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사상>, 2022년 봄호
【김현경의 회고담 13】
김수영 시 읽기 (3)
일시 : 2021년 8월 21일, 10월 20일, 11월 16일.
2022년 1월 11일, 1월 20일.
장소 : 경기도 용인 자택
맹문재 : 「아침의 유혹」이란 작품부터 살펴보도록 할게요. “나는 발가벗은 아내의 목을 끌어안았다/산림과 시간이 오는 것이다”와 같이 시작되고 있는데,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 같네요.
김현경 : 살림을 막 시작할 때의 이야기 같아요. 나는 이 작품을 당시 보지 못했어요. 시어머니께서 일숫돈을 마련해 돈암동에 우리의 살림집을 마련해주셨어요. 아래채였는데 방 하나, 부엌, 마루방이 있었어요. 그때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맹문재 : 작품의 3행에 “서울역에는 화환(花環)이 처음 생기고”라는 표현이 있어요. 이 작품은 『자유신문』 1949년 4월 1일에 발표된 것으로 해방기인데, 그 당시 서울역 풍경을 좀 말씀해주세요. 동포들의 귀국 상황을 보신 적이 있는지요?
김현경 : 일부러 보러 가진 않았어요. 기억이 사진처럼 떠오르지는 않지만 전차를 타고 가면서 본 적이 있어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어요.
맹문재 : 4행에는 “나는 추수하고 돌아오는 백부를 기대(期待)렸다”라는 표현이 나와요. 백부가 금강산에 요양을 가셨다고 지난번에 말씀해주셨는데, 추수라는 말이 왜 나오는지요? 또 작품의 6~8행에 “무지무지한 갱부(坑夫)는 나에게 글을 가르쳤다/그것은 천자문이 되는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스푼과 성냥을 들고 탄광에서 나는 나왔다”란 구절이 나와요. 이 표현도 상당히 낯선데, 갱부라거나 탄광이라는 어휘가 왜 나오는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의 상상으로 보여요. 아니면 다녀왔는지도 모르지요. 김 시인의 할아버지가 파주나 양평 등에 땅을 많이 가지고 계셨잖아요. 그러한 면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요. 백부는 아편을 했는데, 가진 것이 많아서 그랬던 것이지요.
우리 아버님께서 광산을 했어요. 해방 직전까지 강원도 고성에서 중석광산을 했어요. 그런데 해방 뒤 38선이 그어져 빼앗긴 것이에요. 내가 어렸을 때 아버님이 버들가지로 엮은 고리짝에 우리가 입던 헌 옷을 모아 그쪽에 부치는 모습을 보았어요. 고성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아이들의 옷을 제대로 입힐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대요. 그래서 내가 그런 얘기를 김 시인에게 한 것을 쓴 것도 같아요.
맹문재 : 이 작품의 13행에는 “UN위원단이 매일 오는 것이다”라는 표현이 있어요. 유엔위원단을 보신 적이 있는지요?
김현경 : 그럼요. 유엔 한국위원단이 덕수궁에 있었어요. 덕수궁 석조전을 사무실로 썼어요. 소련 사람도 있었고, 미국 사람도 있었어요. 우리나라 위원은 모윤숙 시인이었어요. 인도의 위원은 메논이었는데, 두 사람이 연애했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모윤숙의 『렌의 애가』란 시집이 그 사랑을 담은 것으로 보여요.
맹문재 : 유엔 한국위원단에 인도의 대표 크리슈나 메논(Krishna Menon)에 관해서는 지난번에 잘 말씀해주셨지요. 이 작품은 “모자 쓴 청년이여 유혹이여/아침의 유혹이여”라고 마무리되고 있어요. 이 의미는 무엇일까요?
김현경 : 나를 첫머리에 놓고 그것에 대한 마무리로 보여요. 아침에도 사랑할 수 있는 왕성한 나이였잖아요.
맹문재 : 그렇게 보이네요. 결국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부와 갱부와 유엔위원단과 화환 등 시대를 끌어안고 있네요. 다음 작품은 「음악」이에요. 김수영 시인이 실제로 음악을 좋아했는지요?
김현경 : 내가 신혼살림을 차릴 때 친정집에서 전축을 가지고 왔어요. 매킨토시에서 나온 아주 좋은 전축이었어요. 유행가는 아예 듣지 않고 클래식만 들었어요. 친정아버지께서 음악 마니아였어요. 커다란 전축을 마련해 놓고 틀어 동네가 다 우렁우렁했어요. 아버지가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김순남 작곡가를 그렇게 사랑했던 것이지요. 아버지는 양말도 까만 실크로 된 것을 신을 정도로 멋쟁이였어요.
나는 주로 베토벤 후기 음악을 들었어요. 현악 4중주, 5중주로 실내악이었어요. 베토벤 124번, 125번 곡을 좋아했어요. 엘피(LP)판으로 들었어요. 스텐더드(SP)판도 있었어요. 김 시인은 내가 전축을 틀면 음악을 들었지 먼저 틀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음악을 집중해서 들었어요. 언젠가 김 시인이 나에게 “뭐니 뭐니 해도 예술성의 최고봉은 음악이다. 가슴을 치는 것은 음악이다”라고 말했어요. 음악을 그렇게 높게 보았어요. 그래서 김순남의 예술성도 알았어요.
영화를 볼 때도 음악에 대한 얘기를 많이 얘기했어요. 이탈리아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길>의 음악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음악으로 영화가 다 편집이 된 것 같았어요. 음악이 흐르고 뒤따라서 화면이 흐르고 스토리가 흐르는 것 같았어요. 김 시인의 「죄와 벌」이란 시에 나오는 장면이, 그 영화를 본 뒤에 일어난 것이에요.
나는 대중가요는 전혀 안 들었어요. 그런데 김 시인은 대중음악도 좋아했어요. 강홍식(姜弘植)이란 가수가 있었는데 제대로 된 가수라고 했어요. 강흥식 가수는 월북했어요. 해방기 무렵에는 무성 영화 시대여서 극장에서 사람이 직접 말했잖아요. 김 시인은 이종구와 함께 공부하고 나서 막걸리를 마시다가 흥이 나면 <이수일과 심순애>를 아주 잘했어요. 대사를 다 외우고 있었어요. 모두 탄복하면서 들었어요. (웃음) 그런데 6․25전쟁을 겪고 나서는 기억력이 좀 떨어졌어요.
맹문재 : 음반의 종류로는 스탠더드(SP)가 있지요. 스탠더드 플레잉(Standard Playing)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이에요. 엘피(LP)는 장시간 플레잉(Long Playing)이지요. 엘피가 등장하기 전에 스탠더드 음반이 있었는데, 녹음 저장 공간이 적어 한 면에 1곡씩만 들어갔어요. 강흥식이란 가수는 “봄은 왔네 봄이와 숫처녀의 가슴에도/나물 캐러 간다고 아장아장 들로 가네/산들산들 부는 바람/아리랑 타령이 절로 난다”라는 <처녀총각>이란 노래를 부른 가수네요. 「음악」을 읽으니 김수영 시인은 음악을 들으면 설움을 떨칠 수 있다고 여겼네요. 설움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으로도 보이네요. 다음의 작품이 「달나라의 장난」인데, 작품의 배경에 대해 들을 수 있을까요?
김현경 : 이 작품은 나하고 별거하고 있을 때 부산에서 쓴 작품으로 보여요. 김 시인이 가장 비참할 때 쓴 것이에요. 김 시인이 찾아간 곳은 노 여사의 집으로 보여요. 그 집 분위기로 느껴져요. 노 여사의 남편이 장님이었고, 아이들이 있었대요. 그래서 김 시인이 노 여사 아이들에게 미국 만화를 번역해서 읽으라고 주기도 했대요. 노 여사는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의 간호사였어요. 그때 간호사들이 약 같은 것을 몰래 가지고 나가 팔고는 했대요. 김 시인이 그러한 것을 못 본 척해주었대요. 물론 김 시인은 물건 하나에도 손을 안 대었지요. 그래서 포로수용소의 창고 열쇠를 맡겼을 정도로 미군들이 신뢰했대요.
내가 포로수용소에 편지를 보내놓고 답장을 기다려도 안 와요. 아이를 업고 매일 조암리 우체국에 가서 답장을 기다렸어요. 그때 우체국이 파출소에 같이 있었어요.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노 여사가 내가 보낸 편지를 중간에서 낚아채어 김 시인에게 전달해주지 않은 것이에요. 그만큼 노 여사가 김 시인을 좋아했던가 봐요. 내가 김 시인한테 처음 편지를 보냈을 때 이 사람 저 사람 돌려봐 편지지가 나달나달해져 찢어질 것 같아 베개 속에 감추어 두었다고 했어요.
