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신화속의 주요 신들
식물과 대지의 신으로, 이집트의 신들중 가장 추앙받는 신입니다. 신화에 따르면 땅의 신 게브와 하늘의 신 누트의 사이에서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네프티스의 2남 2녀가 태어났습니다. | |
오시리스(Osiris) | |
보호의 여신으로 오시리스의 아내이자 동생입니다. 위대한 마력의 소유자로 주문과 마술을 행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
이시스(Isis) | |
매의 머리를 한 신으로서 지상세계를 지배하는 신입니다. 오른손에 생명의 상징인 부적을 들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왕권의 상징으로 이해되어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오시리스의 아들인 호루스와 동일시 되었고, 스스로 호루스임을 자처했습니다. | |
호루스(Horus) | |
재칼머리에 남자의 몸을 한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 |
아누비스(Anubis) | |
이시스의 자매신으로, 여성의 신입니다. 네프티스란 '성의 여주인'이라는 뜻으로, 그녀가 부활을 도운 오시리스와 관계가 있습니다. | |
네프티스(Nepthys) | |
'호루스의 집'이라는 의미의 하트-호루스(Hat-Horus)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암소, 또는 '뿔의 관'을 쓴 여성의 모습을 한 사랑의 여신으로, 행복, 무용, 음악의 여신이기도 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하토르가 일곱이나 나타나 아이의 장래를 정하였습니다. | |
하토르(Hathor) | |
신화상에서 악의 신으로 묘사되며, 모든 악과 앙상함, 폐허들의 상징이지만 상 이집트의 주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거대한 귀를 가진 당나귀와 비슷한 가공의 동물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막과 태풍과 유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
세트(Seth) | |
지혜의 신으로, 따오기나 비비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달과 관계가 있으며, 스스로의 빛으로 밤의 어둠을 몰아낸다고 하였습니다. 헤르모폴리스 신화의 주신으로, 신들의 대변인이며, 우주창조의 신입니다. | |
토트(Toth) | |
'보이지 않는 신' 아문은 이집트 주신 가운데 하나로, 흔히 '신들의 왕'이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 |
아문(Amon) | |
멤피스의 지방신으로 직인의 수호신으로, 미이라의 두손이 와스(Was), 안크(ankh), 그리고 제드(died) 장식의 지팡이를 든 모습으로 형상화 되었습니다. | |
프타흐(Ptah) | |
헬리오폴리스의 태양신으로 제5왕조 시대에 주신이 되었습니다. | |
라(Ra) |
영생의 비밀을 푸는 열쇠들!
이집트의 왕관은 모두 다섯 종류인데, 지역에 따라 상 이집트의 왕은 큰 원추형에 끝이 뾰족하게 높이 올가간 흰색 왕관을 썼으며, 하 이집트의 왕은 머리 윗부분이 납작하고 귀가 길게 솟은 붉은 색 왕관을 썼습니다. 기원전 3000년경 상 이집트의 나르메르왕에 의해 통일이 된 이후로 파라오는 두 왕관을 한꺼번에 씀으로써 통일 왕국을 통치하는 힘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이밖에도 전투에서 사용되는 푸른 왕관과 종교적 제례에서 사용하는 아테프(atef)가 있습니다. | |
파라오의 왕관 | |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 뒤에도 자신의 모습을 담은 그림, 조각등을 무덤이나 신전에 비치함으로써 영생에 이르는 삶을 누릴수 있게 하였습니다. 여러 형태의 조각상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육면체상입니다. 육면체로 만들어진 몸통부분은 죽은 이의 이름, 직함, 공적, 또는 영생을 비는 기원문등을 새겨 넣거나 특별한 의도의 부분 조각을 첨가할수 있는 면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 |
육면체상 | |
고왕국시대 건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문은 장례때 제사의식을 집행하는 방에 세워졌던 것으로, 죽은 자의 영혼 카(ka)가 이리로 드나들며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다음 세상에서 사는데 필요한 제물이나 기도를 받아들이는 마술적인 기능을 했던 장치입니다. 고왕국시대 무덤의 가장 깊은 곳에 비석처럼 세워졌습니다. 문위에는 창문 모양을 만들어 죽은 자의 모습을, 문에는 죽은 자가 마치 저승에서 막 나오려는 듯한 모습을 새겨 넣었습니다. | |
가짜문 | |
샤브티('대답하는 사람'이란 뜻)는 죽은 자의 시중을 들기 위해 무덤에 같이 넣었던 사람 모양의 노예인형들입니다. 사람 모양을 작게 만들어 장례때 시신과 함께 부장하는 관습은 중왕국시대에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자 모습은 없고, 대부분 남자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입니다. 죽은 사람의 성이나 지위를 막론하고 누구하고나 같이 묻혀 다음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 |
샤브티 | |
고대 이집트의 상징물중 가장 잘 알려진 사인입니다. 상형문자로 '생명', '살다'라는 뜻을 의미하는 이 기호는 T자 위에 타원형의 고리가 연결되어 있는 모습으로 삶과 관련된 모든 의미를 나타내는데 사용됩니다. 신전에 봉헌할 조각이 완성되면 최후로 사제가 안크를 조각의 코에 대어 영원히 살수 잇는 생명을 불어 넣어 주었다고 합니다. 생명을 관장하는 신과 여신의 손에는 항상 안크가 쥐어져 있습니다. 후에 이집트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그리스도교의 상징물(십자가)로 편입된 듯 합니다. | |
안크 십자가 | |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을 거대한 쇠똥구리가 굴리고 다니는 원반이라고 여겼으며, 쇠똥구리를 통해 생명의 원천을 상징하였습니다. 또한 쇠똥구리의 번식방법에서 탄생과 새로운 생명, 더 나아가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따라서 쇠똥구리는 삶을 상징하는 색인 파란색, 녹색의 재료로 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로써 저승의심판에서 괴물에게 잡아 먹히는 것에 대비해 죽은 자의 가슴에 쇠똥구리 장식을 매달거나 부착함으로써 죽은 자가 반드시 영생을 살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 |
쇠똥구리 장식 | |
미이라가 되어 영생을 누리는 죽은 자가 손과 발의 기능을 상실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시체를 썩지 않고 그대로 마르도록 처리하는 과정에서 손가락 마디, 발가락 바디가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균이 침입하기 쉬운 신체의 끝부분이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중왕국시대부터 손가락, 발가락 싸개를 만들어 손가락과 발가락을 각별히 보호하였습니다. | |
미이라 손가락,발가락 싸개 | |
사람이 죽으면 미이라로 만들어 관속에 눕혔습니다. 이 관은 맹수나 무덤 도굴꾼으로부터 미이라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무엇보다 죽은 자의 영혼이 머무르는 집으로 여겨졌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직사각형 형태였으나 중왕국시대에 이르면서는 미아라와 같은 사람 모양의 형태가 등장하였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몇겹으로 관을 만들기도 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도금을 하거나 보석으로 치장을 하는등 화려한 관이 만들어졌습니다. | |
관 | |
죽은 자를 미이라로 만들때 꺼낸 내장을 보호하는 용기입니다. 간, 허파, 위, 창자를 담는 네개의 단지로 이루어집니다. 그 재질은 석회암, 알라바스터, 도기, 나무등으로 용기의 뚜껑 부분에도 여러가지 세공을하였습니다. 이 단지들은 미이라의 관옆에 매장되었습니다. | |
카노푸스 단지 | |
약 200개의 주문들로 이루어진 장례문서로 기원전 16세기경부터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파피루스에 기록된 '사자의 서'는 관속에 넣거나 미이라를 감싸고 있는 천속에 끼워져서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 내용중에서 소위 '부인하는 고백' 부분, 즉 살아 생전에 이러이러한 나쁜 일들을 하지 않았다는 고백의 내용은 42명의 신들에 대하여 차례로 진행됩니다. | |
사자의 서(書) |
Ⅰ. 이집트의 신들
1. 라(Ra)
라는 '창조자' 라는 뜻이며, 하늘의 절대적 지배자인 태양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그의 성소(聖所)는 북부 이운에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그곳을 헬리오폴리스라고 불렀던 것이다.그 도시의 사제들은, 태양신 라는 벤벤이라는 돌에 오벨리스크의 형태로 처음으로 몸소 구현했다고 믿고 있으며 그 돌은 헤트 벤벤, 즉 오벨리스크관(館)이라는 사원에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다.
사제들의 말에 따르면 본래 태양신은 원초의 대양인 '눈'의 품안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양신은 그 광채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눈을 감는다든지 하얀 연꽃 속에 숨는 등 갖은 고생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의 힘으로 대양위에 우뚝 일어서서 '라' 라는 이름으로 찬란하게 빛났던 것이다. 라는 젊고 활력 넘치던 시절에는 신들이나 인간들을 평화롭게 통치할 수 있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의 젊음과 건강은 빛을 잃어갔다. 그가 떨리는 입언저리에서 줄곧 침을 흘리는 노인으로 묘사된 기록도 남아있다. 훨씬 뒤에 라가 노쇠해지자 이시스가 라의 신비로운 이름을 물려받고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태양신이 인간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 하늘로 올라간 이후, 그는 거기에서 틀에 박힌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낮의 열 두 시간을 쪽배를 타고 그의 적 아포피스의 공격을 피하려고 애쓰면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그의 제국을 누빈다. 아포피스는 하늘의 나일강에 사는 거대한 구렁이인데, 그가 태양의 배를 뒤엎을 때가 바로 일식(日蝕)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아포피스는 언제나 라의 부하들에게 몰매를 맞고 결국 지옥의 바닥으로 떨어진다.
라에게 있어서 밤의 열 두 시간은 더욱 위험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항상 그 위험에서 벗어나 동굴에서 동굴로, 그의 빛을 필요로 하는 저승 세계의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으며 다닌다. 그리고 그들은 또다시 암흑의 괴로움에 빠지는 것이다.
라는 매일 아침 어린이의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설도 있다. 그는 낮 열 두 시 까지는 성인이 되었다가 점차 노인이 되어 밤에는 죽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알려진 것처럼 여러 가지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탄생한지 얼마 안 되는 연꽃 위에 있는 왕자의 모습으로 불을 토하면서 신의 적을 무찌르는 성스러운 독사 우라에우스에게 둘러싸여 태양의 원반을 머리에 얹고 앉아 있거나 걸어가고 있는 남자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는 밤을 누비며 다니는, 죽은 태양을 상징하는 양의 머리를 지닌 남자의 모습으로도 표현된다. 역시 성스러운 뱀 우라에우스에 둘러싸인 원반을 머리에 얹은 매의 머리를 갖고 있는 인물로도 묘사된다. 그것이 바로 헬리오폴리스의 태양신 이집트의 지배자 라 하라크티이다. 그 밖에 라의 모습이나 수는 매우 많으며 라 자신이 그것을 자칭하고 있다.
왕의 분묘 입구에 태양에 대한 기도문에 새겨져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이름이 75개나 된다. 창조자로서, 세계의 지배자로서 널리 알려진 라는 다른 신들까지 차례차례 동화시켜 고왕국 시대 이후 국왕들로부터 가장 숭배받는 신이 되었다. 그리고 국왕들은 스스로 '라의 아들' 로 자처했다.
그것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는 루디트디디트라는 여자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다시 그 자신이 태어났다. 루디트디디트는 제 5왕조 초기의 세 왕의 아내가 된 여자이지만, 라는 그 왕이며 아들이기도 했다. 즉 그가 지상으로 돌아가서 왕비와 결혼할 때마다 국왕이 태어난 것이다. 태양신 라는 헬리오폴리스의 멋진 성소에서 돌로 표시된 태양의 광선, 즉 거대한 오벨리스크의 모습으로 예배를 받고, 성스러운 소 므네비스로도 변신했으며, 때로는 베누라는 새로도 변했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는 폐허와 제 12왕조의 세누세르트 1세에 의해서 세워진 오벨리스크 뿐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 현존하는 오벨리스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2. 눈 ( Noun)
눈은 카오스(그리스 신화에서, 우주의 발생 이전의 원시적인 상태를 일컫는 말, 우주는 이 상태에서 생겨났다고 함)이며 창조에 앞서서 모든 것, 생물의 근원을 품고 있는 원초의 대양이며 몇몇 문헌에서는 이것을 '신의 아버지' 라 일컫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지적인 관념에 그치고 사원도 숭배자도 없었으며 흔히 물속에 몸을 반쯤 담근 채, 위로 뻗친 팔로 그 자신에게서 탄생한 신들을 받치고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3. 아툼(Atoum)
아툼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는 '가득 차 있다.'를 뜻하는 어원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처음에는 헬리오폴리스의 지방신이었는데 여기서는 성스러운 동물, 즉 므네비스로 간주 되고 있다. 그러나 일찍이 헬리오폴리스의 사제들은 이것을 위대한 태양신 라와 동일시 했다.
그리고 그들은 창조에 앞서 원초의 대양인 눈 속에 아툼이라고 불리는, 온갖 실재를 내포하는 아직 밝혀지지 않는 정령이 살아 있고, 그것이 어느 날 '아툼 라' 라고 자칭하며 신들와 인간들과 그 밖의 모든 존재를 낳았다고 한다.
훨씬 뒤에 아툼은 가라앉는 태양과 일출 전의 태양의 인격화가 되어 그에 대한 제사는 이집트 전역에 걸쳐서 라의 제사와 더불어 상당히 보급되었다. 일반적으로 아툼은 인간의 선조라 생각되었고, 항상 왕의 쌍관 '푸스칸트'를 쓴 남자의 머리 부분으로 표현 되어 있다.
처음에는 독신이며 여자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의 몸에서 최초의 신 한 쌍을 탄생시킨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에게 하나 또는 두 배우자를 연관시키게 된 것은 훨씬 훗날에 가서였다. 예컨대 멤피스에서 그는 쥬사스 또는 네베트호텝과 동일시되며, 슈와 테프네트의 쌍둥이를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4. 슈(Shou)
슈는 쌍동이인 누이동생 테프네트와 헬리오폴리스 신화 가운데 최초의 부부로 되어있다.
그의 이름은 '높이다'를 나타내는 동사에서 유래했으며, '들어올리는 것' 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 신화의 아틀라스처럼 하늘의 기둥이지만, 라의 명령을 따라 두 어린 대지신 게브와 하늘의 여신 누트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때까지도 게브와 누트는 꼭 붙어 있었는데, 슈가 누트를 들어올려 두 팔을 뻗친 자세로 공중을 떠받들어 그 둘을 떼어놓았다.
슈는 또한 공기의 신이며 성스러운 공허의 신이다. 그러나 다른 위대한 자연신들처럼 제사를 받지 않으며 항상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보통 머리 위에 독특하게 타조의 깃을 달고 있는데, 그것은 슈의 표의문자이다.
라의 후계자로서, 지상의 주인으로서 그는 아버지인 라와 마찬 가지로 그 권력의 성쇠를 맛보았다. 즉 아포피스의 자식들이 음모를 꾸며 아트 누브에 있는 궁전에서 그를 습격했기 때문이다. 슈는 그들과 싸워 이겼지만 그가 병이 들자, 충실한 신자들까지도 그를 배반했다.
5. 테프네트(Tefnet)
테프네트는 현실적인 인간상이라기 보다는 신화적인 본질로 생각된다. 헬리오폴리스에서 그녀는 슈의 누이동생이며 아내인 여성으로 되어 있다. 테프네트는 이슬의 여신 또는 비의 여신이었지만, 그녀 역시 태양과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녀를 암사자의 모습이나 사자의 머리를 한 여자의 모습으로 숭앙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리스인들은 아르테미스와 동일시하고 있었다. 테프네트는 여러 문서를 통해서 슈의 창백한 묘사(描寫)에 불과한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그녀는 슈를 도와서 하늘을 받치고 태양이 동쪽 산에서 떠오를 때 그와 더불어 갓 태어난 어린 태양을 매일 아침 맞이하는 것이다.
6. 게브(Geb)
게브는 누트와 함께 헬리오폴리스신화 가운데 제2의 부부이며 플루타르코스에 의해서 크로노스와 동일시되고 있다. 사실 게브는 대지의 신이며 이 세상의 근원적인 기반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제사 다운 제사를 거의 받지 않았던 것 같다.
게브는 슈에 의해서 그의 아내이며 누이동생인 하늘의 여신 누트와 떨어졌기 때문에 그 후로는 비탄에 잠겨 그 울음 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려퍼졌다. 때때로 게브는 슈의 발밑에 누워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그는 슈로부터 그의 아내를 지키려는 헛된 몸부림을 치고 있다.
한쪽 팔꿈치와 한쪽 무릎으로 몸을 들어 올린 자세는 그의 몸이 나타내는 산이나 땅의 높낮이를 상징하는데 때론 그 위에 나무가 그려져 있다. 대체로 게브는 특정한 부속물을 갖지 않는 사나이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의 표의문자인 거위를 머리에 얹은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어떤 전설에는 '위대한 수다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숫거위로 되어 있고 그 거위의 암컷이 태양의 알을 낳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쨌든 게브와 누트는 오시리스의 신들을 낳아, 게브에게는 '신들의 아버지'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게브는 3대째의 신의 왕으로서 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비교적 파란만장한 통치를 했다.
어떤 성소(聖所)의 유물을 빛내고 있는 한 기록에는, 게브는 그의 면전에서 성스러운 뱀 우라에누스가 갇혀 있는 황금 상자를 열게 했는데 그 뱀은 다시 살아나 게브의 신화들을 순식간에 물어 죽이고 게브 자신도 심한 상처를 입은 것으로 되어 있다.
우라에누스는 너무나 위험한 부적이기 때문에 라가 그의 지팡이와 한줌의 수염과 함께 왕국의 동쪽 변경에 있는성곽 속에 놓아두었었는데 오직 라의 그 수염 다발만이 게브의 상처를 낫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성스러운 수염은 훨씬 뒤에 물에 빨기 위해 아트 누브 호수에 넣었을 때 금방 악어로 변했다는 것이다.
게브는 건강을 회복하자 그 왕국을 훌륭히 통치하고 이집트 전역의 상태를 아주 세심하게 정리했다.
이어서 그는 그 권력을 장남인 오시리스에게 물려주고 하늘로 은둔하여, 거기서 때때로 토트 대신 라의 군사(軍使)가 되고 또 신들의 지배자가 되었다.
7. 누트(Nout)
누트는 하늘의 여신으로서 역사 시대에는 제사의 대상이 되었었다. 그리스인들은 그녀를 태양신 라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녀는 대지의 신 게브와 쌍동이인 누이동생이었는데, 라를 배반하고 무의식중에 오빠와 부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노한 신은 슈로 하여금 그 둘을 떼어놓게 한 다음, 누트에게는 1년에 한 달도 땅에 눕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다행히도 토트가 그녀를 가엾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달과 내기 장기를 여러 번 두어 마침내 달의 72번 째 빛을 손에 넣어 닷새 동안을 간직했는데 그 5일간의 정력(正歷)으로는 계산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누트는 연달아 그녀의 다섯 아이(오시리스, 하로에리스, 세트, 이시스, 네프티스)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늘의 여신 누트는 때때로 손발을 쭉 편 여인으로 표현된다. 그녀는 발가락 끝으로 발돋움을 하고 서서 손가락 끝을 대지에 대고 있으며, 별이 아로새겨져 있는 그녀는 배가 슈에 의해 받쳐져 공중에 떠서 하늘의 궁륭(한가운데가 제일 높고 사방 주위는 차차 낮아진 하늘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너무 높이 솟은 나머지 현기증이 일어났다. 그래서 네 발, 즉 하늘의 네 기둥이 된 그 네 발에 각각 신(神)을 하나씩 두어 그 발을 받치도록 하였다.
