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굴에 들어온 이 토끼를 어쩐담?
보통 덕질이라는 것을 할 때에도 무의식중에 자신의 취향이 반영되기 마이다. 영화, 드라마, 음식, 캐릭터 종류 가리지 않고 꽂히면 덕질을 시작하는 나에게도 취향이라는 건 분명히 존재하고 또 나름 명확하다. 영화나 드라마, 책을 선택할 때 내 취향은 여자주인공이 수동적이지 않아야 하며, 음악이 극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음식은 상큼하지만 않으면 되고 스포츠는 나를 답답하게는 만들어도 무기력하게 만들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덕질은 하지 않아도,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사람의 경우에는 여자는 상관없이 다 좋지만, 남자는 무조건 구릿빛 피부에 옆통 큰 연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을 덕질한 건 멋 모르던 17살이었다. 남들은 아이돌을 팔 때 혼자 묵묵히 외국 연예인을 파던 나를 보고 친구들이 말했었다. 영원아, 원래 취향에 정반대인 사람들이 위험한 거야. 무슨 소리인가 했지. 내 취향에 정반대인 사람들은 지천에 널렸지만, 위험한 사람은 없던데.
그 선견지명을 가진 친구의 말을 약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뼈저리게 실감한다.
취향을 깨부숴버리고 들어오는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걸.
김도영을 통해.
취향의 예외가 되어버린다는 게 이런 의미구나 싶다. 내 입맛에 맞는 부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그 자체로 예뻐 죽겠다. 뽀얀 피부도, 예민한 듯 귀여운 눈매와 입꼬리도. 우리 도영이는 왜 아이돌 안 했나 몰라. 내가 성공하게 만들어 줄 자신 있는데. 데뷔만 하면 세상이 제 것 같을 텐데.
하루에 한 번씩 말한다.
도영아 늦지 않았어. 너의 아이돌, 나의 홈마.
마음껏 예뻐하는 것을 허락받은 후부터 나는 브레이크를 잃은 트럭과 다름없었다. 당황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보던 시선이 아직 선명한데 요즘의 도영이는 내 앞에서 아주 말랑토끼가 따로 없다. 가끔 동혁이한테 절대 안 지려는 모습을 보면 마냥 말랑하지는 않나 싶다가도 어째 한 번을 못 이기는 걸 보면 태생부터 말랑이구나 싶기도 하다. 가끔 셋이 쪼르르 앉아 핸드폰을 들고 빨려 들어갈 것 같이 집중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를 할 때, 그렇게 환하게 웃을 수 없을 정도로 입동굴 훤히 보이면서 좋아할 때에는 정말이지… 깨물고 싶다는 개변태적 발상이 불쑥 고개를 쳐든다. 아직은 잘 참고 있지만.
시야 옆으로 밝은 머리통이 돌아간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까지 돌더니 쿵 하고 책상에 떨어진다. 한숨 비슷한 앓는 소리가 나고 이내 웃음과 울음이 섞인 기괴한 소리까지 흘린다. 드디어 정신이 나간 거지. 피차 발등에 불이 떨어진 참이라 그러거나 말거나 영혼 없이 레포트나 갈기다가 슬쩍 드는 안타까운 마음에 물어나 본다. 왜 그러는데.
“나 이번에 발표야.”
“나쁘지 않네.”
“25분.”
“그건 살짝 나쁘네.”
“ppt가 왔는데 슬라이드가 딱 10개야.”
숙연. 할 말을 잃었다. 해 줄 말이 없었거든. 그냥 아직까지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머리통을 몇 번 쓰다듬을 뿐이다. 흐엉, 하고 울음소리를 내던 동혁이가 중얼거린다. 생각해보니까 어이가 없네. 내가 이걸 왜? 혼자? 이내 마음을 바꿨는지 짧게 전의를 다지곤 자세를 바로 한다. 곧이어 전투적인 타자 소리가 들린다. 뭐, 피드백을 주거나 피피티 담당했던 사람이랑 한바탕 하는 거겠지.
“쫄리면 뒤지시등가.”
