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이 기워서 물려주신 옷
누구에게나 결코 물리거나 추해 보이지 않는 물건이 있는 법이다. 나는 닳아 해지고 빛이 바랜 고동색 승복 한 벌을 가지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승복보다 나는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도반들은 우스갯소리로 그것을 “서른일곱 번이나 윤회하며 고행의 삶을 거친 승복”이라 불렀지만, 나는 그 옷이 낡았다거나 추하다고 여긴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바오 크억 사원에서 지내며 불교 대학 공부를 하던 시절 그 옷을 입고 지내며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 옷은 스승님께서 깨달음의 삶, 즉 승려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내게 주신 것이었다. 이제는 너무 닳아 해진 바람에 실제로는 더 이상 입을 수 없지만, 여전히 사미승 시절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중략)
나의 수계식은 이튿날 오전 네 시에 있을 예정이었다. 그날 밤 (중략) 나는 당신의 방에서 깜박거리는 촛불을 곁에 둔 채 방석에 앉아 계신 스승님을 찾아뵈었다.
스승님 곁에 놓여 있는 탁자 위에는 오래된 경전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스승님께서는 나에게 물려줄 당신의 낡은 고동색 승복의 해진 곳을 꼼꼼하게 깁고 계셨다. 연세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승님께서는 여전히 정정하신 데다가 눈까지 밝으셨다. 만 사제(師弟)와 나는 입구에서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천히 바느질을 하고 계신 스승님의 모습은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보살을 보는 듯했다.
우리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스승님께서 쳐다보셨다. 우리를 보시자 스승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고 나서 다시 숙이시고는 계속해서 바느질을 하셨다. 만 사제가 말했다.
“스승님, 이제 그만 쉬십시오. 벌써 꽤 늦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우리를 쳐다보시지 않고 그대로 바느질을 하면서 말씀하셨다.
“내일 아침 꾸언(Quan)이 이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바느질을 마저 마치련다.”
(중략)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스승님, 뚜 보살님에게 부탁해서 바느질을 마치도록 하시지요.”
“아니다. 내 손으로 직접 기워서 네게 주고 싶다.”
스승님께서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그리고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우리는 감히 더 이상 한마디도 못 드리고 다소곳이 합장을 한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스승님께서는 바늘에서 눈을 떼지 않으신 채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적에 단지 승복을 기운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었던 제자의 이야기를 경전 속에서 본 적이 있느냐?” 스승님께서는 말씀을 이어가셨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마. 그 제자는 찢어진 승복을 고치는 일에서 기쁨과 평온을 얻는 적이 많았단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것뿐만 아니라 도반의 것도 고쳐주곤했었지. 한땀 한땀 뜰 때마다 그는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힘을 갖추리라는 착한 마음을 내었단다. 어느 날 바느질을 하다가 그는 심오하고도 훌륭한 가르침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지. 그리고 여섯 땀을 뜨고 나서 육신통(六神通)을 얻게 되었단다.”
나는 고개를 돌려 공경심이 가득한 눈으로 스승님을 바라보았다. 스승님께서는 육신통(六神通)을 얻지는 못하셨다해도 우리가 도달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심오한 경지에 이르셨던 것이 분명하다.
이윽고 바느질이 끝났다. 스승님께서는 가까이 오라고 내게 손짓을 하셨다. 그리고는 한번 입어보라고 하셨다. 그 옷은 내게 조금 컸지만, 그 때문에 눈물이 날 만큼 행복감이 밀려왔다. 나는 감동했다. 수행자의 삶을 살면서 가장 신성한 사랑을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잔잔하면서도 한량없는 그 순수한 사랑은 오랜 세월에 걸쳐 나의 수행자로서의 삶에 힘과 기쁨을 주었다.
스승님께서는 나에게 옷을 건네주셨다. 나는 옷을 받아들면서 그 속에는 말로 다할 수 없을만큼의 커다란 격려와 온화하면서도 사려 깊은 사랑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해주신 스승님의 목소리는 내가 그때까지 들어본 말 중에서 아마도 가장 부드럽고 상냥한 것이었을 것이다.
“내일 네가 이 옷을 입게 하려고 내 손으로 고쳤단다. 내 아들아!”
꾸밈이라고는 전혀 없는 수수한 말씀이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듣고 나는 무척 감동했다. 그때 내 몸은 부처님 앞에 꿇어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입은 일체 중생을 구하겠다는 큰 서원을 읊조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내 마음은 진정한 보살행의 삶을 살아가겠노라는 심대한 서원을 세우고 있었다. 땀 만 사제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랑과 존경심이 가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다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우주가 향기로운 꽃으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그날 이래로 지금까지 나는 새 승복을 여러 벌 얻었다. 새 고동색 승복은 한동안 눈길을 끌곤 했지만 나중엔 잊혀져버렸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주신 낡고 닳아해진 그 고동색 옷은 언제까지고 내 마음속에 신성한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옛날에 나는 그 옷을 입을 때마다 스승님을 떠올리고는 했다. 이제 그 옷은 너무 닳아 해진 바람에 입을 수가 없지만, 때때로 아름다웠던 옛날 기억을 되살려 보고자 여전히 그 옷을 간직하고 있다.
-틱낫한 지음, 진현종 옮김, 김담 그림, <<내 스승의 옷자락 My Master’s Robe>>(청아출판사, 2003).
福祉月初弦有盈無闕
복덕의 달은 초승달이나 상현달이니
차기만 하고 이그러짐이 없고
移孝爲忠得其門而入
효를 옮겨 충으로 삼아
그 문을 얻어 들어가네.
緣慈悟脫于彼岸先登
부처님 자비(어머니 사랑)의 인연으로 해탈을 하니
피안에 먼저 오르고,
恩波溪似帶其存者長
부처님 은혜(어머니의 은혜)의 물결 시내처럼 흘러
그 있음이 길도다.
-추아 뚜 히우 Chua Tu Hieu 자효사慈孝寺 일주문 주련(바깥쪽)
*
1847년 10월에 입적한 냑진 스님이 이곳 '양(Yang 楊)의 봄'이라는 동산(楊春嶺)에
양화당(養和堂)이라는 초막을 짓고 노모를 모시고 수행했다.
양화당의 화(和)는 중용의 희로애락미발 위지 中, 발이개중절 위지 和인 것 같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불성이다.