한편 슈는 그녀의 배를 받쳤다. 그래서 그 배가 하늘이 되고 라는 지상에 사는 인간의 세계를 밝혀주기 위해 그 배에 별과 성좌(星座)를 박아 놓았다.
가끔 라의 딸의 자격으로 누트 역시 태양의 어머니로 대접받기도 한다.태양은 아침마다 여러가지 형태로 그녀의 가슴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또한 누트는 한 마리의 암소로 표현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반역을 겪은 다음 원초의 대양인 눈의 명령으로 대지를 떠날 결심을 한 아버지 라를 등에 업고 갔을 때, 그녀는 암소의 모습을 했었기 때문이다.
누트는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될 때 간혹 그 이름의 표의문자인 둥근 항아리를 머리 위에 얹고 있다.
또한 그녀는 죽은 자의 수호여신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죽은 자를 꼭껴안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돌로 만든 관의 뒷면에는 여신이 미이라 위에 별처럼 찬란한 몸을 펼치고 우아한 자태로 죽은 자를 지켜보고 있는 그림이 있다.
8. 오시리스(Osiris)
오시리스는 이집트어의 우시르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오시리스를 그들의 수많은 신들 가운데 특히 디오니소스와 동일시하고 있다. 처음에는 자연의 신이요 식물의 정(精)의 변신으로서, 수확기에 죽고 곡식의 배아와 더불어 다시 살아난다고 믿어지는 오시리스는 죽은 자의 신으로서 이집트 전역에서 숭배받았다. 그는 그런 자격 때문에 이집트의 많은 신 가운데 제 1위에 속해 있는 것이다. 오시리스는 게브와 누트의 장남으로 상이집트에 테베에서 360일 이외의 제 5일 중 첫날에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신비스런 목소리로 '세계의 주인' 이라고 선언하여, 그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기쁨의 탄성을 올렸다. 그러나 이윽고 그를 위협하는 불행을 깨달았을 때 그 탄성은 통곡 소리와 슬픈 노래로 변했다.
라는 그선언을 듣자 앞서 누트에게 저주를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의 손자인 오시리스를 불러 그의 왕위 계승자로 인정했다. 오시리스는 큰 체격에 미남이었다, 아버지인 게브가 하늘로 은둔한 후, 그는 이집트 왕위를 계승하고 누이동생인 이시스와 결혼했다. 이 새지배자의 최초 관심사는 거의 미개상태로 있는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사람 고기를 먹는 습관을 없애고 들판을 경작하는 도구를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빵과 포도주와 맥주 따위의 음식물이 되는 보리나 포도를 생산시키는 일이었다. 오시리스는 그때까지 행해지지 않았던 신들에 대한 경배를 명령하여 사원을 세우고 최초의 신의 모습을 조각 하였으며 의식의 항목을 자세히 정하고 이어 제전의 합창 반주로 쓰이는 플루트 두 종류를 발명하기까지 했다. 그 후 오시리스는 여러 도시를 건설하고 주민들에게 올바른 법을 가르쳤다.
이렇게 그는 4대째의 신왕(神王)으로서의 이름 우노프리스, 즉 '착한 존재'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존재였다. 그는 이집트를 계발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의 올바른 정치를 전세계에 미치게 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이시스에게 통치를 맡기고 재상 토트, 지휘관 아누비스, 오포이스 등을 데리고 아시아 정복의 길에 나섰다. 어떤 폭력에도 반대하는 오시리스는 오직 자애로써 이 나라 저 나라를 정복해 나갔다. 그는 노래와 온갖 악기를 연주함으로써 주민들의 마음을 풀고 그 무장을 풀게 했다. 그는 온 지상을 누비며 도처에 문명을 보급시킬 때까지는 이집트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이집트에 돌아온 오시리스는 그의 왕국이 자신이 없는 사이에도 아내인 이시스에 의해 현명하게 통치되어 완전한 상태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윽고 그의 권력을 시기하는 동생 세트가 꾸민 음모에 말려들게 되었다.
이집트를 통치한지 28년 되던 해에 '착한 존재'로 불리우던 오시리스는 반역자에 의해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충실한 아내가 남편의 시체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소생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래서 게브가 주재하는 신들의 법정에서 세트의 비난에 대하여 오시리스가 억울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다시 살아난 뒤에 죽음으로부터 보호 받기로 된 오시리스는 왕좌에 다시 올라 살아 있는 사람들을 통치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지상을 버리고 '극락정토'에 안주하기를 원했으며, 거기에서 바르게 살다 온 영혼을 맞아 죽은 자들을 통치했다. 이것이 오시리스의 전설인데, 그 전설의 기원이 확실하다면 오시리스는 어떤 정복 부족(征服部族)의 물신(物神)으로 볼 수 있다. 그 부족은 처음에는 하이집트 지방의 부시리스의 자리에 모셔졌는데, 안치의 형태와 이름까지 그대로 써버렸다. 이어서 훨씬 뒤에 상이집트의 아비도스에 거처를 정했는데, 여기서 테엔스의 지하 묘소와 낭신(狼神) 켄트투, 서방인들의 우두머리, 즉 태양이 지는 땅에 거처를 갖는 죽은 자들의 우두머리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오시리스가 진실로 널리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은 죽은 자의 신으로서였다.
왜냐하면 그는 신자들에게 저승에서 올바르고 선량한 왕 밑에서 행복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오시리스의 그 장엄한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자나, 적어도 자기의 이름을 새긴 비를 세우게 할 수 있었던 자는 행복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내세에 '착한 왕'이라는 위치를 보증받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오시리스는 몸에 꼭 끼는 가늘고 흰 줄무늬 옷을 입고 서있거나 왕좌에 앉아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초록 빛이 감도는 그 얼굴에는 타조의 깃 두 개를 단 높고 흰 사교관(司敎冠), 즉 '아테프'라 불리는 것을 얹고 있다. 목에는 붉은 끈을 매고 수의에 나와 있는 두 손은 가슴 위에, 회초리와 홀(忽), 즉 지상권을 나타내는 갈고리 모양의 왕홀(王忽)을 엇갈리게 얹어놓고 있는 것이다.
9. 이 시스(Isis)
이시스는 그리스어의 이세트에 해당하는 말로 그리스인들에 의해서 데메테르, 헤라, 셀레네 등과 동일시되며 후에 이시스와 하토르가 혼동되자 아프로디테와도 동일시되었다. 이시스는 게브와 누트의 장녀로서 에파고메노스의 4일째 델타 지방의 저습지에서 태어났다. 오빠인 오시리스의 아내로 택해진 그녀는 그녀와 더불어 살아있는 사람들을 다스리는 왕좌에 앉아 오시리스의 개화사업을 도와, 여자들에게 곡식을 빻고 삼으로 실을 만들어 옷감을 짜는 방법을 가르쳤다.또 그녀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결혼시켜 가정생활을 하게 했다. 오시리스가 세계를 평화적으로 제패하기 위해 떠난 후 이시스는 이집트의 통치자로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 왕국을 현명하게 지배했다. 그런데 그들의 형제, 즉 난폭한 세트가 오시리스를 죽였다는 통지를 받았을 때 이시스의 비탄은 뭐라 형용할 수 없었다.
그녀는즉시 머리카락을 자르고 옷을 찢은 다음 '착한 존재' 오시리스가 들어 있는 관(棺)을 찾으러 나섰다. 반역자들은 그 관을 나일강에 던져 버렸던 것이다. 나일강의 지류인 타니스의 하구로부터 바다로 흘러든 그 관은 파도를 타고 페니키아의 해안에 있는 타마리스크(버드나무의 일종) 밑에 닿았다. 놀라운 속도로 자라는 그 나무는 그 관을 줄기 속에 완전히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나무는 뷔블로스의 왕 마르칸드로스의 명령으로 베어져 그의 궁전의 지붕을 받치는 기둥이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신비스런 나무는 야릇한 향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소문을 들은 이시스는 곧 그 까닭을 알게 되어 그 즉시 페니키아로 떠났다. 그곳에서 이시스는 아스타르테 여왕이, 태어난 지 얼마 안되는 왕자에 대해 근심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이시스는 그 왕자를 영원히 살 수 있는 몸으로 만들어 주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왕자의 몸을 깨끗이 하게 하기 위해 불로 목욕시키는 것을 본 여왕이 너무나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주문의 힘은 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이시스는 여왕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그곳을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그런 다음 궁전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타마리스크의 신비스런 기둥을 넘겨받아 거기서 남편의 관을 꺼내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후 이집트로 가지고 왔다.
그녀는 세트의 음모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관을 부토의 저습지에 감추었는데 세트는 우연히 자기 형의 시체를 다시 찾아내어 그것을 열 네 토막을 내어 사방에 뿌렸다. 이시스는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그 귀중한 잔해를 여기 저기서 찾아내어 거의 다 모았다. 이시스는 시체 토막을 교묘히 이어 붙여서 오시리스의 몸을 본래의 상태로 만들었다. 이어서 누이동생 네프티스, 조카 아누비스, 죽은 오시리스의 재상 토트, 그리고 아들 호루스의 도움을 얻어 죽은 시체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는 의식을 처음으로 행했다. 이어서 그녀는 세트의 노여움을 피하고, 또 아들 호루스를 세트에게 복수할 수 있을 만큼 키우기 위해 부토의 저습지에 숨어 살았다. 어머니의 주문 덕분으로 호루스는 어떤 위험한 재난이라도 면할 수 있었다.
사실 이시스는 뛰어난 주술사였기 때문에 신들까지도 그 저주를 면할 수 없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가 태양신 라의 시중을 드는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했을 때, 그녀는 라에게 그 신비스런 이름을 물려달라고 간청했다는 것이다. 태양신은 이미 늙고 쇠약하여 머리가 흔들리고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흘러내리는 형편이었으므로, 이시스는 그 점을 이용해서 침이 밴 흙으로 독사 한마리를 만들어 태양신이 다니는 길목에 놓았고 독사는 태양신 라를 심하게 물었다. 그 뱀의 유래를 모르는 라는 그 상처를 치료할 방법을 몰라 이시스의 주문에 의지해야 했다. 그러나 이시스는 그 독액을 좀처럼 제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양신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그 신비스런 이름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 이름은 다른 신이 모르는 사이에 라의 몸에서 이시스의 몸으로 옮겨갔다.
오시리스의 신화에서 이시스는 매년 나일강의 범람에 의해 기름지게 되는 이집트의 토양을 상징하고 있으며 나일강을 나타내는 오시리스나 기름진 토양인 이시스와는 정반대인 세트는 사막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이시스는 흔히 그 이름의 표의문자인 왕좌를 머리에 얹은 여자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훨씬 뒤의 일이지만 때로는 두 개의 깃을 달고 - 달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 쇠뿔 사이에 원반을 얹은 관을 머리에 쓰고 있고, 때로는 인체에 쇠머리를 얹은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런 뿔이나 동물의 머리는 당시 사람들이 이시스와 하토르를 동일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대체로 이시스는 조각이나 그림에는 오시리스와 함께 표현되어 있다. 그녀는 죽은 자들에게 대하듯 오시리스를 그 날개가 붙은 손으로 어루만져 떠받들고 있거나 돌로 만든 관 밑에서 울거나 혹은 항아리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빈번히 볼 수 있는 표현으로 어머니로서 호루스를 키우는 모습과 나중에는 호루스를 데리고 세트와 싸우는 묘사도 있다.
10. 호루스(Horus)
는 일종의 태양신의 명칭이며 줄곧 아폴로와 동일시되어 왔다. 그리고 한 마리의 매나 매의 머리를 가진 신으로 표현되었다. 이집트인들은 '하늘'을 표현하는 말과 같은 음인 호르(Hor)의 이름으로 그들의 머리 위에 높이 나는 매를 나타내고, 하늘을 좌우로 하여 태양과 달의 눈을 갖고 있는 한 마리의 매를 보았던 것이다. 매 신의 추종자들이 정착한 곳에서는 호루스에 대한 신앙이 어김없이 행해졌다. 그러나 그 신의 역할이나 권한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각의 성소에 변화해서 이집트의 수많은 신들 가운데는 호루스 신이 스물이나 될 정도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늙은 호루스, 즉 '하로에리스' 나 기타의 태양신 계통의 매 신인 호르 베레데티, 에드푸의 호루스와 오시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시스의 아들 호루스, 즉 아버지의 복수자인 '하르에시스'와 구별하는 것이다. 이시스가 오시리스를 소생시키면서 주문의 힘으로 호루스를 잉태하여 부토와 가까운 케므니스의 섬에서 낳은 사정은 오시리스의 전설에 나온다.
이 호루스의 유년 시대, 즉 그것은 호르 파 케르드(어린 호루스)라 불렀고 거기에서 하르포클라테스의 이름이 생겨났다. 하르포클라테스는 벌거숭이 아니면 보석류를 몸에 달았을 뿐 관자놀이에 늘어뜨린 땋은 머리 이외에는 머리가 거의 없는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때때로 그 아기는 젖을 내밀고 있는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빨고 있다. 그 동작은 그리스인들이 겸손의 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잘못 해석했지만, 훨씬 후세에 가서 침묵의 신이라고 불리는 그 젊은이에게 어울리는 동작이었다.
세트의 음모를 염려하여 고독 속에서 키워진 이시스의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몹시 허약했지만 어머니의 마법 덕택에 여러 가지 위험이나 난폭한 동물들의 습격, 불, 전갈과 병을 모면할 수 있었는데, 그 기록은 주술자들이 병자를 고치기 위해 사용한 주문의 문장을 만드는 법이나 쓰는 법 속에 보존되어 있다. 그러는 동안에 점차 성장한 호루스 앞에 종종 오시리스가 나타나 싸우는 법을 가르치며, 어서 빨리 세트와 싸워서 그 왕위 계승권을 되찾아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영광스러운 복수 행위에서 '하렌도테스'라는 명칭이 생겼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복수자 호루스'를 뜻하는 호로 네지 이테프의 그리스어식 발음인 것이다.
호루스가 오시리스와 살해자 세트와 싸우는 모습은 에드푸의 신전 벽면에 조각되어 있다. 이 에드푸의 주신 베헤데티는 그 시대에는 이시스의 아들과 동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세트도 태양의 영원한 적 아포피스와 혼동되어 있었다. 그 벽면에 조각되어 있는 띠 부분에는 호루스가 하르토메스(찌르는 사람 호루스)의 이름 아래 그 창을 상대방에게 찌르는 한편, '호루스의 추종자들'은 악어나 하마나 영양이나 그 밖의 다른 티폰의 동물들 속에 숨으려고 도망치는 '세트의 추종자들'을 칼로 마구 찌르는 그림을 볼 수 있다. 신들은 싸움을 중지시키려고 그 판가름의 마당에 두 적대자를 출두시켰다. 세트는 오시리스의 아들이라는 그의 조카가 서자에 불과하다고 호소했으나 호루스는 자기 출생의 정당함을 떳떳이 증명했다. 그래서 신들의 왕위를 빼앗은 자에게 그 계승권을 돌려주라고 판결을 내린 후 호루스를 상하 두 이집트의 주인으로 선고했다.
'두 나라를 합치는 호루스'를 뜻하는 호르 스마타우이의 음역(音譯)인 하르솜투스와 '두 땅의 주인 호루스'를 뜻하는 호르파 네브 타우이 등의 명칭이 생긴 것도 여기에 연유한다. 이렇게 해서 호루스는 곳곳에 많은 신전을 세웠으며 그 신전에서 그는 원수 세트의 추종자들과 싸우기 위해 그 탈을 썼던 여러 가지 동물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이집트 전체를 평화적으로 통치하고 국가신(國家神), 즉 국왕들의 선조로서 이집트에 영원히 머물렀다. 그리하여 국왕들은 '살아 있는 호루스'의 칭호를 갖게 되었다. 오시리스와 어머니 이시스와 함께 이집트 전역에서 숭배받는 호루스는 많은 성소의 3인조 중에서도 우두머리가 되어, 혹은 왕자로서, 혹은 신의 아들로 표시되었다. 예를 들어 에드푸와 온보스에서는 호루스가 주신으로서 아내 하토르를 갖고 있었지만, 덴데라에서는 하토르가 어엿한 여주인이고 호루스는 여왕의 남편이하는 자격으로 주신이 된 데에 불과했다. 여러 신전에 나타나 있는 조건이나 그림의 표현 중에서는 신왕국 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호루스는 세트와 협력해서 왕에게 왕관을 쓰도록 하고, 왕의 시중을 들거나 성소로 안내하는가 하면 두 나라가 통합하도록 하고 있다. 호루스는 저승에서 죽은 자들을 오시리스 앞으로 안내하여 영혼의 무게를 재는 일을 감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11. 토트(Thot)
토트는 제프티의 그리그, 로마 시대의 명칭인데, 그리스 인들은 그를 하늘의 전령 헤르메스(Hermes)와 동일시 하고 있었다.사실 그는 이집트 전역에서 달의 신, 편지, 과학, 발명, 지혜의 우두멀, 신들의 대변자, 기록 보관자로서 숭배를 받고 있었다. 제프티란, '제프트의 모든 것'이라는 듯으로 풀이되는데, 제프트는 하이집트의토트는 따오기나 초승달 위에 앉아 있는 따오기의 머리를 가진 인간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종종 그 따오기 종류의 새로 변신햇는데, 대로는 원숭이로 변신하는 일도 있었다. 그 유래는 까마득히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것은 각각 개와 원숭이로 표현된 두 사람의 달의 신성(神性)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혼동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피라밋의 여러 기록을 보면 토트는 태양신 라(Ra)의 장남이 되기도 하고, 게브와 누트의 자식이 되었다가 이시스, 세트, 네프티스의 형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오시리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며, 그저 오시리스의믿음직한 재상이자 왕국의 성스러운 서기로 알려져 있다. 토트는 마법의 주문을 외는 목소리를 가졌는데, 그가 충실히 모시던 주인 오시리스가 살해되자 그 목소리를 이용하여 주인을 다시 살리고 그 육체를 회복시켰다. 그런 다음 그는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를 도와 고아인 호루스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켰으며, 특히 신들의 명령을 받은 그가 전갈에 물린 호루스의 몸에서 독약을 제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 후에는호루스와 세트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를 중재하고, 자기의 침을 뱉어서 둘의 물린 상처를 치료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팽팽히 맞선 호루스와 세트가 헤르모폴리스에서 열린 신들의 법정에 섰을때는 우푸레부이, 즉 '두사람의 싸움을 판가름하는 자'라는 칭호에 어울리게 적대자들에게 판결을 내려서 세트에게 왕위를 조카에게 돌려주라고 선고했다고도 한다. 토트는 오시리스의 재상이었듯이 호루스의 재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호루스가 왕좌에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토트가 살아 잇는 사람들의 왕좌에 올라 3226년동안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지식과 지혜를 지니고 태어난 토트는 모든 학문과 예술을 발명했다. 산술, 측량술, 기하학, 천문학, 점술, 주술, 외과술, 현악기나 관악기 등을 이용한 음악, 그림 그리소 무엇보다도 중요한 업적으로는 문자의 발명을 들수 있다. 상형문자의 발명자로서 '신의 말의 구세주'라 불리는 토트는 또 최초의 주술자로서 셈수(Semsou), 즉 선인(先人)으로도 불린다. 오랫동안 지상을 통치한 후 하늘나라에 오른 토트는 거기에서 여러가지 직책을 맡았다. 우선 그는 달의 신이자 달의 호위를 맡은 신이었다. 왜냐하면 달은 '아'의 이름을 갖는 독자적 존재로 되어 있기 때문이며, 어떤 전설에 의하면 토트가 내기로 달의 72번째 빛을 땄다고 전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토트는 그 빛으로 에파고메노스('첨가되었다'라는 그리스어. 이집트인의 360일에 5일의 윤날을 첨가함을 뜻함)의 5일을 만들었던 것이다. 토트는 달의 신으로서 시간을 재는 신이기도 한다. 그는 달을 나누어 최초의 달에 자기 자신의이름을 붙여주고, 또 해를 나누어 각각 일년을 세 계절로 나누었다. 또한 신의 훌륭한 계산자인 토트는 모든 계산이나 기록을 해냈다. 따라서 에드푸의 신전에 있는 3인조(오시리스,이시스,호루스)에게 장부를 바치는 토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 장부에는 국가의 규모, 오아시스의 수와 더불어 그 나라의 지리적 구분에 관한 모든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바하리에는 푼트에서 바다건너 이집트의 신들에게 보낸 보물의 목록을 상세하세 작성하는 토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는 신들의 기록 보관자로서 역사의 보호자 이기도 했으며 여왕들과 하늘의 주인 사이에서 태어날 미래 국왕의 이름을 헬리오폴리스의 성스러운 나뭇잎에 적어놓는 등 왕위계승에 대한 기록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토트는 신들이 왕에게 허락한 축복받은 통치기간을 관란수(棺欄樹) 의 새싹에 새겨놓기도 했다. 토트는 신들의 사자로서 기록하는 일도 맡았다. 오시리스의 앞에서 행해지는 심판에서 영혼의 계량을 조사하는 토트는, 죄가 적다고 인정되는 자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고 그것을 비석에 기록했다고 한다. 신들의 신임이 두터워 조정자로 선택된 토트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호루스의 주장을 인정하여 세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따라서 적어도 신왕국 시대 이후가 되면, 토트는 세력을 잃은 세트대신 대관식과 제식(祭式)을 행했던 것이다. '스마 타우이'의 의식 등이 그것이다.
