또 한 줄기는 곧장 금천현(衿川縣) 경계에서부터 서쪽으로 흘러서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된다. 고려 이인로(李仁老)의 〈용산〉 시에 “두 물이 넘실넘실 제비꼬리처럼 갈라지네.[二水溶溶分燕尾]”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바다의 조수와 통하여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경기 상류의 조운(漕運)이 모두 여기에 집합한다.
마포(麻浦) 도성 서쪽 10리에 있다. 위로 용산포와 이어지고 아래로 서강과 접해 있다.
서강(西江) 도성 서쪽 15리에 있다. 황해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 하류의 조운이 모두 여기에 집합한다. 그 아래가 양화도가 되는데 용산포, 마포와 함께 서호(西湖)라고 통칭하였다. ○ 본조 서거정(徐居正)의 〈서호〉 시에,
양화도 어귀에 목란 배를 매고 보니 / 楊花渡口繫蘭船
참으로 인간 세상에 별천지가 있구나 / 須信人間別有天
굳이 신선과 함께 학을 타진 않더라도 / 不必神仙同鶴駕
요컨대 용면 시켜 그림은 그려야겠네 / 要將圖畫倩龍眠
햇살 퍼진 바다엔 황금 물결이 출렁이고 / 日明鰲背黃金浪
바람 치는 용두봉엔 푸른 옥빛 흩뿌려졌네 / 風撼龍頭碧玉濺
모름지기 서호를 서자에 비유할 만하니 / 須把西湖比西子
강가에 흥취가 끌리는 걸 어이하리 / 江上其奈興相牽
하였다.
개천(開川) 백악산, 인왕산, 목멱산의 여러 계곡의 물이 합류하여 도성 안을 가로질러 관통하여 동쪽으로 나아가 삼수구(三水口) 9리쯤에서 중량천(中梁川)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들어간다. ○ 장헌왕(莊憲王) 때에 술사 이현로(李賢老)가 풍수설을 가지고서 도성 안 개천에 오물을 투기하는 것을 금지하여 명당(明堂)의 물을 맑게 할 것을 청하였다. 집현전 교리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기를 “풍수지리설은 삼대 이전에는 없었고 양한(兩漢) 이후에야 비로소 그 학설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말하는 ‘명당에 냄새나는 더러운 물이 있으면 불길한 상이다.’라는 것은 장지(葬地)의 길흉을 논한 것이지 도성에 대해 논한 것이 아닙니다. 도성이란 지역은 인가가 번성하여 이미 사람이 많고 번화하니 냄새나는 오물이 쌓이게 마련이므로, 반드시 수도와 너른 내가 그 사이를 종횡으로 소통하여서 그 더러운 것을 흘려보낸 뒤에야 도성을 깨끗이 할 수 있으니 그 물이 깨끗할 리가 없습니다. 이제 도성의 물을 산속의 물처럼 청정하게 만들려고 한다면 형세상 되지 않을 뿐만이 아닙니다. 장지에나 적용할 일을 어찌 도성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이 “어효첨의 논리가 옳다.” 하여 마침내 이현로의 주장을 쓰지 않았다.
중량천(中梁川) 또 다른 이름은 속계(涑溪)이다. 도성 동쪽 13리에 있다. 물이 양주로부터 시작되어 살곶이[箭串] 들녘을 거쳐 남쪽으로 흘러서 두모포(豆毛浦)에 이르러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도요연(桃夭淵) 전관교에 있다.
남지(南池)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다. 연꽃을 심어서 연지(蓮池)라고도 부른다.
서지(西池) 돈의문(敦義門) 밖 모화관(慕華館) 남쪽에 있다. 또 다른 이름은 반송지(盤松池)이다. 예전에 수십 보를 뒤덮을 만한 반송이 못가에 있어서 고려 왕이 일찍이 남경에 행차하였을 때 이곳에서 비를 피하였다. 본조 초까지도 그 반송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동지(東池)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다. 연꽃이 있다.
초정(椒井) 인왕산 아래에 있다. 거기서 목욕하면 병이 나으니, 효종(孝宗)과 금상(현종)이 이곳에 행차한 적이 있다.
율주(栗洲) 도성 서남쪽 15리 한강 용산포(龍山浦) 안에 있다. 세속에서는 밤섬[栗島]이라고 칭한다. 그 길이가 7리인데 뽕나무 숲이 있고, 또 약초를 심는 약밭이 있다.
나의주(羅衣洲) 도성 서쪽 15리 서강(西江) 안에 있다. 세속에서는 잉화도(仍火島)라고 칭한다. 본래 율주와 서로 이어져 있었는데 장맛비가 범람하는 바람에 갈라져서 두 개가 되었다. 짐승을 기르는 목장이 있어서 사축서(司畜署)와 전생서(典牲署)의 관원을 나누어 파견해서 감목한다.
삼전주(三田洲) 도성 동쪽 29리 삼전도(三田渡)와 신포(新浦) 사이에 있다. 그 안은 사토가 매우 비옥하여 사포서(司圃署)에 소속되어서 채마밭을 가꾸어 공상하였다. 또 뽕나무 숲도 있다.
저자도(楮子島) 도성 동쪽 25리에 있다. 한강 가운데 작은 섬이 우뚝 솟아서 모래섬을 앞에 마주하고 있는데 고려 때 한종유(韓宗愈)가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 본조 세종이 이 섬을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는데, 공주의 아들 안빈세(安貧世)가 그 위에 정자를 짓고 화공에게 명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니, 한때 이에 대해 시를 읊은 이가 매우 많았으며, 정인지의 서문이 있다.
○ 한종유의 시에,
십 리 서호에 가랑비 지나갈 제 / 十里西湖細雨過
한 가락 젓대 소리 갈꽃 너머 들려라 / 一聲長笛隔蘆花
조정에서 경륜하던 솜씨를 가지고 / 直將金鼎調羹手
낚대 잡고 저물녘 모래밭에 내려오네 / 還把漁竿下晩沙
하였다.
토산(土産)
도기(陶器), 당도(唐桃), 자두[紫桃], 모두 장원서(掌苑署)에서 난다. 밤[栗], 현삼(玄蔘), 무[蘿葍], 동교(東郊)에서 나오는 것이 가장 좋다. 염초(鹽硝), 엿[飴糖], 숭어[秀魚], 쏘가리[錦鱗魚], 웅어[葦魚], 누치[訥魚], 붕어[鯽魚], 뱅어[白魚], 복어[豚魚]
궁실(宮室)
종루(鍾樓) 도성 안 큰 거리에 있다. 태조 4년(1395)에 종각을 세우고 세종 때에 층진 누각으로 고쳐 지었다. 동서로 5칸이고 남북으로 4칸인데 큰 종을 달아서 아침저녁의 시간을 알렸다. ○ 권근(權近)의 〈종명(鍾銘) 서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조선이 천명을 받은 지 3년 만에 한강 북쪽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 이듬해에 비로소 궁궐을 지었으며, 그해 여름에 담당 관사에 명하여 큰 종을 주조하게 하였다. 종이 완성된 뒤에 큰 시가에 종각을 세우고 종을 달았으니, 공업을 이루었음을 기록하고 큰 경사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였다. 예로부터 국가를 세운 자가 큰 공을 세우고 큰 기업을 정립하면 반드시 종과 솥에 명(銘)을 새겼으니 그 아름다운 소리가 견고하여 후세 사람들의 이목을 고무시켰다. 또 사통팔달의 큰 도읍 한가운데에 아침저녁으로 종을 쳐서 백성들의 일하고 쉬는 시한을 엄하게 하니, 종의 쓰임이 큰 것이다.
