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키아(현 터키의 안타키아)
-고대 오리엔트 2대 도시 중 하나(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의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에는 시리아의 수도로 됨.
-로마시대에는 제국의 동쪽을 방어하는 최고 책임자의 부임지였슴.
-그리스도교화 된 로마시대의 대표도시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이슬람 세력이 확대되면서 주력이 지;중해에서 메소포타미아 자역으로 향해 쇠퇴의 길로 접어 듬.
-12키로에 이르는 성벽에 400개 가까운 탑을 갖추고 있음. 비잔틴 제국 전성기에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철저한 보강 공사를 받아 20키로의 로마 성벽보다 뛰어난 수비력을 갖추고 있음.
(1) 이슬람· 시리아의 영주들
안티오키아의 총독 "야기 시한": 딸을 리드완에게 시집을 보냈으나 관계 개선은 되지 않았음.
알레포의 지배자 "리드완": 영주가 되자 두 동생을 살해하려 했으나 그 중 한 사람인 두가크는 도망감.
다마스쿠스의 지배자 "두가크": 리드완과 형제지간.
모술 태수 "케르보가"
안티오키아 총독 야기 시한은 십자군이 온다는 말을 듣고
-멀리 떨어진 곳의 두자크와 케르보가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가까운 리드완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음.
-그리스인 주교를 추방하고 그리스도교 남자들을 해자 공사 핑계로 추방함.
![](https://t1.daumcdn.net/cfile/cafe/221D703E54B2CE7D11)
(2) 십자군의 도착과 포진
1097년 10월20일 도착
아데마르 주교가 "철의 다리" 점거
1097년 10월21일 풀리아 골작 보에몬드가 정찰을 마치고 부대를 배치
철의 문: 비워 둠
성 바울 문: 보에몬드 부대
개의 문: 레몽 부대
공작(Duke) 문: 고드프루아 부대ㅏ 선교를 건설
성 조르주 문: 탄크레디
탄크레디가 제노아 선박 13척(천명의 해병)의 도움을 받아 "알렉산드레타"(현 이스켄데루, 이수스의 알렉산드리아) 와 "성 시메온"항을 정복
1097년 10월 하순에 접어들 무렵 레몽이 단독 출정을 하려는 것을 보에몬드가 만류함.
1097년 10월말 시얀의 아들이 다마스쿠스의 두카크로 부터 원군의 약속을 받고 돌아오자 적극 공세를
시작하려고 하렌크의 부대로 보에몬드 군 배후를 습격했다가 위성도시 하나만 날리고 말았다.
(3) 식량 부족
1097년 11월 하순 군량 부족이 심각해져 보에몬드는 군량 조달을 위해 150키러 남쪽에 위치한 하마까지 원정을 가기로 함.
-레몽 부대의 진영 이동 도중 시얀에게 기습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
-샤이자르에서 다마스쿠스 수비대에 노출됨.
플랑드를 배작의 기병대가 두카크의 공격을 받았으나 보에몬드의 부대가 배후를 쳐서 퇴각시킴.
-12월 말일 강지진이 발생 하마에 이르지 못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 옴.
1098년 1월말이 되자 다시 식량난이 심가해져 아데마르 주교의 주창으로 사흘간 단식을 시행.
시얀은 다마스쿠스의 두카크의 원군이 오지를 않자 알레포 영주 리드완에게 안티오키아의 영유권을 양도해 주기로 하고 원군을 요청했다. 2월 초순 알레포 리드완이 원군을 끌고 나타났으나 보에몬드의 기병과 고드프루아의 중무장 보병부대에 시얀과 합류도 해 보지 못한 채 패주함.
1098년 3월4일 영국 선단이 참전을 지원한 기사들과 군량 그리고 탑을 조립할 수 있도록 재단되어 있는 목재를 싣고 도버 해협을 건너 시메온 항에 입항.
- 두개의 감시탑을 건설
①라 마오메리 탑: 지중해와의 연락로를 확보. 레몽에게 방어를 맡김.
② 탄크레디 탑: 성 조르주 문에 대한 감시. 또 다른 이유는 안티오키아와의 연락 용이.
※공격보다 방어에 도움이 되는 곳에 세워짐.
1098년 4월말 이집트 칼리프의 Visir "알 아흐달"이 사절로 시메온 항에 입항.
(4) 이집트에서 온 사절
당시 이슬람 세계는 두 명의 칼리프가 있었음.
① 카이로(메디아)에 근거한 이집트 칼리프: 파티마 왕조 계열(시아파)
② 바그다드(메카)에 근거한 이라크 칼리프: 아바스 왕조 계열(수니파)
알 아흐달은 이집트 칼리프(시아파)의 Visir로 바그다드의 칼리프 지배하인 시리아의 공격을 묵인하는 대신 팔레스티나는 손 대지 말 것을 요구해 옴. 회담은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으나 이집트의 해상 전력을 감안 예의를 지켜 돌려 보냄
※칼리프 하킴 하의 폭행(성묘교회 파괴, 순례자 학살)를 잊지 않고 있었음.
(5) 셀주크 투르크, 일어나다
6개월 전 안티오키아의 총독 시얀의 원군 요청을 받았던 모술 태수 케르보가는 바그다드 칼리프의 허가를 받아 알레포, 다마스쿠스등에도 원군 참가를 요청했고 페르시아 병사 까지도 가담한 수니파 전체의 원군을 끌고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먼저 백작 보두앵의 에데사를 공격했으나 보두앵의 활약으로 3주간이나 발을 묶어 두고 있었다.
