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이 남긴 지팡이에 싹 돋아 선비화로 불려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신라 문무왕 16년 서력 676년에 창건한 부석사浮石寺는 경북 영풍군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고찰이다. 어찌해서 절 이름이 괴상하게도 ‘돌이 떴다’는 뜻 浮石寺가 되었을까. 「삼국유사」는 이 절의 창건 설화를 이렇게 전한다.
신라 승려 의상義湘(625∼702)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건너가 등주登州해안에 닿아 어느 신사 信士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그 댁의 아리따운 딸 선묘善妙라는 아가씨가 이국의 신라청년 의상을 사모하게 된다. 그러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사제지간의 결의를 맺는다. 그리고 종남산終南山 지엄智儼대사 (600∼668)를 찾아가 화엄학을 공부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묘의 집을 다시 찾아 그 부모들께 그 동안 베풀어준 후의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귀국선에 올랐다. 선묘아가씨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된다. 선묘는 그동안 의상을 상면할 그 날을 기약하며 한올한올 바느질하여 지어둔 법복 法服을 감싸안고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벌써 배는 저 멀리 돛대만 남겨둔 채 떠나가고 있었다. 이미 한 사람에게 마음을 바친 선묘는 “내 죽어 용이 되어 의상을 따르리라” 서원誓願을 세우고 바다에 몸을 던진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이 화엄대교를 펼 수 있는 길지吉地 봉황산에 절을 세우고자 했으나 먼저 터 잡고 있던 수백명의 화적떼들이 덤벼들었다. 그때 풍랑의 먼 뱃길을 인도하며 의상을 따라왔던 용이 나타나 거대한 바위를 공중에 띄워 도적떼들을 덮칠 듯 맴돌았다. 기겁을 한 도적무리는 물러갔고 그 자리에 절을 세웠으니 절 이름이 뜰부浮 돌석石 절사寺가 되었단다.
사찰을 창건하면서 이 선묘아가씨의 정한을 위로하고 덕성을 추모하기 위해 석용을 조성하였는데 지금 용머리는 무량수전 아미타불상 바로 밑에 꼬리부분은 석등아래에 걸쳐 묻혀있다고 한다. 이 절을 보수할 때 거대한 석용의 몸 일부가 흙 밖으로 나와 발견되었고 용비늘이 살아있는 모습이였다고 한다. 善妙井 우물도 있고 의상대사를 부석존자라 부르고 있어 선묘아가씨의 서러운 사연은 지금도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있다.
부석사에는 이러한 창건설화와 더불어 의상에 얽힌 불가사의한 또 한가지 전설 선비화 禪扉花 仙扉花, 仙飛花 이야기가 전해온다. 일설에 선비화라는 이 나무는 의상이 쓰든 지팡이를 조사당 처마 아래 꽂아 놓았더니 싹이 돋아 살아난 것이라 하고「택리지擇里志」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나무가 부석사 조사당 지붕 밑에서 햇빛과 달빛만 바라보며 이슬과 비를 전혀 맞지 않고서도 지금까지 살아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타국의 선묘아가씨가 의상을 사랑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돌이 되어 묻혀 있듯이 의상도 매정하게 떠날 수 없어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조사당 그늘 아래서 아직도 서성이고 있는지.
퇴계 이황 선생이 부석사를 찾아와 이 선비화를 바라보며 시를 지었다.
절 문에 기대선 옥같이 곧은 한줄기 나무
주승은 지팡이곶아 뿌리내렸다 전하네
지팡이 끝 선맥의 물이 스스로 흐르는가
천지간 비이슬 없이도 살아가고 있다네
擢玉亭亭의寺門
僧言錫杖化靈根
杖頭自有曹溪水
不借乾坤雨露思
「義湘植杖樹」
이 전설 같은 선비화의 식물이름이 골담초骨擔草다.
▶어린시절 따먹던 꽃봉오리
골담초骨擔草는 이름에 풀초草자가 들어 있으나 풀이 아니고 콩과에 속해있는 낙엽관목이며 엄연한 키 작은 나무다.