이후 효심이 깊었던 뜨득 황제가 '황명 자효사皇命 慈孝寺'라는 절 이름을 내렸다.
틱낫한 스님은 베트남 선불교 임제종 제42대 법손이고, 이 절의 제5대 조사가 되었다.
틱낫한 스님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었다.
그래서 <당신의 호주머니를 위한 장미( A rose for your pocket)>이라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나 부처님의 중생 사랑이 자慈이고
어머니의 은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효孝이다.
효(가정)를 군주(나라)에 대한 忠으로 옮기고,
자애를 바탕으로 깨달음의 언덕(양의 언덕)에 오르고
부처님 은혜의 물결이 시냇물(일주문 앞의 작은 시내)가 되어 오래 흐를 것이라고 하였다.
유교와 불교 사상이 융합되어 있다.
인각사로 하산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수행한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 <효도와 선행(孝善)>편을 실었다.
일연스님 탑비에도 중국의 진존숙을 본받아 효심이 강했음을 말했다.
보경사의 18세기 오암당 의민 스님도 유가에서 출가하였지만 속가의 부모에 대한 효도를 다했다.
부모은중경은 어머니의 은혜를 설파한 한국불교의 고전이다.
남인의 영수이고 정조의 총신이었던
번암 채제공 선생은 부모은중경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고,
정조대왕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새겨진 절이 용주사이다.
용주사에서 단원 김홍도의 삽화를 넣은 부모은중경이 간행되었다.
뚜 히우 절로 들어가는 도로가의 입구
어둠을 걷어낸 새해의 종소리
(전략) 피난길에서 처음 돌아온 사람들이 우리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양(Yang)의 봄’이라는 야산 가까이에 도착하고 보니 거의 보름 전에 몇 집이 이미 돌아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중략) 우리는 대여섯 날을 걸어오고 있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피곤에 절어 온몸이 쑤셔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이 가까워 오자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야산과 언덕을 따라 퍼져 있는 작은 마을들을 지나면서 공포와 침묵에서 비롯된 무거운 분위기를 느끼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흔적이 있어서 마음이 편해졌다.
“저기 절이 보인다!”
만 사제(師弟)가 기쁨에 겨워 큰 소리로 외쳤다. 키가 큰 소나무 그늘 아래로 절 지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치 먼 옛날의 친구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과도 같았다. 그 모습에 우리는 큰 감동을 받았다. 나는 뚜 보살님이 염려되었다. 보살님은 별일 없이 살아계실까? 소개(疏開) 명령을 받았을 때, 뚜 보살님은 남아서 절을 지키기로 결심했다.(중략)
절 마당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보살님의 안위를 걱정하던 내 마음은 사라져버렸다. 저 멀리 보살님이 빛이 바랜 갈색의 긴 승복을 입은 채 샘에서 물을 긷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만 사제가 보살님을 행해 소리쳤다. 보살님은 양동이를 내려놓고 이쪽을 바라다보았다. 보살님은 우리를 보자 곧장 달려왔다. 감정이 격앙되어 보살님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
절 지붕은 총탄에 맞아 여러 군데가 부서져 있었다. 절의 벽도 여기저기 총탄에 뚫려 구멍이 나 있었다. (중략) 우리가 절에 돌아온 날은 음력 섣달 27일이었다. (중략) 우리는 음력으로 새해, 즉 쥐띠 해를 축하하는 의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중략) 밤이 되자 전쟁과 죽음의 그림자가 다시 찾아왔다. 총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총탄이 우리 절 지붕 위로 날아다녔다. 우리는 문을 잠그고 방안에만 있었다. 조명탄 불빛이 벽 틈으로 보였다. 일련의 기관총 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나는 조사당(祖師堂)에서 만 사제와 함께 꺼질 듯 말 듯한 호롱불 곁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 죽음의 장면을 떠올리며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께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시간이 좀 지나자 밤은 조용해졌지만, 그것은 답답한 적막이었을 뿐이었다.
우리가 돌아온 날 이래로 만 사제는 범종을 친 적이 없었다. 뚜 보살님이 못 치게 했던 것이다. 보살님이 말하기를 어느 날 밤 계단을 올라 종이 있는 층계참으로 가서 종을 대여섯 번 쳤는데 그때 아래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달려 내려가 보니 대여섯 명의 프랑스 군인이 보였다. 총으로 보살님을 위협하며 다시는 종을 치지 말도록 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종소리가 적을 위한 암호로 생각했거나 종소리가 듣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중략)
평소 우리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침상에 앉아 범종 소리를 들으며 수식관(數息觀; 호흡을 세는 명상)을 하거나 칭명염불(稱名念佛-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부르며 불보살의 지혜와 공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른 아침이 되어도 더 이상 종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중략)
섣달 그믐날 밤, 우리 모두는 요사채 한가운데 있는 화롯불 둘레에 앉아 있었다. 뚜 보살은 설날 음식으로 엿을 고았다. 그리고, 화로 위에 솥을 올려 떡을 쪘다. 바깥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별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간간이 총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새해를 맞이해 미륵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자정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날 밤 절에는 뚜 보살님과 우리, 일곱 사람밖에 없었다.(중략)
스승님은
“악업의 씨앗을 심으면 어디로 가든 그 과보를 피할 수가 없게 되는 법이니라.”
고 하셨다. (중략) 피난 가지 않고 남아 있으면서도 별 탈 없이 지내는 가난한 가족들이 많은가 하면,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났지만 위험을 피할 수 없었던 부자 가족도 많았다. 뚜 보살님은
“지금 같은 때에는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요. 믿을 것이라곤 각자가 쌓은 공덕 뿐이라우. 재산이나 머리는 믿을 것이 못 되지요.”