Ⅱ. 이집트의 역사
1.이집트의 선왕조시대 (BC 3600?∼BC 3100?)는 국가의 형성에 직접 연결되는 중 요한 시대이며, 암라(나카다 Ⅰ)문화 렇뗀틉?Maadi)문화 럭毒A?나카다 Ⅱ)문화 등이 있다.
인공관개(灌漑)가 도입되고, 인구는 증가하고, 촌락은 도시 규모로 되 었다. 왕조시대의 노모스[州]의 기초가 이루어진 것도 이 시기이다.외국과의 교 역도 더욱 왕성해졌는데, 특히 아시아산(産) 은 렛?鉛) 렝靡痴?렸嚥鴉?黑曜石) ?청금석(靑金石)이나 메소포타미아산 원통인장(圓筒印章) 등이 수입되었다.
토기나 호부(護符)에 토템을 나타내는 동물이 그려져 있는데, 후세의 하트호르와 닮은 우두(牛頭)의 여성도 보인다. 무덤에는 우샤브티를 연상시키는 인형이 부장 되었으며, 후장(厚葬)의 풍습이 엿보인다.
게르제기(期)에는 노동의 분화와 신분 의 차가 보이며, 파상 파수토기(波狀把手土器) 렝??峨?有文土器), 프린트제 (製)의 정교한 손칼(刀子)이 한창 만들어졌다. 게르제기의 히에라콘폴리스의 무덤 에는 석회칠이 되어 있고, 그 위에 갖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어, 왕조시대에 성행한 벽화의 조형(祖型)을 이룬다.
2. 이집트의 초기 왕조시대는 제1~제2왕조 (BC 3100?∼BC 2686?)시대를 말한다.
국토의 통일과 건설의 시대인 게르제기(期)의 말에 상 렷?이집트의 각 노모스는 차차 통합되었고 곧이어 남북으로 서로 적대하는 두 개의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쌍방이 함께 왕가와 같은 종족의 귀족에 의하여 지배되었는데 처음에 하이집트는 부토, 상이집트는 히에라콘폴리스를 수도로 하였다. 그 뒤 북은 사이스, 남은 티 니스(티스)로 옮겼다. 한때 북왕국이 남왕국을 지배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남왕국이 전국토를 지배하 였다.
이 통일에는 스코르피온, 나르미아 두 왕이 활약하였는데 그 기록은 히에라 콘폴리스에서 발견된 석회암제(石灰岩製)의 곤봉두(棍棒頭)와 봉납용(奉納用)의 팔레트에서 볼 수 있다.
BC 280년경 이집트의 신관(神官) 마네토는 상 렷?이집트 를 처음으로 통일하였고, 새로이 멤피스를 축조한 제1왕조 초대의 왕은 메네스였 다고 하나, 그것은 나르미아와 동일인물인 것 같다. 이 통일은 BC 3100년경에 이 루어졌다고 짐작된다. 마네토에 의하면 제1왕조는 8명의 왕, 제2왕조는 9명의 왕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400년에 걸친 초기 왕조시대에 관하여는 채광(採鑛)을 위한 시나이 원정과 누비 아 토벌 이외에는 거의 분명하지 않다. 국왕과 그 가족은 아비도스와 사카라에 매 장되었는데 그곳에서의 출토품이 당시 문화의 한 면을 나타낸다. 왕묘는 마스타 바의 형태를 취하였다.
‘신(神)이 되는 왕’에 의한 통치사상이 널리 퍼졌으며, 국가 의 조직이나 토목 럭플敾?기술도 크게 진보하였다. 문자도 이 시대에 크게 발전하 였으며, 석제용기 럿옥┎?銅製品) 런告釜?렉맑?가공 등의 공예도 높은 수준에 이 르렀다.
3. 이집트의 고왕국시대 제3~제6왕조(BC 2686?∼BC 2181?)시대를 말한다. 이집 트 최초의 융성기로서 각 방면으로 이집트 문명이 가진 여러 특징이 나타난 시대 이다.
이 시대에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특징있는 피라미드가 건설된 시대로 피라 미드시대라고도 불린다. 수도는 멤피스로 옮겨졌다. 제3왕조의 조세르왕은 카이로의 남서쪽 30 km 사카라에 있는 계단식 피라미드에 묻혔다.
이것은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한 것으로서 처음으로 돌을 사용하였고, 외 관(外觀)은 마스타바를 6단으로 쌓아올린 형태이다. 이것은 피라미드의 과도적 (過渡的)인 것으로서 높이 62 m, 북쪽의 장제전(葬祭殿)을 비롯하여 부근에는 의 식용 건물과 열주랑(列柱廊) 런ㅐ?등이 있으며, 이것을 높이 약 10 m, 전장(全長) 1,600여 m의 주벽(周壁)이 남북으로 직사각형으로 둘러싼 피라미드 복합체를 구 성한다.
제4왕조의 왕 스네프루는 3개의 피라미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다슈르의 북쪽 피 라미드는 저변 213 m, 높이 97.5 m의 각추형(角錐形)으로 된 최고(最古)의 피라미 드이다. 기제에는 3개의 큰 피라미드가 솟아 있다. 모두 제4왕조의 것으로, 북쪽에 서부터 쿠푸 렬デ족?렇琁タ痍뮌?것이다.
그 중 가장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저 변 230 m, 높이 146.5 m이고 2.5 t의 큰 돌을 230만 개 쌓아올린 것이다. 북쪽으로 난 입구에서는 길고 복잡한 통랑(通廊)을 통하여 매장실에 이르는데 도굴(盜掘) 을 방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카프레왕의 피라미드에는 장제전 이외에 하곡(河谷)신전과 그곳으로 통하는 참배길이 부수되어 있다. 또한 유명한 스핑크스는 국왕의 얼굴형을 닮았다고 한다. 피라미드는 제5∼제6왕조에서도 계속 축조되었다. 그러나 규모는 작아졌으며, 그 에 대신하여 태양신 라를 제사하는 대규모 신전이 건설되었다.
제5왕조 최후의 왕 우나스의 피라미드 내부에는 최초로 피라미드 텍스트(매장용의 呪文)가 새겨져 있다. 각 왕의 업적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시나이 반도의 구리 광산이나 누비아 지방의 채석장을 확보하고 때에 따라서는 양재(良材)를 구하기 위해 시리아로, 또한 향료 를 구하기 위하여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제5왕조에는 영토가 제2폭포 와디할파까 지 넓혀졌다. 그러나 제6왕조에 접어들자 왕권은 약체화되고 각 노모스의 지사 (知事)가 그 직위를 세습하게 됨으로써 왕명은 힘을 잃고 노모스는 반독립국과 같 이 되었다. 고왕국시대에 국왕은 파라오라 불리고 절대적 전제군주로서 신으로 숭배되었으며 재판관 런봉?렘키?등의 모든 면에서 최고위의 존재로서 백성 위에 군림하였다.
왕은 왕족 중에서 고급관리를 선임하여 중앙집권정치를 하였다. 소수의 도시 생활 자 이외의 국민의 대다수는 농민이며 그 밖에 전쟁노예가 있었다.
당시의 생활은 분묘의 벽면에 새겨진 부조(浮彫) 등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종교는 사회생활뿐만 아니라 국가의 행사나 예술에까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 다. 이집트의 종교는 원래 수목 렙究?럿예?등 자연물이나 생물에게 초인간적인 힘을 인정하는 주물(呪物)숭배였다. 그것이 곧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서, 왕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신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화신 (化身)하였다. 예를 들어 호루스 신은 매, 하트호르 신은 암소, 아누비스 신은 늑대 였다. 원래 이것들은 각 부족의 토템이었으나 이 무렵에는 지방신으로서 받들어졌 고 성수(聖獸)로서 신전에서 사육되었으며 죽은 뒤에는 후장(厚葬)되었다.
이러한 신 가운데에서 태양신 라는, 전 우주의 창조자로서 점차 깊은 신앙의 대상 이 되었다. 이집트인은 태양의 운행이나 수목의 번식에서 생명의 불사(不死) 렉?활을 믿었다.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보존하거나, 내세의 생활을 위하여 특히 왕이 나 귀족이 훌륭한 분묘를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건축기술과 기하학이 진보하였고 , 또 농업과 관련하여 토지 측량과 점성술이 발달하였으며, 달력이 만들어졌다. 피라미드 텍스트는 종교적 주문(呪文)이나 신화의 단편(斷片)으로 되어 있어, 이 시대의 신앙을 아는 데 귀중한 사료(史料)이다.
4. 제7~제10왕조(BC 2181?∼BC 2050?) 제6왕조 말부터 왕권은 쇠미하였고, 노모스 의 지사는 세습화되어 봉건군주와 같이 되었다.
한편 관료정치에 강한 반감을 품 어오던 민중이 봉기하여, 사회는 혼란하였다. 이와 같은 국내의 분열과 혼란에 편 승하여 사막으로부터는 이민족(異民族)이 침입하였다.
일시적으로 질서가 회복되 기도 하였으나 오래 가지 않았으며, 헤라클레오폴리스에서 문학이 번성했던 것밖 에는 일반적으로 학문 레抉珦?모두 쇠퇴한 불모의 시대였다.
제13~제17왕조(BC 1750?∼BC 1567?) BC 1750년경 제12왕조는 붕괴되고 이집 트는 또다시 혼란의 시대로 들어갔다. 많은 왕이 교대로 즉위하였고, 때로는 병립 하기도 하였다.
이 혼란을 틈타 아시아에서 힉소스인이 침입하여, 삼각주지대의 아바리스에 성채를 구축하고 약 100년 동안 주로 하(下)이집트를 지배하였다.
이것은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에 의한 지배이다. 힉소스의 침입은 당시의 서아시아에 일어난 민족이동의 일환이었고 문화 정도는 이집트에 비해 훨씬 낮 았으나, 그들은 말과 전차를 도입하여, 그 이후의 전술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BC 1600년경이 되자 테베를 중심으로 하여 제17왕조의 제왕(諸王)에 의한 반항 이 기도되어 장기간의 항쟁 끝에 카흐모스왕의 아우 아모세가 아바리스를 함락하 고 결국 힉소스를 아시아로 추방하였다. 그는 귀국 후, 아모세 1세로서 제18왕조 를 일으켰다.
5. 이집트의 중왕국시대는 제11~제12왕조(BC 2050?∼BC 1750?)시대를 말한다. 제1중간기의 말, 북의 헤라클레오폴리스에 웅거한 제10왕조에 대하여 테베에 웅 거하는 안테프의 제11왕조가 독립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오랜 항쟁 후에 이집트 는 멘투호테프 2세 치하에서 다시 통일되었다. 이후 테베는 약 1,000년 동안 이집 트의 정치 려쓩냅?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왕은 또한 장기간 방치되었던 누비아에 원정하여 콥토스에서 와디 함마마트에 이 르는 도로를 정비하고 시나이 반도와 푼트 지방에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는 테 베의 서쪽 교외 델 엘 부하리의 벼랑에 붙은 새로운 양식의 장제전(葬祭殿)을 건 설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은 통일을 유지할 힘이 없어 국내는 한때 혼란하였으나 최후의 왕 때의 재상 아메넴헤트 1세가 제12왕조를 열었다. 이 무렵부터 테베의 시신(市神)인 아몬신(神)이 유력해졌다.
아메넴헤트 1세의 아들 세소스트리스 1세는 제3폭포까지 군대를 파견하여 금광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세력은 여전히 강하였다.
노모스의 세력을 장악하고 참된 의미에서 국토통일을 완성한 것은 세소스트리스 3세의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 그는 북상하는 니그로를 토벌하여 누비아를 지배하였고 각처에 성채(城砦)를 설 치하고, 팔레스티나에 원정하였다. 이 시대의 교역은 시리아 렴㈆뮴맙”沮?미쳤 다. 다음의 아메넴헤트 3세는 국내의 정치에만 힘썼는데, 특히 댐과 관개용수로를 만들었고, 파이윰 지방을 개척하여 경지의 증대에 성공하였다.
제12왕조의 왕들은 파이윰의 북동에 있는 리셰트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리셰트 렷臼尻?등지에 피라미드나 신전이 조영되었다.
이 시대는 민중이 귀족에 대신하 여 힘을 얻어 관리에 등용되었고 농노에서 자유민으로 되는 길도 열리는 등 이집 트의 역사 가운데서 비교적 민중의 힘이 인정되었던 시대였다.
이러한 경향은 신 앙상에도 나타나 사후의 세계는 왕이나 귀족들의 독점물이 아니고, 민중들도 미라 가 되어 공동묘지에 매장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었다.
종교 레?龜涌【??피라미드 텍스트에 대신하여 관(棺)의 주위에 표시된 코핀 텍 스트는 일반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또한 중왕국시대는 일반 문학(산문)이 가 장 발달한 시대이기도 하다.
세계 최고(最古)의 모험기행이라고 할 수 있는 《시누 에의 이야기》는 이집트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며 그 밖에 푼트 교역을 취급한 《난파선 이야기》와 사회적 관심을 나타낸 《능변의 농부 이야기》 등이 있다. 이것은 시대를 반영하고 서사(書寫) 재료로서 파피루스의 두루마리가 사용되었고 , 서체도 쓰기 쉬운 행서체로 옮겨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밖에 파피루스는 《기하학서》(린도 파피루스) 《외과서》(에드윈스미스 파피루스) 《치병(治病) 의 서》(에베루스 파피루스) 등 학술적인 것에까지 미치고 있다.
6. 이집트의 신왕국시대는 제18~제20왕조(BC 1567?∼BC 1085?)를 말한다. 이 시 대는 이집트 역사상 고왕국 려傷欄뮈?이어지는 세 번째의 융성기로, 영토도 아시 아까지 확대되어 제국시대라고도 불렸다.
제18왕조 초기의 국왕들은 힉소스를 추 방한 후에도 계속하여 팔레스티나 방면으로 파병하였는데 그것은 곧이어 전리품 을 목적으로 한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변하였다. 당시의 서아시아 정세는 각 민족 이 분립 렷戮點求?시대였다. 곧 이집트도 그와 같은 국제정세 속으로 말려들어갔 다.
한편 투트모세 1세는 제3폭포까지 파병하는 등 남방(南方) 경영도 게을리하지 않 았다. 하트??수트 여왕은 내정에 힘쓰고 광산을 개발하였으며, 푼트 지방에 배를 보내어 향료(香料) 렌燦?象牙) 렇炷?등을 수입하였다. 또한 테베 서쪽 교외의 델 엘 부하리에 거대한 장제전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여왕과 공동통치를 하였던 투 트모세 3세는 여왕의 사후,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카데시의 왕이 지휘하는 동맹군과 메깃도에서 싸웠는데 그 승리가 이집트 번영의 기초를 다졌다고 한다. 왕의 출병은 20년간 전후 17회에 이르렀고 북은 유프라테스강(江) 연안에서 남은 제4폭포까지 지배하에 두게 되어 이집트의 영토 는 사상 최대가 되었다. 방대한 전리품과 많은 노예를 얻게 되었고 각지에서 물자 가 집결되었으며, 미탄니 렙틱첩??렴㈆뮴?등이 조공하였다. 따라서 테베에는 웅 장한 신전 렛欄? 귀족의 저택 렌竄?등이 들어서 번화하였다.
귀족은 충실한 가신(家臣)으로서 왕을 받들었으며, 그들을 고급관리로 하는 관료 조직이 정비되었다. 투트모세 3세는 이제까지 한 사람이었던 재상을 두 사람으로 하여 상 렷?이집트의 내정에 전념시켰다. 원정으로 획득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하 여는 강력한 상비군(常備軍)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직업군인이 출현하 였고 곧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 용병의 수가 많아지자 그들의 생활을 유지하는 일이 큰 문제로 되어, 이것은 국력을 피폐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승리는 신의 힘에 의한 것이고 그것은 신 자신의 승리이며, 국가의 번영은 아 몬신의 번영이라고 생각되었다. 국왕이나 귀족은 신에게 토지를 기증하고 신전을 잇달아 건립하였다.
따라서 신관단(神官團)은 관료 런봉恝?못지 않은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방대한 신전령(神殿領)은 신관의 사복을 채웠고 곧이어 왕위 계승에도 간섭하였다. 투트모세 3세의 사후 시리아에 대반란이 일어났으나, 아멘호테프 2세는 미탄니를 토벌하였고 다음의 투트모세 4세는 미탄니와 동맹하여 그 왕녀를 왕비로 맞았다.
