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미 예수님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하신 예수님께서는 또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움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잘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프랑스에서 존경 받는 피에르 신부님께서는 평생 집 없는 이들을 위해 집을 짓는 엠마우스 운동의 시초이시며 휴머니스트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과 표현을 빌리면 결국 하느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잘못을 하면 벌을 주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무서워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흔히들 학창 시절에 하는 짝사랑에는 주로 나이가 많은 분들이 많습니다. 수줍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짝사랑하는 선생님께 다가가는 학생을 생각해 보시면 어떻습니까? 예전 저의 출신 본당에 보좌신부님이 무척이나 잘 생겼습니다. 저희 본당 학생 중에 왈가닥 여학생이 한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왈가닥 여학생이 보좌 신부님 앞에만 가면 어쩔 줄을 모르고 조심스러워하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다소 당황스러웠습니다.
즉,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기에 그 분 앞에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마주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또한 한편으로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드러내어 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떨리고 두려운 맘으로 앉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내가 깊이 인식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크기를 느낄 때, 우리의 무딘 마음도 움직여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두려워하는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은 “당신은 저의 피신처. 구원의 환호로 저를 감싸시나이다.” 하고 전합니다.
첫댓글 ㅎㅎ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가슴 저리게 다가옵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기에 그 분 앞에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마주함을 뜻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