종각(鍾閣) 경복궁 광화문 바깥 서쪽에 있다. 세조(世祖)가 큰 종을 주조하여 애초에는 사정전(思政殿) 뒤에 두고자 하였으나 여기에 종각을 짓고 종을 매달아 두어서 금군(禁軍)을 호령하고 정돈케 하였다. 신숙주(申叔舟)가 명(銘)을 지어 새겼다.
태평관(太平館) 숭례문 안에 있다.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관 뒤에 누각이 있다. 전후로 중국에서 온 조사(詔使)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읊은 시가 매우 많다.
모화관(慕華館) 돈의문 바깥 서북쪽에 있다. 본래 모화루(慕華樓)였는데, 세종 12년(1430)에 관(館)으로 개수하였다.
동평관(東平館)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다. 일본(日本)과 여러 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북평관(北平館) 동부 흥성방(興盛坊)에 있다. 조회 온 야인(野人)들을 접대하는 곳이다.
독서당(讀書堂) 예전 폐기된 용산사(龍山寺)로, 강 북쪽 언덕에 있다. 강정왕(康靖王 성종)이 개축하여 당을 만들어서 홍문관 유신들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장소로 삼았다. 공희왕(恭僖王 중종) 10년(1515)에 두모포 남쪽 언덕 위로 옮겨 지었다.
남별관(南別館) 중부 □□방에 있다.
제천정(濟川亭) 한강 나루 북쪽 기슭에 있다. 국초에 정자를 지었는데 그 나루를 굽어보고 있으므로 ‘제천’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조사가 올 때마다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고 이어서 한강에 배를 띄워 놀았는데, 중국 사신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은 시가 정자 위에 많이 새겨져 있다. ○ 명나라 장녕(張寧)의 시에,
동국 땅에 높다란 누각 있는데 / 東國有高樓
누각 앞엔 한강수가 흘러가네 / 樓前漢水流
광채는 화려한 배에 어른거리고 / 光搖靑雀舫
그림자는 물새 노는 강가에 떨어지네 / 影落白鷗洲
먼 곳 바라보니 하늘이 다한 듯하고 / 望遠天疑盡
허공에 떠 있어 땅이 떠오르는 듯하네 / 凌虛地欲浮
팔방 창문에 바람과 볕이 좋아서 / 八牕風日好
자리에서 내려오려다 거듭 머뭇거리네 / 下榻重淹留
봄물은 오리 머리처럼 새파랗고 / 春水鴨頭綠
새벽 산은 소라 뿔처럼 푸르네 / 曉山螺髻靑
끊어진 구름은 먼 산에 의지해 있고 / 斷雲依遠岫
외기러기는 긴 물가에 사라지네 / 孤雁沒長汀
이역 땅에서 나랏일에 치이고 / 異域傷靡盬
밝은 시대에 홀로 깸이 우습구나 / 明時笑獨醒
무슨 인연으로 홀연히 이곳에 왔는지 / 何因忽來此
시 생각으로 하늘에 오를 듯하네 / 詩思入蒼冥
길은 멀어 오가는 거마가 적고 / 路遠輪蹄少
봄 깊어서 풍경이 훌륭하구나 / 春深景物多
안개 걷힌 산은 흡사 그림과 같고 / 煙開山似畫
바람 잔 물결 마치 비단 같구나 / 風澹水如羅
즐거운 일에다 좋은 때 만나니 / 樂事酬佳節
맑은 술에 호탕하게 노래 부르네 / 淸尊發浩歌
옛날부터 문물이 번성한 곳이라 / 由來文物地
이르는 곳곳마다 잘도 지나가네 / 隨處好經過
하였다.
낙천정(樂天亭) 전관교(箭串郊) 동쪽, 신포(新浦) 북쪽 기슭에 있다. 태종(太宗)이 명하여 건립한 것이다. ○ 변계량(卞季良)의 기문에 “낙천정은 우리 상왕(上王 태종) 전하께서 가끔 노닐던 장소이다. 전하께서 재위한 지 19년째 되던 해에 주상 전하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농사가 한가한 때를 틈타 동교(東郊)로 나가 노닐었다. 그곳에 대산(臺山)이라고 하는 언덕 하나가 둥그렇게 높이 솟아 마치 솥을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그 위에 올라가 사방을 돌아보면, 큰 강물이 못을 휘감고 서로 뒤섞여 굽이쳐 흐르는가 하면 연이은 산봉우리와 첩첩 쌓인 높은 산이 번갈아 층층이 드러나서 대산을 둘러싸고 조회하듯 모여 있어 그 형세가 마치 뭇 별들이 북극성을 에워싸는 것 같았다. 전하께서 이 언덕의 동북쪽에 이궁(離宮)을 건축하여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하고, 언덕 위에 정자를 지어 좌의정 박은(朴訔)에게 정자의 이름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박은이 《주역》 〈계사전(繫辭傳)〉에서 ‘낙천(樂天)’ 두 글자를 취하여 올렸는데, 이는 전하께서 행한 사실을 총괄하여 정자의 이름에다 그 의의를 담고, 또 오늘날의 즐거움을 기록한 것이었다.” 하였다.
화양정(華陽亭) 살곶이[箭串]에 있다. 세종 때에 지은 것이다. ○ 유사눌(柳思訥)의 기문에 “화산(華山)의 동쪽 한강 북쪽에 들판이 있으니, 토지가 평평하여 길이가 10여 리나 이어져 있으며 뭇 산이 빙 둘러싸고 내와 못이 얽혀 감돌고 있다. 태조께서 도읍을 정한 초기에 그곳을 목장으로 삼았는데, 임자년(1432, 세종14)에 주상 전하께서 사복시 제조 판중추원사 최윤덕(崔潤德) 등에게 명하여 낙천정 북쪽 언덕에 정자를 짓게 하였다. ‘천하의 누대와 정자가 모두 이름이 있는데 이 정자만 이름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고, 이어서 《서경》 〈주서(周書) 무성(武成)〉의 ‘화산 남쪽으로 말을 돌려보냈다.[歸馬于華山之陽]’라는 의미를 취하여 화양정이라 이름 지었다. 우리 태조께서 천명에 응하고 민심을 따라 새로운 국가를 건립하셨고 열성조가 계승하여 문무(文武)의 덕을 닦아 말을 돌려보내고 소를 방목하였으니 오직 지금이 그때인 것이다.” 하였다.
