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조선의 전쟁이야기 - 용골산성 전투조선의 백성, 나라를 위해 떨쳐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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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29. 04:19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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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골산성 전투
조선의 백성, 나라를 위해 떨쳐 일어나다.
1) 용골산성 전투의 개요
용골산성 전투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당시 의병장 정봉수(鄭鳳壽, 1572~1645)와 정기수(鄭麒壽, 1575~1668) 형제가 평안북도 염주군과 피현군 경계의 용골산에 위치하였던 산성에서 수천의 의병과 더불어 후금(後金)의 군대를 크게 물리쳐 승리한 싸움이다.
2) 용골산성 전투의 전개 과정
인조반정 후 들어선 서인정권이 후금에 대해 적대적인 자세를 고수함에 따라 조선과 후금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으며, 결국 1627년 정월 후금이 3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조선을 침입한 정묘호란이 발발하게 된다. 국경을 돌파한 후금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조선 관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 해 1월 말부터 2월에 걸쳐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해 후금군에 저항하였는데, 이때 의병장 정봉수가 이끄는 의병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다. 정봉수는 영산현감을 지낸 전직관료로서,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당시 용골산성에는 성이 험해 적을 피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인근 고을 백성들이 많이 모여 들었는데, 이들이 의견을 모아 정봉수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때를 기다리던 정봉수가 쾌히 응하고 의병 모집에 박차를 가하자 며칠 안 되어 수천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다.
그는 출신(出身 : 무과에 급제하고 아직 벼슬에 나가지 않은 사람) 김종민(金宗敏)을 중군으로 삼고 미곶첨사(彌串僉使) 장사준(張士俊) 등과 함께 성을 지켜 난을 피해 모여든 백성들을 구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고립되어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성을 지킨다는 것은 무리라 판단하고, 평안감사에게 피난민들을 산군(山郡)으로 철수시킬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정봉수는 이를 듣지 않았다.
성을 함께 지키기로 한 장사준이 몰래 후금 진영과 내통하면서 정봉수에게 함께 투항할 것을 권유했으나 이를 거절한 정봉수는 성안으로 들어가 장사준을 벤 후 남은 병사를 모아 결사의 각오로 적의 완강한 공격을 물리쳤다.
정봉수는 조선과 후금 사이에 이미 화의가 성립되었음에도 계속 성에 머물면서 항전하였다. 이에 후금군은 의주 · 창성 · 곽산의 병력을 총집결해 이 성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도리어 많은 전사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이어 후금군 부장(副將) 유해(劉海)가 정봉수에게 여러 차례 성을 나와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정봉수가 이에 불응하자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다시 많은 사상자만 내고 의주로 퇴각하였다.
용골산성 전투는 조선과 후금 사이에 화의가 성립된 뒤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에, 후금에게 조선이 맹약을 위배했다고 꼬투리를 잡을 수 있는 구실을 주기는 하였으나, 정봉수 형제와 휘하 의병들의 용감한 항전은 조선에도 힘과 용기 있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후금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싸움이었다.
3) 용골산성 전투 관련 문헌
용골산성 전투와 관련된 기록은 『인조실록(仁祖實錄)』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으며, 사찬 자료 중에는 정봉수, 정기수 형제의 후손들이 선조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편찬한 『용성쌍의록(龍城雙義錄)』, 임진왜란 시기 의병장으로 활약한 바 있었던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이 17세기 초반 조선의 대명 · 대청 외교활동과 관련된 기록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평가받는 『속잡록(續雜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정묘 · 병자호란 시 왕을 호종하며 전란을 직접 경험하였던 장유(張維, 1587~1638)의 문집인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등이 관련 기록을 담고 있다.
及丁卯春 虜大擧入寇陷義州 凌漢安州相繼失守 ··· <중략> ··· 時龍骨無守將 叛人張士俊 以城應賊 府中士民 相率倡義 誅士俊 推郡人鄭鳳壽爲將 入城保守 無何賊大至 城中人悉力死鬪 殺賊無算 賊屢進屢却 悉取死尸焚之而遁去 自是不敢復犯 當是時 虜兵乘勝勢甚盛 名城巨鎭 望風摧敗 而龍骨以孤城弱卒 獨能却賊立功 使關西一面隱然倚重 及虜之卷而歸也 兩西被俘男婦數千口逃歸者 皆入城得活 論者以是益歸功于是城云
정묘년 봄에 이르러 오랑캐가 대거 침입해 들어오자 의주(義州)가 함락되면서 능한[凌漢, 곽산(郭山)의 산성(山城)]과 안주(安州)의 방어선도 잇따라 무너졌다. ··· <중략> ··· 이때 용골(龍骨)에 지키는 장수가 없자 장사준(張士俊)이 모반을 일으켜 성을 적에게 내주려고 하였는데, 부중(府中)의 사민(士民)들이 너나없이 대의를 부르짖고 나서서 사준을 죽이고 군인(郡人) 정봉수(鄭鳳壽)를 추대하여 장수로 삼은 뒤 성에 들어가 굳게 지켰다. 얼마 뒤에 적의 대병력이 이르렀는데, 성안의 사람들 모두가 단결하여 사투(死鬪)를 벌이면서 적을 무수히 쓰러뜨렸다. 이에 적이 몇 차례나 진격과 퇴각을 반복하다가 죽은 시체를 한군데 모아 불태운 뒤 달아났는데, 이 뒤로는 감히 다시 범하지를 못하였다. 그 당시에 오랑캐 군사가 승승장구하며 무척이나 기세를 떨치고 있었으므로 이름난 성(城)과 거대한 진(鎭)들이 소문만 듣고도 무너지는 형편이었는데, 용골의 경우만은 그야말로 약한 군사들이 외로운 성에 의지하여 지키는 처지에서도 적을 물리쳐 공을 세움으로써 관서(關西) 지방에 믿고 의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급기야 오랑캐가 군대를 철수해 돌아갈 적에,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에서 포로로 잡힌 남녀 수천 명이 도망치면서 모두 이 성에 들어가 목숨을 구하였는데, 논자(論者)들은 바로 이 점을 들어 더욱 이 성에 공을 돌리고 있다.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14권 비명(碑銘) 용골성 고 부사 이공 비(龍骨城故府使李公碑)
(원문뷰어 14권 78쪽 / 원문 권14 1쪽)
[네이버 지식백과] 용골산성 전투 - 조선의 백성, 나라를 위해 떨쳐 일어나다.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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