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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여기까지 왔나 싶습니다. 하루하루 보내며 새해를 더욱 가깝게 느끼면서 지나가리라 생각합니다. 새해가 되면 좋은 일이라도 생긴답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비싼 희망을 거저 받게 됩니다. 그것만이라도 얼마나 좋습니까?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절망이라는데 희망은 그 반대입니다. 이 힘든 세상에서 그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도 매우 희망적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직 미래에 대한 기대가 부질없다고 생각할 만한 나이는 아닙니다. 백세시대라고 하는데 멀었습니다. 정신 차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야 합니다. 넘어지지만 않으면 가능합니다. ㅋㅋ 꼭 겨울에만 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조심하면 백세까지도 무난하리라 생각합니다.
겨울 맛을 보며 12월을 맞이해서 때가 제대로 가고 있나 싶기도 합니다. 사람은 때를 잘 타고 나야 합니다. 하기야 그게 자기 맘대로 되는 일입니까? 그러면 자기 때를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애쓰고 수고하면 자신의 때를 개척해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주제넘게 몸의 때만 불리는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 물론 그래야 목욕탕이 존속하겠지만 말입니다. 하기야 요즘은 고급 사우나로 대체하고 있기는 합니다. 아무튼 시대의 때가 아니라 개인 육체의 때나 키우는 사람들이 많아질까 걱정됩니다. 새해에는 물갈이 기회도 있으니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볼 일입니다.
희망을 싹 틔우는 12월을 출발합니다. 건강하게 신나게 파이팅하며 시작합니다. 복된 한 달을 빕니다. ^)^
2023년 12월 2일 김종우 목사 드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디모데후서 2 : 5)
<만분의 일초>
승리의 감동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패배의 안쓰러움도 없습니다. 경기보다는 한 사람의 감정의 회오리와 그것을 벗어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코치의 말이 귀를 때립니다. 경기를 하려 온 거야, 쌈박질하러 온 거야? 경기에 임하는 선수는 일단 자신의 감정을 이겨내야 합니다. 전쟁에 임하는 장수가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면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승리는 고사하고 그 장수 하나 때문에 많은 병사의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나라까지 위태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가 맡은 직책의 비중에 따라서 당할 손해와 위협이 크게 됩니다. 지도자는 그런 것을 고려하여 장수를 선발해 전장에 내보내야 합니다. 나라의 운명을 가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다른 스포츠보다 특히 몸에 직접 가격을 하는 운동은 자칫 감정을 건드리고 쌓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여겨집니다. 몸과 몸이 부딪치는 운동이 아니라면 그런 면에서는 안심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몸에 상대방의 직접적인 타격이 가해지면 기분이 결코 좋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런 감정을 이겨내고 단순히 스포츠다 생각하며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런 운동을 하려는 사람은 우선 그 훈련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그 운동을 오래 지속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상대방에게도 해를 끼치기 쉽고 본인에게도 운동하기에는 적합지 않다는 주변의 비판을 받으리라 생각합니다.
소위 강심장이라고 말합니다. 규모가 큰 경기에 임하면 선수들이 위축되기 쉽습니다. 그 분위기에 흔들리면 본인의 평소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강심장이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면에서는 앞에서 말한 대로 상대방에 따라 감정에 휘둘릴 수 있기에 그에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강심장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냉정하게 순간순간의 상황에 적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감정에 휩싸이면 소위 이성을 잃게 되고 경기의 흐름을 잃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끌려갈 가능성이 크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불리한 상황으로 끌려들어갈 것입니다. 이미 승리와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크게 보면 스포츠 정신부터 익혀야 합니다.
운동경기라 해도 때로는 뜻하지 않은 사고도 날 수 있습니다. 물론 악의가 개입된 조작된 경기로 인하여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역시 돈이 개입되면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고를 인정하고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괜한 복수의 감정을 심게 됩니다. 그 감정을 안고서 스포츠를 해서는 안 됩니다. 스포츠를 모욕하는 일입니다. 사실 당하는 본인에게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남 이야기하듯 쉽게 말하지만 어려운 일임을 압니다. 그러나 과연 운동선수라면 그것을 이겨내야 선수로써 임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훈련 과정 속에 심리상담사가 동참하는 것도 일리가 있는 일입니다.