어쩌면 가장 믿을 수 있는 갑옷은 자비심으로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평소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공덕이나 복덕은 각자가 짓는 것이다. 그것은 우연히 생기는 법이 없다. (중략)
자정과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의식을 올릴 준비를 했다. 향로에서 오르는 연기가 대웅전을 가득 채웠다. 나는 종각으로 가서 받침대를 딛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산과 숲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하늘에는 몇 개의 별들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눈에 불을 켜고 보았지만 어둠 속의 마을에는 불빛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문을 잠그고 뜬 눈으로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조상님께 인사를 드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땀 만 사제가 조용히 곁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새해 축하 의식을 올리는데 범종과 법고를 치면서 반야심경을 독송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 방 세게 맞은 것 같았다. 막 꿈에서 깨어난 듯했다. 맞아, 새해를 맞이하는데 반야 지혜의 종과 법고를 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매년 새해 축하 의식을 올릴 때면, 절에서는 언제나 종과 법고를 일곱 번 쳤다. 그 소리를 신호로 새해를 축하하는 불꽃놀이가 시작 되었다. 불꽃은 하늘을 밝히고 화약이 폭발하는 소리는 언덕과 산자락에 있는 여러 마을에 울려 퍼졌다. 올해는 감히 불꽃놀이를 하려고 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종과 법고도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바깥을 내다 보았다. 산과 언덕 그리고 여러 마을은 모두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이렇게 두려움이 가득한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새해를 제대로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평소대로 종과 법고를 쳐보지 않을래?”
내가 이렇게 묻자 만 사제는 움찔했다.
“프랑스 군인들이 총을 쏘아대면 어쩐다죠?”
나라고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해가 이렇게도 음울하게 막 시작되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용기가 되살아났다.
“걱정마, 그들도 오늘이 섣달 그믐밤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 그렇게 해보자 지금 분위기는 너무 무겁잖아. 이래서 새해가 오기나 하겠어? 사제, 어서 종과 북을 치자, 만일 그들이 온다면 내가 프랑스말을 아니까 설명을 하면 되겠지 뭐.”
땀 만 사제는 단호한 내 모습을 보고는 자신감이 생겨서 고루(鼓樓)에 올라가서 법고를 치기 시작했다.
댕.... 댕.... 은은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법고의 박자에 맞춰 점점 더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잇따라 들려오는 천둥이 울리는 것 같은 강렬한 북소리는 멋지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재촉했다. 일곱 번에 걸친 종과 북소리는 새해가 온 것을 축하하면서 어두운 밤하늘을 뒤흔들어 놓았다. 종소리와 함께 스님들의 조화로운 염불 소리와 끊임없이 목탁을 치는 소리가 대웅전에 울려 퍼졌다.
만 사제는 한 손을 내 어깨 위에 얹고는 어둠 속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형, 저기 보세요!”
마을 사람들이 새해가 시작된 것을 환영하고 있기라도 하듯 사방에서 등불이 어둠을 밝히며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문이 활짝 열린 듯했다. 언덕과 야산을 짓누르고 있던 황량한 느낌은 사라지고 한층 부드러운 모습을 되찾은 듯 보였다. 범종에서 나는 웅장하고도 은은한 소리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물리치고 어둠을 쫓아버렸다.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이들은 전쟁 중인 나라에 따뜻한 봄이 왔음을 느꼈을 것이다.
범종 소리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그 강렬한 소리는 따뜻한 마음과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퍼져나갔다. 사제와 나는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불단 앞에 꿇어앉은 채 승가와 함께 우리 민족과 조국을 위해 평화스럽고 기쁜 한 해가 되기를 간절하게 기도드렸다.
-틱낫한 지음, 진현종 옮김, 김담 그림, <<내 스승의 옷자락 My Master’s Robe>>(청아출판사, 2003).
명종 鳴鐘 종을 울림
원차종성초법계 願此鐘聲超法界 바라건대 이 종소리 법계를 뛰어넘어
철위유암실개문 鐵圍幽闇悉皆聞 철위산과 지옥의 모든 중생에게 들리고
문진청정증원통 聞塵淸淨證圓通 사바세계에 들려서 청정하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게 하고
일체중생성정각 一切衆生成正覺 일체 중생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소서!
(자효사 범종의 게송)
삼륜의 북 소리 항하사(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세계에 두루 퍼지고
백팔 종 소리 법계를 너머까지 울리네
어머니의 자식 사랑과 자식의 효도는 참된 불성을 여의지 않네
https://youtu.be/DRObW9noiVk?si=4eSEvOqzqrulcRh8
九陛錫之田似績祖此
황제 폐하가 하사한 전답(사찰 부지)은 조사들이 여기를 이어온 것 같고,
兜率天高京國同佛國
도솔천 큰 나라(자효사)는 부처님 나라와도 같네.
上方月出前溪肖後溪
절에 달이 뜨니 앞 시내는 뒤 시내를 닮았고,
白(百)巖歸其室爰及友朋
흰(백 개의) 바위가 그 방으로 돌아가니 이에 벗에게도 미치네.
(삼문의 안쪽)
*上方: 절
*주련의 시가 해석하기가 어렵다. 정확한 번역을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
*주련 상단의 常, 樂, 我, 靜(淨)은 해탈열반의 경계이고
無常, 苦, 無我, 染은 욕계중생의 실상이다.
1월 29일에 봉행된 틱낫한스님 탈상재 준비로 대웅보전이나 틱낫한 스님 모셔놓은 사당이
폐쇄되어 있어서 참배를 하지 못하고 온 것이 많이 아쉽다.
좌대에 베트남어로 "나무(南無) 본사(本師) 석가모니불(삼계를 윤회하는 중생에게 해탈의 길을 가르쳐주시는
근본 스승인 석가모니불께 귀의하나이다)"이라고 새겨놓았다.
삼문을 들어서자 나오는 반달 모양 연못에서 왼쪽으로 백색의 이 불상의 뒷면이 보였는데
긴장한 탓에 곧 잊어버리고 촬영을 해오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다.
나중에 다낭, 후에, 호이안 세 도시를 가족여행으로 다시 가고 싶다.
틱낫한 스님이 8~9세 무렵 불교 잡지의 표지에 실린 풀밭 위의 불상이 정말 평온하여
자신도 그러한 불상처럼 평온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고 하였다.
플럼빌리지나 뚜 히우 사의 노천 불상은 틱낫한 스님이 어릴 적에 본 그 불상을 재현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광효당
자효사 제5대 조사가 된 틱낫한 스님
국제 플럼빌리지 14개 수행공동체의 개창조
베트남 선불교 임제종 제42대 법손
2013년 범어사
2013년 백양사 서옹 스님이 틱낫한 스님께 붓글씨(원, 청풍잡지淸風匝地)를 선물하는 장면,
두 분은 같은 임제종 법손으로 반갑게
만났고 뜻을 같이 하셨다.
백양사 박물관에 보존된 틱낫한 스님 영문 붓글씨
"정토는 지금 외에 달리 없다!"