이내 승리의 미소를 띤 동혁이가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쁘지 않은 싸움이었어. 순조롭게 망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돌린다. 당장 망한 건 내일의 나이기에. 유사도 낮추기 작업을 재개하려 할 때 작은 소란과 함께 문이 열린다.
“왔어?”
학과 가릴 것 없이 친구가 많아 틈틈이 만날 사람도 많은 서영호가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커피를 손에 쥐고 들어온다. 아직도 해? 굉장히 버릇없는 말과 함께. 모든 걸 미리 미리 해 놓는 성격의 서영호답게 내일까지 제출인 과제를 아직도 붙잡고 있는 나를 이해하지 못 한다. 몇 년 동안 꾸준히 미루는 나도 나지만 그런 나를 아직도 이해 못 하는 너도 너다.
“그러게 내가 미리 하라고 했지.”
“그 말 안 받아요.”
옆 자리에 앉아 잔소리 장전하려는 낌새를 미리 눈치채고 입을 막는다. 너 한 마디도 하지 마.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바로 한다. 앞에서는 쫄리면 뒤지라는 말과 다르게 초조해 보이는 이동혁이 손톱을 물어뜯는다. 씁 지지야. 서영호가 그런 손을 제자리에 갖다두면 울음 가득한 혀엉 소리를 시작으로 자초지종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나와 다르게 영혼 가득한 리액션을 원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서영호를 반만 아는 거지. 누구보다 단호한 목소리로 어쩔 수 없지. 너가 하고 이름을 빼. 하는 해결책을 내놓는다. 나름 아끼는 동생이라고 같이 해답을 찾아주려는 의도였겠지만, 이미 상대는 상처받았다.
“진짜… 내 맘 아무도 모른다.”
이거 아니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봐도 소용없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오랜만에 한심하다는 시선을 던질 때 문이 활짝 열리고 구세주가 등장한다.
“커피 마셔!”
깨발랄한 행동과 그렇지 않은 목소리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마크와 그 뒤를 따라 들어온 도영이 테이블 위로 캐리어를 올린다. 온갖 영혼을 끌어모아 도영이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캐리어를 훑으면 마실 사람들이 있든 말든 우선 인원수에 맞게 사 왔는지 주인 없는 커피들도 보인다.
생긴 것과 다르게 카페인에 취약한 나는 하루에 한 잔의 커피밖에 마시지 못 한다. 그 이상 마시면 심장이 벌렁거려서 잠을 못 자기 때문에 아침에 한 잔을 마신 지금 내가 마실 수 있는 건 없었다. 세 번째 타겟으로 잡힌 마크가 울음기 가득한 하소연을 듣기 시작할 때 커피 한 잔이 내 옆에 놓인다.
“누나, 커피 마시면서 해요.”
오늘은 회색 후드티네. 해사하게 웃으며 건네는 커피를 무시할 수 없었다. 요즘 많이들 먹는 방광염을 유발할 것 같이 생긴 1L 커피를 들이댔어도 나는 웃으면서 받았을 것이다. 누가 주는 건데. 고맙다는 말과 함께 빈 의자를 톡톡 치며 앉으라 말할 때 불쑥 불청객이 침범한다.
“박영원 오늘 커피 할당량 끝났어.”
도영이는 고개를 갸웃하고 나는 도리도리 젓는다. 아냐, 마실 수 있어. 이미 받은 커피를 뺏기기 싫어 쓸데없는 오기를 부려보지만, 불청객은 단호하다.
“얘 하루에 커피 한 잔 이상 마시면 못 자. 아침에 한 잔 마셔서 오늘은 끝.”
“아…”
굳어지는 도영이의 표정을 보고 냅다 커피부터 잡았다. 마실 수 있다니까? 독기 가득 오른 눈으로 얘기하면 상대는 별 저항 없이 물러선다. 마음대로 해라~ 하면서. 어렵지 않게 처치했다는 생각에 나름 뿌듯한 얼굴로 도영이를 바라보지만, 아무래도 더 큰 적은 이쪽인듯하다.