(6) 보에몬드의 계략
아르메니아인 부대장 "피루즈"가 방어를 맡고 있던 "자매탑" 부근 산등성이로 올라가는 지점에 "탄크레디 탑"을 건축. 케르보가가 카데사에 발이 묶인지 3주째 정도인 5월말 보에몬드와 피루즈 사이에 동의가 이뤄짐.
6월 2일 케르보가의 공격을 두려워한 블루아 백작이 진영에서 탈주 알렉산드레타 항으로 향함.
보에몬드는 제후들을 막사로 불러 성내 잠입 계획을 밝힘.
6월 3일 자매탑에서 내려온 줄 사다리를 타고 성내로 잠입, 성문을 염.
총독 "야기 시한"은 성밖으로 탈출하다 아르메니아인 시종에게 죽임을 당함.
아들 "샴스 알 다울라"는 산위의 성체로 도망치는데 성공.
(7) 안티오키아 함락
6월 3일 함락된 안티오키아는 완전히 불바다가 되어 식량난이 여전한 상태임. 케르보가가 이끄는 대군이 에데사를 포기하고 안티오키아로 진군 6월 5일 "철의 다리" 부근에 모습을 드러 냄.
(8) 투르크 군의 도착과 포위
6월 6일 샴스가 도망쳐 있는 성채를 석재를 쌓아 통채로 봉쇄해 버림.
6월 7일 "샴스:가 게르보가에게 구원군을 요청.
6월 8일 "이븐 메르완"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도우러 가게 함.
6월 9일 "메르완" 군이 "철의 문"으로 진격해 옴.
좁은 길에 수많은 병사들이 몰려든 탓에 십자군의 유격대에 의해 지리멸렬 됨.
6월10일 "케르보가"는 병력수를 바탕으로 안티오키아 성채를 포위하는 작전을 씀.
이후 많은 사람들이 앞서 도망친 블루아 백작이 머무르고 있는 타르수스에 몰려 듬.
6월중순 알렉시우스 황제가 안티오키아를 비잔틴 제국령으로 삼기 위해 타르수스로 옴.
탈주자들의 말을 듣고 콘스탄티노플로 철수.
(9) 성스러운 창
"바르톨로메오"가 툴루즈 백작 레몽에게 와 성 안드레아가 꿈에 나타나 안티오키아 중앙거리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 밑에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던 "성스러운 창"이 뭍혀 있으니 그 성스러운 창"을 앞세우고 싸우라고 고지했다고 일렀다. 6월14일 밤 투르크 진영에 유성이 떨어지는 사고가 나자 신의 도움이라며 감격해 했고 툴루즈 백작 레몽은 사람을 동원 성 베드로 성당 바닥에서 창 촉을 하나 파내게 되었으며, 이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10) 십자군 대 투르크의 전투
6월27일 보에몬드는 케르보가의 공격을 예측하고 십자군을 6개 부대로 재 편성
6월28일 셀주크 투르크 군이 오론테스 강 서쪽 연안으로 공격해 옴.
보에몬드는 대군을 상대로 별동대로 타격하는 전술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끔. 지휘 계통이 일원화 되지 못한 모술 태수 지휘하의 영주들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함. 다마스쿠스 영주 두카크, 알레포 영주 리드완 등 거의 모든 영주들은 철수하고 케르보가와 하마 영주 한사람만 남음. 승패가 명백해지자 케르보가는 휘하 병사들을 내팽개친 채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담숨에 모술까지 도망쳤다.
(11) 안티오카는 누구 손에?
-풀리아 공작 보에몬드가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며 자신이 안티오키아의 방어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
-툴루즈 백작 레몽은 황제 알렉시우스와의 서약을 내세워 영유권은 황제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
-교황의 대리인인 아데마르 주교가 황제 알렉시우스에게 특사를 보내 황제가 직접 안티오키아에 온다면 영유권을 넘기기로 하고 프랑스왕 동생 위그르르 특사로 보냄.
-황제는 여름철에는 군사 이동이 어려우니 다음 해 봄아너가능하다고 회답을 보내 옴.
(12) 아데마르 주교의 죽음
식량부족과 여름의 무더위, 역병으로 시달리고 있던 7월 아데마르 주교가 역병으로 쓰러졌다. 이로 인해 아데마르 주교가 항상 행동을 같이 하던 툴루즈 백장 레몽의 권위가 추락했다. 거기에다 "성스러운 창"의 발견자인 바르톨로메오가 또 현몽하기를 "안티오카 방어는 정의로운 사람에게 맡기고 될수록 빨리 예루살렘을 해방하러 떠날 것을 레몽에게 전하라." 라고 성 안드레아가 일렀다고 했으나 이번에는 레모이 지난 번과 다르게 대응을 하여 또 한번 권위가 손상되었다.
8월 제루들은 다른 도시나 마을로 피난을 떠났다가 9월에 다시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다시 보에몬드와 레몽 간의 안티오키아 영유권 싸움이 벌어졌는데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그리고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가 보에몬드 편을 들고 나서자 레몽은 예루살렘 진군에 동행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가 안티오키아 분할 통치를 주장하기도 하여 한달 이상이나 예루살렘 진군이 늦어지고 있었다.
(13) 인육 사건
안티오키아 동남쪽 100키로 떨어진 곳에 있는 "미아라트 알 누만"이란 도시를 점령하고는 레몽의 군대가 방어를 맡고 있었는데 1099년 새해 초 부대 병사들이 주민의 인육을 먹었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툴루즈 백작 레멍은 이 불상사에 심한 타격을 받고 자신의 군대를 모두 인솔해 이 도시를 불태우고는 그 길로 예루살렘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때는 1월중순이었다. 이로써 안티오키아는 자연스럽게 버에몬드의 손에 굴러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