노 여사는 6․25전쟁이 휴전된 뒤 서울에 올라와 미도파백화점에서 장사를 했어요. 일제 물건, 미제 물건을 다루는 양품 장사였어요. 김 시인한테 타월과 혁대 등을 선물하기도 했어요. 영화도 같이 한 번 보고 했는가 봐요. 김 시인의 여동생이 노 여사가 주는 선물을 받으러 간 적도 있대요. 그렇지만 김 시인이 노 여사의 손도 한 번 안 잡았대요. 김 시인은 그렇게 깨끗한 면이 있어요. 노 여사는 이북 여자였어요. 김 시인이 이북 여자를 좋아했어요. 그러다가 나와 김 시인이 재결합을 한 뒤로는 노 여사와의 관계가 끊어졌어요. 우리가 살림을 다시 시작할 때 김 시인이 노 여사가 보내온 타월 등을 버릴까 물어봤어요. 그래서 내가 멀쩡한 것을 왜 버리냐고 했고, 집에서 유용하게 사용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노 여사의 가정을 방문해 보니 그렇지 못하는 자신이 대비되어 설움을 느꼈나 봐요. 만약 노 여사라는 분이 가정을 갖지 않고 있었으면 김수영 시인과 결혼을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웃음)
김현경 : 글쎄요. 김 시인이 굉장히 까다로웠어요. 내가 이화여대에 다니고 김 시인이 연희전문대에 다닐 때 내 친구들을 소개해 달라고 해서 네 명이나 소개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다 퇴짜를 놓았어요. 그레이스 킹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코리아타임스』 여자 부장을 지냈어요. 학교 다닐 때 영어를 아주 잘해 『콘사이스 영한』 사전도 가지고 다니지 않았어요. 아주 별났지만 시야가 넓었어요. 나하고 덕수초등학교 동창이었어요. 그런데 평발인 데다가 인물이 없다고 했어요. 김영산이라는 친구도 있었어요. 상명고녀의 선생을 하다가 어느 날 저녁에 사망했어요. 집안이 아주 좋은 친구였어요. 또 정성희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대구에서 올라와 공부를 했어요. 대구 약전시장의 딸이었는데, 집안이 풍족해 효자동의 기와집에서 기거하며 어머니가 시중을 들고 있었어요. 그 친구의 어머니가 김 시인이 마음에 들어 밥상을 진수성찬으로 차려주었어요. 사위 삼으려고 굉장히 애썼어요. 김 시인이 그 친구에게 영어 공부 가르치고 있었어요. 그런데 김 시인이 그 친구를 싫어했어요. 다른 한 친구도 있었어요. 예쁘장하고 집안이 좋았는데 김 시인이 역시 싫다고 했어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이에요. 포로수용소의 이야기가 비교적 길게 소개되고 있는데, 김수영 시인의 시 세계에서는 다소 의외의 작품이지요. 포로수용소에 처져 있는 가시철조망인 유자철망(有刺鐵網)이며, 단기 4284년(1951년) 3월 16일 오전 5시 제62적색수용소 폭동 등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네요.
김현경 : 대한민국을 지지하고 친미 관계를 위하는 글을 써달라고 반공단체에서 야단이었어요. 유혹이 아주 심했어요. 그래서 김 시인이 안 쓰려고 버티다가 할 수 없이 쓴 것이에요. 포로수용소 내에서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내 고향 남쪽 바다> 노래가 울려 퍼진대요. 지리산에서 지령이 내려온대요. 그러면 개미 새끼 한 마리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대요. 그런 뒤에는 반드시 폭동이 일어나 시체가 분뇨통에 담겨 포로수용소 밖으로 나간대요. 김 시인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자기를 친공으로 보는지, 아니면 반공으로 보는지 아주 겁이 났대요. 더욱이 김 시인은 영어를 잘해 통역관을 한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도 무서웠대요. 그래서 『성경』만 읽었대요. 그것도 반동이지요. 그래서 자기 스스로 환자를 만들어야 하니 이를 뽑은 것이에요. 다시 환자가 되어야 부산 거제리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안 그러면 언제 자신이 반공으로 몰려 사지가 찢어질지 모르니 살아남으려고 생니를 뽑은 것이에요. 그래서 거제리로 되돌아왔을 때는 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대요. 김 시인이 거기서 석방된 것이에요.
맹문재 : 남한과 유엔은 포로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는 것을 허용하고, 북한과 중국은 원래의 자기 나라에 가야 한다는 주장에서 서로 충돌이 일어났어요. 전쟁의 이념에 희생된 분들이 참으로 안타까워요. 이 작품에는 김수영 시인이 체험한 개천 야영훈련소, 북원 훈련소, 중서면 내무성 군대 등도 나와요. 관련된 얘기를 들으셨는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이 의용군으로 개천까지 끌려갔잖아요. 그곳에서 통나무를 벌목해서 산꼭대기에서 산 아래까지 어깨에 메고 갖다 놓는데 아주 힘들었대요. 그런데 더욱 힘든 것은 17살 정도 되는 인민군이 비인간적으로 감독을 했기 때문이었대요. 죽을힘을 다해 일을 하는데도 조금만 쉬거나 하면 욕을 하면서 사정없이 몽둥이로 두들겨 팼대요. 그래서 그곳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밤에 탈출한 것이에요. 거기서 죽자니 억울해서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도망친 것이지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긍지의 날」이에요. 작품에는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라는 구절이 있는데, 김수영 시인은 긍지가 강했는지요?
김현경 : 아주 강한 분이셨어요. 동네 아이들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어요. 우리 집에서 닭 키우는 일을 돕던 만용이와 식모로 데리고 있던 순자도 끔찍하게 배려했어요. 우리가 밖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오면 집 대문이 잠겨 있는 적이 있어요. 만용이가 자전거를 타고 계란을 팔려고 나간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화를 내면 “남의 집에서 사는 놈이 그런 맛도 없으면 어떻게 지내느냐”고 말해요. 그러면 화를 내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졌어요.
김 시인이 벽에다가 “싸워라 싸워라” 같은 말을 써놓기도 했어요. 부정되고 허영된 것과 싸우려고 한 것이지요. 결국 자기 인격과 관계된 것이었어요. 김 시인은 인격과 긍지가 같은 사람이었어요. 헛된 욕심을 갖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내 주변에는 다들 잘살았잖아요. 그래서 내가 시인하고 산다는 것을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가끔 김 시인과 함께 식사를 하러 오라고 차를 보내주기도 했어요. 내가 아이를 데리고 가도 김 시인은 일절 안 갔어요.
김 시인이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달력에다가 ‘상주사심(常住死心)’이라고 쓰셨어요. 김철 시인이 보내준 달력이었는데 인상파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요. 내가 그 뜻이 궁금해서 김 시인에게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죽음을 생각하면 다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김 시인이 돌아가신 뒤 그 말이 좌우명 같았어요. 그래서 서예가에게 부탁해서 썼어요. 소가 김현경 여사가 부탁했다고 써놓기도 했어요. 도봉동에 있는 김수영문학관에 기증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은 시 쓰는 것에도 긍지가 강했는지요?
김현경 : 그럼요. 아주 산고를 치렀어요. 어떤 날은 머리를 박박 깎기도 했고, 술을 잔뜩 마시기도 했어요. 그만큼 고뇌가 심했어요. 시를 다 썼다고 나를 불러 서재에 가면 원고지 준비가 다 되어 있어요. 그러면 김 시인이 시를 읽는 대로 내가 원고지에 옮겨 적어요. 김 시인은 시를 읽으면서 살펴봐요. 그러다가 띄어쓰기가 틀리거나 하면 적당히 고치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새롭게 시작해요. 그렇게 두 통을 써요. 한 편은 출판사에 갖다 주고, 다른 한 편은 집에 보관해요. 그리고 시가 발표되면 꼭 다시 교정을 봐요. 시 쓰는 일도, 번역하는 일도 아주 진지했어요.
맹문재 : 일상생활에서도 긍지가 강했는지요?