이 무렵부터 아시아에서는 히타이트의 세력이 신장하였는데, 이집트도 그 동향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아멘호테프 3세의 시대는 표면상으로 이집트가 가장 안정되 고 융성한 시대였다. 왕은 거의 외정(外征)을 하지 않고 다만 신전 등의 건축공사 에 부(富)와 힘을 쏟았다. 왕은 아시아제국과 서한 및 기증물을 교환하여 친교를 맺었기 때문에 여기에 일종의 국제주의시대가 도래하였다(아마르나시대). 아멘호테프 4세는 절대 세력을 갖게 된 테베의 아몬신관단에게 반발하여, 태양신 아톤을 시신(市神)으로 하는 신도(新都)를 오늘날의 텔 엘 아마르나의 땅에 조영 하여 아케타톤(아톤의 지평선이라는 뜻)으로 명명(命名)하고 스스로도 이크나톤 이라고 개명하였다.
왕은 아톤찬가(讚歌)의 제작과 예술활동에 전념하고 국정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아시아에서는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고 정정(政情)이 불안하게 되었다. 결국 왕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아 사후에 아몬신앙은 부활되었으며 신도 (新都)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예술면에서는 고정화된 종래의 전통이 타파되고 개 방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외국과의 문화교류도 행하여져서, 사실적이고 밝은 성격의 아마르나 예술을 낳았다. 이것은 투탕카멘 왕묘의 출토품에서 엿볼 수 있 다. 투탕카멘 왕은 18세 때 죽고 군인출신의 호렘헤브가 왕위에 즉위하여, 제18왕 조는 끝났다.
제19왕조의 초대는 호렘헤브가 선택한 군인 출신의 람세스 1세이고, 그의 아들 세 티 1세는 재차 아시아에서의 이집트의 우위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
그의 아들 람세스 2세는 전형적인 파라오로 67년 동안의 오랜 치세에, 각지에 다수의 신전을 건축하였고 북쪽 또는 남쪽으로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아시아 경영 때문에 신도 를 삼각주지대의 타니스에 건설하였다. 건축 사업 중에는 테베의 서쪽 교외에 세 운 장제전 라메세움이나, 누비아의 아부심벨의 대소 2신전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남하하는 히타이트를 카데시전투(BC 1286)에서 막아냈고, 곧이어 아시리 아의 세력에 대처하기 위하여 하투실리시 3세와의 사이에 우호조약을 맺었다. 왕은 그 후 아시아 진출을 단념하였다.
다음의 메르엔프타흐왕 시대부터 아시아는 또다시 민족이동의 소용돌이 속에 빠 졌고 제20왕조의 람세스 3세 때 이미 히타이트는 멸망하여 없어졌고 이 무렵부터 삼각주지대는 자주 리비아인 등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또한 신관단의 세력에 대 하여, 왕실의 세력은 쇠퇴하여 왕위는 신관(神官) 헤리호르에게 찬탈되었다.
신왕국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테베에 조영된 카르나크 렁雍恬?등의 많은 신전과 여러 왕의 장제전, 그리고 테베 서쪽 교외의 벼랑을 뚫고 매장한 국왕과 귀족 럭恣活?연도분(羨道墳)이다. 이것은 모두 엄청난 부와 권력, 그리고 풍부한 노예노동력에 의한 것이지만 높은 수준의 건축기술과 벽면의 부조(浮彫)에서 볼 수 있는 뛰어난 예술상의 재능은 오늘날에도 그 유적을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 다. 문학은 구어체(口語體)를 사용하여 민중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한 작품이 만 들어졌다. 농민의 생활을 묘사한 《두 형제 이야기》, 교훈적인 작품 《정의와 허 위의 이야기》 등이 있고 이외에도 고관의 분묘에 남겨진 자전적(自傳的)인 묘비 명(墓碑銘) 렝還째? 아몬신 렙팍逆탔?찬가, 격언(格言) 렛О?戀歌)도 남아 있다. 또 《사자(死者)의 서》를 비롯한 종교적인 작품도 있다.
7. 이집트의 후기 왕조시대는 제21~제30왕조(BC 1085?∼BC 332)시대를 말한다.
테베에서 헤리호르가 왕위를 찬탈할 무렵, 북부에서는 네지바다두트(스멘데스)가 타니스에 제21왕조를 열어 이집트는 양분되었다. 그후 리비아 출신의 일족이 중 부 이집트의 헤라클레오폴리스를 중심으로 세력을 폈으며 곧이어 시샤크(셰숑크) 는 삼각주지대의 부바스티스를 근거로 제22왕조를 일으켰다.
그 후의 제23 ?4왕 조는 리비아인이 지배하였는데 분립의 기운은 삼각주지대까지 미쳐, 제22 려?3 왕조는 병립하였다. 제25왕조는 나파타에서 일어난 에티오피아인의 왕조이다.
BC 671∼BC 664년 이집트는 세 번에 걸쳐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아 테베는 두 번 점령되었다. BC 664년 프삼티크 1세가 삼각주지대의 사이스에 제26왕조를 열었다.
그는 그리스인의 힘을 빌려 아시리아인을 추방하고 삼각주지대를 통일, 곧 남부에 까지 손을 뻗쳤다. 왕은 그리스인들의 삼각주지대에서의 식민(植民)을 허용하였 으므로 곧 나우크라티스가 번영하였다.
왕은 또한 고왕국시대를 본보기로 하여 일종의 복고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사이스왕조는 한때 예술면에서도 우수한 복 고적 작품이 나왔다.
그러나 네코 2세는 카르케미시에서 신바빌로니아에 대패하여 세력을 잃었다. BC 525년 페르시아의 캄비세스에 의하여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한 속주가 되었다 (제27왕조).
그 후 한때 이집트는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모두 짧은 기간으로 재차 페르시아의 세력하에 놓여졌으며 결국 BC 332년 정복되어 이집트인에 의한 왕조 시대는 끝났다.
8.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왕조시대는 BC 305∼BC 30년까지를 말한다. 알렉산드 로스 대왕이 바빌론에서 죽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는 대왕이 임명한 이집트 태수(太守) 클레오메네스를 추방하고 스스로 신왕조를 건설하였다. 신왕조 밑에 서 이집트는 재차 번영을 되찾았다.
왕은 수도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기고 학자 렌?인 럭坪?工匠) 렛類?傭兵)을 그리스에서 이주시켜 이곳을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 지로 삼았다. 그 때문에 유리와 금속공업이 발달하였고, 각지와의 무역도 성행하 였다.
또한 아카데미나 부속의 대도서관을 세움으로써 학예면에서도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국토의 지배에 있어서는 이집트 종래의 노모스를 단위 로 하는 통치기구를 그대로 물려받아 장관에는 그리스인을 임명하였다. 그리스어 (語)가 공용어로 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종래의 토착어가 사용되었고, 종교면에 서도 많은 외국풍의 신들이 이집트로 도입되었으나, 그 이름이 이집트 고래의 신 의 이름에 적용되는 데 그쳤다.
몇 개의 대신전이 이 시대에 건립되었으나 신전에 새겨진 왕들은 이집트왕의 칭 호를 채용하였고, 그 이름은 카르투슈(王名額子)에 기록되었다.
이와 같이 그리 스 문명이 도입되었다고 하지만 얼마 안 되어 그리스세계와의 접촉도 차차 적어 졌기 때문에 결국 이집트의 체질을 개선하지 못하였다. BC 30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사망으로 끝나고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제국치하(BC 30∼641)〉 BC 30년 로마의 옥타비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이후,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치하를 포함하여 약 700년 동안, 이집트 는 로마의 속주였다.
그 동안에 이집트는 로마에 대한 곡물과 기타의 공급원의 역 할을 하였다. 농민의 생활은 고통스러웠으며, 특히 로마제국의 재정이 궁핍하게 되자, 탈취는 극심해졌다. 그 때문에 도망자가 늘고 국유지는 황폐하여 점차 대토 지 소유자에게 옮겨갔다.
297년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이집트를 몇 개의 주(州)로 분할하였다. 로마인은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행정 렝瑩?렌濚萱?그대로 채용하여 정책면에서도 프톨레 마이오스왕조의 것을 발전시켰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공 용어로 채용되었으나 일반 민중에게는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는 철학 레?洋?려쓩냘?렐置?럭幣?렝피?등이 크게 발전하 여 학예분야에서는 지중해에서 중심적 존재였다. 그리스도교도 밀라노 칙령의 포 고와 함께 이곳에서 발전하였다.
특히 이집트인은 미술분야에서 그것을 꽃피웠는 데 아라비아인은 이집트의 그리스도교도를 콥트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 미술 을 콥트미술이라고 한다. 그것은 특히 이집트 북부를 중심으로 5~6세기경에 번영 하여 건축에서 뛰어났다.
1) 아랍족지배시대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단결된 아라비아인이 이집트를 정복한 것은 640년 초에 아 무르 이브눌 아스가 거느리는 약 4,000명의 군대가 수에즈 운하를 넘어 현재의 구 (舊)카이로 지방에 있었던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바빌론성(城)을 포위한 데 서 비롯된다.
이어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공략하여 대략 641년 말까지는 정복이 끝났다. 당시의 이슬람교국의 수도는 아라비아의 메디나였으며 제2대 칼리프 우 마르가 총지휘하였다. 아라비아인은 바빌론성이 있던 곳을 푸스타트라 하였고 이곳을 이집트 지배의 새 로운 수도로 정하였다. 이로부터 우마이야왕조를 거쳐 아바스왕조에서도 이집트 는 사라센제국의 한 주(州)로서 취급되었고, 역대의 칼리프가 파견하는 총독이 푸 스타트에 주재하여, 세금을 모아서 중앙정부에 송달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 총독들은 임기가 짧아서, 이집트의 토지가 농민들의 노력으로 산출하는 부(富) 는 시리아 렝繭纘㈎?흡수되고 이집트 그 자체의 번영을 위하여는 거의 도움이 되 지 않았다.
2) 독립왕조시대
이집트를 지배한 아바스왕조의 한 총독인 투르크족 출신의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형식상으로는 동왕조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독립국을 이루면서부터 형 세는 일변하였는데 이집트의 부(富)는 그 땅에 축적되어서 번영을 더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를 툴룬왕조(868∼905)라 부르며, 푸스타트의 북동부(현재는 카이로시 의 일부)에 아르카타이라는 구역을 만들어 이곳을 지배의 중추부로 삼았다. 그 후 잠시 아바스왕조의 지배로 돌아갔다가 같은 투르크계의 아흐시드왕조가 이 집트뿐만 아니라 시리아도 지배하였다.
그러나 969년 서방으로부터 침공해온 파 티마왕조에게 멸망되었다. 파티마왕조는 마호메트의 딸 파티마와 제4대 칼리프 알리의 아들 하산의 혈통이 라고 하며, 이슬람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를 신봉하였다. 파티마왕조는 원래 튀니지에서 건국하여, 북아프리카 일대에 세력을 폈는데 제4대의 무이즈 때 에 이집트를 공략하고 시리아와 아라비아의 일부도 합하였으며, 알카히라성(城) 을 조영하였다.
이것이 카이로의 기원이며, 그 성문(城門)과 성벽 일부를 비롯하 여, 현재도 남아 있는 건축물이 많이 있다. 이 왕조의 군주는 칼리프라고 하며, 동으로는 아바스왕조와, 서로는 코르도바의 후(後)우마이야왕조와 대항하여 오랫동안 3개의 칼리프제국이 정립하였다. 사상 레?極?있어서도 정통파(수니파)와 상용되지 않는 점이 많으며, 또한 해상 무역도 성행하였으므로 이 시대부터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하는 이라크의 번영을 서서히 능가하게 되었고 카이로는 이슬람 세계에서 경제적 레??岵막琯?최고의 수준을 나타냈다.
그러나 11세기에 들어서 내부 동요를 거듭하여 쇠퇴하였고, 아이유브왕조로 인하 여 멸망되었다. 아라비아인이 처음으로 이집트를 정복했을 무렵 이집트 주민의 대부분은 그리스도교도였다. 지배계급인 그리스인은 그리스정교(正敎)를 신봉하 였고, 토착의 이집트인은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에 의한 콥트교회에 속하였는 데, 이것이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아라비아인의 지배시대에 들자, 이슬람 교로 개종하는 자가 해마다 증가하였다. 정복 후 200년 정도 지나서 9세기에는, 콥트교도가 이슬람교도보다도 적어졌다.
이슬람화와 더불어 아랍어화(語化)도 신속하게 진전되어 콥트어나 그리스어를 잊 어버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현재는 2,000만 명 정도의 이슬람교도에 대하여 콥트 교도는 100만여 명에 지나지 않아 거의 전주민이 이슬람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십자군(十字軍)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으로 유명한 살라딘이 파티마왕 조에 대신하는 아이유브왕조(1169∼1250)를 세우면서부터 이집트는 다시 이슬람 의 정통파로 돌아갔다. 그 뒤 투르크계 렘첩Dソ첸?코카서스가 본토)계의 노예병 출신의 군벌이 정권을 잡았다.
이것이 맘루크왕조이며, 바흐리 맘루크(1250∼1390)와 부르지 맘루크(13 82~1517)의 2기로 구분되지만 몽골군이나 십자군과의 싸움 이외에 정권쟁탈의 내전도 많았으나 한편으로는 인도양이나 지중해 무역으로 번영하여 시리아까지 지배하였다. 그러나 인도항로의 발견에 따라 포르투갈에게 경제적 타격을 받았고, 1517년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셀림 1세에게 정복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맘루크군 벌 중에서 잔존된 것도 많았다.
3) 투르크제국 지배시대
유럽인의 동방 신항로 발견 등에 따라, 이집트는 동서 교통의 중계지로서의 중요 성을 잃게 되어, 세계의 한 변경으로서 쇠퇴하였고, 문화적으로도 침체를 계속했 다.
투르크제국의 지배력도 점차 약화되었고, 맘루크 귀족의 세력이 부흥하여, 그들의 과두정치(寡頭政治)가 행하여지게 되었다. 1798년 나폴레옹이 거느리는 프랑스군이 7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 상륙, 맘루크 귀족의 군대를 피라미드싸움에 서 격파하고 23일에 카이로에 들어왔다. 프랑스군의 점령은 1801년 9월까지 계속 되었으나, 그 동안에 프랑스인의 이집트 연구, 아랍족의 유럽 문화와의 접촉 등에 의하여 새 시대를 맞이하는 새로운 장이 열렸다.
이집트에서 프랑스군의 철수 후, 투르크제국의 지배하에 되돌아갔으나 맘루크 귀 족의 잔존분자는 카이로로 돌아가 실권을 장악하여, 혼란이 계속되었다.
투르크 정부가 파견한 알바니아인 부대의 대장 무하마드 알리가 1805년부터 파샤 (太守)가 되어, 1811년 맘루크 귀족을 일소하고 실권을 쥐어, 이집트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명목상으로는 투르크의 속주(屬州)였으나 실제상으로는 독립왕국이 었던 것은 옛날의 툴룬왕조나 아흐시드왕조와 같았다.
무하마드 알리 이후에, 자손이 계승하였고 5대째의 이스마일 때에 하디우(副王)의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이 왕조는 차차 재정난에 빠졌고, 영국 렷조壕?등의 세력 이 침투하여 왔다. 한편 민족 사상도 고취되어, 1881년 아라비 파샤 등의 봉기가 있었는데, 이들이 영국군에게 진압됨으로써 영국의 점령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투르크제국의 주권은 배제되었고, 영국의 보 호하에 놓이게 되었다. 부왕(副王) 아바스 힐미가 퇴위하고, 그 숙부인 후사인 카 밀이 술탄으로서 괴뢰정권을 만들었다. 그러나 영국의 보호국이 된 뒤부터 민족 독립의 기운은 더욱 격화하여, 자그루르 파샤 등을 중심으로 하는 와프드당이 중 심이 되어 노력하였으며, 1922년에는 일단 영국의 보호권 정지를 쟁취하였다.
그리하여 영주(英主) 푸아드 1세(재위 1922∼1936) 치하에서 영국의 속박을 벗어 나, 1936년에 우선 완전에 가까운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 해, 푸아드의 아들 파루 크가 왕위에 올랐으나 영국의 수에즈 운하지대 주둔병을 철퇴시키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전쟁(1948∼1949)에 패한 것 등도 중요한 원인이 되어, 1952년 7월 민족 사상으로 단결한 소장 장교들의 정변이 일어나, 파루크는 국외로 추방되고, 1953 년 6월 나기브를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국이 되었는데 1954년에 J.A.나세르가 그 뒤를 이었고, 1970년 9월에 사망하자 M.A.사다트가 대통령을 승계하였으나 1981 년 10월 과격파 회교도에 의해 피살되자 무바라크 부통령이 국민투표에 의해 대 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87년 10월 재선되었다.단결한 소장 장교들의 정변이 일어 나, 파루크는 국외로 추방되고, 1953년 6월 나기브를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국이 되 었는데 1954년에 J.A.나세르가 그 뒤를 이었고, 1970년 9월에 사망하자 M.A.사다 트가 대통령을 승계하였으나 1981년 10월 과격파 회교도에 의해 피살되자 무바라 크 부통령이 국민투표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87년 10월 재선되었다.
Ⅲ. 파라오
1. 메네스(Menes)
이집트의 첫 왕인 메네스(Menes)는 이집트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 새로운 국가는 북부와 남부, 즉 나일강 계곡과 유역을 합친 것이었다.
왕이 썼던 북부와 남부 이집트를 명시하는 빨간색의 왕관은 이러한 통일을 상징한다. 메네스 왕은 티니트 왕조를 세웠는데 이 이름은 왕조의 왕들이 출생한 북부 이집트의 디스 엘 비르바의 한 구역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수도는 나일강 유역의 맨 꼭대기에 있는 멤피스('하얀 벽'이라는 뜻)라는 곳에 세워졌다.
이 왕은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 었는데 나메르라는 이름은 앞으로의 재임 기간 동안 그의 건강을 위해 열렸던 한 축제 를 기념해 남부 이집트의 히에라콘폴리스에서 만들어진 갑옷의 일부분과 철퇴의 머리 부분에 새겨져 있었다. 이런 갑옷의 일부분과 철퇴의 머리들에는 양각으로 새겨진 그림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런 세공된 그림은 왕조 예술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을 나타냈다.
호루스라는 이름은 매의 신, 호루스를 상징하는 것인데 호루스는 모든 이집트 왕들이 숭배했던 신이었고, 히에라콘폴리스에 있는 신전은 이 호루스 신에게 바쳐졌다. 메네스가 통치하는 동안, 이집트는 단순한 행정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사후, 고위 관료들은 사카라라는 벽돌무덤에 매장되었다.
