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지금부터 내 임무는]
신입인 내게 첫 지령이 떨어졌다. 임무는 이 아이의 꿈 속에 들어가는 것. 들어가기만 하면 끝인가? 그런 생각이 끊임 없이 밀려든다. 미션이라든가 과제라든가 하는 것이 분명 있어야 하는데... 이상한 일이다. 아무튼 사수 없이 꿈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긴장이 되었다. 여주야 잘하자 제발. 사수의 잔소리가 귓가에 아직도 맴도는 듯하다. 이 아이의 이름은 박지성. 나이는 23살. 아직 덜 익은 풋내가 난다. 꽤 귀엽다. 사실 내가 인간이었다면 곧바로 고백했을 지도 모른다. 어떤 행복한 꿈을 꾸는지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봉긋 솟아오른 광대, 약간은 발그레해진 볼.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어댄다. 이래도 되나? 심장부근에 손을 올리고서 진정하자. 진정하자. 여러 번 되뇌어 봤지만....효과는 전혀 없었다. 현재 시각은 새벽 5시... 이 아이는 주로 4시경 잠들기 때문에 지금 꿈에 들어가는 것이 적시였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얘야, 네 꿈 훔쳐볼 거라서 미안해."
듣지도 못할 아이에게 그런 말을 남기고서 꿈 속으로 들어갔다.
.
.
.
들어가는 꿈마다 시점은 제각각이었다. 꿈을 꾸는 본인이기도, 관찰자 시점이기도 했다. 이번 꿈은 제3자 시점인 듯 했다. 내가 이 아이의 꽤나 가까운 사람인 듯 싶다. 참고로 꿈에서는 나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다. 꿈을 꾸는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이뤄지며 우리는 그 속에서 주어진 과제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그 실마리를 가지고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다. 하지만.......나는 이번 과제의 ㄱ자도 듣지 못했다. 분명 있어야 하는데. 이상한 일이다. 정말 꿈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단 말이야? 그게 과제라면 누워서 떡 먹기, 식은 죽 먹기였다. 과제는 누군가의 소망이다. 그 소망을 우리가 이뤄주는 것이고. 하지만 소망이......'박지성의 꿈 속에 들어가기'가 정녕 끝이란 말인가. 임무로 머릿속이 복잡할 때였다.
"할 거 없어서 이렇게 누워있는 거야?"
"아니, 할 거 많아."
"할 거 많으면 얼른 일어나야지."
나는 아이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는 둘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묻어있다. 잠에서 막 깬 듯 웅얼거리며 답하는 모습이 귀여웠는지 내가 아이의 볼을 꼬집고 턱을 쓸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아무래도 나....이번 꿈에서 얘 여친인가 봐. 이렇게 대리만족해도 되는 거야? 정말? 물어볼 사수가 없음에도 내 물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 때 아이가 내 팔을 확 잡아 끌었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시선을 마주했다. 아니 선배 이거 임무 맞아요? 얘가 아니라 내가 일하는 중인 거 맞냐구요. 이게 일이면 나는 24시간도 일할 수 있었다. 아 그러면 누군가 24시간을 자야하는 건가. 그건 좋지 않은 징후이니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야겠다. 뽀얀 피부와 오똑한 코, 통통한 입술까지....근데 입술 모양 지짜 귀엽다. 작품 감상하듯 아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감상했다. 얘 진짜 잘생겼네. 귀여운데 잘생겼어.
"잘생겼지."
"어? 그게 들려??"
"진짜야?"
아이가 푸흐흐 웃었다. 진짜인 줄은 몰랐나보다. 장난을 내가 또 진담으로 받아들였네.....아니 잠깐만.
"박지성....?"
"응, 왜."
뭐야 이거. 내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어야 하는데...
"....."
"왜 그래?"
말문이 막혀 아무말도 하지 못할 때였다.
"그냥.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어."
내 의지가 아닌 말이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맞는지 확인을 해 봐야 하는 건가. 혼란한 내 머릿속을 알리 없는 아이는 그런 나를 꼭 끌어안았다. 아 진짜 너 너무 좋아.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 손은 얼마나 큰지 한 손으로 내 머리를 다 감싸안을 정도였다. 닿은 가슴팍에 아이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대로 전해져왔다.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시험해보기 위해서.
"진짜 손 크다 너."
"어?"