펜싱이 좀 날렵한 감이 있다면 검도는 어쩐지 무거운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리한 눈빛은 탈 속에서도 빛납니다. 사실 그 옛날 살인의 무기였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결정을 내는 일입니다. 그것이 스포츠로 진화한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의 급소를 향하여 겨냥하는 칼끝이 매서울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훈련 과정 속에서 ‘재우’의 아버지는 사고를 당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서 한참 후 시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재우는 당시의 상대가 ‘황태수’였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말림도 거부하고 그 길을 그대로 갑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와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은 대응할 실력이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감정이 앞서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넘을 수 없습니다. 볼 때마다 속에서 솟아나는 복수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훈련장에서까지 표출합니다. 코치의 불같은 호령도 미치지 못합니다. 어느 날 둘이서 마주한 기회가 닥쳤습니다. 재우는 사정없이 밀어붙여 태수를 마구 쳐댑니다. 그런데 태수가 전혀 반응하지 않고 가격하는 대로 피범벅이 되도록 맞습니다. 결국 동료들에 의해 둘은 격리됩니다. 행방불명되었던 아버지의 시신이 발견되고 장례식이 치러집니다. 재우는 장례식에 참석하고 그곳에서 참석한 감독을 만납니다. 아버지와 잘 아는 사이였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재우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식을 마치며 재우에게 한 마디 남기고 떠납니다. 선택은 네가 하는 거라고.
한적한 산골, 검도훈련장만 있습니다. 훈련생들의 기합소리만 힘차게 주변을 울립니다. 중심은 재우와 태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실 재우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선수로의 성장기 말입니다. 몸의 훈련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마음부터 수련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참 실력자는 결국 훈련과 연습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냥 되는 일이 아니지요. 어떤 종류의 운동을 이야기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물론 재능이 있어야 하겠지만 재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갈고 닦지 아니하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보석처럼 연마하여 빛을 내게 만들어야 합니다. 영화 ‘만분의 일초’(IRON MASK)를 보았습니다.
무슨 전쟁이요?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러시아 우크라아나 전쟁으로 시끄러운 한 해를 보냈다면 올해는 가을에 닥친 중동의 전쟁이 온 세계를 시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끝나려나 말려나, 이어지고 있는데 시간으로는 얼마 안 되었지만 유럽의 1년 전쟁보다도 희생자가 많은 듯합니다. 더구나 어린아이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 참상의 현장은 그야말로 종말을 보는 듯 느껴졌을 것입니다. 실제로 종말의 현실을 보며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전쟁’ 하면 흔히 종말을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사실 많은 재앙들 중에 그 참혹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재앙이 바로 전쟁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전쟁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재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잔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사람만큼 악한 존재가 없으니까요.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잔혹한 현장을 바로 전쟁터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는 가까이는 개인의 종말이 있고 나아가 나라의 종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지나간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튼 전쟁이 발생하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행여 핵전쟁으로 확산되지 아니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자칫 지구의 자멸을 초래할지도 모릅니다. 말 그대로 종말이 되겠지요.
