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장
그리고 또 한 사람.
팽무도였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 공포가 서려 있었다. 백산이 당해서가 아니었다. 천비비, 붉은 혈광을 줄기줄기 쏟아내는 천비비 때문이었다.
피를 흡수해야만 살 수 있다 했던 광혈지안의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광혈지안에 도달하면 더 이상 방법이 없다. 혈가의 후예도 방법이 없다 하지 않았던가.
"천영이! 천영이를 살려야 해……."
그 수밖에 없었다. 백산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은 소운이나 추렴이보다는 조천영이었다. 조천영이 있었기에 백산의 정신을 되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어르신, 천영이…… 천영이는……. 오! 안 됩니다."
팽무도가 그 자리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온몸에 화상을 입고 있는 조천영을 갈태독이 치료를 하고 있었다. 단순한 치료가 아니었다. 그의 모든 내공을 다하여 조천영의 몸속에서 날뛰고 있는 화마와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백무천과 교환했던 일 장에서 화룡 한 마리에 그대로 잠식당해버렸다.
그 화룡을 밀어내기 위해선 극빙의 기운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운을 가진 당사자는 이미 미쳐 있는 백산밖에 없다.
지금 싸우고 있는 백산을 불러올 수도 없고, 또한 부른다 한들 알아들을 입장도 아니기에 자신의 내공으로 막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손을 떼는 순간 조천영은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갈태독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변하자 뒤에 있던 오구가 재빨리 그의 명문혈에 손을 붙이고 내공을 밀어 넣고 있었다.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코에서 입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으면서도 밀어 넣는 내공을 멈추지 않았다.
'빨리 백산을……. 어서!'
망연자실 세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팽무도의 머릿속으로 갈태독의 음성이 들려왔다.
"알았습니다."
갈태독의 입과 코에서 더욱더 많은 피가 솟구쳐나왔다. 더 이상 버티는 게 무리라는 의미였다.
"소운아! 추렴아! 너희들이 해야 한다. 산이의 정신을 돌아오게 할 사람은 너희 둘밖에 없다. 내 말 명심해야한다."
팽무도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소운과 추렴이 두 사람으로 백산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지 못하면 전부 죽는다. 이미 광혈지안의 징후는 나타났고, 지금 중지시키지 못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언니……."
"가자!"
울고 있는 소운의 손을 잡은 냉추렴이 백산에게로 몸을 날렸다.
그녀들이 백산을 향해 움직이는 그 순간에 백무천과 백산의 대결은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서로 간에 피를 토해내고 있으나 백무천의 패배가 확연했다.
그가 만들어낸 화룡은 대부분 사라져버렸고 십여 마리의 화룡만 남아서 백무천의 몸을 방어하고 있었다. 화염 불꽃을 피워대던 가루라의 모습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백무천이 처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벽이 남아 있었던 거였다. 온통 심령을 휘젓는 고통으로 인하여 내공을 제대로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놈의 공세는 화룡파천비공의 약점을 너무 정확하게 꿰뚫었다.
화룡이 터져나가도 시간 간격만 있으면 마음을 다스려 대항할 수 있는데, 지속적인 고통을 주어서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정신을 차릴 만하면 두 마리의 화룡이 소멸되어나가고, 그 고통을 극복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싶으면 또다시 두 마리의 화룡이 터져나간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는데 아니었다. 화룡파천비공을 완성했어야 했다. 신의 무공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걸 무시했다.
"피하십시오, 사숙!"
마지막 화룡이 터져나가는 순간, 백무천 앞으로 두 사람의 신형이 뛰어들었다.
공동파 장로 두 명, 그들이 몸을 날리며 백무천을 향해 일 장을 날리고 다가오는 검은 기운을 막아내었다.
"커억!"
왼쪽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고통에 백무천이 비명을 내질렀다. 두 명의 사질이 가루로 흩어지는 모습과 함께 자신의 왼팔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크아악!"
