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王安石)과 사마광(司馬光)
우리들에게
판관 포청천으로 유명한 송나라의 포증(包拯)이,
모란이 피는 어느 봄날,
평소에 무척이나 엄격했던 그도,
봄향기에 취해
"술이나 한잔하자" 라며,
파격적으로 그보다 나이가 20살이나
아래인 사마광과 왕안석 외
여러 부하들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마광과 왕안석은
술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먼저 포증이 술을 한잔 한후 직접 술잔을 돌렸는데,
사마광은 엄격한 상사의 권유를 이기지 못해 술잔을 받아 마셨습니다.
이어 왕안석의 차례가 되어 포증이 술을 따라주려 하자,
왕안석이 말하기를,
"저는 술을 못합니다.
그래서 술잔을 받지 않겠습니다"
라며 거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분위기가 얼어붙었고,
주변 동료들의 재촉과 상관의 거듭된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자신의 뜻을 관찰하여
술잔을 받지 않했습니다.
비록 술을 하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술을 받아 마신 ‘사마광’은,
그 유명한 "자치통감"이란 역사책을 저술하여 이름을 만세에 떨쳤다.
그러나 술을 마시지 않은 ‘왕안석’은,
북송 최고의 개혁론자로서,
관아의 물자조달 방식을 바꾼 균수법이나,
농촌의 대출업을 개혁한 청묘법 등,
그의 너무나 좋은 친서민 정책들은,
줄줄히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데
많은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바로 위 상사인 포청천의 마음도 사지 못했던 그의 그릇크기 때문에,
그의 모든 정책들이 실패하고 말았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술을 하지 못한다고,
술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의 성격은,
친구인 사마광과 중도성향인 소동파와, 그리고 그와 함께 개혁에 동참했던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려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과 정책이 있더라도,
이를 다루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확실히 증명해주는,
'왕안석의 술이야기’ 입니다.
ㅡㅡㅡ
왕안석(신법)과 사마광(구법)의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바. 누가 우위에 섰다고 할수 있을까. 주자학시대는 사마광이 인정받지만, 근현세관점에선 왕안석의 신법이 훨씬 대중을 위한 개혁이기에 왕안석이 평가되지.
그냥, 척~봐서 귀에 익은 이름도 왕안석이 앞서는데,....
사마광의 일화 하나.
뒷뜰에서 함께 놀던 친구가 큰 물항아리에 빠졌다.
어떤 아이는 울고,어떤아이는 어른을 찾아 나섰고....
사마광은 큰 돌을 던져 물항아리를 깨뜨렸다.
♡♤♧
사마광
https://naver.me/FlxjuG1r
사마광
司馬光
사마광
출생 - 사망 1019년 ~ 1086년
시대 : 중국 북송시대
저서 : 자치통감(資治通鑑)
중국 북송시대의 역사가이자 정치가이다. 사마광은 섬주(陝州)의 하현(夏縣) 출신인 아버지 사마지(司馬池)가 광산(光山) — 지금의 하남성 — 에 근무할 때에 관사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천장각(天章閣) 대제(待制)를 지냈다. 사마광의 자(字)는 군실(君實)이라고 하고 속수(涑水)선생으로 불리었으며, 죽은 다음에는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다.
20세에 진사(進士) 갑과에 합격한 뒤에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35세 때에는 뒤에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는 강서(江西) 사람 왕안석과 같이 군목사판관(群牧使判官)을 지낸 일이 있다. 그 뒤로도 개봉부 추관, 지제고를 거쳤는 데 이른바 복왕(福王)논쟁을 거치면서 파직되었다. 그 후에도 보한림학사나 어사중승의 관직을 담당하였으나, 신종(神宗)이 개혁 정치를 진행함에 따라서 왕안석이 권력을 잡았고 사마광은 실세(失勢)하였다.
원래 사마광은 영종(英宗) 치평 2년(1065)에 영종으로부터 역대의 역사를 편년체로 편찬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국(戰國)시대와 진(秦)나라 시기까지를 8권으로 편찬하여 『통지(通志)』라고 제목을 붙여서 헌상(獻上)하였는데, 영종 황제는 이것을 읽고 감동한 나머지 『자치통감(資治通鑑)』이라는 책의 이름을 직접 지어 주었다.