2. 람세스 2세
람세스 2세는 기원전 1279~1213(1212) 신왕국 19왕조 3번째 왕이다. 람세스 2세는 자기 아버지 곁에서 부관과 지명후계자의 자격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왕이 되기 위한 고도의 훈련을 쌓게 했으며, 그가 왕의 특권 과 명예를 누리도록 했다. 람세스 2세는 청년기가 시작되자 아버지가 하렘에서 간택해준 두 명의 왕후를 받 아 들였다. 그들이 바로 이시노프레와 왕의 사랑을 받았던 우아한 네파르타리로 서, 그녀들이 낳은 자녀들은 정통 후계자가 되었다. 테베의 귀족 출신으로 보이는 "위대한 왕비. 두 땅의 여주인" 네파르타리-메렌무 트는 람세스 2세 옆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람세스 2세는 우아한 네파르타리의 모습을 묘사하게하는데 싫증을 느끼지 않았 다. 그녀의 섬세한 모습은 그가 세운 온갖 기념물에 새겨져 있다. 네파르타리는 50대에 죽었는데, 람세스 2세는 그녀에게 왕비의 무덤 중에 가장 아름다운 무덤 을 주었다. 그는 히타이트족의 공주 두 명과도 정략적인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는 네 명의 딸들과도 결혼했다. 그 중 하나는 이시노프레의 딸로서, 벤 타나트라는 아시아풍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많은 자녀(대장에 기재된 50명이하의 아들과 50 정도의 딸)를 작위를 받은 부유한 관리로 임명했다. 많은수의 왕자는 람세스 2세의 추정 상속자가 되었으나 , 그들은 대개가 람세스 2세가 세상을 뜨기 전에 먼저 죽었다. 열세 번째 아들 메렌프타가 람세스 2세가 죽고 왕위를 계승했고, 람세스 2세의 아 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아들은 "왕자 고고학자" 라고 불리는 이시노프레가 낳은 케 무아세이다. 케무아세는 멤피스에 거주하면서 프타 신의 대사제로서 람세스 2세의 특별한 경 애와 보살핌을 받았다.
람세스의 통치
람세스는 끊임없이 왕국의 전반적인 복지를 염려했다고 한다. 나라의 복지는 무엇 보다도 신들을 만족시킴으로서 얻어지는 것이었다. 신을 씻기고, 기름칠을 하고, 옷을 입히고, 치장하고, 먹이고, 물을 주는 매일의 신성한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신 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신들에게 바쳤던 음식은 사제들에게 분배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모든 지방(42개의 "노모스"-지방)에서는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여러 축제 때 신에게 경배드리기 위해 소와 양, 거위를 잡았으며, 수확한 열매 도 바쳤다. 이리한 양식들은 모두 의식이 끝난 뒤 군중에게 분배되었다. 이들은 그밖에도 정기적으로 월급과 식량 배급을 받았다. 피라미드시대 이후 파 라오와 국민들은 암묵적인 계약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즉, 왕은 신들에게 작용함으로써 국민에게 안전과 생계를 보장하여 주고 국민은 군주에게 복종과 존 경과 노동력을 바쳐야 했다. 국가가 번영을 누릴 때에는 왕은 신전과 행정부 및 사법부뿐 아니라, 가장 낮은 계층의 국민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 그래서 군인의 월급이 오르고, 장인의 보수가 많아졌다. 이러한 관대함은 노동에 대한 열의를 촉진했다. 왕위에 오른 뒤 람세스 2세가 처음 시작한 공식 행동은 카르낙의 아몬이 성스러운 나룻배를 타고 룩소르 신전을 방문하는 행사인 종교 대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남쪽 에 있는 수도 테베를 찾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 세티 1세가 진행하다 중단된 대신전 건설 사업도 재개했다. 람세스 2세는 방대한 건설 사업을 지시했다. 국민들에게 위대한 왕으로 보이고 싶 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여기저기에 아몬을 위한 신전을 세웠고, 성벽을 쌓아 국경 수비를 굳건히 했다. 즉위한지 4년째 되는 해, 그는 잃어 버린 이집트 땅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갔다. 첫 번째 원정은 시리아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지방 군주 들을 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베이루트 근처 알칼브 강에서 멈췄으며, 비석 을 세우고 이 전쟁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비문에 새겨진 글자는 모두 지워지고 지금은 람세스 2세의 이름과 날짜만 남아 있다.
카데시 전투
람세스 재위 5년 여름 둘째 달의 아흐렛날 본격적인 원정이 시작됐다. 목표는 카데시에 자리잡고 있는 히타이트족 이었다. 오론테스 강 유역에 있는 요새 카데시는 히타이트족의 중심지였다. 람세스 2세의 주력 부대는 각각 5000여 명의 전차 부대와 보병 부대로 이루어진 아 몬, 라, 프타, 세트라는 이름을 지닌 4개 사단으로 되어 있었다. 왕은 "전나무 계곡" 에 있는 식민지인 람세스-메리아몬에 도착하여, 해안길이나 베카평야를 통해 카데 시로 갔다. 카데시에 있는 산악지대에 멈추었다가 북쪽, 샤브투나라는 도시쪽으로 진행했다. 그 도시의 남쪽에는 오론테스강의 여울목에 통로가 있었다. 두명의 베두인족이 람세스에게 다가와서 당시까지 히타이트의 지배를 받고 있던 그들 부족이 파라오에게 충성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게다가 그들은 히타이트 군대 가 북쪽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알레포 부근에 있다는 정보까지 알려주었다. 당연히 그들은 이집트군의 위치를 조정하고 람세스가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무와탈리가 보낸 첩자였다. 함정에 빠진 파라오는 오론테스강을 건너 카데시 북쪽에 자리를 잡았으며, 아몬 사단이 그 뒤를 따랐다. 한편 라 사단은 샤브투나의 여울목을 건너고 있었고, 프타 사단과 세트 사단은 그 보다 더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사로잡힌 두 명의 히타이트 포로가 태형을 받고 히타이트 군대가 아주 가까운 요새 뒤에 숨어 있으며, 금방 처들어 올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시실을 자백했다. 프타사단에게 이 급보를 전하기 위해 사자를 보냈 다. 진을 치는데 몰두해 있던 아몬 사단은 아직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때 한 소대의 히타이트 군마들이 나타나 샤브투나의 여울목에 있던 라 사단을 공 격해 사방으로 흩어지게 했다. 람세스는 갑옷을 입고 자신의 애마들이 이끄는 마차를 올라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의 신 아몬을 의지하여 고함을 지르면서, 마치 몬투처럼 싸워 적의간담을 써늘하게 했다. 아무르에 머물러 있던 이집트 분견대, 네아린족이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마도 그들은 다시 침착을 되찾은 이집트 부대의 도움을 받아 파라오를 도와 싸웠 던 듯하다. 어쨌든 그곳에 있었던 람세스의 자녀들이 비교적 안전했던 점으로 보아 이집트 진영은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 않은 듯했다. 다음날 아침, 고생해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이집트 군대는 다시 싸울 채비를 마쳤다. 그러나, 히타이트 왕은 람세스에게 화친을 맺을 것을 제안했다. 제안을 받은 참모부는 파라오에게 그 안을 받아들일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그 결과 군대는 방해를 받지 않고 이집트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람세스가 등을 돌 리자마자 무와탈리는 벤테시나를 폐위시키고 아무루의 통제권을 다시 빼앗는다. 이집트와 히타이트 제국은 주변의 나라와 도시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15년간을 더 싸우며, 대립했다. 그들의 영향권하에 있는 나라와 도시들은 무력에 의한 강요를 이기지 못하거나 이해관계에 의해서 종주국을 바꾸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주로 아무루와 우피의 종주권을 놓고 전쟁을 치렀다. 람세스 8년과 9년에 람세스의 군대는 다푸르까지 전진하여 투니프에 도착했다. 그러나 두 제국은 다른 전선에서도 이민족과 싸워야만 했다. 아시리아가 히타이트를 위협하고 있었던 반면, 이집트는 서쪽에서 리비아에 대항해 왕국을 지켜야 했다. 게다가 큰 위기가 하티를 약화시켰다. 무와탈리가 죽고 나서 두 명의 후보가 왕위를 놓고 싸웠다. 무르실 3세라는 칭호로 통치한, 우르히-테슈브로 불렸던 무와탈리의 서자와, 그의 숙부이며 합법적인 후계자였던 하투실 3세가 그들이다. 결국 하투실 3세가 승리를 거둔다. 우르히-테슈브는 변방으로 유배되어 람세스 치 하18년에 이집트로 망명했다. 하투실 3세는 조카를 추방할 것을 요구했으나 람세스는 이를 거절했다. 다시 전쟁이 시작될 것 같았지만, 하투실 3세는 아시리아의 세력이 막강하게 커지 는데 압박감을 느껴 람세스와 평화협상을 한다.
히타이트 국제조약
평화협상 끝에 람세스 2세와 하투실 3세는 람세스 치하21년에 은탁자위에 국제 공 식언어인 아카드어로 쓰여진 조약에 서명한다. 점토판 위의 복사본이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사에 보관되었으며, 파피루스에 이집트어로 번역한 것도 피람세스의 고문 서실에 보관되었다. 또 카르낙 벽의 거대한 비문에도 새겨졌다. 두 강대국은 양국 간에 전쟁을 영구히 중지하며 상호 양보하는데 동의했다. 즉, 이집트는 아무르를 포기하는 대신에 우피 지방을 보존하며, 페니키아 항에 대한 권리를 공고히 하여 파라오의 밀사가 우가리트까지 난 길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이 조약은 현대적인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다. 평화에 대한 약속과 형제애, 불가침 과, 상호협력 협정, 두 나라의 왕권보호, 도망자의 추방과 망명자에 대한 사면이 그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 조약이 있은 후로 이집트는 람세스 2세가 죽을 때까지 수십년 간 평온한 행복을 누렸다. 전쟁이 끝난 뒤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 왕의 맏딸과 결혼을 한다. 나중에 그는 히타이트의 둘째 공주와도 결혼을 했다. 람세스 2세는 대신전을 완공했을 뿐 아니라 라메세움이라고 알려진 자신의 장례 신 전도 만들었다. 또, 아비도스에 있는 세티 1세의 신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의 신전을 지었으며, 수도인 테베에는 큰 신전 네 개와 작은 신전 여러개를 세웠다. .람세스 2세는 누비아에도 최소한 여섯 개의 신전을 지었다. 그는 누비아 신전 벽에 공식 기록과 시의 형태로 카데시 전투에 대해 설명하고 그림 을 그려 넣었는데, 그 시는 파피루스에도 남아있다. 람세스 2세는 그 어떤 파라오보다 신전을 많이 건설했으며, 그 중에 아부심벨 신전 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3. 람세스의 마지막
기원전1213년 경 최후의 희년을 맞기 하루전날 밤에 람세스 2세는 67년간의 통치 를 마감하고, 파람세스에서 사망한다. 그곳에서 그의 시체는 70일 동안 방부처리를 받았다. 장례 행렬은 성대한 예식 속에서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 테베에 도착하여, 람세스 는 영원한 거처에 안치되었다. 왕국의 모든 영역에서 람세스 2세 시대는 파라오의 역사에 최후의 절정을 이룩한 빛나는 시기였다. 이집트 제국의 힘, 그리고 정치, 종교, 문화적 명성, 왕중의 왕이 며,신이기도 한 람세스 2세의 영광, 행정의 효율성, 신전과 그 주위의 화려함, 웅장 하고 화려한 수많은 기념물, 보편적인 평화와 번영 등 이 모든 것을 그 후의 파라오 에서는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람세스 2세의 열세 번째 아들이며, 그의 후계자였던 메란프타는 람세스 2세 사후 몇 년 동안은 연속성을 유지했으나, 그후 냉혹한 멸망을 맞았다. 왕권다툼으로 제 19왕조는 멸망하고 왕국은 위엄 있던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외침 의 위협 속에 생활 수준은 급격히 저하되고, 내부적으로는 부패했다.
4. 아멘호텝 4세
제 18왕조의 열 번째 왕으로 즉위한 아멘호텝 4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를 개혁 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 개혁을 실시했다. 그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다신교를 부정하고, 아몬에 대한 전통 신앙으로 대표되는 유일하고 보편적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인 아톤에 대한 신앙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도 "아몬을 다스리는 신성한 도시 테베의 지배자" 라는 뜻의 "아멘호텝"에서 "아톤을 섬기는 사람" 이라는 뜻을 가진 "아케나톤"(아크나톤)으로 바꿨다.
아케나톤이 진정으로 바란 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창조한 태양신 아톤만을 믿고 복 종함으로서 그의 아들인 파라오 또한 "유일하고 지극히 고귀한 존재"로 여기게 만들 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케나톤은 아톤이 지상에서 인간의 운명을 지도하는 신의 아들인 파라오에게 명령 을 내려 자신을 대리로 삼았다고 믿게 했다. 아케나톤과 아내인 네페르티티는 아톤에 대한 유일 신앙을 깊이 받아들였고, 이를 널리 펴기 위해 노력했다. 아케나톤은 이집트의 피정복지였던 시리아와 리비아에 도 아톤 신앙을 포교하려 했다.
그는 수도도 테베에서 북쪽으로 300Km 떨어진 곳 으로 옮기고 그 곳을 아마르나라고 불렀다. 아케나톤은 파라오의 권한을 강화하고, 아톤에 대한 신앙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다른 신들을 부정하고 신관을 추방했다. 그의 눈에 신관들은 물신 숭배자였고, 주변에 성스러운 풍뎅이를 잔뜩 늘어놓고 마 법으로 돈을 모으는 상인일 뿐이었다. 그는 또 이집트 안 모든 신전이나 무덤에서 아몬 상을 없애고 그 이름을 지우도록 명령했다.
아케나톤이 취한 이런 조치들에서는 광신적인 성향이 옅보이기도 한다. 아마 그의 괴상한 외모가 그런 혐의를 더 짙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조각이나 벽화에서 아케나톤은 허약한 사나이로, 얼굴이 길고, 비틀어진 어께는 축 늘어졌으며, 배가 나오고, 엉덩이가 크고, 다리는 길고 굵은 모습으로 묘사됐다.
가짜 신들을 쫓아낸 세상에서는 아톤에 대한 신앙만이 허용됐다. 이제 이집트인은 "빛의 산에 있는 환희의 신"만을 숭배해야 했다. 사람은 삶과 따뜻함을 내리신 태 양에 감사하기만 하면 됐다. 아톤은 사랑과 평화의 신이며, 운명의 주인이며, 생산의 원천이며, 생명의 창조자며 , 압박받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가르치고 자유를 주는 신이었다. 아톤은 달걀 속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것을 도와 주는 신이었다. 아톤이 빛날 때 인간은 기쁨에 겨워 춤추고, 하늘의 새나 땅과 바다의 동물은 기꺼 이 그를 섬겼다. 새로운 도시 아마르나는 매력적인 도시였으며, 이 이전시대와는 달리 조각상을 만 들 때 사실적인 묘사가 행해졌다. 유명한 사람의 모습을 석고를 만들고, 벽화에서 손이나 발가락을 처음으로 정밀하게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무덤의 벽화는 위와 아래가 조화를 이뤘고, 화가와 조각가는 신관의 검열에 구속받 지 않고 자유롭게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르나에서는 이전까지와 다 른 새로운 예술 양식이 시작되고 번성했다. 예술은 비로소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 었다. 아케나톤은 이집트 내부 체제와 종교를 개혁하는 데만 힘을 쏟고 나라 밖 사건들과 이집트가 직면한 어려움에는 무관심했다. 외국에 군대를 파견하는 대신 그는 그 군대를 신전과 무덤으로 보내 그 곳에 있는 상징,우상,다른 신의 이름과 그것을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없애 버리라고 명령했다.
찬란한 "빛의 시대"에 과거의 어두운 힘을 연상시키는 것이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전령이 나쁜 소식을 가지고 달려오면 아케나톤은 모든 것을 태양신에 맡겼다. 아톤이 군림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이것이 그의 믿음이었고, 통 치 원칙이었다. 아톤만 믿으면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고 믿었고, 오로지 다른 신과 그 신을 믿는 사람들과만 계속 투쟁했었다. 때문에 그는 실패했다.
아케나톤은 신 안에 존재하는 인간, 인간 안에 자리잡은 신을 사랑했다. 그는 소박하게 살면서 모든 노예를 해방했다. 가난한 자에게 호소해서 아톤을 위해 싸우라고 요구하고, 그는 이미 내려진 모든 판결을 재심사해서 많은 죄수를 석방했다. 그리고, 동물을 사냥하는 것을 비인간적 인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아케나톤은 동물을 보호하는 법률까지 공표했다. 아케나톤은 호화로운 건조물을 짓는 것을 모두 중단하고 평민을 위한 주택을 짓게 했다.
이집트 발굴 협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케나톤은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노 동자 도시를 만든 사람으로 나와있다. 아케나톤은 집의 규모와 크기를 하나로 통일했고, 누구도 그것을 어길 수 없었다. 아케나톤은 인간이 양이나 기타 다른 짐승과 방을 같이 쓰는 것도 금지했고, 이 조 치는 그가 죽은 뒤에도 계속됐다. 집집마다 난로가 설치됐고, 화장실을 갖추게 됐다.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집 밖에 서 음식을 만들고, 거리에서 용변을 봤었다.
아케나톤은 구걸행위도 금지했고, 이를 어기고 동정을 배푸는 사람은 엄한 처벌을 각오해야 했다. 점쟁이나 주술사를 믿는 것도 금지 대상이었다. 아케나톤의 혁명은 무혈 혁명이었다. 그는 군대도 해체했다.
아케나톤의 시대에는 군인이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급이 되고 말았다. 군인에게는 급료가 지불되지 않았고, 계속 군대에 남고 싶은 사람은 걸식을 하던지 굶주림으로 고통받든가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식민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도 아케나톤은 "새로운 신 아톤은 압박을 허락하지 않는 다"며 진압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이집트 제국을 해체할 것을 명 령했다. 왕은 제일 먼저 이집트에 여자와 유모를 공급하던 시리아를 해방했다. 아케나톤은 이집트인이 외국에서 명성을 얻고 있다는 보고를 믿지 않았다. 외국인 들이 이집트인을 폭군으로 여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집트인에 대한 인식이 아주 나빠 " 죽은 이집트인만이 좋은 이집트인"이 라는 유행어가 있을 정도였다. 아케나톤은 이집트에 대한 이런 악평을 바꾸고자 결 심했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 있던 이집트 점령군을 모두 불러 들였다. 아케나톤이 통치하기 전에는 아몬이 이집트의 모든 부를 소유했었다. 이는 곧 이집 트의 풍부한 토지가 모두 신전과 신관의 것이었음을 뜻했다. 아케나톤은 이를 인정 하지 않았고, 아몬에 속한 모든 토지와 재산을 농민에게 돌려 줬다. 귀족이나 부자 도 자기에게 꼭 필요한 만큼의 토지만 기질 수 있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그들도 세금을 내야 했고, 노예에게 노동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의사에게는 무료로 가난한 자를 진료할 의무가 부과됐다. 아케나톤의 시대에는 신관들도 일을 해야만 했다. 아톤은 정의의 신인만큼 일하지 않고 부를 얻는 것은 금지됐다.
인민에게 부당한 세금을 거둔 관리는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부정한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도 처벌을 받았다. 이런 정책들은 폭력을 동반하지 않고 또 피를 흘리지 않고 실행됐다. 그 정책들은 사랑의 신 아톤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집트인은 이 갑작스런 자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평민들은 편안함만을 좋아했고, 예전에 부자들이 했던 생활을 흉내내려고 했다. 그들은 새로운 자유를 방만한 생활을 보장해 주는 토대쯤으로 생각했다. 평민들에게는 지도자가 없었고, 통일된 목표도 없었다. 새롭게 주어진 권리를 현명 하게 지킬 방법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읽기와 쓰기를 배우라는 왕의 명령에 반항하기도 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아케나 톤 반대 세력에게 반격할 기회를 제공했다. 아케나톤에 반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귀족과 신관이었다. 이들은 보리 공급을 방해 해서 가격을 올려 평민들이 불만을 갖게하는데 성공했다. 게다가 아케나톤이 제 1 수입품인 향료사용을 금지해서 거의 모든 배가 일거리를 잃었고, 실업자가 된 선원 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시리아를 비롯한 옛 식민지들은 더 이상 이집트에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미이라제조도 금지되어 장례산업은 사라지고, 부장품을 만드는 산 업도 모두 마비됐다.