김현경 : 자기 긍지가 강했어요. 주위에서 돈 많은 여자를 결혼 상대로 소개해주어도 끌리지 않았어요. 술도 시시한 사람과 마시지 않았어요. 해방 뒤 ECA(경제협조처, 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에 과장으로 취직을 했는데도 비위에 거슬린다고 한 달 만에 그만두었어요. 이종구 씨와 시를 써서 합평회를 할 때도 고리타분하다고 다투기도 했어요. 김 시인은 시시한 일에 타협하지 않았어요. 이런 점을 생각해 보면 동경 유학할 때 참으로 힘들었을 것 같아요. 대학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지, 집에서 생활비는 안 오지,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맹문재 : 네. 말씀을 들으니 김수영 시인의 심정과 성격을 이해할 수 있겠네요. 다음의 작품이 「그것을 위하여는」이에요. 이 작품에는 “만나야 할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가야 할 곳도 가지 못하고/나의 천직도 이제는 아주 잊어버렸다”라는 구절이 나와요. 이 작품에서도 ‘설움’을 느끼고 있어요.
김현경 : 나하고 별거하고 있을 때 쓴 작품이에요. 시어머니는 아들이라도 찾아오라고 김 시인의 등을 떠밀었어요. 결국 나를 그리워하고 아들을 지켜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하는 자신을 서글퍼하는 것이에요. 이 작품을 읽고 있으면 백석 시인의 「흰 바람벽이 있어」가 떠올라요. 김 시인이 더 비참하게 느껴져요. 이 작품에서 ‘그것을’이란 아내예요. 이 무렵의 시들이 다 그래요.
맹문재 : 이 작품에 “나는 조울히 드러누워”란 구절이 나오는데, ‘조울히’란 어떤 상태일까요?
김현경 : 졸리지도 않은데 잠을 재촉하는 것으로 보이네요.
맹문재 : 이 작품에는 “나의 천직도 이제는 아주 잊어버렸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김수영 시인에게 ‘천직’이란 어떤 것일까요?
김현경 : 학교 선생이나 시 쓰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김 시인이 의용군 전력에다가 대학 졸업장이 없으니 학교의 교사가 될 수 없잖아요.
맹문재 : “‘돈은 암만 벌어도 만족하여지지 않는다’/는 상인을 업수이 여기는 나의 마음도/사실은 오지 않을 기적을 기다리는/영원의 상인”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김수영 시인이 돈을 벌려고 했는지요? 돈을 중요하게 여겼는지요? 그리고 돈을 아껴 썼는지요?
김현경 : 돈을 벌려고 애를 썼다기보다 놀지는 않았어요. 돈을 중요하다고 여겼어요. 돈을 잘 안 썼어요. 지출을 함부로 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술값 같은 것을 깎지는 않았어요. 우리 집 언덕 밑에 담배도 팔고 껌도 팔고 하는 하꼬방 같은 구멍가게가 있었어요. 중년 할머니가 운영하는 가게였는데, 김 시인이 그곳에서 담배를 사고 남은 잔돈을 받지 않고 할머니에게 쓰라고 했는가 봐요. 어느 날 내가 가게를 지나가는데 “색시, 이리 와봐요. 그 양반이 거스름돈을 안 받는 거야. 내가 그냥 써도 되는지?” 하고 물었어요. 그런 얘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어요.
맹문재 : “도장나무 많이 심은 공원”이란 구절이 나오는데, ‘도장나무’는 회양목을 말하는지요?
김현경 : 공원에 많이 심잖아요. 나지막하고, 흔하지요.
맹문재 : “있어야 할 게 아니랴/그러하니까/재미있는 생각이/굶주린 마음에서/유수(流水)같이/유수같이/쏟아져 나올 게 아닐까 보랴”라는 구절에서 ‘있어야 할 게’라는 무엇일까요?
김현경 : 옆에 누울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것으로 보여요. 곧 아내겠지요. 홀아비 절정의 시로 읽혀요. (웃음) 이 무렵 김 시인이 술만 취하면 신당동의 집에 가지 않고 종로 3가로 갔대요.
맹문재 : 이 작품에서 “실낱같이 잘디잔 버드나무”나 “도장나무” 같은 시어는 주도면밀하게 쓴 것 같아요. 버드나무(柳)는 머무르는(留) 것과 발음이 비슷해 이별의 선물이잖아요. 새로운 곳에 정착해서 심은 버드나무를 볼 때 자신을 잊지 말라는 뜻이 있고, 도장나무의 ‘도장’은 결혼이나 이혼 등을 증명하는 데 필요하잖아요.
다음의 작품이 「애정지둔(愛情遲鈍)」이에요. 이 작품도 앞의 작품과 비슷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으로 느껴져요. “조용한 시절은 돌아오지 않았다/그 대신 사랑이 생기었다”로 시작하는 구절이 가슴에 와닿네요.
김현경 : 나를 만나기 전에 쓴 작품이에요. 나를 만나기 직전에 김 시인이 수도고녀의 영어 교사와 선을 본 얘기는 이전에 몇 번 했지요. 인연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에요. 이 작품을 읽으니 김 시인이 포로수용소에서 만난 노 여사를 얘기한 것으로 읽히기도 해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풍뎅이」에요. “너의 앞에서는 우둔한 얼굴을 해도 좋다”라는 표현이 좋네요. 풍뎅이가 김현경 선생님을 그린 것 같은데요. 시 전문을 소개해볼게요.
너의 앞에서는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좋았다
백 년이나 천 년이 결코 긴 세월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사랑의 테두리 속에 끼여 있기 때문이 아니리라
추한 나의 발밑에서 풍뎅이처럼 너는 하늘을 보고 운다
그 넓은 등판으로 땅을 쓸어가면서
늬가 부르는 노래가 어디서 오는 것을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추악하고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너도 우둔한 얼굴을 만들 줄 안다
너의 이름과
너와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아질 때까지
소금 같은 이 세계가 존속할 것이며
의심할 것인데
등 등판 광택 거대한 여울
미끄러져 가는 나의 의지
나의 의지보다 더 빠른 너의 노래
너의 노래보다 더한층 신축성이 있는
너의 사랑
―「풍뎅이」 전문
김현경 : 풍뎅이를 보고 나와의 관계를 노래한 것 같아요. 김 시인이 의용군에 잡혀갈 때까지 다정하게 살았잖아요. 나는 이종구 씨하고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이종구 씨보다는 김 시인이 제대로 시를 쓴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언젠가는 내가 돌아온다는 것을 김 시인도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 재회한 뒤 김 시인은 이종구에 대한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김 시인은 모든 것을 나를 통해서 보는 것 같았어요.
맹문재 : “늬가 부르는 노래가 어디서 오는 것을/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라든가, “등 등판 광택 거대한 여울/미끄러져 가는 나의 의지/나의 의지보다 더 빠른 너의 노래/너의 노래보다 더한층 신축성이 있는/너의 사랑” 같은 구절을 보면 아내를 무척 사랑하는 것으로 보여요.
김현경 : 우리가 다정하게 살았으니 그런 추억이 있겠지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너를 잃고」에요. 이 작품을 읽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요?
김현경 : 이 시를 읽어보니 김 시인과 내가 서로 심장이 똑같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진짜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았어요. 이종구 씨는 한시도 나를 놓지를 않았어요. 그럴수록 나는 보따리를 싸고 싶었어요. “네가 없어도 산단다”는 것은 절규에 가까운 것이지요. “억만 개의 모욕이다”에서 보듯이 증오가 컸지요. 그렇지만 나를 만나서는 생활도 시의 방향도 완전히 달라졌어요. 나의 얘기는 없어졌어요. 이 작품은 내가 원고지에 옮겨 적은 것이 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서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억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너는 억만 개의 모욕이다”라는 구절을 보면 정말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어요. 만약 김수영 시인에게 다시 태어나도 김현경이란 여자와 결혼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김수영 시인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 같으세요? (웃음)
김현경 : 그렇게 대답할 것 같아요. 내가 편하게 해주었잖아요. 내가 세대주 역할을 다 했잖아요. 김 시인은 나를 만능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느 날 김 시인이 시어머니한테 “준이 에미는 진짜 재주가 많아요” 하고 말했어요. 나에게 직접 말하지는 않아도 은근하게 칭찬했어요.
