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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위한 바울의 셀프 추천서(고후4:1-6)-2024.6.2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전도 기간에 개척한 교회입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대략 일 년 육개월을 머물면서 말씀을 가르치며 목회를 한 것이지요(행18:11). 그리고 에베소를 거쳐 안디옥과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으로 다니면서 모든 제자들을 굳게 하며 2차 전도여행의 대미를 장식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의 2차전도 여행의 주 무대는 아가야 지역 즉, 고린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3차전도 여행을 에베소를 주 무대로 시작합니다. 에베소에서 그는 삼년동안을 사역합니다(행20:31).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교회가 수없이 많았고, 모두 바울의 마음에 있는 교회였지만 특별히 고린도교회는 아픈 손가락과 같은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의 내용을 볼 때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어떤 교회보다 사랑했고,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물론 고린도 교회는 어느 교회보다 열정도 많고 은사도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였지요. 그래서 개척자 바울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교회이기도 합니다.
고린도교회 하면 잊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아볼로입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그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였습니다. 그가 에베소에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아볼로는 복음에 대해 2%가 부족한 사람이었지요. 그런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서 부족한 복음의 2%를 수혈 받게 됩니다. 복음의 깊은 것을 체험한 아볼로가 아가야 지역 선교를 자처합니다. 그리고 에베소에 있던 형제들의 지지를 받으며 아가야 선교에 나선 것입니다. 당연히 고린도교회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의 사역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많은 교인들의 지지를 받았을 정도였지요(고전1:12).
고린도는 아가야 지역의 행정수도입니다. 아가야 지역의 대표적인 도시가 고린도지역이었지요. 그런데 아볼로는 고린도교회에서 오래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바울이 있는 에베소로 돌아 온 것입니다. 바울은 아볼로로부터 고린도교회 소식을 비교적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아볼로에게 고린도교회로 돌아가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고전16:12). 그런데 아볼로가 거절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지역에서 고린도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한 답변을 기록하여 디모데 편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1) 바울의 대적자들
바울은 고린도전서 마무리에 자기가 고린도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밝힙니다. 그가 마게도냐를 지나 고린도를 방문한 후에 그곳에서 겨울을 날 계획이라는 것입니다(고전16:5-7). 그런데 그 일정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일정이 틀어진 것입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나 대표적으로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고후1:8). 그 환난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환난이 매우 고통스러운 환난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이 환난으로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고후1:9). 얼마나 힘든 환난이었으면 사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겠습니까?
극심한 환난이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바울이 당한 환난의 목록을 보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고후11:23-28). 누구든지 그런 환난을 당한다면 그런 정도의 말은 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우리중의 대부분은 그가 당한 환난의 한 두 가지도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사역을 포기하든지, 하나님을 원망하든지, 자기 생명을 끊어버릴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견뎌낸 것입니다. 그런 환난 때문에 바울이 약속했던 고린도교회방문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대적들의 먹잇감이 되었던 것이지요.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울의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교회 편에서 보면 고린도교회도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고린도전서라는 편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보낸 디모데의 가르침도 큰 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디모데의 보고에 의하면 오히려 고린도교회는 거짓 사도가 나타나 복음을 훼방하며 바울과 고린도교회를 이간시켜 교회를 분란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직접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고후13:2).
그런데 이 방문은 바울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던 것이지요. 방문에 대한 효과가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모욕만 당한 채 돌아왔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방문에 대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고후2:1). 그리고 다시 바울은 애통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써서 디도편으로 전달한 것입니다(2:4). 물론 이 편지는 사랑의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의 주된 내용은 거짓 사도들을 용납지 말고 징계하라는 것이요, 자기의 사도성에 관한 의구심을 변증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공격 메뉴가 있습니다. 사도성에 관한 시비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 스스로 진짜 사도라는 강한 확신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사도라고 자천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진짜 사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늘날이나 예전이나 똑같습니다. 가짜가 진짜를 가짜라고 비난합니다. 오히려 가짜들이 진짜라고 큰 소리를 칩니다. 세상이 그러다보니 가짜가 무서워서 진짜된 자의 신분을 밝혀야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와 가짜의 구별을 위해 진짜된 자의 신분이 밝혀져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 진짜된 자는 자기가 진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짜들은 자기들이 진짜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닙니다. 그것이 진짜와 가짜의 표면적인 구별법입니다.