“누나, 에이드 사다 드릴게요.”
몇 없는 단호한 표정이다. 나 진짜 괜찮다고 얘기해도 씨알도 안 먹힌다. 당장 일어나서 에이드를 사 오려는 건지 짐만 내려놓은 채 일어나려는 도영이를 겨우 앉혔다. 어차피 곧 나갈 거라고. 뭐 마시고 싶은 생각 없다고. 몇 번을 설명하고 나서야 그럼, 다음에는 꼭 에이드 사올게요… 하고 말끝을 흐리는 김도영이다. 나는 괜찮으니까 너 두 잔 마셔. 이거 다 마셔. 내 몫의 커피와 이미 마시고 있던 서영호 몫의 커피까지 몰아주고 웃는 얼굴을 본 후에야 마음이 놓인다.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과제를 하는 도영이의 옆모습을 보다가 문득 생각에 잠긴다. 최애의 실생활을 1열에서 직관하는 삶이라니. 한 명을 욕을 중얼거리며 피피티를 만들고, 두 명은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또 한 명은 따라 할 수 없는 웃음소리를 내고 나머지 한 명은 그 앞에서 재롱을 떠는 이 시끄러운 환경 속에서도 집중하는 옆모습을 보고 있자니… 대견하니까 뭐라도 먹어야겠다.
“도영아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 너 피자 먹고 싶다며.”
“네, 좋아요.”
최애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직접 사 줄 수 있는 삶이라니. 그리고 최애가 내 커피를 손수 들고와서는 손에 쥐여주기까지 하는 삶이라니.
하,ㅋ
나는 요즘 최고의 갓생을 사는 중이다.
“산뜻한 주말 아침 9시 강연회는 대체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발상일까?”
“나는 3년이면 황교수님을 다 알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대체 어느 교수가 주말 오전 9시에 강연회를 심지어 사심 가득 담아 학생에게 꼭 인사하고 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을까. 진심으로 영감탱 돌으셨수? 를 외치고 싶었지만 취업 잘하고 싶으면 황교수랑 척지지 말라고 술에 취할 때마다 노래를 부르던 주연선배가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려 입에 힘 빡 주고 웃으며 대답했다. 꼭 가야죠 교수님(하트)
그리고 대망의 강연회 전날 밤. 아침 9시부터 강연회에 참석하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 법도 한데 망각의 동물이자 될 대로 되라의 표본인 우리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둘러앉아 있다. 금요일은 막걸리거든요 라는 동혁이의 말에 그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고 각자 주섬주섬 안주를 챙겨서 우리의 홈스윗홈 서영호의 집에 둘러앉았다. 이 인원이 다 같이 궁둥이 붙이고 앉을 공간이 있는 유일한 집.
'나 홀로 집에'에 이어 '해리포터 시리즈' n번째 정주행을 시작한 문태일은 자신은 아직 해리포터 안 본 눈이라며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요? 라고 순진한 얼굴로 그렇지 못한 총알을 쏘는 제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리 제노가 진정한 재미를 모르고 살았구나. 문태일의 표정에 맑은 광기가 서렸다. 한동안은 고생 좀 하겠구나. 해리포터의 진실된 재미 알리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문태일에게 제대로 걸린 듯 한 제노의 앞날이 그려졌다.
한쪽에서는 어김없이 취업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뚜렷한 답도 없는 문제에 대해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며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싶다가도 어김없이 은은하게 돌아있는 대화가 들린다. 수박주스의 방향성에 대해, 오렌지 주스와 포도 주스의 빛에 제 힘을 발휘하지 못 하는 거라는 강렬한 주장.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초점 없는 눈동자.
어느 정도 술이 올라오자 그제서야 슬슬 걱정이 시작되는지 다음 날 깔끔하게 일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한다. 알람을 3분 단위로 맞춰놓고 자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이동혁과 이거 진짜 좋아! 하며 화장실 사진을 찍어야 알람이 꺼지는 앱을 설명하는 마크다. 자신들은 경영 안 가길 잘했다며 아무 걱정 없이 연속 짠을 해대는 이제노와 김정우 옆에는 세상 시름 가득한 도영이가 보인다.