성경에서는 분명히 종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 끝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마 24장입니다. 흔히 ‘종말 장’이라고 하고 ‘소계시록’이라고도 말합니다. 그 말씀 가운데 보면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6 - 8절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커다란 재앙이 세 가지 나옵니다. 기근과 지진 그리고 전쟁입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하는 말씀을 보면 분명히 전쟁을 뜻합니다. 이것이 전쟁을 뜻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말씀이 뒤에 또 나옵니다. 19 - 20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우리 자신이 6.25라는 무서운 전쟁을 경험했기에 어른들은 그 참혹함과 어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던 일과 겨울의 혹독한 시련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정말 실감날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에 일어날 전쟁에 대하여 설교를 하면 이 말씀들이 사실적으로 마음에 와서 닿습니다. 소위 은혜(?)를 받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동안 성경을 우리들의 시각으로 보아 왔습니다. 우리들끼리 생각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그 한 예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따라온 큰 무리가 저녁이 다 되도록 먹지도 못하고 있는 것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요 6 :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그러고는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오천 명을 먹이십니다. 이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경험한 백성이 얼마나 다행으로 생각하였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최소한 굶지는 않겠지요. 예수님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자기를 찾아온 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26 - 2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바로 이어서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51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아무래도 좀 이상합니다. 그런데 보다 노골적으로 말씀하십니다. 53 - 5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 영생하는 양식은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 곧 사람의 살과 피를 먹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설명해주십니다. 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럼에도 듣고 있던 백성이 역시 이해하지 못합니다. 66절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설명을 해주어도 모르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 55 : 8 - 9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누구에게 말씀하는 겁니까?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백성입니다. 하나님 백성임에도 그 백성의 생각은 땅의 수준에 그쳐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말씀하시는데 그 백성은 땅으로 듣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그 백성은 육으로 듣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고 자부하고 살고 있어도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무나 하나님께 ‘주여, 주여’하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기에 부르는 칭호입니다.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그 신자는 분명히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절한 소망을 담아 부르짖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또 말씀합니다. 마 7 : 22 - 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일했습니다. 분명히 주님의 부르심으로 목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도 전하고 능력도 행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대단한 목자입니다. 실력과 능력을 겸비한 목자입니다. 그야말로 성령이 함께한다고 믿을만하지요. 성도들이 몰려들 만합니다. 이런 목자라면 소문도 빠릅니다. 그러니 그의 섬기는 교회는 빠른 시간 내에 부흥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 일이 이해가 됩니까? 왜 그러실까요? 그렇다면 ‘주의 이름으로’ 행한 그 일들이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법대로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을 말씀하시는데 그 목자는 땅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그 목자는 육으로 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책을 들고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성경책을 들고 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을 전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뭐라 하십니까?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찰떡 같이 믿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성경을 가르치고 배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하늘이 아니라 땅의 것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영으로 말씀하신 것을 육으로 전합니다. 성도들은 목자가 전하고 있으니 분별없이 아멘 하고 따라갑니다. 그래서 경고하십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목자가 변명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도 똑똑해져야 합니다. 스스로 분별해야만 하지요.
사실 기근과 지진 그리고 전쟁은 인류 역사와 함께 공존해 왔습니다. 그것을 새삼스럽게 종말에다 갖다 붙이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요. 유별나게 떠들 내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창 12 : 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왔지만 그곳에 기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잘 아는 대로 야곱의 아들 요셉 때는 7년 기근이 생깁니다. 상상이 안 됩니다. 7년이나 기근이라니요. 창 45 : 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오늘날 아프리카의 기근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살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지구촌이 겪고 있는 기근은 불평등으로 인한 기근이기도 합니다. 속된 말로 한쪽에서는 배 터져 죽고 다른 한쪽에서는 배곯아 죽는 것입니다. 재앙이라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만들고 있는 악행입니다. 그것을 마지막 때의 재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전하고 있으니 주님이 탄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기근이 과연 그런 육적인 기근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무치 주기도문 외우듯이 엉뚱하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입니다. 마 6 :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는 여태 이 기도를 하면서 육의 양식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옛날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날마다 먹이셨던 것을 떠올리고 그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함으로 날마다 양식을 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을 얼마나 모욕하는 처사가 되는 줄 알기나 합니까? 바로 뒤에서 뭐라 하십니까? 31 - 32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설마 예수님이 이방인이 구하는 것을 구하라고 가르치셨겠습니까? 주님 스스로 그렇게 말씀하고 그렇게 가르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그러므로 기근이 무슨 기근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암 8 :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기근입니다. 왜 말씀이 없습니까? 요즘도 교회마다 말씀이 넘치고도 넘칩니다. 주일에 두 번, 수요일에 한 번, 매일 새벽마다 있고 구역예배도 있습니다. 심방할 때마다 나오지요. 그것도 모자라서 라디오에서 또는 TV에서 그것도 성이 차지 않으면 테이프로 반복해서 듣습니다. 사실 말씀이 넘치고도 넘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이 말씀이 해당되지 않는 것일까요? 오히려 더욱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15 :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7 - 9절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으로 주고받습니다. 영으로 말씀하신 것을 육으로 주고받는 것이지요. 과연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인데 우리는 땅의 것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전쟁을 이야기해봅니다. 마 24 : 7절에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하는 이 말씀이 전쟁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또 다른 성경에서 더 엄청난 말씀을 하고 있기에 상상은 부풀어집니다. 벧후 3 :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전쟁과 더불어 이 말씀을 생각하니 보통 전쟁이 아닙니다. 그러니 핵폭탄이 여기저기 떨어지고 온 지구촌이 불바다가 된다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분별력이 없는 성도들은 목사님의 설교에 아멘, 아멘 하고 두려움에 싸입니다. 그럼에도 사실 집에 돌아와서는 별다른 일 없이 편안하게 잘들 살고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것인지, 도망갈 구멍이 마련되어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사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는 동안에는 결코 아닐 것이다, 하는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보다 훨씬 강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탄식하실 만한 믿음입니다.