망원정(望遠亭) 양화도 동쪽 강안에 있다. 본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희우정(喜雨亭)이었다. 과거에 효령대군이 여기에 정자를 지었는데 세종이 서교(西郊)의 농사를 살피시고는 이 정자에 행차하였다. 당시 파종하는 시기라 가뭄을 근심하고 있는데 마침 정자에 올랐을 때 비가 내리니, 이 때문에 ‘희우정’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그 후에 정자가 무너졌는데 성종 때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다시 짓고 망원정이라고 이름하였다. 매년 상이 농사를 살피거나 수전(水戰)을 살필 때에 항상 이 정자에 행차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희우정〉 시 서(序)에 이르기를 “정자의 규모는 사치하지도 않고 초라하지도 않다. 화악이 뒤에서 굽어보고 있고 한강이 앞에서 일렁이고 있으며, 서남쪽으로 아득히 가물거리는 푸른 산봉우리가 구름 낀 하늘과 안개 자욱한 강 너머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한다. 강을 굽어보면 물고기와 새우를 낱낱이 헤아릴 정도로 맑고 돛단배와 모래사장의 새들이 궤안 아래로 왔다 갔다 하는데 맑은 바람이 불어오면 마치 날개가 솟아나 하늘에 오르는 듯 황홀하다.” 하였고,.
○ 김종직(金宗直)의 〈망원정(望遠亭)〉 시에,
강가에 집을 지어 먼 경치 한눈에 드니 / 結構鰲頭控遠形
팔창에 연이어서 새 병풍을 펼친 듯하여라 / 八窓迤邐展新屛
난간 앞엔 바다로 흐르는 양화도 흰 물결이요 / 檻前朝海楊花白
성곽 밖엔 하늘로 솟은 무악이 푸르구나 / 郭外攙天毋嶽靑
저자에서 사람 돌아가니 화려한 배 저어 가고 / 小市人歸撑畫舫
먼 하늘에선 학이 내려와 물가에서 퍼덕이네 / 遙空鶴下颭回汀
그 옛날 어가가 거둥하여 농사일 살폈으니 / 翠華昔日曾觀稼
여기가 바로 서교의 희우정이라오 / 此是西郊喜雨亭
천지는 넓고 넓어 아득히 끝이 없는데 / 乾坤納納莽難窮
작은 누대에서 취한 늙은이 축수하네 / 一片樓臺壽醉翁
땅은 봉성과 연접하여 안개 낀 숲 어우러졌고 / 地接鳳城煙樹合
강물은 큰 바다로 들어가 사신길이 통하네 / 江輸鯷壑海査通
고기잡이 노래 간드러지니 비주객이요 / 漁歌嫋嫋悲珠客
임금의 글씨 휘황하니 쇠뇌처럼 공교롭구나 / 宸翰煌煌伏弩工
응당 초야의 사람이 노를 저어 오거든 / 應有野人來撥棹
악군이 달밤에 향기로운 이불을 덮어 주리 / 鄂君香被月明中
하였다.
영복정(榮福亭) 서강(西江) 북쪽 강안에 있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별장이다. 세조가 일찍이 행차하였을 때 손수 ‘영복’이라는 두 자를 써서 정자의 편액으로 삼고, 이어서 “일세를 영화롭게 하고 백 년을 복되게 한다.[榮一世福百年]”라는 여섯 자로 그 의미를 풀이하여 하사하였다.
풍월정(風月亭)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안국방(安國坊)의 저택 서쪽 동산에 정자를 지었다. 강정왕(康靖王)이 친히 찾아와서 ‘풍월’이라는 두 자를 하사하여 편액으로 삼고 여섯 수의 시를 지어 문신들에게 화답하게 하였다.
황화정(皇華亭) 두모포(豆毛浦) 북쪽 강안에 있다. 연산군이 이 정자를 지어서 놀러 다닐 곳으로 삼았다. 중종 때 제안대군(齊安大君)에게 하사하였다.
대은정(戴恩亭) 도성 남쪽 10리의 한강 서쪽 언덕에 있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정자이다.
능원정(綾原亭) 대은정 오른쪽에 있다. 본래 유희발(柳希發)의 월파정(月波亭)인데, 후에 능원대군(綾原大君)이 그 터를 넓혀서 다시 지었다. ○ 본조 허적(許𥛚)의 시에,
높은 누각을 층진 바위 위에 새로 지었는데 / 高樓新架層巖上
잔잔한 호수 굽어보니 고요해 흐르지 않네 / 俯壓平湖澹不流
저도의 새벽빛이 멀리 물가에 떠오르고 / 楮島初暉浮遠渚
상림의 저녁놀이 긴 모래섬 둘러싸네 / 桑林晩靄鎖長洲
신선 경치 이 안에 있나 도리어 의아하더니 / 却疑眞境區中在
인재는 세상 밖에서 구한다는 말 비로소 미덥네 / 始信朝英物外求
고요히 안개 낀 강 바라보며 물고기 새와 함께하니 / 靜對煙波伴魚鳥
세상의 부귀영화가 모두 덧없구나 / 世間榮樂總悠悠
저물녘 돌아가던 배를 한강 모래밭에 정박하고 / 歸橈晩駐漢江洲
홀로 높은 누각에 올라 푸른 강물을 굽어보네 / 獨上危樓俯碧流
거센 바람에 풍이가 북을 치며 춤추고 / 風急馮夷檛鼓舞
저녁놀에 신녀가 구슬을 희롱하며 노네 / 日斜神女弄珠遊
서산의 붉고 푸른 산은 찬 달빛에 흐릿하고 / 西山紫翠寒光曖
북쪽 물가 자욱한 안개에 어둠이 떠 있네 / 北渚雲煙暝色浮
도성을 돌아보니 사람들은 소란스러운데 / 回首鳳城人擾擾
푸른 창은 적막하니 깊은 가을에 잠겨 있네 / 綠窓寥寂鎖深秋
하였다.
우역(郵驛)
노원역(盧原驛) 흥인문(興仁門) 밖 4리에 있다.
청파역(靑坡驛) 숭례문(崇禮門) 밖 3리에 있다.
○ 이상의 두 역은 병조에 직속되어 있다.
보제원(普濟院) 흥인문 밖 3리에 있다. 누각이 있어 기로들이 이곳에 모여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조말생(趙末生)의 서문이 있다.
홍제원(洪濟院) 도성 서쪽 8리에 있다. 누각이 있으니 중국 사신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다.
이태원(利泰院) 목멱산(木覓山) 남쪽에 있다.
전관원(箭串院) 전관교(箭串橋) 서북쪽에 있다.
관량(關梁)
사현애(沙峴隘) 도성 서쪽에 있다. 세속에서 사현(沙峴)이라고 부른다. 북쪽으로 인왕산(仁王山)과 연이어 있고 남쪽으로는 무악(毋岳)과 이어져 있는데 중간에 길 하나가 바로 성곽 밖 관애(關隘) 지역과 통한다. 명나라 동월(董越)이 지은 《조선부(朝鮮賦)》에 “홍제원(洪濟院)에서 동쪽으로 몇 리 가지 않아서 하늘이 만든 관애가 하나 있는데 남쪽과 북쪽이 모두 산으로 막혀 있고 가운데로 기마 하나가 통행할 정도이니 더할 수 없이 험한 지역이다.” 하였다.