왕안석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1625&cid=59014&categoryId=59014
과감한 개혁을 시도한 중국 송나라의 재상
왕안석
王安石
출생 - 사망 1021.12.18. ~ 1086.5.21.
조선 세종은 왕안석을 가리켜 “재주는 많지만, 소인이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정조는 주자학의 공식대로 왕안석을 비판하면서도 “그가 시행한 신법이 어찌 모두 잘못이었겠는가? 좋은 제도도 많은 것을 훗날 모두 폐지해 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다”라는 언급을 덧붙였다. 왕안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유교 문화권에서 살던 전근대 동아시아인의 난제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1) 빛과 어둠의 정치사상
유교는 춘추전국시대에 성립된 후 한왕조에 이르러 국교가 되었다. 이후 도교와 불교의 도전을 받으면서도 중국의 기본 통치이념의 지위를 지켜왔으며, 북송 왕조에 이르러서는 정치, 사회, 문화 모든 부문을 규율하는 규범이 되기에 이른다.
이미지 1
그런데 공식적으로는 진시황 시대 이후 퇴출당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유교의 뒤에 숨어 통치이념으로서 암암리에 작동했던 사상이 법가였다.
두 사상 모두 올바른 통치와 통치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통하기도 했으나, 유가와 법가는 인간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그에 따라 어떤 방법을 정치의 기본 방식으로 보느냐에 따라 반대가 되기도 했다.
유가는 사람의 마음에 선을 추구하는 부분과 악을 추구하는 부분이 모두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중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보다 근본적이다. 그러나 욕망 때문에 그런 마음은 쉽게 힘을 쓰지 못하고 희미해져 있다.
따라서 선의 마음을 확충하고 악의 마음을 억눌러야 하는데, 이것에 능통한 사람이 군자이고 능통하지 못한 사람이 소인이다. 통치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므로 군자에게 전적으로 맡겨야 하며, 군자는 나라를 다스릴 때 소인들을 교화하여 선하게 바꾸는 일을 우선시해야 한다.
반면 법가가 보기에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에게 희미한 마음이라면 그것을 근본이라 보기도 어렵고, 아예 무시해 버리는 쪽이 편리하다. 따라서 법가는 사람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악하다 보았으며, 정치의 기본은 교화가 아니라 당근과 채찍을 교묘하게 쓰는 법률 제도의 마련과 시행이라고 여겼다.
이런 법가의 사상이 더 현실적일지는 모르지만, 인간을 근본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사상이 널리 공감을 얻기는 어려운 법이다.
또한, 지배자나 피지배자나 “결국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동물”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전근대적 지배체제를 항상 불안하게 만들 소지가 있었다. 그래서 법가는 수천 년 동안 유가의 그늘에 가려 있었으나, 때때로 전면에 떠오를 때도 있었다.
통치기반을 다진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람을 감시, 숙청하고 공안정국을 이끌었던 군주들, 그리고 난세를 극복하려면 도덕 운운보다 제도개혁이 시급하다고 주장한 학자 관료들이 그 주역이었다. 왕안석은 그런 학자 관료의 대표라고 볼 수 있다.
2) 평화 속의 위험을 느끼며 성장하다
960년 수립된 송왕조는 제4대 인종(仁宗)의 치세(1022~1063)에 전성기에 달한 것처럼 보였다. 40년 동안 큰 전란도 천재지변도 없는 속에 경제는 부흥했고, 문화는 융성했다. 그래서 이 시기를 당태종의 ‘정관의 치’에 맞먹는 ‘경력(인종의 연호)의 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안팎으로 불안요소를 간직한 번영이었다. 앞서 1004년에 요나라(거란)가 침공하여 ‘전연의 맹약’을 맺고 매년 거액을 상납하는 조건으로 상당히 치욕적인 평화를 얻은 채였고, 다시 1044년에 서하가 쳐들어와 역시 매년 상납하기로 정하여 무마했다.
이러니 “온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로서의 체면뿐만 아니라매년 들어가는 거액의 비용도 문제였고, 항상 국경 너머에 불안 요소가 도사리고 있음도 문제였다.