맹문재 :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이 진실하잖아요. 생활 태도가 정직하고 진실했어요. 그러니 다른 뭐하고 바꿀 수가 없어요. 배인철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내 주위의 남자들이 모두 다 도망갔는데 김 시인만 찾아왔어요. 어느 날 찾아와 뒷마루에 앉아 너도 문학을 할 수밖에 없다, 나하고 같이 문학을 하자고 하더라구요. 나한테 인격적으로 대해주었어요. 원고료 등 모든 일을 나한테 속이지 않고 다 얘기했어요. 나한테 맡기고 김 시인은 몸에 돈을 지니고 다니지 않았어요.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 받을 때도 나한테 전화로 상을 받아도 되는지 물어봤어요. 그래서 내가 반공단체가 주는 것이면 받지 말라고 했어요. (웃음) 무한히 아름다운 것, 착한 것, 소박한 것을 꼭 붙잡고 잘 지킨 사람이에요. 부정된 돈은 한 푼도 안 벌었어요. 반공 소설을 쓰라는 유혹도 많이 받았지만 다 거절했어요. 번역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맹문재 : 배인철 사건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전에 말씀해주신 적이 있어요. 저도 「배인철의 흑인시에 나타난 주제 의식 고찰」 논문으로 쓴 적이 있어요.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선생님께서는 어떠했는지 좀 더 듣고 싶네요.
김현경 : 배인철 씨가 나와 함께 남산의 바위에 앉아 있다가 총격을 받았어요. 2미터 위에서 미군이 쏜 총을 맞고 즉사했어요. 우리가 앉아 있는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조금 내려가면 빨래터가 있었어요. 그날까지 우리는 하루도 안 빠지고 만났어요. 헤어질 때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도 다음날 만났어요. 내가 아침에 학교 가려고 나서면 그는 보신각 옆에서 『코리아타임스』를 보며 기다리고 있었어요. 중절모를 쓰고, 스코치 코트를 입고, 컴비네이션 옥스퍼드 구두를 신고 등 아주 멋쟁이였어요. 그래서 그를 따라갔는데, 이화여대 학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학교에 가서 일렀어요. 특히 정지용 선생님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배인철 씨의 집에서는 결혼하라고 난리였대요. 그래서 내가 이화여대에서는 약혼만 해도 퇴학이니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사건이 일어나는 날, 서로의 생활에 지장을 주니 매일 만나지 말고 앞으로는 날짜를 정해서 만나자고 약속했어요. 나도 학교생활을 해야만 되었고, 그도 남로당 회의에 매일 빠지니 아주 난리가 났다고 했어요. 물론 그가 남로당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임화 시인의 집에서 만났으니 좌익으로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인 줄은 알지 못했어요. 이주하 밑에서 일한 것을 나중에 알았어요.
남산 바위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빵, 하고 소리가 났고, 그가 피를 콱 토했어요. 나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너무 놀랐고, 사람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올라왔고, 파출소에서 순경이 왔어요. 내려다보니 내 신발에도 피가 고였고, 다리에 마비가 와 잘 걷지 못했어요. 그래서 오장동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어요. 내 옆구리로 총이 스쳐 간 것이었어요. 그전에는 흉터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어요. 한 일주일 정도 입원했어요. 부모님과 김순남 작곡가, 조경희 수필가, 이병옥 시인, 신문기자 등이 병문안을 왔어요. 경찰들이 지키고 있어 면회가 안 되어 몰래 몰래 만났어요. 그런 상황이니 무서웠어요.
그 사건을 오제도 검사 쪽에서는 남로당과 관계된 좌익 암살 사건으로 몰아갔고, 언론에서는 풍기문란죄로 몰아갔어요. 나중에 치정에 의한 살인죄로 마무리되었어요. 그 바람에 박인환, 이종구, 이진구, 김수영 등 나와 관계된 사람들이 조사를 받았어요. 그중에서도 김 시인이 가장 고초를 겪었어요. 그 사건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 즈음에 내가 배인철 씨와 손을 잡고 명동을 걸어가는데, 저쪽에서 김 시인이 오는 것이 보였어요. 그래서 아저씨에게 소개해야지 하고 다가갔는데, 김 시인이 나를 보더니 피해 그만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어요. 아주 무안했어요. 그다음 날 새벽같이 김 시인이 우리 집에 찾아왔어요. 신발도 안 벗고 내 방에 들어와 영어로 욕을 했어요. 우리 어머니가 들어와 “자네 왜 이러는가?” 하고 물으니, “어제 현경이가 웬 말 뼈다귀 같은 놈하고 팔짱을 끼고 가고 있었어요, 아셨어요?” 하고는 화를 내고 갔어요. 나도 어머니도 의아하게 생각했지요. 그러고 나서 일주일도 못 되어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이에요. 그래서 김 시인이 의심을 가장 많이 받았어요. 경찰이 권총을 찾는다고 김수영의 집 기왓장까지 뒤졌대요. 박인환 시인도 좀 당했을 것이에요.
나는 일주일 입원하고 있다가 집으로 퇴원하지 않고 중부서장의 집에 가 있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부탁을 한 것이지요. 필동에 있는 일본집이었는데, 그 집에 초등학교 다니는 딸 둘이 있었어요. 그래서 공부하는 것을 좀 봐주고, 신재덕 피아노 연주가에게 데려가 피아노 과외를 받도록 해주었어요. 그 무렵 김순남 작곡가와 신재덕 피아노 연주가가 가깝게 지내고 있었어요. 중부서장의 집에서 한 달 정도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내가 학교를 다시 다니려고 이화여대 김활란 총장을 찾아갔어요. 연애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분이었어요. 학교에 다시 다니고 싶다고 했더니 학교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퇴학이라고 했어요. 이전에 김활란 총장이 나에게 컬럼비아대학에 스칼라십으로 도서관학과에 가라고 추천한 적이 있었어요. 나는 도서관학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응하지 않았어요. 나 대신 신재숙이란 친구가 갔어요. 그래서 이화여대를 다니지 못하면 스칼라십의 기회를 얻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퇴학 처분에 기운이 빠져 집까지 걸어왔어요. 그렇지만 좋은 사람하고 연애한 일이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니 주저앉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배인철 사건이 일어난 뒤 한두 달 지나서 김 시인이 우리 집에 찾아왔어요. 방에 들어오지는 않고 뒷마루에 걸터앉아 나 보고 문학 하자고 말했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했어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미숙한 도적」이에요. 술을 마시고 기진맥진해 여관에서 잠을 잤는가 봐요.
김현경 : 나하고 재회하기 전에 쓴 작품인데, 술 마시고 여관비 안 내고 몰래 도망친 것 같기도 하네요. 이 무렵 김 시인은 친구들 쫓아가서 자고 해서 생활이 엉망진창이었어요. 산문 「낙타과음」에 잘 나오잖아요. 허름한 다방에 들어가 사람들이 안 앉는 구석 자리에서 차 한 잔 팔아주고는 하루 종일 책 읽고 글을 쓰고 그러다가 친구들하고 어울려 술을 마셨어요. 그런데 나하고 재회한 뒤로는 생활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생활의 질서가 잡히니까 명동에도 잘 안 나갔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는 “음시(淫詩)를 한바탕 읊었더니/여간 좋아들 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나와요. ‘음시’란 어떤 것일까요?
김현경 : 무성 영화 시대의 <이수일과 심순애>가 있잖아요. 김 시인이 진짜 잘했어요. 또 <각설이 타령>에도 음시가 있잖아요. 자주는 안 해도 한 번 하면 잘했어요. 흉내를 잘 내어 보는 사람들 모두 쓰러질 정도였어요. <대니 보이>도 아주 멋지게 불렀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점잖아졌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는 “나이를 물어보기에 마흔여덟이라고 하니 그대로 곧이듣는다”라는 구절이 나와요. 따져보니 실제로는 김수영 시인의 나이는 서른두 살이네요. 왜 나이를 높여 불렀을까요?.
김현경 : 김 시인의 얼굴에 주름이 많았어요. 술을 많이 마시고 위가 아팠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인지 김 시인이 거울을 자주 들여다봤어요.
맹문재 : 다음 작품이 「부탁」이에요. “자라나는 죽순 모양으로/부탁만이 늘어간다”고 하고 있어요. 무슨 부탁이었을까요?
김현경 : 김 시인이 서울대 의대 부속 간호학과에서 영어 강의를 했잖아요.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번역해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장사하는 사람들이 비누나 화장품 같은 수입 상품이 영어로 쓰였으니 번역해 달라거나, 영어 단문을 대필해 달라고 했어요. 팸플릿 같은 것도 있었어요. 물품의 설명서도 있었어요. 무역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이 부탁했어요. 그러면 김 시인이 거저 해주었어요. 싫어하지 않더라구요. 나는 김 시인이 문학에 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을까 하고 조마조마했어요. 그런데 잘 해주더라구요. 그래서 저런 부탁도 잘 받아주네 하고 내가 놀랐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간호학과에서 영어 강의를 할 때 다른 일은 하지 않았는지요?
