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서 정방폭포 옆 암석에 새겨진 서복에 글씨에 관한 전설..
서복에 관한 이야기
(1)
옛적에 중국인들은 강물이 바다에 끊임없이 들어가는데도 바다가 넘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생각했다. 동쪽에 있는 바다, 곧 동해인 발해(渤海)에서 또 동쪽으로 몇 억 리인지 모를 거리에 귀허(歸墟)라는 골짜기가 있다. 귀허는 워낙 커서 세상의 모든 강물과 바닷물이 흘러들어도 물이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귀허에는 대여(岱輿)와 원교(員嶠), 방호(方壺), 영주(瀛州) 그리고 봉래(蓬萊)의 다섯 신령한 산(五神山)이 있는데 각기 그 높이와 둘레가 3만리가 넘는다. 신산의 주민들은 신선으로 대부분 흰 옷을 입고 있으며 등에 날개가 달렸다. 그 날개로 바다 위를 날아서 다른 신산에 사는 벗들을 찾아가기도 한다. 신산에 사는 새와 짐승은 모두 흰색이다. 나무에 달리는 열매는 진주와 옥인데 맛도 기가 막히지만 먹으면 장생불사하게 되는 효험이 있다.
그런데 오신산에 사는 신선들은 파도가 칠 때마다 섬이 흔들려서 언제 떠내려갈지 몰라 불안해 했다. 신선들은 천제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탄원했고 천제는 해신 우강에게 명하여 열다섯 마리의 거대한 거북으로 하여금 섬을 떠받치게 했다. 거북들은 등으로 섬을 떠받치고 있다가 6만년에 한 번씩 교대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발해 반대편인 서쪽 아득한 곳에 있는 용백국의 거인이 와서는 섬을 떠받치고 있던 거북 가운데 여섯 마리를 낚시질로 잡아가 버렸다. 거북 등껍데기의 무늬로 점을 치려고 했다던가.
어떻든 이 일로 대여와 원교 두 신산이 속절없이 떠내려가다 침몰해 버렸고 오신산은 삼신산이 되고 말았다. 남은 삼신산 가운데 방호산은 바로 방장산(方丈山)으로 우리나라 지리산의 별칭이다. 다 알고 있는 대로 봉래산은 금강산의 별칭, 영주산은 한라산의 별칭이다.
삼신산 이야기는 중국 전국시대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동쪽 바닷가에 있던 제(齊)나라의 위왕(威王)이며 선왕(宣王), 연(燕)나라의 소왕(昭王) 등이 탐사대를 보내 삼신산을 찾아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국시대의 막을 내린 진시황은 태산을 비롯해 전국 각지를 순행하고 비를 세우며 스스로가 곧 나라임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재위 28년이 되던 해(BC 219), 산둥지방의 낭야에 왔을 때 문제의 인물, 제나라 출신의 방사 서불(徐)을 만났다.
서불은 ‘서시’라고 잘못 읽는 경우가 많다. 슬갑(膝甲:추위를 막기 위해 무릎까지 내려오게 입는 옷)을 뜻하는 불()은 한 일(一) 자와 수건 건(巾) 자가 합쳐진 것이고 시장(市場)이라고 할 때의 시는 머리 두(?)와 수건 건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불에는 앞치마, 초목이 무성하다는 뜻도 있다. 그 서불이 자신의 제국처럼 스스로의 생명도 영원하기를 바라던 영정(政), 곧 진시황에게 글을 올렸다.
“바닷속에 세 개의 신산이 있는데 이름을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습니다. 청컨대 재계하고 동남동녀와 함께 신선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영정이 서불에게 동남동녀 수천 명과 함께 바다로 들어가 신선을 찾게 했다는 것이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진시황 본기’의 내용이다.
산둥반도 일대가 신선사상의 거점이 된 것은 지형적인 특성이 크다는 게 오늘날의 해석이다. 산둥반도에는 봄철이면 신기루 현상이 자주 발생하는데 꼭 바다 멀리 신선이 사는 산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불이 수천 명이나 되는 ‘애들’을 데리고 바다로 떠나간 지 8년이 되던 해(BC 210) 순행을 하던 진시황이 또다시 낭야에 이르렀다. 언제 돌아왔는지는 몰라도 돌아와 있던 서불 등은 책벌이 두려워 거짓말을 했다.
