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삽화부터 텔레비전 만화영화까지
이도영, ‘남의 숭내’(‘대한민보’, 1909년 6월 17일 자)
<장한몽>과 번안
“저것 좀 보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저런 닭들도 부창부화(夫唱婦和)하여서 화목하게 세상을 지내는데 나는 무슨 혼신이 씌워서 그때에 그렇게 당신의 뜻을 거역했을까요.”
“그러한 것이 가위 이 세상을 지나갈 때의 파란이라 하는 것이지. 그런 생각을 다시 할 까닭이 없소. 우리가 인제는 일장춘몽을 늦게 깨달았으니 이후로는 세상에서 공익사업에 힘을 쓰도록 합시다.”
“나는 무엇이든지 하시는 대로, 시키시는 대로 따라갈 뿐이지요. 분골쇄신이 되기로 어찌 거역하오리까.”
대동강 부벽루에서 산책하던 이수일과 심순애의 길고 긴 꿈을 마무리하는 대화다. 이수일과 심순애는 분명 우리 이름이고 대동강과 부벽루도 우리 땅에 있지만, 이들이 등장하는 소설의 원작은 우리 것이 아니다. 개화기를 대표하는 번안 소설 <장한몽(長恨夢)>은 1913년에 ‘매일신보’에 연재되기 시작해 인기를 끌었다. 이 소설은 조중환(趙重桓)이 오자키 고요(尾崎紅葉)의 신문 연재소설 <곤지키야샤(金色夜叉)>와 연극 대본을 번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곤지키야샤> 또한 영국 작가 클레이(Bertha M. Clay)의 <여자보다 약한(Weaker than a woman)>을 번안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번안 순서에 흔히 마주치게 된다.
<장한몽>의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는 소설, 신파극, 유성기 음반, 드라마, 영화 등 여러 장르를 오가며 널리 쓰였다. 태평양을 건너 일본으로, 그리고 현해탄을 넘어 조선으로 바다를 두 번 건너오면서 소설에서 연극으로, 연극에서 소설로 그리고 영화로 번안되면서 변신을 거듭했다. 번안은 시공을 달리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장한몽>은 원작과 동일성을 유지하기보다는 ‘조선의 실정에 어울리는’ 새 저작물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 번안’ 태도를 취했다. 번안의 창의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기존 번안 소설과 다르다. <장한몽>에서 번안은 번역과 확연하게 갈라지게 되었다.
1910년대의 독서 대중은 이미 번안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번안 소설을 읽고 신파극에 눈물을 흘리며 탐정소설과 연애소설에 탐닉했다. 그리고 1920년대 신문과 잡지의 주요 독자층이 되었다. 1920년대 들어 일간신문이 대중화되면서 외국 서적의 번안뿐만 아니라 만화의 번안도 활발해졌다. 번안 소설과 신파극을 즐기던 1920년대 대중을 떠올리다 보면 1960년대 번안 가요를 듣고 부르던 대중이 그들과 겹쳐진다.
<여자보다 약한> 표지
세창사가 출간한 딱지본 소설 <장한몽>의 표지
<장한몽> 연재 1회(‘매일신보’, 1913년 5월 13일 자)
한·중·일 근대 만화의 기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만화는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 창간호에 실린 이도영(李道榮)의 삽화다.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에 그려진 이도영의 만화는 신랄한 풍자를 바탕으로 전통적인 그림의 풍모를 보여 주는데, 중국 만화의 영향을 받은 듯 말풍선이 열려 있다. 중국 만화는 설날 실내나 문을 장식하던 풍자적 그림인 연화(年畵), 글과 함께 구성된 여러 장의 그림인 연환화(連環畵), 일러스트집과 유사한 점석재 화보(点石斎画報)4)를 거쳐 벽보 만화로 발전했다. 식민지 이전 만화에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풍자를 바탕으로 민중 의식과 비판의식이 담겨, 직접적인 선전 매체의 성격도 있었다. 외세 침탈에 대항하는 중국 민중이 직접 그림을 그려 벽에 붙이던 벽보 만화는 형태가 특이한 매체였고, 신문에 실리는 만화는 가정으로 보급되는 벽보 만화 같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만화로 평가되는 이도영의 ‘대한민보’ 창간호 게재 삽화
목판화를 연상시키는 이도영의 만화
중국 만화와 이도영의 만화가 제국주의의 침탈에 대항해 저항적이고 풍자적인 성격을 강하게 띤 전통성을 가진 반면, 일본 만화는 19세기 말부터 서구 만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1877년에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 시사 풍자 잡지인 ‘마루마루친분(団団珍聞)’이 창간되었다. 영국의 ‘펀치(PUNCH)’와 미국의 ‘퍽(PUCK)’ 등 서구 만화 잡지를 참고해 만든 이 잡지는 에도 시대와 다른 서구의 카툰 형식 만화를 연재했다. 외국 풍자만화 잡지의 표지 디자인과 체계, 아이디어를 차용하기도 했다.5) 1905년에는 일본 최초의 컬러 만화 잡지 ‘도쿄퍽(東京パック)’이 창간되었다.