발그스레하게 올라온 얼굴로 공손히 포갠 앞발을 의자에 기댄 채 한숨을 연신 내뱉는다. 평소보다도 훨씬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 안쓰럽다가도 후, 후 하고 내뱉는 숨에 따라 자기주장 중인 부리를 한 번 보면 그 앙큼한 자태에 덕심이 미친듯이 차오른다.
그래도... 그래도, 인간의 도리로서 양심적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을 앞세워본다. 어제 날밤도 깠다는 애가 무슨 고집으로 굳이 굳이 왔는지. 심지어 사람 좋아 많을수록 좋아인 정우까지도 형 오늘은 집에 가서 쉬는 게 낫지 않아? 라며 말리는 데도 기어코 함께했다.
“너는 그냥 집 들어가서 일찍 자라니까.”
이제는 자리에 앉아 졸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말 하면 새침한 눈으로 나를 흘기는 김도영이다.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흘기더니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한다. 그 모습이 꽤 술에 잔뜩 취한 토끼 같아서 자연스레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떤 알람이 가장 효과적인 건지 술이 들어갔기에 가능한 터무니없는 토론이 이어지고 있어서 꽤 소란스러웠다. 도영이의 소곤소곤하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몸을 살짝 기울여야 했다.
“누나는 나 안 오면 좋아요?”
“너 피곤하니까 그렇지.”
“치... 그래도 어떻게 안 와...”
공기 반, 숨 반으로 나오는 목소리에는 취기가 가득했다. 뭐가 그리 서운한지 새침한 목소리는 이 자리에 꼭 와야만 했다는 결연한 의지를 섞여 있는 듯하지만 비슷한 부피의 토라짐이 공존하는 듯하다. 우리끼리 먹으러 간다고 해서 내심 서운했던 걸까. 그래도 날밤 깐 애한테 술 먹자고 할 안하무인들은 못 되는데...
아무리 다같이 어울리는게 좋아도 자기 몸부터 챙겨야지. 괜히 속상한 마음에 구박 섞인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자 머리 울려요오 하면서 내 손을 잡아 내린다. 그 손에 느껴지는 열기가 마신 술의 양을 짐작하게 한다. 말끝을 흐리는 게 술에 취할 대로 취해가는구나 싶어서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야야 그만 먹어. 오늘만 사냐? 주섬주섬 술병을 정리하려는 걸 서영호가 말린다. 오늘 애들 여기서 재울 생각이니까 정리하지 말라고.
“내일 같이 오게?”
“상태 보니까 그게 나을 것 같네.”
“그럼 나 그냥 간다?”
“택시 불러줄게. 기다려.”
주방에 놓인 기다란 식탁에서 둘러앉아 술을 먹고 있던 애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어 인사를 건넨다. 누나 조심히 가고 내일 살아서 보자. 동혁이의 말에 손을 번쩍 올려 흔드는 제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김에 이미 정신을 놓고 엎드려 자는 김정우를 거실에 눕히려는 서영호를 도우려 김정우의 한쪽 팔을 어깨에 메는데 겉옷을 챙겨 입은 나를 보고는 누나 가게? 조심히 가고 올 때 메로나~ 하는 김정우다. 도착하면 연락 달라는 서영호의 말에 대답하며 현관으로 가는데 언제 그 앞에 왔는지 멀뚱히 서 있는 김도영이 보였다.
“너 여기서 뭐 해?”
“누나 배웅.”
거의 다 풀린 눈을 벅벅 비비며 서 있는 거대한 남성이 이렇게나 귀여울 수 있다니. 요즘 들어 김도영의 귀여움에 면역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안일한 착각이었다. 어떻게 면역 따위가 생길 수 있겠어. 가끔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는 덕심에 벅차오를 때면 발을 동동 구르고 싶어진다. 무서운 사람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로 꾹 눌러온 한 번쯤 깨물고 싶다는 욕망이 다시 고개를 쳐들어 올리길래 그것만큼은 꾹 참고 눌렀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 번만 깨물어봐도 될까?”