신관들은 평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사회가 불안해진 이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아케나톤에 대한 원한을 부추겼다. 점성가와 주술사들은 이 모든 사태가 아몬을 모욕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고, 이제 곧 엄청난 파국이 이집트를 덮칠 것이라고 경 고하고 다녔다.
어느 날 아몬에게 충성을 맹새한 평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박해가 뒤따랐다. 이집트는 이제 둘로 갈라지고, 아톤 편에 선 이들은 주로 노예와 무산계급이었고, 아몬 편에는 신관과 유산 계급, 서기 등이 속해 있었다. 신관들은 옛 군인들에게 무 기를 주며 아몬의 이름으로 싸워 이기면 재산을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이런 혼란을 틈타 욕심을 채우는 무리까지 나타나고, 그들은 여기저기에서 약탈과 방화를 저질 렀다.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건물이 불타고, 시체가 길 위에 산더미를 이루고 있거 나 나일 강에 던져졌다. 무너져 가는 제국을 보며 아케나톤은 아톤에게 호소를 했다.
그러나 그와 아톤의 패 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아케나톤은 어느 날 시의가 건넨 약을 먹고 숨을 거뒀다. 왕을 배반한 시의가 신관들의 명령에 따라 독약을 먹인 것이다. 신관들은 옛 신들의 승리를 선언했고, 아몬 신전 앞에는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이번에는 귀족, 군인, 신관이 복수할 차례였다.
아톤을 믿는 신도 몇 천명이 처형됐 고, 수많은 사람들이 책형. 교수형. 화형. 생매장에 처해지거나, 사막에 버려졌다. 이는 모두 아몬의 영광을 위해 내린 정의롭고 위대한 심판이었다.
아케나톤이 이뤘던 개혁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노예들은 다시 신의 영광을 위해 채석장에서 일해야 했으며, 평민들은 새로운 권력에 복종해야했고, 길들여졌다. 대신관은 새로운 군대의 지휘관이 되고 그 군대는 외국으로 진군했다. 신관들도 다시 예전의 위세를 떨치고, 부자들은 다시 신전에 금을 바쳤다. 아톤을 위해 세워졌던 대신전은 아몬 신전으로 개조되고, 가난한 자들은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한 신들을 다시 저주하기 시작했다.
아케나톤이 죽은 뒤 잠시 동안 그의 아들인 스멘크카레가 왕위를 이었다. 스멘크카레는 자신의 누이와 결혼했기 때문에 아케나톤의 사위이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 왕실에는 이런 근친 결혼이 아주 흔했다. 스멘크카레가 젊은 나이로 죽은 뒤 왕위는 그의 동생 투탕카멘에게 이어졌다
5. 투탕카멘
18왕조 파라오( BC 1580 ~ 1314년 )인 투탕카멘은 아케나톤 다음의 파라오로서 1922년에 하워드 카터에 의해 그의 피라미드가 발견된 후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유명한 파라오가 되었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데 그가 아멘호테프3세의 아들일 것이라는 의견 과 아케나톤과 네페르티티의 자식일 것이라는 설등 2가지가 주도적이다. 그는 9살에 파라오가 되었고, 18살까지 9년간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는 통치기간중에 수도를 엘 아마르나에서 테베로 천도했고, 아케나톤에 의해 유일신이된 아톤에 반해 아문신을 다시 섬기도록 하였다.
그의 미이라는 왕들의 계곡(The valley of the kings)에서 두개골이 파손 되어서 발견되어 그가 사고에 의해 희생되었거나 암살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그의 피라미드는 도굴범들에게 파손되지 않은 몇안되는 피라마드중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으 로 알려져 있어 더 유명하다.
또한 투탕카멘의 피라미드에서는 인류최초로 향이 발견되었다.인 투탄카멘의 무덤 안에서 발견되었다. 석고로 만든 아라바스타 항아리에 채워진 향고는 20세기 발견 당시 은은한 향기 로 남아있어 전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향고는 손에 묻히면 녹는 끈적끈적한 물질로 냄새는 느끼한 느낌으로 마치 미타리과 식물의 냄새를 연상시키고, 또한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방부성을 가진 유향이나 보류성이 높은 방향성 수지를 사용하여 3000년동안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와같이 'PER FUMUM'이라는 ( 라틴어로 '연기를 통한다'라는 의미 ) 향의 어원에서 볼수 있듯이 고대 이집트 왕조들은 마르지 않은 나일강처럼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향을 애용하였고 시체의 부패방지, 보존을 위해 약품으로 사용하였다. 이밖에 파라오가 아닌 일반인들은 특별한 나무나 나뭇가지를 태운 향을 신에게 공물로 바쳤 다.
☆ 네프로티니왕비
일반적으로 이집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꼽으라면 크레오파트라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크레오파트라의 미모에 버금가는 미모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이집트의 왕비이고 이름의 뜻이 "아름답도다"일 정도로 아름다움이 대단했던 왕 비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이 네페르티티이다. 네페르티티가 처음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아케나톤의 부인이 되고 나서이다.
네페르티티의 출생근원에 대 해서는 여러 학설들이 분분한데 이집트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온 공주라는 학설과 아멘호템3세의 공주이거나 티예(Tiye)의 공주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의 부모가 누구인든지 네페르티티는 아케나톤의 왕비로서 멤피스에 사는 동안 6명의 공주를 낳았다. 사실 발견된 기록은 아직 없지만 그녀가 왕자도 낳았을 것 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왕위 승계는 남자후계자이고 이집트 예술은 남자 후계자자 어린아이일 때는 묘사를 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 투탕카 멘이 네페르티티의 아들일 가능성도 대두되고 있다.
네페르티티는 그의 남편 아케 나톤과 함께 아톤이란는 곳으로 거취를 옮겼는데 그곳은 아케나톤이 새로운 신 으로 모시게한 아톤신의 축복을 받은곳이었다.
현재 아케나톤왕보다도 네페르티티의 초상과 조각이 더 많이 남아 있어 일부에서 는 실제도 아톤으로 옮긴건은 아케나톤이 아닌 네페르티티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 다. 그러나 신비하게도 약 15년간의 통치뒤 네페르티티의 기록은 역사에서 사라 진다.
혹자는 그녀가 그 시기에 사망했을 것이라하고, 다른 학자들은 그녀가 이집 트 북쪽지역에서 투탕가멘을 양육하며 여생을 보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녀가 갑자기 사라진데에 대한 이유는 두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우선 네페르티티가 아문신에 대한 신앙이 회복되어 테베로 돌아 갔을거라는 이 론과 아케나톤이 다신교였던 이집트에서 모든 신들을 금지하고 아톤신을 섬기 도록 하여 국민들과의 불화로 인해 아케나톤이 민심을 잃었다고 생각하여 그 를 떠났을 것이라는 이론이 있다.
왼쪽의 네페르티티의 흉상은 미모야릇하고 좀 처럼 잊을수 없는 여성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예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기념 물중의 하나이다.
☆ 서양종이의 원조 파피루스.
파피루스는 중국의 종이 제조방법이 아랍세계를 통해 유럽 전해진 8세기이전까지 유럽에서 기록매체 이용되었다. 파피루스를 최초로 만든 곳은 바로 이집트이다. 나일강의 습지대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파피루스풀은 높이가 4-5미터나 되는 것도 있다. 이 파피루스의 껍질은 배의 돛으로 이용하였고 줄기는 배를 만들거나 땔감으로 사용하였으며, 고갱이는 샌달이나 바구니 등을 만들었다.
바로 이 파피루스풀로 종이를 만들었는데, 최상품은 고갱이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제조방법을 간략히 소개하면, 파피루스의 줄기 밑을 60cm정도 길이로 잘라 껍질을 벗긴다.
파피루스 식물을 넓고 길다란 조각으로 갈라 만든 후 물에 담군다.
나일강의 물은 흙탕물이라 이것이 마르면서 끈끈한 접착제 역활을 한다.
파피루스 조각이 서로 겹쳐지도록 나란히 판자위에 놓은 다음 끝을 잘라 끝부분에 직각이되도록 겹친다.
이것을 압착하여 말리는 것이다. 나무망치를 이용하여 두르려 말린다.
수액을 내어 말려서 줄기들이 서로 접착되도록 하여 파피루스를 만든다. 고갱이로 만든 것은 종교관련 서적에 이용되었으며, 껍질로 만든 것은 표지나 포장지로 이용되었다.
이 파피루스 종이를 여러장이어서 두루마리로 만들어서 필기도구와 함께 널리 이용되었다고 한다.
파피루스는 현대의 종이와 유사한 형태로 가볍고 동그랗게 말려 지므로 가지고 다니기에 편리하였다.
이 파피루스가 바로 종이 즉 페이퍼의 어원이 되었다. 이 파피루스는 이집트 국가에서 독점하여 만들었으며, 개인이 허락없이 만들 수 없었다.
페니키아와 지중해안을 따라 유럽으로 전해졌으며, 이집트의 중요한 수출품 이였다. 파피루스가 그리스에 수출될 때 페니키아의 비브로스항을 거쳤는데, 이 때문에 그리스에서는 파피루스를 비브로스라고 불렀으며, 비브로스는 바로 그리스어로 책이라는 뜻이였다.
이 비브로스가 비블리오그라피 즉 서지학의 어원이 되었으며, 바이블 즉 성경의 어원이 되었다. 하지만 파피루스는 값이 비싸고 찢어지기가 쉬워서, 중국에서 종이가 전해지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급히 사려져갔다.
Ⅳ. 이집트신화
1. 멤피스
아툼(Atum, 창조 이전에 온갖 실재를 내포하고 있는 아직 밝혀지지 않는 정령)의 외형으로서 심장이 있었고, 혀가 있었다. 프타(Ptah)는 전능한 존재이다. 프타는 그 심장과 혀를 통해 모든 신들의 몸과 영혼에 생명을 주었다. 호루스는 이 심장에 의해 프타가 되고, 토트(지혜의 신)는 혀에 의해 프타가 되었다.그리하여 심장과 혀가 신체의 다른 기관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심장과 혀는 모든 신들과 모든 인간, 가축 등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몸과 입안에 프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프타가 바라는 모든 것을 생각하고 명령했다.
프타의 아홉 신들은 이와 입술의 형태를 띠고 프타 앞에 있다.
이 아홉 신들은 아툼의 정액이자 손이다. 그렇지만 프타의 아홉 신이 이입에 있는 이와 입술속에 들어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들이 모든 것의 이름을 발설한 듯하다.
그리하여 슈와 테프누트가 생겨났는데, 이들이 아홉 신의 창조자였다.
눈은 자기가 본 것을, 귀는 들은 것을, 코는 냄새맡은 것 심장에게보고한다. 온전한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심장이고, 심장이 생각하는 바를 발표하는 것은 혀이다.
그리하여 모든 신들이 만들어지고 프타의 아홉신이 완성되었다.
과연 심장이 생각하고 혀가 지시한 것을 통해 모든 신들의 질서가 실제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카 영혼(ka-spinit, 몸이 죽고난 뒤에도 살아 남는 영혼)이 만들어지고 헴수트 영혼(hemsut-spirit)이 지정되었다. 헴수트영혼들은 말로써 모든 양식과 자양분을 만든다. 남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상이 주어지고 남들이 싫어하는 일을 하는사람에게는 벌이 내려졌다.
즉 평화롭게 하는 사람에게는 삶이 주어지고 죄를 짓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주어졌다. 심장이 생각하고 혀가 말고 표현한 명령에 따라 모든 활동과 기능이 생겨났다.
팔의 동작과 다리의 움직임을 비롯해 모든 신체 기관의 활동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렇듯 심장의 생각은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프타는 "모든 것을 만들고 신들을 존재하게 만든 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프타는 정말로 모든 신들을 만든 프타테넨이다(프타는 대지의 신 테넨과 동일시되어 프타테넨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자양분과 양식, 신들의 제물을 비롯해 모든 좋은 것이 그에게서 나왔기때문이다
결국 그의 힘이 다른 신들의 힘보다 크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알려졌다. 그리하여 프타는 모든 것을 만들고 신들의 질서 잡고 난 뒤 아주만족하였다. 프타는 신들을 만들고 , 도시를 만들고.....신들을 각자의 성소에 집어넣고, 그들의 제물을 마련하고.....그들의 심장이 만족할 흙, 혹은 그들을 자라나게 할 만한 것들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모든 신들은 만족하여 두 나라[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지배자와 제휴했다.
2. 헤르모폴리스
헤르모폴리스는 '헤르메스의 도시'라는 뜻으로, 그리스인은 고대 이집트의 신 가운데 지혜의 신 토트(Thot)를 그리스의 헤르메스(Hermes)신과 동일시 하여 그 신을 믿는 도시를 헤르모폴리스라고 불렀다.
이곳은 나일강을 남쪽으로 상당히 올라가야 있는데, 고대에는 후문, 나중에는 슈문이라고 불렀으며 오늘날에는 에스네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그것은 '여덟'을 의미하는데, 뒤에 나오는 여덟 신의 수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다.
이곳 신전에서 볼 수 있는 신들의 그림에는 여덟 신이 그려져 있고, 이 그림에는 '원초의 대양'이 갖는 네 가지 특성이 남신과 여신에 의해 표시되어 있다.
원초의 대양을 숭배한 것은 헤르모폴리스, 헬리오폴리스, 멤피스의 신화가 모두 같은데, 그 원초의 대양을 눈(Noun)이라고 불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헬리오폴리스의 신화'에서 다시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헤르모폴리스의 여덟 신은 다음과 같다.
남신 나우와 여신 나우네트
심연 남신 후흐와 여신 하우헤
무한 남신 아몬과 여신 아마우네트
불가시성 남신 쿠크와 여신 카크웨트
암흑 이 여덟 신 중에서 남신은 개구리의 머리를 가진 모습으로 여신은 뱀의 머리를 가진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신들은 원초의 대양에서 헤엄쳤으며 그 물속에서 최초의 알이 생겨났다.
이 알은 '켄켄 웰(꽥꽥하고 우는 큰 놈이라는 뜻)'이라는 커다란 오리, 혹은 거위가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원초의 대양에서는 연꽃이 피어났고 거기서 귀여운 아기가 뛰쳐나와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한다.
이 아기는 떠오르는 태양을 의미하며, 저녁이 되면 연꽃은 꽃잎을 닫아 다시 태양을 가둬버린다는 것이다.
헤르모폴리스에서는 나중에 토트(Thot)신이 숭배를 받게 되고 그 후에는 헬리오폴리스의 신화와 뒤섞여 버렸다고 한다.
헤르모폴리스의 신화에서 우주의 주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우주의 주인)는 신들을 내 땀으로 만들고, 인류를 내 눈물로 만들었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어로 '인류'를 로메트, '눈물'을 레메이에트라고 말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혹은 동물 사이에) 본질적인 구별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3. 헬리오폴리스
그리스어로 헬리오폴리스라고 불리는 고대 이집트의 도시는 오늘의 카이로 근처에 있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헤브라이인들은 그것을 '온'이라고 불렀고 헬리오폴리스는 헬리오스(태양)와 폴리스(도시)라는 말이 결합된 것으로, 이곳이 태양신을 숭배하는 중심지였음을 보야주고 있다.
그러나 태양신 라(Ra)는 헬리오폴리스의 신화에서는 나중에 등장한다. 헬리오폴리스에서 말하는 천지창조와 신들의 창조자는 아툼(Atoum)이며, '완전한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아툼은 원초의 대양인 '눈'의 아들이라고도 하며, 큰 홍수 뒤에 생기는 언덕 혹은 지면을 의미한다고 한다.
아툼은 이곳에서 들이나 바위 위에 서서 남신 슈(Shou)와 여신 테프네트(Tefnet)를 입에서 뱉어냈다.
(고대 이짐트에서 슈나 테프는 '뱉는다'는 의미였다.)
슈는 '공기', 테프네트는 '증기'를 나타낸다.
4. 이집트 홍수
태양신 라는 아버지인 물의 심연에게서 경고를 받았다.
인류가 너무 사악해진 나머지, 신들에게 맞서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라는 자신의 눈인 여신 하토르를 세상으로 보내, 상황을 알아보고 악인들을 벌하라고 하였다.
하토르는 땅으로 내려가 인간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하토르가 너무나 지독했기 때문에 체테누텐 마을의 거리는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너무 많은 피가 나일강으로 흘러 들어가, 강물이 둑을 타고 흘러 넘쳤다.
피와 물이 뒤섞여 땅을 덮고, 그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집어 삼켰다.
핏물이 바다와 만나자 이번에는 바닷물이 넘치기 시작했다.
하토르는 말 그대로 목이 말라 그 피비린내 나는 물을 끝없이 마셨다.
라는 원래 의도는 인류를 벌하는 것이었지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라는 지혜의 신 토트를 불러 조언을 구했다.
그런 다음 라는 여신 세크헤트를 불러, 대추야자 열매를 갈아 보리와 섞어서 독한 맥주를 만들라고 했다.
그 맥주는 죽은 사람의 피와 섞여 하토르를 유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다음 라는 시종들에게 맥주 항아리를 가지고 가, 하토르 근처 마른 땅이 남아 있으면 어디에든 쏟아부으라고 시켰다.
맥주는 거대한 바다를 이루었다.
하토르는 피 냄새에 끌려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결국 하토르는 너무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살아 남은 사람이 몇 명 있었지만 하토르는 완전히 취한 상태라 인간들을 알아 보지도 못한 채 골아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살아 남은 사람들 때문에 인류는 다시 땅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라는 인간들과 하토르를 상대하고 땅 위의 다른 문제들을 처리하는 데 싫증이 났다.
그래서 그는 토트를 땅의 통치자로 임명하고 자기는 천상의 거대한 소 등으로 쉬러 갔다. 토트를 땅의 통치자로 임명한 것을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
토트가 사람들에게 글쓰는 법과 시 짓는 법은 물론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까지 가르쳤기 때문이다.
5. 이시스
이시스는 처음에 신비로운 힘을 지닌 말을 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기에 지쳐 신들을 부러워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신의 거룩한 이름으로 태양신 라와 같이 여신이 되기로 하자."
그런데 태양신 라는 날마다 신성한 배를 타고 하늘을 가로질러, 두 지평선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잇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늙고 쇠약해진 태양신은 침을 질질 흘리게 되었다. 이시스는 땅 위에 몸을 굽혀 흙으로 창 모양의 신성한 뱀을 만들어 태양신이 지나가는 곳에 놓았다.
태양신은 여러 신들을 거느리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하늘을 가로질러 갔다. 그런데 도중에 신성한 뱀이 태양신에게 덤벼들었다.