적을 놓쳤다는 생각에서인지 백산이 분노의 괴성을 발하며 백무천의 뒤를 쫓았다.
"막아랏!"
백무천 뒤로 포진하고 있던 산동분타원 전원이 백산의 앞을 막아섰다.
"분타주!"
백무천이 고통스런 표정으로 마금천을 불렀다. 불과 며칠 전에 자신을 따르기로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 하고 있다. 무천각이나 십천각 인물들은 이미 도망을 치고 없는데 그들만이 남아서 뒤를 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맹주님!"
마금천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절을 하고 있었다.
"사내는 한 번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 배웠습니다."
"알겠소, 분타주. 분타주와의 약속 반드시 지키겠소."
마금천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안다. 파벌이 없는 맹을 만들어 달라 했던 요구, 그것을 약속했기에 자신을 따랐던 것이고 그 약속을 위해 죽고자 한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백무천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인 마금천이 산동분타원들을 향해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산동의 형제들이여, 우리는 사내다. 약속을 아는 사내란 말이다."
"고맙소, 분타주. 반드시 약속하리다. 파벌을 없애는 것은 물론, 그대들의 복수까지……."
왼팔이 없어진 것보다 마금천의 뒷모습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또다시 이곳에서 두 사질과 가장 큰 힘이 될 수 있었던 산동분타원들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있다.
"두고 보자, 버러지 놈. 꼭 갚아주마. 이 빚은 꼭……."
이번에도 패했다. 천마맹과의 전쟁에는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인간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뇌룡현의 버러지에게는 또 패하고 말았다.
도망치고 있는 무천각이나 십천각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갈수연의 말로는 그들에게 광천뢰가 없을 것이라 하였는데 그 광천뢰가 사방에서 터지며 천무맹 무사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이 전쟁의 끝에 얼마나 살아남을지 알 수가 없다.
"천무맹 무인들은 퇴각하라!"
백무천에게서 터져나온 퇴각 명령이 초리하 곳곳에 메아리쳤다. 굳이 백무천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십천각과 무천각 인물들은 살아남기 위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는 반대로 죽음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는 자들이 있었으니.
마금천을 비롯한 산동분타원 백여 명이었다. 양맹의 전쟁 중에 이미 백여 명의 무인들이 죽었고 살아남아 있던 나머지 인원들마저도 먼저 간 형제들과 같은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정녕 인간이 아니었더냐……."
이건 놀라움도 아니었다.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도대체 뚫고 들어갈 틈이 없다.
모두 열두 개의 비도가 사방에서 춤을 추며, 다가오는 부하들을 잘라내고 있었다. 전후좌우 할 것 없이 모든 방향에서 붉은색의 죽음이 생겨났다.
"어차피 산동분타에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었어."
마금천이 입술을 깨물며 몸을 날렸다. 무공이 강한들 무엇 하랴. 꿈이 큰들 무엇 하랴.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는 그런 곳이 산동분타였다.
그곳은 천무맹이 아니었다. 천무맹의 죄인들이 가는 유형지였다.
오는 사람은 있어도 나가는 사람이 없는 유배지(流配地). 그러나 지금은 그곳을 떠났다. 죽음만큼은 산동분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이 괴물아! 같이 한번 죽어보자."
마금천이 괴물이라 부르는 인간.
그 괴물의 머릿속에는 이미 아무런 생각도 들어 있지 않았다.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열두 줄의 시구(詩句)만이 입을 통해 흘렀다.
하늘에서 죽음의 비가 내리니, 화염지옥이 탄생하고, 핏빛 혈광이 몰아치고, 검은 구름이 떠다닌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순간에 하나씩 쏟아져나간 시구가 혈관(血管)을 통해, 뇌룡사를 따라 핏빛 비도에 이른다.