영국 만화 잡지 ‘펀치’의 표지(1916년 4월 26일 발행, 150호)
미국 만화 잡지 ‘퍽’의 표지
‘마루마루친분’ 창간호 표지
'도쿄퍽’ 창간호 표지
유머에서 풍자까지
1920년대의 신문 연재만화의 중심에는 미국 코믹스를 번안한 코믹 만화가 있었다. ‘조선일보’는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김동성(金東成)이 기획한 ‘멍텅구리 헛물켜기’를 1924년부터 500회 이상 연재해 인기를 끌었다. 그는 미국 작가 맥머너스(George Mcmanus)가 1913년부터 연재물로 제작한 ‘아버지 돌보기(Bringing up Father)’라는 작품의 캐릭터를 참조했는데, 이 작품은 건설 노동자였던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 ‘지그스’가 경마로 거부가 되어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이 주요 내용이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지그스’와 그의 부인 ‘매기’의 이름을 따서 ‘매기와 지그스’로 더 알려졌다. 이를 참고한 ‘멍텅구리 헛물켜기’는 재산가 최멍텅과 미모의 기생 신옥매, 그리고 이 둘 사이를 농락하는 윤바람이 등장해 ‘우습고 재미있는 헛물켜는 그림 이야기’를 엮어 나갔다.
‘아버지 돌보기’(1920년 1월 31일)
‘멍텅구리 헛물켜기’(‘조선일보’, 1924년 10월 13일 자)
한편 ‘시대일보’는 1924년에 미국 국제통신사와 특약을 맺고 ‘엉석바지’를 연재했다. ‘엉석바지’는 번안 만화라기보다는 번역 만화인 셈이다. ‘조선일보’의 ‘멍텅구리 헛물켜기’가 인기를 끌자 ‘동아일보’는 1925년에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안석영(安夕影)을 채용해 본격적으로 코믹스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의 ‘허풍선이’ 시리즈는 독일 작가 라스페(Rudolf Erich Raspe)의 소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Die Abenteuer des Baron Münchhausen)>을 원작으로 했다.6) 이 소설은 1913년에 신문관에서 ‘허풍선이 모험기담’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기도 했다. 멍텅구리의 바보 같은 우스개에서 허풍선이와의 연애, 모험과 기담으로 소재가 바뀌었다. 결국, 1920년대 일간신문에 실려 인기를 모은 번안 코믹 만화들은 시사 풍자보다 재미나 유머에 치중했다.
‘엉석바지’(‘시대일보’, 1924년 3월 31일 자)
‘허풍선이 모험기담’(‘동아일보’, 1925년 1월 23일 자)
만화는 소설과 더불어 번안이 쉬운 매체였다. 그림과 말풍선을 거치면 다른 창작물이 되었다. 코믹스나 신문 만평, 만문 만화라는 장르는 번안을 통해 쉽게 대중에게 다가가는 길을 열었다. 최초의 자칭 만화가였던 일본의 오카모토 잇페이(岡本一平)7)는 당대의 세태를 희화적으로 묘사한 그림에 짧은 글을 붙여 ‘만화 만문(漫画漫文)’이라는 형식을 만들어 냈다. 이런 형식이 조선에도 유입되었다.
‘조선일보’가 신춘문예 현상 모집 공고에서 ‘1930년을 회고하거나 1931년의 전망이거나 시사, 시대, 풍조를 소재로 하되, 글(文)은 1행 14자 50행 이내’라는 만문 만화 형식을 명시했다. 만문 만화는 단편소설, 시, 학생문예, 소년 문예와 함께 문예의 한 장르가 될 만큼 유행했다. 안석영이 이를 조선에 처음 도입했는데, 1930년대 신문과 잡지를 통해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안석영와 오카모토 잇페이의 만문 만화는 ‘모던’ 세태를 주로 다루었다.
식민지 시기의 번안은 외국 창작물뿐만 아니라 고전 작품을 바탕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특히 김규택(金奎澤)이 조선의 고전을 코믹하게 재해석해 근대적 장르인 만화 번안의 독자적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안석영이 근대화된 도시 경성의 세태를 풍자했다면, 김규택은 ‘모던 춘향전’에서 고전소설 <춘향전>을 소재로 만화의 스타일을 근대화하는 작업 방식을 선보였다. 고전을 당대에 어울리게 번안한 김규택은 고전소설의 구조와 현실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며 당대 세태를 풍자했다.