태양신이 입을 열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자, 그 소리가 하늘에 온통 울려퍼졌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신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난 것 인가하고 시끌벅적했다. 태양신의 몸 속에는 독이 스며들어 턱과 손발이 덜덜 떨렸다.
태양신은 신들을 불러들여 그 고통을 호소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고통스러워본 적이 없다.
나는 많은 이름을 갖고 있는 대신으로서 이 세상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런 고통은 처음 당한다. 이건 불일까, 아니면 물일까? 내 심장은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온몸이 마구 떨린다." 모든 신들이 태양신의 모습을 보고는 몹시 슬퍼했다. 그러자 이시스가 태양신에게 말했다.
"오, 태양신이여!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뱀에게 물렸다구요?
그렇다면 제가 신비로운 말의 힘으로 그것을 고쳐드리겠습니다.
제가 하는 말은 생명의 입김이므로 그 고통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태양신이 이시스에게 말했다.
"나는 날마다 두 지평선 사이를 지나다니면서 네가 창조한 것을 바라보다가, 어딘가 숨어 있던 뱀에게 물리고 말았다.
그 고통은 불 같기도 하고 물같기도 하다.
아니 그것은 불보다 뜨겁고 물보다도 싸늘하다." 이시스가 태양신에게 말했다. "오, 태양신이여! 당신의 진정한 이름, 숨겨진 말을 가르쳐주십시오.
그러면, 그 이름에 의해 당신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태양신이 이시스에게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고, 산과 물과 바다의 창조자이고, 사랑의 근원인 '어머니가 되는 암소'의 창조자이고, 두 지평선의 창조자이다.
나는 신들에게 영혼을 주고, 눈을 밝게 한 자이고, 나일강에 물이 흐르게 하는 자이고, 시간과 날짜와 해의 제삿날을 정하고, 나일강에 홍수를 일으킨 자이고, 물을 만들고 집에 음식을 마련해주는 자이고, 아침에는 헤펠라, 낮에는 라, 저녁에는 툼이라고 불리는 자이다." 그러나 뱀의 독은 더욱더 깊숙이 스며들어, 태양신은 점점 더 고통스러워했다.
이시스가 태양신에게 말했다. "방금 말씀하신, 진정한 이름을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독이 사라질 것입니다.
" 태양신의 몸 속에 퍼진 독은 더욱 기승을 부려, 태양신은 한결 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 이시스에게 말했다.
"나는, 나의 진정한 이름이 나한테서 이시스에게 전해지는 데 동의하겠다." 태양신은 그 말을 마치자 신들 사이에서 사라져, 신성한 배 안에 있는 태양신의 자리는 비게 되었다.
그리고 때가 되어 태양신의 진정한 이름, 즉 신비스런 이름이 이시스에게 전해진 것 같았다.
이시스가 아들 호루스에게 말했다. "태양신은 그의 두 눈 -즉 해와 달-을 걸고 맹세했다." 그리고 이시스는 신비로운 말의 힘으로 명령했다.
"오 독이여, 라에게서 나와 사라져라! 오, 호루스의 눈이여, 신에게서 나와 그의 입을 비추어라! 독을 없애 버리는 건 바로 나다.
태양신의 이름으로 말한다, 어서 사라지거라! 태양신의 생명이 영원하기를! 독이여, 사라지거라!" 이리하여 이시스는 태양신의 자리에 앉게 되고, 그의 진정한 이름을 아는 위대한 여신으로서 경배를 받게 되었다.
6. 오시리스
이집트 신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오시리스 신화>는 그리스의 저술가 플루타르코스(기원전 1~2세기)가 <모랄리아>라고 부른 수필집의 일부에 쓰인 <이시스와 오시리스에 대해서>가 가장 자세하게 이것을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집트의 많은 신들이 그리스 이름으로 바뀌어져 있다.
레아(여신 스토)와 크로노스(남신 게브)가 성교하면 태양 라는 레아에게 1년(365일)동안 아이를 낳도록 주문했다.
그러나 헤르메스(토트 신)도 레아와 성교하여 365일에 윤일 5일을 더하여 이 5일은 주문에서 자유로워져 레아는 5신(오시리스, 아르엘리스:연상의 호루스, 튜폰:세트, 이시스, 네프티스)을 낳았다.
오시리스는 이집트에서 경작과 법률, 신들에 대한 존경과 숭배에 대해서 가르쳤다.
그러나 튜폰(세토)은 오시리스에 대한 반란을 계획하고 몰래 오시리스의 몸 크리를 재어 그 크기로 관을 만들어서 오시리스에게로 운반했다.
세트는 농담처럼 이 관의 크기에 맞는 자에게 이것을 주겠다고 말했다. 오시리스가 여기에 들어가자 튜폰(세트)과 그 패거리들이 달려들어 뚜껑을 닫고 이것을 못으로 잠가서 강(나일)에 버렸다. 이고나온관은 바다(지중해)로 흘러 나왔다.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상복을 입고 관을 구하기 위해 찾아나섰다.
관은 비브로스(동지중해)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시스는 이곳으로 향했다.
관은 비르로스로 흘러와서 어느 식물 속에 싸여서 큰 나무로 성장했다. 비브로스의 왕은 이 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시스는 이 사실을 알고 왕비에게서 이 기둥을 받아 관을 꺼냈다.
이시스는 이 관을 이집트로 가지고 돌아왔는데 튜폰(세트)은 이것을 알고 관 속의 오시리스 몸을 14부분으로 잘라서 여기저기에 흩어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집트에는 오시리스의 묘가 많다고 플루타르코스는 기록하고 있다.)
이시스는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오시리스의 몸을 찾아서 모았지만 강으로 떨어져서 물고기에게 먹혀 버린 남근만은 찾을 수 없었다.
죽은 오시리스는 명계에서(죽은 자의 모습으로) 아들 호루스가 있는 곳으로 와서 튜폰(세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싸움 훈련을 시킨다.
이렇게 하여 호루스는 투폰과 싸워서 결국 승리한다. 이시스는 쇠사슬로 묶인 튜폰을 건네받았지만 그를 죽이지 않고 풀어주었다.
호루스는 이에 화가 나서 어머니의 머리에서 왕장을 떼어내 버렸다(이 부분은 히에로그리프로 남아 있는 신화적 작품 <호루스와 세트의 싸움>과 거의 같은 이야기이다).
튜폰(세트)은 이후 두 번째의 싸움에서도 패배하였다(<호루스와 세트의 싸움>에서도 두 번에 걸쳐서 세트는 호루스의 도전을 받고 있다).
7. 호루스와 세트
오시리스 신은 죽음을 대표하는 것으로써 늘 숭배되었는데 그의 동생 세트와 아들 호루스가 오시리스의 자리를 놓고 서로 싸워서 신들에게 호소했다. 신들은 만물의 주인의 광장에 모여서 어떤 신은 세트의 편이 되고 어떤 신은 오시리스에게 가담했다.
아홉 신들은 지혜의 신 토트에게 명령하여 신의 어머니 네이트의 의견을 물어보도록 한다. 신의 어머니 네이트는 호루스야말로 오시리스의 뒤를 이을 만한 자라고 한다.
세트는 화가 나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많은 신들이 여기에 가담했다. 그러자 호루스의 어머니 이시스(오시리스 아내)는 이 일에 화가 나서 끝까지 대항할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나서 만물의 주인은 가운데 섬에서 다시 심판을 하기로 하고 이시스가 쳐들어 올 것을 두려워하여 나룻배 사공에게 이시스가 못 건너오도록 지키라고 명령하였지만 이시스는 금반지를 주고 쉽게 건너간다.
그리고 나서 이시스는 미녀의 모습으로 바꾸어 신들의 마음을 유혹한다. 세트도 이시스라는 것을 모르는 채 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시스는 세트에게 남편이 죽으면 재산은 아들의 것이 되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것이 되는지 수수께끼를 낸다.
세트가 그것은 아들 것이 된다고 대답하자 이시스는 매로 모습을 바꾸고(자신이 이시스라는 것을 나타내고) 세트를 비웃었으며 신들도 이시스에게 가담하였다.
세트는 실패를 깨닫고 나룻배 사공 때문이라고 그에게 벌을 주었다. 만물의 주인은 호루스에게 오시리스의 자리를 주었는데 세트는 격력하게 화를 냈다. 세트는 호루스를 불러서 서로 하마로 변신하여 물 속에서 싸웠다.
이시스는 호루스를 도와주려고 침을 물 속으로 던졌다. 그런데 처음에는 호루스에게 꽂혔다.
이시스는 소리를 질러서 침에게 떨어지라고 명령하고 다음에는 세트에게 침을 던진다. 그러나 괴로워하는 세트를 보고 오빠(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아내이며 누이동생이기 때문에 세트는 오빠이기도 하다)에 대한 동정이 생겨 그를 도왔다.
그러자 호루스는 화가 나서 날뛰며 어머니 이시스의 머리를 쳤기 때문에 이시스는 머리를 양 손으로 받치고 신들이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신들에 의해서 호루스에게 벌이 주어져서 호루스는 맹인이 되었는데 사랑의 여신 하토르은 영양의 젖으로 호루스의 양 눈을 원래대로 고쳤다. 이 후에도 호루스와 세트의 싸움은 계속된다.
호루스는 배를 삼목으로 만들고 석고를 칠하여 석주처럼 보이게 했다. 이것을 진짜로 알고 세토는 진짜 돌로 배를 만들어 물에 빠져 죽고 만다.
결국 지혜의 신 토트는 지하에 있는 오시리스 신에게 편지를 써서 호루스야말로 그의 계승자라는 답장을 얻고 세트도 드디어 이 사실을 인정하여 이시스의 호루스 찬가로 이야기는 끝난다.
8. 사토니하무스 기담
원봉의 파피루스 문서는 1864년에 테베에서 발견된 것으로 데모치크로 씌어져 있으며 기원전 233년 경 프토레마이오스 왕조시대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미 헬레니즘 시대로 들어선 이후로 그리스의 영향도 엿보이지만 여기에 나오는 '저 세상'이란 이집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우시루마리 왕에게는 사토니 하무스, 안하트 호루마라는 두 왕자가 있었다. 사토니는 지혜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어느날 한 노인으로부터 지혜의 신 토트 자신이 쓴 마력이 있는 문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메르네부프타하 왕의 왕자 네페루카프타하의 묘 안에 있다고 한다. 사토니는 동생을 데리고 멤피스 묘지로 가서 네페루카프타하의 묘를 찾아 내어 그곳으로 내려갔다,
네페루카프타하의 묘는 토트가 쓴 문서로 인하여 환하게 밝았으며 그곳에는 왕비 아프리와 아들 마켄스의 모형(이집트 인은 인간에게 분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두사람의 진짜 유해는 코프토스에 있었다)도 거기에 있었다. 사토니가 묘로 들어가자 왕비 아프리의 미라가 일어서서 이 문서를 위해 일가족 세 명이 지상의 생명을 빼앗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녀와 네페루카프타하는 누이동생과 오빠 사이었는데 이집트의 관습대로 결혼하여 아들 마켄스가 태어났다. 네페루카프타하는 우연한 일로 토트의 문서가 코프토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강제로 이것을 빼앗았다.
토트 신은 여기에 화가 나서 대신의 허락을 얻어 일가족에게 벌을 내렸다. 먼저 아들 마켄스가 배에서 강으로 떨어지고 이어서 왕비가 강으로 떨어져서 네페루카프타하는 토트의 문서를 몸에 지니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도 사토니는 억지로 이 문서를 손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네페루카프타하의 미이라가 벌떡 일어나 52놀이(장기 같은 것)를 하자고 했다.
두 사람이 승부를 겨루어 사토니가 패하자 힘으로 토트의 문서를 빼앗아 지상으로 돌아왔다. 그 후 사토니는 네페루카프타하의 변신인 미녀 테브브에게 매혹되어 부바스티스에 있다는 그 집으로 갔다.
미녀는 몸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사토니의 전 재산을 받기로 약속을 맺고 게다가 자식들을 불러서 모두 죽여 버렸다.
그리고 나서 사토니가 침대에 누워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자 그녀의 입이 점점 켜져 그곳에서 천둥이 생겨났다.
사토니는 옷도 입지 못하고 부엌 구석으로 굴러갔다. 다시 네페루카프타하의 변신인 왕처럼 훌륭한 모습을 한 남자가 와서 그에게 옷을 주고 토트의 문서를 네페루카프타하에게 돌려주라고 사토니에게 충고했다.
사토니는 겨우 포기하고 토트의 문서를 가지고 네페루카프타하의 묘지로 내려가자 묘 안은 낮처럼 밝아지고 네페루카프타하는 왕비 아프리와 아들 마켄스(마켄스의 모형)와 함께 사토니가 온 것을 기뻐하였다.
사토니가 여러 가지 걱정을 끼친 사죄로 무슨 할 일이 없냐고 묻자 네페루카프타하는 아프리와 마켄스의 진짜 유해가 코프토스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곳으로 옮겨달라고 했다.
사토니는 왕가의 배를 타고 코프토스의 묘지로 갔다.
그렇지만 어디에 아프리와 마켄스의 묘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다시 네페루카프타하가 이번에는 노인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당혹해 하고 있는 사토니 앞에 나타났다. 사토니가 이 노인에게 두 사람의 묘가 있는 곳을 ??자 그것은 프후마토라는 곳의 남쪽 구석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s 사토니는 그곳을 파고 아프리와 마켄스의 유해를 찾아내어 네페루카프타하의 묘지로 옮겨와서 그 방에 봉인을 하고 이것을 닫았다.
9. 두 형제 이야기
오비니 파피루스 19장에 히에라치크로 기록된 것으로 기원전 1,200년보다 조금 먼저 씌어졌다. 전 문장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 매우 드문 예라 할 수 있다. 본문은 명확하게 두 가지의 이야기를 연결한 것으로 전반에는 삼각관계의 모티브로 이루어져 있고 후반에는 신화적인 이야기로 되어 있다.
전반에 나오는 <두 형제>의 모티브(형수가 동생을 유혹하여 동생이 이것을 거절하자 형수가 화가 나서 반대로 동생에게 난폭한 직을 당했다고 형에게 말하여 형이 동생을 내쫓는 이야기)는 고대세계에서 매우 즐겨 사용되던 소재로 <창세기> 제 39장에서 요셉과 이집트 인 포티파르의 이야기(이것은 <고란>의 <요셉 장>에도 나온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벨레로폰과 알고스의 왕 프로이토스의 왕비 안테이아의 이야기,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아누프라는 형과 바터라는 동생이 있었다. 아누프에게는 아내가 있었고 두 형제는 매일 밭에서 일하였다.
어느 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두사람이 밭에서 일하다가 형이 동생에게 집에서 종자를 가져오라고 부탁하여 동생이 집으로 갔다.
마침 형수는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는데 동생 바터의 늠름한 몸을 보고 동침을 하자고 유혹했다. 동생은 이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다시 밭으로 나가서 형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 일했다. 저녁이 되어 형 아누프가 먼저 집으로 돌아오자 형수가 아누프에게 바터로부터 유혹받아서 거절하자 난폭하게 굴었다고 하소연했다.
형은 화가 나서 창을 가지고 가축 우리 옆에 숨어 있었다.
동생 바터가 가축 우리로 손을 놓으려고 하자 암소가 바터에게 아누프가 창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에 바터는 도망쳤다.
바터가 정의의 신 프레 할리후터에게 기도하자 악어가 잔뜩 있는 수면이 나타났다.
형제는 이 수면의 양쪽에서 서로 이야기하여 형은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동생은 이미 신화적 공간의 인물이 되어 '소나무 골짜기(지중해 주변 어딘가)'로 가는 것을 형에게 알린다.
형은 후회하며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를 죽인다. 동생 바터는 '소나무 골짜기'에서 지냈는데 밤에 잠잘 때는 심장을 소나무 꽃이 있는 곳에 두었다. 어느날 나라 안을 여행하던 신들이 혼자인 바터를 동정하여 창조를 담당하는 후누무 신이 미녀를 만들어서 바터의 아내로 삼게 했다.
또 어느날 바터의 아내가 집을 나가자 바다의 신이 쫓아왔다.
그녀가 소나무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바다 신이 소나무에서 그녀를 붙잡고 말했다. 소나무는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을 바다 신에게 건네주었기 때문에 바다 신은 파라오(이집트 왕)에게 가져가서 그 때문에 '소나무 골짜기'에 미녀가 있다는 것이 알려져 버렸다.
파라오는 군대를 보내서 바터의 아내를 이집트로 데리고 왔다. 그녀는 파라오를 사랑하게 되어 바터의 심장의 비밀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소나무가 잘리고 바터는 쓰러져 죽었다.
형 아누프는 조짐에 의해 바터의 변고를 알고 '소나무 골짜기'로 가서 바터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3년째에 그는 버터의 심장을 발견하여 물로 이것에 활기를 불어넣어 바터에게 마시게 하자 바터는 다시 소생하였다.
바터는 복수를 위해 황소가 되어 이집트로 갔다. 궁전의 조리장으로 들어가는 아내를 발견하고 자신이 바터임을 알리자 그녀는 매우 두려워했다.
다음 날이 되자 그녀는 파라오에게 예의 황소를 죽이라고 부탁한다.
황소가 살해되었을 때 두 방울의 피가 왕궁의 문으로 튀어 그곳에서 두 그루의 커다란 나무가 자라났다.
바터의 아내는 파라오에게 이 나무를 잘라서 가구를 만들자고 졸랐다. 나무가 잘려서 쓰러졌을 때 잘린 부스러기가 그녀의 입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녀는 임신을 하여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왕자가 태어나 온 나라가 기
뻐했다. 그런데 이것은 바터가 변신한 것으로 얼마 안 있어 파라오가 사망하자 새로운 왕이 된 바터는 모든 것을 밝히고 그의 원래의 아내는 재판에 회부되고 형을 데리고 와서 후계자로 삼았다.
10. 비후탄의 왕녀
원문은 F.샹폴리온이 1828년 경에 이집트 여행중에 발견한 것으로 비석에 히에로그리프로 씌어 있는 진귀한 것이다.
테베의 수호신 혼스(지금의 카르나크 신궁 내에 만들어진 의료신) 를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집트의 왕이 시리아로 갔을 때 아득히 먼 동방의 바후탄 국의 영주가 장녀를 데리고 왔다.
그녀는 왕의 마음에 들어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네페르 라 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바후탄에서 사신이 와서 네페르 라의 여동생 벤토레시가 큰 병에 걸렸기 때문에 의사를 파견해 달라고 했다.
왕가의 의사가 바후탄까지 가서 벤노레시를 진찰한 뒤 사람을 괴롭히는 귀신이 들어 있다고 알렸다.
그래서 바후탄의 영주는 테베의 수호신 혼스의 신상을 빌리고 싶다고 이집트 왕에게 부탁해왔다.
왕이 혼스 시에게 의향을 물어보자 혼스신의 상은 기뻐하며 허락했다.
이 신상을 벤토레시 왕녀의 방에 안치하자 귀신은 사라지고 왕녀는 깨끗하게 완쾌했다.
그런데 바후탄의 영주는 이 신상을 이집트에 돌려주기가 아까워서 그대로 3년 9개월 동안 바후탄의 마을에 머물게 했다.
