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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연세대 총장
그의 인생에서 예수쟁이가 된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인생은 어려움 스트레스가 많지만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다.
신앙은 우리를 건강하게 해줌
충청도 촌사람이다. 서울대가는 대신 기독교대학인 연세대를 감.
원서사러가다 설교소리가 나서 그곳을 따라갔더니 채플 시간의 설교였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믿고 채플에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백락준 총장이 그를 기억하고 미국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낙제할가봐 걱정되어 하나님 말씀을 적어놓고 밤낮 그말씀을 기억하고 교회도 열심히 나가고 빠지지 못하였다.
미국대학은 금요일까지 공부 그 후부터는 노는 것이 습관.
미국애들은 주말에도 공부하는 그에게 주말인줄 모르냐고 했다.
영어문제로 점수가 좋지않았다.
교수가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에 화가나서 하나님이 나를 낙제하라고 이곳에 보냈느냐고 하였다.
석사마티고 한국에서 군대를 다니고 다시 미국에 박사과정받으러 미국으로 갔다.
그 교수는 그를 자랑으로 여기셨다. 어려움을 참고 참아 이겼다. 이 것은 신앙에서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학교 끊나고 결혼을 하고 의사인 아내는 미국에서 일하고 자신은 교수로 일하고. 그런대 백락준 총장과의 약속때문에
갈등이 되었다. 76년 여름 하나님과의 약속대로 한국으로 나갔다. 물론 집사람은 난리가 났다. 사표를 안내고 가면 안될 것 같아 사표를 내고 한국으로 가며 아내와 아이들에게 먼저 갈테니 하고 한국에 왔다. 한국에 온 목적은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 었다.
한국에서 자기가 가르치는 분야에서 한국에서 1인자가 되는 것이었다, 공인회개사를 제일 많이 만드는 연세대가 되도록 했다.
그런데 미국 국적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학생들은 총장이 우주에서 왔어도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4년만 연세대 총장을 하였다.
하나님은 어떠한 공포에서도 구해주셨다. 신앙안에서 실패는 없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어려운 시간은 언젠가 끓난다. 그 참음은 신앙에서 나온다. 신앙은 공포에서 해방시킨다. 신앙은 우리에게 목적을 준다. 어느감옥수가 판사를 살해하고 자기 어머니를 포로로 잡고 있을 때 그 엄마는 자기 아들에게 하나님은 네게 감옥에서 사람들에게 전도하려는 뜻을 두고 있다고 말하여
그는 어머니를 놓아주고 그 사명을 감당하였다 한다.
한국 전쟁시 가난했던 한국과 대만이 다른나라를 돕는 나라로 변화됨.
우리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 우리는 나눠주는 꿈을 가져야 한다.
15-17 대 국회의원, 국방위원장
공주 출신 공주출신 어머니와 천안 출신 아버지
아버지는 결혼 그다음날 서울로 유학갔다.
결혼해서 아버지은 8번 9번밖에 못보신 어머니는 교회에서 기도하며 시간을 보내며 항상 기뻐하며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행하셨다.
그러다 6.25가 터졌다. 그리고 아버지가 납북되셨다. 어머니는 92세에 돌아가셨다. 데살 5,12절을 크게 읽어달라고 하고 목사님께 대들지 말라로 유언을 하셨다. 그리고 국회의원으로서 모든 일을 할때 깨끗하고 잘못하지 않도록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들이 아빠를 만나면 아빠를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돌아가셨다. 믿는 사람의 본이 되셨다. 팔자타령하시지 않으시고 천사같이 사셨다그러나 어머니 말씀을 잘 순종하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기독교형무소 운동을 벌이고 있다. 교도행정을 위해.
서부영화광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아래. 아버지는 영화를 보여주고 여러가지를 물어보셨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 아이?에게 영화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영화를 만들기로 하였다.
그런데 주일에 영화만들고 고스톱하고 지내다 한달에 한번 교회에 갔다.
그런데 주님은 저를 기억하셨다.