국내적으로도 평화를 틈타 호족들의 세력이 점점 늘어나, 국가의 기반이 되는 소규모 자영농이 몰락해 가고 있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위험’을 의식한 사람도 점점 늘어서 인종 후반기에는 여러 가지 개혁안이 등장하지만, 대부분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고 있었다.
인종 시대 개막과 거의 비슷한 때(1021) 태어난 왕안석은 강서성 무주 임천현 출신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었는데, 할아버지 대부터 관직에 올라 아버지는 강녕부 부지사까지 지냈다.
말하자면 명문가는 아니었던 셈인데, 그나마 왕안석이 19세 때 아버지가 급사하면서 한동안 가난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학문을 좋아했던 왕안석은 “하인이나 다름없는 행색”을 하고서 스승도 두지 못한 채 꾸준히 책을 읽었다.
스승이 없어서인지 공부의 범위가 넓고 이해 방식이 남달랐다고 한다. 그는 공부는 즐거워도 벼슬살이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지만, 어머니와 오누이들을 먹여 살리려면 그가 녹봉을 받는 것 말고 방법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23세에 과거 급제를 하여 벼슬길에 나선다.
당시는 되도록 중앙에서 근무해야 출셋길이 트였지만, 왕안석은 계속 지방관직을 희망했다. 그래서 양주 지사의 보좌관을 시작으로 16년 동안 은현, 서주, 상주, 파양을 전전하며 지방행정을 맡아보았다.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미래의 대개혁가 왕안석을 만드는 바탕이 되었는데, 상대적으로 권모술수의 수라장에서 벗어난 한가함을 이용해 경전 공부를 더욱 심화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지방민들의 실생활을 오래 접하며 무엇이 그들에게 절실한가를 숙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는 이 두 가지에서 모두 좋은 평판을 얻어, 결과적으로는 중앙에서 권모술수에 몰두한 사람들보다 더 성공할 수 있었다. 즉 30대 후반의 그는 “경전 해석에서 당대 으뜸”이라는 명성을 누렸으며 지방관으로서도 두루 선정을 베풀었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그는 1058년에 중앙관직으로 올라가면서 인종에게 “만언서”를 올려 개혁에 대한 자신의 포부를 밝혔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그 후 인종이 죽고 영종이 즉위하며, 왕안석의 어머니가 죽음으로써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잠깐의 공백기가 있었다.
그러다가 1067년, 영종이 일찍 죽음에 따라 그의 맏아들 조욱(趙頊)이 20세의 나이로 즉위함으로써(송 신종), 마침내 ‘왕안석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3) 신법의 시대
왕안석은 1068년에 신종과 처음 만남을 가졌다. 이것은 신종의 태자 시절 사부였던 한유의 주선 덕분인데, 한유는 왕안석의 사돈의 사돈이었으므로 어느 정도는 정실이 개입된 만남이었다.
왕안석에 대한 신종의 첫인상은 의외로 “너무 원칙에만 치우친 이상주의자”라는 것이었고, 서하의 간섭을 물리치는 문제와 재정 압박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고 싶었던 신종으로서는 다소 실망이었다. 그래도 그는 왕안석을 참지정사에 기용했는데, 그 이후 이른바 “왕안석의 신법”이 잇달아 제정되기 시작한다.
1069년의 균수법(均輸法)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의 운송을 발운사라는 관청에 통제하도록 하여, 그동안 원거리에서 공물을 바칠 때 신선도를 유지할 수 없어 사실상 중간상인들이 대납하고 폭리를 취해 온 것을 차단했다.
같은 해의 청묘법(靑苗法)은 춘궁기에 굶주린 소농이 높은 이자로 대지주에게 식량과 종자를 빌리고, 그 빚 때문에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국가가 소농에게 식량과 자금을 빌려주게 했다.
1070년의 모역법(募役法)은 지방행정 업무를 민간에서 돕는 직역을 임의로 부과하고 그 부담이 파산할 정도로 과했던 상황을 개선하여 모든 농가가 재산 등급별로 면역전을 내도록 했다.