끓어오르는 덕심을 꾹 누르고 물어보기.
허락받고 깨무는 나 제법 젠틀하다.
주접에 적응이 될 법도 한데 아직도 내가 이지랄을 할 때에는 어쩔 줄 모르는 김도영이다. 보통은 잔뜩 당황해서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게를 젓는다. 가끔은 얼굴을 가리기도 하고 어쩔 땐 여기서? 하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 저기 구석에 가서는 괜찮아? 하며 2절까지 가면 아 누나~ 심호흡해봐요 심호흡 하면서 나를 진정시킨다. 그 정도 보면 3절에 4절까지 가고 싶은 마음 꾹 참을 뿐이다.
이번에도 누나 하며 말끝을 늘이고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지 손부채 질을 하는 도영이다. 이런 반응에 더 놀리고 싶어지는 건 모르는지.
"솔직히 너도 스스로 귀엽다는 거 알지."
결국 또 못 참고 놀리면 안그래도 빨간 얼굴이 더 빨개지면서 강력하게 부인한다. 진짜, 진짜 몰라요. 아니 모르는게 아니라 나 안 귀여운데! 누나가 맨날 놀리려고 그러는거지... 아니, 진짜로... 진짜 아니라니까? 뭐가 아니야. 어? 아니, 그냥... 아니야... 부정에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다가 결국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모르는 모습까지 보고 나서야 놀리는 걸 멈춘다.
그제서야 진정이 됐는지 커다란 손으로 조그마한 얼굴을 가린 채 손을 눈까지만 살짝 내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누나, 내일 일어날 수 있겠어요?"
“자신 없어. 내일 나 연락 없으면 그냥 너네끼리 다녀와.”
“그럼 내가 그... 모닝... 모닝콜 그거 해줄까요?”
입을 가리고 있는 손과 김정우의 노래소리 때문에 말이 잘 들리질 않았다.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며 뭐라고? 다시 묻자 손을 내린 도영이가 이번에는 자신의 양손을 가만두질 못한다. 나를 한 번 보고 아직도 소란스러운 거실과 부엌을 한 번, 내 뒤쪽의 현관문을 한 번 보며 정처 없이 눈동자를 굴린다. 그 와중에 왼쪽 검지를 꾹꾹 누르기도 하고 단정히 잘 깎인 손톱으로 괴롭히기도 하면서
“아침에 전화로 깨워줄까요?”
쭈뼛거리면서 떡볶이와 순댓국을 세팅하던 말랑 토끼가 언제 이렇게 커서 듬직하게 깨워 준다는 말을 다 하는지. 가슴이 웅장해졌다. 이.. 이 기특한 놈. 하지만 도영이는 어제 날밤을 깠고, 오늘 술까지 마셨고 원래 아침잠도 많은 아이라는 걸 안다. 즉, 아침에 나를 깨우려면 나보다 더 빨리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우리 토끼 10분이라도 더 자야지
“됐어.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자.”
“괜찮은데...”
“씁 괜찮긴 뭐가 괜찮아. 너 어제 밤도 새고 지금 술도 먹고 어?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너 다음에도 이렇게 무리하면 진짜 혼난다.”
치 하고 고개를 숙인 도영이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는 나왔다. 따라 나와서 택시 타는 걸 보겠다는 김도영을 겨우 겨우 말리고는 문을 나섰다. 닫히는 현관문 사이로 손을 흔들며 끝까지 도착하면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는 김도영을 보고 집으로 향했다.
이 기특한 놈. 다 컸구나 싶은 마음을 갖고.
집에서 나서기 전부터 귀가 후 침대에 쓰러질 때 까지 혼을 쏙 빼먹은 강연회와 끝을 모르고 쏟아지는 과제. 이제 그만 할 때 되지 않았나 싶을 때 기출변형 느낌으로다가 타이밍 이상하게 투척되는 팀플까지. 아무리 학교에 뜻 없는 나라고 할 지라도 정신없는 하루의 연속이었다. 이틀 연장으로 술을 마시고 해장을 같이 한 후로는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그리고 그 정신없는 하루하루 속에서도 기민하게 포착한 건 묘하게 기운없어 보이는 도영이였다.