“봉래산의 선약은 구할 수 있으나 커다란 물고기(大魚)가 방해하여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청컨대 활솜씨가 뛰어난 사람들을 저희와 함께 보내 주시고 대어가 나타나면 연노(連弩)로 공격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따라 진시황은 선약을 구하러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대어를 잡을 수 있는 연노, 곧 연발식 쇠뇌를 가져가도록 했다. 서불이 두 번째로 출발한 뒤 진시황 자신도 직접 쇠뇌를 들고 낭야에서 북쪽 영성산에 이르도록 계속 바닷가를 따라 올라갔다. 지부에 이르러 고래나 상어로 추정되는 대어가 나타나자 한 마리를 쏘아 죽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곧 병을 얻어 죽음에 이르렀다.
진시황이 바닷가에서 들고 설치던 쇠뇌,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동안 여러 사람의 관심을 모은 석궁(石弓)이라는 무기가 그와 유사하다. 서양의 십자궁(cross bow)과도 통한다.
쇠뇌는 사격할 때 손으로 잡는 몸통인 비(臂), 활 역할을 하는 익(翼), 발사장치인 기(機)로 구성되어 있다. 활에 비해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데다 근육을 뚫고 뼈까지 박히는 강력한 힘이 있어서 일반 활보다 훨씬 살상력이 높다.
보통 화살을 맞은 뒤 이를 뽑아내고 적에게 달려드는 광경은 소설을 비롯, 여러 기록에 숱하게 나온다. 그러나 쇠뇌의 화살이 뼈에 박히면 죽든 살든 전투력을 상실하기 마련이었다. 이 쇠뇌의 강도를 재는 단위가 석(石)인데 후한시대에는 6석(160㎏)이 일반 쇠뇌의 강도였다고 한다.
영주산 아래인 제주도 서귀포, 방장산 아래인 전남 구례, 경남 남해, 한려수도의 외도 등 한반도 곳곳에 ‘서불과차(徐過此: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 또는 ‘서불과지(徐過之)’‘서불과처(徐過處)’라는 글씨와 기록,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서불이 선약을 찾았으나 진시황이 죽고 없어서 돌아갈 때의 방아쇠(時機)를 놓쳐버렸는지, 고래를 향해 쇠뇌의 방아쇠를 당겨보기는 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서불은 일단 산둥반도에서 출발해서 랴오둥(遼東)반도를 거쳐 고조선의 강역을 만났을 것이다. ‘나 지나간다네’라고 본인이 직접 썼는지 말았는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몇 군데에 상륙해서 삼신산을 찾던 흔적을 남기고는 다시 배를 타고 흘러가다가 어딘가에 상륙, 정착했다. ‘서불은
들판(平原)과 넓은 못(廣澤)을 얻게 되자 그곳에 머물러 왕이 되고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는 게 ‘사기’의 결론인데 그 어딘가는 일본의 규슈 지방 사가현으로 추정된다. 사가현 일대에서는 서불이 벼농사 기술과 의약에 관한 지식, 포경술 등을 전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2)
불로초를 찾기 위해 제주를 찾은 서복의 이야기.
신선들이 산다는 한라산 깊이 맑은 아이들의 눈에만 보인다는 불로초.
전국시대를 천하통일하고 스스로 시황제라 칭한 진시황제는 변방의 왕들을 거느리며 그 위세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호령 한마디에 영웅과 미녀는 무릎을 굽혔고, 세상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진시황제는 오랫동안 권세를 누릴 수 있도록 장수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을 방방곡곡의 영험한 곳으로 보내 제를 올리고 자신의 장수를 밤낮으로 빌도록 하였습니다.
시황제의 신하 중에는 서복(서불)이란 현명한 방사(方士)가 있었습니다.