우리집안은 불교집안이었지만 419때 형님이 폐병을 걸렸다. 푸닥거리도 도움이 안되었다. 마지막으로 천막교회에 갔다, 저는 중 3 이었다. 저는 도마와 같은 자로 제가 보지 않으면 믿지않는 자 였다. 도마는 순교자가 되었다.
조용기 목사님은 원수마귀잡았다고 하자 형님은 뜨겁다고 뛰고.
우리형은 40일 금식하고나서 오셨다. 엣스레이를 찍어보더니 깨끗이 나았다. 그리고 월남에 갔다. 그리고 장난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편지로 연락하여왔다. 그래서 저는 형이 죽지않도록 통성으로 기도하였다. 형은 1년 근무하고 돌아와 여의도 장로님으로 변함없이충성하신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 때문에 평생을 기도하셨다. 어머니는 형을 위해서는 조금만하면 되는데 에로영화 만드는 너를 위해서는 길게 기도할수 밖에 없다 하셨다.
영화를 개봉하는 날에 홍수가 나서 극장이 흥행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빚져서 도망다니기 하였다.그리고 처의 이름으로 부도났다. 저의 처는 잡혀 경찰서에 갖히고 저는 도망다녔다. 중학교 다니는 딸이 아버지에게 남자가 비겁하다고 따졌다.
그래서 자수하여 경찰서에 갖혀 있었는데 형님이 면회오셔서 성경을 읽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신약을 읽으면서 소경 바디메오 이야기를 일고 벌떡 일어났다. 소경 바디메오가 소리높여 주님께 부르짖는데 주위에선 그를 꾸짖었지만 겉옷을 놓고 예수님께로 왔다. 예수님은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그는 당신을 보기를 원한다 답했다.예수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누가 19,1에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몇년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네가 돌아와야하지 않니? 에로영화를 그만드고 영성영화를 만드시길 말씀하셨다.
그래서 신앙적인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영화를 무료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7년만에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작년에 졸업.
목사님은 제가 술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한번을 친구와 함께 술을 많이 마셨다. 그런데 눈병을 얻어 입원하였다. 눈에 풍이 온 것이었다. 그래서 회개하면서 집에서 가정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기적이었다.
한국기독실업인회 회장.
저의 선조중엔 왕비가 두분.
저의 조상의 한분인 신동흥님은 연산왕을 섬기기 위해 죽음을 택해서 후에 영조가 그분을 복권시키며 고금동충이라고 말함.
이와 같이 저희는 전통적인 유교집안.
아버지는 제가 두살때 교통사고로 돌아겼고 24세에 과부가 되셨다.
집안이 괜찮았었으나 사기를 당해 가난해졌고 할아버지는 공자 맹자를 찾았지만 생활력은 없었다. 그리고 형님은 사고로 돌아가셨다.
광나루에 있는 친척집에 가서 그곳에 있는 친구따라 교회에 가서 매우 재미있게 지냈다. 그후 광나루에 있는 교회에 가기위해 친척집을 자주 갔다.
얼마 후 할아버지한테 기도하는 것을 발견당해 할아버지는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할아버지께 자신은 옳은 길을 간다고 말씀드리고교회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625사변이 일어나자 담임선생님이 빨갱이였다. 이 담임선생님이 너는 가난한 사람이니 너의 세상이 왔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곳을 떠났고 피난생활하다 영등포에 정착하였다. 13살에 신문도 팔고 미군부대에서 보이노릇도 하였다.
그당시 새마을교회에서 목사님이 야간학교를 열었고 그는 등록하여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에 가서 1년 3개월 배웠다.
초등 4년때 예수님을 만났던 그는 이 야간학교에서 신앙이 싹이 자랐다. 그리고 서울이 수복되어 다시 주간학교를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학교는 안다녔었고 나이로는 고등학교갈 나이라 검정고시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합격하였다.
그리고 종로 5가에 있는 서울사대부고가 어떤 곳인지 알지도 못하여 그곳에 시험을 보아 합격하여 할아버지는 크게 놀라셨다.
