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2월 5일 이서옹 종정 스님의 부름을 받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부장을 겸직하게 되었다. 이유인즉 총무원에 중대한 사건이 생겨서 총무원장 모 스님 등 세 분이 구속되어 사건 수습의 적임자를 물색하던 차 사건 처리를 잘 할 수 있는 적임자라 단정 짓고 종정 스님이 직접 불러 올린 것이다. 총무부장으로 취임하자 바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다녔다. 그리고 내가 총무부장이 됨과 동시에 교무부장에는 통도사의 철인 스님, 재무부장에는 법주사의 월서 스님, 사회부장에는 도선사의 혜성 스님, 규정부장에는 석옹 스님 등으로 구성했다. 다음 날 종정 스님께서 나를 불러서 송서암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모셨으면 좋겠는데 한번 모셔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재무부장인 월서 스님과 함께 문경 봉암사 조시로 계시는 서암 스님을 찾아뵈었다. 인사를 드리고 종정 스님의 말씀을 전해드렸더니 첫말에 거절의 뜻을 밟히셨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서암 스님과 가장 친한 안양 보장사에 계시는 관응 스님을 찾아갔다. 관응 스님께서는 평소 나를 좋아하셨기에, 내가 찾아가니 참으로 반가워하셨다. 동정 스님의 말씀과 서암 스님의 말씀을 전해드렸더니 관응 스님은 말했다.
“이 사람아! 그럼 좋다. 내일 모레가 내 생일이니 서암 스님뿐만 아니라 비룔 스님까지 내가 초빙해서 오시게 할 터이니 모레 다시 오시게! 비룡 스님과 같이 권유할 터이니 그날 와서 다시 한 번 시도해보자고.”
이렇게 약속하고 다시 총무원으로 돌아왔다.
종정 스님에게는 그와 같이 보고하고 수감된 경산 원장과 부장 등 구명 운동을 열심히 전개하여 제일 먼저 경산 원장부터 석방시키고 다음은 총무부장을 석방시키며 쉬지 않고 수습해 나갔다. 그러던 중 교무부장이던 모 스님은 제주도 관음사 주지 당시 토지 매각 부정 사실이 있어 조사한다면서 제주지검으로 이송되고 말았다. 이 사람을 구명하려먼 제주도까지 가야할 형편이었다. 이 세 분만 구속된 것이 아니라 부원장격으로 있던 모 스님 등도 입건되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조계종의 치욕이었다. 얼마나 힘이 없으면 조게종 수뇌부가 모조리 구속되고 입건된단 말인가.
구명 운동 겸 사건 진상을 알리기 위해서 담당인 황 검사를 만나고자 검찰청으로 갔다. 마침 담당 검사실에 갔더니 모 스님 등 두 분이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취조가 끝날 때까지 옆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황 검사라는 자가 얼마나 말이 거칠고 욕까지 서슴없이 잘하던지 같은 승복을 입고 옆에서 들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스님을 보고서
“야! 이 새끼야! 바른 대로 대란 말이야! 얼마나 해먹었어?”
하는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흉악범을 다루듯 하는지라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서 나는 검사 앞으로 다가가서 큰소리로,
“야! 이 새끼야! 네가 검사면 검사지, 뭐가 잘났다고 순수한 스님들에게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흉악범 취급을 하느냐? 야 이 새끼야, 이 스님들이나 나도 사회에 있었으면 검사도 되고 판사도 되었을게야. 그까짓 검사가 뭐 대단한 것이라고 안하무인격이냐? 네가 보기에는 나 같은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너 같은 검사 하나 모가지 떼기는 식은 죽 먹기다! 너 자리 오래 보존하려면 스님들에게 존댓말 써라. 알겠어?”
라고 말했다. 황 검사는 그제서야 죄송하다면서 고개를 숙엿다.
그리고 난 뒤 내 소개를 했다.
“나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부장으로 새로 취임한 사람이요. 본래 큰 종단을 운영하다 보면 상대방의 모략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곤욕을 치를 때가 있고 오늘의 형제가 내일의 원수가 되고 오늘의 원수가 내일의 형제가 되기도 하는 법이니 검사 양반 종교인이나 정치인은 상대방의 중상모략으로 누명을 쓴 것인지, 살인강도의 흉악범인지 사람을 봐가면서 잘 다루시오! 이번 조계종 사건도 중상의 일종이니 그리 알고 속히 마무리 지어 법원으로 넘기세요. 오늘은 이쯤하고 갑니다.”