그리고 터져나가는 육신들. 한 번의 손짓이 목마름을 달래고, 한 번의 발길이 뜨거운 가슴을 식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검은 구름이 눈에 끼었는지, 분간할 수 있는 사물이 아무것도 없다. 단지 주변을 어지럽히는 발자국소리가 있고, 비도가 그곳을 찾는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곳에 피(血)가 있고, 그 소리가 멈춰지면 안락(安樂)이 찾아온다.
풍마도 마금천을 포함한 산동분타원 백여 명이 죽어가는데 겨우 이 각이 걸렸다. 처음 흑색지안이 발현될 때보다 더욱 강해지고 더욱 빨라졌다.
그런 백산의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는 인물들, 남궁세우의 후퇴 명령에 더 이상 살행을 멈추고 한쪽으로 피한 광풍대원들이었다.
"사부님!"
일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팽무도를 불렀다. 저 빌어먹을 파멸안을 막기 위해서 그 노력을 했고 뇌룡현에서 이곳까지 쉬지 않고 왔는데 결국은 막지 못했다.
아니, 막는 것은 고사하고 그를 피해 도망을 쳐야 한다.
"추렴이와 소운이를 믿는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자는 결코 마인이 될 수 없다."
바람이었다. 지금 백산의 상태는 비도만 붉어졌을 뿐, 눈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저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기록과는 다른 점이었다.
혈가의 후예의 기록에 의하면 지금 백산의 눈은 붉은색이어야 한다.
그러나 백산의 눈은 아직 흑색지안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무엇인가가 백산이 변하는 것을 막고 있다는 말이다.
긴장된 표정으로 모든 일행이 백산을 향해 가는 냉추렴과 소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소운과 냉추렴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벌써 몇 번을 불렀는지 모른다.
십여 장 앞에서부터 백산을 불렀으나 두 개의 검은 눈동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그도 심한 내상을 입었는지 계속해서 피를 넘기면서도 광풍대원들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쪽에서 수십 개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저 소리가 멈춰야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언니!"
소운이 울먹이며 냉추렴을 불렀다. 백산의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백랑!"
백산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소운의 앞을 막아섰다. 울음이 터져나왔다. 자신들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죽고 나면 이 사람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시아버지께서 말씀해주셨다. 님이 처한 상황을, 님이 안고 가는 저주스런 운명을, 자신과 소운이 죽는 순간 광혈지안이 될 것이다.
인간의 피가 있어야 살아가는 광혈지안. 소운과 자신이 죽고 천영 언니와 나머지 가족들이 살아난다 해도 이 사람은 떠나고 말 것이다.
외롭게 떠돌다 죽든지, 아니면 흡혈귀가 되어 세상을 피로 적실 것이다. 무서워해서도 안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인데, 그의 모습이 변했다 한들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고, 죽음까지도 같이 하려는 님이다.
천영 언니도 그랬다. 온 사방에 시체 조각이 널려 있는데도 님을 향해 웃었다. 님을 위해서 울었다.
'힘을 내라, 추렴아. 아버지와 어머니 죽음도 겪지 않았더냐.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사부로, 의부로 모시고 있지 않더냐. 그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냉추렴, 그녀도 부모님과 철목승과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우연히 알게 된 세 분의 사연, 그러나 미워할 수가 없었다. 오직 그녀의 행복만을 위해 살고 있는 사부를 원수로 여길 수가 없었다.
사부를 다시 인정하는 데 오 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제는 의부로 생각하고 있다. 두려워하면 안 된다. 님의 모습일 뿐이다. 사랑하는 님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정신 차려요, 정신을 차리고 우리를 보란 말이에요."
"안 돼!"
순간 소살우의 입에서 처절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백산의 손이 두 사람을 향해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형님! 광천뢰! 광천뢰 남은 것 전부 가져오란 말이야!"
그 방법밖에 없다. 그것마저도 가능할는지 모르지만 아직 열 개의 광천뢰가 남아 있다. 그것만 있으면 같이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뿐이었다.
"살우야!"
