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많고 수줍고 장난기 많던 그때 그시절! (퍼 옴)
작가 김명자
염소똥 굴러 가는 것만 보아도 까르르 웃던 꽃다운시절!
순진했지만 장난기가 심했다.
지금도 마음은 그 시절 못지않다.
청운령 추억들 중에 나를 가끔 미소짓게 하는 것이 있다.
그렇게 재미 있는 것도 아니니 기대는 하지 말길.
나의 치부를(전과)를 드러내는 것 같아서 익명난에 올릴까도 했는데
윤환 친구가 책임 질 것 같아서 그냥 ~~~~~.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면서 갑자기 추워진 어느날!
점심시간에 가까운 친구들과 어울려 동쪽 산 밑에 매점으로 갔다.
벌써 많은 학생들이 북적거렸고, 뜨거운 우동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남학생 여학생 줄을 서서(남학생은 여학생을
여학생은 남학생을 흘끔흘끔 바라보며)기다리고 있는데 1년 선배 언니가 먹던 우동 그릇을 들고 일어나
'매점아줌마, 여기 멀국 좀 더 주세요'하면서 큰 소리를 지르는 순간 '멀국?' 하면서 친구들 하고 킥킥대며 웃었다.
그런데 더 우스운 건 그 뒤 멀국을 얻어 돌아서는 순간 그 선배 명찰에 새겨진 이름이 너무나 웃겼다.
'이국자'
배꼽이 빠질 것 같이 웃었다.
우리는 우동도 먹는둥 마는둥 빼꼽을 빠지다 왔다.
담임 수업시간에 그 광경이 생각나서 또 킥킥대다가 들켜 앞으로 다 불려 나왔다.
석탄을 아끼느라 난로를 안 때주어서 발이 너무 시려워 발에다 장갑 끼고 다른 친구는목도리를 엉덩이에다 감고, 그대로 불려나갔다.
다른 친구들도 까르르 웃었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또 웃다가 복도로 쫓겨났고.
교무실로 불려간 우리는 부모님을 모셔 오라는 엄포를 받고 순진하게 실행했다(대전역에서 지게 지시는 분을 포섭. 대표로 아버지라).
그 대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선생님께서 출석부로 머리를 한 대씩 치셨다.
'아버지가 고생하셔서 공부 가르치는데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되야지. 알간?'
'네~~~~~'
'웃은 이유와 반성문 쓰셔~~~~~~'
반성문을 보신 선생님
'그게 그렇게 웃스워?'
선생님도 웃음을 꾹꾹 참는 눈치다.
그 뒤로 담임선생님과 더 친근해졌고 그 후 통지표 가정 통신란에
'밝고 명랑하며 감각이 뛰어난~~~~~~~'이라고 기재되었다.
싱거운 얘기지만 주말에 가볍게 웃어주길~~~~~~~
2001. 10. 13.
김명자(김명원으로 개명, 성악가, 등단 시인, 수필가)
지게꾼 아버지
최윤환
고향(충남 보령시 웅천읍) 가는 기차 차창가에 얼굴을 맞대여 들녘을 지켜보았다.
晩秋의 風致가 기다려지는 고향으로 가는 길목에서 느끼는 행복함은 나이를 먹어도 소년마냥 가슴을 뛰게 한다.
이 글의 제목은 '지게꾼 아버지'이어야 한다고!
대전 역전의 지게꾼 아버지는 말썽 많은 여고생을 둔 죄?로 하룻품을 허양치고 한밭 목동의 청운령을 넘어서 교무실에 들어 갔것다.
1. 그런데 우동 국물 "(멀국)"을 달라고 하였는데 왜 이 말에 많은 여학생들은 웃었을까?
2. 뒤에 선 선배 여학생의 명찰이 '이국자'였나 보다. 이름이 희한하게 해학적이다.
3. 그렇다면 '국자'는 주방의 조리기구로 해석된다. '멀국(우동)'을 '이 국자'로 '국물'을 퍼 주는 상황이렸다.
그래서 한바탕 웃었나 보다.
점심시간에 요절복통할 사건을 잊지 못하고 수업시간에도 그 웃음을 참아내지 못하고 끽끽!거리다가 선생님으로부터 들켰것다.
또 상황은 반전한다.
발이 시려워 언발에 손에 끼는 장갑을 신고 또 목도리를 엉덩이에 감은 채 교실 앞에 나가야 했을 상황이 웃음거리를 만들었으며, 그래서 학생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으리라.
진짜 웃기는 대목은 이 사건의 말미일 게다.
'학부형을 모시고 와.'
선생님의 엄포를 어기지 못하고 이 말썽꾸러기 여학생들은 마지 못하여 대답은 하였을 것이다. 집에 가서 부모님에게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궁리를 한 것이 고작 '가짜 아버지'를 만드는 공모였을 것이다.
수업 후 대전역에 나가 허수름한 지게꾼과 교섭하여 진짜 아버지를 대리토록 약속을 하였을 것이다.
익일 이 가짜 아버지는 지께군의 복장 대신에 부자유스운 복장(아마 양복)을 입고서 또 가짜-딸인 '명자'의 이름을 까먹지 않으려고 속으로 암기하면서 '학부형의 대표'가 되었을 것이다.
과연 천연스럽게 연기를 멋지게 하여서 선생님을 감쪽같이 속여 넘겼을까?
명자씨의 글을 보면 성공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나 이 지게꾼 아버지의 입장이 궁금하다. 아마 그 분은 속으로 땀 깨나 흘렸을 것이다(어휴. 돈 벌기 어려워!).
또한 이 엄청난 해학적인 상황을 연출한 여학생들은 행여나 들통이 나지 않을까 마음을 조리면서도 자신들의 기발한 생각과 돌발적인 행동에 또 얼마나 웃었으랴?
한밭의 터 청운령의 아릿다운 여고생들만이 만든 웃음이었을 게다. 삼십여 년 전의 웃음이 신선하여 좋다.
그래서 장난끼 많은 학창시절의 이야기를 더 들려주기 바라오.
2001. 10. 15. 유나니가...
※
한밭은 대전직할시.
중구 목동에 있는 남녀공학 고등학교이었으나 1970년에 나눠졌다. 아쉽게도..
아카시나무가 엄청나게 많던 교정이었기에 청운령(靑雲嶺)으로 불렸다. 주변에 복숭아 과수원도 있어서 5월이면 꽃내음새가 교정에 가득 찼다.
내가 위 글을 읽고서 당시에 쓴 산문이다.
1960년대 중반에 대전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 꿈처럼 뒤로 사라졌고, 수십 년이 지난 뒤인 지금에는 많이도 지워졌다.
나는 쌍둥이. 동생은 고교 졸업 후 다음다음해에 뱀물려 죽었기에 나는 학창시절을 애써 잊으려고 했으며, 많은 세월이 흘러서야 동생과 함께 학교 다녔던 학창시절을 다시 회상하기 시작했다.
고교 여자친구 카페에서 찾아내서 '한국 국보문학'에도 옮긴다.
이런 글은 수필보다는 꽁트, 산문에 어울릴 게다.
당시의 남녀 동창생은 문학끼가 많았을까? 예술계통에 활동하는 친구가 많다. 화가, 문학가, 사진작가, 성악가 등 ...
나는 딱딱한 길로 들어섰고...
2020. 3. 3. 최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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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양짱 카페에 있다.
다시 읽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