이렇게 내가 검찰청을 다녀온 뒤에 청와대와 중앙정보부에서 검찰청으로 전화가 갔던 모양이다. 다음 날 즉시 법원으로 넘어가서 일주일 안에 기각되어 사건이 일당락 되었으나 제주구치소의 모 스님 사건만 남게 되었다. 사건이 기각되면 다시는 그 사건을 재기하지 못하여 다른 것으로는 재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응 스님의 생일이 되어 나는 재무부장 월서 스님과 함께 케익과 약간의 축하금을 준비해서 안양 보장사로 갔다. 관응 스님 방으로 갔더니 서암 스님과 비룡 스님이 와 계셨다. 우리 일행은 세 분의 스님에게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큰스님 생신을 축하드린다고 말씀드렸다. 서암 스님은
“이 사람들이 오늘 웬일로 또 왔지?”
라고 하시자 관응 스님이 얼른
“내가 오라고 했다”
고 말했다. 사시마지가 끝나고 점심 공양을 했다. 공양 끝에 차를 마시면서 관응 스님께서
“ 이 사람들이 서암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모시려고 하기에 오늘 내가 오라고 했는데 어지간하면 그만 허락을 하시지요”
라고 했다. 그러자 서암 스님은 버럭 화를 내시면서
“그러면 관응 스님이 하시오”
라고 했다. 관응 스님은 이어서
“야! 그야, 나를 오라고 하면 금방 가지만 그렇지 않고 스님만 오라고 하니 그것이 문제지요! 라고 했다. 곁에 있는 비룡 스님이 거들었다.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종정 스님이 일본 유학도 같이 가고 했으니 서암 스님만 찾는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그만 올라가서 좀 도와주시오!"
이때 관응 스님께서 내게 눈짓을 하기에 나는 반허락이 났다는 신호임을 알고 절을 하면서
"스님!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종정 스님께 가서 그대로 보고하겠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여기까지 왔으니 올라가는 걸음에 봉암사 조실 스님을 봉암사까지 모셔다 드리고 가겠습니다"
라고 했다. 관응 스님은
"아, 그러면 좋지! 그렇게 해!"
라고 했고, 비룡 스님 역시
"그리 해주면 고맙지"
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종정 스님에게 전화해서 기자들과 총무원 직원들을 대동시켜 놓고 임영장을 써서 기다리다가 문 열고 들어서는 즉시 임명장을 수여하라고 해놓고 서암 스님을 모시고 봉암사가 아니라 서울 상도동 백운암 종정 스님 처소로 직행했다.
백운암에 도착해서 서암 스님께
“스님! 다 왔습니다. 내리세요!”
라고 했더니 서암 스님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 사람아 여기는 봉암사가 아니잖아!”
라고 했다. 나는
“죄송합니다. 종정 스님께서 잠깐 보고 가시랍니다”
라고 전했더니, 서암 스님은
“허! 그 사람들 참!”
하시면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가셨다. 전화로 약속한대로 안에 들어서자마자 종정 스님과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둘러선 가운데 종정 스님께서는 임명장을 들고 읽으셨다. 기자들은 사진을 연방 찍어대고 직원들은 박수를 치고 한 바탕 소란스러웠다. 종정 스님께서 자리에 앉으시고 서암 스님도 자리에 앉으시면서
“허! 이 사람들 참!”
하시기에 나는 또 말했다.
“스님! 차 한 잔 자시고 나면 봉암사로 모실까요, 총무원으로 모실까요? 이제는 스님께서 봉암사로 가셔도 내일 아침 신문에 총무원장 취임에 승낙하셨다고 대문짝같이 날 것이고 총무원으로 가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어디로 모실까요? 스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시겠습니다.”
서암 스님은 한참 있다가 총무원으로 가자고 하셨다. 그제서야 종정 스님은 서암 스님에게
“힘이 들겠지만 좀 수고를 해달라”
고 했고, 서암 스님은
“유능한 사람 많을 텐데 하필이면 미숙한 저에게 큰일을 맡기시느냐”
고 답했다. 이렇게 해서 며칠 후 취임식까지 하게 되었다.
총무원장 취임식을 해놓고 보니 서암 스님의 승적을 아무리 찾아봐도 비구승 정화 후 승적 갱신을 하지 않아서 승적이 전혀 없다. 이 말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노심초사하다가 나 혼자만 알고 태고종 총무원으로 찾아갔다. 태고종 총무원장 스님을 만나서 조계종에 제가 아는 한 스님이 있는데 정화하고 나서 승적 갱신을 하지 못해서 승적이 누락되어 승적부를 좀 열람해보고자 왔다고 했더니 태고종 총무원장은 선뜻 응해줬다. 나는 교무부장의 안내를 받아 승적부를 열람해보니 거기에는 승적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대로 등사해와서 조계종 승적부에 삽입하여 감쪽같이 해놓고 원장 본인에게는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서암 스님에게 말씀드렸다. 서암 스님을 막상 총무원장으로 모셔놓고 보니 선지는 좀 있으나 행정에 대해서는 미숙한 점이 있었다.