광통교(廣通橋) 대광통교와 소광통교 두개가 모두 도성 안 종루(鍾樓) 남쪽 거리에 있다.
혜정교(惠政橋) 종루 서쪽 거리에 있다. 혜정교의 동쪽에 앙부일구대(仰釜日晷臺)가 있다.
통운교(通雲橋) 종루 동쪽에 있다.
연지동교(蓮池洞橋) 통운교 동쪽에 있다.
동교(東橋) 연지동교 동쪽에 있다.
광제교(廣濟橋) 광통교 동쪽에 있다.
장통교(長通橋) 광제교 동쪽에 있다.
수표교(水標橋) 장통교 동쪽에 있다. 다리 서쪽 수중에 돌을 세워 척촌(尺寸)으로 숫자를 새겨 표시하였으니, 무릇 비가 내릴 때 물의 깊이를 알기 위한 것이다.
신교(新橋) 수표교 동쪽에 있다.
영풍교(永豐橋) 신교 동쪽에 있다.
대평교(大平橋) 영풍교 동쪽에 있다.
○ 이상의 다리들은 모두 도성 가운데 있는데 개천에 걸쳐 있다.
영도교(永渡橋) 흥인문 밖 2리에 있는데 개천 하류에 걸쳐 있다. 다리 머리에 ‘영도교’ 세 자를 새긴 비석이 있다.
제반교(濟盤橋) 도성에서 15리 떨어진 살곶이[箭串] 들녘에 있다.
홍제교(洪濟橋) 도성 서쪽 10리 홍제원 옆에 있다.
삼전도(三田渡) 도성에서 30리 떨어진 광주(廣州)와의 경계에 있으니 바로 한강 나루터이다. 도승(渡丞) 1명을 배치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기찰하였다.
한강도(漢江渡) 예전에는 사평도(沙平渡)라고 불렀고, 세속에서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 부른다. 도성 동남쪽 10리 목멱산 바깥쪽에 있다. 도승 1명을 배치하였다. ○ 본조 김세렴(金世濂)의 시에,
강 머리 군함에 청룡 깃발 빽빽하니 / 江頭舸艦簇靑龍
예로부터 긴 나루는 사방을 제어했네 / 從古長津控四衝
온종일 행인이 끊임없이 오고 가니 / 盡日行人來苒苒
늦봄 아지랑이에 푸른 물결 넘실거리네 / 暮春煙浪綠溶溶
하였다.
노량도(露梁渡) 또 다른 이름은 노량도(鷺梁渡)이다. 도성 남쪽 10리에 있다. 도승 1명이 있다. 그 북쪽 강안에 모래밭이 넓고 평평한데 요즘은 경군(京軍)이 훈련하는 장소가 되었다.
양화도(楊花渡) 도성 서쪽 14리에 있다. 도승 1명이 있다. 노량도와 함께 역시 모두 한강의 나루터이다. ○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의 시에서 “한강의 옛 나루를 양화라고 한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고적(古蹟)
북한산성(北漢山城) 삼각산 중흥동에 있다. 산꼭대기를 따라 걸쳐 있으면서 골짝 입구까지 와서 끝나는데, 석문의 둘레는 9400자이다. 바로 삼국 시대의 북한산성이니 세속에서는 중흥동석성(重興洞石城)이라고 칭한다. 가운데에 산봉우리가 솟아올라 있는 것이 노적가리와 같다 하여 ‘노적봉(露積峯)’이라고 부른다.
장한성(長漢城) 한강 가에 있다. 신라 때의 중요한 진영이다. 예전에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곳인데 신라인이 군사를 동원해 빼앗고 〈장한성가(長漢城歌)〉를 지어 그 공덕을 기념하였다. ○ 살펴보건대 지금의 광진(廣津) 가 아차산(峨嵯山) 동쪽 언덕에 한강을 굽어보는 옛 토성이 있는데 삼국 시대에 방수하던 곳이라고 전해 오니, 아마도 바로 이 성인 듯하다. 양주(楊州)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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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군〔丹陽郡〕
군명(郡名)
적성(赤城), 단산(丹山)
형승(形勝)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나다. 본조 이작(李作)의 기문(記文)에 “단양은 오래된 고을로서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나니, 그 맑고 깨끗한 기운이 반드시 거저 쌓였을 리가 없다.” 하였다.
일천 바위와 일만 골짜기가 있다. 신개(申槩)의 시에 “일천 바위와 일만 구학에 강줄기 하나가 감아 돌아 흐르고, 깎아지른 바위 벼랑을 따라 작은 길이 나 있다.[千巖萬壑一江回 斷石緣崖小徑行]”라고 하였다.
긴 강이 옷깃처럼 감싸고 있다.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긴 강이 옷깃처럼 감싸고 일만 산이 빙 둘러 있다.[長江襟抱萬山回]”라고 하였다.
호서(湖西)의 산수 가운데 은밀한 곳이다. 본조 허목(許穆)의 〈단양산수기(丹陽山水記)〉에 “이곳은 대개 호서의 산수 가운데 은밀한 곳이다. 강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물이 서리어 감돌며 굽이졌다 곧아졌다 하는데, 얕게 흐르다가 바위를 만난 곳은 여울이 되고 깊이 고여 있는 곳은 못이 되었다. 맑은 물결이 찰랑대며 끝없이 이어지고, 바위 벼랑 사이에 있는 돌다리와 모래사장은 모두 깨끗하고 고와서 사랑스러웠다.” 하였다.
산천(山川)
올산(兀山) 군 서쪽 2리에 있다. 혹 소유올산(所由兀山)이라고도 칭한다.
가은암산(可隱巖山) 옛날 이름은 가은암산(加隱巖山)이다. 군 서쪽 17리에 있다.
죽령(竹嶺) 군 동쪽 30리 경상도 풍기군(豐基郡) 경계에 있다.
건지산(乾止山) 군 남쪽 15리에 있다.
상악산(上嶽山) 군 서쪽 13리에 있다. 가은암산과 서로 이어져 있으며 매우 험하고 막혀 있다. 산꼭대기에는 돌우물이 2개 있는데, 가물면 이곳에서 비를 빈다.
여물진산(餘勿眞山) 군 동쪽 10리에 있다.
성산(城山) 군 북쪽 3리에 있다. 위에 옛 성이 있는데 둘레가 1760자이고 안에 큰 우물이 있다.
계두산(鷄頭山) 군 남쪽 20리에 있다.
소백산(小白山) 군 동쪽 35리에 있다. 경상도 풍기군에도 보인다.
두혈산(頭穴山) 군 남쪽 8리에 있다.
객산(客山) 군 북쪽 30리에 있다.
갑산(甲山) 군 북쪽 40리에 있다.
