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157 : 漢高祖 列傳 10, 張良의 은퇴와 미인계
張良은 이橋를 떠나 天谷城(천곡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천곡성 동문을 나와 한참을 가다보니, 과연 조그만 언덕 위에 큰 누런 바위 하나가 장승처럼 서 있는 게 아닌가? "아! 이 바위가 바로 황석공 선생의 化身(화신)
이란 말인가?" 장량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며, 그 앞에 큰절을 올린다.
누런 바위를 <황석공 선생의 화신>이라고 확신한 장량은 바위 앞에 정성스런 祭物(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弟子(제자)로서 恩師(은사)에 대한 당연한 도리로 그곳에 黃石公 의 祠堂(사당)을 짓기로 하고, 사람을 사서 아담한 사당을 지어 놓았는데 지금 현재도 天谷城 동문 밖 언덕 위에는 張良이 지어 놓은 祠堂이 유적으로 남아있다.
張良은 황석공의 사당을 지어놓고 사람을 시켜, 해마다 제사를 지내도록 조치해 놓고 집으로 돌아 왔는데, 뜻밖에도 유방의 부름을 받는다. 유방은 장량을 기쁘게 맞으며 말한다. "선생을 만나지 못한지도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장량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聖慮(성려) 덕택에 無恙(무양)하게 지내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는 國務(국무)에 얼마나 분망하시옵니까
?" 유방은 이때다 싶어서 새삼스럽게 정색을 하며 말한다. "그렇지 않아도 나라에 번거로운 일이 생겨서, 오늘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일부러 모셨습니다." "번거로운 일이란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것
이옵니까?" "선생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지난번 묵특을 진평 대부의 美人計(미인게)로 잘 넘겼는데, 묵특이 속임수에 넘어간 사실을 알고 크게 분개하여, 또다시 大軍을 이끌고 침범해 온다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선생께서 좋은 계책을 말씀해 주소서."
유방의 표정은 매우 심각하였다. 장량은 오랫동안 심사숙고하다가 정중하게 대답한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臣은 現職(현직)
에서 물러난 이후 時局變化(시국변화)에 대한 관심이 크지 못하여, 전체적인 시대의 흐름에 둔감해졌사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진평 대부가 잘 알 수 있을 것이오니, 그에게 下問해 주시옵소서. 진평 대부는 누구 보다도 훌륭한 謨士(모사)이
옵니다."
유방은 그 말에 적잖이 섭섭한 빛을 보이며, "물론 진평 대부
와도 상의는 하겠소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도 선생의 말씀을 먼저 들어보고 싶어서 그러하오." 張良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과분하신 말씀, 聖恩(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러나 臣은 현직을 떠난 지가 오래 되어, 彼我間(피아간)의 정세에 너무도 어둡다보니 어찌 좋은 계책을 생각해 낼수가
있사오리까? 옛글에 結者解之(결자해지)라는 말이 있듯이 묵특의 문제는 당초부터 진평 대부가 취급해 왔으니, 이번에도
진평 대부로 하여금 해결하게 하는 것이 上策인 줄로 아뢰옵니다. 북방 오랑캐의 문제에 대해서는 劉敬 大夫도 매우 정통한 분이오니, 그 두 사람과 상의하시면 반드시 좋은 계책이 나올 것이 옵니다." (역시 천하의 張良이었다. 여기서 자칫 코를 꿰면 정치판에 다시 휘말리게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유방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 진평과 유경을 불러 상의하니 劉敬(유경)이 즉석에서 이렇게 아뢴다. "우리는 천하를 평정하느라고 너무도 오랫동안 싸워왔기 때문에, 이제 다시 묵특과 싸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옵니다. 하오니, 싸우기 보다는 政略(정략)으로써 冒頓(묵특)을 포용하는 방법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정략적으로 포용하는 방법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말하는 것이오?"
그러자 劉敬은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어렵게 말을 꺼낸다. "폐하께서 震怒(진노)
하실까 두려워 아뢰옵기 황송하 오나, 冒頓을 포용할 방법이 있기는 하옵니다." 유방 은 그 말을 듣자 얼굴이 밝아지며 묻는다. "모두가 나라를 위하는 일인데, 내 어찌 卿의 말에 노여워하 겠소!? 걱정 말고 어서 기탄없이 말해 보시오."
劉敬은 그제서야, "冒頓은 본래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위인입니다. 그가 진평 대부의 가짜 美人計에 넘어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가짜 미인계>가 아닌 <진짜 美人計>를 쓰신다면 묵특을 원만하게 포용할 수가 있으리라 생각되옵니다." "참된 미인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오."
그러나 劉敬은 말하기가 몹시 거북한 듯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유방의 재촉하는 視線(시선)이 느껴지자 눈 딱 감고 이렇게 말하였다. "폐하께서 사랑하는 美華公主(미화공주)를 冒頓에게 시집보 내시면 만사는 쉽게 해결 될 것이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자 소스라치게 놀란다. "뭐요? 내 사랑하는 딸 美華 公主를
冒頓에게 보내란 말이오?"