처음은 사소했다. 좋아하는 영화 취향이라고는 온통 로맨틱 코미디인 김도영씨께서 뜬금없이 마블을 입에 달고 다니는게 이상했다. 나랑 서영호, 그리고 이동혁까지는 뭐 환장한다고 쳐도, SF물에는 별 감흥 없어 보였는데 갑자기 그것도 굉장히 뜬금없는 타이밍에 냅다 언급하는 식이었다.
시간 맞는 사람끼리 점심을 먹던 중 깍두기 잘라줄까? 라는 물음에 아, 마블 영화 재미있다던데 라던가. 카페인 수혈 없이는 오늘을 못 버티겠다며 자진해서 커피셔틀을 하러 다녀 온 동혁이가 따로 챙겨 온 에이드를 건네받을 때 누나도 마블 좋아해요? 라던가. 한참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다가 쿨타임 채우는 와중에 아... 마블... 하며 앓는다던가.
이게 대체 뭘까 싶을 때 궁금증이 해소됐다.
"누나 혹시 이번에 새로 나온 마블..."
"봤지. 개봉 하자마자 서영호랑 보고 왔지. 너 보게? 꼭 봐 재밌어."
"아... 봤구나..."
"왜 형 마블 안 좋아하지 않았어? 꼭 봐. 나도 봤는데 이번 거 미쳤어."
어디서 나타났는지 털썩 하고 도영이의 옆에 앉으며 동혁이가 맞장구쳤다. 누나는 봤지? 어. 그치, 누나가 안 봤을리가 없지. 캬, 나는 마지막에 사운드 크게 울리는데- 각자 덕심이 뻐렁쳤던 포인트를 짚어서 이야기할 때 멍 한 얼굴로 우리를 보다 수업에 늦었다며 정신없이 나가는 도영이다. 무슨 일이 있나 싶다가도 이 시점 되면 다들 정신 살짝 빼 놓고 사는게 현실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물론 그 날 영화표 두 장은 보내놨다. 이번 영화 진짜 괜찮으니까 친구랑 한 번 보라고. 우리 도영이 조금이나마 힐링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신 못 차리는 우리를 기다려줄 생각 없다는 듯 눈 깜짝할 사이에 시작된 시험 기간은 성적에 손을 뗀 나에게조차 은근한 부담감을 줬다. 가벼운 마음으로 치르는 시험임에도 무슨 스트레스가 이리 심한지 찌릿하게 울리는 편두통에 침대에 드러누웠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자야지. 생각이란 걸 하지 않겠다는 생각만 잔뜩 안은 채 조용히 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서영호와는 종종 둘이서 술을 마시곤 한다. 동갑에 휴학도 같은 시기에 하고 생각과 생활이 상반된 사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잘 통하는 사이다. 평소와 비슷하게 마신 술이었는데 역시 섞어 먹는 게 문제인 건지 다음 날 올라오는 숙취가 영 더러웠다.
한 과목 시험이 끝나고 남들은 다음 시험을 준비할 때 나는 나의 라꾸라꾸에 누워 혀 끝까지 건드리는 알콜 기운을 간신히 날리고 있었다. 이따 우리 지성이 저녁 사주기로 했으니까 딱 그때까지만 누워있자 생각하며 천천히 낡아가고 있을 때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 어디 아파요?”
그 목소리에 눈을 떠니 살짝 놀란 얼굴로 라꾸라꾸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도영이가 보였다. 아니라 해도 아픈 사람 몰골을 하고 있는 내 말을 쉽게 믿어주지 않았다. 잠시만요 누나 하며 가방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며 당장에라도 약국에 다녀올 것 같아서 우선 붙잡았다.
"나 술 먹어서 그래, 술 먹어서."
“오늘 시험이었는데?”
“그래서 짧게 마셨지.”
“짧고 굵었나 보네.”