김현경 : 안 했어요. 서울대 의대 부속 간호학과 강의가 야간반이었어요.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강의하고, 나머지는 책 읽고, 책방에 다녀오고, 시 쓰고 했어요. 나도 그때 살림하면서 책 읽었어요. <돈암서원>이 있었는데, 서점을 지키는 그 집의 아내가 나에게는 무료로 책을 빌려주었어요. 그래서 일본 현대문학전집을 다 읽었어요. 문학 공부를 참으로 많이 했어요.
그리고 6․25전쟁이 나기 전까지 한 두서너 달 옷가게를 했어요. 김 시인의 수입이 적으니까요. 동대문이 보이는 창신동 골목이었어요. 먼 친척 일가가 하던 양복점이었는데, 내가 인수했어요. 재봉틀 한 대를 놓았어요. 돈암동에서 차를 두 번 갈아타야 했어요. 그런데 6․25전쟁이 나는 바람에 가게 문을 닫았어요. 시댁이 가서 재봉틀을 팔았어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시골 선물」이에요. 이 작품은 1954년 1월에 발표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선생님과 재회하기 전에 쓴 것이에요. 따라서 작품의 배경은 마포구 구수동이 아니라 광산촌인 것 같아요. “나는 중앙선 어느 협곡에 있는 역에서 백여 리나 떨어진 광산촌에 두고 온 잃어버린 겨울 모자를 생각한다”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어요. 김수영 시인이 ‘시골’인 광산촌에 다녀온 적이 있는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신당동 이모네 집에 살 때 시끄럽다고 다방을 서재로 삼고 다녔어요. 다방 구석의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시를 썼어요. 신당동 집은 방이 두 개가 붙어 있었는데 한 방은 김 시인이 썼고, 다른 방은 여섯 식구가 썼어요. 그래서 그 집을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에요. 아이를 찾아와라, 장가를 가라, 신발 좀 사 신어라 등등으로 집안 식구들의 요청을 듣기 싫었던 것이지요. 김 시인이 작품에 나와 있듯이 광산촌에 다녀왔는가 봐요.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방랑하는 마음으로 다녀왔을 것으로 보여요. 아내가 없어 서럽고 외로웠겠지요.
맹문재 : 이 작품은 “나는 모자와 함께 나의 마음의 한 모퉁이를 모자 속에 놓고 온 것이라고/설운 마음의 한 모퉁이를”이라고 마무리되어요. 시골 선물은 서러운 마음일까요?
김현경 : 광산촌에 가서도 서러움만 받아왔다는 것이지요. 서러운 마음이 선물이라고 여길 정도로 외로웠던 것이에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방 안에서 익어 가는 설움」이에요. 이 작품은 1954년 8월 10일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미발표 원고에요. 이 작품은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빈 방 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 앉아/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 보려 하는가”라고 마무리되고 있어요. 이와 같은 모습을 보면 김수영 시인은 “설움”을 “책”을 통해 극복하려는 것으로 보여요. 즉 공부를 통해 서러움을 이겨내려고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김현경 : 김 시인의 막내 이모네가 운영하는 신당동 인쇄소 방에서 쓴 작품으로 보여요. 김 시인은 서러움을 술도 아니고, 담배도 아니고, 문학으로 이겨내려고 했어요. 다시 말해 시로 극복하려고 한 것이지요. 김 시인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방랑하는 시절에도 그랬어요. 김 시인은 이 무렵 소설도 쓰려고 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의 일기를 보면 소설을 구상한 것을 볼 수 있지요. 실제로 미완성이지만 「의용군」이란 소설을 쓰기도 했어요. 김수영 시인의 소설 쓰기는 언젠가 말씀해주셨는데, 좀 더 듣지요.
김현경 : 최태응이란 소설가가 있었는데, 이화여대 자수과에 다닌 황00이란 친구와 동거했어요. 나하고 무척 친했어요. 얼굴이 군고구마 같고 인물이 없었어요. 내가 붙여준 별명이 뒷모습 미인이었어요. 내가 여름에 곤색 문양이 박혀 있는 인조로 만든 지지미 스커트를 입고 다녔는데, 하도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주었더니 돌려주지 않았어요. 우리 집에 있는 은수저도 가져갔어요. (웃음) 최태응 소설가가 무릎이 아파 아편을 시작해 친구도 아편을 했어요. 돈이 없어 여관에서 동거를 했는데, 여관비를 벌기 위해 힘들게 살았어요. 내가 1953년 겨울에 만났는데, 솜도 안 넣은 노란 저고리를 입고 종로3가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당시 이승만 정권 때 승승장구하던 정00과 연애를 잘못해서 인생을 망쳤어요. 어느 날 그 친구의 집에서 잔치를 벌여 갔었어요. 친구의 아버지가 마포 일대의 배추밭 지주여서 잘살았어요. 으리으리한 기와집에서 전축을 틀어놓고 춤을 추고 했었어요. 잔치가 끝나자 이00이 돈암동 우리 집까지 바래다주었고, 나중에 찾아오기도 했는데, 내가 안 만났어요. 친구의 연애는 6․25전쟁으로 어긋났어요.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최태응 소설가를 만나 헌신적으로 사랑을 한 것이에요. 결국 휴전된 뒤 환도해서 얼마 안 있다가 세상을 떴어요. 김 시인이 그 비극적인 사랑을 소설로 쓰려고 했던 것이에요.
맹문재 :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니 김수영 시인이 소설을 쓰려고 한 것은 이승만 시대에 희생당한 한 여인의 삶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단순히 재미로 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상황을 반영하려는 의도였다고 보여요.
김현경 : 그 당시 우익 문인들이 김 시인에게 의용군 다녀온 얘기나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얘기를 쓰라고 강요했어요. 정의는 우익에 있다는 관점으로, 반공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공갈을 쳤어요. 김 시인은 그러한 요구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맹문재 :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한국전쟁과 이념전쟁을 겪은 민족의 비극이지요. 다음 작품이 「구라중화(九羅重花)」예요. 『동아일보』 1955년 1월에 발표했는데, 작품의 제목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김현경 : 김 시인이 글라디올러스를 한자 이름으로 만든 것이에요. 명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글라디올러스는 꽃이 겹겹이에요. 빛깔이 정말 이뻐요. 이 꽃은 주로 고급 다방의 화병에 꽂혀 있었고, 잘사는 집에 많이 있었어요. 김 시인이 아마 다방에 있는 것을 보고 쓴 것으로 보여요.
맹문재 : 이 작품은 “죽음 위에 죽음 위에 죽음을 거듭하리/구라중화”라고 마무리되고 있어요. 김수영 시인은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을 보면서 상주사심(常住死心)을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김현경 : 그럴 수 있지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휴식」이에요. 1954년 『동아일보』에 발표해요. 이 작품에는 “돈 없는 나는 남의 집 마당에 와서/비로소 마음을 쉬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누구네 집 마당일까요?
김현경 : 신당동에 있는 김 시인의 이모네 집 같아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른 차중락 가수의 집이었어요. 이모님이 신당동에서 인쇄소를 운영했는데, 그곳에서 가까운 데 집이 있었어요. 굉장히 잘살았어요. 아주 으리으리한 기와집이었어요. 부산에 피란 갔다가 올라와 서울시의 인쇄물을 주로 맡아서 작업했어요.
내가 수원에 피란 가 있을 때 서울의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서 스리쿼터(three quarter)를 이용해 가교(假橋)를 건너 다녀온 적이 있어요. 스리쿼터는 지프와 트럭의 중간급에 해당하는 자동차인데 그 속의 의자 밑 공간에 숨어 한강을 건넜어요. 돈을 얼마 주었어요. 그때는 헌병이 가교의 양쪽에서 검문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강을 건너기가 쉽지 않았어요. 군속 차들만 들락날락할 수 있었어요. 증명서가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밤에 밀선을 타거나 스리쿼터에 숨어 건넌 것이지요. 내가 도강해서 이모네 집에서 하룻밤을 잤어요.
김 시인과 데이트를 시작할 때 김 시인이 나를 제일 먼저 데리고 간 집이 이모네 집이에요. 이모하고 친하니 나를 소개해주고 싶었던가 봐요. 이모님이 나를 보고 좋아했어요. 저녁상을 한 상을 차려왔어요. 거기에는 차중락의 할머니도 있었어요. 차중락 가수 고모의 아들인 차도균도 가수에요. 고모님은 유치원 원장을 하셨고, 고모부님은 아주 명필이었어요. 우리 시어머니가 사교성이 굉장히 좋아 차중락의 할머니와 아주 잘 지내셨어요. 우리 시어머니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했어요. 김 시인이 일본 유학 갔을 무렵 시어머니가 구멍가게를 해서 식구들을 책임지고 있었어요. 둘째 아들인 수성이 어머니를 도와 집안의 기둥이었어요. 우리 시어머니는 인물도 아주 좋았어요. 글쎄 이시형 부통령 아들이 당신을 보려고 매일 가게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충무로에서 빈대떡 장사를 할 때도 일수쟁이가 우리 시어머니에 반해 일숫돈도 후하게 빌려주었다고 했어요. 한번은 나를 데리고 유명한 관상쟁이에게 갔는데, 일수쟁이가 따라와 우리를 중국집에 데려가 탕수육도 사주었어요. (웃음) 연옥색 모시 저고리를 곱게 입은 아름다운 모습이 잊히지 않아요.