눈물을 흘리며 광천뢰를 모아들고 오는 소살우를 석두가 불렀다. 소운과 냉추렴의 목을 쳐가던 비도가 마지막 순간에 멈춰 있었던 것이다.
사라랑! 사라랑!
냉추렴과 소운이 마주잡고 있는 손에서부터 흘러나온 애명환 울음소리였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던 백산이 애명환 소리에 손을 멈췄다.
냉추렴이 소운을 막아서면서 서로의 손을 잡았고 왼손에 같이 끼고 있던 애명환이 만나자 울음을 토해냈던 것이다.
"누구?"
백산의 입에서 미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왕! 오라버니……."
소운을 울음을 터트리며 백산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죽을 것만 같았는데, 포기하고 말았는데, 드디어 님이 정신이 돌아왔다.
"백랑! 언니가 위독해요, 어서요."
지금 살아난 감격이 문제가 아니었다. 간신히 돌아온 정신인데 천영 언니를 구하지 못하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
서둘러 백산의 손을 잡고 조천영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괜찮으냐?"
팽무도가 걱정스런 얼굴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입에서 흘러내린 피가 멈추질 않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조천영을 치료할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었다.
"어떻소."
속에서 울컥하니 무엇인가 치밀어 올랐다. 천영이 죽어가고 있는데 자신은 정신을 잃고 다른 짓을 하고 있지 않았는가.
더구나 마지막 자신의 앞에 있던 두 여인들,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도 멈춰지지가 않았다.
마치 저 먼 꿈속의 목소리라 여겼다. 그런데 애명환 소리가 자신을 깨웠다.
천영에게도 있는 애명환, 소운에게도 추렴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있는 그 애명환 소리 때문에 정신이 돌아왔다.
빌어먹을 놈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들의 목소리는 알아듣지 못하고 반지 소리에 정신이 들다니…….
"아예 안 보이는 게냐?"
피를 흘리고 있는 갈태독의 모습을 보면서도 어떠냐고 묻는 백산의 행동 때문이었다.
파멸안. 정말이지 저주스러운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철가인들의 한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살아 있는 생물을 전부 도륙하게 만들었지 않은가.
철가인들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결과가 그리 나왔다.
"조금만 있으면 되오, 어서!"
자신을 갈태독의 뒤로 앉혀 달라는 말이었다. 갈태독이 바로 물러날 수 없기에 그를 통해서 냉기를 밀어 넣으려 함이다.
지금 몸 상태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백산의 몸에서 저주스러운 열두 개의 비도가 튀어나와 땅속 깊숙이 박혀들었다.
'빌어먹을, 엄청나게 망가졌군.'
내공을 끌어올리던 백산이 내심으로 욕설을 토했다. 지금 상태로는 내기를 모으는 자체가 불가능했다.
화룡파천비공 때문이었다. 백무천은 팔을 잃었지만 백산도 엄청난 내상을 입었던 터였다.
'그래도 해야 한다. 내기를 이용하지 못하면 진원지기라도.'
진원지기를 사용하면 어떻게 될지 그것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일단 뽑아내기 시작하면 멈추지 못한다 하였다. 모든 게 소진될 때까지 끊임없이 흘러나와 죽는다 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천영을 살리는 길이기에 해야 한다.
결심을 굳힌 백산이 자신의 생명에 해당하는 진원지기를 뽑아내어 내공으로 변환시키자 몸 상태가 급격하게 호전되며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순간 땅속에 박혀 있던 열두 개의 비도로부터 엄청난 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빨리!'
그러나 백산의 마음은 급했다. 천비들로부터 빨리 기운이 들어와야 한다. 자신이 살아나는 길이 아니라, 살아 있어야 그녀를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지로부터 유입되는 기운과 진원지기가 같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멈춰라! 제발, 제발 멈추란 말이다.'
내심의 절규가 이어졌다. 진원지기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비도에 의해서 들어온 기운은 이제 절반 정도밖에 채우지 못했다.