목사이신 장관이 야간학교에 오셔서 졸업식을 거하였다. 그는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그다음날 종로 5가에 있던 서울사대부고 입학식에 참석하셨다. 할아버지는 놀라셔서 말을 못하시고 우셨다. 그리고 이 전쟁터에서 요한이 또래들이 (저의 이름이 요한) 부랑배로 몰려다니는데 자신은 손자닌 너를 아무것도 못 돌봐주었는데 어떻게 이 애가 이렇게 승리했는가 생각해 보았더니 네가 교회에 가기 때문인 것이라고 깨달았다 하셨다. 그래서 저는 일어나 할아버지께 절하였다. 교회에 가자고 말씀드렸더니 자신은 종손이라 할아버지는 놓아두라 하셨다. 그러나 할머니와 어머니는 본인들 소원대로 하도록 하라사셔서 할머니, 어머니 그다움 여동생의 의견을 물었더니 모두 교회 간다고 하여 교회로 가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후에 할아버지도 교회에 나오셨다. 할아버지는 어두컴컴한 때 부흥회에 오셨대 일찍 빠져나가셨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믿으셨다.
제가 하나님게 가정복음화위해 기도한 것을 하나님이 들어주신 것이었다.
저는 엄격한 의미에서 서울법대 졸업장 밖에 없다. 저는 외우는 데 도사가 되었다. 다른 졸업증서는 없다.
하나님께서 제 환경에서 가장 맞는 길을 주셨는데 그것이 영어를 익히는 것이었다.
40살이 되던해 1977년 기업을 독립하고자 기화하이텍 회사를 차렸다. 그리고 대리점 계약을 맺었다.
컴푸터를 통해 자동화 장치이다.
그런데 비싼 이 물건이 잘 안 팔렸다. 그래서 돈을 차입해서 운영하였다. 차입금이 늘어나고 이자가 늘어났다. 이자를 갚기위해 또 돈을 빌렸다. 빚이 산 2억정도로 늘자 목사님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목사님은 새벽기도회에 나올 것을 권면하여 한달반 동안 고생하며 새벽기도에 나갔다. 그래도 안풀리자 이사야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의 담이 있기 때문인 것을 깨닫고 죄를 자복하기 시작했다. 서너달이 지나갔다. 그러나 감감소식이었다.
그리고 야곱 4장 2-3절을 통해 정욕을 위해 구해서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업을 운영하겠다고 기도하였다. 한 5개월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이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믿고 실천하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가 왔다. 그러고 기대와 확신이 오고 한 기계가 팔리고 점차로 기계 하나 하나가 팔려나갔다. 비싼 장비기 때문에 기계 하나가 팔리면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교회 성도들에게 진 빚을 먼저 갚고, 한 1 년이 지나자 빚을 전부 갚았다.
그리고 신뢰받는 회사가 되도록 고객지원을 잘 하였다.
그런데 IMF가 왔다. 저희는 수입물건 값이 두배로 뛰니 회사가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즉시 사업을 접고 다른 사업을 하였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다.
성경의 야곱은 위기의 때에 가족에 있었던 모든 이방신상을 제거하고 가솔을 모두 데리고 벧엘에 가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
그래서 사원들에게 집합하여 회사형편을 이야기하자 사원들은 모두 봉급을 낮추기로 하여 한사람도 회사에서 파면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사업이 번성하였다.
한국CBMC가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을 믿는다.
이 사업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이경재. 1941년 경기 이천 태생). 15, 16, 17, 18대 국회의원을 역임. 한나라당 기독인회 회장 역임. 현재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그의 딸은 가수 겸 스타일리스트인 이윤정.
초등학교시절 친구가 떡 먹으러 가자고 하여 교회에 갔더니 조그만 떡 조각을 주어 억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갔다. 어려서 부터 신앙생활한 것은 축복.