옛날 육적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 일어난 전쟁은 그대로 전쟁입니다.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들과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렀습니까? 그것은 모두 육적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 속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들입니다. 그러나 영적 이스라엘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에서 말씀하는 전쟁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나라도 둘이요, 민족도 둘뿐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와 마귀의 나라입니다. 성경도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6 :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영적인 전쟁이지 육적인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소속의 하나님 백성과 마귀 소속의 마귀 백성의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총칼과 대포나 핵무기를 동원한 전쟁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전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무기도 세상 것들과는 다릅니다. 11절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무엇입니까? 엡 6 : 14 - 17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그렇게 무기를 갖출지라도 승리가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승리는 하나님의 손에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18절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사실 마귀와의 싸움이기에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마귀가 아니라 마귀의 영 곧 악령이 역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마귀는 대적해야 합니다. 약 4 :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그러나 알지도 못하고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는 그 사람은 살려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그 사랑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죄보다는 그 사람입니다. 죄는 보이지 않고 그 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보이니 그 사람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 말씀하시니 그게 보통 일입니까? 마 5 :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미움과 원망, 억울함과 분노가 치솟는데 기도가 나옵니까?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원하심이고 뜻입니다. 반복하지만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원수 안에서 역사하는 마귀를 미워하고 대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칼에는 칼, 총에는 총, 그렇게 되면 잘 알겠지만 악순환만 일어납니다. 롬 12 : 20 - 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치르는 전쟁이 어떤 전쟁인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처럼 총칼을 들고 대포를 쏘아대며 행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대하는 적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 사단입니다. 다만 사단이 사람을 들어서 대적하기에 이 사람이 사단 마귀의 소속인지 하나님의 소속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요일 4 :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다시 말해서 영이 두 가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편이냐 사단의 편이냐,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선지자’ 곧 말하는 자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사단의 말인가 분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태 이야기했지만 하늘의 말이냐, 땅의 말이냐 분별하면 됩니다.
정리합니다. 우리가 치러야 하는 전쟁은 세상 전쟁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몇 배나 어렵습니다. 마귀는 쫓아내고 그 마귀가 역사하는 사람은 살려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 곧 참이 아니라 마귀의 말 곧 거짓이요, 진리가 아니라 비진리임을 드러내주어야 합니다. 깨닫게 하여 그 악령의 역사로부터 빠져나오게 해야 합니다. 전쟁이 핵전쟁이 아니라 진리와 비진리의 말(言)싸움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곧 진리를 먹으면 생명이고 영생이지만 마귀의 말 곧 거짓말, 비진리를 먹으면 저주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핵전쟁이라고 전하는 저들은 자기가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불쌍한 저들을 위하여 우리는 기도하며 싸워 최후의 승리를 얻어내야 합니다. 자기가 출석하고 있는 목자를 핑계 댈 수도 없습니다. 그것 또한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따라가면 둘 다 구덩이(마 15 : 14) 곧 지옥행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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