틱낫한 스님의 첫 제자 찬콩 비구니 스님
스님은 본래 생물학을 공부하였다.
포항 창포동 마장지 가운데에 있는 아포리즘.
틱낫한 스님의 <<정념의 기적(The Miracle of Mindfulness>>이 출전이다.
호흡을 알아차려서 몸과 마음이 일치가 된 상태에서 걸으며
나와 풍경을 알아차리면서 걸으면 즉시 행복과 기쁨을 되찾는다.
그것이 기적이다.
1960년대, 나는 사람들에게 정념 수행을 가르치기 위해 <<정념의 기적(The Miracle of Mindfulness>>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대념처경大念處經>>(마음챙김을 확립하는 수행 지침이 담긴 경전)을 참조하기 했지만, 이 책이 훨씬 간단하고 실천적이며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사회봉사청년학교School of Youth for Social Service의 봉사자들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봉사청년학교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베트남의 재건을 돕기 위해 만든 청년 학교이었습니다. 나는 청년들이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민중들을 돕는 봉사를 하면서 정념 수행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정념 수행이 매우 유용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념 상태를 유지하면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고 신선한 시각으로 봉사를 하면서, 정념 수행을 통해 어려운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기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봉사를 하는 내내 스트레스를 받고 정념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면 짜증과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되어 제대로 활동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정념의 기적>>은 이런 청년들을 돕기 위해 나온 책입니다.
집필 당시만 해도 나는 이 책이 세계에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책은 25개 언어로 번역되고 여러 번 재판되면서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고, 아직도 독자들로부터 감사의 편지가 쇄도하고 있습니다. 이 간단한 책을 통해 정념 수행을 배운 덕분에 일상생활과 일에서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틱낫한 지음, 김순미 옮김<<내 손 안에 부처의 손이 있네 :틱낫한 스님의 법화경 Peaceful Action, Open Heart Lessons from the Lotus Sutra>>, 173-174쪽.
https://youtu.be/qbulEzfSuZY?si=46r721a3UBak7YJg
노래 오고 감에 자유롭기
오고 감에 자유롭기
틱낫한
나는 여전히 오고 감에 자유로우니,
존재와 비존재는 문제가 되지 않네.
아이야! 느긋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오렴!
이지러지거나 차지도 않는 단지 하나의 달이니,
다만 하나의 달이 되렴.
바람은 여전히 여기에 있는 줄을 아느냐?
먼 데 비가 구름 곁에 이를 때,
햇살이 높은 곳에서 쏟아지지,
그러면 땅은 늘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지.
*반야(중관 中觀) 지혜를 표현한 시이다.
On January 29, more than 400 monastics from all Plum Village centers, alongside venerable monks and nuns of Hue and lay practitioners from over 30 countries gathered in Tu Hieu Root Temple to honor Thay.
1월 29일 국제 플럼빌리지 14개 수행공동체에서 온 400여 명의 수행자들과 베트남 후에의 스님들과 세계 30개 나라에서 재가 불자들이 틱낫한 스님을 기리기 위하여 뚜 히우 근본 사찰(慈孝 祖庭)에 모였다.
The Ceremony of Transformation to Ancestor in Vietnam on January 29th, 2024, marked the end of the International Plum Village Community's two-year formal mourning period.
베트남에서 2024년 1월 29일에 봉행된 틱낫한 스님 탈상재(脫喪齋)로 국제 플럼빌리지 수행공동체의 2년 간의 애도기간이 공식적으로 끝났다.
*탈상재脫喪齋: 49재 7회 100일 8회 1년(小祥) 9회 만2년(大祥) 10회 추천재(追薦齋-천도재)로 애도 의례인 상례는 끝나고 뚜 히우(慈孝) 사의 제5대 조사로, 플럼빌리지 수행공동체(상가, 승가)의 개창조로 받들어지고 공식적 애도 기간은 끝난다.
이후는 열반일에 제례로 다례재가 봉행된다.
It also recognized our teacher ('Thay') as the fifth patriarch of his root temple, Từ Hiếu, and the founder of the Plum Village Sangha.
Our Teacher's legacy lives on, guiding us in every mindful step, in every mindful breath.
우리 스(승)님(베트남어 타이는 우리말 스님에 해당, 우리말 스님은 스승님의 줄임말)의
유훈은 살아 있어서 우리의 마음챙김하는 발걸음과 들숨날숨을 이끌어주신다.
Each step and each mindful breath nurtures understanding, and love, and illuminates the path of spirituality.
한 발걸음 한 발걸음, 한 들숨 한 날숨마다 이해와 사랑의 마음을 자라게 하고, 영성의 길을 비추어준다.
Let us express our deepest gratitude to the venerable Zen Masters and fellow practitioners for their unwavering support and compassion.
위대한 선사(禪師)들과 도반들의 흔들림없는 지원과 연민에
가장 깊은 감사를 표합시다.
https://www.youtube.com/live/VI0YDFCZJ00?si=7Qhfj6lVAl3rXYur
탈상재
틱낫한 스님 이력
1926년에 태어남
8세에 불교 잡지의 표지에 실린 풀밭 위의 불상의 얼굴이 평화로운 것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되려는 소망을 품음
프랑스 식민 지배 시기인
1942년 16세에 베트남 후에의 뚜 히우 사원(chua Tu Hieu 慈孝寺)에 출가하여 한문, 불어, 한문 경전 수학.
독경, 기도에 머물러 있는 전통 불교의 혁신을 위해
틱낫한 스님 등 젊은 승려들은 과학, 문학, 경제, 영어 등을 배웠다.
폭탄이 투하되는 속에서 명상홀에 앉아 좌선만 하고 있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현실을 바꾸기 위한 행동하는 명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참여불교(Engaged Buddhism)
1954년에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전쟁과 폭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1957년에 불교 혁신과 참여 불교의 이상을 위해 젊은 승려들은 깊은 산속에 프엉 보이(향기로운 야자 잎)라는 수행처를 만들었다. 그러나 4년 뒤에 프엉 보이도 전쟁터의 한 가운데 들어갔고, 승려들은 프엉 보이를 두고 떠나갔다.
1961년에 연구와 강의를 위해 틱낫한은 미국 프린스턴과 컬럼비아 대학으로 갔다. 이곳에 머물며 명상은 심화되었고 틱낫한은 첫 깨달음을 얻었다.