오늘날도 유난히 자기들이 속한 교회가 진짜 교회라고 큰 소리를 친다거나, 혹은 자기들이 진짜 목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의심을 해 보아야 합니다. 분명히 켕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대부분 자기들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지나치게 자기들의 신분을 자랑하기 바쁩니다. 가짜를 감추기 위해 진짜라고 호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은 진위 여부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은 세대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관찰해보면 쉽게 드러납니다. 특별히 유투브라는 채널을 통해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가슴 아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시대입니다.
(2) 바울과 고린도교회를 이간시키는 교란작전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 교사들과 사도들이 바울을 공격하는 주된 메뉴가 사도성 시비였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마다 찾아다니며 바울의 사도성 시비를 하고 다녔던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서신서마다 자기의 사도성에 관한 인사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도된 바울’이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들어보면 웃기는 말이 아닐까요? 누가 자기를 소개할 때마다 그렇게 소개하겠습니까? 그냥 바울이라는 이름만 소개하면 안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의 소개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서신서에서 빠짐없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는 문구를 삽입합니다. 자기가 사도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지요. 바울이 그렇게 자기를 사도라고 밝힐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상식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버릇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영적인 분별력을 갖지 못한 대적들의 공격 때문이지요. 가짜들의 비난 때문이에요. 물론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예수님 곁에서 훈련받았던 12명의 사도그룹 멤버는 아닙니다. 이른바 예수님의 12제자가 아닌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친히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요, 사도적 권위를 위임받은 자입니다. 비록 어떤 제도적인 틀에 의해 피택 받은 사도는 아닐지라도 주님이 직접 그를 사도로 부르시고 파송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확실한 사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의 사도성을 시비하는 자는 있어 왔습니다. 주로 유대 율법주의자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들의 눈에 비친 바울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암적 존재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바울을 흠집 내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을 죽이려는 특공대가 있을 정도였으니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이 바울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았던 사람이니까요. 물론 그 모습이 그들의 눈에 비친 바울의 가장 죽이고 싶은 모습이었겠지요. 최소한 복음을 아는 사람이나 복음을 믿는 자라면 바울을 그토록 미워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바울을 대적하는 그들은 모두 복음의 대적자들이었던 셈이지요. 바울을 대적하는 한 가지 증거만으로도 그들이 복음에 속한 자가 아니라, 율법에 속한 자라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이 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거짓교사들이나 사도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시비하는 것은 바울과 교회를 이간시키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그래야 자기들이 교회를 장악할 수 있거든요. 그들의 먹잇감은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바울이 세운 교회를 자기들의 놀이터로 만들려는 것이지요. 그들 눈에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는 모두 다 가시 같은 존재로 보였던 것입니다. 반드시 그런 교회를 율법으로 흐리게 하는 것이 그들의 제일 되는 목표였던 것이지요. 왜냐면 그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복음으로 여기고 있었을 것이니까요.
거짓 교사나 거짓 사도들은 모두가 다 율법의 옷을 입은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신천지라는 이단이 기성교회에 파고들어 목사와 교회를 이간시킨 후 자기들이 교회를 접수하는 그런 방식입니다. 그들은 추수꾼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 침투하여 목사와 교회를 이간시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교회를 접수해버립니다. 그들은 그 전략을 산 옮기기 전략, 혹은 가나안정복이라고 말합니다. 사단의 전략은 가장 먼저 교회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공격하는 가장 중요한 전략은 목사와 교회를 이간시키는 것이지요.