'됐다!'
드디어 진원지기의 양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비도에 의해 유입된 기운이 들어차기 시작하면서 진원지기를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 더 이상의 진원지기 흘러나오지 않자 백산의 얼굴이 편안하게 변했다.
이제 남은 일은 빙천비와 풍천비를 이용하여 극빙의 기운을 만든 후, 갈태독을 통해서 보내기만 하면 된다.
백산의 몸에서부터 쏟아져 들어온 극빙의 기운을 접한 갈태독이 몸을 움찔하더니, 이내 조천영의 몸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지금 조천영의 내부는 엉망이었다.
갈태독이 내공을 이용하여 온몸에 잠식해 있던 화마의 기운을 잡고 있었지만, 전신 세맥에까지 퍼져 있는 그 기운들을 전부 통제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선택을 해야 했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곳의 세맥은 손상된다 하더라도 그대로 두고, 없어서는 안 될 맥만 지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갈태독이 아니라면 해낼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미 조천영의 모든 내공은 사라져버렸다.
내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상태라면 그녀를 깨워서 어찌해볼 수 있을 터인데 그것마저 불가능했기에 갈태독이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휴! 됐다."
거의 한 시진 동안 치료에 전념하던 갈태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천영의 몸에서 손을 뗐다.
"다 끝난 겁니까, 어르신."
남궁세우가 반색을 하며 갈태독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기나긴 여정의 끝이었다. 찍새와 뱁새를 잃었지만 그들의 죽음을 애도할 경황도 없이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이었다.
모든 광풍대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희생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다.
조천영은 이미 백산의 부인만이 아니었다. 모든 대원들의 대모였던 것이다. 특히 광견조원들에게는 누나이고 어머니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뻐하는 상황임에도 웃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형님!"
울고 있는 팽무도의 얼굴에 깜짝 놀란 남궁세우가 그를 불렀다. 조천영이 살아나서 감격에 겨워 우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 녀석이 나이를 더 먹어버렸어."
팽무도가 백산을 가리키며 울먹거렸다. 모두들 조천영을 응시하고 있을 때 그만은 백산을 주시하고 있었다.
백산이 이곳에 왔을 때 그의 몸 상태로는 도저히 내공을 일으킬 수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뭘 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백산의 몸속에 있는 기운은 다른 내공이 들어간다 해서 융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가능한 사람이라면 오구밖에 없었는데 그도 이미 탈진하여 쓰러져 있었던 거였다.
남에게 줄 수는 있어도 받아들일 수는 없는 특이한 내공. 오직 혼자의 힘으로 내기를 끌어올려야 했고 그래서 진원지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탱탱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세월을 건너버렸다. 사십 대에 달하는 얼굴로 변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흰머리까지. 그나마 비도에 의해 급속하게 기운이 채워져서 진원지기의 손실이 멈추었지, 잘못되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설마……."
남궁세우의 표정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진원지기를 다 써서 죽어간 무인은 보았지만, 그것을 뽑아 썼다고 몸이 노화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저런 일이……."
"놀라운 일이군, 이론상으로 가능한 일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서둘러 운공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었는지 갈태독이 백산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론상으로 가능하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진원지기가 생을 유지하는 기본이라는 것은 전부 알 걸세."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일행을 향해 갈태독의 설명이 이어졌다.
진원지기(眞元之氣).
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내기(內氣)를 말한다.
즉, 선천지기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가지게 되는 기운. 부모로부터 받은 선기와 하늘로부터 받은 천기, 그리고 대지로부터 받은 지기.
이 세 가지가 합쳐져서 혼백이 되고 육신에 스며들면 살아 있는 생명이 되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진원지기를 소모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즉, 숨을 쉬고 활동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진원지기를 사용하는 행위이고 진원지기를 다 썼다 함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럼 내공을 가진 무인들이 더 오래 사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건 진원지기가 많아서가 아니라, 후천지기라는 내공을 선천지기 대신 사용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네."