오카모토 잇페이의 ‘조선만화행(朝鮮漫画行)’ (1) 부산(‘도쿄아사히신문’, 1927년 8월 2일 자
안석영의 ‘가상소견’ (4) 사탄(‘조선일보’, 1928년 2월 10일 자)
김규택의 ‘모던 춘향’ (1) (‘제일선’, 1932년 11월호)
텔레비전과 더빙
1930년 이후 30년이 지난 1960년대는 또 다른 번안 문화의 시대였다. 1960년대 중반 동네 만화방을 석권하던 ‘철인 28호(鉄人28号)’라는 만화가 있다. 주인공 불똥이가 조종하는 철인 28호가 박카스라는 나쁜 로봇과 싸우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신간이 나오길 기다렸다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만화방에 달려가서 보던 어린 시절에 이것이 일본 만화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철인 28호’는 요코야마 미쯔테루(横山光輝)가 1958년에 연재하기 시작한 일본 만화다. 한편 ‘철완 아톰(鉄腕アトム)’은 일본 후지TV가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일본 최초로 제작해 방영한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인데, ‘우주소년 아톰’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방영되었다. 그 밖에도 ‘황금박쥐(黄金バット)’, ‘요괴인간(妖怪人間ベム)’ 등 많은 일본 만화영화를 한국 텔레비전에서 출처를 분명히 하지 않은 채 방영했다.
이미지 목록
만화가게에 모여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경향신문’, 1966년 2월 23일 자)
미국 드라마 ‘전투’의 신문광고(‘경향신문’, 1965년 1월 13일 자)
1960년대 중반 한국에 일본과 미국 문화가 텔레비전을 통해 유입되었다. “현재 서울 시내에는 1천여 개의 만홧가게가 있다. 만홧가게가 주택지로 파고들어 가고 있다. 만화를 10원어치 보면 저녁에 한 시간 이상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티케트를 만든다는 것이다.”8) 텔레비전에서는 미국 드라마를 방영하고, 일제강점기의 까까머리는 여전히 강요되며, 일본 만화를 그대로 베낀 만화는 한국 작가의 이름을 달고 인기를 누렸다.
일본 만화가 말풍선만 날림 번역되어 한국 만화로 출판되었듯이, 일본 만화영화는 목소리만 다시 녹음해 한국 만화영화인 양 방영되었다. 더빙은 만화의 말풍선 같았다. 말풍선 속 한글처럼 더빙된 성우의 목소리는 외국 드라마와 일체감을 더하는 번안 구실을 해냈다. 프로레슬링과 인기 드라마가 방영되는 날은 만홧가게가 붐볐다. 당대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은 미국 드라마 ‘전투(Combat!)’였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는 미국 방송사 ABC가 1962년 10월 2일부터 1967년 3월 14일까지 방영했다. 일본에서는 TBS에서 더빙을 통해 1962년 11월 7일부터 1967년 9월 27일까지 방송하며 인기를 얻었고, 한국에서는 동양방송이 1964년 12월 27일부터 1967년 11월 12일까지 방영했다. 한국말 더빙은 아마 일본판의 더빙 방식을 참조했을 것이고, 그것이 한국식 더빙 말투로 자리 잡았으리라고 본다.
요코야마 미쯔테루의 ‘철인 28호’ 중 한 장면
텔레비전용 만화영화 ‘철완 아톰’의 한 장면
더빙은 외국어의 느낌과 외국인의 감성을 한국어로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더빙의 독특한 말투가 만들어졌다. 외화 더빙은 목소리의 번역으로서 단순히 대사만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원본의 목소리를 한국식으로 바꿔 세세한 느낌을 전달하는 이중 번역이다. 더빙은 글이 아니라 말을 번역하기 때문에 글 번역보다 번안의 여지가 더 크다. 부가된 요소인 목소리를 통해 전달할 느낌을 표현해야 한다. 더빙의 전성기는 1960년대 텔레비전 외화 프로그램의 범람기였다. 자체 제작 능력이 달리던 시기에 수입한 외화에 유일하게 덧붙일 수 있는 한국적 감성이 더빙이었다. 대체로 1980년대 말 이후 더빙은 점차 자취를 감춘다. 자막이 더빙을 대체하는 시기는 기울어진 문화 수용에서 형식적으로나마 균형점이 마련되기 시작하는 지점일 것이다.
저자 백욱인 |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미디어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전방위적으로 분석해 온 연구자로서 한국의 근대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아이템 ‘번안물’을 통해 한국 근대를 꿰뚫어보고자 한다.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은 책으로 《인터넷 빨간책》, 《디지털이 세상을 바꾼다》, 《한국사회운동론》, 《정보자본주의》, 《디지털 데이터·정보·지식》, 《컴퓨터의 역사》, 《속물과 잉여》(편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