우리 토끼 아주 예리해. 정곡을 찌르는 말에 헛헛하는 웃음을 남발했다. 쪼그려 앉아있던 도영이는 본격적으로 나를 혼낼 생각인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라꾸라꾸에 누운 눈높이보다 바닥에 앉아 나를 보는 도영이의 시선이 살짝 더 높아서 나는 제대로 혼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는 참 말랑한데 가끔 잔소리하거나 혼낼 때는 아주 가차 없거든요.
"누나 계속 이렇게 술 먹으면 정말 간 안 좋아져요. 요즘 계속 피곤하다며 피로가 안 풀린다며 그거 다 간이 안 좋아서 그런 거야. 술을 무슨... 우리 삼촌처럼 먹어?"
"미안..."
"나한테 미안할 게 아니라 누나 간한테 미안해야죠."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장한 날카로운 팩트폭력에 나는 결국 술을 줄이겠다는 약속을 하고야 말았다.
“어제 단톡에는 먹자는 말 없던데, 혼자 마신 거에요?”
“아니 서영호랑.”
“둘이?”
“엉.”
“단둘이?”
“엉. 간만에 소맥 말았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도영이다. 그래, 소주도 아니고 맥주도 아니고 소맥은 좀 심했지? 아무리 내가 성적 신경 안 쓴다 해도 시험 기간인데. 그런데 솔직히 어제는 내가 먼저 먹자고 안 했다? 서영호가 시작한 거야. 나는 진짜 일찍 누워서 자려고 했어. 이게 다 서영호 때문이라니까? 맞아 지금 엄청 반성 중이야. 먹을 거면 하나만 먹지 무슨 자신감으로 섞어서. 표정으로 혼나는 중이라 생각한 내가 눈도 못 마주치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변명 아닌 변명을 속으로만 늘어놓고 있을 때
“나도 집에 혼자 있었는데...”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험공부 열심히 했겠네?”
“아뇨, 저 오늘 시험 없어서...”
“그럼 푹 쉬어야지. 원래 중간중간 살 틈은 있어야 버텨.”
“누나 진짜...”
나 뭐 잘못했나...? 한숨 가득한 말에 당황한 내가 얼어붙었다. 뭐, 뭐지. 왜지? 뭘 잘못말한거지? 도통 감 잡을 수 없었다. 요즘 도영이가 묘하게 기운 없어 보이는 것 같길래 기운 내라고 먹을것도 보내주고 영화도 보내주고, 나 나름 열심히 한 것 같은데... 그게 문제인가? 부담스러웠나? 내가 또 의도치 않게 불편하게 만든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어도 누나가 무슨 잘못을 해요... 하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는게 다였다.
그럼 대체 뭔데ㅜ 이미 속으로는 눈물 찔끔 흘렸지만 사회적 체면상 나름 근엄하게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러 꿀물 사 올테니 기다리라는 말 뿐.
도영이가 주고 간 따뜻한 꿀물을 손 안에 넣고 한참동안 생각했다. 뭐가 문제인걸까. 내가 요즘 뭐 잘못한게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예뻐해 달라 했고. 나는 마음 가는대로 예뻐해 줬고. 이 과정에서 부담스러웠다면 표현 하지 않았을 애도 아니고. 아무 이상 없었는데 뭘까. 별다른 수확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리고 그 해답은 전혀 예측하지 못 한 날, 예측하지 못 한 상황에서 튀어나왔다.
[동방에서 같이 뷰인사 볼거야. 볼 사람은 지금 동방으로] 라는 톡에 [너는 그걸 아직도 안 봤어?] [누나 그거 여주 죽어요.] 하는 불필요한 답들만 돌아왔다.
기다리지 않고 영화를 시작하려 할 때 [저요! ] [저 지금 가요!] 하는 도영이었다.