연비산(鷰飛山) 군 서쪽 10리에 있다. 높고 크고 몹시 험하며 상악산(上嶽山)과 마주 보고 있다. 가운데로 큰 내가 흘러 지나가는데, 바로 상진(上津)의 큰 물줄기이다.
금수산(錦繡山) 군 북쪽 20리에 있다.
가문현(加文峴) 매포현(買浦縣) 동북쪽 10리에 있다. 길이 몹시 험하고 막혀 있다. 영춘현(永春縣)에도 보인다.
오로봉(五老峯) 군 서쪽 20리에 있다. 세 개의 석봉(石峯)이 있는데, 물가에 임하여 우뚝 서 있어서 형세가 매우 빼어나다. 그 위 동쪽 봉우리를 오로봉이라 하고 가운데 봉우리를 현학봉(玄鶴峯)이라 하고 서쪽 아래 봉우리를 채운봉(彩雲峯)이라 한다. 옛날에는 모두 이름이 없었다가 가정(嘉靖) 연간에 이황(李滉)이 군수로 재직할 때 이름을 붙였다.
단구협(丹丘峽) 군 서쪽 20리에 있다. 양쪽에 벼랑이 마주 보고 우뚝 솟아 있는 형국이 10여 리 이어지고 그 가운데 한 줄기 강물이 흘러가는데, 험준한 바위가 층층이 쌓여 있고 맑디맑은 물이 넘실대며 흐르니 기이한 승경이 극에 달하였다. 예전에는 이름이 없었다가 성화(成化) 연간에 김일손(金馹孫)이 단구라고 이름 지었다. 고려 이색(李墻)의 시에 “새벽에 단양 쪽으로 길 가노라니, 자석병에 구름이 활짝 걷히었네.[曉向丹陽路 雲開紫石屛]” 하였으니, 바로 이곳이다.
선암(仙巖) 군 서쪽 20리에 있다. 옛 이름은 불암(佛巖)이고 본조의 이황이 선암으로 고쳤다. 또 기문을 지었으니 이르기를 “남천(南川) 가에 선암이 있으니 가장 기이하다. 옛 이름은 불암이다. 이 바위는 양쪽 산 사이의 붉은 절벽 아래에 있는데, 시냇가에 100여 보에 걸쳐 펑퍼짐하게 자리 잡고 있어 마치 흰 눈이 편평하게 덮이고 흰 방석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 같다. 모두 세 층이 되는데 그 사이로 물이 흘러 굽이돌며 세차게 흐르다가 아래층 아래로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 그 물이 합하여 하나의 못이 되었는데 초록빛의 맑은 물이 감상할 만하다. 못 위에는 석대(石臺)가 천연적으로 이루어져 평탄하고 반들반들하여 앉아서 고기가 노니는 것을 구경할 만하다. 그 동쪽에 여러 바위가 서로 기대서 있는 것이 마치 보기 좋게 담아 놓은 음식과 같고, 그 아래에 공간이 있어 집이 되었으니 비를 피할 만하다. 바위의 사방 가에는 봄이면 철쭉꽃이 타는 노을 같고 가을이면 단풍이 찬란한 비단 같으니, 이 바위는 참으로 진풍경 중에서도 진풍경이다.” 하였다. ○ 이황의 시 에,
층층의 하얀 돌이 흰 방석 포개 놓은 듯 / 白石層層疊素氈
귀신의 솜씨라 기교의 손질 부질없네 / 神工不待巧磨鐫
요란하게 떨어지는 운문의 물 가져다가 / 從敎吼落雲門水
대 아래 거울 만들어 찬 하늘 비추는구나 / 臺下寒開一鑑天
하였다.
상진(上津) 군 북쪽 13리에 있다. 혹 마진(馬津)이라고도 칭한다. 그 수원은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오는데 여기에서 청풍군(淸風郡) 경계를 거쳐 충주(忠州) 경계로 흘러 들어간다.
하진(下津) 군 서쪽 4리에 있으니, 바로 상진의 하류이다.
소요항탄(所要項灘) 군 서쪽 5리에 있으니, 바로 하진의 하류이다.
남천(南川) 일명 선암천(仙巖川)이다. 수원은 경상도 예천군(醴泉郡) 작성산(鵲城山)에서 나와서 군 남쪽 20리에 이르고 선암(仙巖) 아래를 지나 군 서쪽으로 흘러 들어가 이요루(二樂樓) 앞을 경유하여 하진에 합류한다.
북평천(北坪川) 군 북쪽 5리에 있다. 그 수원은 둘인데, 하나는 죽령(竹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풍기군(豐基郡) 유재(杻岾)에서 나오며, 장림역(長林驛) 앞에서 합류하여 상진으로 들어간다.
도담(島潭) 군 북쪽 24리에 있다. 한수(漢水)가 여기에 이르러 멈추어 모여서 못을 이루었다. 세 바위가 우뚝 서 있고 못 가운데는 절로 깊다. 물길을 거슬러 수백 보쯤 가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고 황양목(黃楊木)과 측백나무가 거꾸로 자라고 있으며 돌이 갈라져 생긴 동굴이 문과 같아서 바라보면 마치 별천지의 한 고을 같다. ○ 본조 이황의 기문에 “한강의 상류인 도담의 물굽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만력(萬曆) 연간에 이지함(李之菡)이 유람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내처 초가를 짓고 오래도록 살았다. 지금 터가 남아 있다. ○ 본조 이황의 시에,
어느 해 무슨 신물 운근을 옮겨다가 / 何年神物動雲根
절경의 한 중간에 큰 돌을 벌여 놓았나 / 絶境中間巨石開
만년이라 긴 세월에 물결 따라 아니 가고 / 萬古不隨波浪去
우뚝 서서 사군 오길 기다린 것 같네그려 / 巍然如待使君來
노 하나인 조각배를 물결에 맡기노라니 / 一棹扁舟放碧瀾
차가운 맑은 강 세 섬을 가로질러 가누나 / 橫穿三島鏡光寒
거슬러 올라 서쪽 벼랑 경치를 다 보자면 / 泝洄欲盡西厓勝
동편의 백옥 물굽이 끼고 가야겠는걸 / 須傍東邊白玉灣
하였다. ○ 본조 이안눌(李安訥)의 시에,
단양군 북쪽에 천 자 되는 못이 있고 / 丹陽郡北千尺潭
못 안에 바위 있으니 도암이라 하네 / 潭中有石名島巖
나란히 선 세 봉우리 푸른 옥 같으니 / 三峯騈立碧琬琰
신령의 도끼로 다듬은 듯 정교하다 / 如以神斧工鐫劖
그 가운데 한 봉우리 제일 기묘하니 / 其中一峯最奇絶
큰 자라가 이고 나온 듯 높고 험준하다 / 巨鰲戴出高巉巉
영묘한 못 맑디맑아도 바닥 보이지 않고 / 靈湫澄澈不見底
백번 닦은 능경이 옥함을 열고 나온 듯 / 百煉菱鏡開玉函
아마도 조화옹이 이름난 이곳 감추느라 / 意者造化閟名區
깊은 골짜기로 빗장 삼고 안개로 봉하였나 보다 / 洞壑作扃煙霧緘
솔숲 사이 오두막집 그 누가 사는지 / 松間矮屋誰氏居
마당 풀이 길을 덮어도 베는 사람 없구나 / 庭草沒蹊無人芟
내가 와서 묵으며 그윽한 흥취 실컷 푸노라니 / 我來投宿縱幽討
마음이 마치 고삐 재갈 벗은 준마 같구려 / 心若逸驥遺轡銜
짧은 노 저어 언덕까지 급한 물살 거슬러 오르면서 / 短棹搒岸泝奔湍
벼랑 문과 바위 구멍으로 움푹 들어간 곳 엿보네 / 門崖穴壁窺崆嵌
물길 따라다니다 어느덧 서산에 해 저무는데 / 沿洄不覺西日晏
시원한 바람 솔솔 돌아가는 돛배에 불어오네 / 涼風嫋嫋吹歸帆
계곡을 굽이돌아 산 입구를 나서니 / 溪回谷轉出山口
천지가 지척에서 선계 속계로 나뉘누나 / 乾坤咫尺分仙凡
하였다.