하....망했다. 내 의지대로 말이 나오잖아. 심지어 행동까지 따라준다. 가슴팍에서 얼굴을 떼어내고서 아이의 얼굴을 바라본 나다.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선배, 이런 게 된다는 말은 없으셨잖아요. 미치겠네 진짜. 그런데 마주본 아이의 표정이 심상찮다. 뭐라도 말하려 했는데....그 표정에 할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질 않는다.
"...."
"뭐야."
"...."
"또 꿈이에요?"
........................망했다. 되게 자연스러운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난 지금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고심해봐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적에서 이미 답이 나왔다. 정적은 꿈이 맞다는 반증이었다. 또 꿈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적어도 나만 걸린 것은 아니다. 이 사실에 안심하고 있는 나는 진짜 답이 없다. 어색한 미소만 짓는 나를 보며 아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도 같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무래도 생판 모르는 남이랑 침대에 누워있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아마 이 아이도 그렇게 생각해서 일어난 거겠지. 그런데 불쑥 내 얼굴 가까이 고개를 들이민다.
"어딨어."
"예..?"
"이번엔 또 누구예요."
눈은 마음의 창이자 영혼의 창이라고 그랬다. 그래서 눈을 들여다보는 것일까. 근데 당황스러우면서도 좋았다. 잘생긴 얼굴은 코앞까지 들이밀어도 굴욕이란 게 없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이딴 생각만 하다니. 선배 죄송해요. 일 말아먹은 놈 치고는 심히 기쁜 모양새였다. 하지만 바라본들, 그 안의 영혼을 본들 이 아이는 누군지도 모를 텐데. 어차피 보이는 거라곤 눈동자에 비친 자기 모습뿐일 텐데. 그러나 난 그런 말을 내뱉을 만큼 당당하지 못했다. 그저 횡설수설하며 말끝을 늘일 뿐이었다.
"....어, 그게..."
"...."
"하하..."
눈동자만 도륵도륵 굴리자 아이는 고개를 뒤로 물렀다. 그....제가 여기서 나가드릴까요..? 볼품없는 질문이나 했다. 아이는 팔짱을 끼고서 순서대로 왼볼, 오른볼에 바람을 넣었다. 잠깐 고민하는 듯 싶더니. 그러면 저도 같이 깨는데 그건 싫어요. 단호하게 말했다. 뭐야 선배들 대체 몇 번을 들킨 거예요. 저도 모르는 걸 왜 얘가 알죠? 아무래도 이 아이는 여자친구를 꽤나 좋아하나 보다. 꿈 속에서도 계속 보고 싶어하는 걸 보면.........아 부럽다 진짜 청춘이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아이에게 물었다. 꿈을 꾸는 사람이 꿈임을 자각해버렸으니 나는 이제 내 의지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처럼 절로 말이 나오고, 절로 행동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
"...."
"아이야...?"
결국 정적을 참지 못하고 속으로만 불러대던 호칭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순간 아차싶었다. 절차상 본명으로 불렀어야 했는데. 뒤늦게 입을 막았지만.....이미 늦었다. 앞으론 마음속으로도 본명으로 불러야겠어. 박지성. 박지성. 박지성. 약간 찌푸려진 지성의 미간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던 나는 변명을 덧붙이려 했다.
"그...지성아 그게....."
"...."
"...."
근데 뭐라고 변명하지. 속으로 계속 아이라고 불러서 습관적으로 말도 그렇게 내뱉었다고 해? 아니 이상한데 좀. 말을 내뱉기 전에 생각이란 걸 먼저 했어야 했는데. 이미 운은 띄운 채였다. 결국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박지성을 바라봤다. 박지성은 피식 웃더니 그런다.
"그냥 아이라고 불러요."
그러더니 나한테 데이트나 하잰다. 내가 왜?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계탔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내가 박지성의 여친이란 말이다. 내 취향의 아이와 언제 이렇게 데이트를 해보겠어. 누군가는 사심 가득하다고 혀를 내두를지 모르지만. 나한텐 소중한 기회였다. 물론 아까와 같은 그런 달달한 표정을 다시 볼 순 없겠지만......아까와 같은 말과 포옹도 더이상 없겠지만........................아. 시험 따위 하지 말 걸. 내 자아 없이 굴었어야 했는데. 이번 기회로 알았으니 다행인가. 눈물을 머금고 앞으로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눈을 감았다 뜨니 수평선과 맞닿은 듯한 구름과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아이는 날 바다로 데려왔다. 해변가도 아닌 유람선 위. 낭만도 있었네.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풍경을 구경했다. 그러다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는 모습에........나는 그 아이를 아이라고 부르기가 잠깐 망설여졌다. 그런데 표정이 펴질 줄을 모르네. 동시에 꿈 속에 들어오기 전 보았던 아이의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괜히 마음이 속상해진다. 그렇게 예쁘게 웃을 줄 아는 아이인데.