같은 해 말의 보갑법(保甲法)은 향촌을 열 집씩 묶어 행정의 효율성과 향촌방위의 강화를 도모했고, 1072년의 보마법(保馬法)은 향촌별로 군마를 할당하여 사육하게 했다.
1072년의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은 토지의 소유에 따라 세금을 차등 있게 징수하는 법이었으며, 대지주에게 타격을 주었다. 또 같은 해의 시역법(市易法)은 중소상인이 부족한 자금을 대상인에게 높은 이자로 빌리던 것을 국가에게 낮은 이자로 빌리게 했다.
이 밖에 1070년에서 1071년까지 과거제도를 개혁해 보다 실무 위주의 임용시험이 되도록 했으며, 1070년의 창법(倉法)은 서리에게도 녹봉을 주고 정식 관리로 승진할 기회를 주되 부정부패는 엄히 단속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신법들은 국가의 경제 개입을 늘리고, 재정 수입과 규모를 늘리며, 대지주와 대상인에 맞서 소농과 소상인을 보호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4) 개혁에는 신경 쓸 것이 없다?
이런 개혁은 ‘당연히도’ 처음부터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반대론은 신법의 역효과나 시행상의 어려움 등을 지적하는 것에서부터 왕안석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 도참설을 들먹이는 “신법은 불길하며 국가에 변고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 등까지 다양했다.
그래도 신법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볼 수 있다면, 그들이 주로 화북 지방의 명문대가 출신으로서 대토지 소유자이거나 대규모 상인과 얽혀 있었다는 것, 따라서 대지주와 대상을 억제하는 신법에 반대할 까닭이 충분했다는 것을 우선 들 수 있다.
또한, “선대 임금이 지으신 법(조종지법)을 멋대로 고치는 것은 불효”, “정치는 법제를 제정하기보다 풍속을 교화하는 일이 앞서야 마땅” 등 유교적 정치론에 따라 왕안석과 그의 개혁을 “법가적”이라고 비판하는 점에서 이념적 통일성이 있었다.
사실 왕안석을 법가라고는 볼 수 없다. 그는 [삼경신의]를 짓고 맹자를 존숭하여 그를 공자 다음의 반열에 올렸으며(대체로 맹자가 토지개혁 등 과감한 개혁을 주장했기 때문인 듯하지만), 원론적이나마 유가 이외의 학문을 탄압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법가인 상앙을 매우 존경했으며, “위기 상황에 언제 백성의 마음을 쓰다듬어 교화시킬 여유가 있는가? 제대로 된 법제가 먼저다”는 주장을 강조했다.
그는 이른바 “삼부족론(三不足論)”을 주장했다고 한다. 개혁을 할 때 “천변(天變)도 신경 쓸 것 없고, 언론(言論)도 신경 쓸 것 없고, 조종지법도 신경 쓸 것 없다”는 것이다. 유교 정치사상의 기본을 깡그리 부정했다는 말이나 다름없는데, 사실 이는 왕안석의 말은 아니며 나중에 그의 말이라고 치부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왕안석은 가뭄이 든 것이 우리 정치의 잘못을 경고하는 하늘의 소리가 아니냐는 신종의 우려에 “요순 시대에도 가뭄은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후 내내 풍년이었는데 잠깐 흉년이 들었다고 고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또 “조종지법이 중요하다지만 새로운 법을 제정하지 않은 황제가 하나라도 있느냐? 조종지법보다 더 근본적인 법, [주례] 등에 나와 있는 ‘선왕의 법’을 존중해야 한다”라고도 밝혔다. 조정 내외의 반대론에 대해서도 단 한 번도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지 않고, 무시와 숙청으로 대응했다.
왕안석이 독불장군 내지는 고집불통이었다는 일화는 숱하게 남아 있다. 가령 하급관리 시절 사마광과 함께 ‘포청천’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포증의 초대를 받아 술자리에 참석했는데, 왕안석은 “관리란 사석에서도 몸가짐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포증이 권하는 술잔을 받지 않았다.