구담(龜潭) 강 안에 석봉(石峯)이 물에 잠겨 있는데 모양이 거북 같아서 이름이 붙여졌다. 깊고 넓은 못이 푸르고 맑기가 거울 같아서, 완연히 허공에 별개의 신선 세계가 있는 듯하다. 군 서쪽 20리에 있다. ○ 이황의 시에,
뭇 골짜기 동에서 나와 서쪽으로 내달리고 / 衆壑趨西出自東
협문의 성낸 기세 가로질러 뚫렸구려 / 峽門餘怒始橫通
격한 물결 붕운 위에서 얼마를 다투었던가 / 幾爭激浪崩雲上
거울 같은 맑은 못에 이제 겨우 들어가네 / 纔入淸潭拭鏡中
귀신이 갖가지 모양 새겨 산이 골격 드러내고 / 鬼刻千形山露骨
신선이 만 길에 노니니 학이 바람 타고 맴도네 / 仙游萬仞鶴盤風
은암이라 남녘 두둑 이끼 낀 저 낚시터는 / 隱巖南畔苔磯石
신령한 경지 흡사 무이구곡 같구려 / 靈境依然九曲同
하였다. ○ 이안눌의 시에,
사군은 산수가 좋은 고을인데 / 四郡山水鄕
구담 경치가 그중 제일이라 / 龜潭境最勝
우뚝 솟은 옥순봉에 / 矗立玉筍峯
가파른 산세 연이어 뻗어 나가네 / 奔峭相連亘
소리 내는 물줄기 그 아래에 모여들고 / 淙流匯其底
세찬 여울물 맑고 또 영롱하다 / 激湍淸且瑩
거룻배는 소용돌이 물살 따르며 / 鳴艚逐盤渦
넘실넘실 높은 흥을 돋운다 / 蕩漾發高興
서리 맞은 단풍이 층층의 벼랑 사이 끼어 있고 / 霜楓夾層巘
비 개니 가을 모습은 검푸른 빛을 띤다 / 雨霽秋容靘
고요한 산속이라 사람 소리도 끊어지고 / 地閴人語絶
바람 부는 물가에 그윽한 소리 가득하다 / 風灘滿幽聽
번잡한 속세 마음 가만히 씻다 보니 / 煩襟坐滌澣
세속에 물든 귀 그 또한 깨어났다네 / 俗耳亦云醒
석양이 푸른 벼랑을 내리비치니 / 返照下蒼壁
흰 물결 빛이 한없이 일렁이네 / 素浪光不定
뱃전 두드리고 노래하며 혼자 즐기는데 / 鼓舷歌自逸
메아리도 빈 계곡에 걸쳐 울려 퍼진다 / 響徹空谷應
절벽 따라 소나무 선 물가를 지나고 / 緣崖歷松澗
골짜기에서 쉬고 덩굴 숲길 찾아가네 / 憩壑訪蘿逕
어느 곳에서 신선을 배울거나 / 何處學仙子
가파른 비탈에 의지해 띳집 지었다 / 結茅依絶磴
신선의 책을 강하는 곳 멀리서도 아나니 / 遙知講玉書
달 뜨는 저녁 차가운 경쇠 두드리는 소리로다 / 月夕叩寒磬
구름 속 숲에선 향기로운 지초가 빼어난데 / 雲林秀芳芝
캐고 또 캔들 누구에게 주려는가 / 采采欲誰贈
서글피 바라보다 홀로 노 저어 돌아오니 / 悵望獨回棹
학 우는 시냇가 길은 이미 어두워졌네 / 鶴唳川路暝
하였다. ○ 이황의 〈단양산수기(丹陽山水記)〉는 다음과 같다.
“고을의 서쪽에 단구협(丹丘峽)이 있다. 협곡이 끝나는 곳에서 남쪽으로 들어가서 설마동(雪馬洞)에 당도하니, 골짜기 입구가 깊숙하고 길다. 동서의 돌벼랑에 붉은빛, 푸른빛이 마주 비치는 가운데 맑은 샘이 솟아나고 흰 돌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시내를 따라 몇 리가량 가다가 옥이 구르는 듯한 물소리가 다하면 벼랑이 끝나고 넓은 골짜기가 나타나는데, 깊숙하고 그윽하여 살기도 좋고 밭을 갈 수도 있으니, 은거하여 유유자적하게 지낼 만한 곳이다. 동쪽으로 장림역(長林驛)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구부러져 시내를 따라 들어가 10리쯤 가면 사인암(舍人巖)이란 것이 있으니 천석(泉石)이 매우 아름답다. 또 여기에서 남쪽으로 8, 9리를 가는데, 시내와 골짜기가 아름다워서 구경할 만한 곳이 많다. 북으로 매포(買浦)로 가는 중에 나루가 있으니 상진(上津)이라 한다. 그 아래에 석벽이 하늘에 닿고 그림자가 푸른 못에 거꾸로 비치는 곳은 이른바 서골암(棲鶻巖)이라는 곳이다. 나루를 건너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빙 둘러 들어가면, 큰 바위 세 봉우리가 물 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도담(島潭)이요, 또 서쪽 벼랑의 승경과 돌문[石門]의 기이함이 있다. 남천(南川) 가에 선암(仙巖)이라는 것이 있어 가장 기이하니, 옛 이름은 불암(佛巖)이다. 내가 전에도 찾아가 본 적이 있는데, 바위가 참으로 이경(異境) 중에 이경이다.
