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한의 전쟁이야기 - 대한제국군의 마지막 기상, 군대 강제 해산에 대한 시위대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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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29. 22:59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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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의 마지막 기상, 군대 강제 해산에 대한 시위대의 항쟁
1) 일제의 침략, 나라가 망해가다. 다시 의병이 일어나다. 의병투쟁에서 의병전쟁으로.
1904년 2월 8일, 일본은 러시아 함대를 급습하며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이른바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10년 전 중국과 싸웠던 일본은 또 다시 한국과 만주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1897년 수립된 대한제국은 전쟁 발발 이전인 1904년 1월 23일 미리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대한제국 장악을 시도하였다. 2월 23일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강제하여 한국을 일본의 군사기지화하였다.
일본은 1905년 9월 러시아를 꺾으며 본격적으로 한국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갔다. 그해 11월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이른바 ‘을사늑약’을 강제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전국각지에서 이에 대한 반대투쟁이 일어났다. 반대하는 상소는 줄을 이었고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하고 상인들은 장사를 접었다. 민영환, 조병세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결을 하였다. 을사늑약에 찬성한 박제순, 이완용, 권중현 이지용, 이근택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는 시도가 줄을 이었다. 고종은 조약의 무효화하기 위해 각국에 특사를 보냈다.
1907년은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고종의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1907년 7월 20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곧이어 이른바 정미조약을 강요하였다. 부처는 일본인 차관들이 장악하였고, 그리고 7월 31일 얼마 남지 않은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시켰다. 한국이 사실상 일본의 것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1910년 결국 일본은 한국을 강점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의로운 병사’, 의병이 전국각지에서 일어났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의해 일어난 지 약 10년만이었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강요를 계기로 의병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의병장은 허위, 최익현, 민종식, 신돌석 등이었다. 1906년 74세 고령의 의병장 최익현은 체포당해 대마도로 압송되었다. 그는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단식에 돌입하여 1907년 1월 세상을 떠났다.
의병의 활동은 이전의 이른바 양반 중심의 위정척사적 성격의 저항에서 전 계층이 참여하는 민족적인 구국의 전쟁으로 확대되어갔다. 그 새로운 전기의 계기된 것이 바로 군대 해산이었다. 수많은 군인들이 군대 해산 조치에 반대하여 의병 투쟁에 참가하였다. 의병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고 참여 계층도 점차 다양해갔다. 이들은 망해가는 나라를 지키려는 최후의 군대였다고 할 수 있다.
1908년 5월 13도 의병연합부대의 서울 진공 시도, ‘태백산의 나는 호랑이’ 신돌석의 활약, 김수민, 홍범도 등 평민 의병장의 활약도 눈부셨다. 1909년 의병들의 끈질긴 저항을 누르고자 일본은 의병 투쟁이 활발한 호남 지방에서 무자비한 탄압을 거행하였다. 의병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후일을 기약하며 만주, 연해주 지방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독립 운동의 씨앗을 마련하였다.
2) 의병전쟁의 불씨를 지피다. 군대 강제 해산에 대한 시위대의 항쟁
1907년 7월 고종이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강제로 퇴위되고 이른바 ‘정미조약’이 강제되었다.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대해 통감의 지도’를 받고 법령 제정, 중요한 행정 처분은 통감의 승인을 받으며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굴욕적인 조항이었다. 나아가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하게 되어 있었다. 이른바 일본인들이 차관을 차지하여 실권을 장악하는 ‘차관정치’였다. 사실상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와 더불어 극비에 붙인 것이 ‘부수각서(附隨覺書)’였는데, 이것이 바로 사법권 장악 및 군대 해산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한국군은 허약할 대로 허약해져 시위대 2개 연대, 지방의 8개 진위대 등 만 명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일본은 한국군의 저항에 대비하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무장해제를 준비하였다. 일본 본국의 1개 여단을 급파하여, 1개 사단, 1개 여단으로 증강하고 총기 6만 정을 서울로 급송하였다.