문태일이 들여놓은 빔프로젝터를 틀고 나는 라꾸라꾸에, 도영이는 소파에 앉아 영화를 봤다. 중간중간 모습이 바뀐 남주가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서 등장할 때 헙 하는 소리를 내고 그들이 맞이하는 이별에 이유 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도영이는 이 영화가 볼 때마다 다가오는 의미가 다르다고 했다. 너 이 영화 봤어? 라는 물음에 세 번 보니까 더 좋은데요 할 뿐이었다. 평소와 같이 영화의 감상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가 오고 갈 때 도영이가 자연스럽게 한 질문이 그 사건의 시작이었다.
“누나는 어떤 사람이랑 연애하고 싶어요?”
“나? 우선 무조건 연상”
“네?”
“왜?”
“나 연하잖아.”
“어?”
“어?”
그 후로 이어진 정적
가볍게 시작된 물음과 그렇지 못한 결과였다.
영화를 보면서 먹은 팝콘을 정리하며 가볍게 물어오는 도영이에 가장 중요한 조건부터 말했다.
연상이라고. 그 말에 놀란 듯 반응하는 도영이에 습관적으로 왜? 하며 되물었고 이에 돌아온 답은 도영이도, 나도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말 의아하다는 듯 나 연하잖아. 라고 대답한 도영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어오는 나를 보고 똑같이 얼빠진 대답을 내놨다. 어? 하며.
순간적으로 숨 막히는 정적이 우리의 대화를 가로질렀고 점차 자신이 한 말을 인식했는지 볼과 귀가 아주 빨개진 도영이는 어버버 하는 소리를 내며 부산스럽게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허공에 헛손질하며 봉지 주변으로 움찔, 소파 위로 움찔하다가 다급히 가방을 챙기더니 이내 소파 위에 놓인 핸드폰을 들고는
“... 전화...가 오네? 여보세요?”
“도영아 너 핸드폰 거꾸로 들었는데...”
거꾸로 든 핸드폰에 여보세요를 시전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행동을 지켜보던 내가 입 쪽을 향한 카메라 렌즈의 상태를 말해주자 텅 빈 동공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냅다 뒤돌아 뛰어나갔다.
포근했던 분위기가 단번에 깨지고 동아리 방에는 라꾸라꾸와 나, 다 먹은 팝콘 봉지만 남았을 때 나는 깨달았다.
아주 대단한 오해가 있었구나.
우리 토끼가 이상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호랑이 굴에 냅따 들어와버린 토끼를...
이걸... 어떻게 하지...?
BONUS
마크리 안경 뭐야?
아 이거 어제 새로 맞춰쓰
별안간 귀엽다며 빵터진 영원이야. 나 사진 한 번만 찍으면 안 됨? 물어보고 사진까지 찍고, 너무 잘 샀다고 너무 잘어울린다고 주접부리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있다가도 쑥쓰러운지 머리 슥슥 긁는 마크
그리고 그걸 다 지켜보고있던 도영이
다음 날 동방에 들어 온 영원이는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도영이를 보며 지금 내가 헛것을 본 건 아닌가 싶어.
야... 도영아 너 안경 뭐냐?
아.. 그 블루라이트 차단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
이런미친 야 이게 무슨...
말을 잇지 못 하고 문 앞에 얼 빠진 채로 서 있다가 호다닥 도영이 앞으로 와 앉아.
막상 안경을 쓰고 오긴 했는데 영원이가 앞에서 보고 있으니까 민망해서 안경 쓱 벗어
안타깝게도 거기에 더 환장한 박영원
도영아... 도랏냐?
네?
안경써봐
다시 벗어줘
...
시킨다고 또 시키는 대로 하는 도영이야
영원이한테 어제 에어프라이어로 한 요리 보여주면서 자랑하던 도영이
사진 넘기다가 친구랑 찍은 사진이 나왔어
어? 누구야?
친구요
친해?
네. 많이 친해요
그럼 한 번 데려와봐
네?
맛있는거 사 줄게
...안돼요
엥 왜?
... 얘 잘생겼어요...
그럼 더 데려와야 하는 거 아니야...?
... 그래서 안 되는 거에요... (중얼중얼) 이 누나가 진짜(중얼중얼)....
뭐라고? 잘 안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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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토끼야 너무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