내공이 강하다 해서 진원지기를 지킬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방법들이 있으니 도인들이 말하는 신선술이 그것이다.
화식을 멀리하고 벽곡을 위주로 생활하면서 선천지기를 키우고자 하는 그 노력이, 선천지기의 방출을 막고 그동안 사용했던 선천지기를 다시 쌓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현상이 무인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바로 초극의 내공을 가진 자들이다.
무의 극에 도달한 자들의 상태도 깨달음이란 면에서는 신선술을 연마하는 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무의 극에 이룬 자들이 반노환동(返老還童)을 경험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마 저 녀석의 무공과 관련이 있겠지……."
갈태독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자리를 잡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운명이거니 하며 받아들이는 수밖에…….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어찌 저런 일이……."
"무공 때문이야."
백산의 무공, 즉 혈뇌문의 무공을 알고 나서 팽무도가 가장 놀란 점이었다. 지금 백산의 내공은 처음 자신이 보았던 상태에서 변한 게 없다.
그런데 그의 무공은 자신을 훨씬 능가했다.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혈뇌문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깨달았던 것이다.
비도였다.
열한 개의 비도에서 천지의 기운을 끌어와 원래의 가진 내공과 하나로 만드는 것이었다. 즉, 비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힘이 백산의 내공이었다.
"그럼 그 때문에 환골탈태(換骨奪胎)를 못하는 것이었습니까?"
이제야 백산의 상태가 이해 간다는 듯 남궁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제일이라 할 정도의 무공을 가지고 있는 백산이 환골탈태를 못하고 얼굴의 흉터를 그대로 가지고 있기에 이상하다 생각했었는데 그게 혈뇌문의 무공 때문이란다.
비도에 의해서 유입되는 기운은 빌려온 것일 뿐 백산의 것이 아니었다. 외부로 힘을 발휘할 수는 있을지언정 내부적인 상황에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저것도 운명이라면 따라야겠지……."
갈태독과 같이 그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붉은 혈광에 싸여 있는 상태여서 이제는 전혀 보이지도 않았지만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었다.
초리하 갈대밭을 가득 채웠던 뭇 군상들의 탐욕을 쓸어내기라도 하듯, 검은 하늘에서 빗줄기가 내리퍼부었다.
붉은 피에 젖어 있던 갈대들이 서로의 몸을 흔들면서 그 피를 씻어내며 다시 평화스러운 모습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했다.
뱁새와 찍새의 조그마한 봉분을 만들고 두 사람의 극락왕생을 기원한 일행이 피곤에 지친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 그 시간,
분주객잔이 있던 그 자리에 두 명의 인물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형님은 나에게 좀 맞아야 되겠소."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한 쪽밖에 없는 주먹이 날았다.
퍽!
얼굴에 느껴지는 강렬한 충격으로 백산의 몸이 뒤로 밀렸고, 그 다음부터 소살우의 무차별공격이 이어졌다. 손과 발이 움직이며 백산의 전신을 구타하고 있었다.
때리는 소살우도 얻어맞는 백산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때리는 사람도 맞는 사람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크윽!"
결국 견디다 못한 백산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그러한 백산의 모습을 보고도 소살우는 주먹과 발을 멈추지 않았다.
아예 죽이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한 팔과 두 다리에 붉은 강기마저 일렁였다.
금강불괴에 이르러 있기에 웬만한 충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강기를 이용하여 패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강도 퉁겨버린 백산의 몸이 강기라 해서 뚫을 리가 없었다. 약간의 고통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고통스러웠다. 지금 소살우가 자신을 때리고 있는 이유를 왜 모르겠는가.
소운과 추렴에게 비도를 휘두르려 했던 행동 때문이란 것을 알고 있다. 녀석은 팔을 버리면서까지 부인도 아닌 형수를 지켰는데 자신은 그녀들을 해하려 했지 않는가.