"아이야, 무슨 생각해요."
"뭐, 그냥요."
"그냥이 어딨어요."
그런 내 물음에 여깄다고 맞받아치는 아이다. 나는 임무에 없던 과제를 부여하기로 했다. 아이를 웃게 만들기. 그걸 난 꼭 봐야겠다.
"아이야, 넌 이게 데이트야?"
"...."
"내가 네 여자친구인 거잖아요."
"아닌데."
".....내가 네 여자친구 모습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쵸."
아. 강적이다. 또 잠깐 이름 모를 그 여자친구가 부러워졌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걸 해줄게요."
"그런 거 없는데."
"거짓말....진짜 없어요?"
"그냥 이렇게 옆에 있어줘요."
............아. 내 계획은 처참히 실패했다. 실은 아이를 웃게 만드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나도 이 아이랑 데이트 같은 걸 해보고 싶었는데. 내 욕심이었나 보다. 아쉬워.....욕심 많은 소망은 이뤄주시지 않는 건가요?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웃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물음표 가득한 표정으로 아이를 쳐다봤다. 뭐지. 왜 웃니 너. 갑자기 과제 클리어해버렸다. 되게..되게 행복하게 웃네...? 왜 웃냐 물으니 시무룩한 표정이 너무 귀엽댄다. 아이를 만난 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요동치는 심장은 진정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어차피 내가 아니라 여자친구의 모습이 귀엽다고 말한 것일 텐데도.
"아이 넌 얘를 되게 좋아하는구나."
"응, 너무 좋아하죠. 완전 좋아해요."
베시시 웃으며 말하는데 괜히 내가 고백받은 기분이 든다. 그 요상한 기분을 떨쳐내려 물었다. 꿈에서 깨면 또 볼 건데 꿈에서도 그렇게 보고 싶냐고. 답을 듣지도 않았는데 질투부터 난다. 여자친구라는 아이가 들으면 기막혀 할 소리지만 정말 그런 기분이 드는 걸 어쩌겠는가. 그리고 나의 물음에 아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힌다.
"못 보니까요."
"....어?"
"여기서만 볼 수 있으니까."
아이는 난간을 잡고서 바다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괜히 마음이 아렸다.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런 나를 보고 아이가 더 당황했다. 어어...? 왜 울어요..전 괜찮아요. 이렇게 꿈에서라도 볼 수 있고....또.....어....그러니까.... 괜찮은 점을 꼽기가 어려웠는지 말을 고르고 고르고 또 고르는 아이다. 평소처럼 가만히 있을 걸. 말을 내뱉는 게 아니었는데. 이 아이의 소중한 시간을 내가 빼앗아 버렸다. 꿈에서 깨면 꿈의 절반도 채 기억하지 못할 텐데. 그마저도 내가 앗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건 내가 처음이 아닐 것이다. 아이의 말을 곱씹어 보면 분명 선배들도....... 모르겠다. 그저 꿈일 뿐인데. 내가 왜 이렇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또 왜 이렇게 슬픈지. 그리고 그런 내게 아이는 도리어 미안하다고 말한다.
".....아..제가 미안해요."
안절부절 못하며 나를 끌어당겨 안는다. 어색한 손길로 등을 토닥이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나는 그저 아이의 옷자락을 말아 쥐었다.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말...그건 내가 한 거 아니에요."
"............알아요."
".....지성아."
"아이라고 불러요."
순간 토닥이던 손길이 멈춘다. 나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듯 싶더니 툭.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는다.
"그렇게 부르면...꼭 여주가 부르는 것 같단 말이야."
.
.
.
멍한 정신을 붙잡고 지성이를 내려다봤다. '지성이가 저를 잊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내가 빌었던 소망이 뒤늦게 떠오른다. 박지성은 나를 잊지도 못했는데 나는 바보 같이 박지성을 잊었다. 너 두고 떠난 내가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어.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 임무는
이 아이에게서 나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일이다.
-
더 안 이을 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쓰고 싶었엉...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7.21 20:3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7.22 05:24
첫댓글 ㅁㅊ... 지성아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7.27 22:25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7.31 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