정부의 정사를 처리할 뿐만 하니라 의약, 연단술, 점성술, 항해술에도 식견이 있었고, 황제와 귀족들 뿐만 아니라 평민들과 접하며 고충을 헤아리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황제는 특별히 서복을 총애하고 있었지만 점점 의심이 많아져 가는 시황제가 언제 변덕을 부려 자신을 해할지 서복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황제가 서복을 궁전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내가 얼마나 살 것인지 그대는 알 수 있는가?”
“폐하, 온 나라의 백성들이 밤낮으로 기도를 하고 있사옵니다. 어찌 하늘이 그 뜻에 무심하겠사옵니까. 그리고 마침 삼신산에 있는 불로초에 대해서 진언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불로초가 있단 말이냐! 당장 그것을 대령하도록 하라.”
“폐하, 그 약은 이 대륙에는 없사옵고 저 동해바다 멀리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이렇게 삼신산에 있다고 합니다. 짐승도 꽃도 새도 순백색의 신성한 것들로 불로초도 항상 향기로운 구름과 안개가 둘러싸여 속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하옵니다.”
“그러해도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서 구해오도록 하라!”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옵니다. 불로초는 신선들의 음식으로 속인의 눈에는 불로초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동남동녀 오백명과 그들을 태우고 갈 배를 주소서. 신이 목숨을 걸고 구해오겠나이다.”
그는 황제가 없는 곳으로 떠나서 살아갈 궁리를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영생불사를 할 수 있다는 욕심에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곤륜산의 천년 묵은 고목들을 베어 큰 배를 여러 척 만들고, 몇 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과 물품도 준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각 지에서 뽑은 동남동녀 오백을 태우고 배는 동해로 출발하였습니다.
서복 선단은 발해를 지나 오랜 항해 끝에 영주산을 찾아내었습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그곳은 해중의 섬이면서 산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곳이 영주산(지금의 한라산)임이 분명하구나. 저 산봉우리가 하얗고 하늘에 닿아 있지 않는가. 저기 뛰노는 사슴 중에는 신선들이 타고 다니는 백록도 있으리라. 모두 내려서 천천히 구경도 하고 불로초를 찾아보도록 하여라.”
그들은 제주섬의 기슭에 있는 조천포에 닻을 내렸습니다. 동남동녀들은 절경을 구경하며 약초가 가득한 영주산에 올라 신선들이 즐겨 먹는 영지버섯과 한겨울에도 푸르른 시로미를 캤습니다. 불로초를 구했지만 서복은 중국을 떠날 때 이미 다시는 황제에게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서복은 제주를 떠나면서 조천포와 정방폭포의 암벽에 서복 일행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서불과차(徐市過此), 또는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귀를 새겨두고 동쪽을 향하여 떠나고, 그들 일행은 동쪽 어느 땅에 정착하여 그들만의 작은 나라를 이루었다고 하며, 이 나라가 일본이라는 정설이 있습니다.
서 복 공 원
첫댓글 ㅎㅎ 쫌 길죠~~ 시간있을때 읽어보세요 ~~
정방폭포 암석에 새겨진 글자의 history를 약간 이해 했습니다
긴글을 읽자니 눈에서 눈물이 핑핑....ㅋㅋㅋ
천천히 읽어 보시지 ~~ 수고하셨어요 ~~^^
먹돌새기님께서는 요즘 골프연습장엔 안가시나요?
싱글인 사람도 오랫동안 연습을 안하면 실력이 따운 된다던데....
골프 좋죠
아~네 휴일에 한번씩 갑니다..
여기서는 못가구요..클럽을 안갔구 와서..
골프하신지는 얼마나 되셨는지요 ~?
저는 쬐끔 됐습니다 아직 험난한산을 넘어야하기에 공을 쫒아 다닙니다
흐미 전 사진만 볼랍니다
올버디님께서도 매일 연습하시나요??? 올버디님께서도 수준급인거 같은데....
저는 아직 백돌이라 열심히 연습하고 필드도 나가고 있어요.
저와같이 하시면 될것도 같습니다
재밌죠 한바퀴 도는동안 모든걸 잊고
그냥 푹 빠지게된다는 매력 이 살아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