유방에게는 미화 공주라는 외동딸이 있었다. 딸이라고는 그것 하나뿐이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열여섯 살의 절세미인이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딸을 다른 사람도 아닌 오랑캐 두목에게 시집보내라고 하니, 유방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유방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劉敬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기
만 하다가, "卿은 지금 제 정신
으로 말씀하고 있는 게요? 나는 천하를 통일한 萬乘天子(만승천자)요. 美華公主는
만승 천자인 내가 金枝玉葉(금지옥엽)처럼 사랑하는 이 나라의 유일한 公主요. 그러한 내 딸 미화 공주를 어떻게 북방의 오랑캐 頭領에게 주라고 말씀하시오!"하고 정색하며 나무란다.
"......."
劉敬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머리만 숙이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만 있던 陣平이 머리 를 조아리며,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劉敬 大夫의 제안은 매우 절묘한 계책인 줄로 사료되옵니다. 폐하께서 미화 공주를 冒頓에게 보내 주시기가 무척 괴로우실 줄로 알고 있사오나, 미화 공주를 어찌 國家의 興亡과 바꾸지 않을 수 있으오리까? 폐하께서는 부디 통촉하시옵소서." 유방은 그 말을 듣고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쉬며 말한다. "卿도 劉敬 대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다는 말씀이 오?" 진평이 대답한다. "유경 대부께서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북방 오랑캐들은 군사력이 워낙 강하고 드세기 때문에, 지금 형편으로는 그들과 싸워 우리가 쉽게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적사옵니다. 설령 싸워서 이긴다 하더라도, 그때에는 국가재정이 매우 어려워질 것이옵니다. 그러나 劉敬 대부의 말씀 대로
冒頓을 사위로 삼으시면, 우리는 통일국가를 안전하게 보존해 가면서 북방 오랑캐의 광대한 영토까지 우리의 영향력 아래에 두게 될 것이오니, 그보다 더 좋은 方策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陣平의 말에 유방도 수긍 되는 점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사랑하는 외동딸을 오랑캐에게 시집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만약 두 분 말씀대로 미화 공주를 오랑캐에게 보낸다면 천하의 諸侯(제후)들 이 나를 얼마나 비웃을 것이오. 또, 미화 공주가 너무도 측은하게 여겨져, 그것만은 절대로 안되겠 소."하고 단호하게 거절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방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劉敬이 돌연 고개를 번쩍 들더니 큰소리로 외치듯 말한다. "폐하! 美華 公主를 묵특에게 보내지 않고도 타개할 방도가 방금 떠올랐사옵니다." 유방은 유경의 말을 듣고 반색하며 묻는다. "뭐요? 미화 공주를 冒頓 에게 보내지 않고도 위기를 타개할 방도가 있다고!?"
劉敬이 머리를 조아리며, "冒頓을 포섭하려면 미인을 보내주어야 하는 것은 바꿀 수없는 조건이 옵니다. 그러나 미화 공주를 절대로 보내주실 수 없으시다면, 백성 가운데 미화 공주처럼 아름답고 적당한 규수를 한 사람 구하여 양녀로
삼으신 後, 단기간에 皇室(황실) 규범을 가르쳐 묵특에게 보낸다면 효과는 100% 같을 것이옵니다." "과연!.... 그 누구도 생각 해 낼 수 없는 절묘한 方案(방안)이오!" 그리고 진평을 돌아다보며 묻는다. "진평 대부는 유경대부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진평이 머리를 조아리며, "유경 대부의 제안에 臣도 감탄해 마지않고 있는 중이옵니다."
그리하여 미화 공주 대신에 民家(민가)에서 아름다운 규수를 선발하여 冒頓에 게 보내주기로 결정한다. 민가에서 미화 공주 처럼 생긴 처녀를 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정에서는 미인 선택이 끝나자, 유방의 養女(양녀)로 삼아, 황실 법도를 단기간에 가르친 後, 劉敬으로 하여금 유방의 詔書(조서)와 함께 양녀를 대동하고 冒頓을 찾아 가도록 하였다. 양녀와 함께 묵특에게 보내는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前에 白登城 전투에서 그대를 속인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었소. 이에 朕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나의 공주를 그대에게 보내기로 하였으니, 그대는 공주와 백년가약을 맺음으로써 양국 간의 평화를 길이 도모해 주기 바라오.>
冒頓은 유방의 詔書(조서)를 받아보고 크게 기뻐하며, 곧 문제의 '진짜 공주 아닌 양녀 공주'를 만나 보았다. 冒頓은 본래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위인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보통 여자가 아닌 漢帝의 딸, 공주가 아닌가? 冒頓은 입이 찢어지게 벌어지며 유경에게 말한다. "大漢 皇帝께서 公主를 보내주 시면서 나를 사위로 삼으 시겠다고 하셨으니, 내 어찌
이런 영광을 사양하겠소이까? 이제 나는 황제 폐하의 사위가 됨으로써 우리 두 나라는 영원히 翁壻之誼(장인과 사위 관계)를 누리게 될 것이오. 대부께서는 가시는 대로 나의 이 맹세를 皇帝 陛下(황제폐하)께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오."
그리고 吉日을 택하여 혼례식을 성대하게 올렸다. 유경은 중대한 사명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와, 그간의 경위를 황제에게 고하니, 유방은 크게 기뻐 하며, "卿의 勞苦(노고)로 북방 문제는 이로써 원만히 해결되었으니, 오늘 밤부터는 다리를 뻗고 잘 수 있게 되었소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