무신년(1548, 명종3) 여름에 내가 이첩(移牒)하는 일로 청풍군(淸風郡)에 가려고 하진(下津)에서 배를 타서 단구협을 나가 구담(龜潭)을 지나 화탄(花灘)에서 내렸다. 구름과 안개가 토하고 삼키매 언덕과 골짜기가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고, 불어난 물이 세차게 흘러 배가 너무 빨리 가므로 중요한 광경을 제대로 구경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청풍의 응청각(凝淸閣)에 유숙(留宿)하고 이튿날 새벽을 틈타서 배를 끌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삼지탄(三智灘)을 지났다. 내매담(迺邁潭) 가에 이르러 덤불을 걷어 내며 바라보니, 물이 두 골짜기 사이에서 나와 높은 데서 바로 쏟아지는데, 뭇 돌들을 부딪쳐 강타하며 성난 기세로 거침없이 퍼져 나가 구름 같은 파도가 일고 눈 같은 물보라가 치며 용솟음치니, 이곳이 화탄이다. 산봉우리는 그림같이 솟아 있고 골짜기는 서로 마주 보고 벌어져 있는데 물이 그 가운데에 괴어 있어서 너르고 짙푸르기가 마치 새로 닦은 거울 같고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으니, 여기가 구담이다.
화탄을 거슬러 나아가 남쪽 산 절벽 아래를 따라가면, 그 위에 여러 봉우리가 뾰족하게 죽순처럼 서 있는데 높이가 천 길 백 길이나 되며 우뚝하게 기둥처럼 버티고 서 있으니, 그 빛은 푸르기도 하고 희기도 하다. 등덩굴이며 고목(古木)들이 우거져 아득하고 침침한데 올려다볼 수는 있어도 오를 수는 없으니, 옥순봉(玉筍峯)이라 이름 지은 것은 그 형상으로 인한 것이다. 구담의 북쪽은 바로 적성산(赤城山) 한 줄기가 남으로 달리다가 갑자기 끊어진 곳이다. 거기에 큰 봉우리가 세 개 있는데 모두 물에 임해서 가파르게 솟아 있으며 가운데 봉우리가 가장 높다. 층층으로 된 바위가 다투어 빼어나고 우뚝우뚝한 돌이 서로 치받고 있어 마치 귀신이 새기고 깎아 낸 듯하니, 기기하고 괴괴함을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 이때에 산에 비가 갓 개어서 골짜기의 기운이 새롭고 경색(景色)이 맑고 고왔다. 마침 현학(玄鶴)이 가운데 봉우리에서 날아와 몇 바퀴 빙빙 돌다가 저 멀리 구름 낀 하늘로 들어갔다. 이에 나는 배 안에서 초연히 서늘한 바람을 타고 한만(汗漫)을 따라 노니는 기분이 들었다. 인하여 아래쪽에 있는 봉우리를 채운(彩雲)이라 이름하고 그 가운데 봉우리를 현학이라 하였으니, 그 보이는 대로 지은 것이고, 그 위쪽에 있는 봉우리를 오로(五老)라 하였으니 이는 그 형상에 따라 지은 것이다. 배를 저어 조금 올라가다가 방향을 꺾어 북쪽으로 가니 이미 가운데 봉우리를 지나 오로봉 아래에 배가 닿았다.
그 봉우리의 동쪽에 또 큰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단구협과 서로 접하고 있으니, 이른바 가은암산(加隱巖山)이며 가은성(可隱城)이 그곳에 있다. 물이 장회탄(長會灘)으로 흘러 서쪽으로 구봉(龜峯) 절벽에 부딪친 다음 모여서 구담의 머리가 되고, 또 북쪽으로 돌아서 서쪽으로 꺾여서 구담의 허리가 되고, 구담의 꼬리는 채운봉의 발치에서 다하였다. 가은봉(可隱峯)은 물이 북으로 돌아 서로 꺾어지는 굽이에 있고, 서쪽으로는 오로봉과 서로 마주하고 있다. 그 두 봉우리 사이에 골짜기가 있으니, 널찍하게 남쪽을 향해 뻗어 있는데 깊고 고요하여 사람의 자취가 사방 어디에도 없다. 동문(洞門) 밖에 큰 바위가 있는데 물에 닿아 있고 마치 집의 섬돌 같아서 낚시하며 놀 수가 있다. 오직 이 한 굽이에 여러 훌륭한 경관이 다 모여 있으니, 옛사람이 가은(可隱)이라 이름 지은 뜻이 여기에 있는가 보다. 그 구봉이라는 것은 동쪽으로 못의 파도를 받아 주고 북쪽으로 못의 굽이를 내려다보는데, 붉은 벼랑 푸른 절벽이 더욱 절경이다. 특히 이로 말미암아 이 못이 조성되었으므로 구봉이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여기를 지나서 단구협으로 들어가는데, 단구협의 승경은 탁영공(濯纓公)의 〈이요루기(二樂樓記)〉에 다 기록되어 있다.”
토산(土産)
옥석(玉石), 고을 동쪽 덕상동(德上洞)에서 난다. 청석(靑石), 고을 북쪽 약야촌(若也村)에서 나는데, 청금석(靑金石)과 비슷하나 금이 없다. 녹반(綠礬), 고을 북쪽 35리 평동(坪洞)에서 난다. 먹[墨], 품질이 가장 좋아서 단산오옥(丹山烏玉)이라 칭한다. 옻[漆], 잣[海松子], 대추[棗], 꿀[蜂蜜], 황랍(黃蠟), 오미자(五味子), 인삼(人蔘), 지치[紫草], 복령(茯苓), 시호(柴胡), 당귀(當歸), 안식향(安息香), 산무애뱀[白花蛇], 황양(黃楊), 송이버섯[松蕈], 누치[訥魚]
학교(學校)
향교(鄕校) 고을 남쪽 1리에 있다. 풍화루(風化樓)가 있는데, 영락(永樂) 14년(1416, 태종16) 지군사(知郡事) 이작(李作)이 세웠고 기문이 있다.
궁실(宮室)
객관(客館)
향사당(鄕射堂)
이요루(二樂樓) 군 서쪽으로 30보 거리의 남천(南川) 가 언덕 위에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누각 편액을 썼다. ○ 본조 김일손(金馹孫)의 기문은 다음과 같다.
“중원(中原 충주)에서 동쪽으로 가서 죽령(竹嶺) 쪽으로 향하노라면 그 사이에 즐길 만한 산수가 한두 곳이 아니다. 청풍 경계까지 다 가서 고개 하나를 넘어 단양 경계에 들어가면 장회원(長會院)에 이르는데, 들어갈수록 경치가 더 아름답다. 홀연 우뚝 솟아난 겹겹의 바위와 첩첩한 푸른 산봉우리가 나타나는데, 좌우가 구분되지 않고 동서가 헷갈려 비록 비상한 역상가(曆象家)라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벼랑이 열리고 골짜기가 열리면서 강물 한 줄기가 가운데로 흐르는데, 쪽빛 푸른빛 물결이 넘실댄다. 강 북쪽의 매우 험준한 언덕 위로 수백 보 가면 성(城)이 있어 숨을 만하므로 옛 이름이 가은암(加隱巖)이다. 내가 그 앞에서 말을 멈추자 연무(煙霧)가 자욱하여 아련히 난가(爛柯)의 생각에 빠지는 듯하였다. 이러한 절경이 아무 이름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비로소 이름을 지었으니 단구협(丹丘峽)이라 하였다. 단구협에서 동쪽으로 가면 산은 더욱 기묘하고 물은 더욱 맑다. 10리를 가면 계곡이 끝나는데, 마치 아름다운 아가씨와 헤어지는 듯이 열 걸음에 아홉 차례나 돌아보게 된다. 거기서 곧장 동쪽을 바라보면 적성(赤城)이 지척의 거리도 안 되고 강가에는 나루가 있는데, 작은 배로 가로질러 건너면 이곳이 바로 하진(下津)이다. 그 나루를 거슬러 올라가 10여 리쯤 가면 또 관도(官渡)가 있으니, 이곳이 바로 상진(上津)이다.