초등학교 5학년때 6.25가 일어나 산속으로 피난갔고 아버지는 유탄에 맞어 돌아가셨고 큰 형은 잡혀가시고 집안이 풍지박산되었다. 그리고 작은 아버지 집에 들어갔다. 저는 가난해 껌. 사과 고구마 장사를 하였다. 그러나 배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양주장에서 나온 찌끼를 먹어 술먹은 기운이 나는 가운데 학교가니 학생들은 내가 술먹었다 하였다.
그 후 고등학교에 합격되었고 어머니와 함께 한 친척집에 더불살이 하였다.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셨다 저녁에 돌아오셔서 적?내 꿍꿍앓으셨다.
이렇게 외적으로는 어려운 생활을 했지만 신앙적으로는 축복받은 생활을 하여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부흥회에도 참석하였다. 한번은 젊은 전도사님 (곽선희 목사님)이 오셔서 젊은이들은 꿈을 가지라고 하셔서 저도 꿈을 갔게 되었다. 그 분이 보여준 책 가운데 덴마크가 독일에게 땅을 빼앗겨 실망가운데 있을 때 달가스는 국민들에게 회망을 심고 나무를 심어 나라의 척박한 땅을 옥토로 만들엇다. 그리고 국민들이 공동생활하며 기도하는 공동체를 이뤄 흥왕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이러한 사명을 하나님이 주신 저의 사명으로 영접하였다. 그래서 저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서울대 사회학과를 지원하였다. 친구들은 떨어질 것이라고 나를 비웃었다. 그러나 나는 종로 5 가에의 시험장에 가 않아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하는 말씀으로 저를 안심시켜 주셨고 저를 합격시켜주셨다.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당시 직장얻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는데 동아일보에 지원하였다. 100여명의 경쟁자가 있었지만 합격해 정치부 기자가 되엇다.
정치인들이 기자들과 함께 저녁 먹는 자리는 주로 아가씨들과 함께하는 요정식 자리였다. 방탕하게 지낸 것이 자식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이윤정이 저의 딸이다. 서울예고를 다니라고 했더니 이상하게 입고다니고, 전통을 파괴하는 아이라고 신문에 나오고하니 챙피했다. 지금은 변화되어 얌전해졌다.
옛날 공부못하던 아이들이 출세하는 것을 보고 배 아파서 어려웠다.
그러다 1980년에 전두환의 쿠데타를 일으켰다. 기자였던 그는 다른 기자들과 함께 전부 쫓겨났다. 그리고 4년간 실업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보석감정학원에 3개월 다니기도 하였다.
실업자였던 당시 반포에 있는 한 교회를 다녔는데 한번은 정신 지체아들 봉사하기 위하 갔는데 아이들이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 원장이신 분은 이대 나오신 분이지만 더러운 아이들을 끼쁨으로 닦어주고 있는 것을 보고 감동하였고 또 아이들에 비교해서 나는 월등하게 잘사는데 원망하며 사는 자신을 되돌이켜 보고 자신이 감사하지 못하고 산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때 자신이 확 바꿨다. 그래서 실업자로서 시간이 있어서 차로 사람들을 실어날라 주며 봉사를 하였다. 그래서 4년간 괴로운 시간을 섬기는 생활을 하자 교회의 집사, 장로가 되었다.
또 신동아로 취직이 되 었고 기사가 특종을 쳐서 동아일보는 그를 논설위원으로 높여주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후보의 후보특보로 채용되고, 당선되자 초대 대통령대변인이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 1년쯤 좋지못한 대통령 아들사건이 나자 권력이 자기에게 다가왔으나 이를 거절하자 압력이 와서 대변인에서 물러났다,
좌천되어 홍보처에서 케이불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방송을 누구에게 주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각 교회는 자신의 방송권을 얻으려고 했으나, 감리고 장로교등 80개 교단이 통합되어 기독교 방송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 다음은 국회를 복음화 하는 일이었다. 한국 첫 국회에서 이승만 박사가 이윤영 목사씨가 나와 시작 기도를 하도록 제안 하였고 기도롤 한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요나의 회개 설교를 국회에서 전하고 왕도, 모든 사람도 무릅을 꿇고 회개한 것을 설교하자 대통령이 감동하여 모드가 한마음이,되어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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