1963년에 응오 딘 지엠 정권이 무너지고 틱낫한은 귀국하였다. 비폭력 평화운동을 위하여 출판사, 주간지 발간, 불교대학을 세우고 활동했으나 동료들이 총살되는 고통을 겪었다.
1965년에 사회봉사청년학교를 세워 전쟁으로 피폐해진 농촌 자립 개발 활동에 나섰다.
1966년 2월에 새로운 불교 종단(Order of Interbeing)을 창립하였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평화운동을 하였다.
1967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틱낫한 스님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베트남전쟁을 끝내기 위한 파리평화회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39년간 귀국 금지 조치를 당하였다.
1974년 편지를 통해 베트남의 동료들에게 가르침을 전했다. <<마음챙김의 기적(A Miracle of Mindfulness)>>이 전 세계인에게 정념 수행을 전파했다.
1975년 보트피플 구호 활동을 하였다.
1982년 프랑스에 수행공동체 플럼빌리지를 설립하였다.
1988년 승려들의 수행공동체 상가(Sanga, 승단)을 설립하였다.
2000년 미국 캘리포니아, 뉴욕, 파리, 독일(유럽 응용불교 연구소), 홍콩, 타이, 호주에 마인드풀니스 수행공동체를 설립하였다.
2005년 39년간의 입국 금지 조치가 해제되어 베트남으로 귀국했다.
새로운 수행공동체 쁘라즈나(Prajna) 사원을 설립했으나
정부의 퇴출 조치로
2009년에 타이로 쁘라즈나 사원을 옮김, 유엔에서 지구 공동체를 위한
5가지 윤리를 채택함. 각국 의회, 구글 등의 대기업 등에서 연설을 하고
홍콩, 타이완, 한국, 런던, 아일랜드 등 전세계를 순회하며
수천에서 수만 명이 모이는 정념(Mindfulness) 수행을 지도함.
2014년 89세에 뇌졸중으로 언어와 반신이 마비됨 이후 출가 사찰인 베트남 후에의 뚜 히에우 사원으로 돌아옴.
2022년 1월 96세로 입적하기까지 인류의 의식을 깨우는 노력을 지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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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날 무렵 미국 프린스턴,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불교를 강의하고 연구하였던 틱낫한 스님의 일기(젊은 틱낫한의 일기 Fragrant Palm Leaves)에서 스님의 수필 한 편을 건졌다. 어머니 제사날에 일본 정토종 절에서 미국 불교 전파 70주년 기념 법회에서 들은 일본의 저명한 고토(일본 가야금) 연주자 에토 키미오의 연주를 듣고 보름달과 함께 숙소로 돌아오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되찾는 깨달음을 얻고서 작은 책, <<당신 호주머니를 위한 장미 A Rose for your pocket>>을 집필하였다. 이 책이 틱낫한 스님의 다른 책 (Teachings on Love)의 제9장으로 들어있어서 오래 전에 읽고서 번역도 하고 외국인이나 학생들에게도 선물하였다.
1962년 12월 24 ~ 25일, 뉴저지, 프린스턴
생일이 지나고 이틀 뒤 나는 어머니를 위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불교 사원에 갔다. 10월 보름이었고 어머니의 제삿날이었다. 그날은 미국에 불교가 전파된 지 70주년이 되는 날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3일간 열리는 축제의 첫날이기도 했다. 비록 대부분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긴 했지만, 여러 나라를 대표하여 2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큰 절-그 안식처는 안꽝 사원의 대웅전만 한 크기였다-은 아니었지만, 그 사원에는 ‘미국 불교 아카데미’라는 걸출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곳에선 불교 철학 코스와 수행은 물론, 일본어와 다도 그리고 꽃꽂이 수업도 열렸다. 그곳은 일본 정토종의 절이었는데, 선임 법사인 호젠 세카와, 델라웨어 대학교의 교수였던 필립스 박사가 돌보고 있었다.
미국에는 대략 8만 명의 불자들이 있는데, 중국과 일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워싱턴 디.씨.(D.C.)의 정토종 본사에서 최근 계를 받은 70명의 성직자들은 모두 일본인이었고, 그들은 미국 전역에 살았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는 미국 대학에서 일본어와 일본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미국에는 54개의 크고 작은 정토종 사원이 있는데, 뉴욕의 사원은 워싱턴의 사원보다 작다. 기념행사에서 샛노란 승복을 입은 두 명의 상좌부 스님을 만났다. 코네티컷에서 오신 아누룻다 스님과 매사추세츠에서 오신 비니타 스님이었다. 스리랑카 대사인 수산타 데 폰세카 씨도 거기 있었다.
나는 아파트를 나와 331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 있는 사원까지 다섯 블록을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법회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그 법회는 효과적이지 않다. 미국에 불교의 씨앗을 심는 데 그런 법회는 효과적이지 않다. 정토종은 외부의 근원으로 보이는 것에서 구원 찾기를 강조한다. 이 접근은 유럽인과 미국인에게 익숙하다. 서구 교회에는 기독교가 전하는 구원의 말을 퍼뜨리기 위한 수많은 신학교와 유능한 성직자가 있다. 서양의 교회처럼 보이기 위한 정토종의 노력이 내게는 미국인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미국인들은 독립성에 높은 가치를 둔다. 아이들을 독립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기른다. 개인을 바로 세우고, 발달시키고, 깨우치게 하기 위해 선(禪)과 같이 자기 노력과 자아실현을 강조하는 불교의 접근법이 미국인의 정신에 더 잘 맞는 것 같다. 기독교와 정토종은 신성의 개입 없이 구원을 성취하기에는 인간이 너무 나약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사실 이곳에서 선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 1870-1966, 서양에 선禪을 전한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 교수의 목소리는 이 나라 전역에 울림을 주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끝없이 계속되는 계획과 생각에 지쳐 있고, 선과 같은 길이 주는 고요와 자기만족에 목말라 있다.
미국인들은 일본 음식을 먹고, 고토(箏/일본 가야금) 음악을 듣고, 다도에 참여하고, 꽃꽂이 하는 것을 좋아한다. 법회가 끝난 뒤 고토 음악회가 있었다. 고토 연주는 지루한 법회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는 법회 동안 조금 산만해 보이던 두 미국인 사이에 앉아 있었는데, 그들도 그 음악을 즐겼다.