더욱 고통스러워졌으면, 온몸이 부서지는 아픔이라도 느꼈으면 시원해질 것 같은데,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대가리만 돌인지 알았더니 몸뚱이도 돌이구먼."
결국 때리다 지친 소살우가 쓰러져 있던 백산 옆에 털썩 드러누웠다.
자신보다 더 힘든 사림이 이 사람일 것이다. 부인을 죽일 뻔한 사람인데 마음이 편하다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팼다. 얻어맞았다 해서 그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겠지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인생을 더 살았지만 말로써 위로할 자신도 없다. 그냥 맞다보면 속이라도 후련해지기에 자신이 나선 것이었다.
"니미럴! 정말 좆같이도 쏟아지네."
"고맙다."
"형님! 한꺼번에 나이를 먹은 기분이 어떠쇼."
"너 팔 잘릴 때 기분은 어떻대?"
"팔? 오른손이 있으니 밥은 먹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정도?"
"나도 마찬가지다. 살아 있으니 밥 먹는 즐거움은 느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석 대인이 준 그 구룡인가 뭔가 하는 것 써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하여간 대가리하고는……. 근데 그 진원지긴가 하는 거 나눠줄 수 없는 거요?"
소살우도 백산의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던 터였다. 아울러 죽고 싶지 않으면 진원지기는 사용하지 말라는 말도 함께.
광견조원들의 성정으로 볼 때 악에 받치면 그것마저도 사용할 사람들이기에 팽무도가 미리 경고를 한 것이었다.
"살우야. 내 팔을 떼서 너의 왼쪽에 달면 그게 네 팔이냐, 내 팔이냐."
안 된다는 말이었다. 진원지기라는 것은 그 인간을 특징짓는 생명의 원천이기에 나눌 수도 없거니와 설사 나눈다 할지라도 줄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씨팔!"
"내가 늙어버린 게 서운한 모양이구나, 고맙다야."
"누가 형님 때문에 그러우? 젊디젊은 형수님들 때문이지."
"개자식, 비밀 하나 알려줄까?"
"뭐요?"
"이 손목과 발목에 있는 것 있잖냐, 이놈들만 안 빼고 있으면 너보다 오래 산다고 하드라."
"그나저나 잘됐소. 이젠 얼굴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진짜 형님이 되었으니까."
말은 그리하고 있지만 소살우의 작은 눈에 눈물이 흘렀다. 더러운 인생이다.
누가 강호를 먹든 신경 쓰지 않고 사는데 그들은 왜 자신들을 노리는 것인지, 살아남는다는 게 왜 이리도 힘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임마! 작은 눈 부으면 아예 안 보인다."
"그럼 형님 눈은 보일 것 같소?"
"뱁새 자식이랑 눈 크기 재보기로 했는데……. 쿡쿡!"
"큭큭큭! 프하하하! 우하하하!"
두 사람의 공허한 웃음소리가 초리하에 울려 퍼졌다. 뱁새와 찍새가 죽었는데도 복수하러 가지도 못한다. 이제는 백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 하였다.
또다시 변하게 되면 못 온다 하였다. 자신이 못 돌아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언젠가 석숭이 했던 말,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했던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 게 인생이라 했다. 하고 싶다 해서 다 할 수는 없는 게 삶이라 하였다. 항상 무엇인가 부족한 삶이 최고의 삶이라 했다.
그래서 자신도 그 일을 한다고, 돈보다 더 중요한 무엇을 찾기 위해 황제를 돕는다고…….
"형님, 혼례 올리시오. 더 늙기 전에."
"나 아직 서른도 안 됐다, 임마!"
첫댓글 감사히감
잘 읽어 보고 갑니다.
겁고 행복한 날 되세요.
잘읽어 보구 갑니다
아름다운 일욜 되셔요^^*
감사 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잘 읽고 갑니다.
거운 시간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또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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