맹문재 : 스리쿼터를 타고 한강을 넘은 모습을 통해 한국전쟁의 또 다른 상황을 알게 되네요. 김수영 시인과 차중락 가수의 관계도 관심이 드네요. 두 분이 함께 찍은 사진도 있지요.
김현경 : 차중락 가수가 가수왕이 되었을 때 김 시인이 축하하러 갔어요. 이모님이 언론사에 홍보하라고 김 시인에게 부탁한 적도 있어요. (웃음) 차중락 가수가 너무 무리하게 활동해 뇌막염으로 세상을 떴어요.
맹문재 :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차중락 가수는 1967년 문화방송(MBC) 제2회 10대 가수상 신인 부분에서 정훈희와 함께 상을 받았고, 동양방송(TBC)에서도 신인가수상을 받았네요. 노래를 부르다가 쓰러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입원했는데,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68년 11월 10일 사망했네요. 다음의 작품이 「거미」에요. 작품의 전문은 다음과 같아요. 이 작품에도 ‘설움’이 나와요.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 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 버렸다
―「거미」 전문
김현경 : 김 시인이 자화상을 그린 것이에요. 자신의 마음이 까맣게 타 버렸다고, 자신의 인생이 거미 같다고 여긴 것이지요. 김 시인이 「낙타과음」이라는 산문을 쓰기 이전에는 생활의 질서가 없었어요. 한국전쟁 중 김 시인의 가족은 영등포에 살고 있었는데, 휴전 뒤에는 신당동으로 이사를 했어요. 김 시인의 막내 이모 집에서 신세를 진 것이지요. 그러다가 우리가 재회해서 성북동에 자리를 잡자 시댁이 성북동으로 이사를 왔어요. 기와집이었는데 비어있었어요. 한 1년쯤 살았는데 주인이 들어와 살겠다고 해서 다시 도봉동으로 이사를 했어요. 남의 집에 사는 것보다 내 집을 마련하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이지요. 도봉동은 공기가 좋고 펌프 물도 아주 좋았어요.
어느 날 묘지기의 아들인 만석이가 리어카로 알타리무를 두 포대 싣고 와 소금에 절여놓았는데, 그 이듬해에 꺼내 먹어보니 맛이 기가 막혔어요. 얼마나 맛있는지 다른 반찬은 필요가 없었어요. 아삭아삭하면서, 달짝지근하면서, 짭짤한 맛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언젠가 그 이야기를 『샘터』지에 쓰기도 했어요. 마포구 구수동에 가서도 무 농사를 지었는데, 무 이파리를 삶은 뒤 꼭 짜서 참기름을 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어 볶았더니 아주 맛있었어요. 김 시인도 아주 좋아했어요.
맹문재 : 말씀을 들으니 간이 잘 배인 알타리무와 볶은 무 이파리 반찬이 군침을 돌게 하네요. 다음의 작품이 「PLASTER」이에요. 관련된 말씀을 듣고 싶네요.
김현경 : 이 작품은 김 시인의 틀니 이야기에요. “바다보다 아름다운 세월을 건너와서”라는 표현은 틀니가 미국에서 왔다는 것으로 읽히네요. 김 시인이 의용군에 잡혀갔다가 탈출해서 부산에 있는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1950년 11월에 수용되었는데, 다친 몸이 다 나으니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졌어요. 그런데 거기에서는 인공 포로와 반공 포로 사이에 폭동이 자주 일어나 정말 무서웠대요. 영어를 잘하는 김 시인은 반공 포로처럼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를 하나씩 빼었대요. 스스로 환자를 만든 것이에요. 그리고 벽에 기대어 『성경』만 읽었대요. 다시 부산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부산 거제리의 포로수용소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마치 천국에 온 것같이 여겨졌대요. 그곳에서 병원장의 배려를 많이 받았어요. 병원장이 건네는 『타임』이나 『라이프』 같은 잡지를 읽을 수 있었고, 약품 창고의 열쇠를 맡겼을 정도로 신뢰를 받았어요. 김 시인이 영어를 잘하고 성실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틀니도 병원장이 특별히 배려해서 미국에 신청해 만들어준 것이에요. 이가 없으면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잖아요. 틀니에 김 시인의 이름이 찍혀 있었어요. 그때 우리나라에는 틀니를 만들 기술이 없었고, 일반인들은 틀니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살아남으려고 일부러 이를 뽑아 환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다시 들어도 정말 충격이에요. 한국전쟁의 참상이 다시금 떠오르네요. 그런데 작품에서는 틀니를 “괴물”이라고 했어요. 또한 화자 자신의 “명예는 부서졌다”고 했어요. 틀니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전쟁 상황이나 시대를 비판하는 것으로 읽히네요.
김현경 : 틀니는 실체가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니까 그랬던 것이지요.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오면 항상 틀니를 빼서 알루미늄 컵에 보관했어요. 외출할 때는 내가 손수건, 담배, 용돈 등을 준비해 드렸는데, 김 시인은 술에 취하면 틀니를 빼서 주머니에 넣었어요. 어느 날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왔는데 틀니가 없어 걱정되어 잠도 못 자고, 그 이튿날 술집을 찾아다니며 찾은 얘기를 언제가 내가 했지요. 틀니 때문에 이러저러한 일화가 많았어요.
맹문재 : 이 작품이 『평화신문』(1954년 8월 2일)에 실리는데, 다음 해에 김현경 선생님과 재회한 뒤 『평화신문』사의 문화부 차장으로 취직하지요. 김수영 시인과 인연이 깊은 매체네요. 다음의 작품이 「여름 뜰」이에요. 이 작품은 어디에서 쓴 것으로 보이는지요?
김현경 : 마포구 구수동으로 이사 가기 전의 작품이니 성북동에 있는 백낙승 씨의 집에 살 때 쓴 것으로 보이네요. 그 집은 마당도 있고 솔밭도 있고 참으로 좋았어요. 김 시인의 「폭포」도 그곳에서 쓴 작품이에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은 보통 몇 시에 일어나고 또 몇 시에 잠자리에 들었는지요?
김현경 : 여름에는 6시쯤 기상했어요. 밤에 일을 많이 해서 11시에서 새벽 사이에 취침했어요.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작업을 하지는 않았어요. 우리는 각방 생활을 했어요. 신혼 때부터 그랬어요. 한 방에서는 별로 안 살았어요. 김 시인이 소음에 매우 민감했기 때문이에요. 또 작업에 집중해야 되었기 때문이에요.
맹문재 : 각방 생활을 하셨다는 얘기는 처음 듣네요. 혼자 자면 무섭지 않으셨는지요?
김현경 : 아이와 함께 자니 무섭지 않지요. 그리고 나도 밤에 책을 읽었어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구슬픈 육체」이에요. 이 작품을 보면 “불을 끄고 누웠다가/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다시 일어났다”라고 시작하고 있는데, 김수영 시인이 자신의 일에 집중력이 높았던 것으로 보여요.
김현경 : 그럼요. 집중력이 아주 대단했어요. 시를 쓸 때 난산을 겪었고, 번역 일을 할 때도 최선을 다했어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사무실」이에요. 작품에 “남의 일하는 곳에 와서 아무 목적 없이 앉았으면 어떻게 하리” 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실제로 김수영 시인이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사무실에 들르는 일이 있었는지요?