나 역시 그 음악이 좋았다. 연주자의 이름은 에토 키미오(衛藤公雄 Kimio Eto, 1924-2012, 일본의 저명한 고토 작곡, 연주자, 고토 음악을 대중화하기 위해 1950년대에 미국으로 가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명성을 얻음)였는데, 그는 친절하고 숨김없는 표정의 서른 살 안팎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검정 기모노를 입은 그는 젊은 남자의 세심한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무대에 올랐다. 나는 그의 시력이 나쁜지 궁금했다. 세키 법사가 그를 소개하자 에토는 천천히 자리에 앉아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의 존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결코 관중을 바라보지 않고 하얀 천이 드리운 단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미소는 고요하고 평온했다. 나는 그와 같은 미소가 이 나라에서 가능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불교 전파 70년을 기리기 위해 그의 연주를 자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님께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7’이라는 숫자가 자신에게 의미가 깊다고 했다. 아버지가 7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일곱 달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고, 고요한 얼굴에는 감동이 어려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믿음, 기억 그리고 슬픔의 가닥을 발견했다. 그는 자작곡을 연주했다.
https://youtu.be/3p9-6AZA8sY?si=gr0LmgldnqmeQ6fs
Sakura
https://youtu.be/717AzdKgGqk?si=zzfnPlx1z46Zb0By
箏曲 希望の曲 衛藤公雄作曲
에토 키미오 작곡의 <평화의 노래> 연주
첫 번째 곡은 <희망의 노래 希望の曲>라고 했다. 가락에 구슬픈 동경이 어려 있었지만, 견뎌냄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도 표현하였다. 두 번째 곡인 <가을바람>에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의 향기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곡인 <믿음의 언어>는 자비의 길에 대한 헌신을 표현했다. 각각의 곡 다음에는 긴 침묵이 뒤따랐고, 그동안 관객들은 숨죽인 채, 그저 고요한 미소를 머금은 젊은 연주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세 번째 곡을 마치고 그는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말을 했다. 모두가 감동을 받은 듯했고, 나도 온몸으로 감동을 느꼈다. 아무도 그가 앞을 보지 못한다고 짐작하지 못했다.
울고 싶었다. 몇 곡이 더 남았지만, 나는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세 곡의 아름다운 연주로 충분했다. 다소 우울한 기분으로 리버사이드 드라이브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나는 여전히 키미오 에토의 미소를 마음속에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큰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은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없다. 나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왜 그의 미소가 나를 깊이 휘저었는지를 이해했다.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밤거리를 혼자 걷지 말라던 친구들의 경고가 떠올랐다. 지구상의 모든 도시가 그렇듯 뉴욕 또한 그 몫의 범죄가 있다. 나는 108번가를 가로질러 브로드웨이로 돌아왔다. 그때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은 부처님의 연꽃 얼굴처럼 둥글었다. 그것은 높이 솟은 고층 건물로 액자 모양이 된 한 조각 하늘에서 마법처럼 나타났다. 마치 달과 내가 같은 방향으로 함께 여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10월의 보름달, 어머니가 나와 함께 있었다. 달이 지평선 위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어머니가 나를 따라 사원까지 가셨음을 믿게 되었다. 법문 뒤 이어진 에토 키미오의 음악을 듣고 있을 때, 달은 사원의 지붕 위를 비추었다. 그리고 지금 그 달은 나를 따라 집으로 왔다. 어머니는 6년 전 10월 보름에 돌아가셨다. 한밤의 달은 어머니의 사랑만큼이나 부드랍고 경이로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음 4년 동안 나는 스스로 고아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어머니가 꿈속에 나타났다. 그 순간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어머니의 죽음을 상실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어머니는 결코 죽지 않았으며, 나의 슬픔은 환상에 기인한다고 이해한다. 내가 여전히 베트남 중부 산악지대에 살고 있던 4월의 어느 날 밤 꿈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머니는 늘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슬픔의 기미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전에도 어머니 꿈을 여러 번 꾸었다. 하지만 그 꿈들은 내게 그날 밤 꾼 꿈과 같은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꿈에서 깨어나자 마음이 평화로웠다. 나는 어머니의 태어남과 죽음이 개념일 뿐,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태어남 때문에 존재하신 것이 아니고, 죽음 때문에 존재하기를 멈추신 것이 아니다. 나는 존재와 존재하지 않음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았다. 존재는 오직 존재하지 않음과의 관계 속에만 있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음은 오직 존재와의 관계 속에만 있다. 그 어느 것도 존재하기를 멈출 수 없다. 어떤 것이 무에서 생겨날 수는 없다. 이것은 철학이 아니다. 나는 오직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날 밤 1시쯤 잠이 깼고 슬픔은 사라졌다. 나는 어머니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단지 하나의 생각일 뿐이었음을 보았다. 꿈속에서 어머니를 볼 수 있었기에, 나는 어머니를 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드러운 달빛이 흘러넘치는 뜰로 걸어 나갔을 때, 나는 그 빛을 어머니의 존재로 경험했다. 이것은 그저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말로 모든 곳에서, 언제나 내 어머니를 볼 수 있다.
8월 여전히 포모나에 있으면서, 나는 <<당신 주머니를 위한 장미 A Rose for Your Pocket>>라는 제목의 작은 책을 썼다. 고국의 젊은이들에게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의 기적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글을 쓰는 동안, 새들이 숲에서 지저귀고 있었다. 그 글을 니앤에게 보내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는 내가 새로운 시각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타이 탄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묘사한 방식이었다. 베트남 문학을 가르칠 때면 언제나 리 왕조의 선사禪師 틱만짝의 이 시를 언급한다.
봄이 갔을 때
거기 어떤 꽃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지 마라.
바로 어젯밤 앞뜰에
한겨울 매화 한 가지 꽃이 피었네.
나는 언제나 이 시의 느낌을 찬탄했지만, 그날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틱만짝 스님 시의 진정한 의미를 온전히 이해했다. 그때 나는 어두운 겨울밤 매화 가지에 꽃이 피는 것을 자각하는 것처럼 사물의 진정한 경이로움을 보기 시작했다.
-틱낫한 지음, 권선아 옮김, <<젊은 틱낫한의 일기-나를 만나는 길 1962-1966, Fragrant Palm Leaves>>(김영사, 2023), pp.113-119.