나무줄기는 개나리 같이 원줄기가 없이 한자리에 많은 포기가 모여 나서 곧추 서고 줄기 끝에서 약간의 가지를 치며 크게 자라도 사람의 키를 넘지 않는다. 줄기는 회갈색이고 잎은 줄기에 층을 지어 어긋나는데 4매의 잎 조각이 깃털꼴을 이루고 좌우 각 2줄기가 대칭으로 형성되며 잎자루 아랫부분에 작은 가시 한 쌍이 팔을 벌려 잎을 받치듯 돋아있다. 꽃은 4∼5월경 잎 사이에서 날개를 펼친 나비처럼 특이하게 생긴 노란꽃 2송이가 피어난다. 녹황색 꽃은 황갈색으로 변하면서 시들어간다. 꽃이 지고 가을이 되면 조그만 꼬투리형으로 열매가 익는다.
골담초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랄 뿐만 아니라 봄이 오면 꽃들이 노랑나비가 온통 나무를 뒤덮듯 아름답게 피어나면서 땅속뿌리에서는 무리지어 줄기가 돋아남으로 민가에서 꽃도 보고 약도 되고 가시 있는 생울타리 담장도 되어 널리 가꾸어 왔다. 그리고 영넘고 산 넘어가도 보리고개 넘기 어렵다던 그 시절 해긴 봄에 어린아이들이 꽃봉오리를 많이 따먹기도 했고 생꽃을 먹어보면 단맛이 나면서 상큼한 향이 입안에 돌아 조금도 역하지가 않다. 골담초가 중국이 원산지라고는 하나 언제 한반도로 건너와 살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조선 골담초라 하여 우리나라 특산식물로 취급되며 이 땅에서는 함경도를 비롯한 전국의 산과 들에 분포하여 자생하고 있다.
▶뼈·신경통의 특효 민간약
골담초骨擔草란 한문말 그대로 ‘뼈를 담당하는 풀’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름 속에 이미 약초의 효능이 암시되어 있다고 하겠으며 특히 민간에서 뼈와 관계되는 여러 질환의 명약으로 구전되어온 전통 깊은 약초다. 그래서 골담초는 우리만 부르는 한문이름이며 중국에서는 금작초金雀草, 토황기土黃기, 야황기野黃기라 한다. 한방과 민간에서 뿌리를 주로 약으로 쓰고 있으나 잎, 줄기, 꽃을 함께 쓰기도 한다. 골담초는 비장을 도와주며 거풍 제습 활혈약이다. 진통, 통락, 강장의 효능이 있다. 그리해서 신경통, 관절염, 골절통, 골허약증, 근골통, 통풍과 전신의 뼈마디가 아픈 증세에 특효약으로 쓰며 그 외에 고혈압, 두통이명, 부인냉증과 경불순, 유선염 이러한 증상들에 민간에서 폭넓게 두루 쓰고 있는 약재다.
근래 중국에서 실험한 임상보고서를 인용한 기록에 의하면 「골담초의 에테르ether 추출물에도 혈압?球걍珦?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고협압 3기에 대한 효능의 유효율은 70% 이상이라 보고되어 있으며 투여환자 75%가 1주일이내 지속성 있는 혈압강하작용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또한 「합성화학 약품에 의해 떨어지지 않던 혈압도 골담초 생약복용으로 혈압이 내려갔다」고 했다.
이러한 기록들이 출처가 분명하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고혈압환자들이 병원처방을 따르면서 보조요법으로 응용해 보는 것도 해롭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골담초는 민간 약으로 수 백년을 이용해온 식용약초로 해독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거풍 활혈하는 신경통 특효약으로 전해왔으니 손해볼 일은 없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복용해봐서 혈압에 효험을 보게 된다면 병원 약을 서서히 줄여 끊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골담초는 가을에 줄기와 뿌리를 함께 채취하여 잔뿌리를 따고 잘게 썰어 햇볕에 말려두고 쓴다. 내과적인 질환에는 하루 쓰는 양 15∼30g을 물로 달여 나누어 복용한다. 일설에 꽃에는 독성이 있다고 했으나 모든 약초는 응용에 따라 독이 약이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