철벽 천 길이 나루의 물길을 누르며 버티고 있는데 혼이 떨려서 도저히 기어오를 수 없을 정도이니, 내가 서골암(棲鶻巖)이라 이름 지었다. 나루의 물은 강릉부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산골을 굽이굽이 돌아 서쪽으로 멀리 5, 6백 리를 흘러왔으니, 비록 가벼운 배라도 그 원류를 끝까지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되돌아 물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하진 못 미쳐서 한 시내가 남쪽으로부터 들어오니 옛 이름은 남천(南川)이다. 남천의 왼쪽 언덕에 누각이 나는 듯이 서 있는데 날이 이미 어두워져서 오르지 못하고 마침내 군의 객관에 투숙하였다.
다음 날 군수 황린(黃璘)이 누에 오르기를 청하므로, 드디어 함께 난간을 붙잡고 올라가 바라보니, 고갯마루의 구름이 상악산(上嶽山)에 연하여 있고, 가을빛이 금수산(錦繡山)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층층이 쌓인 첩첩 산봉우리가 한 누각을 에워싸고 있는데, 남천 물이 난간 밑에 콸콸 흐르고 상진의 물결이 숲속에 요란하게 모여들었다. 어제 말 타고 노 저으며 보던 것이 모두 술잔이나 궤석(几席) 사이에 들어와 있었다.
벽 사이를 보니, 비해당(匪懈堂)이 편액에 쓴 ‘이요루’라는 커다란 세 글자가 있는데,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처럼 찬란하게 빛나서 그 광채를 범접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마음이 흡족하고 즐거워서 황 군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오직 인자(仁者)라야 산을 좋아할 수 있고, 오직 지자(智者)라야 물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한갓 마음만 산수에 달려가면 스스로 속이는 일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대체 사람으로서 인(仁)과 지(智)의 천성을 갖추지 못한 이는 없겠지마는, 인과 지의 단서를 충실히 하는 이는 드뭅니다. 인과 지를 충실히 하는 것은 내 분수 밖의 일이 아닙니다. 산의 고요함을 체득하여 옮겨 가지 않고 물의 흐름을 체득하여 막힘이 없게 하여 한마음의 덕(德)을 편안히 하고 만물의 변화를 두루 살핀다면, 인과 지가 충실해져서 산과 물 이 두 가지를 참으로 좋아함을 내가 겸비하게 될 것입니다. 후(侯 황 군수)는 타고난 성품이 안온하고 조용한 데다 또한 이치에 통달하였습니다. 어버이 봉양을 위해 이 고을을 맡았으니, 이는 이미 어버이에게 인(仁)을 하여 그 효(孝)의 도로 백성을 가르쳐서 한 지역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얼마 되지 않는 백성을 부리며 척박한 토지에서 세금을 거두되 그 조치를 알맞게 하여, 장부 문서를 잘 따라 부세(賦稅)를 지공(支供)하였습니다. 또 남은 힘을 누대(樓臺)에까지 써서 무너지고 낡은 것만 수리하고 옛것을 그대로 두었으니, 후의 인과 지를 또한 볼 수 있습니다. 후가 여기에서 미루어 한층 곡진하게 하여 그 학문이 이치의 유행하는 극치에 다다름으로써 일삼는 바가 없음을 행한다면,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이 바로 나의 인ㆍ지와 한 몸이 될 것이니, 후는 힘쓰십시오.’ 하였다.
만일 술잔을 들고 악기나 타며 이곳에 올라 바라보는 것을 낙으로 삼아 다만 그 은연히 솟은 것은 산이요 묘연히 흐르는 것은 물인 줄만 알아서 그 빼어나고 맑은 것만을 기뻐할 뿐이라면, 또 장차 사 강락(謝康樂)같이 나막신을 만들어 신고 산을 깊이 찾고 맹동야(孟東野)같이 투금뢰(投金瀨)를 찾아 노니느라 공무를 폐기하여 두 가지를 좋아하는 뜻에 도리어 누가 될 것이다. 함께 오른 우리들도 어찌 서로 힘쓰지 않으리오.”
○ 본조 김내문(金乃文)의 시에,
고을은 깊디깊어라 푸른 강물이 안고 흐르고 / 洞府深深抱碧流
협 안에서 다시 보니 높은 누각 우뚝 서 있네 / 峽中還見起高樓
산봉우리 아스라이 세 섬을 둘러싸고 / 峯巒縹緲環三島
생학은 어렴풋이 십주로 내려온다 / 笙鶴依俙下十洲
물이 빠진 시내 굽이에 생선 가게 적고 / 水落溪灣漁店少
구름 피는 골짝 어귀엔 돌 숲이 그윽하다 / 雲生谷口石林幽
가을 깊어져 못 떠나는 강남의 나그네 / 深秋留滯江南客
오늘 아침 다 가도록 옛 수심 푸노라 / 盡向今朝洗舊愁
하였다.
장림역(長林驛)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인조(仁祖) 무인년(1638, 인조16)에 장림역의 땅이 함몰되었다. 처음에는 그 소리가 우레 치는 것처럼 요란하게 땅속에서 나더니, 갑자기 크게 함몰되었다. 살펴보니 마치 커다란 움 같았고 물이 그 안에서 솟구쳐 나왔다. 그 깊이를 끈으로 재어 본 결과 지상에서 수면까지가 5장(丈)이고, 물속은 바닥을 알 수 없이 깊었다. 그 땅을 보니 흙과 돌이 섞여서 백황색(白黃色)을 띠고 있었다.
고적(古蹟)
가은암 산성(可隱巖山城) 돌로 쌓았고 둘레가 3018자이다. 지금은 모두 무너지고 떨어져 나갔다. 안에 3개의 샘물이 있었다. 험준하므로 고려 말에 제천(堤川), 청풍(淸風) 및 이 군 사람들이 여기에서 왜적을 피하였다.
인용 한국고전종합db
첫댓글 고맙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서호와 동호가 현 중국 대륙에서 어디를 말함인가요?
"유사눌(柳思訥)의 기문에 “화산(華山)의 동쪽 한강 북쪽에 들판이 있으니,...."에서 화산은 현재 중악 화산을 말하는 것인가요?
사진은 대륙일까요 아니면 삼청동 세트장일까요..?
우리가 아는 삼년상의 일반화는 광무개혁(1897)이후로 알고 있었는데.....이미 초기부터 삼년상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기록이군요..중요한 내용입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