제9장 당신의 호주머니를 위한 장미
A Rose for Your Pocket
‘어머니’에 관한 생각은 ‘사랑’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달콤하고, 부드러우며, 맛있습니다. 사랑 없이 어린이는 꽃 필 수가 없고 어른은 성숙할 수가 없지요.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나약해지고 위축되고 맙니다.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나는 잡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이 왔다!” 나이든 사람일지라도 어머니를 여읠 때는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 또한 자신이 아직은 성숙하지 않았으며, 갑자기 자신이 홀로 되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는 마치 어린 고아처럼 버려지고 불행하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지요.
모성을 칭송하는 모든 노래와 시들은 아름답고, 쉽사리 아름답습니다. 심지어 많은 재능이 없는 작사자들과 시인들도 이들 작품들에 그들의 심혈을 쏟아 부은 것처럼 보이며, 그들 작품들이 연주되고 노래될 때는 연주자들 또한 그들이 어머니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를 정도로 너무 일찍 어머니를 여읜 경우가 아니라면, 깊이 감동된 것처럼 보입니다. 모성의 덕성들을 찬탄하는 작품들은 세계 어느 곳이든 역사가 있은 이래로 있어 왔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는 것에 관한 간단한 시를 들었습니다. 아직도 그 시는 나에게 중요합니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신다면,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그대는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느낄 것이고, 그러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날이 멀지만 반드시 닥칠 것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 해에 비록 내가 아주 어렸지만 엄마는 나를 떠나갔네.
그래서 난 내가 고아가 된 것을 알았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울고 있고 나는 침묵 속에 괴로웠네....
눈물이 흐르도록 내 버려두었고
난 고통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어.
저녁이 엄마의 무덤을 뒤덮었어.
절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감미롭게 울렸지.
엄마를 잃는 것이 온 우주를 잃는 일임을 난 깨달았네.
우리는 오래도록 부드러운 사랑의 세계 속에서 헤엄쳤고, 심지어 그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곳에서 아주 행복하였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너무 늦었을 뿐이지요.
시골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의 복잡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도시 사람이 어머니는 “사랑의 보배”라고 말하면, 시골 사람들에게 그것은 이미 너무 복잡한 것입니다. 베트남의 시골 사람들은 그들의 어머니들을 바나나, 꿀, 쌀, 사탕수수 같은 여러 가지 최상의 것들에 비교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사랑을 이들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표현합니다. 나에게 어머니는 최고 좋은 품질의 바 후앙 바나나, 최고 좋은 넾 뫁 감미로운 쌀, 제일 맛있는 미아 라우 사탕수수와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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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가 걸려 열이 나면, 입맛이 쓰고 밋밋하고 아무 맛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오직 어머니가 와서 나를 이불 속에 눕히고, 이불을 턱 위로 부드러이 끌어당기며, 손을 불덩이가 되어 담금질 하는 내 이마에 올릴 때, 엄마의 그 손은 정말로 손인지 아니면 천상의 비단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엄마가 가만히 “불쌍한 내 새끼!” 라고 말할 때, 내 몸은 어머니 사랑의 감미로움으로 회복되고 감싸임을 느낍니다.
아버지의 일은 거대한 산처럼 엄청납니다. 어머니의 헌신은 봄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넘쳐흐릅니다. 어머니 사랑은 모든 사랑의 감정들의 기원이 되는 우리 사랑의 첫 맛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는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분이십니다. 어머니가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감사하게도 나는 모든 존재들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어머니를 통해 나는 이해와 연민의 개념을 얻었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사랑의 바탕이 됩니다. 많은 종교적 전통들은 이것을 알고서, 성모 마리아나 관세음보살처럼 어머니의 존재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엄마가 요람으로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면 어린 아이들은 거의 울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불행과 근심을 사라지게 하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정신입니다. “어머니”라는 말이 주장되었을 때, 이미 우리는 마음이 사랑으로 넘쳐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사랑에서부터 믿음과 행동까지의 거리는 매우 짧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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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우리는 오월에 ‘어머니 날’을 기립니다. 나는 베트남의 시골 출신이라서 이런 전통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토쿄의 긴자 거리를 티엔 안 스님과 같이 방문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의 친구들인 몇 명의 일본인 학생들을 서점 바깥에서 만났습니다. 한 학생이 따로 그에게 물었고, 가방에서 흰 카네이션을 꺼내어 내 가사에 달아 주었습니다. 난 놀랐고 당혹스러웠지요. 이런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전혀 몰랐고, 감히 물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은 지방의 어떤 풍습일 것이라고 여기며,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대화가 끝나가고 있을 때(나는 일본말을 하지 못한다.), 티엔 안과 나는 서점 안으로 들어갔고, 오늘이 이른바 ‘어머니 날’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면 호주머니나 옷깃에 붉은 꽃을 달고,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것에 자랑스러워 합니다. 내 가사 위에 달린 흰 꽃을 보고 난 갑자기 아주 불행함을 느꼈습니다. 나는 어떤 다른 불행한 고아와 다를 바 없는 고아였고, 우리 고아들은 더 이상 우리의 단추 구멍 속에 붉은 꽃들을 자랑스럽게 달 수가 없었습니다. 흰 꽃들을 달고 있는 사람들은 고통스럽고, 어머니 생각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계신다는 것을 알기에 붉은 꽃을 단 사람들은 아주 행복합니다. 그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서 너무 늦어지기 전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노력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 아름다운 풍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베트남과 서양에서도 이런 풍습을 가지기를 제안 합니다.