김현경 : 그럼요. 번역 등 일거리를 찾으려고 갔지요. 가령 원응서 씨가 운영하는 중앙문화사 같은 데 갔어요. 원응서 씨는 잘생겼어요. 부잣집 사장 같았어요. 항상 넥타이를 매고 의젓했어요. 일본 유학을 했고, 번역도 했어요. 중앙문화사는 을지로 2가에 있었어요. 언젠가 그 집에 놀러간 적이 있어요. 명륜동에 있었는데, 집은 방 두 칸으로 크지 않았어요. 부인이 그 집에 피아노 교습소를 차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어요. 큰 부자인 줄 알았는데, 집은 크지 않았어요. 원응서 씨는 김 시인이 번역 일을 직업으로 삼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물론 김 시인과 각별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김중희 소설가도 생각나네요. 아주 호감이 가는 분이었어요. 육군 공보정훈실에서 잡지나 신문이 나왔는데, 그곳에서 일했어요. 유정 시인도 그곳에서 일한 적이 있지요. 김 시인이 나를 앞세우고 나가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어요. 어느 날 만나러 가다가 광화문 지하도에서 최창봉 씨를 만난 적도 있어요. 방송국에서 권위가 있었고, 연극연출도 했고, 이종구 씨와 친한 분이었지요.
그리고 박연희 소설가도 떠오르네요. 사람이 착실하고 구수했어요. 김 시인이 부산에서 혼자 방황할 때 「달나라의 장난」을 『자유세계』란 잡지에 실어주기도 했어요.
맹문재 : 원응서, 김중희, 유정, 최창봉, 박연희 등에 관한 말씀을 들으니 새롭고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음의 작품이 「겨울의 사랑」이에요. 발표를 하지 않은 작품이에요.
김현경 : 노 여사 얘기를 쓴 것 같아요. 노 여사란 간호사는 김 시인이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알게 된 사이에요. 노 여사는 휴전된 뒤 서울에 올라와 미도파백화점에서 양품점을 했어요. 김 시인의 동생을 불러 몇 차례 김 시인에게 선물도 보냈어요. 둘이 영화를 보러가기도 했어요. 노 여사가 김 시인을 많이 좋아했던가 봐요. 나는 노 여사를 보지 못했어요. 김 시인이 나와 재회한 뒤로는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어요.
젊은 날 김 시인이 박일영을 따라다닐 때 가극단의 한 단원을 좋아했어요. 어느 날 중앙극장으로 나를 불러 그 무용수를 인사시켜준 적이 있어요. 이름이 장추하인가 했는데, 얼굴에 주근깨가 있고 여학생 같았어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도취의 피안」이에요. 이 작품에 대해서는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은데요
김현경 : 몇 년 전에 내가 『한겨레』 신문에 이 작품을 제일 좋아한다고 추천한 적이 있어요. 이 작품도 나와 재회하기 전에 썼어요. 내가 이 작품이 신문에 실린 것을 보고 진짜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김 시인의 실력이 다 발휘된 것으로 보였어요. 정말 능변이에요. 내가 이 작품을 읽고 김 시인을 다시 만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김 시인에게 이종구 씨의 집을 나온 사실을 알린 것이에요.
이 작품은 사회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담겨 있어요. 해방된 뒤 좌우익이 분열되었는데, 그때 지식인 청년들은 사회주의에 많은 공감을 했어요. 이승만 정권의 부정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지요. 이 작품은 피안의 세계를 부정한 것이에요. 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긍정한 것이에요.
물론 현실 세계가 꼭 그렇지는 않았지요. 김 시인이 의용군으로 개천까지 끌려갔잖아요. 그곳에서 통나무를 벌목해서 어깨에 메고 산 아래까지 갖다 놓는데 아주 힘들었대요. 그런데 더욱 힘든 것은 17살 정도 되는 인민군이 비인간적으로 감독을 했기 때문이었대요. 죽을힘을 다해 일을 하는데도 조금만 쉬거나 하면 사정없이 욕을 하며 야단했대요. 그래서 그곳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밤에 탈출한 것이에요.
맹문재 : 좀 전에 김수영 시인의 시 쓰기에 대해 능변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평소에도 그러한지요?
김현경 : 평소의 대화에서는 어려운 말을 안 해요. 그런데 영화를 함께 보고 집에 돌아와 얘기할 때는 아주 잘해요. 영화에 대한 얘기가 너무 재미있어 밤새울 때도 있었어요. 내가 영화 제작에 관심이 많아 이화여대에 다닐 때 러시아의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론 책을 다 읽었어요. 여름방학 때 윤봉춘 감독이 만든 영화 <유관순>의 조감독도 했어요. 내가 김윤이라는 가명으로 필기시험에 합격해 찾아가니 다들 놀랐어요. 내 이름을 보고 남자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웃음)
맹문재 : 말씀을 듣고 보니 「도취의 피안」에서 나타난 현실 인식은 매우 견고하네요. 이 작품은 김수영의 시 세계에서 토대가 되는 것으로 보여지네요. 다음의 작품은 「더러운 향로」에요. 왜 향로를 더럽다고 했는지 궁금하네요.
김현경 : 이 작품도 나와 재회하기 전에 쓴 것이에요. 「묘정의 노래」와 일맥상통하는 분위기에요. 그 당시에 서울 사람들은 동묘에 가서 향을 피웠어요. 김 시인도 어렸을 때 집안의 어른들이 동묘에 가서 올리는 제사에 참가했어요. 장남이었으니까 반드시 가야 했지요. 김 시인 집의 가게 정도면 그때는 꽤 큰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장사가 잘 되기를 비는 제사를 지냈지요. 김 시인은 향로에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면서 기복이나 명복을 비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외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나도 동경이 안 되었나 봐요. 나와 김 시인이 동묘 앞을 데이트 코스로 자주 다니기도 했어요.
동묘의 제사상을 생각하니 약과가 떠오르네요. 제사상에 음식이 차려지는데 약과도 올리잖아요. 나는 그 약과를 좋아했어요. 진명여고의 개교기념일에는 학교에서 약과를 만들어 선물로 주었는데 전통 약과여서 정말 맛있었어요. 내가 어릴 때 우리집에 세답방(洗踏房) 출신인 강 씨 할머니가 계셨어요. 세답방이란 궁중의 빨래, 다듬이질, 다리미질 등을 맡은 곳이에요. 우리 할머니의 사촌쯤 되는 분이 그곳에 있다가 이(李) 왕조가 망하니 나오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궁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가끔씩 음식을 보내줬어요. 그리고 그 할머니의 조카가 되는 분은 궁중의 악대 출신으로 피리를 부는 분이었어요. 그분은 자하문 쪽 계곡에서 살았는데 우리 집 빨래를 가지고 가서 빨아 인왕산 바위에 널었다가 가져오곤 했어요. 우리 집의 굴비 껍질이며 대가리며 꽁지를 모아 가져가던 모습도 떠오르네요. 그 집의 울타리는 앵두나무였는데 앵두가 정말로 실했어요. 그런데 그 집 앞에 현진건 소설가가 살고 있었어요. 능금밭이 있었고, 양계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경치가 정말 아름다웠어요. 현진건 소설가의 딸이 진명여고에 다녔어요. 나보다 한 학년 위인데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데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김 시인의 시어머니가 무꾸리를 좋아한다는 얘기는 지난번에 했지요. 정말 무꾸리를 좋아해 나를 데리고도 몇 번 갔어요.
맹문재 : 「더러운 향로」를 다시 읽어보니 향로에 제사를 지내는 관습이나 풍습을 좋게 생각하지 않아 더럽다고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또는 향로에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은 기득권층이니, 그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다음 작품이 「네이팜 탄」이에요.
김현경 : 성북동에서 쓴 것이에요. 이전에는 시인이 폭주 등으로 헤매는 사람이었는데, 나하고 재회하고 나서는 생활도 시도 완전히 달라졌어요. 이 시에서는 6․25전쟁을 정식으로 보고 있어요. 고생하고 외롭고 우울하고 그늘에서만 살다가 생활이 달라지니 전쟁을 객관적으로 본 것이에요. 김 시인이 『애틀랜틱』 등을 통해 기계문명이나 미국 문명을 앞서 받아들였어요.
맹문재 : 이 작품은 “죽음이 싫으면서/너를 딛고 일어서고/시간이 싫으면서/너를 타고 가야 한다//창조를 위하여/방향은 현대-”라고 마무리 짓고 있어 언뜻 보면 네이팜 탄 같은 무기를 통해 물질문명을 인정하는 듯하게 여겨져요. 실제로 전쟁을 통해 인류의 기계문명이나 의학 분야에 발전을 가져오는 면도 있지요. 참으로 모순된 현상이지요. 그렇다고 김수영 시인이 전쟁에 동원된 무기를 긍정하지는 않았을 테니, 표현과는 다르게 아이러니 혹은 역설로 읽히기도 해요. 작품의 도입이 “너를 딛고 일어서면/생각하는 것은 먼 나라의 일이 아니다/나의 가슴속에 흐트러진 파편들일 것이다”에서 그 단서를 볼 수 있지요. 다음의 작품이 「거리 1」이에요.