이들이 7월 31일 서울에 도착하자 그날 밤 해산 조칙을 반포하였다. 이와 더불어 일본군을 서울 전역에 배치하고 저항하면 가차없이 무력으로 진압하도록 하였다. 다음 날인 8월 1일 오전 7시, 일본군 사령관은 대대장 이상의 장교들을 자신의 사저로 불러 ‘군대해산 조칙’을 통지했다. 그리고 무장해제한 후 오전 10시까지 훈련원에 모이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군인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일부 군인만 와서 무장한 일본군의 경계 속에서 퍼붓는 소나기를 맡으며 치욕스런 군대해산식을 거행하였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이었던 박승환(朴昇煥, 1869.9.7~1907.8.1)은 해산조칙을 들은 후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제2연대 1대대 부위 오의선, 기타 장병들도 자결하여 그 뒤를 따랐다. 박승환의 순국사실이 전해지자 군인들의 분노는 폭발하였다.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무기를 들고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오전 8시를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제2연대 제1대대 장병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이들은 숭례문 근방에서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숭례문 위에 진지를 마련하고 기관총을 설치하였다. 러일전쟁 당시 19명을 사살하여 유명했던 가지하라(梶原)는 한국군에 사살되었다. 이들은 약 4시간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화력 열세와 탄환 부족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일본군은 가지하라 대위를 비롯하여 4명의 전사자,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은 한국군을 수색하며 일반인이나 무기가 없는 군인을 학살하였다. 한국군은 100여 명이 전사하였다.
중앙 시위대의 저항은 지방 진위대로 파급되어, 원주 진위대, 강화 분견대 장병 등의 반일 무장 투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대한제국 군인의 저항은 의병 투쟁을 전국적인 의병 전쟁으로까지 확대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이후 독립군으로 계승되어 무장 독립 전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3) 박승환의 군대 해산에 대한 기록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송상도의 『기려수필』, 황현의 『매천야록』, 정교의 『대한계년사』 등 당시 역사서에서는 빠짐없이 당시의 박승환의 죽음과 시위대의 항쟁에 대해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책들의 저자와 내용에 대해서는 디지털 서고의 다른 코너에서 설명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욱 생생한 자료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 소개하는 자료를 읽고 해당 부분을 찾아서 보기를 권한다. 한국군의 치열한 저항은 당시 사람들의 분노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신민회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4일자에는 생생한 분노가 잘 드러나 있다. 『대한매일신보』는 국한문 신문이며 요즘과 다른 세로쓰기이다. 그리고 문장이나 글자도 다소 생소할 것이다. 눈으로 읽기보다는 소리 내어 읽어보면 그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이 신문은 국립중앙도서관의 전자저널에서 이용가능하다. 그래도 이왕이면 신문자료실을 들려 다른 날의 기사, 다른 신문들도 보았으면 한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4일자 「한병해산(韓兵解散)」을 보자. 그날 1면 논설에 실려 있다. 요즘으로 하면 ‘사설’에 해당한다.
훈련원에서 한병을 해산하고자 무장을 해제한 병졸을 소집하였으니 세계 어떤 군인이던지 이런 상황에 무장해제를 당함은 자기에게 가장 심한 굴욕이라. 무장을 소지한 한국 병사들이 이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 서소문 내에 있는 병영에서 이 칙령을 들은 바, 그 대대장이 즉 자결한지라···최초에는 포성이 돌연 일어나더니 일병이 무장 및 군력을 점차 증가한 후에 속사포성이 연발한지라···한병이 무장이 다 떨어지도록 오랫동안 싸움 후에 일본인의 탄환과 칼날에 쓰러져 죽으니 피가 땅에 넘쳐 흘렀다.···인명을 이처럼 크게 손실하는 데 직접 관계한 부당한 권고를 강경 논책하며 겸하여 이 모든 사태를 중심으로 한탄하거니와 동시에 진실로 인정해야 할 것은 한국인이 마땅히 행한 이번 방어가 세계 언론에서 흔히 말하던 한국인이 겁나서 태만한 것이라 한 것이 이치에 맞지 않은 말임을 일본인과 세계인 앞에 보여준 것이다.
같은 날 4면 5단에 실린 기사를 하나 더 소개한다. 제목은 “여학생의 의거(女徒義擧)”이다.
제중원에서 치료중인 부상당한 한국 병정을 남녀 간호원만이 아니라 여학생마저도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도 있는데 우리는 비록 여자이나 의로움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며 일제히 제중원에 가서 부상 장병을 열심히 간호하였고, 또한 전투 당일에 영어일어 모두 능통한 한 여성은 “우리 동포를 우리가 구하지 않으면 누가 하리오”라며 직접 사방을 돌며 부상자를 병원으로 메고 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