어머니는 사랑의 한량없는 원천이고, 다함없는 보배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때때로 잊고 삽니다. 어머니는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아직도 가까이에 어머니가 있는 그대들은 “신이시여, 저는 어머니를 가까이서 바라보지 못하고 이 모든 해들을 어머니 곁에서 살아 왔습니다. 단지 잠시 보며 보잘 것 없는 푼돈이나 이런 저런 것들이나 물어보면서 몇 마디 말을 나누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며 어머니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 말기 바랍니다. 그대는 따뜻해지려고 어머니 곁에 눕고, 어머니에게 샐쭉해지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대는 오직 어머니의 삶을 복잡하게 하고, 어머니를 걱정하게 하고, 어머니의 건강을 해치고, 어머니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게 합니다. 자식들 때문에 많은 어머니들이 일찍 죽습니다. 어머니의 일생 동안 우리는 어머니가 밥하고, 빨래하고, 우리가 어지럽힌 뒷자리를 청소하여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반면, 우리는 오직 우리의 지위와 직장 일만 생각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더 이상 우리를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없고, 우리도 어머니를 가까이서 보기에는 너무 바쁩니다. 오직 어머니가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을 때에야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을 평소 결코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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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는, 울람바나 명절(우란분절/백중절)에 우리는 마우드갈야야나 보살(목련존자:목련 존자는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원하였다. 목련경)에 관한 이야기와 전설, 효심, 아버지의 일, 어머니의 헌신 그리고 자식의 의무에 대해 듣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부모의 장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우리는 효심 없는 자식은 쓸모없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효심, 헌신은 단지 인위적일 뿐입니다. 사랑이 표현되는 것으로 족하고 의무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은 의무가 아니고, 목이 마를 때 물 마시는 것처럼 완전히 자연적인 것입니다. 모든 자녀는 어머니가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자녀는 어머니가 필요하고, 어머니는 자녀가 필요합니다. 어머니가 자녀가 필요하지 않다면 자녀도 어머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어머니도 자녀도 아닌 것입니다. ‘어머니’와 ‘자녀’라는 말을 잘못 쓰는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선생님들 중의 한 분이 물었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할 때 너는 무엇을 해야만 하지?” 선생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어머니에게 순종해야 하고, 어머니를 돕고, 어머니가 연세 드셨을 때 돌봐드려야 하고, 어머니가 산 뒤로 사라졌을 때 조상의 제단을 지키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나는 선생님의 질문에서 “무엇”이라는 말이 쓸모없는 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어머니를 사랑한다면, 어떤 것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 그것으로 족합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이나 덕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도덕적인 교훈을 주려고 이 책을 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대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이익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머니는 맑은 물이 솟는 샘과 같고, 최고의 사탕수수와 같으며, 최상의 품질을 가진 감미로운 쌀과 같습니다. 이것으로 이익 되는 방법을 모른다면, 당신에게 불행한 것입니다. 당신을 위한 삶에서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불평하는 날을 피하는 것을 돕기 위해 나는 단지 이것을 당신의 ‘주의’와 ‘관심’ 속으로 불러오기를 원합니다. 당신 자신의 어머니의 존재와 같은 선물이 당신을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심지어 당신이 대기업의 회장이거나 우주의 제왕일지라도 당신은 아마도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창조주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스스로 생겨났고 어머니를 가지는 좋은 행운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나를 생각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나의 누나는 결혼하지 않고, 나는 스님이 되지 않을 수가 있었답니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새 인생을 살든, 동경하던 이상적인 삶을 살든 우리 둘은 어머니 곁을 떠났지요. 누나가 결혼한 날 밤에 어머니는 천한 가지 일들을 걱정하였고 심지어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누나를 위해 오는 자형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가벼운 식사를 위해 식탁에 앉았을 때, 어머니는 한 입도 음식을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십팔 년 동안 누나는 우리와 같이 밥을 먹었지만 오늘은 누나가 식사를 하기 위해 다른 가정으로 가기 전에 여기서 마지막 밥을 먹는 것이다.” 누나가 울었습니다. 누나의 이마가 접시 위로 드러나며 고개를 떨구며 말했습니다. “엄마, 나 결혼하지 않을래요.” 하지만 누나는 그럼에도 결혼하였지요. 나 자신을 위한 스님이 되기 위해 나는 엄마 곁을 떠났습니다. 스님이 되기 위해 가족을 떠나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축하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해의 길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였지만 또한 이상을 가졌고, 스님이 되기 위해 어머니를 떠나야 하였습니다. 그만큼 나는 힘들어졌습니다.
인생에서, 어려운 선택들을 해야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는 한 손에 한 마리씩이지 동시에 두 마리 생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어른이 되기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고통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스님이 되기 위해 어머니를 떠나는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그런 선택을 하여야만 했던 것에 미안합니다. 어머니, 이 너무나도 소중한 보배에서 완전히 은혜로울 기회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밤마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였지만 더 이상 내 인생에서 부드러운 바나나, 감미로운 쌀밥, 달콤한 사탕수수 맛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당신의 일을 쫒지 말고 어머니 곁의 집에만 있기를 제안하고 있다고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 나는 도덕적인 교훈이나 조언을 하려는 것이 아님을 이미 말했습니다. 나는 단지 어머니는 바나나 같고, 품질 좋은 쌀 같고, 설탕 같다는 것을 당신에게 일깨워주고 싶을 따름 입니다. 어머니는 부드러움이고, 어머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당신, 나의 형제와 자매들은 어머니를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엄마를 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막대한 손실을 낳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무지’ 때문이든 ‘주의 결핍’ 때문이든 그러한 손실을 감내할 필요가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기꺼이 붉은 꽃, 장미를 그대의 옷깃 위에 달 것이고, 그래서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만일 내가 어떤 조언을 하려고 하였다면, 이런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밤 학교나 일터에서 돌아올 때, 혹은 다음에 어머니를 방문할 때면 어머니 방에 조용히,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들어가 어머니 곁에 앉으십시오.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어머니가 일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한참 동안 어머니를 바라보십시오. 어머니를 잘 보기 위하여, 어머니가 거기에 살아계시고, 당신 곁에 앉아 계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하여 어머니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러고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런 짧은 물음을 물어 보기 바랍니다. “엄마, 아세요?” 어머니는 좀 놀랄 것이고, 당신에게 미소 지으며 “애야, 무얼 말이냐?”하며 되물을 것입니다.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며, 어머니에게 말하십시오. “제가 엄마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세요?” 어머니의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물어 보십시오. 당신이 서른이든, 마흔의 나이가 되든지 간에 당신은 어머니의 아이이기 때문에 그냥 물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 어머니와 당신 두 사람 모두 행복해지고 영원한 사랑 속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내일 어머니가 당신 곁을 떠날지라도 당신은 아무런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당신에게 오늘 노래하라고 주는 후렴구입니다. 형제, 자매들이여, 찬송하고 노래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무관심’이나 ‘망각’ 속에서 살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빨간 장미는 이미 내가 당신의 옷깃 위에 달아드렸습니다. 행복하시길. (김희준 옮김)
-Thich Nhat Hanh, Teachings On Love(2007)
틱낫한, 사랑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