누구보다 특출한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이 복음을 깨닫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으니 율법주의자들의 눈에 바울이 얼마나 가시 같은 존재였겠습니까? 그러니까 바울의 동선을 따라 뒤를 밟고 다니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항상 있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울이 복음으로 세운 교회들마다 들어가서 바울을 험담하기 바빴던 것이지요. 험담정도가 아니라 바울과 교회를 이간시키는 것이지요. 당연히 고린도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먹잇감이 되었던 것이지요. 바울과 고린도교회를 이간시키려고 몸부림을 쳤던 것이지요.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바울을 아프게 한 대표적인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가장 괴롭게 한 것은 바울에 관한 오해입니다. 믿음이 깊지 않는 고린도교회는 가짜 사도들의 교란작전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바울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은 바울의 사도성에 관한 시비입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정통 사도가 아니므로 모든 것에 공신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여러 가지 억측을 만들어서 유포시켰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직분에 대한 변론부터 해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의 사도성에 관한 시비는 바울의 모든 것을 다 부정당할 수 있는 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아닌 사람이 전한 복음이 무슨 유익이 있겠으며, 사도가 아닌 사람으로 가르침을 받은 신앙이 무슨 정통성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것을 부정당할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부득불 바울은 자기의 사도성에 관한 시비를 해소해야 했습니다. 적극적으로 변증해야 했던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를 변증하는 것은 개인적인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자기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은 곧 복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변증인 것이지요.
바울은 자기가 예수님으로부터 새 언약의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고후3:6). 무엇보다 바울은 자기의 사도에 관한 증거를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장12절을 보면,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분의 계시로 보고 들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보다 먼저 사도된 사람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갈1:17). 먼저 사도된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합법성이나 정통성을 인정받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가짜 교사들이나 사도들은 자기들이 교사나 사도라는 천거서를 소지하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이 가지고 다닌 가짜 교사증명서나 가짜 사도증명서는 누가 발행해 준 것일까요? 당연히 율법주의자들이 발행한 것이었겠지요. 감히 복음을 아는 자들이 그런 천거서를 발행해 줄 리도 없거니와 그것을 가지고 다닐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가짜들은 그런 것들로 자신들의 신분을 위장하려는 것이지요. 대부분 우리 주변에도 가짜들은 말도 많고, 가짜들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그럴듯한 포장을 많이 합니다. 눈속임을 한다는 것이지요.
대부분 진짜는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혹은 과도하게 포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진짜는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자기를 증명해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드러납니다. 굳이 눈에 보이는 화려한 자격증이나 혹은 증명서가 없을지라도 드러납니다. 솔직히 몇 마디의 말만 나누어 보아도 드러납니다. 아니면 사역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3장1절에서 자기의 사도성 시비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처럼 굳이 천거서가 필요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굳이 천거서가 필요하다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천거서라는 것이지요. 성도들은 복음으로 심어진 복음의 열매요, 그리스도의 편지이기 때문입니다(고후3:2).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새 언약의 일군이라는 것입니다(고후3:6). 새 언약의 일군은 의문에 새겨진 일군이 아니라, 영으로 새겨진 일군입니다. 돌비에 새겨진 일군이 아니라, 심비에 새겨진 일군입니다. 이른바 정죄의 직분이 아니라, 의의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울이 자기를 적극적으로 논증합니다. 셀프 추천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바울이 자기를 천거하는 주된 내용은 무엇일까요? 물론 본문을 읽어보면 바울은 그들이 주장하는 거짓주장들에 대하여 조목조목 근거를 가지고 변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복음을 위한 사도 바울의 셀프 추천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1-2절). 진짜와 가짜의 분별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이른바 말씀을 해독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로 여깁니다. 그 어떤 것도 말씀보다 앞서지 아니하고, 말씀위에 놓지 아니합니다. 말씀이 항상 우선이고, 말씀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가짜들은 말씀을 자기들의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이른바 말씀을 혼잡 시킵니다. 말씀을 혼잡케 한다는 것은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자기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립니다. 말씀에 수많은 양념을 추가합니다. 때로는 말씀을 가지고 사람을 공격하고, 말씀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가지고 부끄러운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궤휼가운데 행하기도 합니다. 궤휼은 교활한 속임수를 말합니다. 실제로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의 재산을 탈취하고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의 영혼을 유린하기도 일쑤입니다. 이단들은 두말할 것 없거니와 본문의 고린도교회를 이간시키는 거짓교사들도 그랬습니다. 가짜들은 말씀을 이용합니다. 자기들의 필요를 따라 말씀을 차용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혼잡시키는 것이지요.