그날 밤 내내 포증은 ‘딱 한 잔’을 권했으나 왕안석은 끝내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고 밤을 새웠고, 사마광만이 대취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의사가 “자단산을 드셔야만 병이 낫습니다”고 하자 “내 목숨은 하늘에 달렸는데 그까짓 자단산이 뭐란 말이냐?”면서 끝내 들지 않았다.
또 그는 도무지 세수도 목욕도 하지 않아서 얼굴빛이 거무튀튀했는데, 보다 못 한 제자가 쥐엄나무로 닦으시라고 하자 “내 얼굴빛이 검으면 검은 것이지 쥐엄나무가 다 뭐냐”고 코웃음을 쳤다고 한다.
물론 이는 나중에 그를 비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화일 수도 있지만, 그가 유난히 타협할 줄 모르며 과격하게 사람을 대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누가 신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당신이 무식하니까 그따위 이야기를 하는 거다. 공부 좀 더 해 가지고 와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러니까 자연히 그에게 개인적 원한과 울분을 품는 사람이 늘었고, 신법 반대론은 더욱 치열해졌다.
사실 화북 지방의 명문 출신으로 강남의 비명문인 왕안석과 대립하는 사회경제적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왕안석이 좀 더 겸허하고 포용적인 자세로 대했다면 신법 반대론자들의 반발도 느슨해졌을지 모른다.
그의 숙적 사마광을 비롯해서 한기, 구양수, 소식 등은 한때 왕안석의 선배나 친구로서 개혁의 필요성에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식한 소리 마라!”는 식의 왕안석의 태도는 그들이 신법 반대를 위해 든든히 결속하도록 만들었다. 이들 “구법당”의 공세는 마침내 1074년에 결실을 보았다.
정협이 기근으로 고향을 떠나 수도에서 유랑생활을 하는 백성의 참상을 묘사한 [유민도]라는 그림을 바치자, 신종은 당장 뭐라고 하지는 않았으나 환멸의 태도가 역력했다.
그동안 여러 원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안석을 지지해 왔는데, 이처럼 백성들의 삶이 척박해졌다면 신법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하여 보갑법과 방전균세법이 중지되고, 왕안석은 며칠 후 사임했다.
그리고 1년 뒤에 잠시 복직했지만 곧 다시 사임했는데, 증포나 여혜경 등 자신의 심복이었던 ‘신법당’의 배척을 받은 충격과 사랑하던 아들 왕방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이 컸다. 그는 이후 다시는 중앙관직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강녕부(지금의 난징) 지사를 지내다가 은퇴했다.
5) 의도하지 않았던 과오를 남기다
말년의 왕안석은 강녕부의 집에서 은거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번뇌를 잊기 위함이었는지 불교에 심취했고, [자설]이라는 책을 짓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65세가 되던 1085년에 신종이 죽고, 어린 철종을 선인태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조정은 구법당 일색으로 바뀐다.
그 영수였던 사마광은 왕안석이 세운 제도는 뭐든지 폐지하고 뒤엎었다. 세상사에 달관한 듯했던 왕안석이었으나 평생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상황 앞에서는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1년 뒤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왕안석의 시대는 가는가 했지만, 7년 뒤(1093)에는 철종이 친정을 시작하며 신법당을 기용, 이번에는 구법당이 조정에서 쓸려나갔다.
그리고 다시 7년 뒤(1100)에 휘종이 철종의 뒤를 이으며 한동안 다시 구법당이 고개를 들었다가, 얼마 후 신법당이 권력을 강화하고 구법당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 언론의 기를 꺾고 학술을 통제하는 등 폭압 정치를 추진했다.
이미 신법의 의의는 간곳없이 노골적인 당파싸움만이 남아 송왕조의 기틀을 흔들자, 그 틈에 북방에서 일어난 금나라의 침공으로 북송은 1126년에 멸망하고 만다.
이어서 수립된 남송에서는 북송의 멸망 책임이 왕안석에게 있다는 주장이 주희 등의 성리학파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이후 왕안석의 평가는 다소 들쑥날쑥했으나 대체로 “간신”, “소인”으로 굳어지게 된다.