김현경 : 이 작품 말고 「거리」란 것이 또 있지요. 6․25전쟁 때 『민생보』에 발표했는데 분실해 정말 아쉬워요. 김 시인도 자신이 인정하는 시로 아주 아까워했어요. 김병욱 시인도 좋은 시라고 했어요. 그 시에는 청춘의 낭만도 비애도 있고, 영원한 애화도 있어요.
6․25 때 모든 걸 두고 맨발로 나왔어요. 김 시인이 발표한 잡지나 보내온 시집들은 물론이고 흑탄으로 만든 책상, 사진, 그림 등 참으로 아까워요. 내가 그린 아버지 자화상, 백영수(白榮洙) 화가가 선물한 <창경원> 그림이 떠오르네요. 백영수 화가는 <백일몽>으로 유명했어요.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에 소속된 프랑스 대표가 백 화가의 그림을 좋아했어요. 내가 이촌동에서 부티크를 운영하고 있을 때 정연희 소설가와 함께 찾아오기도 했어요. 백 화가가 나를 좋아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는 프랑스의 화자 쇠라(Georges Seurat)가 나오는데 그의 그림을 보신 적이 있는지요? 작품에서 “스으라여/너는 이 세상을 점으로 가리켰지만”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김수영 시인이 그의 회화 기법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현경 : 쇠라 전집을 가지고 있었어요. 점묘법이라는 회화 기법을 사용했어요. 김 시인이 나 때문에 그림에 관심을 가졌어요. 내가 김 시인의 서재에 반 고흐의 그림을 갖다 붙이기도 했고, 화장실에도 붙였어요. 1945년 조선이 해방된 뒤 일본인들이 원남서점에 많은 책들을 처분했는데, 내가 그곳에서 일본 가와데쇼보신샤((河出書房新社) 출판사에서 간행된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화집을 사기도 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는 “헌 옷과 낡은 구두가 그리 모양수통하지 않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모양수통’의 의미가 무엇인지요?
김현경 : 모양새가 부끄럽지 않다는 뜻으로 보이네요. 김 시인은 나의 옷차림 등에 관심이 많았어요. “너를 누가 따르니?” 이런 말을 하면서도 은근히 만족해하는 것 같았어요. (웃음)
맹문재 : 이 작품에 나오는 “나는/나의 눈을 찌르는 이 따가운 가옥과/집물과 사람들의 음성과 거리의 소리들을/커다란 해양의 한구석을 차지하는/조그마한 물방울로/그려보려 하는데” 같은 구절을 보면 김수영 시인의 현실 인식으로 읽히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이 거리를 다니는 것을 좋아했어요. 거리에서 방황도 많이 했잖아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나비의 무덤」이에요. 1955년 6월 24일 『동아일보』에 발표한 것으로 보아 마포구 구수동에서 쓴 것으로 보이기도 하네요.
김현경 : 이 작품은 성북동에서 쓴 작품으로 보여요. 해방된 뒤 김 시인과 이종구 씨와 함께 시를 쓸 때는 일본어로 썼어요. 따라서 김 시인이 「묘정의 노래」를 한글로 써서 등단했을 때는 다들 놀랐어요. 김 시인이나 이종구 씨는 쉬르리얼리즘 적인 시를 썼는데, 「나비의 무덤」에도 나타나는 것 같네요. 현실적인 자기 이념이 나타나고 있어요. 밤낮으로 김 시인의 시들은 이미지가 풍요로워요. 상상력이 넓어요. 이종구 씨는 폴 발레리 흉내를 내는 것 같았어요. 김 시인과 둘이 오랜 친구로 사이도 좋았지만, 마치 라이벌 관계처럼 서로 다투기도 잘했어요. (웃음) 이종구 씨는 영어 실력이 대단했어요. 민중서관에서 나온 『콘사이스 사전』을 부산에서 피란 생활할 때 이양하 선생과 만들었어요. 실제로 이종구 씨가 거의 다 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이 “나비야 나비야 더러운 나비야/네가 죽어서 지분을 남기듯이/내가 죽은 뒤에는 고독의 명맥을 남기지 않으려고/나는 이다지도 주야를 무릅쓰고 애를 쓰고 있단다”라고 마무리되고 있어요. 나비는 지분을 남기니 더럽고, 그에 비해 김수영 시인은 깨끗하게 살겠다고, 즉 고독의 극복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여요.
다음의 작품이 「나의 가족」이에요. 참으로 따스한 작품이에요. 지난번 김현경 선생님의 산문집 제목을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라고 정했는데, 이 작품의 마지막 구절이에요. 작품의 전문은 다음과 같아요.
고색이 창연한 우리 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 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는 지층의 단면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 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전령(全靈)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은
위대한 고대 조각의 사진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스러운 향수(鄕愁)와 우주의 위대감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을
나의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에 비하여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안에서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나의 가족」 전문
김현경 : 이 작품도 신당동 이모네 집에서 쓴 것으로 보여요. 방이 두 개였는데, 한 방은 김 시인이 차지하고, 나머지 식구들은 다른 방에서 생활했어요. 그러니 다른 식구들이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내가 6․25전쟁 중 수원에서 피란 생활하고 있을 때 서울이 궁금해 수원에서 몰래 스리쿼터를 타고 신당동 이모네 집에 간 적이 있었다고 말했지요. 그때 돈암동 우리 집도 궁금해서 가봤어요. 가 보니 방방에 사람들이 살고 있더라구요. 그렇지만 빨갱이로 몰려 도망쳤기 때문에 집을 비워달라고 말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휴전된 뒤 찾았어요. 이종구 씨가 서울고등학교 6학년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이00 대령이었어요. 그래서 그 학생의 아버지에게 부탁을 했는데, 그가 자신의 동생에게 말해 결국 우리 집을 되찾게 된 것이에요. 나중에 우리 집을 엄주명 경인지구 사령관에게 팔았어요. 그분은 진명여고 교장을 지내기도 했어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국립도서관」이에요. “모두들 공부하는 속에 와 보면 나도 옛날에 공부하던 생각이 난다”는 구절로 시작하고 있어요. 김수영 시인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의 젊은 날이 생각났던가 봐요. 자연스레 ‘설움’도 들었고요.
김현경 : 김 시인이 번역하다가 집에 있는 『옥스포스 사전』에서 찾을 수 없는 어원 등이 나오면 도서관에 가곤 했어요. 그때 국립도서관이 소공동에 있었어요. 김 시인이 자주 가서 그곳의 사서하고 친했어요. 사서가 김 시인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김 시인이 대인관계가 좋았어요. 김 시인과 술자리를 함께했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때 입장료가 있었는데, 김 시인이 그냥 들어갈 정도였어요. 나도 진명여고 다닐 때 거기 가서 시험공부를 했어요. 언니가 잘 가니까 쫓아다닌 것이지요. 이 작품을 내가 원고지에 옮겨적었어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거리 2」에요. “여인 중에도 가장 아름다운 그네여/돈을 버는 거리의 부인들의 어색한 모습이여”라고 마무리되고 있듯이, 거리에서 돈을 버는 여성을 긍정하는 것으로 보이네요.
김현경 : 이 작품도 내가 원고지에 옮겨적었어요. 김 시인은 이 작품 말고 먼저 쓴 「거리」에 애착이 많았어요. 6․25전쟁 때 잃어버렸어요. 그 작품을 찾으려고 애를 썼는데, 찾지 못해 안타까워요. 김 시인은 거리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리얼리스트의 관심이지요.
맹문재 : 이 작품에는 “나도 지나간 날에는 배우를 꿈꾸고 살던 때가 있었단다”라는 구절이 나와요. 시를 본격적으로 쓴 뒤에는 연극 활동을 그만두었는데, 미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김현경 : 미련이 있었지요. 김 시인이 거울을 자주 본 것이 그 모습이에요. 연극배우처럼 표정 관리를 한 것이지요. 내가 어쩌다가 김 시인이 거울을 보는 모습을 보면 무안해했어요. 그 거울의 테두리가 부서져 내가 고쳐드렸어요. 도봉동의 김수영문학관에 기증했어요.
맹문재 : 여러 가지 말씀 감사해요. 다음 작품이 「영롱한 목표」에요. 새해 내내 건강하세요.
■ 김현경
1927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나 경성여자보통학교(현 덕수초등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김수영 시인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에세이집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공저) 『먼 곳에서부터』(공저)가 있다.
■ 맹문재
대담집으로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지식인 시의 대상애』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시의 대문자』 『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가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