바울은 그런 자들과 자기를 이렇게 비교합니다(고후2:17).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대했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말씀에 어긋날까봐서 노심초사했던 것이지요.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진리를 나타내는 데만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를 천거한다는 것입니다(4:2). 하나님 앞에서의 발언은 바울신앙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각 사람의 양심을 거론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각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하면서 자기를 천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를 천거했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증명해내는 것이지요. 천거서는 함께 보는 것처럼 확증할 수 있는 문서를 말합니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천거서를 일종의 신임장 내지는 위임장 같은 역할로 사용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좋은 추천서는 강력한 힘을 가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가짜들이 바울을 이간시키는 것은 바울은 사도증명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사도로서 증명받을 만한 천거서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이 자신의 가짜됨이 드러날까 봐서 고린도교회 방문을 하지 못한다고 악의에 찬 거짓말을 유포시켰던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적극적으로 자기를 논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천거서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장의 추천서보다 복음의 열매를 가지고 증명하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깨끗한 양심과 복음으로 드러난 열매에 사도의 진정성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바울은 겁박하는 사람들의 소리에 민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짜들이 시비하는 것으로 낙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유는 자기를 사도로 불러주신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사도된 자의 자세입니다. 제 아무리 그들이 스피커를 틀어놓고 비난한다 할지라도 결코 낙심치 않습니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입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3-4절).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것은 복음을 가리운 것입니다. 복음을 가리운 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합니다. 여기서 혼미케 한다는 말은 눈을 멀게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혼미케 한다는 것은 마음의 눈을 멀게 한다는 말이지요. 영적인 눈을 가리운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결국 복음을 가리우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하는 일입니까? 이 세상 신이 하는 일입니다(4절).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의 눈을 멀게 해버린다는 말입니다. 영안을 어둡게 만들어버린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한다구요? 세상의 신이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치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더러운 신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못하도록 영안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안을 혼미케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울을 이간시키려는 거짓 교사들이요, 거짓사도들입니다. 이들이 사단의 앞잡이가 되어 복음의 광채를 비취지 못하게 훼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교회 다수의 성도들이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복음으로 심었던 교회가 가라지를 덧뿌리고 사단의 영에 미혹이 되어 율법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갈라디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로부터 따끔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말입니다(갈3:3). 이는 복음으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려느냐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저주에 가까운 책망입니다. 갈라디아교회가 율법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전파했다는 것입니다(5-6절). 이것은 복음의 핵심이요, 바울의 신앙고백서와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신 것과 자기가 예수를 위하여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님이 자기의 주되심을 믿는 자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섬기기 위한 종 된 자임을 고백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이 땅에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려 오셨다고 밝히셨던 것처럼 바울은 자기의 주되신 주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종이 되었음을 당당히 밝히는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교인들에게 군림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파송 받은 주님의 종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거짓 교사들이나 사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주되심을 믿지도 아니할 뿐 아니라, 뭇사람들로부터도 섬김을 받으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복음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자기 마음에 비취게 하셨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신 것만 증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바울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비취는 빛을 비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거짓 교사들처럼 아무런 빛도 비춘 적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의 마음에 빛을 비춰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직 복음을 위해 살았던 사람입니다. 앉으나 서나 예수님, 사나 죽으나 예수님만 증거하는 사도 중에 사도였던 것이지요.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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