왕안석은 위대한 행정개혁가이면서 [주례]를 비롯한 유교경전을 재해석해 “왕학(王學)”이라 불리는 학파를 창시할 만큼 학문의 조예가 깊었고, 또한 “당송팔대가”의 하나로 꼽힐 만큼 뛰어난 문장력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반대파의 입장도 배려하고 쓴소리도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없었으며, 뺄셈의 정치를 거듭한 끝에 한때의 동료들을 적으로 만들고 끝내 심복들에게서도 배신당했다. 그것은 그가 정말 재능에 어울리는 덕을 갖추지 못한 소인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급진적인 개혁가에게는 으레 따르기 마련인 과단성과, 그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범인들의 시기와 속 좁은 원망이 문제였을까?
아무튼 그가 결국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남김으로써, 송나라 이후 개혁가들은 변법을 시도할 때 “또 하나의 왕안석”이라는 비난을 피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그리고 개혁의 논의가 진보와 보수 사이의 건전한 정책 대결이 되지 못하고, 오직 권력만을 탐하는 피비린내나는 당파싸움으로 이어지는 전례를 남겼다. 이 두 가지야말로 왕안석의, 스스로는 의도하지 않은 과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발행일2011. 04. 06.
왕안석과 신법
https://m.blog.naver.com/yeesang_/130145738496
사마광의 격물치지론
사마광(司馬光, 1019~1086)에 따르면, 격은 막다[扞], 방어하다(御)는 뜻이다. 외물을 막아낼 수 있어야 최고의 도를 알 수 있다.(『文集』권71, 「致知在格物論」) 사마광은, 사회적 모든 일탈 행위나 죄악적 행동은 모두 ‘외물의 유혹과 압박’에 말미암아 조성되고, 일체의 비행은 물욕에 유혹되어 비롯된 것이라고 보고, 진정한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물욕에의 탐닉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학』의, 유학적 군자상을 지향한 체계적인 공부 과정의 단초인 격물을 ‘물욕의 제거’로 풀이하였다. 정현이나 사마광의 격물치지론은 기본적으로 정치윤리적인 관점에 서 있다.
<북송 신파 왕안석과 구파 사마광>
북송은 거란족 요나라에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보내기로 하는 '전연의 맹'을 맺고 평화를 얻었다. 북송은 탕구트족 서하(西夏)에 매년 비단 13만 필, 은 5만 냥, 차 2만 근을 조공으로 바치기로 하는 '경력의 화약'을 맺고 평화를 얻었다.
왕안석은 북송의 정치가로 문장가로 신당파를 구축하여 균수법 청묘법 시역법 모역법 보갑법 보마법 등 신법(新法)을 제정하여 개혁을 추진했다. 신법에 백성과 농민들은 찬성하고 권력자 대상인 대지주 등은 반대했다
사마광은 북송의 정치가로 '자치통감'의 저자이자 구당파의 당수이다. 신당파의 당수인 왕안석을 추방하고 신법을 폐지했다. 구당파의 사상을 계승한 주희가 성리학을 집대성하며 사마광을 '군자 중의 군자'로 추앙했다
여진족이 금나라를 건국하고 거란족의 요나라를 정복하고 다시 북송을 공격했다 북송은 여진족 금나라에 매년 비단과 은을 제공키로 하여 국고가 바닥났다 북송은 신당파와 구당파의 당쟁으로 국력이 급격하게 쇠퇴했다
북송의 휘종과 흠종이 여진족 금나라의 외교에서 실패하고 금나라 군대에 의해 포로가 되고 카이펑이 점령되자 북송이 멸망했다 휘종의 아들이자 흠종의 이복동생인 조구가 남쪽으로 도망가서 임안을 수도로 남송을 건국했다
카이펑은 춘추시대 정나라 전국시대 위나라 한나라 북위 동위 수나라 당나라 후량 후진 후한 후주 북송 등의 수도였다 명나라 말기 이자성의 반란 당시 황하의 폭파하여 도시가 황폐화 되었다
임안(臨安)은 과거 오월국과 남송의 수도였고 현재의 항저우시 린안구를 말한다 항저우는 저장성의 성도이자 중국의 7대 고도(故都) 중 하나이다 수나라 때 항저우와 베이징을 연결하는 운하를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