어느날 바후탄의 영주가 잠을 자고 있는데 꿈 속에서 혼스 신이 황금 매로 모습을 바꾸어 방으로 들어와서 이집트 방향을 향해서 날아갔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 혼스 신의 상은 이집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많은 헌상품과 함께 이것을 보내어 신상은 무사히 테베의 신전으로 돌아왔다.
클레오파트라
BC.304년 알렉산더 대왕의 디아도코스('후계자'란 뜻으로, 알렉산더의 후계를 다룬 장군들)로서 공식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라지드 왕조를 세운 사람은 라고스의 아들 소테르(구제자), 즉 프톨레마이오스 1세이다.
그는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선조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이전에도 클레오파트라(아버지의 영광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가진 공주가 여섯 명이 더 있었다.
이 어린 딸의 증조모는 페르시아 혈통의 시리아 공주인 셀루키데스로 바르바르(야만족)이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리스 혈통을 이어받았다. 곧 이어 아르시노에라는 딸과 훗날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14세가 될 아들 둘이 더 태어나지만, 가족 간의 유대는 전혀 없었다.
이전의 많은 이집트 왕가처럼 이 집안도 음모와 야심의 질투로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여인들의 가문 내 역할도 적극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라지드 왕조가 파라오 율법에 따라 남매간의 결혼을 통한 여인들의 왕위계승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죽은 파라오의 장남과 장녀는 결혼을 통해 파라오 부부가 된다.
클레오파트라 이전에 걱정될 만한 두 명의 라이벌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페레니케와 클레오파트라 6세이다. 이들은 프롤레마이오스와 그의 누이인 트리파이어(향락의 여인이라는 뜻)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BC.51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아울레테스)는 자신의 장녀인 클레오파트라와 장남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유언한 뒤 죽음을 맞았다. 18세의 클레오파트라는 라지드 법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열 살이 갓 넘은 아이와 형식적인 결혼을 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통치의 전권을 부여맏았다. 이리하여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집트 남부와 북부 전역을 통치하는 '두 땅의 여왕'이 된다.
특히 관례에 따라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는 '필로파토르(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파라오의 어마어마한 권한을 두 손에 쥔 그녀는 '살아있는 법'이 된 것이다.
명령, 영화, 가신과 토지를 보장받는 왕권의 신성함이 이집트의 사제들과 그리스의 성직자들이 올리는 종교의식으로 인준되었다.
왕가의 규방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클레오파트라는 조금 자라자 수세기 동안 파라오의 딸들에게 행해져 온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형제이자 남편인 왕곁에서 나라를 통치하게 되어 있는 딸들이 받는 교육은 남자들이 받는 교육과 아를 바가 없었다. 교육과정은 매우 다양했다.
파라오는 전통적으로 교육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해 왔는데,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그 전통을 이어받아 교육을 더욱 강조했다.
모든 그리스 계통의 왕조들이 그랬듯 이들도 '엔쿠클레이오스 파이데이아(백과사전)', 즉 폭넓은 지식과 일반 교양을 중요시했다. 따라서 이집트 전역에 걸쳐 초중등 교육기관은 물론, 토착 이지브인을 통치할 그리스인 엘리트 양성을 위한 왕립학교의 설립이 장려되었다. 클레오파트라으 지적인 자질은 매우 뛰어났다.
특히 그녀의 외국어에 대한 소질은 천부적이었다. 그녀가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는 에티오피아어, 아랍어, 헤브루어, 시리아어, 메디아어, 파르티아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왕가에서 이토록 유창하게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클레오파트라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처럼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훗날 이를 바탕으로 외교적인 흥정을 수월하게 해낼 수 있게 된다.
케사르(시이저)
원전 2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에 걸쳐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뒤, 로마는 지중해역의 동부에 진출했다. 마케도니아, 그리스를 정복해 페르가몬 왕국을 멸망시켰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와 유대를 지배하에 둔 뒤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도 승리하였다. 이지역에서 우일하게 독립국가로 남은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뿐이었다. 이집트는 나일강의 혜택으로 여러 나라 가운데서도 가장 풍족한 나라였다.
밀을 비롯한 여러 곡물뿐만 아니라 직물, 올리브, 포도주, 참기름 등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부과되는 세금이 전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입이 되었다.
또한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인구 100만을 헤아리는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각지에서 상인이 모여들었고, 70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무세이온(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학문 연구로 높은 지적 수준을 자랑하였다.
이처럼 풍족한 이집트를 로마가 욕심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무렵 다른 민족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에 대한 이집트인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궁정 내부에선 왕권을 둘러싼 항재이 격해졌다. 로마 조정에 의해 왕위를 보장받는 국왕도 나타나 이집트는 더욱 로마에 종속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1세의 유언장엔 왕국을 로마 국민에게 기증한다고 적혀 있었다. 기원전 65년, 케사르는 호민관을 움직여 민회 결의로 이집트를 자신의 속주로 획들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로마의 삼두정치와 거래해 6000탈렌트의 금을 주고 '로마 국민의 동맹자이자 우방자'인 이집트 왕위를 겨우 인정받았다.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동생과 함께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왕위에 올랐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인에 의거한 '국민국가'로서 이집트의 독립을 확보하고-그녀는 다른 왕과 달리 민중의 언어, 이집트어를 할 수 있었다.-나아가 케사르의 협력을 받아 이집트를 속주로 만들고자 한 그의 야심을 버리게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케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반대파인 동생 일파를 제거하고 기원전 46년 로마에서 개선식을 치렀다. 32만의 로마 시민은 공짜로 이집트의 곡물과 기름 등을 선물로 받았다. 이때 클레오파트라와 케사리온(케사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은 로마의 케사르 별장에 체류하였다. "케사르가 궁전을 -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애정 때문에 - 알렉산드리아로 옮기려 한다"는 소문이 로마 시민 사이에 퍼졌다.
율리우스력(태양력)이 채용된 것도 이 체류기간중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소개로 알렉산드리아의 학자 소시게네스가 구 로마력과의 차이를 조정하는 어려운 계산을 했다. 이집트력의 합리성과 선진성 을 보여주는 태양력의 채용은 일부 로마 시민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했다. 케사르가 암살되고 클레오파트라는 로마를 떠났다.
악티움의 패전 위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 몸을 물려 자살했다고 한다.
당시 이집트는 독에 관한 연구가 잘 되어 있었다. 여왕은 의사와 의논하며 실험을 거듭한 결과, 이집트 코브라의 독으로 가장 깨끗하게 고통없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플루타크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혀는 마치 현이 많은 현악기와 같아 쉽게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언제든 할 수 있었다.
그리스인이 아니어도 통역을 두고 말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또한 이디오피아, 시리아, 메디아, 파트티아 등 많은 민족의 말까지 그녀는 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녀 전의 이집트 왕들은 이집트어조차 배우려고 들지 않고 마케도니아어까지 포기한 자도 있었다.
"(『안토니우스전』) 이렇게 클레오파트라는 놀랄 정도로 여러 언어에 유창했으며 지성이 풍부한 재녀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재녀일 뿐만 아니라 넓은 통찰력과 정치력을 겸비하였다.
유명한 역사가 W.W.탄은 클레오파트라의 역사적 역할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그녀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로마가 공포를 느낄 정도로 그녀는 위대했다.
자신의 대담성과 야심 가운데 알렉산더의 정신을 지녔으며 그녀는 로마세계의 여왕이 되고자 했다. 만약 케사르가 살았다면 그녀가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죽자 그녀는 차선의 방책으로 안토니우스에 기댔다. 그를 유혹해 로마인의 힘을 빌어 로마를 정복하고자 하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악티움에서 그의 함대의 변절(31년)이 그녀의 제국에 대한 꿈을 조각내 버려, 다음 해 그녀의 자살과 함께 마지막 마케도니아 왕통은 끊어지고 아우구스투스가 프톨레마이오스가(家)의 자리에 올랐다.
안토니우스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누이인 옥타비아를 정식 부인으로 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와 다시 결혼하여,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사이가 나빠졌다.
그러나 BC 43년 되면서, 그들 둘의 사이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발단은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 원정의 성공을 자축해 알렉산드리아 시가에서 개선행진을 벌인 것이었는데, 로마인들은 이 행진을 자신들의 전통적인 개선식을 우스꽝스럽게 흉내낸 불경스러운 행사로 본 것이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여제사장에게 맡겨둔 유언장을 옥타비아누스가 공개하게 되는데, 그 내용에 로마인들은 더욱더 충격을 받게되었다. 그 내용은 첫째, 안토니우스가 자식으로 인정하고 유산을 남겨준 것은 모두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자식 뿐이고, 전 부인인 풀비아와 옥타비아가 낳은 자식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장지를 알렉산드리아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자기가 죽으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오파트라 곁에 묻어달라는 안토니우스의 소원은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진정이었지만, 안토니우스의 유언은 정치적 유언이었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은 로마 민중의 가슴 속에 안토니우스에 대한 배신감과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증오심을 활활 타오르게 하였다.
BC 32년, 31세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결전의 시기가 찾아온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국지전의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세계를 누가 수중에 넣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자 그대로의 결전이었다.
즉,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다툼은 정치사상의 대립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누가 최고권력자의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권력투쟁 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민중의 동의를 얻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적은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그 로마인 장군을 용병대장으로 만들어버린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라고 사람들이 믿게 만들었다.
그 해 가을, 로마 본국의 모든 지방자치 단체는 옥타비아누스를 '국가 로마을 수호하기 위해 적 이집트를 공격하는 원정군 총사령관' 에 선출하였다. 이에 따라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노린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권력 투쟁은 로마와 이집트 사이에 벌어지는 국가간의 전쟁으로 그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고, 이제까지 안토니우스와 함께 행동해온 폴리오나 플란키우스와 같은 참모들은 카이사르 휘하에서 싸울 때부터 안토니우스의 동료였지만,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싸움이 로마와 이집트의 대결로 바뀐 것을 알고는 안토니우스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이반은 로마 병 사들이 안토니우스를 버리는 발단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에서 원정 준비에 전념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그에게 기대했던 재능을 충분히 발휘했고, 시민들에게 연수입의 4분의 1, 해방노예에게는 연수입의 8분의 1에 이르는 임시 특별세를 부과함으로써 민중의 지원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신전에서 출전을 앞두고 치르는 의식을 진행했다. 이것은 신들에게 로마의 수호를 기원하고, 로마군의 승리를 빌고, 적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의식으로, 공식적인 로마의 적은 클레오파트라였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의 이름은 한번도 거론되지 않았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소아시아 서해안의 에페수스에서 사모스섬을 거쳐 서쪽의 아테네로 옮기면서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본영에서의 나날은 화려한 잔치로 끝이 났는데, 걸핏하면 우울해지는 안토니우스의 기분을 북돋우려고 클레오파트라가 밤마다 즐거운 잔치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의 해군은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에서, 옥타비아누스의 해군은 이탈리아 남부의 타란토와 브린디시에 집결하는 가운데 BC 32년이 지나갔다.
안토니우스의 육군은 중무장 보병 6만 5천 명과 궁병 및 투석병을 비롯한 경무장 보병 2만명, 그리고 1만 2천 기의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해군은 60척의 군선과 연락용 쾌속선 5척으로 편성된 함대가 8개, 모두 합하면 520척에 이르는 대함대로 승선 인원만 해도 모두 15만명에 이르렀다. 그 많은 육군과 해군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군자금은 대부분 이집트에서 나왔고, 클레오파트라도 처음으로 자기 돈을 들여 일대 승부로 나아가고 있었다.
한편, 로마측 전력은 육군에서는 이집트 쪽과 막상막하였지만, 해군력은 열세였다. 육상 전력은 8만 명의 중무장 보병과 1만 2천 기의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해상전력은 모두 400척으로 안토니우스의 군선에 비해 열세였지만, 이집트 쪽에 비해 두 가지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그리파가 고안한 한팍스라는 화기를 모든 배가 갖추고 있었다는 점과 뱃머리를 종래보다 견고하고 날카롭게 개량한 결과, 적선에 대한 돌파력을 높였다는 것이었다.
BC 31년 3월, 옥타비아누스는 모든 전력을 이끌고 그리스로 건너갔고, 안토니우스는 지난해 겨울부터 이미 그리스의 파트라스에 본영을 설치하고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거기서 겨울을 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싸움이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BC 31년 9월 2일 아침, 싸움이 벌어진 해역의 이름을 따서 역사상 '악티움 해전'이라고 불리는 결전의 막이 올랐다.
날씨도 쾌청하고, 동쪽에서 미풍이 불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포진단계에서부터 모든 것이 안토니우스의 생각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바람의 방향이 동풍에서 북풍으로 바뀌면서 전세는 역전이 되었다.
38세의 클레오파트라는 전선에 나가서 싸움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지휘까지 맡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지옥 같은 광경은 이집트 여왕을 보통 여자로 만들어 버렸다. 클레오파트라는 돛을 올리고 쏜살같이 도망가기 시작하였고, 이를 본 안토니우스도 클레오파트라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뒤에 남은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아그리파의 함대에 포위되었고, 끝내는 로마군에 포획되었다.
옥타비아 누스는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목숨은 살려주었지만, 이집트 선박임이 분명한 배는 전리품으로 뱃머리를 모두 잘라내고 불태워버렸다.
클레오파트라는 지옥같은 전쟁터로부터 달아나 곧장 이집트로 향했고, 반대로 안토니우스는 남쪽으로 곧장 도망쳐 오늘날의 리비아에 해당되는 키레나이카에 상륙하였다. 그는 전투에서의 충격으로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않았고, 단지 해변 집에 틀어박혀 온종일 바다만 바라 보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에게는 편지를 써서 혼자 살고 싶으니까 자기를 그냥 내버려두라고 적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안토니우스에게 보냈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간청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안토니우스를 격려하여 다시 전쟁을 할 것을 강요하였지만, 안토니우스는 믿을 만한 참모 하나 없고, 하루가 다르게 옥타비아누스에게로 달아나는 병사들을 보면서, 군대를 재편성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맞설 마음이 나지 않았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이 끝난 뒤에도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아그리파와 함께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거쳐 시리아로 유유히 추격하면서, 복종을 맹세하는 군주들과 동맹관계를 경신하는 등 안토니우스의 방임 통치로 문란해진 각 속주의 통치기구를 재정비하였다.
이렇듯, 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의 세력권이었던 로마 세계의 동부가 옥타비아누스의 세력권으로 바뀐 것을 의미하였다. 해가 바뀐 BC 30년, 시리아까지 와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의 편지가 도착하게 된다.
자신은 자결을 선택할 테니, 클레오파트라는 살려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아무런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안토니우스는 로마군이 접근해 오자, 마지막으로 남은 기병대를 이끌고 적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를 따르던 기병들이 모조리 적진으로 돌아서면서 안토니우스는 점점 불리하게 되었다.
이 때,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가 도착하였다. 클리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게 자기가 죽었다고 알리게 한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절망에 빠져서 자살을 선택하게 되고, 칼로 제 가슴을 찌르게 되었으나, 즉사하지는 못하였다.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안토니우스에게 전령이 달려와서 클레오파트라가 아직 살아있다고 전하였다.
거짓으로 죽었다고 알린 것을 후회한 클레오파트라가 사실을 알리는 전령을 보낸 것이다. 많은 출혈로 기진해 있던 안토니우스 부하들에게 자기를 여왕에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피투성이가 되고 얼 굴마저 핼쓱해진 안토니우스를 클레오파트라는 눈물을 흘리며 끌어안았다.
안토니우스는 그가 늘 원했듯이 클레오파트라의 품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안토니우스가 죽은 8월 1일,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다. 이집트 수도에서 이 승자에게 저항을 시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안토니우스의 죽음을 전해들은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산 채로 잡아오라고 명령을 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보물을 줄테니, 그 대신 카이사리온을 왕위에 앉혀달라는 협상을 옥타비아누스와 벌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보물이 들어있는 영묘에 침입하였고, 카이사리온을 살해하였다. 쌍둥이 남매인 10세의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스는 로마로 보내져, 아버지 안토니우스의 아내였던 옥타비아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6세인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도 형과 누나와 함께 로마에서 양육된다. 이리하여 어떻게든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던 클레오파트라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자식들 가운데 옥타비아누스가 죽인 것은 카이사리온 뿐이다.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셋 모두 살아남았다. 카이사르의 아들, 즉 후계자는 옥타비아누스 한 사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무찌르고 이집트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BC 333년부터다. 300년 동안 계속된 그리스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BC 30년에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진주이야기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 중에는 달의 눈물이라고 하는 진주에 관한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고대 이집트가 로마군에 의해서 점령되어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무렵 포트레마이어스 12세의 왕비였던 클레오파트라는 곧 최초의 로마장군 쥴리어스 시저의 애인이 되었고 그가 죽자 그녀는 안토니오에게 몸을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는 매일같이호사스런 연회를 베풀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녀는 안토니오를 연회마다 초대했지만 맛있는 음식에 익숙했던 로마인에게 연회란 그렇듯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
그래서 안토니오가 클레오파트라를 나무라자 그녀는 심부름꾼에게 술이 담겨 있는 황금의 술잔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 잔 속에 그녀는 자신이 달고 있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최대의 아름다운 진주 귀걸이를 넣고 그것이 녹는 것을 본 뒤 마셨다 한다.
이에 안토니오가 경탄하자 그녀는 다시 또 하나의 귀걸이를 빼어 그 속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자 안토니오는 당황하며 '내가졌으니 그만 하시오'라며 그녀를 만류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한쪽만 남게 되었던 진주는 뒤에 로마에 전리품으로 가져가 파티온 신전의 비너스상의 귀걸이로 되었다고 프릴리우스의 박물지는 전하고 있다 .
과연 진주가 술에 녹았는지는 모르지만 이 기이한 이야기가 어떻게 클레오파트라의 자랑거리가 되어 전하는지 참으로 이상한 에피소드이다. 이것은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에 결부된 일이지만 그것도 결코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수천 년이나 계속한 이집트 왕조의 영광을 짊어진 최후의 여왕은 안토니오와 함께 로마의 장군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했고 빛나는 보석에 싸인 채로 그 몸을 독사의 이빨에 물리게 함으로써 그녀 스스로 생명을 끊게 되고 말았다. 현재 남아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초상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보석으로 장식했는데 가슴에 잔뜩 장식한 목걸이와 팔지 등은 이 드라마틱한 생애를 보낸 여왕에게 보다 현란한 빛을 더해주고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산에 관해서는 지금가지 화제가 계속되고 있다.
시대가 흘러 이 땅을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도 그것에서 에메랄드를 채굴했다고 하며 로마 근교의 지진으로 잃어버린 봄베이의 유적에서 발견된 에메랄드도 이 광산의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도들의 탄압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잔혹한 에피소드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 로마의 폭군 네로도 이 클레오파트라의 에메랄드 산에서 산출되는 에메랄드에 이상한 집착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네로의 왕비 포삐아는 제우스의 신전에 바친 거대한 에메랄드를 결혼 기념의 예물로 손에 끼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때 신전에서 신을 받들고 있던 무녀가 크게 노하여 이 에메랄드에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저주를 받은 줄도 알지 못한 포삐아는 보석 세공사에게 부탁하여 그 돌로 네로 황제를 위하여 안경을 만들고 나머지는 아홉 개로 컷트하여 자기의 장신구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에메랄드가 가히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